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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엘 샤다이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4. 8.

2024.04.07.(주일예배). 엘 샤다이. 창세기 17:1~18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18)

 

 

창세기 17장 말씀을 보면 그 처음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라는 구절로 시작이 되고 있죠. 이 말씀은 바로 직전에 있는 16장 마지막 구절 16절과 연결해 볼 때 매우 의도적인 기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616절입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세기 16:16)


그다음 창세기 10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창세기 17:1)

 

팔십육 세 때 이스마엘을 낳은 거예요. 그죠?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몇 년 동안이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오늘 17장 들어오기까지 13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흘렀어요. 13년 동안 하나님은 나타나시지도 않았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시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무려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죠. 성경 저자는 지금 이것을 의도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거예요. 13년 동안 침묵하셨어요.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너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라고 약속하신 것이 창세기 12장 말씀인데, 시간이 오래 흘러도 약속이 이루어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15장에서는 아브람이 자기의 종 엘리에셀을 그냥 상속자로 하십시오. 하나님! 어차피 안 될 거 이렇게 제안을 했고, 16장으로 넘어와서는 이 똑똑한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하갈을 앞세워서 드디어 아들까지 낳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도를 받아들이시지 않았어요. 그거는 그냥 인간적인 시도일 뿐이다. 그거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네가 하는 일이야 사람이 하는 일이야. 그러면서 그것을 거부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약속을 받은 지가 벌써 24년이 지나갔습니다. 24년의 기간에 약속하셨던 자식을 주셨어요? 안 주셨어요? 안 주셨어요. 물론 도중에 이스마엘을 낳긴 했지만 그 후로도 무려 13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흘렀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을 하셨다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냐는 거예요? 이 신앙생활이 힘든 게 그런 거예요. 그죠? 기도하면 바로 응답해 주시면 좋잖아요. 내가 이번 주에 가서 설교 한번 들어보고 야! 그 말씀에서 한번 힘을 얻고 일주일을 살아보겠다 그런 마음으로 와서 말씀을 듣는데 이 말씀이 진짜 기다렸다는 듯이 딱 하나님이 주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신앙생활이 그렇습니까?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은 그냥 팔짱만 끼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은 내 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오랜 침묵의 시간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하시냐 그 말이에요. 좀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일하시지. 우리 그동안 아브람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런가! 그런 말 제일 많이 해요. 그죠? 아브람도 그런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내가 애굽에 가서 괜히 엄한 짓 했다가 이렇게 된 거 아닌가! 내가 그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뭔가 해서 하나님이 괘씸해서 약속을 이루시지 않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죄책감도 들었을 거고, 하나님께서 처음에 나를 선택은 하셨지만 이렇게 보니 별로 안 좋으니까 날 버린 거 아니야! 하는 그런 어떤 불안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초조감도 생기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뭐 나한테만 안 이루어지나! 어차피 인생 이런 건데! 그러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면서 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었을 거고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 혹시 거짓말한 거 아니야! 하는 그런 의심, 갖가지 고통스럽고 복잡한 생각이 아브람의 머리를 짓눌렀던 바로 그런 시점이었다 하는 것이죠. 오늘 이 본문의 상황이 그렇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심정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바로 1718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오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7~18)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드디어 아브라함이 웃었어요. 이게 어떤 웃음일까요? 이 웃음이 여러분들 중에 백 세 되신 분 계세요? 여기 보니까 백 세에 가까우신 분이 있겠죠? 애를 낳을 수 있어요? 없어요? 이렇게 웃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사라는 몇 살이에요? 구십 세, 우리 구십 세 있어요? 여기 보니까 출산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우리는 이런 얘기 들으면 막 그렇게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안 되니까. 그죠? 그냥 웃어버리고 마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예요. 특히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8) 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현실에 만족하는 거예요. 이스마엘이나 잘살게 해주세요. 내가 무슨 애를 낳았습니까? 우리 마누라가 무슨 애를 낳았습니까? 그냥 이 아이나 잘 자라게 그냥 잘 살게나 해주세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박함이 사라져 버렸어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계십니까? 어떤 약속을 갖고 계십니까? 죽으면 천국 가는 약속? 죄를 지어도 정죄함이 없다는 약속? 여러분 안에 어떤 약속이 있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절박함이 없어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자기 집을 떠났던 사람이에요. 자기의 본거지를 떠났던 사람이에요. 하란도 떠났던 사람이에요. 지금 이방 땅에 와서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였냐 하면 하나님 말씀 때문이었어요. 언약의 말씀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약속에 대한 절박함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왜요?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겁니다. 이렇게 된 원인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한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가 있어요.

 

이렇게 된 원인이 첫째는 하나님의 시각아브라함의 시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전의 이야기를 보면 아브라함의 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일 때가 있었어요. 그죠? 롯과의 땅 분쟁에서도 과감하게 양보를 하잖아요. 하나님이 보는 그 먼 땅을 이 아브라함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단 말이에요. 열국이 전쟁이 일어나도 겁 없이 앞장서시는 전쟁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막 전쟁에 나가서 승리합니다. 눈이 열려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하나님의 시각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영적 시각이 노안이 온 거예요. 왜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되니까 이제 눈이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기보다는 낳은 자식 이스마엘에게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초점이 개인이나 공동체도 이럴 수 있어요.

 

두 번째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씨를 만들려고 하십니다. 왜냐? 그 목적을 이루어야만 저 구원의 약속 이방의 모든 열방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다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목적은 뭐냐 하면 그냥 아브라함의 씨를 갖는 거예요. 만족하는 거예요. 이스마엘로 충분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주시지 않고 있는 하나님께 실망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는 이유 중에 그런 게 있죠. 하나님은 이런 분인 것 같다. 하나님 참 섭섭하다. 이럴 때 보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목적과 나의 목적이 다를 때가 많아요. 대부분이 그래요.

 

세 번째로는 방법이 달라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완전히 무력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거예요. 두 손 바짝 들 때까지. 근데 아브라함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을 때 하시지! 꼭 내가 망할 때까지 기다려! 그때 부르시지! 그때 나를 교회 나오시게 하지 잘 나갈 때 말이죠. 고백할 때 보면 그런 분들 있더라고요. 목사님 제가 왕년에 잘 나갔거든요. 왜 하나님이 그때 나를 안 부르셨을까요? 부르면 올까요? 안 오지! 망해야 와요. 아브라함이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약속을 주셨으니까 이 약속을 내가 뭔가 이루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러나 자기에 대한 더 이상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니까 실망을 하고 지치고 냉소를 했던 것이죠.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을 가질 소망이 더 이상 남아있질 않아요.

 

여러분! 사람이 소망이 없어지면 반드시 현실을 바라보게 돼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꿈이 있고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으면 현실이 어려워도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요. 현실에 천착(穿鑿)하거나 현실에 낙심하고 쓰러지지 않아요. ?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는 소망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눈에 들어오는 건 누구밖에 없어요? 이스마엘밖에 없어요. 이 자식에게 집착하는 거, 이 손주에게 유난히 집착하는 이 신앙인의 영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어디에서 나오는 메커니즘(mechanism)인지 이스마엘밖에는 없어요. 약속의 자식은 아니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듯 아브라함은 지금 스스로를 위안하는 거죠. 이 정도면 됐다고 하나님 앞에서 충분하다고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보이질 않아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을 이루기를 원하시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거예요. 그냥 자기하고 자기 자식만 보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의학적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죠? 남자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요. 사라도 경수가 끊어졌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육적 가능성마저도 사라졌어요. 육체적으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 상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무런 믿음이 없는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이런 생각을, 질문을, 했을 거예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내가 무엇이 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해놓고 그 답이 뭡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구나! 여러분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아니에요. 실제적인 일이에요. 난 할 수 없는 존재구나! 나는 무언가가 될 수 없는 존재로구나! 하는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하는 거죠. 근데 바로 그 시점에 오늘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서 자신을 다음같이 소개하죠. (אֵל) 샤다이(שַׁדַּי).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창세기 17:1)

 

여러분! 이 시점을 잘 기억하셔야 돼요. 전능한 하나님이 언제 출연하시는가? 아브라함과 사라 그 집안의 영적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을 때에 전능한 하나님이 등장하시는가를,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인간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신 거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어디인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일터에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여러분 기대하고 기도하십니까? 아멘이시죠? 그럼 우리 질문해야죠.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 임하시는가? 하나님은 어느 자리에 임하셔서 일하시는가를 우리는 질문해야죠. 어디에 임하십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 어디입니까? 인간 자신의 무능함과 자기의 가난함과 자기의 연약함과 자기의 죽음을 고백하는 그 자리에 난 죽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강하심과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입에서 이거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이거 우리가 한 게 아닙니다. 이건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강남교회가 70주년을 맞이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비상하는 공동체라는 표어를 기도 가운데 받았어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 강남교회만의 기도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한국교회, 세계 교회를 향한 기도 제목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목회자로서 담임 목사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향후 나의 남은 모든 목회를 여기에 던지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점점 줄어드는 다음 세대가 회복될 수 있을까! 교회에 실망을 하고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 어르신들도 나이는 들어가지만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신 이 생명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능력 있는 기도를 하고 능력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삶의 자리들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시니어들이 새로운 세대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임하는 거,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 우리가 대신하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이 자리에 임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 그 방법밖에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무능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께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다 버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세요. 인간의 무능함, 임포턴스(impotence)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무능함이라는 단어가 남자로서의 기능을 못한다는 뜻이에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라는 뜻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옴니포턴스( Omnipotence) 그러니까 전지전능한 전능성과 대조되어 드러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완전한 무능함이 있는 곳에 전능성이 임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 지점에서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아요. 그게 하나님의 속성이에요. 보세요. 아브라함의 육체가 무너졌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믿음마저도 영적 상태마저도 무너져버렸는데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시겠다라고 선포하며 나오신 겁니다. 영어로 무능, 무력, 임포턴스가 예배 시간에 말하긴 좀 그렇지만 발기부전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더 이상 남자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서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큽니다.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사회에서 애를 못 낳는다는 거는 죽은 거예요. 무능한 거예요. 무력한 거예요. 아무 가치가 없어요. 물론 지금은 돈이 최고지만 애도 안 낳아도 되고 결혼도 안 해도 되고 그냥 돈만 많으면 되잖아요. 그러나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남자가 더 이상 생산력이 없다. 임포턴스다. 그러면 그건 죽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 일하시는가?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일하시는 거예요. 완전히 죽었을 때 그 약속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역할이 하나도 관여하지 않은 그 시점까지 하나님 밀고 나가서 그때 하나님의 전능성을 드러내시고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누가복음 18:27)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다고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 사람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회의를 많이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그것, 그것을 누가 하신다? 이런 말이 왜 나왔을까요? 어떤 부자 청년이 다른 성경에는 부자 관원이라고도 소개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젊었을 때 부자고 게다가 성공까지 했습니다. 근데 이 사람의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신앙생활도 잘했어요. 교회도 잘 다닌 거예요. 근데 이상하게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예수님 찾아온 겁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냐고 절박한 문제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있지 않느냐! 율법의 말씀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면 된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뭐라고 말했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말씀을 철저히 지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너한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는데 너의 물질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그다음에 나를 따라오너라. 그랬어요. 이 사람 따라왔어요? 안 따라왔어요? 안 따라왔어요. 왜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 재물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물질이 얼마나 많았길래! 아니 물질이 도대체 뭐길래! 그걸로 만족되지 않는 구원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갖고 나왔는데 그 해결점까지 줬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물질 때문에 발목이 붙잡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워! 불가능하다는 얘기예요. 그러자 제자들이 희한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물질에 대한 탐심이 여전히 남겨져 있었던 거예요. 집을 버리고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그것은 또한 성공을 위한 출발점이었을 뿐이지 버린 것이 아니었던 거죠. 그럼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그럴 때에 예수님이 이 말씀하신 거죠. 그건 사람이 할 수가 없어. 그 청년이 할 수가 없어. 스스로 할 수 없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가 없어. 그거는 누가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개념, 이 용어는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에서만 주로 나와요. 요한계시록이 심판장이잖아요. 그렇죠? 하나님 앞에 누가 서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이제 세상 모든 역사를 정리하시고 완성하시고 판단하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앞에 그냥 고개 숙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구약에서는 창세기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처음에 구원의 역사를 새 출발 할 때, 그러니까 무에서 뭔가 새 길을 열어갈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등장해요. 그리고 시편 언어, 유배 생활을 통해서 포로생활을 통해 하나님 없는 것과 같은 그런 실존적 경험 안에서 탄식 어린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등장을 해요. 욥기에 등장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이유 없는 고통 가운데 헤매이고 있는 그러한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임하는 모습이 등장해요. 이런 용례로 볼 때 공통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죠.

 

이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육체나 아브라함의 믿음, 즉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의도적으로 세팅하고 계셨던 거예요. 하나님의 침묵의 13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전략이다라고 볼 수가 있어요.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완전한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선포예요. 내가 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나도 막 다 할 수 있다. 나도 무조건 그냥 금방 떼부자 될 수 있다. 나도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 그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개념이 아니에요.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8절 사이에 보면 하나님을 자신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 나라고 하는 말이 14번 반복돼요. 14번 내가 나는 나예요. , 이 나라고 하는 말이 14번이나 등장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가 17번 등장합니다. 이거 서로 조합해보면 어떤 의미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계속, 반복적으로 내가 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네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할 거야. 그만해. 너 그만해. 너 할 수도 없잖아. 이제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너는 될 것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는 분들일수록 무엇인가를 자꾸 남들한테 보여주려고 할수록 신앙생활이 피곤해져요. 기쁨이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자꾸 경험해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실까! 기대하셔야 돼요. 그리고 기도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어느 날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해놓으셨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는 망했고 나는 일어설 힘이 없었는데 어느 날 뒤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네.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 놓으셨네. 이게 진짜 신앙의 맛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내가 뭘 했다! 우리가 무엇을 했다! 뭘 했습니까? 아무것도 안 했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가 있고 하실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여러분 믿으시죠? 창세기 1장에 보면 무에서 유로 창조됩니다. 하나님 말씀하시니 말씀한 대로 그대로 되니라. 이 원리가 어떤 자연 창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똑같아요.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만 되어지는 인생이에요. 우리는 말할 것도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한 대로만 이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믿으시죠? 인생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가를 지금 하나님께서 알려주고 계시는 거죠. 인생이라고 하는 게 뭐냐? 우리 오늘 정리합시다. 인생은 무엇이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되는 은혜의 자리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되는 은혜의 자리가 인생이다. 맞죠? 아무것도 없어요. 다 부질없는 일이에요. 방해거리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무능과 죽음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증거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무능하게 죽는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성을 드러내셨어요. 참 묘한 일이죠. 역설적인 일이죠. 속죄 사역만 그렇게 믿으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날 동안에 다른 거 없다. 순종해라. 어느 정도 순종하느냐? 난 죽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어리석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 안에 일어나게 된다는 거죠. 아직도 내 안에 자아가 이게 문제예요. 자아가 이 못나고 못된 자아 아직도 저한테 있어요. 이 가시처럼 있어요. 독침처럼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이게 저 밑에 깔아앉아 있다가 이게 피곤하고 어떤 결정적인 상황이 될 때 이게 분노로 확 일어나요. 이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요. 그러니까 내가 일을 못해서 하나님의 일이 망가지는 게 아니라 내가 뭔가를 해보겠다고 내가 잘났다고 그렇게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되는 걸 저도 경험합니다. 혹시나 나도 그러고 있지 않나요? 돌아보셔야 돼요. 하나님 너무하시네요. 이렇게 오래 침묵하고 기다리시나요? 기다리게 하시나요? 그럴 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지금 내 힘을 빼고 계시는구나! 아직도 하나님 대신에 의지할 뭔가가 있어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구나! 나를 약하게 하고 계시는구나! 이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내 인생 가운데 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을 여러분 회복하셔야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약함이 바로 신앙입니다. 뭐가 신앙이라고요? 약해지는 거, 저도 설교를 다음 주부터 목소리를 좀 낮추려고 합니다. 저는 솔직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건데, 이게 혹시나 저의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하고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려고 하는 제 욕심에서 나온 건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에 다음 주부터는 자분자분하게 할 겁니다. 천천히 조용히, 이거를 그대로 깨닫고 실천했던 사람이 누구냐?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 어떤 성격의 소유자고 얼마나 잘 나간 사람이었는지 아시죠?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9~10)

 

사도바울이 자기 인생에 끼어 있는 가시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구했어요. 그 가시가 육체의 가시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가시다. 사명 때문에 받게 되는 사명의 가시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복합적인 거겠죠. 어떻게 한 가지만 얘기하겠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발 이 가시 좀 빼주세요. 이것만 빼주시면 제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도했어요. 근데 하나님이 뭐라고 응답하셨어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안 빼줄 거야. 그걸로 충분해. ? 네가 약해지는 그곳에 나의 온전함이 나의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 응답을 받고 그다음이 더 중요해요. 나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을 다 자랑한다. 이제부터 사람들이 사도권을 무시하고 담임권을 무시하고 목회권을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자랑하고, 사람들한테 모욕당하고, 선교하다가 춥고 배고프고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는 일까지도 나는 다 사람들 앞에서까지도 나는 다 자랑한다 그래요. 왜요? 바로 그때가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어요. 왜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가! 왜 우리에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정말로 선교의 역사는 전도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났는가! 한국교회는 유럽 교회처럼 끝났는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땅에서 하셨던 방식대로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고 교회가 따라가는 겁니다. 약한 것들을, 천한 것들을, 하필이면 없는 것들을 망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교회로 부르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어요. 왜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강함이 전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과제, 우리 공동체의 과제는 한 가지밖에 없어요. 나를 덜어내는 겁니다. 내 자아를 덜어내는 겁니다. 나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는 일만 하시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끝에 있다. 내 삶의 끝자리에 있는 나는 이제 끝장났다라고 하는 분도 기뻐하세요. 왜냐? 이제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실 겁니다. 그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공동체 안에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