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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할례, 언약의 표징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4. 30.

2024.04.28.(주일예배). 할례, 언약의 표징. 창세기 17:1~27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창세기 17:1~27)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오늘 할례의 문제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심지어는 교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할례라고 하는 문제가 굉장히 낯선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고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또 너를 통하여 민족을 이루시겠다라고 하는 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오히려 아브람 자신에 의하여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지를 못하고 그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어요. 그게 창세기 15장 말씀입니다. 그 후에도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서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지난 창세기 16장의 이야기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은 이 아브람의 인간적 시도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했던 것이죠.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않은 사람은 방해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일을 과연 누가 방해할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는 계획에 가장 큰 방해꾼은 바로 교인들이라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그 약속을 방해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었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 13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침묵 시간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전략이라 말씀드렸어요. 결국에는 아브람이 99세 때 사래가 89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또다시 언약을 맺으시고 자손의 번성을 약속해 주셨어요. 그러나 이번에 아브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17절의 말씀에 보면 엎드려서 웃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왜 웃었을까요? 아브람 자신과 아내 사래의 몸이 더 이상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무능과 무력의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그 자리에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심지어는 영적으로 볼 때에도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엘샤다이의 하나님 즉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 무능해진 아브람과 새롭게 언약을 맺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을 읽어보시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어떤 팽팽한 긴장감을 갖게 됩니다. 무려 14번이나 하나님은 내가 할 것이다. 내가 할 거야. 내가 반드시 할 거야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세요. 그러면서 17번이나 너는 될 거야. 그렇기 때문에 너는 될 거야. 너는 반드시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만이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주도권을 확보하시겠다라고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셨습니다. 오늘 이 언약을 맺으시기 전에 1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하세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1)

 

이 문장을 원어로 보면 두 개의 명령문으로 돼 있어요. 하나는 내 앞에서 행하라는 말과 완전해라. 이 두 가지 명령문입니다. 이렇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완전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트너로서의 자격 조건을 갖춘 일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는 일은 이것만 하면 돼 그 말이에요. 나한테 시집을 올 건데 다른 거 준비하지 말고 이것만 하면 돼. 이게 최소한의 조건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첫 번째 명령어인 내 앞에서 행하라 이 말은 아카드어의 상용구다. 그러니까 늘 쓰는 말이에요. 아카드어에서 어떤 상황에서 쓰냐 하면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나타낼 때 이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왕에게 왕이시여. 저는 늘 왕 앞에서 행하겠습니다. 그 말은 뭐예요? 충성을 왕한테만 하겠다 그 말이에요. 앞으로 자네는 내 앞에서만 행하게 이렇게 말하면 충성을 요구하는 말이다. 그 말이에요. 따라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는 거죠.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충성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할례의 시행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거예요.

 

두 번째 명령어는 완전하라 이것인데 히브리어로 타밈(תָּמִים : tâmîym)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노아 이야기에서 등장한 적이 있었어요.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다 할 때 이 타밈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제사 때 제물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흠 없는 제물 할 때 그 흠이 없다에 해당하는 말이 이 바로 타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람한테 흠 없는 존재로 언약의 파트너가 되거라! 언약의 당사자가 되거라! 지금 제안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사실 이 1절에서부터 막혔어요. 도대체 아브람에게 왜 이와 같은 요구를 하시는 건가! 왜 되지도 않는 명령을 내리시는 거지! 하나님이 이렇게 아브람한테 명령을 내리면 아브람은 저절로 충성된 자가 되고 저절로 흠 없는 제물이 되는 것인가! 지금까지 아브람이 살아왔던 인생을 돌아볼 때 이거는 불가능한 명령인데! 아브람에게뿐만 아니라 이 성경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이거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인데 이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에요. 인간은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도 없어요. 하나님께 완전한 충성 드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흠 없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황당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의 충성과 흠 없음이 마치도 언약의 어떤 절대적인 조건인 것처럼 이게 만약에 언약의 조건이 된다 그러면 그 언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늘 무조건적인 은혜의 언약이잖아요. 일방적 언약이잖아요. 주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거잖아요. 내가 원하지 않는 그날에 주님은 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게 맞잖아요. 일방적입니다. 합의를 본 게 아니에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의 이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수용하기 어려운 말씀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구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어 와우 연속법을 통해 해석해야만 합니다. 와우 연속법이 뭐였냐면 여러분 창세기 12장에서 기억나세요? ‘레크 르까 민 엘기억나세요? 떠나라. 어디로부터 어디로 떠나라.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다. 그랬단 말이에요. 떠나라. 될 것이다. 이거 해라. 그러면 너는 될 것이다 할 때 우리는 이미 와우 연속법에 대해서 배웠어요. 그래서 히브리어는 명령문 그리고 명령문이 나오면 뭐 뭐 해라! 그리고 뭐 뭐 해라가! 아니라 뭐 뭐 해라! 그러면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와우 연속법을 적용해서 해석해보자면 내 앞에서 행하라! 그러면 너는 흠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또 오늘 할례 명령이 기록돼 있는 17장과 관련해서 해석하자면 할례의 명령에 충성되게 순종하라! 그러면 너는 어떻게 된다? 흠 없는 제물로 인정될 것이다. 그 정도만 하면 내가 인정해 줄게. 그런 말이에요.

 

여러분! 오늘 이 말씀만 이해하고 가시면 됩니다. 제가 이 말하려고 지금 여기까지 왔어요. 이 명령만 그대로 문자 그대로 순종해라. 그러면 너는 내 앞에서 내가 받을 만한 언약의 파트너가 될 수 있어. 내 신부가 될 수 있어. 다른 거 신경 쓰지 마. 이것만 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말입니다. 아브람은 절대 스스로 완전해질 수가 없어요. 지난 시간에 두 손 바짝 들었어요. 아브람의 웃음이 그 모든 걸 다 대변합니다. 내가 이제 와서 뭘 해! 이 나이에 뭘 할 수가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예요. 스스로 흠 없는 존재가 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삶에 만족했던 사람이잖아요. 이스마엘이나 잘살게 해주세요. 그냥 이 땅에서 내 자식들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그냥 가는 날 동안에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살게 해주세요. 우리 집안이나 그냥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생각했던 아브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이제 하나님께로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릴 것을 하나님은 지금 요구하고 계시는 거예요. 잊어버렸어? 내가 너를 왜 거기서 불러냈는지 잊어버렸어? 네가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 이 이방 땅에 이렇게 나그네처럼 가는 이 시간 동안에 내가 너를 불렀고 내가 너를 앞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갈 그런 모든 것에 대해서 잊어버렸어? 이제 나에게 시선을 돌려라. 말씀하고 있는 또한 99세가 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신의 무능함을 바라보지 말고 이제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봐라! 지금 초청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전능하신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할례의 시행에 대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 순종하는 거라고요? 할례 시행에 대해서 순종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에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냐면 나는 그 조건을 못한다! 그 말이에요.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드려야 될까요? 몸만 와! 나한테 시집올 때 몸만 와! 그랬어요. 그러면 뭐만 가면 돼요? 신랑이 너무 부자예요. 너무 멋있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가진 것이 없는 신부를 어디서 만났는데 몸만 오라로 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돼요? 빚내서 혼수품 마련해서 와요? 아무 소용없어요. 그냥 몸만 오라고 그랬으니까 몸만 가면 된단 말이에요. 신랑만 바라보면 돼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느냐는 중요하지가 않아요. 그냥 지금부터 나만 바라봐. 지금부터 나만 생각해. 지금부터 나만 사랑해. 그 마음만 있으면 돼. 몸만 와. 이것이 그런 얘기예요. 할례를 어떻게 하나! 고대 근동 때나 하는 거지! 현대인들에게 무슨 할례야! 남자들이나 하는 거지! 이게 무슨 얘기야? 이 영적 의미가 주님이 오늘 신부 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할례가 뭔가를 좀 살펴봐야겠죠?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또 아브람의 후손이 지켜야 할 할례에 대해 명령하고 있어요. Circumcision(sɜːrkəmsɪʒn) 이라고 하는 아주 쉽지 않은 용어인데 썰컴(sɜːrkəm)은 둘레를 둥그렇게 한다는 뜻이고 씨전(sɪʒn)은 자른다는 뜻이죠? 살덩어리를 잘라내는 겁니다. 실제로 포피를 잘라내는 거죠. 분할시켜버리는 거죠. 성경의 이른바 할례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셔야 돼요.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1011절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세기 17:10~11)


명확해요. 할례를 제안하신 하나님의 방법론이 아주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할례가 곧 뭐라 그래요? 언약이다. 이렇게 말해요. 포피를 배어라. 그게 언약의 표시가 될 거야. 누가 보더라도 심지어는 내가 보더라도 그 표시를 보고 언약백성이구나. 하나님도 알 수 있는 표시가 될 거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그의 모든 수하의 남성들의 생식기의 끝을 잘라낼 것을 명령하시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아브람 자손의 언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사인이 될 것이다. 말씀하고 있어요. 하나님과의 언약을 인간의 살에 지워지지 않도록 새기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 그랬어요. 이 과정이 5가지 정도로 정리가 됩니다.

 

첫째 남자는 다 할례받으라.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람(후손)과의 영원한 언약이다. 이게 10절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포피를 배어라. 이것이 언약의 표징(Sign)이다. (11) 표시가 됩니다.

 

세 번째 모든 남자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 (12) 그러니까 무슨 말이에요? 이제 살겠는데 이제 사람 노릇하겠는데 그럴 때 딱 너무 늦지 않게 바로 할례를 행하라는 거예요.

 

네 번째 내 언약은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13)


다섯 번째로는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내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14) 어떻게 돼요? 끊어집니다. 소속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끊어집니다.

 

정리하자면 모든 아브람의 자손들은 난 지 팔일 만에 생식기 끝을 자르는 할례 의식을 행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식을 몸에 새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상징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왜 이렇게 또 망측한 방법으로 지난번엔 짐승을 쪼개시더니 아니 왜 이런 방식으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느냐 진짜 설교하기도 힘들어요. 아주 고상하고 좀 이렇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참 받을 만한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이 할례가 웬 말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족장의 즉 남자의 생식기는 힘과 권위와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씨가 뿌려져 후손들이 나오고 그로 인하여 부족의 힘과 세력이 왕성하게 형성된다고 믿었던 시대예요. 지금도 그런 잔재가 남아 있죠. 우리 문화 안에 남아 선호 사상이 있습니다. 그렇게 원초적으로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그 다음 세대에 대한 번식, 나는 죽지만 나의 자손이 계속해서 이 땅에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그런 영적 욕망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건드리신 거죠. 나는 죽어도 나는 사라져도 내 가문을 일으켜야겠다. 내 자손들은 잘 되게 해야겠다. 그래서 계속해서 혈통이 중요한 거죠. 박씨 가문이 중요한 거고 고씨 집안이 중요한 거고 이씨가 중요한 거고 전라도가 중요한 거고 충청도가 중요한 거고 혈통 중심으로 가는 거죠. 자손을 통해 인간의 어떠한 영원성 정말 그 허망한 영원성을 추구하려고 하는 그런 영적 욕망을 이루는 도구가 바로 이 생식기라고 하는 것이예요. 단순한 어떤 성적 도구나 번식의 도구 정도가 아니에요. 여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바로 그 부분을 치고 들어오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족장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족장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든 힘과 생명의 근원을 제거한다라고 하는 의사표시이고, 결국에 나는 죽을 수밖에는 없습니다라고 하는 자기 죽음의 상징이 되는 것이죠. 죽었습니다. 난 죽은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약 당사자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자기 죽음을 고백하는 거예요. 자기 죽음 다른 거 없어요. 언약의 당사자로 필요한 건 뭐냐 하면 나는 당신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람은 실제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었잖아요. 그 안에 사래와 더불어 더 이상은 생명을 생산할 수 없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 죽은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1112절에서 아주 독특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2)

 

여기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다. 아브람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지난번 성경에는 죽은 자와 방불(髣髴)케 한다. 한자를 썼어요. 방불하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아브람은 죽었다는 거예요? 살았다는 거예요? 살았으나 죽은 거예요. 그러나 죽었으나 또 나중에 사는 거예요. 그런 거죠? 아브람은 죽은 거죠? 더 이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씨를 심을 수도 없고 민족을 이룰 수도 없는 생산성이 없는 좀비와 같은 존재다.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어떠한 역사를 이룬다면 그건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 되는 거죠. 만약 이러한 아브람 죽은 자와 방불하는 그런 아브람을 통하여 아들이 출생하고 그 이후에 민족을 이루는 역사가 만약에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건 다 누가 하신 거예요? 죽은 자의 몸에서 생명을 일으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할례가 뭡니까? 난 죽었습니다. 할례가 뭡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십니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겁니다. 이런 고백이 할례 속에 들어가 있는 거죠.

왜 하나님은 아브람뿐만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들에게까지 이와 같은 할례 명령을 내렸는가! 왜 그런 어린아이같이 지금 피덩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럴 아이에게 왜 할례를 행하는가! 왜 그 집안에 들어온 성인들까지 다 할례를 받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브람이 지금 실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은 몸인 거와 같이 즉 생산력을 잃은 것처럼 앞으로 나오는 자손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왕성한 생산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내가 얼마든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를 고백하도록 만드시는 거죠. 그들의 생산력이 그들의 힘과 생명과 영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들의 힘과 생명과 영혼은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할례 의식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할례를 통해 아브람에게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게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인정함과 동시에 또 나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그 어떠한 인간적 시도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자기 포기 의사를 표명하는 게 바로 할례예요. 할례를 안 받으면 끊어져요. 그래서 할례의 정신이 하나님과의 유일한 언약 조건이자 그 언약 자체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브람의 방식이 아니라 아브람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씨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 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언약 백성의 조건이 이제부터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위에서 그 어떠한 인간적 노력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자기 죽음의 고백이 여기 담겨져 있는 거죠. 이게 자녀들에게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아로 새겨져 있어야 돼요. 넌 다 할 수 있어. 아빠는 못 했지만 말이야. 너는 앞으로 다 하게 해줄게. 그게 굉장히 신앙적으로 보이십니까? 엄마는 모든 걸 다 해주려고 그래요. 나는 고생했지만 너는 말이야. 다 할 수 있어. 그 아이가 과연 앞으로 잘 될까요? 그렇다고 애를 기죽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라는 말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자라면서 자신의 인생의 한계를 아는 아이일수록 얼마나 지혜로운 아이입니까!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참 연약한 존재구나! 인간은 절대로 혼자 살 수가 없는 거구나! 이웃도 있어야 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구나! 기도가 필요한 거구나!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아이야말로 얼마나 지혜로운 아이입니까! 그 아이는 얼마나 이 땅의 위대한 지도자로 변화되겠습니까! 모든 걸 자기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자아를 그냥 극대화시켜 주고, 그 못나고 못된 자아를 부모들이 계속해서 부추겨주고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그거를 그냥 끝까지 붙잡고 있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언제까지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행하고 있는 유아세례라는 건 그런 의미예요. 하나님 나에게 주셨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십시오. 내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이 아이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옵소서. 여러분 생명이라고 하는 거 우리에게 있지 않아요! 우리는 호흡하고 먹고 자고 우리가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은 인간에게 없어요. 인간 안에 존재하질 않아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건 다 죽음뿐이에요. 인간 세상 안에는 모두가 서로를 죽이고 짓밟으려는 죽음의 권세가 가득한 곳입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만 있어요? 하나님에게만 있어요. 믿으십니까? 하나님에게 있으니까 그 생명은 하나님에게 받아야 돼요. 좀비처럼 살면 안 돼요. 사는 게 다 사는 게 아닙니다. 왜 믿는 자와 똑같이 삽니까? 안 믿는 사람들처럼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잠자고 똑같이 돈 모으고 자식들 잘되게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건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단 말이에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인간적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의 환경을 뚫고 들어오시는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온전한 생명이 되어 이 땅에 새 생명을 허락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그 생명의 주인공들이 되셔야 돼요.

 

오늘 23절에서 27절 끝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합니다. 어떻게 순종을 하냐면 말씀하신 대로 문자 그대로 순종합니다. 한 글자의 틀림도 없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이제 나는 인간의 생식 노선을 거부하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인간적 방식을 다 거부하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의 노선을 따라가겠다. 노선을 바꾸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죽음을 각오한 순종이에요. 아니 죽음을 고백하는 순종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왜 벌써 죽었으니까! 우리는 막 죽으라고 하고 순종하라고 하면 진짜 죽을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순종하세요. 그러면 죽을 것 같잖아요. 애쓸 필요 없어요. 이미 죽었는데 뭘 애써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죽음의 고백을 근거로 일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형성이 될 겁니다.

 

여러분! 그냥 저절로 교회에 온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그냥 교회에 들락날락한다고 저절로 마치 체육관 드나들듯이 다닌다고 이렇게 태권도도 배우고 막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만드시는 일 이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유난히도 세상에서 망한 사람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 나는 내 힘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이 이곳이에요. 하나님이 아니면 난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마지막 자리 인생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집니다. 이제야 점점 더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죠. 믿음이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정말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럼 내가 죽어야 됩니다. 우리 강남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죽어야 됩니다. 죽었다고 고백하셔야 돼요. 자꾸 내 뜻이 살고 내가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가 없어요. 더디어질 뿐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은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죽으라는 말이에요. 너 죽었다고 고백하라는 말, 넌 아무것도 못한다라고 고백하라는 말이에요. 그 순종과 동시에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 앞에 뭐가 되는 거예요? 흠 없는 제물로 인정되는 거예요. 그래 그렇게 고백했어?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어? 그래, 그럼 너는 내 앞에 흠 없는 제물이야. 여러분! 순종이 바로 믿음이고 믿음이 바로 순종이에요. 그 믿음의 순종, 순종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 우리의 능력, 우리의 생명, 그것은 순종밖에 없어요. 순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가능성의 전부입니다.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