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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서로 기다리라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4. 22.

2024.04.21.(주일설교). 서로 기다리라. 고린도전서 11:27~34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고린도전서 11:27~34)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배우는 말 중에 가장 빨리 배우는 말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다음 말이 빨리 빨리라고 해요. 우리나라가 굉장히 빠르죠. 어쩌면 이 나라가 이 정도 된 것은 빨리빨리 정신에 의한 게 아닌가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 못 하고 또 업그레이드 시켜야 되고 또 뭔가를 개발하고 생산해내면 밤새워서 생산하고 그래도 모자라서 또 뭔가를 만들어내는 그런 빨리빨리 정신에 의해서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어떤 기다림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왠지 기다린다 하는 거 보면 굉장히 답답한 마음이 들고 왠지 좀 시대에 뒤떨어졌다 이런 생각을 좀 하는 것 같습니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의 시간에 나를 맞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가 있죠. 예를 들면 아이를 잉태하고 열달이라는 시간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 또 씨앗을 뿌려놓고 추석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 우리 교회 어떤 청년처럼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며 자신을 가꾸고 실력을 쌓아가는 그런 청년의 마음 그것은 답답함이라기보다는 기대와 행복으로 채워지는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맞습니까? 네 모두가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주님 없으면 못 산다. 그래서 주님을 필요로 하는 그런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어요. 유명한 전도자인 무디 목사님에게 교회에 굉장히 실망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을 했답니다. ‘목사님, 저한테 문제없는 교회 좀 소개해 달라고 하여간 다니는 곳마다 제가 세 군데를 옮겨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문제가 너무 많다고 좋은 교회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형제, 좋은 교회가 있긴 한데 당신에게는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인데 당신이 가는 순간 그 교회는 문제 있는 교회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이 땅에 문제없는 교회 있습니까? 문제없는 교회가 없어요. 그리고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제없는 성도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께 구원받고 무능하지만 하나님께 구원받아서 이제 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로 예수님을 닮아가자라고 결단하고 노력하면서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공사 중인 그러한 성도일 뿐인 거죠.

오늘 우리가 함께 볼 고린도 교회도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경제적으로 아주 풍요로운 도시 안에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은사가 많았고요. 말씀도 충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 안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이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너는 바울파냐? 너는 아볼로파냐? 너 베드로파야? 나 예수파야! 이러면서 당파가 갈라졌고요. 음란의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오늘 살펴볼 성만찬의 문제도 아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어요. 오늘 본문은 성찬 행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본문인데 앞에서 이렇게 집례할 때 요즘에는 시간이 없어서 제가 생략하는데 회중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중에 세례받은 분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잔을 혹은 떡을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에 해당하는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이에요. 여러분 성만찬이라고 하는 게 뭡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 주신 것에 대해서 넘치는 감사를 하는 시간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런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시간인데 이런 성만찬의 귀한 의미는 점점 더 퇴색되고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먹는 것 자체에 그냥 몰두 되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교회 모임 가운데 유익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린도전서 11:17)

 

교회 모임이라면 다 유익해야 할 텐데 유난히 그 모임만큼은 안 하는 게 낫겠는데! 안 한만 못한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고 하는 거죠. 여러분! 사람이 모이는 목적이 뭐겠습니까? 교제하는 거죠. 세상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교제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이 만나는 교제는 세상 모임과는 좀 다릅니다. 이 안에 오늘도 많이 모여 계시는데 각자 나이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도 다르고요. 경제적 수준도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다 하나가 되는 거죠. 이것을 수평적 교제라고 합니다. 여기에 와서 내가 왕년의 뭐다! 나 지금 밖에서 뭐 하는 사람이다! 이거 자랑할 수가 없어요. 다 죄인이고 다 예수님께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인 거죠. 그런 수평적 관계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님과 나라는 수직적 관계를 더 견고하게 합니다. 성도들 간에 수평적 관계가 왜 중요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잘 믿는 기도 열심히 하는 경건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외면하고 성도들을 미워하거나 혹은 무관심하거나 밖에 나가서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이웃들에게 함부로 한다! 무관심하다! 그럼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안 좋은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만큼 하나님과 나라는 수직적 관계, 내 이웃과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 안에 오시면 보기에 신앙생활이 좀 부족해요. 그리고 사는 것도 조금 어려우신 것 같아요. 나보다 배운 것도 낮은 것 같아요. 좀 연약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에게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그분들을 도와주고 그분들이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그분도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회복이 되고 도와주는 나 역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더 돈독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도들 모임 이후에 공동 식사라고 하는 것을 했어요. 우리 교회도 예배 후에 식당으로 내려가면 국수를 주잖아요. 지금 이민 교회 같은 경우도 예배 후에는 이렇게 공동 식사라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식사를 누군가가 혼자서 준비한다면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 각각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어요. 모여서 같이 먹습니다. 대체로 떡과 포도주겠죠. 이렇게 화려한 어떤 음식이 아니라 떡과 잔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가 되었다는 그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이라고 하는 예식이 주님께서 이 예식을 기억하여 지키라 했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제도화된 것은 상당한 시간 이후입니다. 우리는 성찬 그러면 너무 거룩하고 제도화되고 어떤 의식화된 예식화된 어떤 의식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초대교회는 그냥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다가 성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한 피 받은 한 영적인 가족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어때요? 요즘 어떻게 사세요? 집안 사정은 어때요? 그 속 썩이는 아들은 어때요? 자연스럽게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한 몸 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대 성찬식은 성찬을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성찬이 너무 형식화돼버렸어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조차 없이 그냥 내가 받을 떡과 내가 받을 잔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 사람이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 이 사람이 어떠한 어려움에 처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성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교제하면서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면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성찬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예수님께 생명을 받은 사람이지! 나는 사실은 이 음식조차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이지!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사는 사람이지! 내가 저 형제를 사랑해야지! 내가 저 자매를 용서해야지!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내가 아까 짜증 내고 그 친구하고 싸웠는데 나는 이거 끝나면 반드시 가서 먼저 화해해야지! 그런 마음을 갖는 시간이 바로 공동 식사요. 성만찬의 시간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어요. 도시 문화 안에 형성된 공동체니까 아마 빈부의 격차가 심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음식을 가지고 옵니다. 음식에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을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아예 음식을 못 갖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는 주인과 노예가 같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먹을 만치 음식을 노예가 준비했어요. 이것이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성찬 자리가 된 겁니다. 말씀 한번 읽어볼까요?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고린도전서 11:20~21)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나누는 식사의 교제 그 안에 차별이 일어나,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의 자리로 나가야 되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차별이 생긴 겁니다. 배부른 사람, 배고픈 사람, 얼큰하게 취해서 기분이 좋은 사람, 허겁지겁 내가 교회에 가서라도 주님께 은혜를 받고 우리 공동 식사의 자리에서 좀 배고픔을 해결해야겠다 그런 사람들이 뛰어왔는데 그 사람들은 식사를 해결할 길이 없는 거예요. 함께 모여 주의 사랑과 성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이 주님의 만찬과 이 주님의 이 본질, 만찬의 본질과 의미가 완전히 퇴색해버리고 자기들만의 파티가 돼버린 거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걸 뭐라고 말했냐! 해로운 거다. 그리고 이거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식사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본질을 모독하는 것이다. 교회의 의미를 완전히 훼손시키는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어요. 우리 다시 한번 말씀 읽어볼까요?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전서 11:22~23)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 한 몸된 공동체입니다. 서로 경험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생활 수준이 다르지만 교회에 오면 한 몸인 유기체로서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거죠. 고난도 함께하고 아파하고 앞으로 기쁜 일도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거예요. 왜 한 몸된 교회를 이토록 너희들은 업신 여기느냐! 하필이면 한 몸을 이루는 그런 성만찬으로 나아가는 이 식사의 자리에서 교회를 욕되게 하느냐! 왜 빈곤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느냐!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거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하나 제시하고 있는데요.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 잡으리라.” (고린도전서 11:33~34)

 

나머지 일은 나중에 처리할게. 지금 이 일은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예수님의 몸에 영적 그 의미를 상실시켜버리는 심각한 일이다. 지금 당장 해결해라! 이런 마음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해결책은 뭐냐? 서로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기다려주라는 거예요. 기다려줘라.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프면 어디 가서 먹고 와라. 집에 가서 먹고 오라는 거예요. 굳이 왜 교회에 와서 남들 앞에서 자랑하듯이 나는 이런 음식을 먹는 사람이야. 이 정도는 살아야지! 그렇게 하느냐는 거죠. 먹고 와라.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절대 그런 일을 하지 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지체 가운데 소외되고 배제되어있는 자는 없는지 살피는 시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고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해지도록 만드는 시간이 언제냐! 그것이 바로 성찬의 시간이에요. 우리 강남교회는 앞으로도 성찬의 시간을 좀 늘리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성찬의 자리로 나갔어요. 그게 일상이었어요. 지금 성찬을 조금 더 확대하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제가 여러분들 중에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말을 제가 하지는 않겠으나 여러분들이 잔을 받기 전에 떡을 받기 전에 스스로가 물어야 합니다. 난 세례를 받았지만 과연 이 떡을 받을 만한가! 잔을 받을 만한가! 이렇게 질문을 하다 보면 자꾸 개인적인 죄에만 집중하는 분들이 있어요. 내가 지난주에 나쁜 생각 했는데, 난 지난주에 말씀을 제대로 안 읽었는데, 나는 지난주에 음란한 마음을 품었는데, 나는 그 형제에게 욕을 했는데, 개인적인 죄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공동체적 관점에서 생각하셔야 됩니다. 주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나는 과연 생명 없이 살아가는 주위의 이웃들에게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나는 한 몸 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우리 공동체 안에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인가! 나는 그 사람을 개인의 이익 때문에 함부로 대하고 욕하고 싸우고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런 마음의 상태로 과연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을 수 있을까! 관계적 개념으로 공동체적 개념으로 여러분 꼭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지, 또 소외된 사람들에게 진정한 공감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있는지 우리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 동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어떤 상처를 당했을 때 나도 아파하는 거 그게 동정이죠. 어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도 분노가 일어나는 거 동정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이 수준을 뛰어넘어야 돼요. 공감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공감이라고 하는 건 동정과 어떻게 다르냐 하면 그런 동정심의 마음은 같되 또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고통이 끝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아픔이 좀 줄어들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고민하고 도와주는 단계까지 나가는 게 바로 공감이라고 하는 거예요. 공감의 대명사가 누구시냐!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각종 장애인들을 고쳐주셨어요. 몸과 마음이 다치고 아프고 치료받을 길 없는 그 당시의 장애인들을 다 돌보시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요. 더 나아가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파트너 동역자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여러분! 그와 같이 우리 모두가 공감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교우들을 돌보고 이웃들을 돌보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보고에 따르면 등록된 장애인이 202212월 기준으로 2652860명으로 이렇게 집계가 됐습니다. 전체 인구의 한 5%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등록 안 한 분들 포함하면 더 많아지겠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신앙을 가진 장애인 성도는 얼마나 되느냐 1% 미만입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기독교인이 20%예요. 그중에 신앙을 가진 장애인 비율이 1%도 되지 않아요.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뭐냐면요. 장애인을 섬길 수 있는 교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장애인 부서를 운영하는 교회가 이 땅에 교회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섬기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고, 또 하나는 장애인 부서가 있더라도 시설이 너무 미흡해요. 그리고 섬길 수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적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도 장애인을 가지고 있는 가정에서는 장애인 부서가 있는 교회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장애는 치료되거나 극복되는 것이 아니에요. 평생 그 사람이 안고 가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안고 가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안고가야 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사역은 사람의 성격과 유형이 연령이 다 다르듯이 그 유형에 따라서 그 연령에 따라서 예배나 훈련도 달라져야 됩니다. 다행히도 우리 강남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장애인과 함께한다라는 이런 의식을 가지고 이 비전이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벌써 한 20년 됐네요. 장애부서 사역이 시작되고 또 밀알부라는 명칭도 생기고 전임 사역자도 세우고 또 연령별로도 세분화시켜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강남교회는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 정도가 아니라 장애인이 사역하는 교회, 장애는 있지만 그래도 함께 즐거움을 주고 감사를 주고 서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장애인도 사역하는 교회, 장애인은 존재하지만 장애가 없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장애인 비장애인으로 이렇게 나눕니다. 이렇게 나누는 나라도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외국에 가면 장애인 잠재적 장애인으로 나눕니다. 사람을 장애인 예비적 장애인으로 나눕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다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장애인들이 될 거예요. 더 중요한 것 우리 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 장애인이에요. 신앙생활 한다고 그 장애가 고쳐지던가요? 죽을 때까지 의인이라 칭함은 받았지만 죄인 된 삶을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돌보심을 끝까지 받아야 되는 그런 영적인 장애인에 불과한 거죠. 우리 모두가 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 안에 서로가 좀 부족하더라도 좀 이렇게 속도가 떨어져서 답답하더라도 우리 장애인 분들도 사역하고 그 사역의 결과를 우리가 함께 누리고 또 이 안에서 따뜻한 이야기들이 흘러넘쳐서 모두가 다 치료되고 회복되고 부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