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세푸스/유대 고대사

요세푸스 - 유대 고대사 (18)

by 복음과삶 2024. 5. 24.

유대 고대사 - 제 18 권

32년의 간격을 담고 있습니다.

 

 

아켈로의 추방부터 바빌론에서 출발까지.

 

제 1 장

 

카이사르는 시리아와 유대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키레니우스를 어떻게 보냈습니까? 그리고 코포니우스가 유대 총독으로 파견된 방법; 갈릴리의 유다와 유대인 중에 있던 여러 종파에 관한 일이라.

 

1. 로마 원로원 의원 키레니우스(Cyrenius)는 다른 행정관들을 거쳐 집정관이 되었고, 다른 말로는 매우 위엄 있는 사람이 이때 시리아에 들어와서 그 외에 몇 사람은 그 민족의 재판관인 가이사에게 보내어 그들의 재산을 조사하게 하였느니라 기마 기사단의 사람인 코포니우스도 유대인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력을 가지도록 그와 함께 파견되었습니다. 더욱이 구레니우스는 그들의 재산을 조사하고 아켈라오의 돈을 처리하기 위해 현재 시리아 속주에 추가된 유대로 직접 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세금 보고를 극악하게 받아들였지만, 베투스의 아들이자 대제사장인 요아자르의 설득으로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반대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아자르의 말을 듣고, 아무런 논쟁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재산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갈로 사람 유다가 있었는데,(1) 가말라라 이름하는 한 성읍 사람이 사두개를 데리고 갔으며(2) 한 바리새인이 그들을 반란으로 끌어들이려고 열심이었는데, 그들은 이 세금이 노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면서 민족에게 그들의 자유를 주장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마치 그들이 소유한 것에 대한 행복과 안전, 그리고 훨씬 더 큰 선에 대한 보장된 즐거움, 즉 그들이 관대함으로 얻게 될 명예와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회의에 서로 참여하고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참여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그들이 큰 공적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이 대담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불행도 이 사람들로부터 생겨났고, 나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 교리에 감염되었습니다. 폭력적인 전쟁이 연달아 닥쳤고, 우리는 고통을 덜어주던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강도와 살인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공공의 복지를 위해 행해졌으나 실제로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그로부터 폭동이 일어났고 그들로부터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동족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이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광기 때문에). 그들의 적; 기근도 우리에게 닥쳐 우리를 절망의 지경으로 몰아넣었고,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마침내 소요가 너무 심해져서 하나님의 성전마저도 적들의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것의 결과는 이러하여 우리 조상들의 관습이 바뀌었고 그러한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모든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막강한 무게가 더해졌는데, 이 사람들이 함께 공모함으로써 야기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네 번째 철학 종파를 선동하고 그 안에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유다와 사두개인은 현재 우리 정부를 소란으로 가득 채웠고,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이 철학 체계로 미래의 비참함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오히려 이것에 대해 열성적인 젊은 부류 사이에 퍼진 감염이 대중을 멸망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 가지 철학 종파를 갖고 있었습니다. 에센파와 사두개인파, 셋째는 바리새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견해였습니다. 그 종파들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유대 전쟁 제2권에서 말했지만 지금은 그들에 대해 조금 다루겠습니다.

 

3. 바리새인들은 천한 생활을 하며 음식의 맛있는 것을 멸시하며 그리고 그들은 이성의 행위를 따른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좋다고 규정하는 대로 그들은 행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천에 대한 이성의 지시를 준수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한 수년 동안 존경을 표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소개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대담하게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운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인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를 빼앗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념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질을 두시고 인간의 뜻이 선하게 행하거나 악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영혼이 불멸의 엄격함을 갖고 있으며, 이생에서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에 따라 땅 아래에서는 보상이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후자는 영원한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전자는 살아나서 다시 살 권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리 때문에 그들은 국민 전체를 크게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성한 예배, 기도, 희생에 관해 무엇을 하든지 그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그것을 수행합니다. 그만큼 도시들은 그들의 삶의 행동과 담론 모두에서 그들의 덕행 전체에 대해 큰 증거를 제공합니다.

 

4.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교리는 이것이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 그들은 법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준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방문하는 철학 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의 일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소수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지만 여전히 가장 위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치 않고 때로는 강요에 의해 행정관이 되었을 때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개념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5. 에센스의 교리는 이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가장 잘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혼불멸을 가르치며, 의의 보상은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것을 성전에 보낼 때에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느니라 (3) 그들은 그들 자신의 더 순수한 정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전의 공동 뜰에서 제외되고 스스로 희생을 바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적으로 농업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덕과 의에 중독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우리는 감탄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은 그리스 사람이나 야만인이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나타난 적이 없고, 단시간 동안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그들의 제도에 의해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서 아내를 두지도 않고 종을 두기를 원하지도 않는 남자가 사천 명쯤 됩니다. 후자는 사람들을 불의하게 유혹하고 전자는 가정의 싸움을 주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생활하면서 서로를 섬깁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수입과 땅의 소산으로 얻은 수입을 받도록 특정한 청지기들을 임명합니다. 그들은 곡식과 음식을 준비하는 선한 사람들과 제사장들입니다. 그들 중 생활방식은 다른 에센족과 다르지 않지만 폴리스타에(Polistae)라고 불리는 다카에족과 가장 흡사합니다.(4) [도시 거주자].

 

6. 그러나 유대 철학의 네 번째 종파의 저자는 갈릴리 사람 유다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모든 면에서 바리새인의 관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에 대한 불가침의 애착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통치자이자 주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어떤 종류의 죽음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며, 실제로 친척이나 친구의 죽음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어떤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흔들리지 않는 결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므로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나는 그들에 대해 내가 말한 어떤 것도 불신을 당할까봐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말한 것이 그들이 고통을 겪을 때 보여주는 결의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의 시대에 온 국민은 우리의 총독이자 유대인들이 그의 권위를 남용하여 광포하게 만들고 로마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이 질병으로 인해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 철학의 종파들입니다.

 

제 2 장

 

이제 헤롯과 빌립은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 여러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사제와 검찰관의 계승에 관하여; 또한 프레이테스와 파르티아인들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이제 키레니우스는 아켈라오의 돈을 처분하고, 가이사가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한지 37년째 되는 해에 행해진 세금 부과가 끝났을 때, 그는 요아자르에게 대제사장직을 박탈했다. 무리가 그를 의탁하매 그가 셋의 아들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니라 헤롯과 빌립은 각자의 분봉 통치를 받고 그 일을 해결했습니다. 헤롯은 또한 온 갈릴리의 안전이 되는 세포리스 주변에 성을 쌓고 그 곳을 그 나라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그는 또 베다람프타 둘레에 성벽을 쌓았고, 그 자체도 도시였으며, ​​황제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율리아스라고 불렀습니다. 빌립도 요르단 강변에 도시 파네아스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가이사랴라 불렀습니다. 그는 또한 게네사렛 호수에 위치한 벳새드 마을을 주민 수와 그 웅장함을 고려하여 도시의 위엄으로 발전시켰으며, 가이사의 딸과 같은 이름인 율리아스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

 

2. 우리가 너희에게 말하였나니 구레니우스와 함께 보냄을 받은 코포니우스가 총독직을 수행하며 유대를 다스리다가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느니라. 유대인들은 우리가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무교절을 기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자정이 지나면 성전 문을 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이 처음 열렸을 때 사마리아인 중 몇 사람이 몰래 예루살렘에 들어와 회랑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던졌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나중에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냈는데, 그들은 그러한 축제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 그들은 이전보다 더 주의 깊게 성전을 관찰했습니다. 얼마 후 코포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왔고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그 정부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헤롯 왕의 누이 살로메가 죽으매 율리아와 얌니아와 그 모든 고관과 평지에 있는 파사엘리스와 또 종려나무가 많고 그 열매가 열리는 아레엘래에게 남겨졌느니라 그 종류가 훌륭합니다. 그 뒤를 이어 안니우스 루푸스(Annius Rufus)가 오는데, 그의 통치 기간은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인 카이사르가 죽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57년이었고, 그 외에 6개월 2일이었습니다(이 기간 중 안토니우스는 그와 함께 14년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77세였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아내 Julia의 아들인 Tiberius Nero가 계승했습니다. 그는 이제 세 번째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를 유대의 총독으로 보내고 안니우스 루푸스(Annius Rufus)의 뒤를 이도록 보냈습니다. 이 사람은 아나누스의 대제사장직을 박탈하고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을 대제사장으로 세웠느니라. 그리고 잠시 후에 그를 폐하시고, 전에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누스의 아들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가 1년 동안 그 직분을 맡고 있던 그라투스는 그 직분을 박탈하고 카미투스의 아들 시몬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위엄을 얻은 지 1년이 채 안 되어 요셉 가야바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라투스는 이 일을 마치고 유대에서 11년을 머물다가 본디오 빌라도가 그의 후계자로 왔을 때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3. 그리고 이제 티베리우스에게 큰 총애를 받은 분봉왕 헤롯이 그와 함께 같은 이름의 성을 건설하고 그 이름을 티베리아스라 불렀느니라. 그는 갈릴리에서 가장 좋은 곳인 게네사렛 호수에 그것을 건축했습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에 따뜻한 목욕탕이 있다. 낯선 사람들이 와서 이 도시에 거주했습니다. 주민들 중 상당수도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헤롯에 의해 자기에게 속한 땅에서 그곳으로 오도록 강요받았고, 강제로 그 주민이 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조건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등 가난한 사람들도 그 곳에 거주하도록 허락하셨다. 아니, 그들 중 일부는 완전한 자유인이 아니었고, 그는 이들에게 은인이 되어 그들을 수많은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비용으로 그들에게 아주 좋은 집을 짓고 땅도 주어서 그 도시를 버리지 않도록 강요하셨습니다. 이곳에 거주할 곳을 만드는 것은 유대의 옛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됨이라 여기고 이 곳에서 많은 무덤을 옮겨 디베랴 성읍을 세우게 하였음이라(5) 우리 율법에서는 그러한 주민이 7일 동안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6)

 

4. 이때쯤 파르티아의 왕 프라아테스가 그의 아들 프라타케스의 배반으로 죽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프라아테스가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들을 낳았을 때, 그에게도 테르무사라는 이탈리아인 하녀가 있었습니다. 다른 선물들 중에서 Julius Caesar가 이전에 그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그는 먼저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크게 존경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서 프라타케스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녀를 합법적인 아내로 삼았고 그녀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말한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었고, 아들을 위해 파르티아 정부를 확보하는 데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프라아테스의 합법적인 아들들을 [왕국에서] 제거할 방법을 고안하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아들들을 로마에 대한 충성의 보증으로 보내도록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 따라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이제 프라타케스는 정부에서 성공하기 위해 혼자 자랐지만, [그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기부로 그 정부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에 대해 배신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보고서에 따르면 아버지와도 범죄적인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두 가지 악덕 때문에 미움을 받았고, 그의 신민들은 그의 어머니의 이 [사악한] 사랑이 그의 존속살해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커지기 전에 그들 곁에서 폭동을 일으켜 그 나라에서 쫓겨났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파르티아인들은 왕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데 함께 동의했고, 동시에 아르사케스 가문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의 끊임없는 관행이었고 [그들의 ​​법은 다른 사람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왕국이 이탈리아인 첩과의 결혼으로 이미 충분히 손상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문제로 인해] 그들은 대사를 보내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오로데스를 불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중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아주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다루기 힘든 성격을 갖고 있었고, 쉽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르사케스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고 그를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했듯이 그것은 축제 때나 그들의 제물 가운데서였습니다.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곳의 보편적인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그를 사냥하러 나가게 했을 때 그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 사신을 보냈고, 자신들의 왕이 되겠다는 서약으로 그곳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따라서 보노네스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우선시되어 그들에게 파견되었습니다(그는 이제 태양 아래 가장 위대한 두 왕국, 즉 자신의 왕국과 외국 왕국이 그에게 제공할 만큼 엄청난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천성적으로 변덕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곧 마음을 바꾸었습니다.이 사람이 그들의 총독이 될 자격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은 종이었던 자의 명령에 순종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인질이었던 자들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 이름의 치욕을 견딜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파르티아인들은 전쟁의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의 시기에 그들을 다스리는 그러한 왕을 가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메디아 왕 아르타바누스를 그들의 왕으로 초대했는데, 그도 역시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아르타바누스는 그에게 주어진 제안에 응하고 군대를 이끌고 그들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보노네스는 그를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수많은 파르티아인들이 이쪽에 서 있었고, 그는 자신의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는 패하여 메디아 산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모아 보노네스와 싸워 그를 이겼습니다. 그 후 보노네스는 그의 수행원 몇 명과 함께 말을 타고 셀레우키아(티그리스 상공)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아르타바누스는 많은 수를 죽이고 야만인들이 처한 매우 큰 실망으로 인해 승리를 얻은 후 많은 수의 백성과 함께 크테시폰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파르티아인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노네스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 오자마자 그 나라의 정부를 그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 목적을 위해] 로마에 대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이를 거부하고, 그가 용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파르티아 왕이 그를 위협하고, 그가 계속한다면 전쟁을 선포하도록 사절을 그에게 보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다른 왕국을 되찾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 Niphates에 관한 아르메니아 인 중 권위있는 사람들이 Artabanus에 합류했기 때문에) 그는 시리아 대통령 Silanus에게 자신을 넘겨주었습니다. Silanus는 로마에서의 교육을 고려하여 그를 시리아에 유지했고 Artabanus는 아르메니아를 Orodes에게주었습니다. , 그의 아들 중 한 명.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Ctesiphon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파르티아인들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노네스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 오자마자 그 나라의 정부를 그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 목적을 위해] 로마에 대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이를 거부하고, 그가 용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파르티아 왕이 그를 위협하고, 그가 계속한다면 전쟁을 선포하도록 사절을 그에게 보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다른 왕국을 되찾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 Niphates에 관한 아르메니아 인 중 권위있는 사람들이 Artabanus에 합류했기 때문에) 그는 시리아 대통령 Silanus에게 자신을 넘겨주었습니다. Silanus는 로마에서의 교육을 고려하여 그를 시리아에 유지했고 Artabanus는 아르메니아를 Orodes에게주었습니다. , 그의 아들 중 한 명.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Ctesiphon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파르티아인들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노네스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 오자마자 그 나라의 정부를 그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 목적을 위해] 로마에 대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이를 거부하고, 그가 용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파르티아 왕이 그를 위협하고, 그가 계속한다면 전쟁을 선포하도록 사절을 그에게 보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다른 왕국을 되찾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 Niphates에 관한 아르메니아 인 중 권위있는 사람들이 Artabanus에 합류했기 때문에) 그는 시리아 대통령 Silanus에게 자신을 넘겨주었습니다. Silanus는 로마에서의 교육을 고려하여 그를 시리아에 유지했고 Artabanus는 아르메니아를 Orodes에게주었습니다. , 그의 아들 중 한 명.

 

5. 이때 콤마게네 왕 안티오코스가 죽었다. 그러자 군중이 귀족들과 다투었고 둘 다 [로마]에 대사를 보냈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부 형태를 [로마] 속주 정부 형태로 바꾸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들의 조상처럼 왕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은 동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해야 한다는 법령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행운은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동부에 가서 그곳에서 모든 일을 해결했을 때, 다른 곳에서 언급된 것처럼, 피소가 그에게 준 독에 의해 그의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7)

 

제 3 장

 

본디오 빌라도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소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리고 로마에서 파울리나와 유대인들에게 닥친 일에 관하여,

 

1. 그러나 이제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유대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겨울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동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깃발 위에 있던 카이사르의 조각상을 소개하고 그것을 도시로 가져왔습니다. 우리 법은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직 검찰관들은 그 장식품이 없는 깃발을 들고 도시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빌라도는 그 형상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그곳에 세운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이 밤에 이루어졌으므로 백성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느니라.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알고 곧 군중이 가이사랴로 와서 빌라도에게 그 형상들을 제거해 달라고 여러 날 간청하니라. 그리고 그것이 가이사에게 해를 끼치게 될 까닭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셨을 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요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여섯째 날에 그는 그의 병사들에게 그들의 무기를 개인적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그가 와서 그의 재판에 앉았습니다. 그 자리는 도시의 열린 곳에 준비되어 있어서 그들을 진압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를 숨겼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에게 다시 청원하자 그는 군인들에게 그들을 포위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들이 그를 방해하는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들의 처벌은 즉각적인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엎드러져 목을 드러낸 채 그들의 율법의 지혜가 범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들의 율법을 불가침으로 지키겠다는 그들의 확고한 결의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곧 그 형상들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져가라고 명령했습니다.

 

2. 그러나 빌라도는 물의 흐름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일을 맡았고, 그것은 신성한 돈으로 행했고, 이백 스타디온 떨어진 곳에서 그 흐름의 근원을 알아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8) 이 물에 대해 행해진 일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를 반대하여 소란을 피우고 그 계획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대개 그런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 사람을 비난하고 학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옷 속에 단검을 넣고 그들을 포위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 많은 수의 병사들을 그들의 복장에 거주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직접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담하게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사전에 합의한 신호를 군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빌라도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가하고 떠들썩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동등하게 벌하였느니라. 그들은 아무 것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무장도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하려는 일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부상을 입고 도망갔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요는 끝났습니다.

 

3. 이때 예수께서 계시니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시라 그를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옳으니라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일을 행하는 자요,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을 그에게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빌라도가 우리 중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정하고(9) 처음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그들에게 나타나셨음이라.(10)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 일들과 기타 수만 가지 놀라운 일들을 예언한 것과 같으니라. 그리고 그에게서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 부족은 오늘날에도 멸종되지 않았습니다.

 

4.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슬픈 재난이 유대인들을 어지럽게 하여 로마에 있는 이시스 신전에 대하여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나는 먼저 이시스 신전에 대한 사악한 시도에 주목하고, 그 다음에는 유대 사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로마에 파울리나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조상들의 위엄과 규칙적인 고결한 생활로 인해 큰 평판을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매우 부유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고, 그 시대의 여성들이 가장 동성애자였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매우 겸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훌륭한 성격으로 그녀에게 모든 면에서 책임을 졌습니다. Decius Mundus는 승마 계급에서 매우 높은 남자였던 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 위엄이 있었고 이미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보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 불타올랐고,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20만 다락방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룻밤 숙박을 위한 드라크마; 그리고 이것이 그녀에게 이기지 못하고 그의 사랑 속에서 이 불행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그는 파울리나의 슬픈 거절 때문에 음식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식으로 죽기로 결심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목적을 계속했습니다. 이제 문두스에게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해방된 해방된 여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이데(Ide)였으며 온갖 종류의 장난에 능한 사람이었다. 이 여인은 청년이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매우 슬퍼하고 있었습니다(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멸망시키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가 Paulina와 함께 하룻밤을 묵을 수 있도록 그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간청을 기쁘게 들었을 때, 그녀는 그 여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대가로 오만 드라크마만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청년을 격려하고 요구한 만큼 돈을 받은 후에는 이전과 같은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여자가 결코 돈의 유혹을 받을 것이 없음을 알았음이라.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이시스 여신을 매우 숭배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계략을 고안했습니다. 그녀는 이시스의 몇몇 사제들에게 가서 [은폐에 대한] 가장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말로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돈을 제의하여 이만 오천 드라크마를 손에 넣었고 그 일이 발효되면 그 이상을 더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청년의 열정을 말해 주고, 그 여자를 속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갖게 될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은 즉시 Paulina에게 갔다. 그리고 그가 허락하자 그는 그녀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그것이 허락되었을 때,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아누비스 신이 자신을 보냈다고 말하고 그녀에게 그에게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메시지를 매우 친절하게 받아들이고 아누비스의 이러한 겸손을 크게 소중히 여기며 남편에게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저녁 식사를 하고 아누비스와 함께 누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순결에 완전히 만족하고 그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자가 성전에 갔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제사장은 성전 문을 닫았고, 성전의 거룩한 부분의 등불도 꺼졌다. 그러자 문두스는 뛰쳐나와 (그가 거기 숨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 줄 착각하고 밤새도록 그를 섬기던 그녀를 즐겁게 즐겼다.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때, 이 책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직자들이 동요하기 전에 Paulina는 남편에게 일찍 와서 아누비스 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이 호의를 얼마나 큰 가치로 여겼는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그 일의 본질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분적으로는 믿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척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겸손과 존엄성. 그러나 이제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만에 문두스는 파울리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파울리나님, 당신은 나에게 이십만 드라크마를 구해 주셨고, 그 액수는 당신의 가족에게 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초대한 대로 나를 섬기게 해달라고. 당신이 문두스에게 가한 비난에 관해서는, 나는 이름을 따지는 일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아누비스의." 그는 이 말을 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옷을 찢으며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략의 끔찍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경우에 자신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제사장들을 심문하여 그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들과 이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데는 그들을 멸망시킨 원인이자 그 여자에게 너무나 해로운 모든 일을 꾀한 이데였다. 그는 또한 이시스 신전을 헐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추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저지른 범죄는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에 의해 발생한 부상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에게 메시지가 전송되었으며 저녁 식사를 하고 아누비스와 함께 누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순결에 완전히 만족하고 그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자가 성전에 갔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제사장은 성전 문을 닫았고, 성전의 거룩한 부분의 등불도 꺼졌다. 그러자 문두스는 뛰쳐나와 (그가 거기 숨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 줄 착각하고 밤새도록 그를 섬기던 그녀를 즐겁게 즐겼다.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때, 이 책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직자들이 동요하기 전에 Paulina는 남편에게 일찍 와서 아누비스 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이 호의를 얼마나 큰 가치로 여겼는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그 일의 본질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분적으로는 믿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척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겸손과 존엄성. 그러나 이제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만에 문두스는 파울리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파울리나님, 당신은 나에게 이십만 드라크마를 구해 주셨고, 그 액수는 당신의 가족에게 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초대한 대로 나를 섬기게 해달라고. 당신이 문두스에게 가한 비난에 관해서는, 나는 이름을 따지는 일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아누비스의." 그는 이 말을 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옷을 찢으며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략의 끔찍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경우에 자신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제사장들을 심문하여 그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들과 이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데는 그들의 멸망의 원인이었으며 그 여자에게 너무나 해로운 모든 일을 꾀한 이데였다. 그는 또한 이시스 신전을 헐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추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저지른 범죄는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에 의해 발생한 부상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했던 대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의 관계로 돌아가겠습니다.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에게 메시지가 전송되었으며 저녁 식사를 하고 아누비스와 함께 누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순결에 완전히 만족하고 그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자가 성전에 갔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제사장은 성전 문을 닫았고, 성전의 거룩한 부분의 등불도 꺼졌다. 그러자 문두스는 뛰쳐나와 (그가 거기 숨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 줄 착각하고 밤새도록 그를 섬기던 그녀를 즐겁게 즐겼다.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때, 이 책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직자들이 동요하기 전에 Paulina는 남편에게 일찍 와서 아누비스 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이 호의를 얼마나 큰 가치로 여겼는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그 일의 본질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분적으로는 믿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척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겸손과 존엄성. 그러나 이제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만에 문두스는 파울리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파울리나님, 당신은 나에게 이십만 드라크마를 구해 주셨고, 그 액수는 당신의 가족에게 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초대한 대로 나를 섬기게 해달라고. 당신이 문두스에게 가한 비난에 관해서는, 나는 이름을 따지는 일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아누비스의." 그는 이 말을 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옷을 찢으며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략의 끔찍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경우에 자신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제사장들을 심문하여 그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들과 이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데는 그들을 멸망시킨 원인이자 그 여자에게 너무나 해로운 모든 일을 꾀한 이데였다. 그는 또한 이시스 신전을 헐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추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저지른 범죄는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에 의해 발생한 부상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했던 대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의 관계로 돌아가겠습니다.그는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밤새도록 그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때, 이 책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직자들이 동요하기 전에 Paulina는 남편에게 일찍 와서 아누비스 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이 호의를 얼마나 큰 가치로 여겼는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그 일의 본질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분적으로는 믿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척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겸손과 존엄성. 그러나 이제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만에 문두스는 파울리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파울리나님, 당신은 나에게 이십만 드라크마를 구해 주셨고, 그 액수는 당신의 가족에게 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초대한 대로 나를 섬기게 해달라고. 당신이 문두스에게 가한 비난에 관해서는, 나는 이름을 따지는 일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아누비스의." 그는 이 말을 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옷을 찢으며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략의 끔찍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경우에 자신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제사장들을 심문하여 그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들과 이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데는 그들의 멸망의 원인이었으며 그 여자에게 너무나 해로운 모든 일을 꾀한 이데였다. 그는 또한 이시스 신전을 헐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추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저지른 범죄는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에 의해 발생한 부상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했던 대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의 관계로 돌아가겠습니다.그는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밤새도록 그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때, 이 책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직자들이 동요하기 전에 Paulina는 남편에게 일찍 와서 아누비스 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이 호의를 얼마나 큰 가치로 여겼는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그 일의 본질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분적으로는 믿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척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겸손과 존엄성. 그러나 이제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만에 문두스는 파울리나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파울리나님, 당신은 나에게 이십만 드라크마를 구해 주셨고, 그 액수는 당신의 가족에게 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초대한 대로 나를 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문두스에게 가한 비난에 대해서는 나는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인해 기쁨을 얻었습니다. 아누비스의." 그는 이 말을 하고 자기 길을 갔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옷을 찢으며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략의 끔찍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경우에 자신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제사장들을 심문하여 그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들과 이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데는 그들을 멸망시킨 원인이자 그 여자에게 너무나 해로운 모든 일을 꾀한 이데였다. 그는 또한 이시스 신전을 헐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추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저지른 범죄는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에 의해 발생한 부상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나는 이름의 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누비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얻은 기쁨을 기뻐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한 후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의 역겨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옷을 찢고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획의 끔찍한 성격을 말했고, 이 사건에서 그녀를 돕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발견했고,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그 문제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제들을 심문하고 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며, 그들을 멸망시킨 이데도 그 여자에게 그토록 해를 끼쳤던 모든 일을 꾸며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사랑의 열정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이 입은 피해.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했던 대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의 관계로 돌아가겠습니다.나는 이름의 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누비스라는 이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행한 일로 얻은 기쁨을 기뻐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한 후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의 역겨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옷을 찢고 남편에게 이 사악한 계획의 끔찍한 성격을 말했고, 이 사건에서 그녀를 돕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황제에게 발견했고,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그 문제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제들을 심문하고 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며, 그들을 멸망시킨 이데도 그 여자에게 그토록 해를 끼쳤던 모든 일을 꾸며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조각상을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문두스를 추방했을 뿐 그 이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사랑의 열정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시스 신전과 관련된 상황과 그녀의 사제들이 입은 피해. 이제 나는 이전에 여러분에게 말했던 대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의 관계로 돌아가겠습니다.

 

5. 어떤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율법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고 그 때문에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자기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악한 사람입니다. 당시 그는 로마에 살면서 모세 율법의 지혜로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과 완전히 같은 성격을 지닌 다른 세 사람을 자신의 파트너로 확보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교를 받아들인 매우 위엄 있는 여인 풀비아를 설득하여 보라색과 금색을 예루살렘 성전에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얻었을 때 그들은 그것들을 자신들의 용도로 사용하고 그 돈을 스스로 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 그것을 그녀에게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풀비아의 남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티베리우스(Tiberius)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고자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그 당시 집정관은 그들 중 4천 명을 명단에 올려 사르데냐 섬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조상들의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로 군인이 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11) 그리하여 이 유대인들은 네 사람의 간악함으로 인해 도시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제 4 장

 

사마리아인들은 어떻게 소란을 일으켰고 빌라도는 그들 중 많은 사람을 멸망시켰는가? 빌라도가 어떻게 고발되었으며 비텔리우스가 유대인과 파르티아인들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했는지.

 

1. 그러나 사마리아 민족은 소란 없이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흥분시킨 사람은 거짓말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고 군중이 기뻐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고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모든 산 중에서 가장 거룩하게 여겨지는 그리심 산에 모이라고 명하고, 그들이 그리로 오면 그 곳에 놓여 있던 신성한 기물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거기 두었느니라(12) 그래서 그들은 무장하고 거기로 왔고, 그 사람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티라타바라는 마을에 머물다가 나머지 사람들을 모아서 큰 무리가 함께 산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큰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길을 장악하여 마을에 모인 사람들을 덮침으로써 그들이 올라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매 그들 중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도망하여 많은 사람이 살아 남았으니 그 중에 우두머리와 도망한 자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들이 빌라도에게 명하여 살해당했습니다.

 

2. 그러나 이 소란이 가라앉자 사마리아 원로원은 집정관이었으며 지금은 시리아 총독인 비텔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빌라도가 죽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라도의 폭력을 피하려고 티라타바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텔리우스는 유대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기 친구 마르켈루스를 보냈고, 빌라도에게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서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 답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에서 10년을 머물다가 서둘러 로마로 갔는데, 이는 비텔리우스의 명령에 순종하여 감히 반대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티베리우스는 죽고 말았습니다.

 

3.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유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이라고 불리는 축제 기간이었습니다. 비텔리우스는 그곳에서 큰 환대를 받았고, 매매된 과일에 대한 모든 세금에서 예루살렘 주민을 해방시켰으며, 그들에게 대제사장의 예복과 모든 장신구를 관리하고 그것들을 왕궁 아래 두도록 허락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을 관리하는 권한은 이전에 그들이 가졌던 권한이었으나 이때 그들은 성채라고 불리는 안토니아 망대에 안치되어 있었고 다음과 같은 경우에 [최고] 중 하나가 있었습니다. Hyrcanus라는 이름의 사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 근처에 망대를 건축하고 그 일을 한 후에는 대개 그 안에 거하며 이 예복을 가지고 다녔으니 이는 그 사람만이 옷을 입는 것이 옳으니 이는 갈 때에 그것을 거기 보관하게 하였음이더라 도시로 내려가서 그의 평상복을 가지고 갔다. 그의 아들들과 그 이후의 아들들도 똑같은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아주 편리한 위치에 있던 이 탑을 장엄하게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토니우스의 친구였기 때문에 그 곳을 안토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의복이 거기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이 보관하는 동안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혁신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같은 장소에 보관했습니다. 헤롯이 행한 일과 같은 일을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행하였고,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로마인들이 정권을 잡을 때에 이 대제사장의 예복을 취하여 돌방에 넣어두었고 제사장들과 성전을 지키는 자들 곧 총독의 인을 받아 돌방에 두니라 경비원은 매일 그곳에서 등불을 켜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제 7일 전 (13) 친위대장이 그것을 그들에게 건네준 후에 대제사장이 그것을 정결케 한 뒤 전에 두었던 그 방에 다시 두었으니 이는 바로 다음 날이니라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이것이 세 번의 연례 절기와 금식일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우리 조상들의 시대처럼 그 옷들을 우리 자신의 권한에 맡기고 경비대장에게 그것들이 어디에 놓였는지, 언제 사용될 것인지 묻느라 애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라를 그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친절한 행동으로 이것을 행했습니다. 게다가 가야바라고도 불리는 요셉의 대제사장직도 박탈하고, 전 대제사장 아나누스의 아들 요나단을 그의 뒤를 잇게 세웠습니다. 그 후 그는 안디옥으로 다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4. 게다가 티베리우스는 비텔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와 우호 동맹을 맺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적이었을 때 아르메니아를 빼앗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도록 겁을 주었고 인질, 특히 그의 아들 아르타바누스를 주는 것 외에는 그를 신뢰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비텔리우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 막대한 돈을 제안함으로써 이베리아 왕과 알바니아 왕 모두에게 지체하지 말고 아르타바누스와 싸우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스키타이인들에게 그들의 나라를 통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카스피해의 문을 열어 그들을 아르타바누스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는 다시 파르티아인들에게서 빼앗겼고, 파르티스 땅은 전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의 부하들의 우두머리들은 살해당했고, 그들 사이에는 모든 것이 무질서했습니다. 왕의 아들도 이 전쟁에 함께 쓰러졌습니다. 그의 군대는 수만 명이다. 비텔리우스는 또한 아르타바누스의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보냈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뇌물로 인해 아르타바누스가 살해당할 뻔했습니다. 그리고 아르타바누스는 자기를 해하려고 계획된 음모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요 인물들과 그 수효가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에게 진실로 충성하였고 또 이미 타락하였으나 그에게 고백하는 친절은 속이고 시험을 당한 후에 그의 원수들에게 넘어갈 뻔하였으므로 그는 윗지방으로 도망하였느니라 그 후 그는 다해와 성에서 대군을 일으켜 적들과 싸워 공국을 유지했다.

 

5. 티베리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아르타바누스와 우호적인 동맹을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초대에 대해 그는 친절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르타바누스와 비텔리우스는 유프라테스로 갔고, 강 위에 다리가 놓였을 때 그들은 각자 경비병을 데리고 와서 유프라테스 한가운데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다리. 그리고 그들이 평화 조약을 맺자 헤롯은 통로 한가운데에 풍성한 천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후에 아르타바누스도 많은 선물과 함께 그의 아들 다리우스를 볼모로 보냈는데 그 중에 키가 칠 규빗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태생이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엘르아살이라 불리더라. 거인 한명. 그 후 비텔리우스는 안디옥으로, 아르타바누스는 바빌론으로 갔다. 그러나 헤롯(분봉왕)은 그들이 인질을 잡았다는 첫 번째 정보를 카이사르에게 알리고 싶어 편지와 함께 우편물을 보냈는데, 거기에 그는 모든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설명했고 집정관 비텔리우스가 그에게 알릴 만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의 편지가 발송되었을 때, 카이사르는 헤롯이 이전에 그에게 그 편지에 대해 설명했기 때문에 그가 이미 그 일을 알고 있다고 그에게 알렸습니다. 비텔리우스는 그 일로 인해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보다 더 큰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카이우스가 정부를 장악한 이후에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때까지 이 기회에 은밀한 분노를 계속했습니다.

 

6. 이때가 바로 헤롯의 형제 빌립이 세상을 떠난 때니 곧 디베료 왕 제이십년이라(14) 그는 Trachonitis와 Gaulanitis와 Bataneans 국가의 분봉왕을 지낸 후 37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활과 통치에 있어서 절제되고 조용한 사람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나라에서 끊임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몇몇 선택된 친구들과 함께 발전하곤 했습니다. 그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 재판관도 그의 진보를 따라갔다. 누구든지 그의 도움을 구하는 자를 만나거든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가 있는 곳에 즉시 재판관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아서 그의 불평을 들으니라 형벌을 받고, 부당하게 기소된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Julias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자신을 위해 세워 놓은 기념비로 옮겨졌을 때, 그는 장엄하게 장사되었습니다. 그의 공국인 티베리우스는 (그 뒤에 아들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시리아 속주에 추가했지만, 그곳에서 발생한 조공을 모아서 그의 사분국에 쌓아 두도록 명령했습니다.

 

제 5 장

 

분봉왕 헤롯은 아라비아 왕 아레타와 전쟁을 벌이고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에게 패배합니다. 비텔리우스가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아그리파와 헤롯 대왕의 후대에 관한 일부 이야기와 함께.

 

1. 이때쯤에 아라비아 페트레스 왕 아레다와 헤롯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툼을 벌였습니다. 분봉왕 헤롯이 아레다의 딸과 결혼하여 오랫동안 그와 함께 살았는데, 그러나 그는 로마에 있을 때 헤롯과 함께 머물렀다.(15) 누가 그의 형제였으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헤롯은 대제사장 시레오의 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의 마지막 아내인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헤로디아는 그들의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자 아그리파 대왕의 누이였습니다. 이 남자는 감히 그녀에게 그들 사이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녀가 그 주소를 인정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고 그가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오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결혼의 조항 중 하나는 그가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티푸스는 이 계약을 맺고 로마로 항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그가 헤로디아와 맺은 계약을 알고, 그가 그 모든 계획을 알기 전에 그것을 알고서, 그에게 사람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그녀를 아레타스와 헤롯의 영토 경계에 있는 마케루스에게 그녀의 의도를 알리지 않은 채. 그래서 헤롯은 자기 아내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줄 알고 그녀를 그곳으로 보냈다. 이제 그녀는 오래 전에 마케루스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마케루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아레타스 군대의 장군에 의해 그녀를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그녀는 여러 장군들의 지휘 하에 곧 아라비아로 들어왔고, 그들은 그녀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연속적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여자는 곧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헤롯의 의도를 알렸다. 그래서 아레다는 이것을 자기와 헤롯 사이에 처음으로 적개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헤롯은 가말리 지방에서 그들의 경계를 두고 그와 약간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쪽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전쟁을 준비하고 그들 대신에 장군들을 보내어 싸우게 했습니다. 그들이 전투에 참가한 후, 헤롯의 모든 군대는 빌립의 분봉 왕조에 속했지만 아레다의 군대에 합류한 도망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전멸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이 사건에 대해 티베리우스에게 썼는데, 그는 매우 화를 냈습니다. 아레타스가 행한 시도는 비텔리우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와 전쟁을 벌이고 그를 살려서 결박하여 그에게 데려오거나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보내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티베리우스가 시리아 대통령에게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2. 어떤 유대인들은 헤롯의 군대를 멸한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하니 이는 세례라 하는 요한에게 행한 일에 대한 형벌이니 이는 헤롯이 의로운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유대인들에게 명하여 서로 의로움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덕을 행하고 세례를 받으라 하셨으니 이는 그 사람이 [물로] 씻는 것을 기쁘게 여기려니와 만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죄를 [또는 사면]하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몸을 정결하게 하려 함이라 아직도 그 영혼이 의로 말미암아 미리 철저히 정결케 되었다고 생각하는도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의 주위에 모여들매 헤롯은 요한이 백성에게 끼치는 큰 영향력이 자기의 세력과 뜻에 끼어들어 그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느니라 반역(그들은 그가 조언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해악을 막고 자신을 어려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아끼는 것입니다. 너무 늦었을 때 회개하십시오. 따라서 그는 헤롯의 의심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내가 앞서 언급한 마케루스 성으로 죄수로 보내져 그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이 군대의 멸망이 헤롯에 대한 형벌이자 그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3. 그래서 비텔리우스는 무장한 두 군단을 데리고 아레타스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경갑부대와 기병들을 데리고 로마제국 아래 있던 왕국들에서 끌려 나와 서둘러 페트라로 가서 프톨레마이스로 왔다. 그러나 그가 매우 분주하게 행군하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유대를 통과하고 있을 때 주요 인사들이 그를 만나서 자기들의 땅을 통과하여 행군하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법은 그들이 그 나라로 가져온 그 형상들을 간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형상들은 그들의 깃발에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말에 설득되었고, 이 문제에 관해 이전에 취했던 결심을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군대에게 함께 행진하라고 명령했다. 그 자신은 분봉왕 헤롯과 그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고대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거기 이르러 많은 유대인의 대접을 받고 거기에 사흘 동안 머물더니 그 기간에 요나단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자기 형제 데오빌로에게 주었느니라. 그러나 넷째 날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그에게 왔을 때 그는 군중에게 가이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군대를 소환하여 그들 모두를 집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겨울 숙소로 보내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국이 가이우스에게 이양되자 그는 이전에 가졌던 이 전쟁을 수행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레타스는 비텔리우스가 자신과 싸우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점쟁이들과 상의하면서 비텔리우스의 이 군대가 페트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통치자 중 한 사람, 전쟁 명령을 내린 사람, 상대방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행진하는 사람, 아니면 이 군대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Vitellius는 진정으로 Antioch로 은퇴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아그리파는 티베리우스가 죽기 1년 전에 황제가 허락한다면 황제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로마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이제 헤롯과 그의 가족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묘사할 마음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 역사에 적합하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 이것은 섭리의 개입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행위 외에 인류가 마음을 두는 다른 어떤 힘보다 유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년 안에 헤롯의 자손 중 많은 수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하였기 때문입니다. (16) 이것을 인류의 교육에 적용하면 그들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그리파의 역사를 보여줄 것입니다. 인간은 그를 아는 사람들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어 큰 권력과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전에 그들에 대해 몇 가지 말했지만 이제 그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4. 헤롯 대왕은 히르카누스의 손녀인 마리암네에게서 두 딸을 낳았습니다. 한 사람은 살람프시오(Salampsio)였는데, 그녀의 사촌인 파사엘로(Phasaelus)와 결혼했는데, 그 자신은 헤롯의 형제인 파사엘로의 아들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가 결혼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키프로스였는데, 그는 헤롯의 누이인 살로메의 아들이자 사촌인 안티파테르와도 결혼했습니다. Phasaelus는 Salampsio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Antipater, Herod, Alexander와 두 딸 Alexandra와 Cypros; 마지막으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아그리파가 결혼했습니다. 키프로스의 티미우스는 알렉산드라와 결혼했다. 그는 저명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그리파는 키프로스로부터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딸들의 이름은 베르니케(Bernice), 마리아룬(Mariarune), 드루시우스(Drusius)였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의 이름은 아그리파와 드루수스였는데, 드루수스는 사춘기가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그립바는 그의 다른 형제들인 헤롯과 아리스토불로와 함께 자랐으니 이들도 헤롯 대왕의 베르니게의 아들의 아들들이었더라. 그러나 버니게는 코스토바루스와 헤롯의 누이인 살로메의 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리스토불루스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 알렉산더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이 어린아이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춘기가 되자, 아그립바의 형제 헤롯은 헤롯 왕의 딸 올림피아와 헤롯 왕의 형제 요셉의 아들 요셉의 딸인 마리암네와 결혼하였다. 왕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아들 아리스토불루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Agrippa의 셋째 형제인 Aristobulus는 Emesa의 왕 Sampsigeramus의 딸인 Jotape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귀머거리 딸이 있었는데, 그 이름도 요타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까지 남자 계보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누이인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빌립)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네에게서 태어나 살로메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그 후에 헤로디아가 그를 맡아 우리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고 그 남편 생전에 이혼하고 그 남편의 동생 헤롯(안티바)과 결혼하여 갈릴리 분봉왕이 되었으나 그러나 그녀의 딸 살로메는 헤롯의 아들이자 드라코니티스의 분봉왕인 빌립과 결혼했습니다. 그가 자식 없이 죽자 헤롯의 아들이자 아그리파의 형제인 아리스토불로가 그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들에게는 헤롯, 아그리파, 아리스토불루스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Phasaelus와 Salampsio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키프로스의 안티파트로스의 딸은 키프로스였고, 알렉사스의 아들인 알렉사스 셀시아스는 그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키프로스(Cypros)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안티바터의 형제인 헤롯과 알렉산더는 자식이 없이 죽고 헤롯왕의 아들 알렉산더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했고 카파도키아 왕 아르켈라오의 딸에게서 알렉산더와 티그라네스라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Tigranes)는 로마에서 고발되어 자식 없이 죽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형제 티그라네스와 같은 이름의 아들을 갖고 있었는데,네로에 의해 아르메니아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Jotape와 결혼한 아들 Alexander를 낳았습니다.(17) 콤마게나 왕 안티오코스의 딸.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를 킬리키아 섬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알렉산더의 후손들은 태어나자마자 유대교를 버리고 헬라인의 종교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의 나머지 딸들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거한 이 헤롯의 후손들은 아그리파 대왕이 왕국을 차지한 것과 동시에 존재했으므로 이제 나는 그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제 아그립바에게 닥친 몇 가지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최고의 위엄과 권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려드립니다.

 

제 6 장

 

아그리파 왕이 로마와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로 항해한 일에 관하여;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자유인에게 고발을 당하고 결박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티베리오가 죽은 후 가이오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되었고 빌립의 분봉정의 왕이 되었습니다.

 

1. 헤롯왕이 죽기 조금 전, 아그리파는 로마에 거주하며 대체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와 자라며 대화를 나누었으며, 드루수스 대왕의 아내 안토니아와도 친분을 맺었다. Bernice는 큰 존경심을 갖고 아들의 발전을 매우 원했습니다. 아그리파는 천성적으로 관대하고 선물을 아끼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그의 마음의 이런 성향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그런 사치에 대한 어머니의 노여움을 피할 수 있도록 하려 함이었더라. 그러나 버니케가 죽자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에 막대한 돈을 썼고, 그가 준 과도한 선물과 특히 카이사르의 자유민들 사이에서 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난에 빠졌고 더 이상 로마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또한 죽은 아들의 친구들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보면 아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슬픔이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런 이유로 바울이 로마를 떠나 배 타고 유대로 갔으나 형편이 좋지 아니하고 전에 있던 돈도 잃었고 그 많은 채권자들에게 갚을 돈도 없어서 낙심한지라 , 그리고 그에게 탈출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부끄러워서 이두매에 있는 말라타에 있는 어떤 망대로 물러가서 자살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키프로스는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가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 분봉왕 헤롯의 아내가 된 그의 누이 헤로디아에게 편지를 보내 아그리파의 현재 계획과 그를 그렇게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그의 친족으로서 그녀에게 그에게 그녀의 도움을 주고, 남편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만큼의 재산은 없었지만, 남편의 문제를 가능한 한 모두 덜어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그에게 티베리아를 그의 거주지로 할당하고 그의 생계를 위하여 돈의 얼마를 정하여 그에게 명예를 주어 그 성읍의 행정관을 삼았느니라. 그러나 헤롯은 그 지원조차도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오랫동안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두로에서 잔치를 벌이고 잔을 마시며 서로 욕을 퍼붓는 것처럼 아그립바는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헤롯은 가난과 빚 때문에 그를 때렸습니다. 그에게 음식. 그래서 그는 집정관이었던 플라쿠스(Flaccus)에게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이전에 로마에서 그와 아주 좋은 친구였으며 지금은 시리아의 대통령이었습니다.

 

3. 이에 Flaccus는 그를 친절하게 받아들였고, 그는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 Flaccus는 실제로 Agrippa의 형제이지만 그와 의견이 달랐던 Aristobulus도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은 두 사람 모두에 대한 Flaccus의 우정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로부터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아그리파에 대한 그의 악의를 누그러뜨리지 않았고 마침내 그를 플라쿠스와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메섹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관해 시돈 사람들과 의견 차이가 있었고, 플라쿠스가 그들 사이의 이유를 막 듣고자 했을 때 그들은 아그리파가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편이 되기를 바랐고 그 호의에 대해 그에게 많은 돈을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다마스커스 사람들을 돕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이제 아리스토불루스는 그에게 돈을 주겠다는 이 약속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그에 대해 그를 플라쿠스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그것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 그는 많은 친구들 중에서 아그리파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극도로 필요한 상황에 처해 프톨레마이스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계를 어디서 구할지 몰랐기 때문에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부족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유인인 마르시아스에게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 그래서 Marsyas는 Agrippa의 어머니 Bernice의 자유인이자 그녀의 유언장에 따라 Antonia에게 물려받은 자유인 Peter에게 Agrippa 자신의 유대와 안전을 많이 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그리파가 일정 금액의 돈을 속였다고 비난했고, 그래서 마르시아스가 2만 다락 드라크마의 채권을 만들었을 때 2,500드라크마를 받도록 강요했습니다.(18) 그가 원했던 것보다 적었지만, 다른 사람이 허락한 것은 그가 그것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을 받자 아그리파는 안테돈으로 와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히스의 총독인 헤레니우스 카피토(Herennius Capito)는 로마에 있는 동안 카이사르의 국고에 빚진 은 삼십만 드라크마를 그에게 요구하기 위해 일단의 군인들을 보내어 그를 머물도록 강요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이 명령한 대로 행하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밤이되자 그는 밧줄을 끊고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항해하여 그곳에서 알라바크 알렉산더를 찾았습니다.(19) 그에게 이십만 드라크마를 빌려주라.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에게 빌려주지 않을 것이지만 키프로스에게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그녀의 미덕의 다른 경우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들에게 다섯 달란트를 지불했고, 그 금액의 나머지 부분을 디케아르키아(Puteoli)에서 그들에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그리파가 곧 그 돈을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키프로스는 자기 남편을 풀어 주고 이탈리아로 계속 항해하도록 내보냈으며, 그 동안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유대로 떠났습니다.

 

4. 그리고 이제 아그리파는 푸테올리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당시 가프레아에 살고 있던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그를 시중들고 방문하기 위해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아무 어려움도 겪지 않고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호의적인 방법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카프레아에로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도착했을 때, 그는 편지에서 약속한 대로 그를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헤레니우스 카피토(Herennius Capito)가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보내 아그리파가 30만 드라크마를 빌렸으나 정해진 시간에 갚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요구되자 그는 도망자처럼 그의 통치하에 있는 곳에서 도망쳐 그에게서 돈을 빼앗을 힘을 잃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편지를 읽고 몹시 괴로워하며 빚을 갚을 때까지 아그리파를 그의 앞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는 카이사르의 분노에도 결코 꺾이지 않고 아그리파의 어머니 안토니아에게 간청했다. 게르마니쿠스와 나중에 카이사르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우정을 잃지 않도록 그에게 30만 드라크마를 빌려주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베르니케에 대한 기억을 생각하고(그 두 여자는 서로 매우 친숙했기 때문에) 그와 클라우디우스가 함께 받은 교육을 생각해서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이 빚을 갚았을 때 그와 티베리우스의 우정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에게 자신의 손자를 추천했습니다.(20) 그리고 자신이 해외로 나갈 때 항상 동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안토니아가 아그리파를 친절하게 맞이하자 그는 그에게 그녀의 손자인 가이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카이우스는 그의 아버지를 낳은 호의로 인해 매우 높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자유인 탈루스가 있었는데, 그는 그에게서 백만 드라크마를 빌려 안토니아에게 빚진 것을 갚았습니다. 그리고 가이우스에게 궁정 비용으로 남은 돈을 보냄으로써 그와 함께 큰 권위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5. 아그리파와 가이우스의 우정이 두터워지자, 한때 함께 병거를 탔던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티베리우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아그리파는 티베리우스가 곧 무대에서 내려와 모든 면에서 더 합당한 가이우스에게 정부를 맡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그립바의 자유인으로서 병거를 모는 유두고가 이 말을 듣고 그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그리파가 자기 옷을 훔쳤다고 그를 비난했을 때(확실히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붙잡혀 그 도시의 총독인 피소 앞에 끌려갔을 때 그 사람은 왜 도망쳤느냐고 묻자 카이사르에게 그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할 말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를 결박하여 카프레아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평소의 관습에 따라 그를 묶어두었고, 만약 그런 왕이나 폭군이 있었다면 일을 지연시켰습니다. 그는 대사를 빨리 받아들이지 않았고, 죽지 않는 한 이전에 파견되었던 지방의 총독이나 검찰관에게 후계자가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죄수의 원인을 듣는 데 너무 태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경우에 자신이 지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친구들로부터 물었을 때 그는 대사의 듣기를 연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빨리 해고되면 다른 대사가 임명되어 그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공개적인 수용과 해임에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한 번 그들의 정부에 파견된 총독들이 그들 아래에 있는 신하들을 고려하여 [오랜 동안 그곳에 머물도록] 허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지사는 당연히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잠시 머물도록 한 자들은 언제 드러날지 불확실하므로 더욱 급히 사람들을 피하려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부가 오랫동안 그들에게 계속된다면; 그들은 마침내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얻은 것처럼 전리품에 만족하고 마침내 약탈에 덜 예리해졌습니다. 그러나 만약 후계자들이 빨리 파견된다면, 그들에게 먹이로 노출된 가난한 신민들은 새로운 신민들을 견딜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전임자들이 그들 자신을 채웠던 것과 같은 시간을 그들에게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에 대해 점점 더 무관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압제를 위한] 시간을 갖기 전에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예를 드셨습니다. 어떤 상처를 입은 사람의 아픈 부위에 파리 떼가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그 파리를 쫓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위해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대답하여 그에게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현재의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제를 막는 데; "당신이 이 파리들을 쫓아낸다면 당신은 나에게 더 큰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미 내 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를 에워싸지도 않고 전보다 나를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태만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미 피곤해져서 오는 새로운 통치자들은 나의 파멸이 될 것입니다. 많은 억압에 시달려 이 파리들처럼 더욱 괴로움을 겪을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득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 외에도 추가적인 자극을 받아 그들이 받는 즐거움을 갑자기 박탈당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나는 티베리우스의 성급한 성격에 대해 내가 말한 것에 대한 추가 증거로서 그의 실천 자체에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22년 동안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두 명의 총독인 그라투스와 정부의 후계자인 빌라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파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하지 않았고, 그의 나머지 신민들에 대해서도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또한 죄수의 원인을 듣는 중에도 그렇게 지체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들을 즉시 죽임으로써 그들의 현재의 비참함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반면, 저 악하고 비참한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호의;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현재의 재난으로 괴로움을 받아 더 큰 불행을 받게 하려 함이라.”그 사악한 비참한 사람들은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현재의 재난으로 고난을 받아 더 큰 불행을 받게 하려 함이라.”그 사악한 비참한 사람들은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현재의 재난으로 고난을 받아 더 큰 불행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이 때문에 유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에서 로마에서 약 100펄롱 떨어진 투스쿨라눔으로 왔습니다. 그러자 아그리파는 안토니아에게 유두고에 대한 청문회를 열어 그가 그를 고발한 문제가 어떻게 될지 입증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안토니아는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의 아내였던 그와의 관계의 위엄과 탁월한 순결로 인해 모든 면에서 티베리우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21) 그녀는 아직 젊은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과부 생활을 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그녀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결혼을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비난받지 않고 자신의 명성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의 친구였던 세야누스가 그를 상대로 매우 위험한 음모를 꾸몄을 때 티베리우스에게 가장 큰 은인이었으며, 와이어는 군대 장군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과 많은 자유인들이 그와 합류했고, 군인들은 부패했고 음모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 Sejanus는 확실히 그의 요점을 얻었습니다. Antonia의 대담함이 Sejanus의 악의보다 더 현명하게 수행되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녀가 티베리우스에 대한 그의 계획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그에게 전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썼고, 그녀의 하인 중 가장 충실한 팔라스에게 편지를 주고 그를 카프레레의 티베리우스에게 보냈습니다. 세야누스(Sejanus)와 그의 동맹자들; 그래서 이전에 그녀를 매우 존경했던 티베리우스는 이제 훨씬 더 큰 존경심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모든 일에서 그녀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안토니아에게 유두고를 심문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유두고가 아그리파에 대하여 한 말을 거짓으로 고발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이미 그에게 행한 일로 충분한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 그 비난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그리파는 자신의 자유인을 처벌하려는 욕구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처벌을 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안토니아가 아그리파에게 이 사실을 말했을 때 그는 그 문제를 조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아는 아그리파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이 은혜를 간청하자 다음과 같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티베리우스가 한 번 그의 세단에 편안히 누워서 운반되었고, 그녀의 손자 가이우스와 아그리파가 저녁 식사 후에 그 앞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단 옆으로 걸어가면서 그에게 유두고를 불러서 진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그는 "오 안토니아여! 내가 하려는 일을 하게 된 것은 내 자신의 성향이 아니라 당신의 기도에 의해 강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신들이 나의 증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세야누스의 뒤를 이은 마크로에게 유두고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그를 데려왔다. 그런 다음 티베리우스는 그에게 자유를 준 사람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내 주여! 이 가이오와 아그리파가 한때 마차를 타고 있었는데 내가 그들의 발 앞에 앉았을 때 아그리파가 가이오에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이 늙은이가 죽고 당신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의 통치자로 지명할 때가 오면, 그의 손자인 이 티베리우스는 방해가 되지 않고 당신에 의해 제거될 것이고, 그 땅은 행복할 것이고 나도 행복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 티베리우스는 이 말이 진정한 아그리파의 말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그리고 아그리파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에게 그의 손자이자 드루수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을 때, 아그리파는 그에게 그러한 경의를 표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의 모든 존중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카이우스에게; 그는 매크로에게 "이 사람을 묶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매크로는 자신에게 속박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고 아그리파에게 그러한 일이 행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를 중단하고 자신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경기장을 돌았을 때 아그리파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입니다. 마크로, 이 사람은 제가 묶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이것 중에 무엇을 묶어야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아그리파"라고 말했습니다. 아그리파는 자기가 함께 자란 아들과 자기가 교육한 티베리우스를 생각하여 스스로 간구하기로 작정하고 그러나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사람을 보라색 옷을 입은 채로 묶어서 이리저리 끌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날씨도 매우 더웠고, 식사할 포도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목이 매우 말랐습니다. 그는 또한 일종의 괴로움에 빠졌고 그를 극악하게 대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타우마스투스라는 이름의 가이우스의 노예 중 한 명이 그릇에 물을 담고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마시기를 원했습니다. 종이 그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니 그가 마음껏 마시고 이르되 소년아 네가 나를 섬기는 이 일은 네게 유익이 되리라 만일 내가 이 얽매인 것에서 벗어나면 속히 풀려나리라 나를 섬기기를 원하지 않았던 가이우스의 자유를 지금 나는 이전의 상태와 위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속박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에게 약속한 대로 그 사람을 속이지 않고, 그가 지금 행한 일을 보상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아그리파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타우마스투스를 특별히 돌보았고, 그를 가이우스에게서 풀어 주고, 그를 자기 재산의 관리인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를 그의 아들 아그립바와 그의 딸 베르니게에게 맡겨 그들에게 동일한 직분으로 섬기게 하였느니라. 그 사람도 그 영예로운 자리에서 늙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얼마 후에 일어났습니다."아그립바가 스스로 양육한 아들과 교육받은 디베료를 생각하여 그를 위하여 간구하려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그들이 그를 이리로 끌고 갔음이라" 날씨도 매우 더웠고, 식사할 포도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몹시 목이 말랐고, 그 사람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가이우스의 종 중 하나인 타우마스투스가 그릇에 물을 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마시기를 청하니 그 종이 그에게 마실 물을 주어서 마시며 이르되 오 소년이여 ! 당신이 나에게 봉사하는 이 봉사는 당신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일단 이 속박에서 벗어나면, 나는 곧 당신에게 나를 섬기기를 원하지 않았던 가이우스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전 상태와 위엄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또 약속대로 그를 속이지 아니하고 지금 행한 일을 보상하였으니 그 후에 아그립바가 왕위에 오매 다우마스토스를 특별히 배려하여 가이우스에게서 그를 풀어 주고 그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죽자 그를 그의 아들 아그립바와 그의 딸 베르니게에게 맡겨 그 직분을 맡게 하였고 그 사람도 그 직분을 맡아 늙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얼마 후에 일어났습니다."아그립바가 스스로 양육한 아들과 교육받은 디베료를 생각하여 그를 위하여 간구하려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그들이 그를 이리로 끌고 갔음이라" 날씨도 매우 더웠고, 식사할 포도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몹시 목이 말랐고, 그 사람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가이우스의 종 중 하나인 타우마스투스가 그릇에 물을 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마시기를 청하니 그 종이 그에게 마실 물을 주어서 마시며 이르되 오 소년이여 ! 당신이 나에게 봉사하는 이 봉사는 당신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일단 이 속박에서 벗어나면, 나는 곧 당신에게 나를 섬기기를 원하지 않았던 가이우스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전 상태와 위엄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또 약속대로 그를 속이지 아니하고 지금 행한 일을 보상하였으니 그 후에 아그립바가 왕위에 오매 다우마스토스를 특별히 배려하여 가이우스에게서 그를 풀어 주고 그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죽자 그를 그의 아들 아그립바와 그의 딸 베르니게에게 맡겨 그 직분을 맡게 하였고 그 사람도 그 직분을 맡아 늙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얼마 후에 일어났습니다.

 

7. 아그립바는 결박된 채 왕궁 앞에 서서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슬픔 때문에 한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습니다. 그들도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아그리파가 기댄 나무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았는데(로마인들은 이 새를 부보라고 부른다) 결박된 자 중 하나인 한 민족의 독일인이 그를 보고 군인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보라색은; 그 사람의 이름은 아그립바요 또 그 족속으로는 유대인이요 그 족속의 큰 자라 하는 말을 듣고 자기를 묶인 군인에게 허락을 구하여(22) 그에게 가까이 와서 그와 이야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나라에 관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그에게 물어볼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유를 얻었을 때 그 옆에 서서 통역을 통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네 상태의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네게 매우 괴로운 일이요, 네게 여러 가지 매우 큰 일을 가져오느니라."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이 비참함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그리고 신의 섭리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마련해 줄 것인지 내가 예언하더라도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속박을 준 이 곳의 신들) 내가 당신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은 호의나 뇌물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런 예언 때문에 이유 없이 당신을 즐겁게 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실패하게 되고 마침내는 슬픔을 느끼게 되며 당사자가 그런 일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것보다 더 진지하게 쓰라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도 당신에게 그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들의 예언에 따르면, 당신은 이 속박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곧 그 속박에서 벗어나 최고의 위엄과 권력을 누리게 될 것이며, 지금 당신의 곤고함을 불쌍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행운; 그리고 당신은 죽을 때까지 행복할 것이며, 당신의 행복은 당신이 갖게 될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새를 다시 보게 되면 당신은 닷새만 더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사건은 당신에게 표징이 되도록 이 새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에 관해 내가 미리 알고 있는 것을 너에게 숨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너에게 어떤 행복이 닥칠지 미리 알면 현재의 불행을 고려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이 실제로 당신에게 닥치게 되면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잊지 말고 나를 구원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독일인이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아그리파를 비웃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토니아는 아그리파의 불행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러나 그를 대신하여 티베리우스와 대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실제로 성공의 희망에 관해서는 실제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지키는 사람은 온순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들을 감독하며 그와 함께 식사하기로 되어 있는 백부장도 같은 성품이어야 하며, 그 사람은 매일 목욕하러 나갈 수 있어야 하고, 그의 자유인들은 같은 성품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실라스가 그에게 들어왔고, 그의 자유인 마르시아스와 스테쿠스가 그에게 그런 종류의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그를 좋아했고 정말로 잘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옷을 파는 척하면서 그에게 옷을 가져왔습니다. 밤이 되자 그들은 그것들을 그의 밑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매크로가 미리 명령한 대로 그들을 도왔습니다.그리고 이것이 6개월 동안 아그리파의 상태였으며 이번 경우에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8.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인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에 걸렸습니다. 처음에 그의 디스템퍼는 아주 온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병이 점점 심해지자 그는 회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그가 가장 존경했던 자유인이었던 에우오두스에게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23) 그에게. 왜냐하면 그는 죽기 전에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현재 살아있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외아들인 드루수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드루수스의 아들 티베리우스는 아직 살아 있었는데, 그의 추가 이름은 게멜루스였습니다. 또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가이우스도 살아 있었습니다.(24) 그의 형제 [Drusus]의. 이제 그는 장성하여 교양 교육을 받고 그로 인해 많이 향상되었으며,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뛰어난 인품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결한 행동의 확고함, 군중과의 대화의 용이함과 유쾌함, 그리고 그의 위엄 때문에 마치 그들이 동등하다는 것처럼 그들 모두와 친밀감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으로 그는 국민과 원로원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에게 종속된 모든 나라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에게 왔을 때 그분의 은혜로운 영접에 감동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와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보고에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모든 사람이 애도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아첨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마치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그가 사람들과 나누는 쉬운 대화는 모든 사람 중에서 그의 아들에게 크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인들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그가 정부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죽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9.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유오두스에게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을 때, 그 아이들 중 누가 정부에 와야 하는지 분명한 신호를 보여달라고 그의 나라 신들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아들의 아들에게 맡기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여전히 자기 자신의 의견과 성향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관해 미리 보여주실 것을 더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다음 날 먼저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정부가 맡겨진다는 징조로 삼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결심한 그는 손자의 가정교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황제가 되도록 허락하실 거라 생각하고 아침 일찍 아이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지정과 반대되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이렇게 일을 꾸미고 있는 동안, 하루가 다 되자마자 에우오도스에게 거기에 준비되어 있는 아이를 불러오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가서 문 앞에 있는 가이우스를 만났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아직 오지 않고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uodus는 그의 주인이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이우스에게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부르신다"고 말한 다음 그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를 보자마자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정부를 수여하는 능력이 얼마나 그에게서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확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계획했던 것을 확립할 권한을 빼앗기고, 그의 손자 티베리우스가 죽음으로 인해 로마제국을 잃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도 잃게 될 것이라고 크게 한탄했습니다. 친척이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의 친족이 그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 자신보다 더 강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에게 두려움과 매질을 당할 것인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제국 옆에 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자신을 보호하고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부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사무국장도요. 이제 티베리우스는 점성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25) 그리고 탄생의 계산, 그리고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예언이 사실로 입증된 것을 존중하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그는 갈바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언젠가 로마제국의 위엄을 갖게 될 사람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티베리우스는 다른 로마 황제들보다 온갖 종류의 점쟁이들에게 더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진실을 말해주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지금 자기에게 닥친 이 사고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자기가 미리 내다본 손자의 멸망을 몹시 슬퍼하며, 자기가 이런 점술 방법을 썼어야 했다고 스스로 불평했습니다. 미리, 미래에 대한 지식으로 슬픔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이 그의 능력에 있는 동안;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불행을 미리 알고 괴로워했고, 그 괴로움 속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정부가 예기치 않게 혁명을 일으키자 혼란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그리고 자신의 성향에 반하여 가이우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티베리우스는 너보다 나와 더 가까운 친척이지만 나는 나 자신의 결정과 신들의 음모에 따라 로마 제국을 당신의 손에 넘겨줄 것입니다. 당신을 그토록 높은 위엄으로, 또는 당신과 티베리우스와의 관계를 높이십시오. 그러나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신들과 함께 당신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티베리우스가 당신과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그를 돌볼 것입니다. 게다가 티베리우스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제국과 당신의 국가 모두에서 당신의 안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불행에 대한 전조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일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들은 인간에게 다르게 행동하도록 지시하는 법칙에 어긋나는 부당하게 행해진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티베리우스가 한 연설이었는데, 가이우스가 그렇게 약속했지만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부에 정착했을 때, 그는 다른 티베리우스가 예언한 대로 이 티베리우스를 제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비밀 음모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10.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이때 가이우스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을 때, 그는 22년 5개월 3일 동안 통치를 마치고 며칠 만에 죽었습니다. 이제 가이우스는 네 번째 황제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좋은 소식을 기뻐했지만 그것을 믿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많은 돈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소식이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 그들의 기쁨을 드러냈더라면 그들의 기쁨이 공개적으로 알려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해 비난을 받고 파멸되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 티베리우스는 로마 최고의 가문들에게 막대한 불행을 안겨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경우에 쉽게 격정에 불타올랐고, 분노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성미가 컸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그가 내리는 모든 형벌에 있어 맹렬했고, 가장 가벼운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을 기쁘게 들었을 때 그들의 희망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 뒤따를 것이라고 예견한 비참함을 두려워하여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그리파의 자유인 마르시아스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듣자마자 아그리파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가 목욕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히브리 방언으로 말했다.(26)은 죽었습니다." 그는 그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소식에 너무 기뻐서 "아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 소식에 대해 모든 종류의 감사와 행복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다만 나는 당신의 말이 진실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그립바를 지키도록 임명된 백부장은 마르시아가 급히 오는 것과 아그립바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의심하였다. 일이 크게 바뀌자 그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지만 그가 더 압박하자 아그리파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이 기뻐서 아그리파에게 행운이 주어져서 그를 저녁 식사로 대접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잔치를 벌이고 술잔이 돌아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티베리우스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며 성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백부장은 몹시 괴로워했는데, 이는 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죄수를 그토록 기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아그리파를 감옥에서 쫓아냈습니다. 그가 소파에 누워서 말했다, "네가 처벌도 없이 황제에 대한 거짓말로 나를 속일 생각이냐?" 그러면 네가 이 악독한 일에 대하여 네 머리 값으로 갚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아그리파를 다시 결박하라고 명령하고(이전에 그를 풀어 주었으므로) 그를 전보다 더욱 엄중히 지키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그 날 밤 아그리파는 그 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도시에는 티베리우스가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이 더 커졌고, 사람들은 이제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희생을 바쳤습니다. 그 기록은 또한 가이우스로부터 원로원으로 전달되었는데, 그 편지에는 티베리우스의 죽음과 그가 정부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있었고, 또 다른 편지는 그에게 같은 내용을 전했다. 그는 또한 아그립바를 진영에서 내보내고 그가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살던 집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제 가이우스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티베리우스의 시신을 가져와 조국의 법에 따라 성대한 장례를 치렀습니다. , 그는 바로 그날 아그리파를 해방시키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아가 그를 막은 것은 죄수에 대한 악의 때문이 아니라 카이우스의 품위를 고려하여 그가 즉시 결박한 사람을 풀어주었을 때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처럼 사람들이 믿게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그를 집으로 불러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그 후 그는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그를 필리포스 사분왕국의 왕으로 임명했습니다.그는 또한 그에게 리사니아의 사분왕국을 주었습니다.(27) 그리고 그의 쇠사슬을 같은 무게의 금 사슬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또한 마룰루스를 유대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11. 이제 가이우스 카이사르 통치 제2년에 아그리파는 그에게 집으로 항해하여 그의 정부 문제를 정리할 수 있는 허가를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정리한 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허락을 받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그들 모두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리하여 그를 본 사람들에게 그의 이전 가난함과 현재의 행복한 풍요를 비교할 때 행운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그와 함께 상황이 그토록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제 7 장

 

헤롯이 어떻게 추방되었는지.

 

1. 그러나 갈릴리와 베레스의 분봉왕 헤롯의 아내로 살고 있는 아그립바의 누이 헤로디아는 특히 그가 자기보다 더 큰 영광을 받은 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자기 오빠의 권위를 취했습니다. 남편이 그랬어요; 왜냐하면 그가 도망친 것은 빚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돌아왔고, 위엄도 있고 큰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일이 이렇게 크게 변한 것에 대해 슬퍼하고 매우 불쾌해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그녀는 그가 평소 왕권의 깃발을 들고 군중 사이로 행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를 향한 질투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흥분시키고 그와 동등한 영예를 얻기 위해 로마로 항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했고, 아버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아그리파는 극도의 빈곤 속에서 생활 필수품을 강제로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날마다 그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채권자들로부터 바다로 도망쳤을 때, 이제 그는 왕을 돌려보냈습니다. 그 자신은 왕의 아들이었고, 왕권과 가까운 관계가 그에게 같은 위엄을 요구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앉아 사적인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런즉 헤롯아 네가 전에는 네 근본 조상보다 낮아질 것을 염려하지 아니하였더니 이제는 네 친족의 존귀함을 구하고 이것을 참지 말라 당신의 부를 존경하는 사람이 당신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게 하고, 그의 가난이 우리의 풍요로움보다 더 큰 것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저번에 당신의 자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로 가서 은이나 금을 막론하고 수고와 비용을 아끼지 말자. 왜냐하면 그것들은 왕국을 얻는 것보다 더 나은 용도로 보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헤롯은 안일을 좋아하고 자기가 로마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번에 그녀의 요청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더 잘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를 밀어붙였고, 그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돌도 남기지 말라고 바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와 약혼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녀의 끈질김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준비하고 아낌없이 아끼지 않고 로마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헤로디아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아그리파는 그들의 의도와 준비를 알아차리고 그곳으로 갈 준비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출항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자유민 중 한 명인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를 로마로 보내 황제에게 바칠 선물과 헤롯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고, 만일 가이우스가 필요하다면 그 문제에 대해 특별한 설명을 하게 했습니다. 어떤 기회라도 있으세요. 이 사람은 헤롯을 매우 빨리 따라갔고 항해가 매우 순조로웠으며 헤롯을 따라온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헤롯이 가이오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직접 와서 편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둘 다 Dicearchia로 항해했고, Dicearchia에서 약 5펄롱 떨어진 Campania의 작은 도시인 Bairn에서 Caius를 발견했습니다. 그 곳에는 호화로운 아파트를 갖춘 왕궁이 있으며, 모든 황제는 여전히 전임자의 장엄함을 능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장소는 또한 땅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따뜻한 목욕을 제공하며, 이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건강 회복에 유익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남성의 사치에도 봉사합니다. 이제 가이오가 헤롯에게 문안하니 이는 그가 먼저 헤롯을 만난 다음 아그립바가 자기에게 보낸 편지 곧 헤롯을 고발하기 위하여 쓴 편지를 보았음이니라.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티베리우스에 맞서 세야누스와 동맹을 맺었고 이제는 카이우스 정부에 반대하여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와 동맹을 맺고 있다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기고에 7만 명을 수용할 만큼 충분한 갑옷이 준비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이우스는 이 말에 감동하여 헤롯에게 그 갑옷에 관해 말한 것이 사실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그러한 갑옷이 있었다고 자백했을 때, 그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의 진실은 너무 악명 높았기 때문에 카이우스는 그것이 그가 반란을 계획했다는 비난에 대한 충분한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사분왕국을 빼앗아 아그리파의 왕국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주었다. 그는 또한 헤롯의 돈을 아그립바에게 주었고, 형벌로 그를 영구 추방하고 갈리아의 도시 리옹을 그의 거주지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로디아가 아그립바의 여동생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자신의 돈을 선물로 주면서 그녀가 남편과 함께 같은 재난을 당하는 것을 막은 사람은 그녀의 오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오 황제님! 장엄한 방식으로 행동하시고, 당신이 나에게 제공하시는 것에 따라 당신 자신이 되는 대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남편에 대해 베푸는 친절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의 형통에 동역한 내가 그의 환난 중에 그를 버려야 할 것이 아니니라 이에 가이오는 그에게 노하여 헤롯과 함께 유배하여 그 땅을 아그립바에게 주었느니라 헤로디아가 그 오라비를 시기한 일과 헤롯이 여자의 헛된 말을 들은 일로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나이까 가이오는 즉위 원년과 이년에 관대하게 국사를 다스리며 절제 있게 처신하였느니라 그는 로마인들과 그의 다른 신민들의 호의를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자만심으로 인해 인간 본성의 한계를 넘어섰고, 그의 영토가 광대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만들었습니다. 신이었으며, 신 자체를 비난하기 위해 모든 일에 스스로 행동했습니다.

 

제 8 장

 

가이오 주재 유대인 사절에 관하여; (28) 그리고 카이우스는 유대인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페트로니우스를 시리아로 보냈으나 그들이 그의 상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1. 이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주민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각 정당에서 세 명의 대사가 선출되어 가이우스에게 왔습니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의 대사 중 하나는 아피온이었습니다.(29) 그는 유대인을 비방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가이사에게 속한 영예를 무시한다고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로마제국에 복속된 모든 사람은 가이오를 위한 제단과 신전을 건축하고 다른 면에서는 신을 받듯이 그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 유대인들만이 그를 기리기 위해 조각상을 세우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러한 가혹한 말들 중 많은 부분이 아피온에 의해 말되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가이오가 유대인들에게 화를 낼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그를 자극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절단의 책임자인 필로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요 알라바키아 알렉산더의 형제입니다.(30) 그리고 철학에 능숙한 사람이 그러한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기꺼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그를 금지하고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너무 화가 나서 그들에게 아주 큰 해악을 끼치려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필로는 이같이 모욕을 당하고 나가서 자기 주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담대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우스의 말은 실제로 그들에게 화를 냈지만 실제로는 이미 하나님을 자신에게 대항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2. 이에 가이우스는 자신이 유대인들에게만 이렇게 멸시당하는 것을 매우 극악하게 생각하여 페트로니우스를 시리아의 대통령이자 비텔리우스의 후계자로 파견하고 그에게 대대적인 군사력으로 유대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군대 본체; 그리고 그들이 그의 동상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성전에 세우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다면 전쟁으로 그들을 정복하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페트로니우스는 시리아 정부를 장악하고 서둘러 카이사르의 서신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보조군을 모으고 로마군 2개 군단을 데리고 프톨레마이스에 와서 봄에 전쟁을 시작하려고 그곳에서 겨울을 났습니다. 그는 또한 가이우스에게 자신이 결심한 일을 편지로 보냈는데, 가이우스는 그의 민첩성을 칭찬하고, 그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계속해서 그들과 전쟁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수만 명의 유대인이 페트로니우스와 프톨레마이스에게 와서 그에게 청원을 하여 그들에게 조상들의 율법을 범하고 범하도록 강요하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신상을 가져와 세우기로 결심했다면, 먼저 우리를 죽인 다음 당신이 결심한 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금지된 일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입법자의 권위와 그러한 금지가 미덕의 사례라는 우리 조상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는 그들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황제이고 마음대로 내 뜻을 따를 수 있었고, 그런 다음 이렇게 행동할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이 말이 나에게 정당하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보내심을 받았으니 나는 그의 율례에 복종할 수밖에 없나니 그 율례를 불순종하면 나에게 파멸이 임할 것임이니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페트로니우스여, 그러므로 당신은 가이우스의 서신을 거스르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 율법의 명령도 어기지 아니할 것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수고는 지금까지 범법되지 않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유익하다고 정하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율법을 범할 정도로 결코 겁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에 빠지면 우리 법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참아야 합니다.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은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편에 서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불확실한 운명의 전환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당신에게 복종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비겁함으로 인해 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율법을 범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며 또한 하나님의 큰 분노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재판관으로서 가이오보다 낫습니다."

 

3. 페트로니우스는 그들의 말을 통해 그들의 결의가 제거되기 어렵다는 것과 전쟁 없이는 카이우스의 동상 봉헌식에 복종할 수 없으며 많은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자 유대인들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친구들과 주변에 있는 종들을 데리고 급히 디베랴로 갔다. 페트로니우스가 티베리아스에 왔을 때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로마인과 전쟁을 하면 큰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율법을 범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결과를 낳는다고 판단하고, 결코 그들을 그런 고통에 빠지게 하지 마시기를 예수께 간구했습니다. 조각상의 봉헌으로 그들의 도시를 더럽히지 말라. 그러자 페트로니우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카이사르의 전쟁 준비와 당신 자신의 약점을 고려하지 않고 카이사르와 전쟁을 벌이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와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법이 범해지는 것을 보기 전에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목을 내밀고는 죽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함께 이 일을 했으며, 그 사이에 땅 경작을 중단했고, 계절에 따라 파종해야 했습니다.(31) 그리하여 그들은 확고한 결심을 계속했고, 조각상의 봉헌식을 보기보다는 기꺼이 죽겠다고 스스로 제안했습니다.

 

4. 상황이 이렇자, 아그리파 왕의 동생 아리스토불로와 대왕 헬레야스와 그들과 함께 있는 다른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페트로니우스에게 가서 간청했습니다. 그가 군중의 결의를 보았으니, 그는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셨고, 그리하여 그들을 절망에 빠뜨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내자면, 유대인들은 그 신상을 받는 것에 대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혐오감을 느꼈고, 어떻게 그와 함께 머물렀으며, 경작지를 땅에 버려두었는지, 그들은 그와 전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법을 어기게 하기보다는 즐겁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이 계속해서 파종되지 않은 채, 그들이 공물을 바칠 능력이 없어서 어떻게 강도가 자랄 것인지; 그리고 가이우스는 그로 인해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가하라고 명령하지 않을 것이며, 국가를 파괴할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전의 견해를 계속 굳건히 고수하여 그들에게 전쟁을 일으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 그리하여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와 함께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페트로니우스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페트로니우스는(32) 부분적으로는 아리스토불로와 그와 함께한 나머지 사람들이 만든 긴박한 상황 때문이었고, 그들이 원했던 것의 큰 결과 때문이었고, 그들이 간구한 열성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반대가 확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한 것을 보고 가이우스의 광기의 노예가 되어 단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종교적 성향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벌을 기다리며 평생을 보내십시오. 페트로니우스는 가이우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서신에 순종하여 더 빨리 그를 섬기지 않은 것에 대해 그가 가질 수 있는 분노를 참는 것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일인지 그에게 알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를 설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미친 결의가 계속된다면 그는 그들과의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만약 그가 자신의 증오심을 자신에게 돌릴 경우, 덕 있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조차 합당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해 청원자들의 의견을 듣기로 결심했습니다.

 

5. 그리고 그는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디베랴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또한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군대를 그들 반대편에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의미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의 명령에 불복종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지체 없이 그의 진노가 집행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락으로 그렇게 큰 위엄을 얻은 그에게는 어떤 일에서도 그에게 반박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습니다. -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그렇게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안전과 명예는 당신의 보존을 위해 많은 수의 사람들을 희생하는 것을 거부하고 당신의 법에 합당한 존중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므로 당신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최고의 도움과 능력으로 나는 당신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제국의 권위를 수단으로 하여 경멸함. 그러므로 나는 가이우스에게 사람을 보내서 당신의 결심이 무엇인지 알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당신의 소송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력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권위는 인간의 모든 고안과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당신의 고대 율법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며, 비록 당신의 동의가 없더라도 그가 평소에 누리던 명예를 박탈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화가 나서 나에게 맹렬한 분노를 쏟는다면, 당신이 행동하는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몸이나 영혼에 닥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겠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데 빠져 있습니까? 나는 직접 로마로 사람을 보낼 것이며, 나와 내 친구들이 모든 일에 당신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6. 페트로니우스는 이 말을 하고 유대인의 예식 모임을 해산시킨 후,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그들의 농사를 돌보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들이 그들의 일에 좋은 희망을 갖도록 격려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군중을 다시 쾌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페트로니우스에게 자신의 임재를 보여 주셨고, 그의 전체 계획에 있어서 그에게 도움을 주실 것임을 그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할 말을 곧 마치지 아니하였더니 하나님이 사람의 기대와는 반대로 큰 소나기를 내리셨느니라.(33) 그 날은 맑은 날이었고 하늘의 모습으로 보아도 비가 내릴 징조가 없었습니다. 아니, 일 년 내내 심한 가뭄을 겪었고,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인 것을 볼 때에도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물에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양의 비가 내렸을 때, 유별난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어떤 기대도 없이 유대인들은 페트로니우스가 그들을 위한 청원이 결코 실패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에 관해서는,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유대인들을 돌보셨고, 그의 출현에 대해 매우 분명한 표징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에 반대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가 가이우스에게 쓴 다른 세부 사항들 중 하나였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단념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을 산만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에게 간청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를 죽인다면(전쟁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그들의 예배의 율법이 어겨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이 그에게 지불한 수입을 잃을 것이고 미래의 모든 시대에 걸쳐 공개적으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총독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페트로니우스가 하고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7. 그러나 지금 로마에 살고 있는 아그리파 왕은 점점 더 가이오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번 그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즐거움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비용과 준비 모두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의 깊게 만들었을 때; 아니,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능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가이우스 자신도 결코 그것을 능가할 수 없었고, 하물며 그것을 초과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에 가이우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을 넘어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그의 이해력과 장엄함에 감탄했으며,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행한 관대함에서 아그리파 뒤에 있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가이오는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져서 잔치 중에 아그리파가 자기에게 술을 마셨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당신이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겪은 위험을 나에게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선의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것도 생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전에 부족했던 모든 것을 보상해 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베풀어 준 것, 즉 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당신에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당신을 섬기는 일에 행복이 깃들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34) 가이오가 아그립바에게 이같이 말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큰 땅을 요구하거나 어떤 성읍의 수입을 요구할 줄로 생각하였음이라 그러나 그가 물을 것을 미리 준비했지만 그의 의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즉시 가이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가 이전에 명령에 어긋나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이익을 기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티베리우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에게서 무엇이든 받기 위해 그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그에게 부여한 선물은 위대했고 심지어 갈망하는 사람의 희망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기부자인] 당신의 능력 아래 있을지라도 그들은 받는 사람인 나의 성향과 존엄성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이우스가 아그리파의 성향에 놀랐고,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을 요구하도록 더욱 그를 재촉하자, 아그리파는 대답했다: "내 주여, 당신이 기꺼이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내가 당신의 선물에 합당하게, 나는 당신이 나에게 이미 부여한 행복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경건함을 영광스럽게 하고 신성을 당신의 계획에 보조할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을 한 번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 영광이 될 것입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유대인 성전에 성전을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8. 그리하여 아그리파는 이 기회에 과감하게 주사위를 던졌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 일이 너무 컸고, 실제로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왜냐하면 가이우스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그리파의 호의적인 행동에 크게 사로잡힌 가이우스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거짓을 범하는 것이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토록 민첩하게 아그리파를 청원자가 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한 말을 회개한 것처럼 보였고, 아그리파의 미덕을 크게 존경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입이나 다른 권위로 자신의 영토를 늘리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고 대중의 안녕을 돌보았습니다. 율법과 신성 자체에 대해 그는 그가 요청한 것을 그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는 또한 페트로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군대를 소집한 것을 칭찬하고 이 문제에 관해 그와 상의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미 내 신상을 세웠거든 그대로 두라. 그러나 아직 봉헌하지 아니하였거든 더 이상 수고하지 말고 네 군대를 해산시키고 돌아가서 돌보아라.” 내가 처음에 당신에게 보낸 일들은 지금은 그 신상을 세울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매우 존경하는 아그리파에게 부탁한 일이므로 나는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 또는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이것은 가이우스가 편지를 받기 전 페트로니우스에게 쓴 편지로, 유대인들이 동상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매우 되어 있으며 로마인에 맞서 전쟁을 위협할 결심을 한 것 같다고 알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우스는 모든 경우에 비열하고 사악한 행위의 노예였으며, 덕스럽고 명예로운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로 결심한 누구에게든 자신의 정부에 대한 어떤 시도가 행해지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는 어떠한 훈계도 자제하지 않고 화를 참는 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하여 페트로니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내 계명보다 더 큰 가치가 있고 무례하여 그 명령에 복종할 만큼 나는 너에게 명하노니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라. 이제 너는 내가 너를 본보기로 삼을 것임이니라.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대에 그들이 감히 그들의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9. 이것은 가이오가 쓴 편지였습니다. 페트로니우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는 가이우스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받지 못했다. 그 배는 너무 느리게 항해했기 때문에 그 전에 페트로니우스에게 다른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 편지를 통해 그는 가이우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페트로니우스가 유대인들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감행한 위험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이우스를 빼앗았을 때, 자신이 신을 숭배하려고 그토록 무례하게 시도한 것에 대한 분노로 인해 로마와 모든 지배권은 페트로니우스와 공모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 계급에 속한 자들은 카이우스에게 마땅한 권리를 주기 위해 공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위협하는 서한을 페트로니우스에게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경위와 그에 대한 음모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언급하겠습니다. 이제 페트로니우스에게 가이우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먼저 왔고, 조금 후에 그에게 자신의 손으로 자살하라고 명령하는 편지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이오의 죽음에 대한 이 우연한 일치를 기뻐했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그에게 성전에 대한 관심과 유대인들이 성전을 피한 데 대한 도움에 대해 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페트로니우스는 그가 예측할 수 없었던 죽음의 위험을 피했습니다.

 

제 9 장

 

두 형제 아시네우스와 아닐레우스 때문에 바빌론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닥친 일,

 

1. 이제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유대인들, 특히 바빌로니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슬픈 재앙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있었던 재난 중 어느 것도 열등하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엄청난 학살을 수반했으며, 이전에 기록된 어떤 재난보다 더 컸습니다. 내가 모든 것에 관해 정확하게 말할 것이며, 이 불행이 그들에게 닥친 경우를 설명할 것입니다. Neerda라는 바빌로니아 도시가 있었습니다. 인구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좋고 넓은 영토가 있고, 다른 장점 외에도 남자도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그 주변에 세워진 통곡으로 인해 적들의 공격을 받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같은 강의 흐름에 위치한 도시 니시비스(Nisibis)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이 장소의 자연적인 힘에 의존하여 모든 사람이 우리 나라의 관습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반 세겔을 예금했으며 그 밖에도 하나님께 바쳐진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도시들을 보고로 사용했고 적절한 시기에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빌로니아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파르티아인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 명의 남자가 그 기부금을 운반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이제 네르다라는 도시에 태생으로 아시네우스와 아닐레우스라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서로 형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고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에게 휘장 짜는 기술을 배우게 하였더니 베 짜는 일을 사람이 그들 중에서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였더라. 이제 그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치고 그들 위에 임명된 그는 그들이 일에 너무 늦게 온 것을 불평하고 채찍으로 그들을 처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정당한 형벌을 모욕으로 여기고 그 집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무기를 적지 않게 빼앗아 강이 갈라져 있는 곳으로 자연히 아주 적합한 곳으로 갔다. 소를 먹이고 겨울을 대비해 보통 쌓아둔 과일을 보존하기 위해. 가장 가난한 부류의 젊은이들도 그들에게 의지하여 그들이 얻은 무기로 무장하고 그들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악을 끼치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적이 되어 성채를 건설하자마자, 먹이를 주는 소들에게 사람을 보내 그들의 유지에 충분한 만큼의 공물을 그들에게 바치라고 명령했으며,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사방의 다른 모든 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나 그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가축을 죽일 것이라면 그들의 친구들이니라.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만큼 많은 양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세력이 더 강해지고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갑자기 행진하여 그들에게 해를 끼쳤음이라.그래서 그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공격하러 오는 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었고, 마침내 그들에 대한 보고가 파르티아 왕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2.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총독은 이것을 알고 그들이 더 커지기 전에, 그리고 그들로부터 더 큰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막을 마음이 생겼을 때, 그는 파르티아인과 파르티아인 모두를 포함하여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모았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진격해 왔고, 누군가가 군대를 모았다는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기 전에 그들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호수에 진을 치고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날은 유대인들이 쉬는 날인 안식일이었다) 그는 그 날에는 적들이 감히 싸우지 못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 싸우지 않고. 그러므로 그는 점차적으로 나아갔고 갑자기 그들을 덮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Asineus는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고 그들의 무기는 그들 옆에 놓여있었습니다.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듣는 것은 말들의 소리니 먹이를 주는 자의 소리가 아니요 사람을 등에 업은 자의 소리니 또한 그 고삐의 소리도 들리니 대적들이 올까 두렵나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서 현재 상황이 어떤 것인지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그가 이 말을 한 뒤에 그들 중 몇몇은 무슨 일인지 정탐하러 나갔다. 그들이 즉시 다시 와서 그에게 이르되, 우리 대적들이 하는 일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 당신의 실수가 아니니이다. 또한 그 대적들이 우리가 다시는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리고 많은 기병대가 우리를 향해 행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할 손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쉬도록 강요하는 우리 율법의 금지로 인해 그렇게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siueus는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그의 스파이의 의견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빠진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그들의 영혼을 뽑고 스스로 복수함으로써 그들의 법을 어기는 것이 법에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비록 그들이 전투 중에 죽어야 하지만,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굴복함으로써 적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무기를 들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적들을 쳐죽이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을 업신여기고 승리를 거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패주시켰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이 싸움의 소식이 파르티아 왕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이 형제들의 대담함에 놀랐고,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모든 경비병 중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아츠바누스 왕은 비록 그의 정부에 대항하려고 시도한 여러분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용감한 행동을 그보다 더 존경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오른손을 주시려고 나를 보내셨느니라(35) 및 보안; 그리고 그분은 여러분이 길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안전하게 그에게 올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에게 어떤 교활함이나 속임수를 의미하지 않고 당신이 그에게 친구로서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또한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당신의 용기에 힘을 더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존경심을 표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아시네우스 자신은 그곳으로 여행을 연기하고 그의 형제 아닐레우스를 보냈습니다.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선물을 가지고 그는 가서 왕의 면전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아르타바누스는 아닐레우스가 혼자 오는 것을 보고 왜 아시네우스가 그와 함께 오기를 피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두려워하여 호숫가에 서서 그 나라의 신들을 두고 맹세하고 그들이 맹세한 대로 그에게 오면 그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 모든 야만인과 함께 가장 큰 세력이 있으며 그들과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확고한 안전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그들이 당신에게 오른손을 주면 그들 중 누구도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있을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의 충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불의한 것으로 의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주어졌습니다. 아르타바누스는 이 일을 마친 후 아닐레우스를 보내 그의 형이 자신에게 오도록 설득했습니다. 왕이 이렇게 한 것은 이 유대인 형제들의 용기로 자기 지방 총독들을 억제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지 않게 하려 함이었더라. 왜냐하면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만일 그들이 그들을 반대하는 원정대에 보내진다면 반역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전쟁에 참여했을 때 반란을 일으킨 지방의 총독들인 아시네우스파와 바빌로니아파를 진압하기 위해 세력을 키워 그와 전쟁을 벌이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 반란에 대해 듣거나, 그 경우에 실망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에게 더 많은 해를 끼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4. 왕이 이 뜻을 가지고 아니레우스를 보내니 아니레우스가 왕의 선의와 그가 한 맹세를 그에게 고한 때에 그의 형을 이기니라. 따라서 그들은 서둘러 아르츠바누스로 갔는데, 그들은 그들이 왔을 때 그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시네우스가 행한 행동에 대한 용기에 감탄했는데, 이는 그가 보기에 작은 사람이었고 첫눈에도 경멸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또한 친구들에게 비교했을 때 자신의 영혼이 모든 면에서 육체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었는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그는 한때 아시네우스를 그의 군대 장군 중 한 명인 압다가세스에게 보여주고 그의 이름을 말하며 그가 전쟁에서 얼마나 큰 용기를 가졌는지 설명했고 압다가세스는 그를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왕은 파르티아 정부에 해를 끼친 것에 대해 그에게 처벌을 가하기 위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믿음을 의지한 사람을 죽이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내가 그에게 내 권리를 보낸 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들의 맹세로 그의 믿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로 호전적인 사람이라면, 당신은 나의 위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파르티아 정부에 복수할 것입니다. 돌아와서 당신의 지휘하에 있는 군대로 저를 이기소서." 그러자 왕은 아시네우스를 불러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청년이여,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곳에서 내 장군들의 분노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을 살해하려 하고 내가 승인하지 않고도 바빌로니아 땅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의 보살핌으로 그 땅이 강도와 다른 해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안전과 관련이 있고 그러므로 마땅한 일에 대해서는 당신이 나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아시네우스에게 선물을 주고 즉시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요새를 건설하고 짧은 시간에 위대해졌고, 그보다 더 높은 시작이 없었던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었던 용기와 성공으로 일을 관리했습니다. 그 길로 파견된 파르티아 총독들도 그에게 큰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에게 바친 영예는 너무 작아서 그의 사막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그가 그곳에서 적지 않은 위엄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아니, 실제로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일은 그에게 달려 있었고, 그는 15년 동안 이 행복한 상태에서 점점 더 번영했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일이 매우 번영하던 중 다음과 같은 경우에 그들 사이에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큰 권력을 얻었던 덕의 길에서 일단 벗어났을 때, 그들은 조상들의 법을 모욕하고 범했으며, 그들의 정욕과 쾌락의 지배 아래 떨어졌습니다. 어떤 파르티아인이 군대 장군으로 그 지역에 왔고 그를 따르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 아내는 다른 업적으로 큰 평판을 얻었고 특히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다른 모든 여성들보다 존경을 받았습니다. Asineus의 형제 Anileus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거나 아마도 그녀 자신도 보았고 즉시 그녀의 연인이자 적이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가 이 여자를 즐기기를 바랄 수 없었기 때문에 포로로서 그녀에 대한 권력을 얻었고, 부분적으로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성향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남편이 그들에게 적으로 선언되어 전투에서 쓰러지자 고인의 과부는 그녀의 애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들의 집에 들어오지 않고서는 아닐레우스 자신에게도, 아시네우스에게도 큰 불행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기회에 그들에게 큰 해악을 가져왔습니다. 그 여자는 포로로 끌려갔으므로 남편이 죽자 자기 남편과 자기가 공통으로 섬기는 그 나라 신들의 형상을 숨겼으니 이것이 관습이 되었느니라(36) 그 나라 사람마다 자기 집에 섬기는 우상을 두고 외국 땅에 갈 때에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니라 그녀는 그들의 우상을 가지고 다니는 그들의 관습에 동의했습니다. 이제 처음에 그녀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닐레우스의 결혼한 아내가 되었을 때, 그녀는 전 남편 시절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정해진 의식으로 그들을 숭배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친구들은 그가 처음에 그가 히브리인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그들의 법에 합당한 일도 행하지 않고 타국인 아내와 결혼하여 그들의 제사와 신앙의 규정을 어겼다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행사; 그는 육체의 많은 쾌락을 허용함으로써 아내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가 도달한 높은 권위로 인해 자신의 권위를 잃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이기지 못하자 그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그들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 법에 관계없이 그의 살인자 Anileus와 Asineus에게도 형벌을 선고하고 그들의 모든 동료가 적들로부터 같은 종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두 사람이 이 악의 주요 행위자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가 그들의 법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당할 때 그를 돕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이 후자는 몹시 비통해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불굴의 의지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현재의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파르티아인들이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닐레우스가 그들의 율법을 훼손한 것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더 많은 사람들이 아시네우스에게 와서 큰 소리로 아니테우스에 대해 불평하며, 그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본 것이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지른 범죄가 그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파멸로 이어지기 전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이 여자의 결혼이 그들의 동의 없이, 그리고 그들의 옛 법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졌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자신의 신들에게] 드린 예배는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이었다. 이제 아시네우스는 형의 범죄가 이미 큰 해악의 원인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친밀한 관계에 대해 가졌던 선의로 인해 동일한 일을 용납했고, 그의 형제가 그의 사악한 성향에 상당히 압도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것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그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그에 대한 소란이 더욱 커짐에 따라 그는 마침내 아닐레우스에게 이 소란에 대해 말하면서 이전의 행동에 대해 그를 질책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을 그만두기를 바랐습니다. 그 여자는 관계로 돌아갔다.그러나 이러한 책망으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아닐레우스가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떤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서 아시네우스의 음식에 독을 넣어서 그를 떼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게 되었을 때 승리할 가능성이 확실해졌습니다.

 

6. 그래서 아닐레우스는 혼자서 정부를 장악하고 파르틴의 최고 권위자이자 아르타바누스 왕의 딸과 결혼한 미트리다테스 마을을 향해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을 약탈하였고, 그 전리품 중에서 많은 돈과 많은 노예와 많은 양과 기타 많은 것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얻으면 인간의 상태를 행복하게 해준다. 이제 이때 그곳에 있던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마을들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닐레우스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불쾌해했으며, 그가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았을 때 현재의 위엄으로 그를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미리;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병 부대와 그 수 중에서 전쟁에 적합한 연령의 사람들을 모아 아닐레우스와 싸우러 왔습니다. 그가 자기 동네에 이르매 그 날이 안식일 곧 유대인들의 쉬는 날이었으므로 그 다음날에 그와 싸우려고 거기 가만히 누워 있더라. 그리고 아닐레우스는 다른 마을에 사는 시리아인 이방인으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그에게 다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미트리다테스가 어디에서 잔치를 벌일 것인지도 말해 주었고 적절한 시간에 저녁을 먹고 밤에 행군했습니다. ,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동안 파르티아인들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그래서 그는 밤 4시경에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죽였고, 다른 일부는 도망쳐 미트리다테스를 산채로 데려다가 발가벗겨서 나귀에 태웠습니다.(37) 이는 파르티아인들 사이에서 가능한 가장 큰 비난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그를 숲으로 데려갔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미트리다테스를 죽이라고 요구했고, 그는 곧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반대하고 다음 중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파르티아인의 주요 가족이며 왕족과 일치하여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간 것만큼은 견딜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미트리다테스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의 생명을 보존한다면, 그에게 이 혜택을 준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그 혜택이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번 죽는다면 왕은 바빌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리고 어떤 불행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안전을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아래에서 그들의 젊음의 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과 공의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그는 그들에게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미트리다테스는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간 후에 그의 아내는 그가 왕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게을리하고 돌보지 않고 그 일을 기쁘게 처리한다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였다가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용기 있는 사람처럼 돌아가라고 말했고, 그렇지 않으면 왕족의 신들을 두고 그와의 결혼 생활을 반드시 파기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그녀의 매일의 조롱을 견딜 수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그녀가 진지하게 결혼 생활을 파탄시키지 않도록 그녀의 무례함이 두려워서 마지 못해 그의 성향에 반하여 다시 큰 군대로 모였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과 함께 행진했습니다. 그 자신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파르티아인인 그가 전쟁에서 그에게 너무 힘들었을 때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보전을 빚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7. 그러나 아니레우스는 미트리다테스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호수 주위에 머물면서 적과 만날 첫 번째 기회를 놓치는 것은 너무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일한 성공을 거두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같은 시도에 대담하게 도전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었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군대에 합류하여 사람들을 약탈하고 그 수로 다시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십 스다디온을 행하고 그 길이 마른 [그리고 모래] 곳을 지나고 한낮쯤에 그들이 심히 목말라하매 그러자 미트리다테스가 나타나 그들 위에 쓰러졌는데, 그들이 물이 부족하여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날의 시간 때문에 그들은 무기를 지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닐레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치욕스러운 패주를 당했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신선한 사람들을 공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큰 살육이 일어나서 만 명이 쓰러지더라. 이제 아닐레우스와 그 주위에 굳건히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숲 속으로 도망갔고, 미트리다테스는 그들에게 큰 승리를 거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일레우스에게 악한 사람들이 대집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안락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그리하여 그에게 다가옴으로써 싸움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상해 주었습니다. . 그러나 이 사람들은 패한 자들과 같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경솔하고 전쟁에 무기력하였음이라. 그러나 그는 이들과 함께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마을에 왔고, 아니레우스가 그들에게 가한 부상으로 그곳의 모든 것이 크게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 사람들과 이미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네에르다로 사람을 보내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가 아닐레우스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예수를 넘겨주고자 하였더면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과 화친하기를 원하였더라. 다른 사람은 그들도 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대답하고 바빌로니아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을 보냈고 그들은 그들에 대해 아닐레우스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인들은 그의 상황을 보고 아닐레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서 그들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을 때 그들에게 몰래 덤벼들어 그들이 붙잡은 모든 것을 두려움 없이 죽였습니다. 그 자신도.

 

8. 바빌로니아인들은 이제 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가졌던 증오의 영향을 크게 억제했던 아닐레우스의 대대적인 침입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법이 상반되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의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가장 담대해졌는지, 그들은 다른 쪽을 공격했습니다. 특히 이때 아닐레우스 쪽이 무너지자 바빌로니아인들은 유대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그들과 싸울 수도 없고 그들과 함께 살기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인 셀레우코스 니카토르가 건설한 셀레우키아로 갔다. 그 곳에는 마케도니아인이 많이 살고 있었지만 그리스인도 더 많이 거주했습니다. 거기에는 시리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5년 동안 아무런 불행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섯째 해에 바벨론에서 이 사람들에게 역병이 닥쳤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거주지가 그 도시에서 새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셀루기아에 왔기 때문에 내가 즉시 이야기하려는 바로 그 때문에 그들에게 더 큰 재앙이 닥쳤습니다.

 

9. 셀루기아 사람들 곧 헬라인과 수리아 사람의 생활 방식은 다툼이 많고 분쟁이 많았으나 헬라인은 수리아 사람에게 너무 강하였더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곳에 와서 그들 중에 거주할 때에 소요가 일어나서 시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서로에게 너무 가혹하였으니 그들은 위험을 멸시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어떤 경우에도. 이제 그리스인들이 이 소요에서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이전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유대인과 시리아인 사이의 합의를 막을 수 있다면 모두가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리아인들은 이전에 친분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과 평화롭고 우정을 누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양국의 주요 인사들이 이 일을 완료하자 그들은 곧 화해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동의했을 때, 그들은 그러한 결합의 가장 큰 목적이 유대인에 대한 공통의 증오가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을 덮쳐 약 오만 명을 죽였습니다. 아니, 유대인들은 모두 멸망했지만, 친구나 이웃이 그들에게 베풀어준 동정심으로 도망가게 하여 탈출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도시인 크테시폰(Ctesiphon)으로 물러나 셀레우키아(Seleucia)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곳은 [파르티아의] 왕이 매년 겨울에 거주하며 그의 부의 대부분이 보관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기에 확실한 정착지가 없었고 셀루기아 사람들은 왕의 명예에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온 유다 족속이 바벨론 사람과 셀레우코스 사람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그 곳에 사는 모든 시리아 사람이 셀레우코스 사람과 연합하여 유다 사람과 전쟁을 하였음이더라.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함께 모여 네에르다(Neerda)와 니시비스(Nisibis)로 가서 그 도시들의 힘으로 그곳에서 안전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그 주민들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바빌로니아에 있던 유대인들의 상황이었습니다.

 

미주

 

(1) 성 누가가 한 번, 행 5:37, 요세푸스가 네 번 여러 번, 여기서 한 번, 종파가 되었습니다. 6; 그리고 B.XX. 채널. 5. 종파. 2; 전쟁에 대하여, B. II. 채널. 8. 종파. 1; 그리고 ch. 17. 종파. 8절에서는 유대 민족을 완전히 멸망에 이르게 한 선동적인 교리와 기질을 창시한 이 유다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기(1절) 요세푸스는 그를 가말라 시 출신의 골로니파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요단 강 서쪽의 갈릴리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동쪽의 갈로니티스에서 태어났는지는 큰 문제입니다. 한편, 지금 막 고대 유물에서 인용된 곳은 B. XX입니다. 채널. 5. 종파. 2절에서 그는 갈릴리 사람으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내가 쓴 책들에 말한 대로"라는 말이 그의 이야기에 추가되었습니다. Dean Aldrich가 관찰한 것처럼 그 특정 장소는 Of the War, B. II. 채널. 8. 종파. 1. 제6분파에 속해 있는 그가 여기서 왜 그를 골로니파라고 불러야 하는지 누구도 잘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이어 두 번의 전쟁에서도 그는 여전히 그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다가 나온 가말라라는 도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갈로니티스에 하나는 갈릴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이름의 도시나 마을에 대한 Reland를 참조하세요.

 

(2) 이 사두개인, 즉 바리새인이 랍비들이 말하는 불행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사두개인들의 불경건이나 불신앙의 계기가 된 바로 그 사람이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오래 전에 별개의 종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두개파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B. XIII의 참고 사항을 참조하십시오. 채널. 10. 제5분파; 그리고 거기에 인용된 Dean Prideaux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사두개파 사람들의 그런 불경이나 불신앙의 최소한의 발자국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인정서는 그것이 세례 요한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B. 1. ch. 54. 위의 참고 사항을 참조하십시오.

 

(3)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말하고 필로 자신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피. 679, 이 에센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유대인 축제에 가거나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신약성서의 일반 책에서 결코 언급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헌법에는 그들이 조상들의 관습을 준수하고 그 백성 가운데 다른 종파들에게 부과된 것과 같은 나쁜 성격을 그들에게 부과하지 않은 사람들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4) Josephus 또는 Strabo의 Polistae는 누구입니까? 피타고라스 다카에 중에서는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Scaliger는 이 Dacae 중 일부가 수도사처럼 텐트나 동굴에서 혼자 살았다는 가능성 없는 추측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다른 사람들은 건설된 도시에서 함께 살았으며, 그곳에서 같은 이름을 암시하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5) 여기서 우리는 전쟁서 B. II의 평행 부분과 마찬가지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채널. 9. 종파. 1, 헤롯 대왕이 죽고 아르클라우스가 계승한 후, 요세푸스는 자신의 시대가 가까워질 때까지 유대에 대한 그의 기록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는 헤롯의 삶과 아마도 그의 아들들의 계승과 첫 행동을 포함하여 다메섹의 니골라우스의 광범위한 역사 이후에 그 이전에 그 시대에 대한 좋은 역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6) 민수기 19:11-14.

 

(7) 이 인용문은 현재 부족합니다.

 

(8) 여기서 빌라도가 피를 흘린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눅 13:1, 2) 갈릴리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소란은 대개 유대인의 큰 축제 때 촉발되었는데, 그 때 그들은 많은 제사를 드렸으며 갈릴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유대와 예루살렘의 소동보다 그러한 소동에 훨씬 더 분주했습니다. 우리는 고대 아켈라오의 역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B. XVII. 채널. 9. 종파. 3 및 채널. 10. 종파. 2, 9; 그러나 실제로 요세푸스의 현재 사본에는 성 누가복음 13장 4절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그들을 죽인 열여덟 사람"에 대한 한 마디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복음은 누가복음 23:6, 7에서 가르칩니다. “빌라도가 듣고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으니 그가 헤롯의 관할권에 속한 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라.” 그리고 버전. 12절 “그 날에 빌라도와 헤롯이 원수되기 전부터 서로 친구가 되었으니” 학식 있는 놀디우스, 데 헤롯의 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매우 그럴듯한 열쇠를 취하십시오. 219번: "헤롯과 빌라도 사이의 적개심의 원인은 빌라도가 분봉왕의 관할권에 개입하여 그의 갈릴리 신민 중 일부를 죽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눅 13:1). 그는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그 시간에 그리스도를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9) 서기 33년 4월 3일.

 

(10) 4월 5일.

 

(11) 티베리우스에 의해 4천 명의 유대인이 사르데냐로 추방된 것에 대해서는 테베레의 수에톤루스를 참조하십시오. 분파. 36.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법에 따라 군인이 될 수 없다고 가정하는 Reland 씨의 메모는 우리 앞에 있는 역사의 한 분야와 모순되며, 그들의 수많은 싸움 사례와도 반대되며 훌륭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전쟁중인 군인; 실제로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이방 왕들 아래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안식일과 다른 엄숙한 절기에 그들에게 휴식을 허락하고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 살게 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들은 항상 그러한 특권을 얻을 수 없었으며, 그런 다음 가능한 한 잘 처형되거나 때로는 절대적으로 싸움을 거부했습니다. 현재 추방된 유대인의 대부분에 관해서는 여기의 경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 로마 법령 중 몇 가지를 참조하십시오. B. XIV. 채널. 10.

 

(12) 모세는 요르단 너머 특히 그리심 산에 결코 가지 않았으며, 이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학문에 매우 능숙한 리랜드 출신의 허드슨 박사가 여기에서 언급한 전통을 그들 가운데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웃시 또는 대제사장 오지스 시대, 대상 6:6; 법궤와 다른 신성한 그릇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심 산에 놓이거나 숨겨졌습니다. 여기에 묘사된 소요에서 현재의 사마리아인들이 밟은 어리석은 기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13) 대제사장의 신성한 의복은 축제 7일 전에 입고 그 당시에 축제를 대비해 정결하게 되었으며, 이방인의 관리로 인해 오염되었다는 언급이 요세푸스에 있어서 탈무드의 전통과 잘 일치한다. , 여기서 Reland가 관찰한 것처럼. 여기에 언급된 세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외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7:9과 같이 구별의 방법으로 불리는 금식은 속죄의 큰 날이었습니다.

 

(14) 요세푸스의 모든 그리스어 사본에서 나온 이 계산은 정확히 맞습니다. 헤롯이 서기 4년 전인 9월경에 죽었고, 잘 알려진 대로 서기 14년 8월 19일에 티베리우스가 시작되었으므로, 빌립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계산해 삼십칠 년이 되는 해가 분명하다. 그것은 티베리우스 20년, 즉 서기 33년 말(역시 우리 구주께서 죽으신 해) 또는 다음 해 초 서기 34년 초였습니다. 헤롯의 모든 후손에게 이는 그가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함이라.

이것은 훌륭한 예입니다.

 

(15) 이 헤롯에게는 빌립이라는 이름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안티푸스의 이름은 헤롯-안티파스였습니다. 그리고 안티푸스와 안티파터는 어떤 면에서는 동일한 이름인 것 같지만 헤롯 대왕의 두 아들의 이름입니다. ; 마찬가지로 분봉왕 빌립과 이 헤롯-빌립이 같은 아버지의 서로 다른 두 아들일 수도 있는데, 그로티아스는 이 모든 것을 마태복음 14:3에서 관찰합니다. 나와 그로티아스와 분봉왕 빌립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분봉왕 헤롯의 아내가 결혼했고, 첫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첫 남편이 그녀에게서 자녀를 낳았을 때, 이 헤롯-빌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간음하고 근친상간한 결혼 때문에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을 정당하게 책망했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아직 살아 있는 첫 남편 헤롯-빌립에게 책망을 받아 부당하게 참수당했습니다.

 

(16) 우리가 여기와 다음 섹션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많았던 헤롯 대왕의 거의 전 혈통이 갑작스럽게 멸종된 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자주 저지른 심각한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는지 여부 , 자신의 조카와 조카들과 결혼하는 것을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레위기 18:6, 7; 21:10; 및 Noldius, De Herod, No. 269, 270.

 

(17) Spanheim이 알려준 대로 이 Eraess의 동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Spanheim은 ​​또한 Commageus 왕의 딸인 Jotape의 동전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려줍니다.

 

(18) Spanheim은 ​​여기에 다락방의 사용 화폐량이 원래 합계의 8분의 1, 즉 12%인 예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왜냐하면 그 비율은 2500 대 20,000이기 때문입니다.

 

(19) 그곳 유대인의 총독.

 

(20) 게르마니쿠스의 후배인 티베리우스.

 

(21) 단 한 번만 결혼한 안토니아에 대한 이 높은 칭찬은 여기에서 주어지고 다른 곳에서 지원되었습니다. 골동품. B. XVII. 채널. 13. 종파. 4 그리고 이것은 가장 강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와 사도 시대에 유대인과 로마인 사이에서 독신 결혼이 얼마나 명예로운 것인지를 보여 주며, 현대 개신교가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놀라움을 많이 없애줍니다. 거기에는 과부가 없고 오직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들이 교회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교, 신부, 부제는 더 이상 성직자 직무를 중단하지 않고 한 번 이상 결혼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36; 디모데 첫째 5:11, 12; 3:2, 12; 디도서 1:10; 구성. 게시물. B.II. 분파. 1, 2; 나. Ⅵ. 분파. 17; 할 수 있다. B. XVII,; 그로트. 루크에서. ii. 36; 그리고 리스포츠. 광고 문의. 카산드. 피. 44; 그리고 코텔레. 콘스티트에서. 나. Ⅵ. 분파. 17. 그리고 Tertullian은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하는 이 법을 그의 시대에 적어도 한 번 집행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그 위반이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이 항상 처벌하지 않았다고 심하게 불평합니다. 제롬은 두 번 결혼한다는 나쁜 평판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이 성직자로 선택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도 이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경우에도 그는 같은 목적을 명확하고 완전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된 저자들의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시대에 전체 가톨릭 교회에 걸쳐 법이 획득되었다고 말합니다.

 

(22) 허드슨 박사는 여기서 Seneca의 서신 V.에서 죄수와 그를 지키는 군인을 같은 사슬로 묶는 것이 티베리우스의 관습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23) 티베리우스는 그의 손자이고, 카이우스는 그의 동생 드루수스의 손자이다.

 

(24) 그래서 형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를 형이라고 부르는 요세푸스의 사본을 정정합니다.

 

(25) 티베리우스가 점성술과 점술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로마 역사가들과 시인들 사이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26) 이 사자라는 이름은 종종 폭군에게 주어졌는데, 특히 그러한 아그리파와 아마 그의 자유민 마르시아가 사실상 그랬을 것입니다. 에스겔 19:1, 9; 에스더 4:9 디모데후서 4:17. 그들은 또한 때때로 맹수에 비유되거나 대표되는데, 그 중 사자가 주요한 것입니다(다니엘 7:3, 8; Apoc. 13:1, 2.

 

(27) 이제 가이우스는 아그리파에게 리사니아의 사분왕국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안티크인 클라우디우스의 통치 때까지는 실제로 그에게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B. XIX, ch. 5. 종파. 1.

 

(28) 섭리의 개입 사례에 관하여, 다른 우상 숭배 국가들에서는 항상 매우 드물었지만, 옛날에는 참 하나님을 숭배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매우 많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열등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어리석음과 악덕 중에서 유대인들은 당시에 우상 숭배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구원은 그들이 다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해진 것입니다.

 

(29) 여기에서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이우스까지의 대사들의 수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는 모두 6명에 불과하여 각 부분에서 3명을 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반면에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고백한 것처럼(이방인을 위한 아피온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주요 대사였던 필론은 가이우스에 대한 그의 공사가 끝날 무렵에 유대인의 대사들 자신도 살아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사본에 오류가 없다면 그것은 진실이라고 가정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 경우에 요세푸스가 필로의 기록을 보았다면 그렇게 확실한 증인을 반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30)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총독이자 알라바키인 이 알렉산더는 필로의 형제로서 사도행전에서 피어슨 주교에 의해 추정됩니다. 게시물. 피. 41,42, 누가가 대제사장의 친족으로 언급한 알렉산더(행 4:6)와 동일하다.

 

(31) 여기서 요세푸스와 종파는 무엇입니까? 6은 유대인의 파종 시기와 관련하여 필로에 있는데, "곡물이 익은 시기와 멀지 않은"데, Le Clerc가 지적했듯이 여기서는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이 기록을 썼을 때 필로의 『레가트』를 보지 못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광고 Caiurn, 그렇지 않으면 그는 거의 여기에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32) 이.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Publius Petronius)는 클라디우스 치하의 이 시리아 대통령을 뒤따랐고, 아그리파의 희망에 따라 일종의 카이우스의 선동으로 클라우디우스의 동상을 세운 도라 주민들에 대한 엄중한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거기 유대인 회당이요. 이 법령은 현존합니다, B. XIX. 채널. 6. 종파. 3, 그리고 유사한 유대 문제에 관한 클라우디우스의 다른 법령과 마찬가지로 요세푸스의 현재 기록을 크게 확증한다(B. XIX). 채널. 5. 종파. 2, 3, 나는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언급합니다.

 

(33) 요세푸스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나타나심이라는 엄숙한 신약의 말씀을 사용하여 페트로니우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특별하게 나타내기 위해 고난의 시기에 그가 세상을 보존하겠다는 결심을 한 즉시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성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경우에는 다른 어떤 기적적인 출현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여기서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구약과 신약의 여러 본문을 크게 설명합니다.

 

(34) 아그립바에 대한 가이오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가 아그립바의 누이인 헤로디아에게 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례 요한(마태복음 14:6-11).

 

(35) 허드슨 박사가 여기에서 관찰하고 저스틴에 대한 주석, B. XI를 언급한 것처럼, 오른손의 결합은 특히 피오인들(그리고 파르티아인들) 사이에서 충실성에 대한 가장 불가침의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채널. 15. 확인을 위해. 우리는 요세푸스(Josephus)에게서도 비슷한 용법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36) 여행할 때마다 드라빔을 가지고 다니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이 관습은 야곱의 시대만큼 오래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아내 라헬도 그렇게 했습니다(창 31:19, 30-35). 또한 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불행이 닥쳤는지 여기서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는 아내와 결혼하도록 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B. XIX의 참고 사항을 참조하십시오. 채널. 5. 종파. 삼.

 

(37)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람을 당나귀에 태워 불명예를 안겨주는 이 풍습이 아직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투르크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악의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말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이 그 나라를 보기 위해 해외로 갈 때에만 당나귀를 빌리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Mr. Maundrell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처럼, p. 128.

 

 

Antiquities of the Jews - Book XVIII

CONTAINING THE INTERVAL OF THIRTY-TWO YEARS.

 

 

FROM THE BANISHMENT OF ARCHELUS TO THE DEPARTURE FROM BABYLON.

 

CHAPTER 1.

 

HOW CYRENIUS WAS SENT BY CAESAR TO MAKE A TAXATION OF SYRIA AND JUDEA; AND HOW COPONIUS WAS SENT TO BE PROCURATOR OF JUDEA; CONCERNING JUDAS OF GALILEE AND CONCERNING THE SECTS THAT WERE AMONG THE JEWS.

 

1. NOW Cyrenius, a Roman senator, and one who had gone through other magistracies, and had passed through them till he had been consul, and one who, on other accounts, was of great dignity, came at this time into Syria, with a few others, being sent by Caesar to he a judge of that nation, and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Coponius also, a man of the equestrian order, was sent together with him, to have the supreme power over the Jews. Moreover, Cyrenius came himself into Judea, which was now added to the province of Syria, to take an account of their substance, and to dispose of Archelaus's money; but the Jews, although at the beginning they took the report of a taxation heinously, yet did they leave off any further opposition to it, by the persuasion of Joazar, who was the son of Beethus, and high priest; so they, being over-pesuaded by Joazar's words, gave an account of their estates, without any dispute about it. Yet was there one Judas, a Gaulonite, (1) of a city whose name was Gamala, who, taking with him Sadduc, (2) a Pharisee, became zealous to draw them to a revolt, who both said that this taxation was no better than an introduction to slavery, and exhorted the nation to assert their liberty; as if they could procure them happiness and security for what they possessed, and an assured enjoyment of a still greater good, which was that of the honor and glory they would thereby acquire for magnanimity. They also said that God would not otherwise be assisting to them, than upon their joining with one another in such councils as might be successful, and for their own advantage; and this especially, if they would set about great exploits, and not grow weary in executing the same; so men received what they said with pleasure, and this bold attempt proceeded to a great height. All sorts of misfortunes also sprang from these men, and the nation was infected with this doctrine to an incredible degree; one violent war came upon us after another, and we lost our friends which used to alleviate our pains; there were also very great robberies and murder of our principal men. This was done in pretense indeed for the public welfare, but in reality for the hopes of gain to themselves; whence arose seditions, and from them murders of men, which sometimes fell on those of their own people, (by the madness of these men towards one another, while their desire was that none of the adverse party might be left,) and sometimes on their enemies; a famine also coming upon us, reduced us to the last degree of despair, as did also the taking and demolishing of cities; nay, the sedition at last increased so high, that the very temple of God was burnt down by their enemies' fire. Such were the consequences of this, that the customs of our fathers were altered, and such a change was made, as added a mighty weight toward bringing all to destruction, which these men occasioned by their thus conspiring together; for Judas and Sadduc, who excited a fourth philosophic sect among us, and had a great many followers therein, filled our civil government with tumults at present, and laid the foundations of our future miseries, by this system of philosophy, which we were before unacquainted withal, concerning which I will discourse a little, and this the rather because the infection which spread thence among the younger sort, who were zealous for it, brought the public to destruction.

 

2. The Jews had for a great while had three sects of philosophy peculiar to themselves; the sect of the Essens, and the sect of the Sadducees, and the third sort of opinions was that of those called Pharisees; of which sects, although I have already spoken in the second book of the Jewish War, yet will I a little touch upon them now.

 

3. Now, for the Pharisees, they live meanly, and despise delicacies in diet; and they follow the conduct of reason; and what that prescribes to them as good for them they do; and they think they ought earnestly to strive to observe reason's dictates for practice. They also pay a respect to such as are in years; nor are they so bold as to contradict them in any thing which they have introduced; and when they determine that all things are done by fate, they do not take away the freedom from men of acting as they think fit; since their notion is, that it hath pleased God to make a temperament, whereby what he wills is done, but so that the will of man can act virtuously or viciously. They also believe that souls have an immortal rigor in them, and that under the earth there will be rewards or punishments, according as they have lived virtuously or viciously in this life; and the latter are to be detained in an everlasting prison, but that the former shall have power to revive and live again; on account of which doctrines they are able greatly to persuade the body of the people; and whatsoever they do about Divine worship, prayers, and sacrifices, they perform them according to their direction; insomuch that the cities give great attestations to them on account of their entire virtuous conduct, both in the actions of their lives and their discourses also.

 

4. But the doctrine of the Sadducees is this: That souls die with the bodies; nor do they regard the observation of any thing besides what the law enjoins them; for they think it an instance of virtue to dispute with those teachers of philosophy whom they frequent: but this doctrine is received but by a few, yet by those still of the greatest dignity. But they are able to do almost nothing of themselves; for when they become magistrates, as they are unwillingly and by force sometimes obliged to be, they addict themselves to the notions of the Pharisees, because the multitude would not otherwise bear them.

 

5. The doctrine of the Essens is this: That all things are best ascribed to God. They teach the immortality of souls, and esteem that the rewards of righteousness are to be earnestly striven for; and when they send what they have dedicated to God into the temple, they do not offer sacrifices (3) because they have more pure lustrations of their own; on which account they are excluded from the common court of the temple, but offer their sacrifices themselves; yet is their course of life better than that of other men; and they entirely addict themselves to husbandry. It also deserves our admiration, how much they exceed all other men that addict themselves to virtue, and this in righteousness; and indeed to such a degree, that as it hath never appeared among any other men, neither Greeks nor barbarians, no, not for a little time, so hath it endured a long while among them. This is demonstrated by that institution of theirs, which will not suffer any thing to hinder them from having all things in common; so that a rich man enjoys no more of his own wealth than he who hath nothing at all. There are about four thousand men that live in this way, and neither marry wives, nor are desirous to keep servants; as thinking the latter tempts men to be unjust, and the former gives the handle to domestic quarrels; but as they live by themselves, they minister one to another. They also appoint certain stewards to receive the incomes of their revenues, and of the fruits of the ground; such as are good men and priests, who are to get their corn and their food ready for them. They none of them differ from others of the Essens in their way of living, but do the most resemble those Dacae who are called Polistae (4) [dwellers in cities].

 

6. But of the fourth sect of Jewish philosophy, Judas the Galilean was the author. These men agree in all other things with the Pharisaic notions; but they have an inviolable attachment to liberty, and say that God is to be their only Ruler and Lord. They also do not value dying any kinds of death, nor indeed do they heed the deaths of their relations and friends, nor can any such fear make them call any man lord. And since this immovable resolution of theirs is well known to a great many, I shall speak no further about that matter; nor am I afraid that any thing I have said of them should be disbelieved, but rather fear, that what I have said is beneath the resolution they show when they undergo pain. And it was in Gessius Florus's time that the nation began to grow mad with this distemper, who was our procurator, and who occasioned the Jews to go wild with it by the abuse of his authority, and to make them revolt from the Romans. And these are the sects of Jewish philosophy.

 

CHAPTER 2.

 

NOW HEROD AND PHILIP BUILT SEVERAL CITIES IN HONOR OF CAESAR. CONCERNING THE SUCCESSION OF PRIESTS AND PROCURATORS; AS ALSO WHAT BEFELL PHRAATES AND THE PARTHIANS.

 

1. WHEN Cyrenius had now disposed of Archelaus's money, and when the taxings were come to a conclusion, which were made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Caesar's victory over Antony at Actium, he deprived Joazar of the high priesthood, which dignity had been conferred on him by the multitude, and he appointed Ananus, the son of Seth, to be high priest; while Herod and Philip had each of them received their own tetrarchy, and settled the affairs thereof. Herod also built a wall about Sepphoris, (which is the security of all Galilee,) and made it the metropolis of the country. He also built a wall round Betharamphtha, which was itself a city also, and called it Julias, from the name of the emperor's wife. When Philip also had built Paneas, a city at the fountains of Jordan, he named it Cesarea. He also advanced the village Bethsaids, situate at the lake of Gennesareth, unto the dignity of a city, both by the number of inhabitants it contained, and its other grandeur, and called it by the name of Julias, the same name with Caesar's daughter.

 

2. As Coponius, who we told you was sent along with Cyrenius, was exercising his office of procurator, and governing Judea, the following accidents happened. As the Jews were celebrating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which we call the Passover, it was customary for the priests to open the temple-gates just after midnight. When, therefore, those gates were first opened, some of the Samaritans came privately into Jerusalem, and threw about dead men's bodies, in the cloisters; on which account the Jews afterward excluded them out of the temple, which they had not used to do at such festivals; and on other accounts also they watched the temple more carefully than they had formerly done. A little after which accident Coponius returned to Rome, and Marcus Ambivius came to be his successor in that government; under whom Salome, the sister of king Herod, died, and left to Julia, [Caesar's wife,] Jamnia, all its toparchy, and Phasaelis in the plain, and Arehelais, where is a great plantation of palm trees, and their fruit is excellent in its kind. After him came Annius Rufus, under whom died Caesar, the second emperor of the Romans, the duration of whose reign was fifty-seven years, besides six months and two days (of which time Antonius ruled together with him fourteen years; but the duration of his life was seventy-seven years); upon whose death Tiberius Nero, his wife Julia's son, succeeded. He was now the third emperor; and he sent Valerius Gratus to be procurator of Judea, and to succeed Annius Rufus. This man deprived Ananus of the high priesthood, and appointed Ismael, the son of Phabi, to be high priest. He also deprived him in a little time, and ordained Eleazar, the son of Ananus, who had been high priest before, to be high priest; which office, when he had held for a year, Gratus deprived him of it, and gave the high priesthood to Simon, the son of Camithus; and when he had possessed that dignity no longer than a year, Joseph Caiaphas was made his successor. When Gratus had done those things, he went back to Rome, after he had tarried in Judea eleven years, when Pontius Pilate came as his successor.

 

3. And now Herod the tetrarch, who was in great favor with Tiberius, built a city of the same name with him, and called it Tiberias. He built it in the best part of Galilee, at the lake of Gennesareth. There are warm baths at a little distance from it, in a village named Emmaus. Strangers came and inhabited this city; a great number of the inhabitants were Galileans also; and many were necessitated by Herod to come thither out of the country belonging to him, and were by force compelled to be its inhabitants; some of them were persons of condition. He also admitted poor people, such as those that were collected from all parts, to dwell in it. Nay, some of them were not quite free-men, and these he was benefactor to, and made them free in great numbers; but obliged them not to forsake the city, by building them very good houses at his own expenses, and by giving them land also; for he was sensible, that to make this place a habitation was to transgress the Jewish ancient laws, because many sepulchers were to be here taken away, in order to make room for the city Tiberias (5) whereas our laws pronounce that such inhabitants are unclean for seven days. (6)

 

4. About this time died Phraates, king of the Parthians, by the treachery of Phraataces his son, upon the occasion following: When Phraates had had legitimate sons of his own, he had also an Italian maid-servant, whose name was Thermusa, who had been formerly sent to him by Julius Caesar, among other presents. He first made her his concubine; but he being a great admirer of her beauty, in process of time having a son by her, whose name was Phraataces, he made her his legitimate wife, and had a great respect for her. Now she was able to persuade him to do any thing that she said, and was earnest in procuring the government of Parthia for her son; but still she saw that her endeavors would not succeed, unless she could contrive how to remove Phraates's legitimate sons [out of the kingdom;] so she persuaded him to send those his sons as pledges of his fidelity to Rome; and they were sent to Rome accordingly, because it was not easy for him to contradict her commands. Now while Phraataces was alone brought up in order to succeed in the government, he thought it very tedious to expect that government by his father's donation [as his successor]; he therefore formed a treacherous design against his father, by his mother's assistance, with whom, as the report went, he had criminal conversation also. So he was hated for both these vices, while his subjects esteemed this [wicked] love of his mother to be no way inferior to his parricide; and he was by them, in a sedition, expelled out of the country before he grew too great, and died. But as the best sort of Parthians agreed together that it was impossible they should be governed without a king, while also it was their constant practice to choose one of the family of Arsaces, [nor did their law allow of any others; and they thought this kingdom had been sufficiently injured already by the marriage with an Italian concubine, and by her issue,] they sent ambassadors, and called Orodes [to take the crown]; for the multitude would not otherwise have borne them; and though he was accused of very great cruelty, and was of an untractable temper, and prone to wrath, yet still he was one of the family of Arsaces. However, they made a conspiracy against him, and slew him, and that, as some say, at a festival, and among their sacrifices; (for it is the universal custom there to carry their swords with them;) but, as the more general report is, they slew him when they had drawn him out a hunting. So they sent ambassadors to Rome, and desired they would send one of those that were there as pledges to be their king. Accordingly, Vonones was preferred before the rest, and sent to them (for he seemed capable of such great fortune, which two of the greatest kingdoms under the sun now offered him, his own and a foreign one). However, the barbarians soon changed their minds, they being naturally of a mutable disposition, upon the supposal that this man was not worthy to be their governor; for they could not think of obeying the commands of one that had been a slave, (for so they called those that had been hostages,) nor could they bear the ignominy of that name; and this was the more intolerable, because then the Parthians must have such a king set over them, not by right of war, but in time of peace. So they presently invited Artabanus, king of Media, to be their king, he being also of the race of Arsaces. Artabanus complied with the offer that was made him, and came to them with an army. So Vonones met him; and at first the multitude of the Parthians stood on this side, and he put his army in array; but Artabanus was beaten, and fled to the mountains of Media. Yet did he a little after gather a great army together, and fought with Vonones, and beat him; whereupon Vonones fled away on horseback, with a few of his attendants about him, to Seleucia [upon Tigris]. So when Artabanus had slain a great number, and this after he had gotten the victory by reason of the very great dismay the barbarians were in, he retired to Ctesiphon with a great number of his people; and so he now reigned over the Parthians. But Vonones fled away to Armenia; and as soon as he came thither, he had an inclination to have the government of the country given him, and sent ambassadors to Rome [for that purpose]. But because Tiberius refused it him, and because he wanted courage, and because the Parthian king threatened him, and sent ambassadors to him to denounce war against him if he proceeded, and because he had no way to take to regain any other kingdom, (for the people of authority among the Armenians about Niphates joined themselves to Artabanus,) he delivered up himself to Silanus, the president of Syria, who, out of regard to his education at Rome, kept him in Syria, while Artabanus gave Armenia to Orodes, one of his own sons.

 

5. At this time died Antiochus, the king of Commagene; whereupon the multitude contended with the nobility, and both sent ambassadors to [Rome]; for the men of power were desirous that their form of government might be changed into that of a [Roman] province; as were the multitude desirous to be under kings, as their fathers had been. So the senate made a decree that Germanicus should be sent to settle the affairs of the East, fortune hereby taking a proper opportunity for depriving him of his life; for when he had been in the East, and settled all affairs there, his life was taken away by the poison which Piso gave him, as hath been related elsewhere. (7)

 

CHAPTER 3.

 

SEDITION OF THE JEWS AGAINST PONTIUS PILATE. CONCERNING CHRIST, AND WHAT BEFELL PAULINA AND THE JEWS AT ROME,

 

1. BUT now Pilate, the procurator of Judea, removed the army from Cesarea to Jerusalem, to take their winter quarters there, in order to abolish the Jewish laws. So he introduced Caesar's effigies, which were upon the ensigns, and brought them into the city; whereas our law forbids us the very making of images; on which account the former procurators were wont to make their entry into the city with such ensigns as had not those ornaments. Pilate was the first who brought those images to Jerusalem, and set them up there; which was done without the knowledge of the people, because it was done in the night time; but as soon as they knew it, they came in multitudes to Cesarea, and interceded with Pilate many days that he would remove the images; and when he would not grant their requests, because it would tend to the injury of Caesar, while yet they persevered in their request, on the sixth day he ordered his soldiers to have their weapons privately, while he came and sat upon his judgment-seat, which seat was so prepared in the open place of the city, that it concealed the army that lay ready to oppress them; and when the Jews petitioned him again, he gave a signal to the soldiers to encompass them routed, and threatened that their punishment should be no less than immediate death, unless they would leave off disturbing him, and go their ways home. But they threw themselves upon the ground, and laid their necks bare, and said they would take their death very willingly, rather than the wisdom of their laws should be transgressed; upon which Pilate was deeply affected with their firm resolution to keep their laws inviolable, and presently commanded the images to be carried back from Jerusalem to Cesarea.

 

2. But Pilate undertook to bring a current of water to Jerusalem, and did it with the sacred money, and derived the origin of the stream from the distance of two hundred furlongs. However, the Jews (8) were not pleased with what had been done about this water; and many ten thousands of the people got together, and made a clamor against him, and insisted that he should leave off that design. Some of them also used reproaches, and abused the man, as crowds of such people usually do. So he habited a great number of his soldiers in their habit, who carried daggers under their garments, and sent them to a place where they might surround them. So he bid the Jews himself go away; but they boldly casting reproaches upon him, he gave the soldiers that signal which had been beforehand agreed on; who laid upon them much greater blows than Pilate had commanded them, and equally punished those that were tumultuous, and those that were not; nor did they spare them in the least: and since the people were unarmed, and were caught by men prepared for what they were about, there were a great number of them slain by this means, and others of them ran away wounded. And thus an end was put to this sedition.

 

3. Now there was about this time Jesus, a wise man, if it be lawful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doer of wonderful works, a teacher of such men as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He drew over to him both many of the Jews and many of the Gentiles. He was [the] Christ. And when Pilate, at the suggestion of the principal men amongst us, had condemned him to the cross, (9) those that loved him at the first did not forsake him; for he appeared to them alive again the third day; (10) as the divine prophets had foretold these and ten thousand other wonderful things concerning him. And the tribe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are not extinct at this day.

 

4. About the same time also another sad calamity put the Jews into disorder, and certain shameful practices happened about the temple of Isis that was at Rome. I will now first take notice of the wicked attempt about the temple of Isis, and will then give an account of the Jewish affairs. There was at Rome a woman whose name was Paulina; one who, on account of the dignity of her ancestors, and by the regular conduct of a virtuous life, had a great reputation: she was also very rich; and although she was of a beautiful countenance, and in that flower of her age wherein women are the most gay, yet did she lead a life of great modesty. She was married to Saturninus, one that was every way answerable to her in an excellent character. Decius Mundus fell in love with this woman, who was a man very high in the equestrian order; and as she was of too great dignity to be caught by presents, and had already rejected them, though they had been sent in great abundance, he was still more inflamed with love to her, insomuch that he promised to give her two hundred thousand Attic drachmae for one night's lodging; and when this would not prevail upon her, and he was not able to bear this misfortune in his amours, he thought it the best way to famish himself to death for want of food, on account of Paulina's sad refusal; and he determined with himself to die after such a manner, and he went on with his purpose accordingly. Now Mundus had a freed-woman, who had been made free by his father, whose name was Ide, one skillful in all sorts of mischief. This woman was very much grieved at the young man's resolution to kill himself, (for he did not conceal his intentions to destroy himself from others,) and came to him, and encouraged him by her discourse, and made him to hope, by some promises she gave him, that he might obtain a night's lodging with Paulina; and when he joyfully hearkened to her entreaty, she said she wanted no more than fifty thousand drachmae for the entrapping of the woman. So when she had encouraged the young man, and gotten as much money as she required, she did not take the same methods as had been taken before, because she perceived that the woman was by no means to be tempted by money; but as she knew that she was very much given to the worship of the goddess Isis, she devised the following stratagem: She went to some of Isis's priests, and upon the strongest assurances [of concealment], she persuaded them by words, but chiefly by the offer of money, of twenty-five thousand drachmae in hand, and as much more when the thing had taken effect; and told them the passion of the young man, and persuaded them to use all means possible to beguile the woman. So they were drawn in to promise so to do, by that large sum of gold they were to have. Accordingly, the oldest of them went immediately to Paulina; and upon his admittance, he desired to speak with her by herself. When that was granted him, he told her that he was sent by the god Anubis, who was fallen in love with her, and enjoined her to come to him. Upon this she took the message very kindly, and valued herself greatly upon this condescension of Anubis, and told her husband that she had a message sent her, and was to sup and lie with Anubis; so he agreed to her acceptance of the offer, as fully satisfied with the chastity of his wife. Accordingly, she went to the temple, and after she had supped there, and it was the hour to go to sleep, the priest shut the doors of the temple, when, in the holy part of it, the lights were also put out. Then did Mundus leap out, (for he was hidden therein,) and did not fail of enjoying her, who was at his service all the night long, as supposing he was the god; and when he was gone away, which was before those priests who knew nothing of this stratagem were stirring, Paulina came early to her husband, and told him how the god Anubis had appeared to her. Among her friends, also, she declared how great a value she put upon this favor, who partly disbelieved the thing, when they reflected on its nature, and partly were amazed at it, as having no pretense for not believing it, when they considered the modesty and the dignity of the person. But now, on the third day after what had been done, Mundus met Paulina, and said, "Nay, Paulina, thou hast saved me two hundred thousand drachmae, which sum thou sightest have added to thy own family; yet hast thou not failed to be at my service in the manner I invited thee. As for the reproaches thou hast laid upon Mundus, I value not the business of names; but I rejoice in the pleasure I reaped by what I did, while I took to myself the name of Anubis." When he had said this, he went his way. But now she began to come to the sense of the grossness of what she had done, and rent her garments, and told her husband of the horrid nature of this wicked contrivance, and prayed him not to neglect to assist her in this case. So he discovered the fact to the emperor; whereupon Tiberius inquired into the matter thoroughly by examining the priests about it, and ordered them to be crucified, as well as Ide, who was the occasion of their perdition, and who had contrived the whole matter, which was so injurious to the woman. He also demolished the temple of Isis, and gave order that her statue should be thrown into the river Tiber; while he only banished Mundus, but did no more to him, because he supposed that what crime he had committed was done out of the passion of love. And these were the circumstances which concerned the temple of Isis, and the injuries occasioned by her priests. I now return to the relation of what happened about this time to the Jews at Rome, as I formerly told you I would.

 

5. There was a man who was a Jew, but had been driven away from his own country by an accusation laid against him for transgressing their laws, and by the fear he was under of punishment for the same; but in all respects a wicked man. He, then living at Rome, professed to instruct men in the wisdom of the laws of Moses. He procured also three other men, entirely of the same character with himself, to be his partners. These men persuaded Fulvia, a woman of great dignity, and one that had embraced the Jewish religion, to send purple and gold to the temple at Jerusalem; and when they had gotten them, they employed them for their own uses, and spent the money themselves, on which account it was that they at first required it of her. Whereupon Tiberius, who had been informed of the thing by Saturninus, the husband of Fulvia, who desired inquiry might be made about it, ordered all the Jews to be banished out of Rome; at which time the consuls listed four thousand men out of them, and sent them to the island Sardinia; but punished a greater number of them, who were unwilling to become soldiers, on account of keeping the laws of their forefathers. (11) Thus were these Jews banished out of the city by the wickedness of four men.

 

CHAPTER 4.

 

HOW THE SAMARITANS MADE A TUMULT AND PILATE DESTROYED MANY OF THEM; HOW PILATE WAS ACCUSED AND WHAT THINGS WERE DONE BY VITELLIUS RELATING TO THE JEWS AND THE PARTHIANS.

 

1. BUT the nation of the Samaritans did not escape without tumults. The man who excited them to it was one who thought lying a thing of little consequence, and who contrived every thing so that the multitude might be pleased; so he bid them to get together upon Mount Gerizzim, which is by them looked upon as the most holy of all mountains, and assured them, that when they were come thither, he would show them those sacred vessels which were laid under that place, because Moses put them there (12) So they came thither armed, and thought the discourse of the man probable; and as they abode at a certain village, which was called Tirathaba, they got the rest together to them, and desired to go up the mountain in a great multitude together; but Pilate prevented their going up, by seizing upon file roads with a great band of horsemen and foot-men, who fell upon those that were gotten together in the village; and when it came to an action, some of them they slew, and others of them they put to flight, and took a great many alive, the principal of which, and also the most potent of those that fled away, Pilate ordered to be slain.

 

2. But when this tumult was appeased, the Samaritan senate sent an embassy to Vitellius, a man that had been consul, and who was now president of Syria, and accused Pilate of the murder of those that were killed; for that they did not go to Tirathaba in order to revolt from the Romans, but to escape the violence of Pilate. So Vitellius sent Marcellus, a friend of his, to take care of the affairs of Judea, and ordered Pilate to go to Rome, to answer before the emperor to the accusations of the Jews. So Pilate, when he had tarried ten years in Judea, made haste to Rome, and this in obedience to the orders of Vitellius, which he durst not contradict; but before he could get to Rome Tiberius was dead.

 

3. But Vitellius came into Judea, and went up to Jerusalem; it was at the time of that festival which is called the Passover. Vitellius was there magnificently received, and release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from all the taxes upon the fruits that were bought and sold, and gave them leave to have the care of the high priest's vestments, with all their ornaments, and to have them under the custody of the priests in the temple, which power they used to have formerly, although at this time they were laid up in the tower of Antonia, the citadel so called, and that on the occasion following: There was one of the [high] priests, named Hyrcanus; and as there were many of that name, he was the first of them; this man built a tower near the temple, and when he had so done, he generally dwelt in it, and had these vestments with him, because it was lawful for him alone to put them on, and he had them there reposited when he went down into the city, and took his ordinary garments; the same things were continued to be done by his sons, and by their sons after them. But when Herod came to be king, he rebuilt this tower, which was very conveniently situated, in a magnificent manner; and because he was a friend to Antonius, he called it by the name of Antonia. And as he found these vestments lying there, he retained them in the same place, as believing, that while he had them in his custody, the people would make no innovations against him. The like to what Herod did was done by his son Archelaus, who was made king after him; after whom the Romans, when they entered on the government, took possession of these vestments of the high priest, and had them reposited in a stone-chamber, under the seal of the priests, and of the keepers of the temple, the captain of the guard lighting a lamp there every day; and seven days before a festival (13) they were delivered to them by the captain of the guard, when the high priest having purified them, and made use of them, laid them up again in the same chamber where they had been laid up before, and this the very next day after the feast was over. This was the practice at the three yearly festivals, and on the fast day; but Vitellius put those garments into our own power, as in the days of our forefathers, and ordered the captain of the guard not to trouble himself to inquire where they were laid, or when they were to be used; and this he did as an act of kindness, to oblige the nation to him. Besides which, he also deprived Joseph, who was also called Caiaphas, of the high priesthood, and appointed Jonathan the son of Ananus, the former high priest, to succeed him. After which, he took his journey back to Antioch.

 

4. Moreover, Tiberius sent a letter to Vitellius, and commanded him to make a league of friendship with Artabanus, the king of Parthia; for while he was his enemy, he terrified him, because he had taken Armenia away from him, lest he should proceed further, and told him he should no otherwise trust him than upon his giving him hostages, and especially his son Artabanus. Upon Tiberius's writing thus to Vitellius, by the offer of great presents of money, he persuaded both the king of Iberia and the king of Albania to make no delay, but to fight against Artabanus; and although they would not do it themselves, yet did they give the Scythians a passage through their country, and opened the Caspian gates to them, and brought them upon Artabanus. So Armenia was again taken from the Parthians, and the country of Parthis was filled with war, and the principal of their men were slain, and all things were in disorder among them: the king's son also himself fell in these wars, together with. many ten thousands of his army. Vitellius had also sent such great sums of money to Artabanus's father's kinsmen and friends, that he had almost procured him to be slain by the means of those bribes which they had taken. And when Artabanus perceived that the plot laid against him was not to be avoided, because it was laid by the principal men, and those a great many in number, and that it would certainly take effect, — when he had estimated the number of those that were truly faithful to him, as also of those who were already corrupted, but were deceitful in the kindness they professed to him, and were likely, upon trial, to go over to his enemies, he made his escape to the upper provinces, where he afterwards raised a great army out of the Dahae and Sacre, and fought with his enemies, and retained his principality.

 

5. When Tiberius had heard of these things, he desired to have a league of friendship made between him and Artabanus; and when, upon this invitation, he received the proposal kindly, Artabanus and Vitellius went to Euphrates, and as a bridge was laid over the river, they each of them came with their guards about them, and met one another on the midst of the bridge. And when they had agreed upon the terms of peace Herod, the tetrarch erected a rich tent on the midst of the passage, and made them a feast there. Artabanus also, not long afterward, sent his son Darius as an hostage, with many presents, among which there was a man seven cubits tall, a Jew he was by birth, and his name was Eleazar, who, for his tallness, was called a giant. After which Vitellius went to Antioch, and Artabanus to Babylon; but Herod [the tetrarch] being desirous to give Caesar the first information that they had obtained hostages, sent posts with letters, wherein he had accurately described all the particulars, and had left nothing for the consular Vitellius to inform him of. But when Vitellius's letters were sent, and Caesar had let him know that he was acquainted with the affairs already, because Herod had given him an account of them before, Vitellius was very much troubled at it; and supposing that he had been thereby a greater sufferer than he really was, he kept up a secret anger upon this occasion, till he could be revenged on him, which he was after Caius had taken the government.

 

6. About this time it was that Philip, Herod's ' brother, departed this life, in the twentieth year of the reign of Tiberius, (14) after he had been tetrarch of Trachonitis and Gaulanitis, and of the nation of the Bataneans also, thirty-seven years. He had showed himself a person of moderation and quietness in the conduct of his life and government; he constantly lived in that country which was subject to him; he used to make his progress with a few chosen friends; his tribunal also, on which he sat in judgment, followed him in his progress; and when any one met him who wanted his assistance, he made no delay, but had his tribunal set down immediately, wheresoever he happened to be, and sat down upon it, and heard his complaint: he there ordered the guilty that were convicted to be punished, and absolved those that had been accused unjustly. He died at Julias; and when he was carried to that monument which he had already erected for himself beforehand, he was buried with great pomp. His principality Tiberius took, (for he left no sons behind him,) and added it to the province of Syria, but gave order that the tributes which arose from it should be collected, and laid up in his tetrachy.

 

CHAPTER 5.

 

HEROD THE TETRARCH MAKES WAR WITH ARETAS, THE KING OF ARABIA, AND IS BEATEN BY HIM AS ALSO CONCERNING THE DEATH OF JOHN THE BAPTIST. HOW VITELLIUS WENT UP TO JERUSALEM; TOGETHER WITH SOME ACCOUNT OF AGRIPPA AND OF THE POSTERITY OF HEROD THE GREAT.

 

1. ABOUT this time Aretas (the king of Arabia Petres) and Herod had a quarrel on the account following: Herod the tetrarch had, married the daughter of Aretas, and had lived with her a great while; but when he was once at Rome, he lodged with Herod, (15) who was his brother indeed, but not by the same mother; for this Herod was the son of the high priest Sireoh's daughter. However, he fell in love with Herodias, this last Herod's wife, who was the daughter of Aristobulus their brother, and the sister of Agrippa the Great. This man ventured to talk to her about a marriage between them; which address, when she admitted, an agreement was made for her to change her habitation, and come to him as soon as he should return from Rome: one article of this marriage also was this, that he should divorce Aretas's daughter. So Antipus, when he had made this agreement, sailed to Rome; but when he had done there the business he went about, and was returned again, his wife having discovered the agreement he had made with Herodias, and having learned it before he had notice of her knowledge of the whole design, she desired him to send her to Macherus, which is a place in the borders of the dominions of Aretas and Herod, without informing him of any of her intentions. Accordingly Herod sent her thither, as thinking his wife had not perceived any thing; now she had sent a good while before to Macherus, which was subject to her father and so all things necessary for her journey were made ready for her by the general of Aretas's army; and by that means she soon came into Arabia, under the conduct of the several generals, who carried her from one to another successively; and she soon came to her father, and told him of Herod's intentions. So Aretas made this the first occasion of his enmity between him and Herod, who had also some quarrel with him about their limits at the country of Gamalitis. So they raised armies on both sides, and prepared for war, and sent their generals to fight instead of themselves; and when they had joined battle, all Herod's army was destroyed by the treachery of some fugitives, who, though they were of the tetrarchy of Philip, joined with Aretas's army.. So Herod wrote about these affairs to Tiberius, who being very angry at the attempt made by Aretas, wrote to Vitellius to make war upon him, and either to take him alive, and bring him to him in bonds, or to kill him, and send him his head. This was the charge that Tiberius gave to the president of Syria.

 

2. Now some of the Jews thought that the destruction of Herod's army came from God, and that very justly, as a punishment of what he did against John, that was called the Baptist: for Herod slew him, who was a good man, and commanded the Jews to exercise virtue, both as to righteousness towards one another, and piety towards God, and so to come to baptism; for that the washing [with water] would be acceptable to him, if they made use of it, not in order to the putting away [or the remission] of some sins [only], but for the purification of the body; supposing still that the soul was thoroughly purified beforehand by righteousness. Now when [many] others came in crowds about him, for they were very greatly moved [or pleased] by hearing his words, Herod, who feared lest the great influence John had over the people might put it into his power and inclination to raise a rebellion, (for they seemed ready to do any thing he should advise,) thought it best, by putting him to death, to prevent any mischief he might cause, and not bring himself into difficulties, by sparing a man who might make him repent of it when it would be too late. Accordingly he was sent a prisoner, out of Herod's suspicious temper, to Macherus, the castle I before mentioned, and was there put to death. Now the Jews had an opinion that the destruction of this army was sent as a punishment upon Herod, and a mark of God's displeasure to him.

 

3. So Vitellius prepared to make war with Aretas, having with him two legions of armed men; he also took with him all those of light armature, and of the horsemen which belonged to them, and were drawn out of those kingdoms which were under the Romans, and made haste for Petra, and came to Ptolemais. But as he was marching very busily, and leading his army through Judea, the principal men met him, and desired that he would not thus march through their land; for that the laws of their country would not permit them to overlook those images which were brought into it, of which there were a great many in their ensigns; so he was persuaded by what they said, and changed that resolution of his which he had before taken in this matter. Whereupon he ordered the army to march along the great plain, while he himself, with Herod the tetrarch and his friends, went up to Jerusalem to offer sacrifice to God, an ancient festival of the Jews being then just approaching; and when he had been there, and been honorably entertained by the multitude of the Jews, he made a stay there for three days, within which time he deprived Jonathan of the high priesthood, and gave it to his brother Theophilus. But when on the fourth day letters came to him, which informed him of the death of Tiberius, he obliged the multitude to take an oath of fidelity to Caius; he also recalled his army, and made them every one go home, and take their winter quarters there, since, upon the devolution of the empire upon Caius, he had not the like authority of making this war which he had before. It was also reported, that when Aretas heard of the coming of Vitellius to fight him, he said, upon his consulting the diviners, that it was impossible that this army of Vitellius's could enter Petra; for that one of the rulers would die, either he that gave orders for the war, or he that was marching at the other's desire, in order to be subservient to his will, or else he against whom this army is prepared. So Vitellius truly retired to Antioch; but Agrippa, the son of Aristobulus, went up to Rome, a year before the death of Tiberius, in order to treat of some affairs with the emperor, if he might be permitted so to do. I have now a mind to describe Herod and his family, how it fared with them, partly because it is suitable to this history to speak of that matter, and partly because this thing is a demonstration of the interposition of Providence, how a multitude of children is of no advantage, no more than any other strength that mankind set their hearts upon, besides those acts of piety which are done towards God; for it happened, that, within the revolution of a hundred years, the posterity of Herod, which were a great many in number, were, excepting a few, utterly destroyed. (16) One may well apply this for the instruction of mankind, and learn thence how unhappy they were: it will also show us the history of Agrippa, who, as he was a person most worthy of admiration, so was he from a private man, beyond all the expectation of those that knew him, advanced to great power and authority. I have said something of them formerly, but I shall now also speak accurately about them.

 

4. Herod the Great had two daughters by Mariamne, the [grand] daughter of Hyrcanus; the one was Salampsio, who was married to Phasaelus, her first cousin, who was himself the son of Phasaelus, Herod's brother, her father making the match; the other was Cypros, who was herself married also to her first cousin Antipater, the son of Salome, Herod's sister. Phasaelus had five children by Salampsio; Antipater, Herod, and Alexander, and two daughters, Alexandra and Cypros; which last Agrippa, the son of Aristobulus, married; and Timius of Cyprus married Alexandra; he was a man of note, but had by her no children. Agrippa had by Cypros two sons and three daughters, which daughters were named Bernice, Mariarune, and Drusius; but the names of the sons were Agrippa and Drusus, of which Drusus died before he came to the years of puberty; but their father, Agrippa, was brought up with his other brethren, Herod and Aristobulus, for these were also the sons of the son of Herod the Great by Bernice; but Bernice was the daughter of Costobarus and of Salome, who was Herod's sister. Aristobulus left these infants when he was slain by his father, together with his brother Alexander, as we have already related. But when they were arrived at years of puberty, this Herod, the brother of Agrippa, married Mariamne, the daughter of Olympias, who was the daughter of Herod the king, and of Joseph, the son of Joseph, who was brother to Herod the king, and had by her a son, Aristobulus; but Aristobulus, the third brother of Agrippa, married Jotape, the daughter of Sampsigeramus, king of Emesa; they had a daughter who was deaf, whose name also was Jotape; and these hitherto were the children of the male line. But Herodias, their sister, was married to Herod [Philip], the son of Herod the Great, who was born of Mariamne, the daughter of Simon the high priest, who had a daughter, Salome; after whose birth Herodias took upon her to confound the laws of our country, and divorced herself from her husband while he was alive, and was married to Herod [Antipas], her husband's brother by the father's side, he was tetrarch of Galilee; but her daughter Salome was married to Philip, the son of Herod, and tetrarch of Trachonitis; and as he died childless, Aristobulus, the son of Herod, the brother of Agrippa, married her; they had three sons, Herod, Agrippa, and Aristobulus; and this was the posterity of Phasaelus and Salampsio. But the daughter of Antipater by Cypros was Cypros, whom Alexas Selcias, the son of Alexas, married; they had a daughter, Cypros; but Herod and Alexander, who, as we told you, were the brothers of Antipater, died childless. As to Alexander, the son of Herod the king, who was slain by his father, he had two sons, Alexander and Tigranes, by the daughter of Archelaus, king of Cappadocia. Tigranes, who was king of Armenia, was accused at Rome, and died childless; Alexander had ason of the same name with his brother Tigranes, and was sent to take possession of the kingdom of Armenia by Nero; he had a son, Alexander, who married Jotape, (17) the daughter of Antiochus, the king of Commagena; Vespasian made him king of an island in Cilicia. But these descendants of Alexander, soon after their birth, deserted the Jewish religion, and went over to that of the Greeks. But for the rest of the daughters of Herod the king, it happened that they died childless. And as these descendants of Herod, whom we have enumerated, were in being at the same time that Agrippa the Great took the kingdom, and I have now given an account of them, it now remains that I relate the several hard fortunes which befell Agrippa, and how he got clear of them, and was advanced to the greatest height of dignity and power.

 

CHAPTER 6.

 

OF THE NAVIGATION OF KING AGRIPPA TO ROME, TO TIBERIUS CAESAR; AND NOW UPON HIS BEING ACCUSED BY HIS OWN FREED-MAN, HE WAS BOUND; HOW ALSO HE, WAS SET AT LIBERTY BY CAIUS, AFTER TIBERIUS’S DEATH AND WAS MADE KING OF THE TETRARCHY OF PHILIP.

 

1. A LITTLE before the death of Herod the king, Agrippa lived at Rome, and was generally brought up and conversed with Drusus, the emperor Tiberius's son, and contracted a friendship with Antonia, the wife of Drusus the Great, who had his mother Bernice in great esteem, and was very desirous of advancing her son. Now as Agrippa was by nature magnanimous and generous in the presents he made, while his mother was alive, this inclination of his mind did not appear, that he might be able to avoid her anger for such his extravagance; but when Bernice was dead, and he was left to his own conduct, he spent a great deal extravagantly in his daily way of living, and a great deal in the immoderate presents he made, and those chiefly among Caesar's freed-men, in order to gain their assistance, insomuch that he was, in a little time, reduced to poverty, and could not live at Rome any longer. Tiberius also forbade the friends of his deceased son to come into his sight, because on seeing them he should be put in mind of his son, and his grief would thereby be revived.

 

2. For these reasons he went away from Rome, and sailed to Judea, but in evil circumstances, being dejected with the loss of that money which he once had, and because he had not wherewithal to pay his creditors, who were many in number, and such as gave him no room for escaping them. Whereupon he knew not what to do; so, for shame of his present condition, he retired to a certain tower, at Malatha, in Idumea, and had thoughts of killing himself; but his wife Cypros perceived his intentions, and tried all sorts of methods to divert him from his taking such a course; so she sent a letter to his sister Herodias, who was now the wife of Herod the tetrarch, and let her know Agrippa's present design, and what necessity it was which drove him thereto, and desired her, as a kinswoman of his, to give him her help, and to engage her husband to do the same, since she saw how she alleviated these her husband's troubles all she could, although she had not the like wealth to do it withal. So they sent for him, and allotted him Tiberias for his habitation, and appointed him some income of money for his maintenance, and made him a magistrate of that city, by way of honor to him. Yet did not Herod long continue in that resolution of supporting him, though even that support was not sufficient for him; for as once they were at a feast at Tyre, and in their cups, and reproaches were cast upon one another, Agrippa thought that was not to be borne, while Herod hit him in the teeth with his poverty, and with his owing his necessary food to him. So he went to Flaccus, one that had been consul, and had been a very great friend to him at Rome formerly, and was now president of Syria.

 

3. Hereupon Flaccus received him kindly, and he lived with him. Flaccus had also with him there Aristobulus, who was indeed Agrippa's brother, but was at variance with him; yet did not their enmity to one another hinder the friendship of Flaccus to them both, but still they were honorably treated by him. However, Aristobulus did not abate of his ill-will to Agrippa, till at length he brought him into ill terms with Flaccus; the occasion of bringing on which estrangement was this: The Damascens were at difference with the Sidonians about their limits, and when Flaccus was about to hear the cause between them, they understood that Agrippa had a mighty influence upon him; so they desired that he would be of their side, and for that favor promised him a great deal of money; so he was zealous in assisting the Damascens as far as he was able. Now Aristobulus had gotten intelligence of this promise of money to him, and accused him to Flaccus of the same; and when, upon a thorough examination of the matter, it appeared plainly so to be, he rejected Agrippa out of the number of his friends. So he was reduced to the utmost necessity, and came to Ptolemais; and because he knew not where else to get a livelihood, he thought to sail to Italy; but as he was restrained from so doing by want of money, he desired Marsyas, who was his freed-man, to find some method for procuring him so much as he wanted for that purpose, by borrowing such a sum of some person or other. So Marsyas desired of Peter, who was the freed-man of Bernice, Agrippa's mother, and by the right of her testament was bequeathed to Antonia, to lend so much upon Agrippa's own bond and security; but he accused Agrippa of having defrauded him of certain sums of money, and so obliged Marsyas, when he made the bond of twenty thousand Attic drachmae, to accept of twenty-five hundred drachma as (18) less than what he desired, which the other allowed of, because he could not help it. Upon the receipt of this money, Agrippa came to Anthedon, and took shipping, and was going to set sail; but Herennius Capito, who was the procurator of Jamhis, sent a band of soldiers to demand of him three hundred thousand drachmae of silver, which were by him owing to Caesar's treasury while he was at Rome, and so forced him to stay. He then pretended that he would do as he bid him; but when night came on, he cut his cables, and went off, and sailed to Alexandria, where he desired Alexander the alabarch (19) to lend him two hundred thousand drachmae; but he said he would not lend it to him, but would not refuse it to Cypros, as greatly astonished at her affection to her husband, and at the other instances of her virtue; so she undertook to repay it. Accordingly, Alexander paid them five talents at Alexandria, and promised to pay them the rest of that sum at Dicearchia [Puteoli]; and this he did out of the fear he was in that Agrippa would soon spend it. So this Cypros set her husband free, and dismissed him to go on with his navigation to Italy, while she and her children departed for Judea.

 

4. And now Agrippa was come to Puteoli, whence he wrote a letter to Tiberius Caesar, who then lived at Capreae, and told him that he was come so far in order to wait on him, and to pay him a visit; and desired that he would give him leave to come over to Caprein: so Tiberius made no difficulty, but wrote to him in an obliging way in other respects; and withal told him he was glad of his safe return, and desired him to come to Capreae; and when he was come, he did not fail to treat him as kindly as he had promised him in his letter to do. But the next day came a letter to Caesar from Herennius Capito, to inform him that Agrippa had borrowed three hundred thousand drachmae, and not pad it at the time appointed; but when it was demanded of him, he ran away like a fugitive, out of the places under his government, and put it out of his power to get the money of him. When Caesar had read this letter, he was much troubled at it, and gave order that Agrippa should be excluded from his presence until he had paid that debt: upon which he was no way daunted at Caesar's anger, but entreated Antonia, the mother of Germanicus, and of Claudius, who was afterward Caesar himself, to lend him those three hundred thousand drachmae, that he might not be deprived of Tiberius's friendship; so, out of regard to the memory of Bernice his mother, (for those two women were very familiar with one another,) and out of regard to his and Claudius's education together, she lent him the money; and, upon the payment of this debt, there was nothing to hinder Tiberius's friendship to him. After this, Tiberius Caesar recommended to him his grandson, (20) and ordered that he should always accompany him when he went abroad. But upon Agrippa's kind reception by Antonia, he betook him to pay his respects to Caius, who was her grandson, and in very high reputation by reason of the good-will they bare his father. Now there was one Thallus, a freed-man of Caesar, of whom he borrowed a million of drachmae, and thence repaid Antonia the debt he owed her; and by sending the overplus in paying his court to Caius, became a person of great authority with him.

 

5. Now as the friendship which Agrippa had for Caius was come to a great height, there happened some words to pass between them, as they once were in a chariot together, concerning Tiberius; Agrippa praying [to God] (for they two sat by themselves) that Tiberius might soon go off the stage, and leave the government to Caius, who was in every respect more worthy of it. Now Eutychus, who was Agrippa's freed-man, and drove his chariot, heard these words, and at that time said nothing of them; but when Agrippa accused him of stealing some garments of his, (which was certainly true,) he ran away from him; but when he was caught, and brought before Piso, who was governor of the city, and the man was asked why he ran away, be replied, that he had somewhat to say to Caesar, that tended to his security and preservation: so Piso bound him, and sent him to Capreae. But Tiberius, according to his usual custom, kept him still in bonds, being a delayer of affairs, if ever there was any other king or tyrant that was so; for he did not admit ambassadors quickly, and no successors were despatched away to governors or procurators of the provinces that had been formerly sent, unless they were dead; whence it was that he was so negligent in hearing the causes of prisoners; insomuch that when he was asked by his friends what was the reason of his delay in such cases, he said that he delayed to hear ambassadors, lest, upon their quick dismission, other ambassadors should be appointed, and return upon him; and so he should bring trouble upon himself in their public reception and dismission: that he permitted those governors who had been sent once to their government [to stay there a long while], out of regard to the subjects that were under them; for that all governors are naturally disposed to get as much as they can; and that those who are not to fix there, but to stay a short time, and that at an uncertainty when they shall be turned out, do the more severely hurry themselves on to fleece the people; but that if their government be long continued to them; they are at last satiated with the spoils, as having gotten a vast deal, and so become at length less sharp in their pillaging; but that if successors are sent quickly, the poor subjects, who are exposed to them as a prey, will not be able to bear the new ones, while they shall not have the same time allowed them wherein their predecessors had filled themselves, and so grew more unconcerned about getting more; and this because they are removed before they have had time [for their oppressions]. He gave them an example to show his meaning: A great number of flies came about the sore places of a man that had been wounded; upon which one of the standers-by pitied the man's misfortune, and thinking he was not able to drive those flies away himself, was going to drive them away for him; but he prayed him to let them alone: the other, by way of reply, asked him the reason of such a preposterous proceeding, in preventing relief from his present misery; to which he answered, "If thou drivest these flies away, thou wilt hurt me worse; for as these are already full of my blood, they do not crowd about me, nor pain me so much as before, but are somewhat more remiss, while the fresh ones that come almost famished, and find me quite tired down already, will be my destruction. For this cause, therefore, it is that I am myself careful not to send such new governors perpetually to those my subjects, who are already sufficiently harassed by many oppressions, as may, like these flies, further distress them; and so, besides their natural desire of gain, may have this additional incitement to it, that they expect to be suddenly deprived of that pleasure which they take in it." And, as a further attestation to what I say of the dilatory nature of Tiberius, I appeal to this his practice itself; for although he was emperor twenty-two years, he sent in all but two procurators to govern the nation of the Jews, Gratus, and his successor in the government, Pilate. Nor was he in one way of acting with respect to the Jews, and in another with respect to the rest of his subjects. He further informed them, that even in the hearing of the causes of prisoners, he made such delays, because immediate death to those that must be condemned to die would be an alleviation of their present miseries, while those wicked wretches have not deserved any such favor; "but I do it, that, by being harassed with the present calamity, they may undergo greater misery."

 

6. On this account it was that Eutychus could not obtain a bearing, but was kept still in prison. However, some time afterward, Tiberius came from Capreae to Tusculanum, which is about a hundred furlongs from Rome. Agrippa then desired of Antonia that she would procure a hearing for Eutychus, let the matter whereof he accused him prove what it would. Now Antonia was greatly esteemed by Tiberius on all accounts, from the dignity of her relation to him, who had been his brother Drusus's wife, and from her eminent chastity; (21) for though she was still a young woman, she continued in her widowhood, and refused all other matches, although Augustus had enjoined her to be married to somebody else; yet did she all along preserve her reputation free from reproach. She had also been the greatest benefactress to Tiberius, when there was a very dangerous plot laid against him by Sejanus, a man who had been her husband's friend, and wire had the greatest authority, because he was general of the army, and when many members of the senate and many of the freed-men joined with him, and the soldiery was corrupted, and the plot was come to a great height. Now Sejanus had certainly gained his point, had not Antonia's boldness been more wisely conducted than Sejanus's malice; for when she had discovered his designs against Tiberius, she wrote him an exact account of the whole, and gave the letter to Pallas, the most faithful of her servants, and sent him to Caprere to Tiberius, who, when he understood it, slew Sejanus and his confederates; so that Tiberius, who had her in great esteem before, now looked upon her with still greater respect, and depended upon her in all things. So when Tiberius was desired by this Antonia to examine Eutychus, he answered, "If indeed Eutychus hath falsely accused Agrippa in what he hath said of him, he hath had sufficient punishment by what I have done to him already; but if, upon examination, the accusation appears to be true, let Agrippa have a care, lest, out of desire of punishing his freed-man, he do not rather bring a punishment upon himself." Now when Antonia told Agrippa of this, he was still much more pressing that the matter might be examined into; so Antonia, upon Agrippa's lying hard at her continually to beg this favor, took the following opportunity: As Tiberius lay once at his ease upon his sedan, and was carried about, and Caius, her grandson, and Agrippa, were before him after dinner she walked by the sedan, and desired him to call Eutychus, and have him examined; to which he replied, "O Antonia! the gods are my witnesses that I am induced to do what I am going to do, not by my own inclination, but because I am forced to it by thy prayers." When he had said this, he ordered Macro, who succeeded Sejanus, to bring Eutychus to him; accordingly, without any delay, he was brought. Then Tiberius asked him what he had to say against a man who had given him his liberty. Upon which he said, "O my lord! this Caius, and Agrippa with him, were once riding in a chariot, when I sat at their feet, and, among other discourses that passed, Agrippa said to Caius, Oh that the day would once come when this old fellow will dies and name thee for the governor of the habitable earth! for then this Tiberius, his grandson, would be no hinderance, but would be taken off by thee, and that earth would be happy, and I happy also." Now Tiberius took these to be truly Agrippa's words, and bearing a grudge withal at Agrippa, because, when he had commanded him to pay his respects to Tiberius, his grandson, and the son of Drusus, Agrippa had not paid him that respect, but had disobeyed his commands, and transferred all his regard to Caius; he said to Macro, "Bind this man." But Macro, not distinctly knowing which of them it was whom he bid him bind, and not expecting that he would have any such thing done to Agrippa, he forbore, and came to ask more distinctly what it was that he said. But when Caesar had gone round the hippodrome, he found Agrippa standing: "For certain," said he, "Macro, this is the man I meant to have bound;" and when he still asked, "Which of these is to be bound?" he said "Agrippa." Upon which Agrippa betook himself to make supplication for himself, putting him in mind of his son, with whom he was brought up, and of Tiberius [his grandson] whom he had educated; but all to no purpose; for they led him about bound even in his purple garments. It was also very hot weather, and they had but little wine to their meal, so that he was very thirsty; he was also in a sort of agony, and took this treatment of him heinously: as he therefore saw one of Caius's slaves, whose name was Thaumastus, carrying some water in a vessel, he desired that he would let him drink; so the servant gave him some water to drink, and he drank heartily, and said, "O thou boy! this service of thine to me will be for thy advantage; for if I once get clear of these my bonds, I will soon procure thee thy freedom of Caius who has not been wanting to minister to me now I am in bonds, in the same manner as when I was in my former state and dignity." Nor did he deceive him in what he promised him, but made him amends for what he had now done; for when afterward Agrippa was come to the kingdom, he took particular care of Thaumastus, and got him his liberty from Caius, and made him the steward over his own estate; and when he died, he left him to Agrippa his son, and to Bernice his daughter, to minister to them in the same capacity. The man also grew old in that honorable post, and therein died. But all this happened a good while later.

 

7. Now Agrippa stood in his bonds before the royal palace, and leaned on a certain tree for grief, with many others,. who were in bonds also; and as a certain bird sat upon the tree on which Agrippa leaned, (the Romans call this bird bubo,) [an owl,] one of those that were bound, a German by nation, saw him, and asked a soldier who that man in purple was; and when he was informed that his name was Agrippa, and that he was by nation a Jew, and one of the principal men of that nation, he asked leave of the soldier to whom he was bound, (22) to let him come nearer to him, to speak with him; for that he had a mind to inquire of him about some things relating to his country; which liberty, when he had obtained, and as he stood near him, he said thus to him by an interpreter: "This sudden change of thy condition, O young man! is grievous to thee, as bringing on thee a manifold and very great adversity; nor wilt thou believe me, when I foretell how thou wilt get clear of this misery which thou art now under, and how Divine Providence will provide for thee. Know therefore (and I appeal to my own country gods, as well as to the gods of this place, who have awarded these bonds to us) that all I am going to say about thy concerns shall neither be said for favor nor bribery, nor out of an endeavor to make thee cheerful without cause; for such predictions, when they come to fail, make the grief at last, and in earnest, more bitter than if the party had never heard of any such thing. However, though I run the hazard of my own self, I think it fit to declare to thee the prediction of the gods. It cannot be that thou shouldst long continue in these bonds; but thou wilt soon be delivered from them, and wilt be promoted to the highest dignity and power, and thou wilt be envied by all those who now pity thy hard fortune; and thou wilt be happy till thy death, and wilt leave thine happiness to the children whom thou shalt have. But do thou remember, when thou seest this bird again, that thou wilt then live but five days longer. This event will be brought to pass by that God who hath sent this bird hither to be a sign unto thee. And I cannot but think it unjust to conceal from thee what I foreknow concerning thee, that, by thy knowing beforehand what happiness is coming upon thee, thou mayst not regard thy present misfortunes. But when this happiness shall actually befall thee, do not forget what misery I am in myself, but endeavor to deliver me." So when the German had said this, he made Agrippa laugh at him as much as he afterwards appeared worthy of admiration. But now Antonia took Agrippa's misfortune to heart: however, to speak to Tiberius on his behalf, she took to be a very difficult thing, and indeed quite impracticable, as to any hope of success; yet did she procure of Macro, that the soldiers that kept him should be of a gentle nature, and that the centurion who was over them and was to diet with him, should be of the same disposition, and that he might have leave to bathe himself every day, and that his freed-men and friends might come to him, and that other things that tended to ease him might be indulged him. So his friend Silas came in to him, and two of his freed-men, Marsyas and Stechus, brought him such sorts of food as he was fond of, and indeed took great care of him; they ,also brought him garments, under pretense of selling them; and when night came on, they laid them under him; and the soldiers assisted them, as Macro had given them order to do beforehand. And this was Agrippa's condition for six months' time, and in this case were his affairs.

 

8. But for Tiberius, upon his return to Caprein, he fell sick. At first his distemper was but gentle; but as that distemper increased upon him, he had small or no hopes of recovery. Hereupon he bid Euodus, who was that freed-man whom he most of all respected, to bring the children (23) to him, for that he wanted to talk to them before he died. Now he had at present no sons of his own alive for Drusus, who was his only son, was dead; but Drusus's son Tiberius was still living, whose additional name was Gemellus: there was also living Caius, the son of Germanicus, who was the son (24) of his brother [Drusus]. He was now grown up, and had a liberal education, and was well improved by it, and was in esteem and favor with the people, on account of the excellent character of his father Germanicus, who had attained the highest honor among the multitude, by the firmness of his virtuous behavior, by the easiness and agreeableness of his conversing with the multitude, and because the dignity he was in did not hinder his familiarity with them all, as if they were his equals; by which behavior he was not only greatly esteemed by the people and the senate, but by every one of those nations that were subject to the Romans; some of which were affected when they came to him with the gracefulness of their reception by him, and others were affected in the same manner by the report of the others that had been with him; and, upon his death, there was a lamentation made by all men; not such a one as was to be made in way of flattery to their rulers, while they did but counterfeit sorrow, but such as was real; while every body grieved at his death, as if they had lost one that was near to them. And truly such had been his easy conversation with men, that it turned greatly to the advantage of his son among all; and, among others, the soldiery were so peculiarly affected to him, that they reckoned it an eligible thing, if need were, to die themselves, if he might but attain to the government.

 

9. But when Tiberius had given order to Euodus to bring the children to him the next day in the morning, he prayed to his country gods to show him a manifest signal which of those children should come to the government; being very desirous to leave it to his son's son, but still depending upon what God should foreshow concerning them more than upon his own opinion and inclination; so he made this to be the omen, that the government should be left to him who should come to him first the next day. When he had thus resolved within himself, he sent to his grandson's tutor, and ordered him to bring the child to him early in the morning, as supposing that God would permit him to be made emperor. But God proved opposite to his designation; for while Tiberius was thus contriving matters, and as soon as it was at all day, he bid Euodus to call in that child which should be there ready. So he went out, and found Caius before the door, for Tiberius was not yet come, but staid waiting for his breakfast; for Euodus knew nothing of what his lord intended; so he said to Caius, "Thy father calls thee," and then brought him in. As soon as Tiberius saw Caius, and not before, he reflected on the power of God, and how the ability of bestowing the government on whom he would was entirely taken from him; and thence he was not able to establish what he had intended. So he greatly lamented that his power of establishing what he had before contrived was taken from him, and that his grandson Tiberius was not only to lose the Roman empire by his fatality, but his own safety also, because his preservation would now depend upon such as would be more potent than himself, who would think it a thing not to be borne, that a kinsman should live with them, and so his relation would not be able to protect him; but he would be feared and bated by him who had the supreme authority, partly on account of his being next to the empire, and partly on account of his perpetually contriving to get the government, both in order to preserve himself, and to be at the head of affairs also. Now Tiberius had been very much given to astrology, (25) and the calculation of nativities, and had spent his life in the esteem of what predictions had proved true, more than those whose profession it was. Accordingly, when he once saw Galba coming in to him, he said to his most intimate friends, that there came in a man that would one day have the dignity of the Roman empire. So that this Tiberius was more addicted to all such sorts of diviners than any other of the Roman emperors, because he had found them to have told him truth in his own affairs. And indeed he was now in great distress upon this accident that had befallen him, and was very much grieved at the destruction of his son's son, which he foresaw, and complained of himself, that he should have made use of such a method of divination beforehand, while it was in his power to have died without grief by this knowledge of futurity; whereas he was now tormented by his foreknowledge of the misfortune of such as were dearest to him, and must die under that torment. Now although he was disordered at this unexpected revolution of the government to those for whom he did not intend it, he spake thus to Caius, though unwillingly, and against his own inclination: "O child! although Tiberius be nearer related to me than thou art, I, by my own determination, and the conspiring suffrage of the gods, do give and put into thy hand the Roman empire; and I desire thee never to be unmindful when thou comest to it, either of my kindness to thee, who set thee in so high a dignity, or of thy relation to Tiberius. But as thou knowest that I am, together with and after the gods, the procurer of so great happiness to thee; so I desire that thou wilt make me a return for my readiness to assist thee, and wilt take care of Tiberius because of his near relation to thee. Besides which, thou art to know, that while Tiberius is alive, he will be a security to thee, both as to empire and as to thy own preservation; but if he die, that will be but a prelude to thy own misfortunes; for to be alone under the weight of such vast affairs is very dangerous; nor will the gods suffer those actions which are unjustly done, contrary to that law which directs men to act otherwise, to go off unpunished." This was the speech which Tiberius made, which did not persuade Caius to act accordingly, although he promised so to do; but when he was settled in the government, he took off this Tiberius, as was predicted by the other Tiberius; as he was also himself, in no long time afterward, slain by a secret plot laid against him.

10. So when Tiberius had at this time appointed Caius to be his successor, he outlived but a few days, and then died, after he had held the government twenty-two years five months and three days. Now Caius was the fourth emperor. But when the Romans understood that Tiberius was dead, they rejoiced at the good news, but had not courage to believe it; not because they were unwilling it should be true, for they would have given huge sums of money that it might be so, but because they were afraid, that if they had showed their joy when the news proved false, their joy should be openly known, and they should be accused for it, and be thereby undone. For this Tiberius had brought a vast number of miseries on the best families of the Romans, since he was easily inflamed with passion in all cases, and was of such a temper as rendered his anger irrevocable, till he had executed the same, although he had taken a hatred against men without reason; for he was by nature fierce in all the sentences he gave, and made death the penalty for the lightest offenses; insomuch that when the Romans heard the rumor about his death gladly, they were restrained from the enjoyment of that pleasure by the dread of such miseries as they foresaw would follow, if their hopes proved ill-grounded. Now Marsyas, Agrippa's freed-man, as soon as he heard of Tiberius's death, came running to tell Agrippa the news; and finding him going out to the bath, he gave him a nod, and said, in the Hebrew tongue, "The lion (26) is dead;" who, understanding his meaning, and being ovejoyed at the news, "Nay," said he, "but all sorts of thanks and happiness attend thee for this news of thine; only I wish that what thou sayest may prove true." Now the centurion who was set to keep Agrippa, when he saw with what haste Marsyas came, and what joy Agrippa had from what he said, he had a suspicion that his words implied some great innovation of affairs, and he asked them about what was said. They at first diverted the discourse; but upon his further pressing, Agrippa, without more ado, told him, for he was already become his friend; so he joined with him in that pleasure which this news occasioned, because it would be fortunate to Agrippa, and made him a supper. But as they were feasting, and the cups went about, there came one who said that Tiberius was still alive, and would return to the city ill a few days. At which news the centurion was exceedingly troubled, because he had done what might cost him his life, to have treated so joyfully a prisoner, and this upon the news of the death of Caesar; so he thrust Agrippa from the couch whereon he lay, and said, "Dost thou think to cheat me by a lie about the emperor without punishment? and shalt not thou pay for this thy malicious report at the price of thine head?" When he had so said, he ordered Agrippa to be bound again, (for he had loosed him before,) and kept a severer guard over him than formerly, and in that evil condition was Agrippa that night; but the next day the rumor increased in the city, and confirmed the news that Tiberius was certainly dead; insomuch that men durst now openly and freely talk about it; nay, some offered sacrifices on that account. Several letters also came from Caius; one of them to the senate, which informed them of the death of Tiberius, and of his own entrance on the government; another to Piso, the governor of the city, which told him the same thing. He also gave order that Agrippa should be removed out of the camp, and go to that house where he lived before he was put in prison; so that he was now out of fear as to his own affairs; for although he was still in custody, yet it was now with ease to his own affairs. Now, as soon as Caius was come to Rome, and had brought Tiberius's dead body with him, and had made a sumptuous funeral for him, according to the laws of his country, he was much disposed to set Agrippa at liberty that very day; but Antonia hindered him, not out of any ill-will to the prisoner, but out of regard to decency in Caius, lest that should make men believe that he received the death of Tiberius with pleasure, when he loosed one whom he had bound immediately. However, there did not many days pass ere he sent for him to his house, and had him shaved, and made him change his raiment; after which he put a diadem upon his head, and appointed him to be king of the tetrarchy of Philip. He also gave him the tetrarchy of Lysanias, (27) and changed his iron chain for a golden one of equal weight. He also sent Marullus to be procurator of Judea.

 

11. Now, in the second year of the reign of Caius Caesar, Agrippa desired leave to be given him to sail home, and settle the affairs of his government; and he promised to return again, when he had put the rest in order, as it ought to be put. So, upon the emperor's permission, he came into his own country, and appeared to them all unexpectedly as asking, and thereby demonstrated to the men that saw him the power of fortune, when they compared his former poverty with his present happy affluence; so some called him a happy man, and others could not well believe that things were so much changed with him for the better.

 

CHAPTER 7.

 

HOW HEROD THE TETRARCH WAS BANISHED.

 

1. BUT Herodias, Agrippa's sister, who now lived as wife to that Herod who was tetrarch of Galilee and Peres, took this authority of her brother in an envious manner, particularly when she saw that he had a greater dignity bestowed on him than her husband had; since, when he ran away, it was because he was not able to pay his debts; and now he was come back, he was in a way of dignity, and of great good fortune. She was therefore grieved and much displeased at so great a mutation of his affairs; and chiefly when she saw him marching among the multitude with the usual ensigns of royal authority, she was not able to conceal how miserable she was, by reason of the envy she had towards him; but she excited her husband, and desired him that he would sail to Rome, to court honors equal to his; for she said that she could not bear to live any longer, while Agrippa, the son of that Aristobulus who was condemned to die by his father, one that came to her husband in such extreme poverty, that the necessaries of life were forced to be entirely supplied him day by day; and when he fled away from his creditors by sea, he now returned a king; while he was himself the son of a king, and while the near relation he bare to royal authority called upon him to gain the like dignity, he sat still, and was contented with a privater life. "But then, Herod, although thou wast formerly not concerned to be in a lower condition than thy father from whom thou wast derived had been, yet do thou now seek after the dignity which thy kinsman hath attained to; and do not thou bear this contempt, that a man who admired thy riches should he in greater honor than thyself, nor suffer his poverty to show itself able to purchase greater things than our abundance; nor do thou esteem it other than a shameful thing to be inferior to one who, the other day, lived upon thy charity. But let us go to Rome, and let us spare no pains nor expenses, either of silver or gold, since they cannot be kept for any better use than for the obtaining of a kingdom."

 

2. But for Herod, he opposed her request at this time, out of the love of ease, and having a suspicion of the trouble he should have at Rome; so he tried to instruct her better. But the more she saw him draw back, the more she pressed him to it, and desired him to leave no stone unturned in order to be king; and at last she left not off till she engaged him, whether he would or not, to be of her sentiments, because he could no otherwise avoid her importunity. So he got all things ready, after as sumptuous a manner as he was able, and spared for nothing, and went up to Rome, and took Herodias along with him. But Agrippa, when he was made sensible of their intentions and preparations, he also prepared to go thither; and as soon as he heard they set sail, he sent Fortunatus, one of his freed-men, to Rome, to carry presents to the emperor, and letters against Herod, and to give Caius a particular account of those matters, if he should have any opportunity. This man followed Herod so quick, and had so prosperous a voyage, and came so little after Herod, that while Herod was with Caius, he came himself, and delivered his letters; for they both sailed to Dicearchia, and found Caius at Bairn, which is itself a little city of Campania, at the distance of about five furlongs from Dicearchia. There are in that place royal palaces, with sumptuous apartments, every emperor still endeavoring to outdo his predecessor's magnificence; the place ,also affords warm baths, that spring out of the ground of their own accord, which are of advantage for the recovery of the health of those that make use of them; and, besides, they minister to men's luxury also. Now Caius saluted Herod, for he first met with him, and then looked upon the letters which Agrippa had sent him, and which were written in order to accuse Herod; wherein he accused him, that he had been in confederacy with Sejanus against Tiberius's and that he was now confederate with Artabanus, the king of Parthia, in opposition to the government of Caius; as a demonstration of which he alleged, that he had armor sufficient for seventy thousand men ready in his armory. Caius was moved at this information, and asked Herod whether what was said about the armor was true; and when he confessed there was such armor there, for he could not deny the same, the truth of it being too notorious, Caius took that to be a sufficient proof of the accusation, that he intended to revolt. So he took away from him his tetrarchy, and gave it by way of addition to Agrippa's kingdom; he also gave Herod's money to Agrippa, and, by way of punishment, awarded him a perpetual banishment, and appointed Lyons, a city of Gaul, to be his place of habitation. But when he was informed that Herodias was Agrippa's sister, he made her a present of what money was her own, and told her that it was her brother who prevented her being put under the same calamity with her husband. But she made this reply: "Thou, indeed, O emperor! actest after a magnificent manner, and as becomes thyself in what thou offerest me; but the kindness which I have for my husband hinders me from partaking of the favor of thy gift; for it is not just that I, who have been made a partner in his prosperity, should forsake him in his misfortunes." Hereupon Caius was angry at her, and sent her with Herod into banishment, and gave her estate to Agrippa. And thus did God punish Herodias for her envy at her brother, and Herod also for giving ear to the vain discourses of a woman. Now Caius managed public affairs with great magnanimity during the first and second year of his reign, and behaved himself with such moderation, that he gained the good-will of the Romans themselves, and of his other subjects. But, in process of time, he went beyond the bounds of human nature in his conceit of himself, and by reason of the vastness of his dominions made himself a god, and took upon himself to act in all things to the reproach of the Deity itself.

 

CHAPTER 8.

 

CONCERNING THE EMBASSAGE OF THE JEWS TO CAIUS; (28) AND HOW CAIUS SENT PETRONIUS INTO SYRIA TO MAKE WAR AGAINST THE JEWS, UNLESS THEY WOULD RECEIVE HIS STATUE.

 

1. THERE was now a tumult arisen at Alexandria, between the Jewish inhabitants and the Greeks; and three ambassadors were chosen out of each party that were at variance, who came to Caius. Now one of these ambassadors from the people of Alexandria was Apion, (29) who uttered many blasphemies against the Jews; and, among other things that he said, he charged them with neglecting the honors that belonged to Caesar; for that while all who were subject to the Roman empire built altars and temples to Caius, and in other regards universally received him as they received the gods, these Jews alone thought it a dishonorable thing for them to erect statues in honor of him, as well as to swear by his name. Many of these severe things were said by Apion, by which he hoped to provoke Caius to anger at the Jews, as he was likely to be. But Philo, the principal of the Jewish embassage, a man eminent on all accounts, brother to Alexander the alabarch, (30) and one not unskillful in philosophy, was ready to betake himself to make his defense against those accusations; but Caius prohibited him, and bid him begone; he was also in such a rage, that it openly appeared he was about to do them some very great mischief. So Philo being thus affronted, went out, and said to those Jews who were about him, that they should be of good courage, since Caius's words indeed showed anger at them, but in reality had already set God against himself.

 

2. Hereupon Caius, taking it very heinously that he should be thus despised by the Jews alone, sent Petronius to be president of Syria, and successor in the government to Vitellius, and gave him order to make an invasion into Judea, with a great body of troops; and if they would admit of his statue willingly, to erect it in the temple of God; but if they were obstinate, to conquer them by war, and then to do it. Accordingly, Petronius took the government of Syria, and made haste to obey Caesar's epistle. He got together as great a number of auxiliaries as he possibly could, and took with him two legions of the Roman army, and came to Ptolemais, and there wintered, as intending to set about the war in the spring. He also wrote word to Caius what he had resolved to do, who commended him for his alacrity, and ordered him to go on, and to make war with them, in case they would not obey his commands. But there came many ten thousands of the Jews to Petronius, to Ptolemais, to offer their petitions to him, that he would not compel them to transgress and violate the law of their forefathers; "but if," said they, "thou art entirely resolved to bring this statue, and erect it, do thou first kill us, and then do what thou hast resolved on; for while we are alive we cannot permit such things as are forbidden us to be done by the authority of our legislator, and by our forefathers' determination that such prohibitions are instances of virtue." But Petronius was angry at them, and said, "If indeed I were myself emperor, and were at liberty to follow my own inclination, and then had designed to act thus, these your words would be justly spoken to me; but now Caesar hath sent to me, I am under the necessity of being subservient to his decrees, because a disobedience to them will bring upon me inevitable destruction." Then the Jews replied, "Since, therefore, thou art so disposed, O Petronius! that thou wilt not disobey Caius's epistles, neither will we transgress the commands of our law; and as we depend upon the excellency of our laws, and, by the labors of our ancestors, have continued hitherto without suffering them to be transgressed, we dare not by any means suffer ourselves to be so timorous as to transgress those laws out of the fear of death, which God hath determined are for our advantage; and if we fall into misfortunes, we will bear them, in order to preserve our laws, as knowing that those who expose themselves to dangers have good hope of escaping them, because God will stand on our side, when, out of regard to him, we undergo afflictions, and sustain the uncertain turns of fortune. But if we should submit to thee, we should be greatly reproached for our cowardice, as thereby showing ourselves ready to transgress our law; and we should incur the great anger of God also, who, even thyself being judge, is superior to Caius."

 

3. When Petronius saw by their words that their determination was hard to be removed, and that, without a war, he should not be able to be subservient to Caius in the dedication of his statue, and that there must be a great deal of bloodshed, he took his friends, and the servants that were about him, and hasted to Tiberias, as wanting to know in what posture the affairs of the Jews were; and many ten thousands of the Jews met Petronius again, when he was come to Tiberias. These thought they must run a mighty hazard if they should have a war with the Romans, but judged that the transgression of the law was of much greater consequence, and made supplication to him, that he would by no means reduce them to such distresses, nor defile their city with the dedication of the statue. Then Petronius said to them, "Will you then make war with Caesar, without considering his great preparations for war, and your own weakness?" They replied, "We will not by any means make war with him, but still we will die before we see our laws transgressed." So they threw themselves down upon their faces, and stretched out their throats, and said they were ready to be slain; and this they did for forty days together, and in the mean time left off the tilling of their ground, and that while the season of the year required them to sow it. (31) Thus they continued firm in their resolution, and proposed to themselves to die willingly, rather than to see the dedication of the statue.

 

4. When matters were in this state, Aristobulus, king Agrippa's brother, and Heleias the Great, and the other principal men of that family with them, went in unto Petronius, and besought him, that since he saw the resolution of the multitude, he would not make any alteration, and thereby drive them to despair; but would write to Caius, that the Jews had an insuperable aversion to the reception of the statue, and how they continued with him, and left of the tillage off their ground: that they were not willing to go to war with him, because they were not able to do it, but were ready to die with pleasure, rather than suffer their laws to be transgressed: and how, upon the land's continuing unsown, robberies would grow up, on the inability they would be under of paying their tributes; and that Caius might be thereby moved to pity, and not order any barbarous action to be done to them, nor think of destroying the nation: that if he continues inflexible in his former opinion to bring a war upon them, he may then set about it himself. And thus did Aristobulus, and the rest with him, supplicate Petronius. So Petronius, (32) partly on account of the pressing instances which Aristobulus and the rest with him made, and because of the great consequence of what they desired, and the earnestness wherewith they made their supplication, — partly on account of the firmness of the opposition made by the Jews, which he saw, while he thought it a terrible thing for him to be such a slave to the madness of Caius, as to slay so many ten thousand men, only because of their religious disposition towards God, and after that to pass his life in expectation of punishment; Petronius, I say, thought it much better to send to Caius, and to let him know how intolerable it was to him to bear the anger he might have against him for not serving him sooner, in obedience to his epistle, for that perhaps he might persuade him; and that if this mad resolution continued, he might then begin the war against them; nay, that in case he should turn his hatred against himself, it was fit for virtuous persons even to die for the sake of such vast multitudes of men. Accordingly, he determined to hearken to the petitioners in this matter.

 

5. He then called the Jews together to Tiberias, who came many ten thousands in number; he also placed that army he now had with him opposite to them; but did not discover his own meaning, but the commands of the emperor, and told them that his wrath would, without delay, be executed on such as had the courage to disobey what he had commanded, and this immediately; and that it was fit for him, who had obtained so great a dignity by his grant, not to contradict him in any thing: — “yet," said he, "I do not think it just to have such a regard to my own safety and honor, as to refuse to sacrifice them for your preservation, who are so many in number, and endeavor to preserve the regard that is due to your law; which as it hath come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so do you esteem it worthy of your utmost contention to preserve it: nor, with the supreme assistance and power of God, will I be so hardy as to suffer your temple to fall into contempt by the means of the imperial authority. I will, therefore, send to Caius, and let him know what your resolutions are, and will assist your suit as far as I am able, that you may not be exposed to suffer on account of the honest designs you have proposed to yourselves; and may God be your assistant, for his authority is beyond all the contrivance and power of men; and may he procure you the preservation of your ancient laws, and may not he be deprived, though without your consent, of his accustomed honors. But if Caius be irritated, and turn the violence of his rage upon me, I will rather undergo all that danger and that affliction that may come either on my body or my soul, than see so many of you to perish, while you are acting in so excellent a manner. Do you, therefore, every one of you, go your way about your own occupations, and fall to the cultivation of your ground; I will myself send to Rome, and will not refuse to serve you in all things, both by myself and by my friends."

 

6. When Petronius had said this, and had dismissed rite assembly of the Jews, he desired the principal of them to take care of their husbandry, and to speak kindly to the people, and encourage them to have good hope of their affairs. Thus did he readily bring the multitude to be cheerful again. And now did God show his presence to Petronius, and signify to him that he would afford him his assistance in his whole design; for he had no sooner finished the speech that he made to the Jews, but God sent down great showers of rain, contrary to human expectation; (33) for that day was a clear day, and gave no sign, by the appearance of the sky, of any rain; nay, the whole year had been subject to a great drought, and made men despair of any water from above, even when at any time they saw the heavens overcast with clouds; insomuch that when such a great quantity of rain came, and that in an unusual manner, and without any other expectation of it, the Jews hoped that Petronius would by no means fail in his petition for them. But as to Petronius, he was mightily surprised when he perceived that God evidently took care of the Jews, and gave very plain signs of his appearance, and this to such a degree, that those that were in earnest much inclined to the contrary had no power left to contradict it. This was also among those other particulars which he wrote to Caius, which all tended to dissuade him, and by all means to entreat him not to make so many ten thousands of these men go distracted; whom, if he should slay, (for without war they would by no means suffer the laws of their worship to be set aside,) he would lose the revenue they paid him, and would be publicly cursed by them for all future ages. Moreover, that God, who was their Governor, had shown his power most evidently on their account, and that such a power of his as left no room for doubt about it. And this was the business that Petronius was now engaged in.

 

7. But king Agrippa, who now lived at Rome, was more and more in the favor of Caius; and when he had once made him a supper, and was careful to exceed all others, both in expenses and in such preparations as might contribute most to his pleasure; nay, it was so far from the ability of others, that Caius himself could never equal, much less exceed it (such care had he taken beforehand to exceed all men, and particularly. to make all agreeable to Caesar); hereupon Caius admired his understanding and magnificence, that he should force himself to do all to please him, even beyond such expenses as he could bear, and was desirous not to be behind Agrippa in that generosity which he exerted in order to please him. So Caius, when he had drank wine plentifully, and was merrier than ordinary, said thus during the feast, when Agrippa had drunk to him: "I knew before now how great a respect thou hast had for me, and how great kindness thou hast shown me, though with those hazards to thyself, which thou underwentest under Tiberius on that account; nor hast thou omitted any thing to show thy good-will towards us, even beyond thy ability; whence it would be a base thing for me to be conquered by thy affection. I am therefore desirous to make thee amends for every thing in which I have been formerly deficient; for all that I have bestowed on thee, that may be called my gifts, is but little. Everything that may contribute to thy happiness shall be at thy service, and that cheerfully, and so far as my ability will reach." (34) And this was what Caius said to Agrippa, thinking be would ask for some large country, or the revenues of certain cities. But although he had prepared beforehand what he would ask, yet had he not discovered his intentions, but made this answer to Caius immediately: That it was not out of any expectation of gain that he formerly paid his respects to him, contrary to the commands of Tiberius, nor did he now do any thing relating to him out of regard to his own advantage, and in order to receive any thing from him; that the gifts he had already bestowed upon him were great, and beyond the hopes of even a craving man; for although they may be beneath thy power, [who art the donor,] yet are they greater than my inclination and dignity, who am the receiver. And as Caius was astonished at Agrippa's inclinations, and still the more pressed him to make his request for somewhat which he might gratify him with, Agrippa replied, "Since thou, O my lord! declarest such is thy readiness to grant, that I am worthy of thy gifts, I will ask nothing relating to my own felicity; for what thou hast already bestowed on me has made me excel therein; but I desire somewhat which may make thee glorious for piety, and render the Divinity assistant to thy designs, and may be for an honor to me among those that inquire about it, as showing that I never once fail of obtaining what I desire of thee; for my petition is this, that thou wilt no longer think of the dedication of that statue which thou hast ordered to be set up in the Jewish temple by Petronius."

 

8. And thus did Agrippa venture to cast the die upon this occasion, so great was the affair in his opinion, and in reality, though he knew how dangerous a thing it was so to speak; for had not Caius approved of it, it had tended to no less than the loss of his life. So Caius, who was mightily taken with Agrippa's obliging behavior, and on other accounts thinking it a dishonorable thing to be guilty of falsehood before so many witnesses, in points wherein he had with such alacrity forced Agrippa to become a petitioner, and that it would look as if he had already repented of what he had said, and because he greatly admired Agrippa's virtue, in not desiring him at all to augment his own dominions, either with larger revenues, or other authority, but took care of the public tranquillity, of the laws, and of the Divinity itself, he granted him what he had requested. He also wrote thus to Petronius, commending him for his assembling his army, and then consulting him about these affairs. "If therefore," said' he," thou hast already erected my statue, let it stand; but if thou hast not yet dedicated it, do not trouble thyself further about it, but dismiss thy army, go back, and take care of those affairs which I sent thee about at first, for I have now no occasion for the erection of that statue. This I have granted as a favor to Agrippa, a man whom I honor so very greatly, that I am not able to contradict what he would have, or what he desired me to do for him." And this was what Caius wrote to Petronius, which was before he received his letter, informing him that the Jews were very ready to revolt about the statue, and that they seemed resolved to threaten war against the Romans, and nothing else. When therefore Caius was much displeased that any attempt should be made against his government as he was a slave to base and vicious actions on all occasions, and had no regard to What was virtuous and honorable, and against whomsoever he resolved to show his anger, and that for any cause whatsoever, he suffered not himself to be restrained by any admonition, but thought the indulging his anger to be a real pleasure, he wrote thus to Petronius: "Seeing thou esteemest the presents made thee by the Jews to be of greater value than my commands, and art grown insolent enough to be subservient to their pleasure, I charge thee to become thy own judge, and to consider what thou art to do, now thou art under my displeasure; for I will make thee an example to the present and to all future ages, that they. may not dare to contradict the commands of their emperor."

 

9. This was the epistle which Caius wrote to. Petronius; but Petronius did not receive it while Caius was alive, that ship which carried it sailing so slow, that other letters came to Petronius before this, by which he understood that Caius was dead; for God would not forget the dangers Petronius had undertaken on account of the Jews, and of his own honor. But when he had taken Caius away, out of his indignation of what he had so insolently attempted in assuming to himself divine worship, both Rome and all that dominion conspired with Petronius, especially those that were of the senatorian order, to give Caius his due reward, because he had been unmercifully severe to them; for he died not long after he had written to Petronius that epistle which threatened him with death. But as for the occasion of his death, and the nature of the plot against him, I shall relate them in the progress of this narration. Now that epistle which informed Petronius of Caius's death came first, and a little afterward came that which commanded him to kill himself with his own hands. Whereupon he rejoiced at this coincidence as to the death of Caius, and admired God's providence, who, without the least delay, and immediately, gave him a reward for the regard he had to the temple, and the assistance he afforded the Jews for avoiding the dangers they were in. And by this means Petronius escaped that danger of death, which he could not foresee.

 

CHAPTER 9.

 

WHAT BEFELL THE JEWS THAT WERE IN BABYLON ON OCCASION OF ASINEUS AND ANILEUS, TWO BRETHREN,

 

1. A VERY sad calamity now befell the Jews that were in Mesopotamia, and especially those that dwelt in Babylonia. Inferior it was to none of the calamities which had gone before, and came together with a great slaughter of them, and that greater than any upon record before; concerning all which I shall speak accurately, and shall explain the occasions whence these miseries came upon them. There was a city of Babylonia called Neerda; not only a ver populous one, but one that had a good and a large territory about it, and, besides its other advantages, full of men also. It was, besides, not easily to be assaulted by enemies, from the river Euphrates encompassing it all round, and from the wails that were built about it. There was also the city Nisibis, situate on the same current of the river. For which reason the Jews, depending on the natural strength of these places, deposited in them that half shekel which every one, by the custom of our country, offers unto God, as well as they did other things devoted to him; for they made use of these cities as a treasury, whence, at a proper time, they were transmitted to Jerusalem; and many ten thousand men undertook the carriage of those donations, out of fear of the ravages of the Parthians, to whom the Babylonians were then subject. Now there were two men, Asineus and Anileus, of the city Neerda by birth, and brethren to one another. They were destitute of a father, and their mother put them to learn the art of weaving curtains, it not being esteemed ,disgrace among them for men to be weavers of cloth. Now he that taught them that art, and was set over them, complained that they came too late to their work, and punished them with stripes; but they took this just punishment as an affront, and carried off all the weapons which were kept in that house, which were not a few, and went into a certain place where was a partition of the rivers, and was a place naturally very fit for the feeding of cattle, and for preserving such fruits as were usually laid up against winter. The poorest sort of the young men also resorted to them, whom they armed with the weapons they had gotten, and became their captains; and nothing hindered them from being their leaders into mischief; for as soon as they were become invincible, and had built them a citadel, they sent to such as fed cattle, and ordered them to pay them so much tribute out of them as might be sufficient for their maintenance, proposing also that they would be their friends, if they would submit to them, and that they would defend them from all their other enemies on every side, but that they would kill the cattle of those that refused to obey them. So they hearkened to their proposals, (for they could do nothing else,) and sent them as many sheep as were required of them; whereby their forces grew greater, and they became lords over all they pleased, because they marched suddenly, and did them a mischief, insomuch that every body who had to do with them chose to pay them respect; and they became formidable to such as came to assault them, till the report about them came to the ears of the king of Parthia himself.

 

2. But when the governor of Babylonia understood this, and had a mind to put a stop to them before they grew greater, and before greater mischiefs should arise from them, he got together as great an army as he could, both of Parthians and Babylonians, and marched against them, thinking to attack them and destroy them before any one should carry them the news that he had got an army together. He then encamped at a lake, and lay still; but on the next day (it was the sabbath, which is among the Jews a day of rest from all sorts of work) he supposed that the enemy would not dare to fight him thereon, but that he would take them and carry them away prisoners, without fighting. He therefore proceeded gradually, and thought to fall upon them on the sudden. Now Asineus was sitting with the rest, and their weapons lay by them; upon which he said, "Sirs, I hear a neighing of horses; not of such as are feeding, but such as have men on their backs; I also hear such a noise of their bridles, that I am afraid that some enemies are coming upon us to encompass us round. However, let somebody go to look about, and make report of what reality there is in the present state of things; and may what I have said prove a false alarm." And when he had said this, some of them went out to spy out what was the matter; and they came again immediately, and said to him, that "neither hast thou been mistaken in telling us what our enemies were doing, nor will those enemies permit us to be injurious to people any longer. We are caught by their intrigues like brute beasts, and there is a large body of cavalry marching upon us, while we are destitute of hands to defend ourselves withal, because we are restrained from doing it by the prohibition of our law, which obliges us to rest [on this day]." But Asiueus did not by any means agree with the opinion of his spy as to what was to be done, but thought it more agreeable to the law to pluck up their spirits in this necessity they were fallen into, and break their law by avenging themselves, although they should die in the action, than by doing nothing to please their enemies in submitting to be slain by them. Accordingly, he took up his weapons, and infused courage into those that were with him to act as courageously as himself. So they fell upon their enemies, and slew a great many of them, because they despised them and came as to a certain victory, and put the rest to flight.

 

3. But when the news of this fight came to the king of Parthia, he was surprised at the boldness of these brethren, and was desirous to see them, and speak with them. He therefore sent the most trusty of all his guards to say thus to them: "That king Artsbanus, although he had been unjustly treated by you, who have made an attempt against his government, yet hath he more regard to your courageous behavior, than to the anger he bears to you, and hath sent me to give you his right hand (35) and security; and he permits you to come to him safely, and without any violence upon the road; and he wants to have you address yourselves to him as friends, without meaning any guile or deceit to you. He also promises to make you presents, and to pay you those respects which will make an addition of his power to your courage, and thereby be of advantage to you." Yet did Asineus himself put off his journey thither, but sent his brother Anileus with all such presents as he could procure. So he went, and was admitted to the king's presence; and when Artabanus saw Anileus coming alone, he inquired into the reason why Asineus avoided to come along with him; and when he understood that he was afraid, and staid by the lake, he took an oath, by the gods of his country, that he would do them no harm, if they came to him upon the assurances he gave them, and gave him his right hand. This is of the greatest force there with all these barbarians, and affords a firm security to those who converse with them; for none of them will deceive you when once they have given you their right hands, nor will any one doubt of their fidelity, when that is once given, even though they were before suspected of injustice. When Artabanus had done this, he sent away Anileus to persuade his brother to come to him. Now this the king did, because he wanted to curb his own governors of provinces by the courage of these Jewish brethren, lest they should make a league with them; for they were ready for a revolt, and were disposed to rebel, had they been sent on an expedition against them. He was also afraid, lest when he was engaged in a war, in order to subdue those governors of provinces that had revolted, the party of Asineus, and those in Babylonia, should be augmented, and either make war upon him, when they should hear of that revolt, or if they should be disappointed in that case, they would not fail of doing further mischief to him.

 

4. When the king had these intentions, he sent away Anileus, and Anileus prevailed on his brother [to come to the king], when he had related to him the king's good-will, and the oath that he had taken. Accordingly, they made haste to go to Artsbanus, who received them when they were come with pleasure, and admired Asineus's courage in the actions he had done, and this because he was a little man to see to, and at first sight appeared contemptible also, and such as one might deem a person of no value at all. He also said to his friends, how, upon the comparison, he showed his soul to be in all respects superior to his body; and when, as they were drinking together, he once showed Asineus to Abdagases, one of the generals of his army, and told him his name, and described the great courage he was of in war, and Abdagases had desired leave to kill him, and thereby to inflict on him a punishment for those injuries he had done to the Parthian government, the king replied, "I will never give thee leave to kill a man who hath depended on my faith, especially not after I have sent him my right hand, and endeavored to gain his belief by oaths made by the gods. But if thou be a truly warlike man, thou standest not in need of my perjury. Go thou then, and avenge the Parthian government; attack this man, when he is returned back, and conquer him by the forces that are under thy command, without my privity." Hereupon the king called for Asineus, and said to him, "It is time for thee, O thou young man! to return home, and not provoke the indignation of my generals in this place any further, lest they attempt to murder thee, and that without my approbation. I commit to thee the country of Babylonia in trust, that it may, by thy care, be preserved free from robbers, and from other mischiefs. I have kept my faith inviolable to thee, and that not in trifling affairs, but in those that concerned thy safety, and do therefore deserve thou shouldst be kind to me." When he had said this, and given Asineus some presents, he sent him away immediately; who, when he was come home, built fortresses, and became great in a little time, and managed things with such courage and success, as no other person, that had no higher a beginning, ever did before him. Those Parthian governors also, who were sent that way, paid him great respect; and the honor that was paid him by the Babylonians seemed to them too small, and beneath his deserts, although he were in no small dignity and power there; nay, indeed, all the affairs of Mesopotamia depended upon him, and he more and more flourished in this happy condition of his for fifteen years.

 

5. But as their affairs were in so flourishing a state, there sprang up a calamity among them on the following occasion. When once they had deviated from that course of virtue whereby they had gained so great power, they affronted and transgressed the laws of their forefathers, and fell under the dominion of their lusts and pleasures. A certain Parthian, who came as general of an army into those parts, had a wife following him, who had a vast reputation for other accomplishments, and particularly was admired above all other women for her beauty. Anileus, the brother of Asineus, either heard of that her beauty from others, or perhaps saw her himself also, and so became at once her lover and her enemy; partly because he could not hope to enjoy this woman but by obtaining power over her as a captive, and partly because he thought he could not conquer his inclinations for her. As soon therefore as her husband had been declared an enemy to them, and was fallen in the battle, the widow of the deceased was married to this her lover. However, this woman did not come into their house without producing great misfortunes, both to Anileus himself, and to Asineus also; but brought great mischiefs upon them on the occasion following. Since she was led away captive, upon the death of her husband, she concealed the images of those gods which were their country gods, common to her husband and to herself: now it was the custom (36) of that country for all to have the idols they worship in their own houses, and to carry them along with them when they go into a foreign land; agreeable to which custom of theirs she carried her idols with her. Now at first she performed her worship to them privately; but when she was become Anileus's married wife, she worshipped them in her accustomed manner, and with the same appointed ceremonies which she used in her former husband's days; upon which their most esteemed friends blamed him at first, that he did not act after the manner of the Hebrews, nor perform what was agreeable to their laws, in marrying a foreign wife, and one that transgressed the accurate appointments of their sacrifices and religious ceremonies; that he ought to consider, lest, by allowing himself in many pleasures of the body, he might lose his principality, on account of the beauty of a wife, and that high authority which, by God's blessing, he had arrived at. But when they prevailed not at all upon him, he slew one of them for whom he had the greatest respect, because of the liberty he took with him; who, when he was dying, out of regard to the laws, imprecated a punishment upon his murderer Anileus, and upon Asineus also, and that all their companions might come to a like end from their enemies; upon the two first as the principal actors of this wickedness, and upon the rest as those that would not assist him when he suffered in the defense of their laws. Now these latter were sorely grieved, yet did they tolerate these doings, because they remembered that they had arrived at their present happy state by no other means than their fortitude. But when they also heard of the worship of those gods whom the Parthians adore, they thought the injury that Anileus offered to their laws was to be borne no longer; and a greater number of them came to Asineus, and loudly complained of Aniteus, and told him that it had been well that he had of himself seen what was advantageous to them; but that however it was now high time to correct what had been done amiss, before the crime that had been committed proved the ruin of himself and all the rest of them. They added, that the marriage of this woman was made without their consent, and without a regard to their old laws; and that the worship which this woman paid [to her gods] was a reproach to the God whom they worshipped. Now Asineus was sensible of his brother's offense, that it had been already the cause of great mischiefs, and would be so for the time to come; yet did he tolerate the same from the good-will he had to so near a relation, and forgiving it to him, on account that his brother was quite overborne by his wicked inclinations. But as more and more still came about him every day, and the clamors about it became greater, he at length spake to Anileus about these clamors, reproving him for his former actions, and desiring him for the future to leave them off, and send the woman back to her relations. But nothing was gained by these reproofs; for as the woman perceived what a tumult was made among the people on her account, and was afraid for Anileus, lest he should come to any harm for his love to her, she infused poison into Asineus's food, and thereby took him off, and was now secure of prevailing, when her lover was to be judge of what should be done about her.

 

6. So Anileus took the government upon himself alone, and led his army against the villages of Mithridates, who was a man of principal authority in Parthin, and had married king Artabanus's daughter; he also plundered them, and among that prey was found much money, and many slaves, as also a great number of sheep, and many other things, which, when gained, make men's condition happy. Now when Mithridates, who was there at this time, heard that his villages were taken, he was very much displeased to find that Anileus had first begun to injure him, and to affront him in his present dignity, when he had not offered any injury to him beforehand; and he got together the greatest body of horsemen he was able, and those out of that number which were of an age fit for war, and came to fight Anileus; and when he was arrived at a certain village of his own, he lay still there, as intending to fight him on the day following, because it was the sabbath, the day on which the Jews rest. And when Anileus was informed of this by a Syrian stranger of another village, who not only gave him an exact account of other circumstances, but told him where Mithridates would have a feast, he took his supper at a proper time, and marched by night, with an intent of falling upon the Parthians while they were unaprrized what they should do; so he fell upon them about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and some of them he slew while they were asleep, and others he put to flight, and took Mithridates alive, and set him naked upon an ass (37) which, among the Parthians, is esteemed the greatest reproach possible. And when he had brought him into a wood with such a resolution, and his friends desired him to kill Mithridates, he soon told them his own mind to the contrary, and said that it was not right to kill a man who was of one of the principal families among the Parthians, and greatly honored with matching into the royal family; that so far as they had hitherto gone was tolerable; for although they had injured Mithridates, yet if they preserved his life, this benefit would be remembered by him to the advantage of those that gave it him; but that if be were once put to death, the king would not be at rest till he had made a great slaughter of the Jews that dwelt at Babylon; "to whose safety we ought to have a regard, both on account of our relation to them, and because if any misfortune befall us, we have no other place to retire to, since he hath gotten the flower of their youth under him." By this thought, and this speech of his made in council, he persuaded them to act accordingly; so Mithridates was let go. But when he was got away, his wife reproached him, that although he was son-in-law to the king, he neglected to avenge himself on those that had injured him, while he took no care about it, but was contented to have been made a captive by the Jews, and to have escaped them; and she bid him either to go back like a man of courage, or else she sware by the gods of their royal family that she would certainly dissolve her marriage with him. Upon which, partly because he could not bear the daily trouble of her taunts, and partly because he was afraid of her insolence, lest she should in earnest dissolve their marriage, he unwillingly, and against his inclinations, got together again as great an army as he could, and marched along with them, as himself thinking it a thing not to be borne any longer, that he, a Parthian, should owe his preservation to the Jews, when they had been too hard for him in the war.

 

7. But as soon as Anileus understood that Mithridates was marching with a great army against him, he thought it too ignominious a thing to tarry about the lakes, and not to take the first opportunity of meeting his enemies, and he hoped to have the same success, and to beat their enemies as they did before; as also he ventured boldly upon the like attempts. Accordingly, he led out his army, and a great many more joined themselves to that army, in order to betake themselves to plunder the people, and in order to terrify the enemy again by their numbers. But when they had marched ninety furlongs, while the road had been through dry [and sandy] places, and about the midst of the day, they were become very thirsty; and Mithridates appeared, and fell upon them, as they were in distress for want of water, on which account, and on account of the time of the day, they were not able to bear their weapons. So Anileus and his men were put to an ignominious rout, while men in despair were to attack those that were fresh and in good plight; so a great slaughter was made, and many ten thousand men fell. Now Anileus, and all that stood firm about him, ran away as fast as they were able into a wood, and afforded Mithridates the pleasure of having gained a great victory over them. But there now came in to Anileus a conflux of bad men, who regarded their own lives very little, if they might but gain some present ease, insomuch that they, by thus coming to him, compensated the multitude of those that perished in the fight. Yet were not these men like to those that fell, because they were rash, and unexercised in war; however, with these he came upon the villages of the Babylonians, and a mighty devastation of all things was made there by the injuries that Anileus did them. So the Babylonians, and those that had already been in the war, sent to Neerda to the Jews there, and demanded Anileus. But although they did not agree to their demands, (for if they had been willing to deliver him up, it was not in their power so to do,) yet did they desire to make peace with them. To which the other replied, that they also wanted to settle conditions of peace with them, and sent men together with the Babylonians, who discoursed with Anileus about them. But the Babylonians, upon taking a view of his situation, and having learned where Anileus and his men lay, fell secretly upon them as they were drunk and fallen asleep, and slew all that they caught of them, without any fear, and killed Anileus himself also.

 

8. The Babylonians were now freed from Anileus's heavy incursions, which had been a great restraint to the effects of that hatred they bore to the Jews; for they were almost always at variance, by reason of the contrariety of their laws; and which party soever grew boldest before the other, they assaulted the other: and at this time in particular it was, that upon the ruin of Anileus's party, the Babylonians attacked the Jews, which made those Jews so, vehemently to resent the injuries they received from the Babylonians, that being neither able to fight them, nor bearing to live with them, they went to Seleucia, the principal city of those parts, which was built by Seleucus Nicator. It was inhabited by many of the Macedonians, but by more of the Grecians; not a few of the Syrians also dwelt there; and thither did the Jews fly, and lived there five years, without any misfortunes. But on the sixth year, a pestilence came upon these at Babylon, which occasioned new removals of men's habitations out of that city; and because they came to Seleucia, it happened that a still heavier calamity came upon them on that account which I am going to relate immediately.

 

9. Now the way of living of the people of Seleucia, which were Greeks and Syrians, was commonly quarrelsome, and full of discords, though the Greeks were too hard for the Syrians. When, therefore, the Jews were come thither, and dwelt among them, there arose a sedition, and the Syrians were too hard for the other, by the assistance of the Jews, who are men that despise dangers, and very ready to fight upon any occasion. Now when the Greeks had the worst in this sedition, and saw that they had but one way of recovering their former authority, and that was, if they could prevent the agreement between the Jews and the Syrians, they every one discoursed with such of the Syrians as were formerly their acquaintance, and promised they would be at peace and friendship with them. Accordingly, they gladly agreed so to do; and when this was done by the principal men of both nations, they soon agreed to a reconciliation; and when they were so agreed, they both knew that the great design of such their union would be their common hatred to the Jews. Accordingly, they fell upon them, and slew about fifty thousand of them; nay, the Jews were all destroyed, excepting a few who escaped, either by the compassion which their friends or neighbors afforded them, in order to let them fly away. These retired to Ctesiphon, a Grecian city, and situate near to Seleucia, where the king [of Parthia] lives in winter every year, and where the greatest part of his riches are reposited; but the Jews had here no certain settlement, those of Seleucia having little concern for the king's honor. Now the whole nation of the Jews were in fear both of the Babylonians and of the Seleucians, because all the Syrians that live in those places agreed with the Seleucians in the war against the Jews; so the most of them gathered themselves together, and went to Neerda and Nisibis, and obtained security there by the strength of those cities; besides which their inhabitants, who were a great many, were all warlike men. And this was the state of the Jews at this time in Babylonia.

 

ENDNOTE

 

(1) Since St. Luke once, Acts 5:37, and Josephus four several times, once here, sect. 6; and B. XX. ch. 5. sect. 2; Of the War, B. II. ch. 8. sect. 1; and ch. 17. sect. 8, calls this Judas, who was the pestilent author of that seditious doctrine and temper which brought the Jewish nation to utter destruction, a Galilean; but here (sect. 1) Josephus calls him a Gaulonite, of the city of Gamala; it is a great question where this Judas was born, whether in Galilee on the west side, or in Gaulonitis on the east side, of the river Jordan; while, in the place just now cited out of the Antiquities, B. XX. ch. 5. sect. 2, he is not only called a Galilean, but it is added to his story, "as I have signified in the books that go before these," as if he had still called him a Galilean in those Antiquities before, as well as in that particular place, as Dean Aldrich observes, Of the War, B. II. ch. 8. sect. 1. Nor can one well imagine why he should here call him a Gaulonite, when in the 6th sect. following here, as well as twice Of the War, he still calls him a Galilean. As for the city of Gamala, whence this Judas was derived, it determines nothing, since there were two of that name, the one in Gaulonitis, the other in Galilee. See Reland on the city or town of that name.

 

(2) It seems not very improbable to me that this Sadduc, the Pharisee, was the very same man of whom the Rabbins speak, as the unhappy, but undesigning, occasion of the impiety or infidelity of the Sadducees; nor perhaps had the men this name of Sadducees till this very time, though they were a distinct sect long before. See the note on B. XIII. ch. 10. sect 5; and Dean Prideaux, as there quoted. Nor do we, that I know of, find the least footsteps of such impiety or infidelity of these Sadducees before this time, the Recognitions assuring us that they began about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B. 1. ch. 54. See note above.

 

(3) It seems by what Josephus says here, and Philo himself elsewhere, Op. p. 679, that these Essens did not use to go to the Jewish festivals at Jerusalem, or to offer sacrifices there, which may be one great occasion why they are never mentioned in the ordinary books of the New Testament; though, in the Apostolical Constitutions, they are mentioned as those that observed the customs of their forefathers, and that without any such ill character laid upon them as is there laid upon the other sects among that people.

 

(4) Who these Polistae in Josephus, or in Strabo. among the Pythagoric Dacae, were, it is not easy to determine. Scaliger offers no improbable conjecture, that some of these Dacae lived alone, like monks, in tents or caves; but that others of them lived together in built cities, and thence were called by such names as implied the same.

 

(5) We may here take notice, as well as in the parallel parts of the books Of the War, B. II. ch. 9. sect. 1, that after the death of Herod the Great, and the succession of Archclaus, Josephus is very brief in his accounts of Judea, till near his own time. I suppose the reason is, that after the large history of Nicolaus of Damascus, including the life of Herod, and probably the succession and first actions of his sons, he had but few good histories of those times before him.

 

(6) Numbers 19:11-14.

 

(7) This citation is now wanting.

 

(8) These Jews, as they are here called, whose blood Pilate shed on this occasion, may very well be those very Galilean Jews, "whose blood Pilate had mingled with their sacrifices," Luke 13:1, 2; these tumults being usually excited at some of the Jews' great festivals, when they slew abundance of sacrifices, and the Galileans being commonly much more busy in such tumults than those of Judea and Jerusalem, as we learn from the history of Archelaus, Antiq. B. XVII. ch. 9. sect. 3 and ch. 10. sect. 2, 9; though, indeed, Josephus's present copies say not one word of "those eighteen upon whom the tower in Siloam fell, and slew them," which the 4th verse of the same 13th chapter of St. Luke informs us of. But since our gospel teaches us, Luke 23:6, 7, that "when Pilate heard of Galilee, he asked whether Jesus were a Galilean. And as soon as he knew that he belonged to Herod's jurisdiction, he sent him to Herod ;" and ver. 12, "The same day Pilate and Herod were made friends together for before they had been at enmity between themselves;" take the very probable key of this matter in the words of the learned Noldius, de Herod. No. 219: "The cause of the enmity between Herod and Pilate (says he) seems to have been this, that Pilate had intermeddled with the tetrarch's jurisdiction, and had slain some of his Galilean subjects, Luke 13:1; and, as he was willing to correct that error, he sent Christ to Herod at this time."

 

(9) A.D. 33, April 3.

 

(10) April 5.

 

(11) Of the banishment of these four thousand Jews into Sardinia by Tiberius, see Suetonlus in Tiber. sect. 36. But as for Mr. Reland's note here, which supposes that Jews could not, consistently with their laws, be soldiers, it is contradicted by one branch of the history before us, and contrary to innumerable instances of their fighting, and proving excellent soldiers in war; and indeed many of the best of them, and even under heathen kings themselves, did so; those, I mean, who allowed them their rest on the sabbath day, and other solemn festivals, and let them live according to their own laws, as Alexander the Great and the Ptolemies of Egypt did. It is true, they could not always obtain those privileges, and then they got executed as well as they could, or sometimes absolutely refused to fight, which seems to have been the case here, as to the major part of the Jews now banished, but nothing more. See several of the Roman decrees in their favor as to such matters, B. XIV. ch. 10.

 

(12) Since Moses never came himself beyond Jordan, nor particularly to Mount Gerizzim, and since these Samaritans have a tradition among them, related here by Dr. Hudson, from Reland, who was very skillful in Jewish and Samaritan learning, that in the days of Uzzi or Ozis the high priest, 1 Chronicles 6:6; the ark and other sacred vessels were, by God's command, laid up or hidden in Mount Gerizzim,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is was the foolish foundation the present Samaritans went upon, in the sedition here described.

 

(13) This mention of the high priest's sacred garments received seven days before a festival, and purified in those days against a festival, as having been polluted by being in the custody of heathens, in Josephus, agrees well with the traditions of the Talmudists, as Reland here observes. Nor is there any question but the three feasts here mentioned were the passover, pentecost, and feast of tabernacles; and the fast so called by way of distinction, as Acts 27:9, was the great day of expiation.

 

(14) This calculation, from all Josephus's Greek copies, is exactly right; for since Herod died about September, in the fourth year before the Christian era, and Tiberius began, as is well known, Aug. 19, A.D. 14, it is evident that the thirty-seventh year of Philip, reckoned from his father's death, was the twentieth of Tiberius, or near the end of A.D. 33, [the very year of our Savior's death also,] or, however, in the beginning of the next year, A.D. 34. This Philip the tetrarch seems to have been the best of all the posterity of Herod, for his love of peace, and his love of justice.

An excellent example this.

 

(15) This Herod seems to have had the additional name of Philip, as Antipus was named Herod-Antipas: and as Antipus and Antipater seem to be in a manner the very same name, yet were the names of two sons of Herod the Great; so might Philip the tetrarch and this Herod-Philip be two different sons of the same father, all which Grotias observes on Matthew 14:3. Nor was it, as I with Grotias and others of the Philip the tetrarch, but this Herod-Philip, whose wife Herod the tetrarch had married, and that in her first husband's lifetime, and when her first husband had issue by her-; for which adulterous and incestuous marriage John the Baptist justly reproved Herod the tetrarch, and for which reproof Salome, the daughter of Herodias by her first husband Herod-Philip, who was still alive, occasioned him to be unjustly beheaded.

(16) Whether this sudden extinction of almost the entire lineage of Herod the Great, which was very numerous, as we are both here and in the next section informed, was not in part as a punishment for the gross incests they were frequently guilty of, in marrying their own nephews and nieces, well deserves to be considered. See Leviticus 18:6, 7; 21:10; and Noldius, De Herod, No. 269, 270.

 

(17) There are coins still extant of this Eraess, as Spanheim informs us. Spanheim also informs us of a coin still extant of this Jotape, daughter of the king of Commageus.

 

(18) Spanheim observes, that we have here an instance of the Attic quantity of use-money, which was the eighth part of the original sum, or 12 per cent., for such is the proportion of 2500 to 20,000.

 

(19) The governor of the Jews there.

 

(20) Tiberius, junior of Germanicus.

 

(21) This high commendation of Antonia for marrying but once, given here, and supported elsewhere; Antiq. B. XVII. ch. 13. sect. 4, and this, notwithstanding the strongest temptations, shows how honorable single marriages were both among the Jews and Romans, in the days of Josephus and of the apostles, and takes away much of that surprise which the modern Protestants have at those laws of the apostles, where no widows, but those who had been the wives of one husband only, are taken into the church list; and no bishops, priests, or deacons are allowed to marry more than once, without leaving off to officiate as clergymen any longer. See Luke 2:36; 1 Timothy 5:11, 12; 3:2, 12; Titus 1:10; Constit. Apost. B. II. sect. 1, 2; B. VI. sect. 17; Can. B. XVII,; Grot. in Luc. ii. 36; and Resports. ad Consult. Cassand. p. 44; and Cotelet. in Constit. B. VI. sect. 17. And note, that Tertullian owns this law against second marriages of the clergy had been once at least executed in his time; and heavily complains elsewhere, that the breach thereof had not been always punished by the catholics, as it ought to have been. Jerome, speaking of the ill reputation of marrying twice, says, that no such person could be chosen into the clergy in his days; which Augustine testifies also; and for Epiphanius, rather earlier, he is clear and full to the same purpose, and says that law obtained over the whole catholic church in his days,--as the places in the forecited authors inform us.

 

(22) Dr. Hudson here takes notice, out of Seneca, Epistle V. that this was the custom of Tiberius, to couple the prisoner and the soldier that guarded him together in the same chain.

 

(23) Tiberius his own grandson, and Caius his brother Drusus's grandson.

 

(24) So I correct Josephus's copy, which calls Germanicus his brother, who was his brother's son.

 

(25) This is a known thing among the Roman historians and poets, that Tiberius was greatly given to astrology and divination.

 

(26) This name of a lion is often given to tyrants, especially by the such Agrippa, and probably his freed-man Marsyas, in effect were, Ezekiel 19:1, 9; Esther 4:9 2 Timothy 4:17. They are also sometimes compared to or represented by wild beasts, of which the lion is the principal, Daniel 7:3, 8; Apoc. 13:1, 2.

 

(27) Although Caius now promised to give Agrippa the tetrarchy of Lysanias, yet was it not actually conferred upon him till the reign of Claudius, as we learn, Antiq. B. XIX, ch. 5. sect. 1.

 

(28) Regarding instances of the interpositions of Providence, as have been always very rare among the other idolatrous nations, but of old very many among the posterity of Abraham, the worshippers of the true God; nor do these seem much inferior to those in the Old Testament, which are the more remarkable, because, among all their other follies and vices, the Jews were not at this time idolaters; and the deliverances here mentioned were done in order to prevent their relapse into that idolatry.

 

(29) Josephus here assures us that the ambassadors from Alexandria to Caius were on each part no more than three in number, for the Jews, and for the Gentiles, which are but six in all; whereas Philo, who was the principal ambassador from the Jews, as Josephus here confesses, (as was Apion for the Gentiles,) says, the Jews' ambassadors were themselves no fewer than live, towards the end of his legation to Caius; which, if there be no mistake in the copies, must be supposed the truth; nor, in that case, would Josephus have contradicted so authentic a witness, had he seen that account of Philo's; which that he ever did does not appear.

 

(30) This Alexander, the alabarch, or governor of the Jews, at Alexandria, and brother to Philo, is supposed by Bishop Pearson, in Act. Apost. p. 41,42, to be the same with that Alexander who is mentioned by St. Luke, as of the kindred of the high priests, Acts 4:6.

 

(31) What Josephus here, and sect. 6, relates as done by the Jews seed time, is in Philo, "not far off the time when the corn was ripe," who, as Le Clerc notes, differ here one from the other. This is another indication that Josephus, when he wrote this account, had not seen Philo's Legat. ad Caiurn, otherwise he would hardly trove herein differed from him.

 

(32) This. Publius Petronius was after this still president of Syria, under Cladius, and, at the desire of Agrippa, published a severe decree against the inhabitants of Dora, who, in a sort of intitation of Caius, had set op a statue of Claudius in a Jewish synagogue there. This decree is extant, B. XIX. ch. 6. sect. 3, and greatly confirms the present accounts of Josephus, as do the other decrees of Claudius, relating to the like Jewish affairs, B. XIX. ch. 5. sect. 2, 3, to which I refer the inquisitive reader.

 

(33) Josephus here uses the solemn New Testament words, the presence and appearance of God, for the extraordinary manifestation of his power and providence to Petronius, by sending rain in a time of distress, immediately upon the resolution he had taken to preserve the temple unpolluted, at the hazard of his own life, without any other miraculous appearance at all in that case; which well deserves to be taken notice of here, and greatly illustrates several texts,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

 

(34) This behavior of Caius to Agrippa is very like that of Herod Antipas, his uncle, to Herodias, Agrippa's sister, about it John the Baptist, Matthew 14:6--11.

 

(35) The joining of the right hands was esteemed among the Peoians [and Parthians] in particular a most inviolable obligation to fidelity, as Dr. Hudson here observes, and refers to the commentary on Justin, B. XI. ch. 15., for its confirmation. We often meet with the like use of it in Josephus.

 

(36) This custom of the Mesopotamians to carry their household gods along with them wherever they traveled is as old as the days of Jacob, when Rachel his wife did the same, Genesis 31:19, 30-35; nor is it to pass here unobserved, what great miseries came on these Jews, because they suffered one of their leaders to marry an idolatrous wife, contrary to the law of Moses. Of which matter see the note on B. XIX. ch. 5. sect. 3.

 

(37) This custom, in Syria and Mesopotamia, of setting men upon an ass, by way of disgrace, is still kept up at Damascus in Syria; where, in order to show their despite against the Christians, the Turks will not suffer them to hire horses, but asses only, when they go abroad to see the country, as Mr. Maundrell assures us, p. 128.

 

 

출처 : https://www.earlyjewishwritings.com/text/josephus/ant18.html

 

Josephus, Antiquities Book XVIII

 

www.earlyjewishwritings.com

 

번역 :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