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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이름 그리고 웃음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5. 13.

2024.05.12.(주일예배). 이름 그리고 웃음. 창세기 17:1~22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창세기 17:1~22)

 

 

이름과 웃음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복의 본질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마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복이 생육과 번성과 관련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으로 창조하시고 나서 복을 주실 때 다음과 같이 그 복을 약속하셨어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7~28)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 안에 엄청나게 많은 피조물을 채우시고 난 다음에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그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출생하기를 바라시고 번성하기를 바라시고 다스리기를 바라셨어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또 홍수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음과 같은 복을 약속하고 계시죠.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세기 9:7)


하나님의 일관된 복은 뭐냐 하면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당연히 아브람은 많은 자손을 가지게 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죠. 왜냐?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하나님의 세대를 많이 출생시키고 번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언약을 받았을 때의 아브람 역시도 많은 자손을 갖게 될 것이다 라고 기대했을 것이라는 거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말이 12장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너로 인하여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아브람은 많은 자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현실은 어떻습니까? 약속을 받은 지 24년 동안 자식이 없었어요. 복을 약속으로 받았을 뿐 현실은 복 받지 못한 존재가 바로 아브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어요. 복 없는 복의 근원이다. 여러분! 이게 말이 돼요? 안 돼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람 자신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이 아브람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모순 그 자체예요. 말이 안 돼요. 아니 복 주겠다고 떠났는데 그 복의 실체인 자손이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더군다나 아브람은 이제 생물학적으로 끝났어요. 할아버지입니다. 노인입니다. 힘이 없어요. 생산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할례를 행해서 자신의 완전한 죽음을 입으로 고백까지 몸으로 고백하게까지 하셨어요. 완전한 무능과 죽음으로 이제 현실적으로 볼 때 생육과 번성의 복은 아브람에게서 더 멀어져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식을 주시겠다라고 강력하게 다시 언약을 맺고 계시는 겁니다. 그게 1156절의 말씀이에요. 죽은 자의 출산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출산! 죽었어요. 생산력이 없어요. 산 자의 출산이 아니에요. 능력 있는 사람의 출산이 아니라 이제 완전히 죽은 자의 출산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그 언약은 아브람에게 모순덩어리일 수밖에 없죠. 말이 되질 않잖아요. 죽었는데 뭘 낳아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엘 샤다이, 즉 전능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며 나타났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어떤 하나님이라고요? 전능의 하나님! 이 전능의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가 어떤 시점에서 나타났는지를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랬죠. 불가능한 상황, 완전히 죽은 상황, 전능의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마치 아브람이 무능해지고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은 육체적으로 무너진 아브람에게, 또 정신적으로도 무너진 아브람에게 심지어는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살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는 믿음 없는 그런 영적 상태가 무너져버린 상태에서 나타나셔서 계속해서 내가 하리라. 내 언약이다. 그러니까 나를 강조하시면서 앞으로의 모든 일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붙잡고 가실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신 거죠. 인간의 어떤 기여나 도움이 하나님의 일에 전혀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자기가 뭔가를 보태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하나님을 도와드려야지! 내가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도록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갖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이나 기여가 필요 없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누가 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일이에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땅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서 계획을 하고 회의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인간이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복 없는 복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완전히 역전시키실 분은 과연 누구인가! 죽은 자의 출산이라고 하는 인간적으로 볼 때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이 비합리적 개념을 가능하게 할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오직 하나님! 그것도 그 이름이 전능한 하나님, 엘 사다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의 세계는 비합리적 세계예요. 물론 목사가 여러분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교를 하고 여러분들은 그 말을 나름의 이해력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세계라고 하는 거는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늠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또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약의 한쪽 당사자 또 다른 파트너가 있어요.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쌍방이 있어야 된다고 그랬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인데 언약의 당사자인 한쪽이 그 이름이 뭐냐 하면 엘 샤다이예요. 전능의 하나님. 마치 회사와 회사가 언약을 맺듯이 개인과 개인이 언약을 맺듯이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시를 해야 되잖아요. 이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다 라고 그 언약의 당사자의 이름을 밝히셨어요. 그렇게 해놓고 다른 쪽 당사자인 아브람의 이름을 뭐로 바꾸셨어요?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을 그냥 바꾼 게 아니에요. 그냥 때가 돼서 그냥 바꾼 게 아니라 바로 이 언약의 시점에서 아브람이 완전히 두 손 바짝 들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고 했을 때,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영적 개명(改名)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거죠. 말씀 한번 읽어볼까요?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세기 17:4~5)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이름을 바꾸신 거예요. 여러분! 원래 아브람이라고 하는 이름도 나쁜 이름은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볼 때 람(רָם)이라고 하는 말은 높다는 뜻이에요. 아부(אָב)는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높으신 아버지, 고귀하신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바뀐 거죠. 반면에 아브라함(אַבְרָהָם)이라고 하는 이름 뭐냐 하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게 좋아진 이름이 아니에요. 그죠? 높으신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 이게 좋잖아요.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이름이 바뀐 겁니다. 위대한 아버지에서 만국의 조상으로 열국의 아비로 이름이 바뀐 것이죠. 이제 그가 한 가정이나 부족 안에서 강하고 존경받는 그 아버지의 차원을 뛰어넘어 이제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 이름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여러분의 이름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 그 언약이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자기 몸에서 낳은 자식이 아무도 없어요. 이름이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비라고 하는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사람들에게 헛웃음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는 거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하나도 없다. 이거는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이름이 축복으로 지어졌는데 현실은 고통밖에 없다 하는 것이죠. 그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바꾸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언약의 파트너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언약의 파트너로 사래 역시도 똑같이 말씀하고 있어요. 말씀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세기 17:15~16)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그랬어요. 네가 아들을 낳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너를 위하여서 아들을 주리라 이렇게 약속하셨어요. 사래(שָׂרַי)라고 하는 말은 나의 공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사래, 사래 그러면 계속 뭐라고 부르는 거예요? 나의 공주, 마이(My) 프린세스(Princess), 이게 되게 좋은 뜻이에요. 그죠?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그런데 이 이름을 여러 민족의 공주(the princess of many nations), 열국의 어미라고 바꾸라고 하신 거예요. 아브람의 공주에서 만국의 공주로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아브람만의 공주가 아니라 이제는 여러 민족의 여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 이름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 또 여러분의 자녀들의 짝으로 만나게 되는 그 사람들의 이름 속에도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약속을 받은 사래 자신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가 내 몸으로 이스마엘도 낳지 못한 형편에 있는데 과연 이 축복의 약속을 받았을 때 감사했을까! 아니면 속이 쓰렸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하나님은 할례의식을 통해 언약의 도장아브라함의 몸에 새기라 하셨고, 언약의 내용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에 두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아브라함의 몸과 이름은 일종의 언약의 계획서가 된 겁니다. 언약 계약서, 몸에 지니고 다녀요. 그렇잖아요. 할례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고, 이름이라는 것도 평생 자기가 사는 날 동안 불리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매일 자기 몸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나는 죽었습니다. 절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떠한 인간적 시도도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라는 뜻을 항상 고백하고 또 매일의 삶에서 자기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는 것이죠. 나는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지, 매일의 현실의 모순과 약속의 모순과 이름의 모순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꽝꽝 못을 박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속에 완전하게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를 넘어 열국의 아버지, 또 나의 공주를 넘어 열국의 어머니가 되었어요. 그 이름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자식이 없는 지금의 상황과는 달리 그들의 바뀐 이름 속에는 세계 열방이라는 미래의 후손들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주어지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육적인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육적인 가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적 지평으로 나가는 출발점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개인 아브람과 개인 사래가 아닙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거예요. 이제 그들은 나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또 언약 성취의 도구로서의 삶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최소한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지! 하나님이 내 바뀐 이름을 통해서 내 인생을 바꾸신다고 그랬지! 그리고 나만 바꾸실 뿐만 아니라 내 가정과 내 민족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꾸신다고 했지! 그것을 믿는 거예요. 최소한으로 믿는 거예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여러분의 삶 속에 갖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웃음거리일 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이에서 나올 아들의 이름을 그래서 뭐라고 지었냐면 이삭(יִצְחָק)이라고 지었어요. 그 이름의 뜻이 뭡니까? ‘웃다라는 뜻이에요. 웃음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웃음이에요. 그러니까 좀 더 문맥에 맞게 번역을 하면 헛웃음 비웃음이에요. 아마 아브라함이 이삭의 이름을 자주 불렀을 겁니다. 엄마도 불렀을 거고, 이삭, 이삭,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이라고요? 웃음이에요. 어떤 웃음이에요? 기쁨의 웃음이에요? 성경에 보니까 이건 비웃음이에요. 그러니까 이삭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비웃었던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나는 그렇게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지! 나는 아무런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나는 무능했던 사람이었지! 라고 떠올리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불신과 허무와 헛웃음과 비웃음이 그 아들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웃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고, 그 아들 이삭과도 언약을 맺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세기 17:19)

 

비웃음을 넘어선 인애(仁愛, mercy, kindness)라고 할 수 있어요. 헤세드의 은혜, 인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러니까 인간이 비웃어도 그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어요. 헛웃음을 덮어준 은혜, 성경에 보면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비웃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계속 등장해요. 하나님 뭘 약속하시고 뭘 말씀하시면 비웃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냐고! 부활을 이야기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자들까지도 그런 건 없다고 부활은 없다고 비웃는 자들이 많이 등장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이라는 약속의 씨를 그대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삭이라는 약속의인간의 웃음하나님의 참으심이라고 하는 언약 당사자의 양 극단의 모습이 들어있어요. 내가 비웃었지! 그러나 하나님이 덮어주셨지! 나는 도무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들을 주셨지! 라고 하는 고백이 그 이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약속을 비웃어요. 이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웃는 거겠죠. 이것이 아직은 나의 삶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일어나도 비웃습니다. ? 나한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죠.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심을 믿으시고 축복합니다.

 

만약 이삭이 앞으로 태어난다면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능력이나 그의 신앙적 믿음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생산력의 죽음과 심지어는 신앙적 불신으로 인한 그 육체적 영적 죽음을 뚫고 이삭이 태어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죠. 이것은 구원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나님의 구원이란 과연 무엇이냐? 그 실체를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가 비판받고 조롱받고 교회가 조롱받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다. 이것이 진짜 구원이다. 기독교에만 이와 같은 구원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사건이 오늘 이 이삭의 사건 안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 인간의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이 그걸 보여주는 사건이라니까요.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혈과 육으로 되질 않아요.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공로를 쌓아서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고 해도 절대로 구원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다른 힘과 다른 경로가 필요해요.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영적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할 인간이, 죽어야 할 육체가 영적으로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게 될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암시를 받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 대한 소유권을 전혀 주장할 수 없다. 이삭이 믿음이 아닌 불신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 대한 소유권을 전혀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삭은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예요. 왜냐? 아브라함이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맞아요? 틀려요? 아브라함이 이삭 낳을 때 한 게 있어요? 없어요? 할아버지가 무슨 애를 낳겠어요? 이삭 출생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 대한 소유권을 절대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던 사람이에요. 전적으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만 소유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당당히 이삭을 요구할 수 있죠. 창세기 22장에 가보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정당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까지도 그렇게 바치죠.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해?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정당성이 있어요.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다? 하나님에게 있다. 여러분! 자녀도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여러분 거 아니에요? 여러분이 배 아파서 낳고 여러분이 고생해서 키웠으니까 여러분 거죠? 맞죠? 아니에요. 기도해서 낳았고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주셨으면 하나님 주신 것이 더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줄로 믿고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인간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비웃음을 덮고 구원하신다. 어떻게 구원하신다고요? 덮어놓고 구원하세요.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요. 거기에 맞서서 너 이거 아직도 안 했어? 너 이거 다 충족시켜! 그렇게 해놓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비웃는다 할지라도 한번 택하기로 작정한 백성은 그 허물을 덮어놓고 구원하신다. 남자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이삭이 태어났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남자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십니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의 족보를 따라 나중에 그대로 출생해요. 이 두 사건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점이에요. 아브라함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그 믿음을 의로 인정하셨으나 그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절대 그 사람은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비웃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고요. 마리아의 경우는 주의 여종이니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다라는 순종의 믿음 위에서 아들을 허락해 주시는 차이가 있는데 공통점은 뭐냐 하나님이 주셨다는 겁니다. 남자가 준 게 아니라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창세기 때부터 인간이 죄를 짓는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이삭을 준비시키시고 나중에는 예수로 완성시키는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비웃음을 덮고 인간을 구원하신 거죠. 이삭을 이 땅에 주셨던 하나님, 예수를 허락해 주신 겁니다. 인간에겐 비웃음이라는 이름이 남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즉 구원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부를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명이어도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유명한 자로, 예수를 믿는 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 은혜가 여러분 가족들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