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주일설교). 할례의 의미와 정신. 창세기 17:1~14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세기 17:1~14)
계속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이 성경 전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천천히 가더라도 제대로 알고 가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 잘 배우면 다른 성경을 읽을 때에도 같은 원리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특별히 이 앞부분에 많이 머무르니까 좀 지루하시더라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 이렇게 언약 언약하냐! 오늘 17장에 보더라도 언약이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와요. 그러니까 저는 언약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특히나 ‘할례 언약’ 그러면 현대인들에게 할례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거슬리잖아요. 솔직히 낯설잖아요. 특히 여성분들한테는 육신적으로 볼 때 이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럴 수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가 언약이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되잖아요. 맞죠? 하나님 말씀을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이해하실 거다. 굉장히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말씀 속에 특별히 성경 안에 기록해 놓으셨죠. 그래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집니다. 여러분! 구약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오래된 약속이라는 뜻이잖아요. 그죠?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란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벌써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이 성경 말씀 성경 전체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약속이 중요한 겁니다. 언약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언약의 말씀을 우리가 계속 나누고 있는데요.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이미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왜 또 17장에 와서 할례 언약을 또 맺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짐승을 쪼개놓고 횃불로 임재해서 지나가는 언약을 맺죠.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약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 berîyth)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처음 나오는 말입니다. 그 말씀에 의미하는 바는 내가 이렇게 쪼개지는 죽음을 각오한 이 언약을 내가 다 지킬게. 내가 다 할게. 너는 그냥 따라만 와. 하는 그런 일방적 언약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 동물이 쪼개지는 언약. 하나님이 임재에서 지나가는 언약이 15장에 있었는데 왜 또 17장에 와서 아브람의 몸을 쪼개는 할례하는 언약이 등장하고 있느냐 하는 거죠. 왜 언약이 또 이렇게 반복되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이 있는데 오늘은 세 가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언약의 내용 – 15장과 17장 언약에 있어 약속의 내용이 다르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15장에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과 17장에 와서 하신 언약의 내용이 다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요. 15장 언약은 주로 땅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17장은 주로 씨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3대 요소가 있다 그랬죠? 뭐죠? 국민, 영토, 주권, 국민은 씨에 해당하는 거고 영토는 땅, 주권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15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땅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고 17장에는 씨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에 두 가지가 합해져야 온전한 언약이 된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 16장에 보면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함께 여종 하갈를 통해 누구를 얻죠? 이스마엘을 얻었잖아요.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적인 시도로 불신을 나타낸다고 그랬어요. 실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가 실패한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7장에 들어와서 씨에 대한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을 다시 맺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는 거죠. 근데 여러분 창세기 15장에 보면 씨에 대한 약속이 분명히 있을 뿐만 아니라 15장이 땅에 대한 거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땅만 나오는 건 아니에요. 벌써 이미 15장 안에도 씨에 대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15장이 왜 중요하냐 하면 아브람이 믿으니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겼다는 이신칭의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신학적 무게로 볼 때 15장을 그냥 쉽게 이건 그냥 땅에 대한 약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거죠. 오히려 씨와 땅의 언약이 15장에 이미 맺어졌는데 16장에서 아브람이 실패했기 때문에 17장에 가서 다시 한번 언약을 갱신했다. 씨에 대한 언약만 갱신했다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거죠.
두 번째, 언약 자체 – 16장의 실패로 15장 언약을 갱신할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다? 왜 또 이렇게 반복되느냐? 언약 자체로 보는 건데 이거는 앞에서 주장한 것보다도 또 좀 더 급진적입니다. 16장의 실패 때문에 15장의 언약을 완전히 없애고 17장의 언약으로 새롭게 제시하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16장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15장의 언약은 완전히 파기가 되었고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파트너로서 믿음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믿음에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셔야만 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다시 언약의 조건인 믿음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17장에서 할례에 대한 아브람의 충성, 이걸 요구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명령과 새로운 믿음으로 새로운 언약이 체결된 걸로 봅니다. 근데 이 주장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성실성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다라고 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계획을 수정하고 바꿀 수도 있다는 문제가 되잖아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문제가 되잖아요. 나름의 일리는 있지만 성경의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다소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그래서 저는 세 번째 주장을 지지합니다. 이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봐요.
세 번째 입장은, 언약의 당사자 – 15장은 하나님 편, 17장은 사람 편? 이건 뭐냐 하면 15장은 하나님 편에서 맺어진 언약이고 오늘 17장 할례의 언약은 사람 편에서 우리 인간 편에서 세워진 언약이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15장에서 동물을 쪼개 가지고 횃불이 지나가는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온전히 이 언약을 보증하시겠다라는 표시이고, 17장에서 사람의 생식기를 자르는 언약은 인간 편에서 이 언약에 충성하겠다는 표시라고 해석합니다. 이 주장이 왜 일리가 있냐면 히브리어의 언약이라고 하는 베리트라고 하는 단어가 약속이라는 뜻과 함께 충성이라는 뜻도 같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약속이고 인간 편에서는 충성이 되는 겁니다. 도표로 정리를 해볼게요.
15장 | 17장 |
언약 = 하나님의 약속 | 언약 = 아브람의 충성 |
신랑의 언약 | 신부의 언약 |
15장에 언약이 등장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다. 17장은 언약인데 이것은 아브람의 충성 이걸 지키는 거 준수하는 걸 요구하시는 거다. 그래서 이걸 비유로 말하면 15장은 신랑의 언약이고 17장은 신부의 언약이다. 여러분 이해되시죠? 이러한 관점은 언약에 부응하는 사람의 편에서 충성과 헌신이라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거예요. 물론 언약은 항상 인간의 불완전한 믿음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능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 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여러분! 복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하나 있는데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라는 거예요. 물론 그 말이 일리가 있어요. 왜냐 할 게 없거든요. 보탤 게 없거든요. 그런데 신랑과 신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소한의 것, 그래서 제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사람 편에서 (부족할지언정!) 언약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거는 최소한의 것이에요. 이것도 안 하겠다고 하면 더 이상 할 게 없어요. 이거 아만(אֲמַן, ’ăman) 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최소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한 나를 통해 이것을 하실 줄로 나는 믿기 때문에 하나님만 따라가겠습니다. 아멘.’ 하는 믿음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11절의 할례의 언약이 바로 언약에 대한 사람의 헌신과 충성이라는 점에서 이 해석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세요. 우리가 로봇이 아닙니다. 매뉴얼화된 자동으로 그냥 기계적으로 말 듣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대하세요. 그래서 자녀라는 표현을 쓰세요. 우리를 신부라고 하는 표현을 쓰세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따르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세요. 그런 측면에서 17장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언약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해되시죠!
그런데 여러분! 지금까지 이 세 가지 해석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이 17장의 할례 언약이 하나님 나라 구성 요소 중에 특별히 씨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하는 거예요.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무능 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만들어진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할례가 드러내고 있다는 거예요. 뭐를 드러내고 있다고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 지금으로 말하면 이런 거예요. 누가 교인이냐? 그거예요. 누가 그리스도인이냐? 이거예요. 그냥 등록만 하면 교인이냐? 그냥 교회만 오래 다니면 그리스도인이냐?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라고 하는 게 뭐라 그랬어요? 그냥 의학적으로 말하면 육체적으로 말하면 남성의 생식기 겉표면을 잘라내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것의 신학적 의미는 뭐냐 하면 자아의 죽음이라고 했어요. 난 죽었습니다. 난 생산력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신학적 고백이 이 할례에 담겨져 있다고 그랬죠. 그 당시 부족 사회에서는 남성의 생식기가 어떤 풍요나 힘이나 생명을 상징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것은 아브람의 생물학적 무능과 죽음을 스스로 고백하게 한다. 하나님! 저 이제는 손들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이제 앞으로는 이스마엘처럼 인간적 시도 이제 안 할게요.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고백이에요. 그래서 그 고백 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이겠다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성경의 축복은 반드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그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복을 앞으로 이루실 때에 아브람 너를 의지하지 않고 누가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하겠다. 그걸 할례의 언약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례를 행하라.’ 그러면 그냥 문자적으로 듣고 행하기만 하면 돼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만 하면 일단은 충성의 표시가 됩니다. 완전한 제물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거죠. 마찬가지로 아브람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례’ 명령을 내립니다. 아브람 할아버지 그러니까 100세 된 할아버지에게뿐만 아니라 앞으로 건강한 얼마든지 육체적으로 생산력이 충만한 그런 자손들에게도 할례 명령을 내린단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라나는 날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런 존재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없으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가 중요합니다. 할례가 8일 만에 행하는 것처럼 어린아이 때에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그 아이가 자라나면서 물어볼 거 아니에요? 엄마! 왜 나한테는 이런 표시가 있어요? 아빠! 왜 나한테는 다른 이방인들에게 없는 이런 표시가 있나요? 물어볼 거 아니에요? 그러면 부모가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거는 말이야!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에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삶으로 고백하게 하는 거야.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거죠. 신앙 고백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영영토록 자신의 죽음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공동체다. 강남교회 공동체는 뭐냐? 인간적으로 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십니다를 고백하는 공동체, 할례를 정리해 보겠어요. 여러분! 이거는요 암기를 하셔야 돼요. 이단들이 와서 할례가 뭔지 알아요? 할례 받았어요? 이런 식으로 이상한 질문하면 이렇게 딱 답하면 돼요. 아셨죠?
할례는 자신의 죽음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신앙 고백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여러분! 할례 받으셨습니까? 아멘이죠. 어떻게 아멘 할 수 있죠? 이 고백이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죽은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죽은 존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할례받은 사람이예요. 아브람의 자손은 다름 아닌 할례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할례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항상 고백해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이거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바로 할례 공동체, 신앙 공동체라는 거예요. 그럼 할례받지 않으면요? 이런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애가 할례를 안 받아! 8일을 놓쳤어요. 8년을 놓쳐버렸어요. 성장을 했어요. 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할례받아야 돼. 그런데 뭐 그런 게 필요해요? 저 안 받아요! 그랬단 말이에요. 그것은 지금 어떤 고백을 하는 거예요? 어떤 고백과 같다고요? 나는 하나님 필요 없다. 내 힘으로 내가 내 삶을 살아간다라는 고백과 다름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근본적 차이가 여기서 일어납니다. 이 사이에는 어떠한 타협점이 없어요. 할례 받으면 살고, 할례 못 받으면 그냥 끊어지는 거예요. 할례 공동체에 할례받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들어올 수가 없어요. 끊어져 버려요. 그리고 혈통적 자손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는다.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 공동체 안으로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거룩한 장소로 들어올 수가 없어요. 다 끊어져요. 그 약속이 바로 17장 14절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라.” (창세기 17:14)
여기 분명히 명시하고 계시죠. 조건이 너무 단순하잖아요. 할례를 받으면 살 수가 있고 할례를 못 받으면 백성 중에 끊어져 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아브람의 자손은 자연적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할례의 신앙으로 형성된 민족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태어나 보니까 내가 이방인으로 태어났어요. 그래도 할례를 받으면 할례의 법에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거예요. 어느 날 팔려서 우연히 이스라엘 사람이 주인의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 거기서 할례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거예요. 할례를 통한 신앙의 공동체가 바로 아브람의 자손이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강남교회에 모여 있는 여기 지체들은 어떤 관심을 가지고 모이게 된 거예요? 어떻게 한 영적인 한 가족이 되는 겁니까? 혈통이 다르고 살아온 지역이 다른데 예수의 피로 인해서 그 피를 공유함으로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음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수혈받은 영적인 한 가족임을 신앙 공동체임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례 공동체라는 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 두 가지 정도 등장하는데 하나는 모세가 하나님의 그 출애굽 사명을 받고 애굽 땅으로 돌아올 때 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애굽기 4:23~26)
뭐 때문이었다고요? 할례 때문에. 지금 모세와 그의 가족들이 출애굽이라고 하는 이 원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애굽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길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게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죽이려는 이유가 결과적으로 뭐였다는 거예요? 아들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모세의 후손입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노예로 있는 애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길 입구에서 막으셨다는 거예요. 죽이려고 했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그곳, 바로 하나님이 계신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는 성경의 원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명이 먼저인가? 존재가 먼저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말합니다. 나는 이런 사명 때문에 여기에 왔고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뭐냐 하면 그 사명을 감당할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 하는 점이에요. 할례를 받았는가? 영적으로 구별되었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알려주신 거죠.
두 번째 사건이 뭐냐 하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일어난 일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여호수아 5:2~5)
아니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고 하는 이 막중한 사명 앞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뭘 명령하셨어요? 할례를 명령하셨단 말이에요. 건강하게 힘 있게 전쟁에 나가도 승리할까 말까인데, 바로 그러한 막중한 일 앞에서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셨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앞장서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이죠. 자칫 잘못했다가는 뒤따라가다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죽어요. 자기 백성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서 할례를 행하게 하시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혈통적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적 공동체임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거예요.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나중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면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을 너희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그러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훈련을 지금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 거죠. 여러분! 기억할 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적 자손이 아니라 신앙적 자손이다. 할례의 자손이다 하는 사실을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시간이 지날수록 이 할례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할례의 의식 자체만을 강조하면서 ‘나, 하나님의 선민이야.’ 이걸 자랑하며 변질이 돼버렸어요. 할례의 표식만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했던 거죠. 그러니까 할례의 정신이 사라져버리고 할례의 표시만 남겨진 거예요. 할례의 가장 큰 정신 궁극적 목적은 뭐냐? 그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죠? 내 몸에 할례가 새겨졌어요. 할례가 있어요. 여자라도 내 남편이 내 아빠가 대표가 할례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이거는 어떤 거냐면 나는 앞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나는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나는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그 모든 것에서 다 끊어져서 하나님에게만 붙어서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이 할례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는 몸에 이 할례의 흔적만 남겨놓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져버렸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됐느냐 하는 거죠.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10:16)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이에요? 몸에 할례를 받았는데 목이 꼿꼿해졌네. 나 선민이야. 그러고 나중에 하나님께도 대항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져요. 자신의 신념이나 자신만의 신앙 체계가 점점 더 강화되고 견고하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까지도 욕되게 하고 하나님까지도 대항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거죠. 몸에 할례가 있는데 왜 그럴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명기 30:6)
여기는 몸의 할례라는 말을 안 쓰고 아예 처음부터 마음의 할례예요. 그렇다고 몸의 할례를 받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몸의 할례를 받았으면 더 중요한 게 뭐냐!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뜻이에요. 마음의 할례가 뭐라고요? 나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물질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너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이 그냥 굴복하게 하시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이상한 일을 하시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게 할까를 고민하시다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례의 표식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몸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볼 수 있죠. 말씀 확인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는 것이 되었으며” (에스겔 44: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에스겔 44:9)
여러분!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왜 몸에 할례도 받지 않고 마음의 할례도 받지 않는 이방인들을 함부로 성소에 들이는 일들이 생겨났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자기의 할례에 대해서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자신들은 정작 몸에 할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니까 경제적 유익을 위해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할례받지도 아니한 이방인들을 함부로 성소 안에 들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슴 아픈 건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들어왔다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성소 안에 들일 수밖에 없는 그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한탄하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다 할례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다 성령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다 세례 받으셨습니까? 사실은 이 자리에 아무나 나와서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중간지대가 없어요. 받아들이거나 내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축복이냐 저주냐 이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무조건 데려오는 거예요. 무조건 등록시키는 거예요. 사람 수를 늘리고 사람 수 늘어나는 것에 따라 경제적인 것도 늘리고 규모도 늘리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고 계시는 거죠. 왜요? 할례라는 거는 마음의 할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몸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아요. 그저 나는 선민이다.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다. 나 유일하게 깨끗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자기 자랑밖에는 남겨져 있지 않은 거예요. 할례를 몸에 새겼으면 그거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더 원하는 건 뭐냐 하면 그것으로 인한 마음의 할례를 원하신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이런 일도 벌어졌어요.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9:26)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 이방 민족들도 살을 잘라내는 할례 의식이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그러나 그들은 내가 정한 언약의 할례 의식은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더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명령한 할례의 의식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어. 너희들은 의리도 없어. 저렇게 이방 민족들이 자기들끼리 혈맹을 맺으면서 의리를 지키는데 너희들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나에 대한 의리도 하나도 지키지 않네. 날 사랑하지 않네. 우상을 더 사랑하네. 물질을 더 숭배하고 있네. 사람을 더 의지하네. 한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의식적인 할례는 받지 않았어요. 그러나 성령 안에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죠.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29)
칭찬이라는 말은 인정해 준다는 뜻이에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율법을 하나부터 끝까지 다 지켰다라고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면적으로 성령 안에서 구별됐다고 믿는 너희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 유대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신다. 우리가 할례라고 하는 거친 의식은 행하지 않지만 그것과 똑같은 정신을 갖는 세례를 받는 사람입니다. 세례 교인이죠. 골로새서가 뭘 증언하는지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오.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로새서 2:11~12)
할례가 그리스도로 인해 세례가 되는 거죠. 여러분! 세례 받으셨죠? 안 받으셨으면 받으셔야 돼요. 그런 할례와 같은 무게감이 있는 절대적인 세례를 받은 그러한 영적인 신앙 공동체인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고백이 있어야 하겠냐는 거죠. 할례 때와 똑같습니다. 하나님 나는 죽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 하실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서로 각자 얼굴이 다르고 출생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피로 인하여 한 영적 가족 되었음을 믿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충만하게 누리시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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