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고대사 - 제 20 권
22년의 간격을 담고 있습니다.
파두스(FADUS)에서 플로루스(Florus)까지.
제 1 장
유대인에 대한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소요; 그리고 대제사장의 예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1. 앞선 책에서 우리가 언급한 아그리파 왕이 죽자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는 아그리파 왕을 기억하기 위해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마르쿠스의 후계자로 보냈습니다. 그는 마커스가 더 이상 시리아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두스는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오자마자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미아라는 마을에서 페레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필라델피아 사람들 사이에 그들의 국경 근처에서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페레아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의 동의 없이 무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사람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Fadus는이 절차에 대해 알게되었을 때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 문제에 대한 결정을 그에게 맡기지 않고 성급하게 그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매우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소요의 원인이기도 한 세 명의 주요 인물을 붙잡아 결박하라고 명령한 후 그 중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인 아레람과 엘르아자르도 쫓아냈습니다. 대강도인 톨로미도 얼마 후 결박되어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두메아와 아라비아인들에게 해악을 끼치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때부터 파두스의 보살핌과 섭리로 유대에서 강도 사건이 사라졌습니다. 이때에 그가 또 황제의 명을 받아 대제사장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명하여 긴 옷과 거룩한 옷을 내놓으라 하였으니 이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에게도 입는 것이 아니니라 안토니아 망대에 대제사장을 입게 하여 그 망대를 이전과 같이 로마인의 지배하에 두게 하였느니라. 이제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감히 반박하지 않고 파두스와 롱기누스를 원했는데, 롱기누스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왔고 파두스의 [엄격한] 명령이 그 명령에 어긋날 것을 두려워하여 큰 군대를 데리고 그와 함께 왔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하고) 먼저 가이사에게 대사를 보내어 거룩한 예복을 그들 스스로 소유할 수 있도록 청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클라우디우스가 그들의 요청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지 알 때까지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로운 행동을 위해] 그들의 아들을 담보로 제공한다면 대사를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동의하고 그들이 원하는 서약을 했을 때 그에 따라 대사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이 로마에 이르매 고인의 아들 작은 아그립바가 그들이 온 이유를 알고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글라우디오 가이사와 함께 살았음이라) 가이사에게 간구하여 유대인들이 구한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하더니 거룩한 예복을 입고 그에 따라 파두스에게 메시지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2.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대사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의 요청을 허락했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의 간청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이 은혜에 대해 감사하라고 그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답변 외에도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들 편으로 보냈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Claudius Caesar Germanicus)는 다섯 번째로 인민의 호민관이었으며, 네 번째로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열 번째로 높은 황제로서 조국의 아버지로서 치안 판사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와 원로원과 백성과 온 유다 민족이 문안하노라 내 친구 아그립바가 너희 사절을 내게 소개하였으니 그는 내가 키워서 나와 함께 있는 자라 그들은 큰 경건함을 가지고 와서 내가 너희 민족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열렬하고 은혜로운 태도로 나에게 간청하여 그들이 거룩한 예복과 면류관을 그들의 권위 아래 차지하게 하려고 왔다. , - 내가 매우 사랑하는 저 훌륭한 사람인 비텔리우스가 나보다 먼저 했던 것처럼 나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 나라의 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헤롯 왕과 아그립바 동생에게 큰 감사를 표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나를 신성하게 대하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고 잘 알고 있고 가장 큰 우정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최고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합니다. 이제 나는 내 검찰관인 Cuspius Fadus에게 이 문제에 관해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나에게 가져온 사람들의 이름은 Cero의 아들 Cornelius, Theudio의 아들 Trypho, Nathaniel의 아들 Dorotheus, Jotre의 아들 John입니다. 이 편지의 날짜는 루피스와 폼페이우스 실바누스가 집정관인 7월 4일 이전입니다."
3. 죽은 아그립바의 동생 헤롯도 갈기스의 왕권을 갖고 있었는데, 글라우디오 가이사에게 성전의 권위와 보물의 은전과 대제사장들의 선택과 그가 청원한 것을 모두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권세가 그의 모든 자손에게 계속되었느니라(1) 따라서 헤롯은 킴테라라고 불리는 마지막 대제사장을 폐위시키고 그의 후계자인 칸토스의 아들 요셉에게 그 위위를 부여했습니다.
제 2 장
아디아베네의 여왕 헬레나와 그녀의 아들 이자테가 유대인 종교를 받아들인 방법; 그리고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헬레나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옥수수를 공급했는지.
1. 이 무렵 아디아베네의 여왕 헬레나와 그녀의 아들 이자테스는 생활 방식을 바꾸고 유대인의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디아베네의 왕 모노바조스라는 이름도 가진 사람 바제우스의 누이 헬레나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아내로 삼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는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워서 아내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잠이 들었는데, 아내의 배에서 손을 떼고 그 속에 있는 아기를 해치지 말라고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 하나님의 섭리로 무사히 태어나 행복하게 끝날 것입니다. 이 목소리는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래서 그는 즉시 잠에서 깨어나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는 그를 이자테스(Izates)라고 불렀습니다. 그에게는 실제로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그의 형인 모노바조스가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아내들 사이에서도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그의 모든 애정을 그의 독생자에게 두셨는가?(2) 아들 이자테스(Izates)는 같은 아버지에게서 다른 형제들이 그에게 품은 시기심의 근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그를 점점 더 미워했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보다 이자테스를 더 좋아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의 정욕을 잘 알고 계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셨으니, 이는 악한 성향 때문에 그러한 정욕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Izates를 많은 선물과 함께 Charax-Spasini의 왕인 Abennerig에게 보냈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품은 증오로 인해 불행을 겪지 않도록 큰 두려움 때문에 그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보호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러자 Abennerig는 그 젊은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에게 큰 애정을 품고 그를 Samacha라는 이름의 자기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그에게 나라를 하사하여 많은 수입을 얻었습니다.
2. 그러나 모노바조스는 나이가 많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죽기 전에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내 그를 가장 다정하게 포옹하고 그에게 카라(Carra)라는 나라를 주었다. 그곳은 엄청난 양의 물질을 낳은 토양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노아가 대홍수를 피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방주의 유적도 있고, 방주의 유적은 여전히 그곳에서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졌습니다.(3) 따라서 Izates는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 나라에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모노바조스가 죽던 바로 그 날, 헬레나 여왕은 왕국의 모든 고관들과 총독들, 그리고 그들의 지휘에 군대를 위임한 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왔을 때 그녀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남편이 이자테스가 정부에서 그를 계승하기를 바랐고 그가 그렇게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당신이 모르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자발적인 투표로 왕국을 얻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녀는 초대받은 사람들을 시험해보고 그들의 감정을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들은 먼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여왕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왕의 결정을 확인하고 이에 복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Izates의 아버지가 그들의 모든 소망에 동의하여 그의 나머지 형제들보다 그를 선호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을 살해하여 정부가 Izates에게 안전하게 오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단 멸망된다면, 그에 대한 그들의 증오와 시기심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헬레나는 이에 대해 자신과 이자테스에 대한 그들의 친절에 감사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자테스의 형제들을 학살하는 처형을 그가 직접 그곳에 가서 승인할 때까지 연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녀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충고했을 때 적어도 그가 올 때까지 그들을 묶어 두어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라고 그녀에게 권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 동안 그녀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왕국의 총독으로 세우도록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헬레나 여왕은 그들의 조언에 따라 장남 모노바조스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인장과 함께 아버지의 반지를 그에게 주었다. 또한 그들이 삼프서(Sampser)라고 부르는 장식품도 있었고, 그의 형이 올 때까지 왕국의 일을 관리하라고 그에게 권고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와서 그의 형제 모노바조스를 계승하여 정부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3. 이자테스가 카락스스파시니에 머물고 있을 때, 아나니아라는 유대 상인이 왕의 신하들 가운데 섞여 유대 종교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들의 수단을 통해 Izates에게 알려졌고 같은 방식으로 그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는 또한 Izates의 간절한 간청으로 그의 아버지가 Adiabene으로 오도록 보냈을 때 그와 동행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헬레나도 다른 유대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그들에게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Izates가 왕국을 차지하고 아디아베네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그의 형제들과 다른 친척들이 결박되어 있는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그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이 불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가해진 피해를 기억하면서 그들 중 몇 사람과 그들의 아이들을 인질로 삼아 로마와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에게 보내고 다른 아이들은 같은 의도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에게 보냈습니다.
4. 그리고 그는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의 관습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서둘러 그것을 바꾸고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완전한 유대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의도를 알고는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이 일이 그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에게 이상하고 이질적인 의식을 그토록 좋아한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게 될 때, 그는 그의 신민들 사이에서 큰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의 통치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고, 당분간은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여자가 아나니아에게 말한 것을 말하고 나서 자기 어머니가 한 말을 확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도 그를 떠나겠다고 위협했을 때, 그가 따르지 않으면 그에게서 떠나가서 그런 행동이 한 번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그 기회와 평판이 좋지 않은 행동에서 왕의 교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그가 유대 율법을 온전히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할례보다 우월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그가 그 수술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그 수술은 필요에 따라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략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왕은 아나니아의 이러한 설득에 따랐습니다. 그 후에도 이 일을 하고자 하는 뜻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갈릴리에서 나온 다른 유대인이라 이름하는 엘르아살이라 그 나라 학문에 학문에 능숙한 자라 그를 권하여 이 일을 하게 하니라 물건; 그가 문안하러 왕궁에 들어가다가 그가 모세의 율법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르되 왕이여 왕이여 이 율법의 원칙을 부당하게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 [할례를 생략함으로써] 당신은 그것을 읽을 뿐 아니라 주로 그들이 당신에게 명령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언제까지 할례를 받지 않고 지내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얼마나 큰 불경죄를 범하고 있는지 지금 읽어 보십시오." 왕은 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다른 방으로 가서 외과의사를 불러 명령받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 어머니와 자기 가정교사 아나니아를 불러 자기가 그 일을 했다고 알렸다. 이에 그들은 즉시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그 일이 공개적으로 밝혀지고 비난을 받아 왕이 그의 왕국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의 신민들은 통치자의 통치를 참지 못하게 될까 봐 크게 놀랐습니다. 다른 종교에 너무 열심이었던 사람;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어떤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그렇게 할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했던 일이 실행되는 것을 방해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자테스 자신과 그의 아들들이 많은 위험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출했고, 그것이 불가능해 보였을 때 그들을 구원했으며,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는 경건의 열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께만 믿음을 두라.(4) 그러나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다루겠습니다.
5. 왕의 어머니 헬레나는 이자테스의 나라가 평안함과 자기 아들이 행복하여 하나님의 섭리로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이방인에게까지 존경받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하여 그녀는 예루살렘 성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유명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고 거기서 감사제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더라. 그래서 그녀는 아들이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하고 그녀를 떠날 준비를 많이 하고 많은 돈을 주었다. 그녀는 예루살렘 성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아들이 그녀를 데리고 먼 길을 갔다. 그 여자가 오는 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하니라. 그 당시에 기근이 그들을 눌렀고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조달하는 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여 죽었지만, 헬레나 여왕은 많은 양의 옥수수를 사기 위해 돈을 가지고 하인 몇 명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고 다른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보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말린 무화과를 실어 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식량이 매우 빨리 완료되자 그녀는 음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그녀가 우리에게 준 이 은혜에 대한 가장 훌륭한 기념물을 그녀 뒤에 남겼습니다. 전국. 그리고 그녀의 아들 Izates가 이 기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5) 그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여왕과 왕이 우리 도시 예루살렘에 어떤 은총을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제 3 장
어떻게 파르티아의 왕 아르타바누스가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비밀 음모를 두려워하여 이자테스로 갔으며, 그에 의해 그의 정부로 복귀되었는지; 또한 BARDANES가 그의 아들이 Izates에 대한 전쟁을 어떻게 비난했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1. 그러나 이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는 속주 총독들이 자신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 그들 가운데 계속 머무르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단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영토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자테스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Izates에 와서 그의 친척과 하인 수천 명을 데리고 길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Izates를 잘 알고 있었지만 Izates는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르타바누스가 그 옆에 서서 먼저 관례에 따라 그에게 경배했을 때 그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운명의 변화로 인해 신분이 낮아지고 왕의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운명을 고려하고 당신의 보살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내가 무시당하고 내 신하들이 처벌받지 않고 떠나간다면, 다른 많은 신하들도 다른 왕들에게 더욱 무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르타바누스는 눈물을 흘리며 낙담한 얼굴로 이 연설을 했습니다. 이제 이자테스는 아르타바누스의 이름을 듣고 그가 탄원자처럼 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용기를 가지십시오. 현재의 재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슬픈 상태는 갑작스럽게 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희망이 당신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친구이자 조력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2. 이 말을 하고 그는 아르타바누스를 말에 태우고 자신보다 더 큰 왕을 기리기 위해 도보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것을 본 아르타바누스는 매우 불안했고, 이자테스가 다시 말을 타고 그보다 앞서 가지 않으면 말에서 내리겠다고 현재의 재산과 명예를 걸고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뜻대로 말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왕궁으로 데려가서 함께 앉았을 때 그에게 온갖 존경심을 표했고, 축제 때에도 그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현재 재산이 아니라 이전의 위엄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행운의 변화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라는 점을 고려하십시오. 그는 또한 파르티아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아르타바누스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른손과 믿음을 주셔서 지나간 일과 이미 이루어진 일을 잊어버리시고 그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이 일을 맡게 하셨습니다. 이제 파르티아인들은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부를 받아들인 다른 사람에게 정부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킨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때문에 내전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킨나무는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아르타바누스에게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서 자랐고 성격도 착하고 온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를 신뢰하고 와서 다시 자신의 통치권을 가져가기를 바랐습니다. 따라서 아르타바누스는 그를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 킨나무가 그를 만나서 절하고 그를 왕으로 칭송하고 그의 머리에서 왕관을 빼앗아 아르타바누스의 머리에 씌웠느니라.
3. 그리하여 아르타하누스는 왕국의 귀족들에 의해 왕국을 잃었지만 이자테스를 통해 그의 왕국을 다시 회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에게 부여한 혜택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그들 중 가장 존경받는 영예로 그에게 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 왕관을 똑바로 쓰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6) 그리고 황금 침대 위에서 잠을 자는 것, 이는 파르티아 왕들에게 특유한 특권이자 명예의 표시이다. 그는 또한 아르메니아 왕에게서 크고 비옥한 땅을 잘라 그에게 바쳤습니다. 나라 이름은 니시비스(Nisibis)인데, 마케도니아인들은 이전에 미고돈라의 안티오크(Antioch of Mygodonla)라고 불렀던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파르티아 왕이 이자테스에게 수여한 영예였습니다.
4.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Artabanus는 죽고 그의 왕국을 그의 아들 Bardanes에게 맡겼습니다. 이제 이 Bardanes는 Izates에 왔고, 그를 그의 군대에 합류시키고 그가 로마인들과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는 전쟁에서 그를 돕도록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Izates는 로마인의 힘과 행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Bardanes를 데리고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그 외에 그의 아들 다섯 명과 아직 어린 것도 보내어 우리와 함께 우리 민족의 언어를 정확하게 배우게 하였고 또 내가 이미 말한 대로 그 어머니를 우리 성전에 보내어 예배하게 하셨느니라 , 준수에 더 뒤떨어졌습니다. 그리고 Bardanes를 제지하고 그에게 로마인의 대군과 유명한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그에게 겁을 주려고 생각했고 그 원정에서 그를 방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파르티아 왕은 그의 행동에 분노하여 즉시 이자테스에 대한 전쟁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전쟁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대한 그의 모든 소망을 끊으셨음이라. 파르티아인들은 Bardanes의 의도와 그가 어떻게 로마인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는지 알아차리고 그를 죽이고 그의 왕국을 그의 형제 Gotarzes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음모로 인해 죽고 그의 형제인 볼로가세스(Vologases)가 그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같은 아버지가 그의 두 형제에게 자신의 영토 중 두 곳을 맡겼습니다. 메디아인의 장로 파코루스(Pacorus);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더 어린 티리다테스(Tiridates)에게 있습니다.
제 4 장
어떻게 Izates가 자신의 백성에 의해 배반당했고,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싸웠으며, 어떻게 Izates가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의 손에서 구출되었는지.
1. 이제 왕의 동생 모노바조스와 그의 다른 친족들은 이자테스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크게 존경받는 것을 보고 그들도 자기 나라의 종교를 버리고 종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Izates의 피험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귀족들은 매우 불쾌해했고 그들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 그들에게 형벌을 가할 의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라비아 왕 아비아에게 편지를 보내 만일 그가 그들의 왕을 대적한다면 막대한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그에게 처음부터 그들의 종교 예배에 대한 왕의 증오 때문에 그를 처벌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왕을 버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맹세를 통해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하고 그가 이 계획을 서두르기를 바랐습니다. 아라비아 왕은 그들의 뜻에 따라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자테스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될 때, 그리고 그들이 근접전을 벌이기 전에, 그 Handees는 마치 공포에 질린 것처럼 그들 모두가 하기로 합의한 대로 Izates를 버리고 그들의 등을 돌렸습니다. 적들이여, 도망쳐라. 그러나 Izates는 이것에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관들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나서 그 문제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라비아 왕과 이런 음모를 꾸민 자가 누구인지 알고 곧 그 죄 있는 자들을 멸절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전투를 벌여 적의 대부분을 죽였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왕을 쫓아 아르사무스(Arsamus)라는 요새로 몰아넣었고, 포위 공격을 계속해 그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노략물 중 적지 않은 것을 약탈하고 아디아베네로 돌아갔더라. 그러나 그는 아비야를 살려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방으로 포위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아디아베네의 귀족들은 하나님에 의해 그들의 왕의 손에 넘겨져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때에도 잠잠하지 않고 당시 파르티아의 왕이었던 볼로가세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그는 Izates를 죽이고 Parthian 가문에 속해야 할 다른 유력자를 그들 위에 세울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들은 조상들의 법을 폐하고 외국 풍습을 받아들인 왕을 미워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파르티아 왕은 이 말을 듣고 대담하게 이자테스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전쟁에 대한 정당한 핑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명예로운 특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그가 거절하면 그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자테스는 비겁함 때문에 그에게 부여된 특권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자신에게 치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적지 않은 마음의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파르티아의 왕이 그 영예를 되찾을지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생명의 위험 속에서 그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를 그의 주요 조수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매우 견고한 요새에 맡기고 그의 곡식을 그의 성채에 쌓고 건초와 풀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최선을 다해 적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파르디아 왕이 많은 보병과 기병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예상보다 빨리 행하여 (매우 급히 행군했기 때문에) 아디아베네와 메디아를 나누는 강가에 제방을 쌓았더니 - 이자테스(Izates)도 멀지 않은 곳에 6천 명의 기병을 데리고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파르티아 왕이 보낸 사자가 이자테스에 왔는데, 그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박트리아에 이르는 그의 영토가 얼마나 큰지 그에게 말하고 왕의 신하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영주들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으로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능히 그를 왕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메신저가 이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Izates는 Parthia 왕의 힘이 자신의 힘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이 모든 사람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 재를 뿌리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금식하였느니라.(7)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이시며 총독이시여, 내가 당신의 선하심에 헌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고 오직 당신만이 유일한 주님이시요 모든 존재의 주인이시라 옳게 결심하였거든 지금 내 마음에 오소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무례한 행위 때문에 나를 도우시고 내 원수들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애도하고 한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볼로가세스는 즉시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다헤와 사크세의 큰 무리가 그를 경멸하면서, 이제 그는 집에서 너무 먼 여행을 떠나 원정을 떠나 파르티스를 황폐화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자테스는 하나님의 섭리로 파르티아인의 위협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3. Izates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생애 55년을 마치고 그의 왕국을 24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는 아들 스물네 명과 딸 스물네 명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형제 모노바조스에게 정부를 계승하라고 명령하여 그에게 보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은 후 자신이 없는 동안 그를 위해 정부를 충실히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들었을 때, 그처럼 가장 충실한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너무나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큰아들에게 계승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서둘러 그에게 갔다. 그리고 그녀가 Adiabene에 왔을 때 그녀는 아들 Izates보다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노바조스는 자신의 유골과 그의 동생 이자테스의 유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피라미드에 묻으라고 명령했다.(8) 그들의 어머니가 세운 것; 그 수는 세 명이었고, 예루살렘 성에서 불과 세 펄롱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노바조스 왕이 남은 생애 동안 행한 행동에 대해. 우리는 나중에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제 5 장
테우다와 갈릴리 사람 유다의 아들들에 관하여; 또한 유월절 날에 유대인들에게 어떤 재난이 닥쳤는가?
1. 파두스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에 데우다스라 하는 마술사가 있었는데(9) 많은 사람들이 소지품을 가지고 그를 따라 요단강으로 가도록 설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선지자이며 자신의 명령으로 강을 나누어 그들이 쉽게 건너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속았습니다. 그러나 파두스는 그들이 자신의 난폭한 시도를 이용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기병 부대를 보내 그들에게 맞서게 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그들에게 닥쳐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느니라. 그들은 드우다도 살려서 그의 머리를 베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다. 이것이 Cuspius Fadus 정부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닥친 일이었습니다.
2. 그런 다음 Tiberius Alexander가 Fadus의 후계자로 왔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라바크 알렉산더의 아들이었는데, 알렉산더는 그의 가족과 부 모두에서 그의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보다 경건함으로 더 유명했습니다. 그 나라의 종교. 이 총독들 치하에서 유대에 큰 기근이 들었고, 그로 인해 헬레나 여왕은 이집트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곡식을 사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갈릴리 유다의 아들들도 이제 죽임을 당했습니다. 내 말은, 우리가 앞선 책에서 보여 주었듯이, 구레뇨가 유대인들의 재산을 조사하러 왔을 때 사람들의 반란을 일으킨 유다를 의미합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은 야고보와 시몬이었는데, 알렉산더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칼키스 왕 헤롯은 카미두스의 아들 요셉을 대제사장직에서 폐위시키고 네베데우의 아들 아나니아를 대신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Cumanus가 Tiberius Alexander의 후계자로 왔습니다. 또한 대왕 아그리파의 형제 헤롯도 글라우디오 가이사 통치 제8년에 세상을 떠났느니라. 그는 세 아들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아내에게서 얻은 아리스토불루스, 베르니키아누스, 히르카누스는 둘 다 그의 형제의 딸인 베르니케에게서 낳았습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Claudius Caesar)는 후배인 아그리파(Agrippa)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부여했습니다.
3. 유대 사사가 구레아누스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 예루살렘 성에 큰 소동이 일어나서 많은 유대인이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 그러나 먼저 그것이 파생된 계기를 설명하겠습니다. 유월절이라 불리는 절기가 가까왔을 때, 우리의 관습은 무교병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 절기에 대하여 각처에서 큰 무리가 모였을 때, 쿠마누스는 어떤 혁신을 시도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을; 그래서 그는 군대의 한 연대가 혁신의 시도가 시작될 경우 무기를 들고 사원 회랑에 서서 진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유대 총독들이 그러한 축제에서 행한 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잔치 넷째 날, 한 군인이 바지를 내리고 하의를 군중에게 노출시켰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맹렬한 분노를 느꼈고, 이 불경건한 행위는 그들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소리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아니, 그들 중 일부는 쿠마누스를 비난하고 그 군인이 그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쿠마누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자신도 그에게 가해진 그러한 비난에 적지 않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선동적인 시도를 중단하고 축제에서 소동을 일으키지 말라고 그들에게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자기를 비난하기 때문에 그들을 잠잠하게 할 수 없자, 그는 온 군대에게 그들의 모든 갑옷을 취하고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요새인 안토니아로 오라고 명령하였다.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곳; 그러나 군중은 거기 있는 군인들을 보고 겁을 먹고 급히 달아났다. 그러나 나가는 길은 좁았고, 적들이 따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도망가는 동안 함께 모여들었고, 그 좁은 통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실제로 이 소동 속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이만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축제 대신에 마침내 슬픈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기도와 희생을 잊어버리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한 병사의 뻔뻔스럽고 음란한 행동이 그들에게 가져온 고통은 너무나 컸습니다.(10)
4. 이제 그들의 첫 번째 애도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재난이 그들에게 닥쳤습니다. 앞서 말한 소동을 일으킨 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성읍에서 백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로 가다가 가이사의 종 스데파노의 여행 중에 그에게서 물건을 빼앗고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것을 약탈하였느니라 ; 쿠레아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군인들을 보내 이웃 마을을 약탈하고 그들 중 가장 저명한 사람들을 결박하여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파괴가 일어나고 있을 때, 군인 중 한 명이 그 마을 중 한 마을에 있는 모세의 율법을 압수하여, 참석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가지고 나와 찢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비난하는 말과 매우 경멸적인 태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듣고 크게 달려와 함께 달려와 그 당시 구마노가 있는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자기들의 원수를 갚지 않고 오직 율법을 모욕하신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 주시기를 구하니 왜냐하면 만일 그들의 조상의 법이 이런 식으로 모욕을 당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쿠마누스는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의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법을 모욕한 군인을 참수하여 폭동을 멈추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두 번째로 불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 6 장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어떻게 다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클라우디우스가 어떻게 그들의 차이를 종식시켰는지.
1. 이 일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다툼이 난지라. 갈릴리인들이 명절을 맞아 거룩한 성에 이르러 사마리아인의 땅으로 다녀가는 것이 관례라.(11) 그 때에 그들이 가는 길에 사마리아와 큰 평지 경계에 있는 기니아라 하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속한 어떤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과 싸워 큰 용사를 죽였더라 그들 중 다수.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자 그들은 쿠마누스에게 와서 그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죽인 원수를 갚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가지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권유를 받아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갈릴리 사람들은 심히 노하여 유대인 무리를 설득하여 무장하여 자유를 되찾게 하고 노예 제도 자체는 괴롭지만 직접적인 해악과 결합하면 완전히 괴롭다 하더라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들이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살해된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쿠레아누스를 설득하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무기를 들고 디네우스의 아들 엘르아자르에게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수년 동안 산에 거주했던 강도가 도움을 받아 사마리아인의 많은 마을을 약탈했습니다. 쿠마누스는 그들의 이 행동을 듣고 네 보병 연대와 함께 세바스테 부대를 데리고 사마리아인들을 무장시키고 유대인들을 향해 진군하여 그들을 붙잡아 그들 중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빼앗았다. 그들은 살아있다; 예루살렘의 고관들은 자기들과 자기 종족들이 받는 존경과 관련하여 물건이 얼마나 높은지 본즉 곧 베옷을 입고 무더기로 쌓았더라 그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선동자들에게 간청하여 그들의 나라가 완전히 전복되고 성전이 불타고 그들과 아내와 자녀들이 노예가 되는 일을 눈앞에 두도록 설득했습니다.(12)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바꾸고 무기를 버리고 미래를 위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설득이 그들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백성은 흩어지고 강도들은 다시 자기들의 견고한 곳으로 도망갔으나 그 이후 온 유대에는 약탈이 들끓었습니다.
2. 사마리아인의 우두머리가 당시 두로에 있던 시리아 총독 움미디우스 콰드라도에게 가서 유대인들이 자기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보여준 경멸만큼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별로 불만을 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어떤 해를 입었다면 그들을 재판관으로 삼았어야 했고, 마치 로마인들이 그들의 총독이 아닌 것처럼 당장에 그런 파괴를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복수를 얻기 위해 그에게 왔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 소란과 싸움의 장본인이며, 우선 쿠마누스가 그들의 선물로 인해 타락했으며, 조용히 살해된 사람들의 살인을 묵인했다고 단언했습니다. - Quadratus가 이 주장을 들었을 때 그는 원인에 대한 심리를 연기하고 유대에 오면 형을 선고할 것이며 그 문제의 진실에 대해 더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Quadratus는 사마리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그 원인을 듣고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그 소란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 중 일부가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쿠마누스가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거기서 룻다라 하는 마을에 이르니 그 동네는 큰 성보다 작지 아니하더라 거기서 사마리아인의 재판정 앞에서 두 번째 소송을 듣고 어떤 사마리아인에게서 유대인의 우두머리 하나가 이르되 그의 이름은 도르투스(Dortus)였고, 그와 함께 있던 네 명의 다른 혁신가들이 군중을 설득하여 로마인들로부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콰드라도는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그래도 그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성전 지휘관 아나누스를 결박하여 로마에 보내어, 그들이 글라우디오 가이사에게 행한 일을 보고하게 하였느니라. 그는 또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주요 인물들과 총독 쿠마누스(Cumanus)와 호민관 케이에르(Ceier)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황제에게 가서 그들의 주장을 듣고 서로의 차이점을 확인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어떤 혁신을 시도할까 봐 두려워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시가 평화로운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 나라의 일반적인 축제 중 하나를 하나님께 거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어떤 혁신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축제 축하 행사에 맡겨두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3. 이제 쿠마누스와 로마로 파견된 사마리아인의 우두머리들은 황제가 그들에게 정한 날을 정하여 그들이 서로간의 다툼에 대해 변론하도록 하였더라. 그러나 이제 카이사르의 자유민과 그의 친구들은 쿠마누스와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에 있던 후배 아그립바가 유대인의 우두머리들이 굳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황제의 아내 아그리피나에게 자기 남편을 설득하여 그 이유를 들어 달라고 간절히 간청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유대인들을 이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의에 동의했고 실제로 로마 정부의 이 반란을 주도한 사람들을 처벌할 것을 정죄했습니다. 그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사전에 매우 좋은 태도를 취하여 그 원인을 듣고 사마리아인들이 그 짓궂은 일의 주모자들을 쫓아낸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자들을 죽여버리고 쿠레아누스를 추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또한 호민관 셀레르를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서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 성읍을 휩쓸어 죽임을 당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제 7 장
펠릭스는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아그리파, 주니어 및 그의 자매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 그리하여 클라우디우스는 팔라스의 형제 벨릭스를 유대의 일을 돌보도록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 제12년이 이미 끝났을 때, 그는 아그리파에게 필리포스와 바타네아의 사분왕국을 부여하고 거기에 아빌라와 함께 트라코니테스(Trachonites)를 추가했습니다. 마지막은 리사니아(Lysanias)의 사분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의 총독이 된 지 4년 동안 칼키스를 그에게서 빼앗았다. 그리고 아그리파는 카이사르의 선물로 이 나라들을 받았을 때 할례를 받기로 동의한 후 그의 누이 드루실라를 에메사 왕 아지수스와 결혼시켰다. 안티오코스 왕의 아들 에피파네스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유대교로 건너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제는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마리암네를 헬키아스의 아들 아르켈라오스와 결혼하게 하였는데, 그녀는 이전에 그녀의 아버지 아그리파와 약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결혼하여 딸이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은 버니스였습니다.
2. 그러나 드루실라와 아지수스의 결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해소되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그는 이 드루실라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움에 있어서 다른 모든 여성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시몬이라는 사람을 보내셨다.(13) 그의 친구 중 한 명; 그는 유대인이었고 태어날 때부터 키프로스 사람이었고 마술사인 척하며 현재 남편을 버리고 그와 결혼하도록 그녀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거절하지 않으면 그녀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악하게 행동했고, 그녀의 여동생 베르니케의 시기심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고, 설득되어 그녀의 조상들의 법을 범하고 펠릭스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아그리파라고 지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와 그의 아내는 어떤 방식으로 베수비오 산의 대화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14) 디도 가이사 시대에 대하여는 이후에 관련될 것이다.(15)
3. 그러나 버니게는 자기 남편이자 숙부였던 헤롯(칼키스 왕)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과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오빠인 아그리파와 범죄적인 대화를 했다는 소문이 나자 그녀는 킬리키아 왕 폴레메를 설득하여 할례를 받고 자신과 결혼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녀에게 거짓이라고; 그리고 Poleme이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주로 그녀의 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Bernice는 말했듯이 불순한 의도로 Poleme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이 결혼과 유대교를 버렸습니다. 동시에 Mariamne은 Archclaus를 버리고 그의 가족과 부를 위해 Alexandrian 유대인 중 주요 인물인 Demetrius와 결혼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당시 그들의 알라바크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그리피누스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이후에 더 정확하게 다루겠습니다.(16)
제 8 장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후 네로는 정부에서 성공했습니다. 또한 그가 행한 야만적인 일들도요. 벨릭스와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일어난 강도와 살인자와 사기꾼에 대하여라
1. 이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가 13년 8개월 20일을 통치하다가 죽었습니다.(17) 그리고 그가 그의 아내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카이사르의 동생 게르마니쿠스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로마 시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인 Domitius Aenobarbus였습니다. 그가 죽고 오랫동안 과부 생활을 한 후 클라우디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아들 돔티투스(Domtitus)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질투심으로 아내 메살리나를 죽였고, 그 사이에서 브리타니쿠스와 옥타비아를 낳았다. 그들의 큰 여동생은 Antonia였으며 그의 첫 번째 아내 Pelina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또한 Octavia와 Nero와 결혼했습니다. 왜냐하면 카이사르가 나중에 그를 아들로 입양할 때 그에게 붙인 이름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이제 아그리피나는 브리타니쿠스가 인간의 영토에 오를 때 그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정부를 이어받을까 봐 두려워했고, 그녀의 아들(네로)을 위해 미리 공국을 장악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을 에워싸고 있다는보고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즉시 군대 장군 부르후스와 그와 함께 호민관들과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자유민들을 보내 네로를 진영으로 데려와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로는 이렇게 정부를 얻었을 때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여 대중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비록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어머니를 공개적으로 죽였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계략으로 로마 제국을 획득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내 옥타비아와 다른 많은 저명인사들을 이러한 구실로 살해하여 그에 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3.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관한 더 이상의 논의를 생략합니다. Nero의 역사를 쓴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중 일부는 그에게서 혜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실의 진실에서 벗어났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한 증오심과 그를 낳은 큰 악의로 인해 뻔뻔스럽게 거짓말로 그를 대적하여 정죄받아 마땅합니다. 나는 네로에 대해 거짓말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네로 시대 이전의 사실에 대한 역사의 진실을 그들의 글에서 보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우리의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은 우리 자신에 관해서는 이 사업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서만 간단히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원한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겪었던 재난과 우리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우리 문제의 관계로 돌아가겠습니다.
4. 네로 통치 원년에 에메사 왕 아지수스가 죽자 그의 형제 소에무스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헤롯의 아들 칼키스 왕 아리스토불루스가 네로의 위임을 받아 소 아르메니아 정부. 가이사는 또한 갈릴리와 디베랴와 타리새의 일부를 아그립바에게 주었으니(18)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관할권에 복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베뢰아의 한 성 율리아스와 그 주변에 14개의 마을을 주셨습니다.
5. 유대인의 사정은 더욱 심하여졌고 그 나라에는 다시 강도와 사기꾼이 가득하여 무리를 미혹하였더라 그러나 벨릭스는 날마다 사기꾼들과 강도들을 많이 잡아 죽였습니다. 그는 또한 강도 떼를 모은 디네아스의 아들 엘아자르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배신으로 이것을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고 그렇게 하여 그에게 오도록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와서 그를 결박하여 로마로 보냈습니다. 벨릭스도 대제사장 요나단에게 악의를 품었으니 이는 그가 유대의 사무를 자기보다 잘 다스리라고 자주 훈계하였음이니 이는 그 자신이 원한 자이므로 무리로부터 원망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가이사에게 그를 유대 총독으로 보내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펠릭스는 그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그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속적인 훈계는 불의하게 행동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괴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벨릭스는 요나단의 가장 충실한 친구 중 하나인 예루살렘 시민인 도라스를 설득하여 요나단을 죽이려고 강도들을 끌어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한 대가로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도라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강도들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를 살해할 수 있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그 강도들 중 몇 사람은 옷 속에 단검을 숨기고 신을 숭배하려는 듯이 도시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군중 속에 섞여 요나단을 죽였다(19) 그리고 이 살인 사건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명절에는 강도들이 삼엄한 경비를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무기를 숨기고 군중 속에 섞여서 그들 자신의 적 몇 명을 죽이고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했습니다. 성읍 구석구석에서만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불경건함을 생각하지 않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살해할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의 사악함을 미워하셔서 우리 도시를 버리신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관해서는, 그는 더 이상 그 안에 거할 만큼 그곳이 충분히 깨끗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로마인들을 우리에게 데려와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그 도시에 불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재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현명하게 만들고자 하여 우리 아내와 자녀에게 노예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6. 강도들이 저지른 이런 일들로 인해 그 도시는 온갖 불경건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기꾼들과 사기꾼들은 군중을 설득하여 그들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게 했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행해져야 할 명백한 이적과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가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배를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형벌을 받았습니다. 벨릭스가 그들을 다시 데려와서 처벌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집트에서 나온(20) 이때에 한 사람이 자기를 선지자라 하여 일반 백성에게 일컬음하는 감람산으로 함께 가자고 권하니 그 성읍 맞은편에 있는 산이더라 5펄롱의 거리.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성벽이 어떻게 무너질 것인지 그들에게 보여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무너지면 그 성벽을 통해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벨릭스가 이 일을 알고 군사들에게 무기를 가지라 명하고 수많은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치러 와서 애굽 사람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을 공격하니라 그는 또 그들 중 사백 명을 죽이고 이백 명을 살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인 자신은 전투에서 탈출했지만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강도들은 로마인들과 전쟁을 벌이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들은 전혀 그들의 말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자 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습니다.
7. 그리고 이제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거기에 거주하는 시리아 사람들 사이에 시민의 특권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놓고 큰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왕 헤롯이 가이사랴를 건축한 자요 또 그가 유대인에게서 났기 때문이니라. 이제 시리아인들은 헤롯에 관해 주장되는 바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Cesarea가 이전에 Strato 's Tower라고 불렸고 당시에는 유대인 주민이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나라의 대통령들은 이러한 혼란에 대해 들었을 때, 양측에서 그 원인을 잡아서 채찍질로 괴롭혔으며, 이로써 잠시 동안 혼란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시민들은 그들의 부에 의존하고 그 때문에 시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다시 비난했고 그러한 비난으로 그들을 자극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리아 사람들은 재산은 열세하면서도 그 곳에 있는 로마 군인의 대부분이 가이사랴나 세바스테 사람이라는 이유로 자기들을 높이 평가하고 얼마 동안 유대인들에게도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마침내 그들은 서로에게 돌을 던지게 되었고 여러 사람이 부상을 입었고 양쪽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이 정복자였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이 싸움이 일종의 전쟁으로 발전한 것을 보고 갑자기 그들에게 닥쳐 유대인들이 그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자, 그는 그의 병사들을 무장시켜 그들에게 보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사람을 생포했으며, 그의 병사들이 가득 찬 시민들의 가옥 중 일부를 약탈하도록 허용했습니다. 부의. 온건하고 권위가 가장 높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두려워하여 벨릭스에게 그의 군사들에게 후퇴를 명하고 장래를 위하여 그들을 아끼고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회개할 여지를 주기를 구하니 했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그렇게 하도록 설득되었습니다.
8. 이때 아그립바 왕은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습니다. 이제 대제사장들과 예루살렘 무리의 지도자들 사이에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 각각은 가장 대담한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혁신을 사랑하고 그들의 리더가 된 사람들의 회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싸울 때에는 서로 비난하고 돌을 던지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을 책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는 마치 그 도시를 다스리는 정부가 없는 것처럼 그 도시에서 음탕한 방식으로 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뻔뻔 스러웠습니다.(21) 대제사장들이 담대함을 가졌으니 그들이 감히 그 종들을 타작 마당에 보내어 제사장에게 드리는 십일조를 빼앗게 하여 가장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떨어지게 하였느니라 제사장들은 궁핍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 정도로 선동적인 자들의 폭력이 모든 권리와 정의를 압도했습니다.
9. 네로가 포르키우스 베스도를 벨릭스의 후계자로 파견하였을 때, 가이사랴에 사는 유대 주민의 우두머리들이 벨릭스를 고발하려고 로마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네로가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영광을 누렸던 그의 형제 팔라스의 끈질긴 간청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의 두 시리아인은 네로의 가정교사이자 그리스 서신의 비서인 부르후스를 설득하여 그에게 많은 돈을 주어 그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유대인 시민의 특권의 평등을 취소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부르후스는 그의 간청으로 그 목적을 위한 서신을 써야 한다는 황제의 허가를 얻었습니다. 이 서한은 우리 민족에게 닥친 다음과 같은 불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의 유대인들은 시리아 사람들에게 보낸 이 편지의 내용을 들었을 때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전보다 더 무질서했습니다.
10. 베스도가 유대에 이르매 유대가 강도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모든 마을이 불타고 약탈을 당하니라 그리고 시카 리라고 불리는 강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acinacae 와 길이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소 구부러진 작은 검을 사용했으며 로마의 sicae [또는 낫]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기들로부터 이 강도들은 그들의 명칭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이 무기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명절에 무리 중에 섞여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각처에서 무리를 지어 성으로 올라와서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을 쉽게 죽였음이니라. 그들은 또한 자주 무기를 가지고 적들의 마을에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페스투스는 어떤 사기꾼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광야까지 자기를 따르기만 하면 그들이 겪고 있는 비참함에서 구원과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파견된 군대는 그들을 속인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11. 그 무렵 아그립바 왕은 예루살렘 왕궁의 주랑 근처에 아주 큰 식당을 지었습니다. 이제 이 궁전은 오래전부터 아사모네우스의 자손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왕이 바라던 전망인 도시를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즐거운 전망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거기 누워서 식사를 하고 성전에서 행해지는 일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 일을 보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행해진 일, 특히 제물에 속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우리나라의 제도나 법률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쪽을 향한 성전 안뜰에 속한 가장 높은 건물에 벽을 세웠는데, 이 벽이 지어졌을 때 궁전에 있는 식당뿐만 아니라 서쪽 회랑의 전망도 가로막았습니다. 이 곳은 성전 바깥뜰에도 속해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축제 때 성전을 지키는 곳이었습니다. 이 일을 보고 아그립바 왕과 주로 총독 페스도는 몹시 불쾌해했습니다. 그리고 페스투스는 그들에게 성벽을 다시 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관해 네로에게 사절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그에게 청원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어느 부분이라도 헐리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베스도가 허락한 후에 그들은 그들의 우두머리 열 명과 대제사장 이스마엘과 보물을 맡은 헬기야도 네로에게로 보냈습니다. 네로는 그들의 말을 듣고 용서해 줄 뿐 아니라(22) 그들이 이미 행한 일을 그들에게 허락하고 그들이 쌓은 성벽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느니라. 이것은 종교적인 여성이었으며 Nero에게 이러한 호의를 요청했으며 10명의 대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Nero의 아내 Poppea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헬시아스와 이스마엘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곧 대제사장 시몬의 아들 가비라 하는 요셉에게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기니
제 9 장
제임스가 총독직 하에서 살해된 알비누스에 관하여; 또한 AGRIPPA가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1. 그리고 이제 카이사르는 페스투스의 죽음을 듣고 알비누스를 총독으로 유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왕은 요셉에게서 대제사장직을 빼앗고 아나누스라고 불리던 아나누스의 아들에게 그 직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보고에 따르면 이 장남인 아나누스는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했으며, 오래 전부터 그 자신도 그 위엄을 누렸는데, 이는 우리의 다른 어떤 대제사장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너희에게 말한 대로 대제사장직을 맡은 이 작은 아나누스는 성격이 담대한 사람이요 매우 무례한 자라. 그도 사두개파에 속하였으니(23) 저희는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다른 유대인들보다 죄인을 심판하는데 매우 엄한 사람이라 그러므로 아나누스가 이런 성향을 가졌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적절한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페스투스는 이제 죽었고, 알비누스도 길 위에 있었습니다. 이에 그가 재판관들을 모으고 예수의 형제 곧 그리스도라 하는 야고보와 또 다른 몇 사람을 데리고 그들 앞에 나아오니 그리고 그들을 율법을 범한 자들로 고소하고 돌에 맞아 죽게 내버려 두었지만, 시민들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여겨지는 자들과 율법을 범하는 것을 가장 불안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왕(아그리파)에게 사람을 보내 아나누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행한 일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 중 일부는 알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여행 중이었을 때 그를 만나러 갔는데, 아나누스가 그의 동의 없이 산헤드린을 모으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을 그에게 알렸습니다.(24) 그러자 알비누스는 그들의 말에 따랐고, 화가 난 아나누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아그리파 왕이 통치한 지 석 달 만에 대제사장직을 빼앗고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삼았더라.
2. 이제 알비누스는 예루살렘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 나라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는 많은 시카리족을 죽임으로써 이루어 졌습니다 . 그러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25) 그는 날마다 영광이 커졌고 이는 크게 증가하여 눈에 띄게 시민들의 호의와 존경을 얻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쌓아두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알비누스와 대제사장(예수)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그들과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에게 또 심히 악한 종들이 있으니 그들은 가장 담대한 백성과 합세하여 타작마당에 가서 제사장들의 십일조를 강탈하고 원하는 자를 때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더라 이 십일조를 그들에게 주지 말라. 그러므로 다른 대제사장들도 그 종들과 그와 같이 행하되 금할 자가 없었더라 그래서 옛날에는 십일조를 받던 제사장들이 음식이 없어서 죽었습니다.
3. 이제 시카리 족 은 명절이 가까워지기 직전 밤에 성에 들어가서 성전 총독에게 속한 서기관 아나누스(아나니아)의 아들 엘아자르라 하는 서기관을 붙잡으니라 대제사장이 그를 결박하여 그들과 함께 끌고 갔으나 그 후에 그들은 아나니아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일 그가 알비누스를 설득하여 자기 일당에서 붙잡은 포로 중 열 명을 석방하게 하면 서기관을 그에게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분명히 알비누스를 설득해야만 했고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더 큰 재난의 시작이었습니다. 강도들은 아나니아의 종 몇 사람을 잡으려고 끊임없이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산 채로 데려갔을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시카리(Sicarii) 의 일부를 되찾을 때까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그 수가 다시 적지 않게 되자 그들은 담대해져서 온 나라에 큰 재앙이 되었습니다.
4. 이 무렵 아그리파 왕은 빌립보 가이사랴를 이전보다 더 크게 건축하고 네로를 기리기 위해 그 이름을 네론라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베리투스에 극장을 지었을 때 그들에게 매년 전시될 공연을 제공하고 거기에 만 달러(드라크마)를 소비했습니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곡물을 많이 주고 그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주었으며, 자신이 기부한 조각상과 고대인이 만든 원본 형상으로 도시 전체를 장식했습니다. 아니,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장식적인 모든 것을 거의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이로 인해 신하들은 그를 평소보다 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외국 도시를 장식하기 위해 신하들의 물건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는 담네우스의 아들 예수의 계승자가 되어 왕이 빼앗은 대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제사장들 사이에 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대담한 사람들의 단체를 모아 비난을 받고 서로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자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의 부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너무 힘들어서 가장 받을 만한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코스토바루스(Costobarus)와 사울루스(Saulus)도 수많은 사악한 비참한 자들을 모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왕가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아그립바 친척으로 말미암아 그들 가운데서 은총을 얻었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백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약탈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로 우리 도시가 크게 혼란에 빠졌고 우리 가운데 모든 일이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5. 그러나 알비누스는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자신의 뒤를 이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감사할 만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보기에 명백히 사형에 처해 있다고 생각되는 죄수들을 모두 끌어내서, 그들도 그에 따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돈을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감옥은 텅 비었지만 온 땅은 강도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6. 이제 많은 레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26) 우리 지파 곧 찬송하는 자들과 왕을 권하여 산헤드린을 모으고 그들에게도 세마포 옷을 입게 허락하고 제사장들에게도 이 일이 합당한 일이라 하였느니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행한 일과 같은 참신한 일을 기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망을 얻는데 실패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은 산헤드린에 참석한 사람들의 투표권을 가지고 찬송가들에게 이 특권을 주어 그들이 이전 옷을 벗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마포 옷을 입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 지파의 일원으로서 그는 또한 그들이 그에게 구했던 찬송가를 배우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의 법률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률을 위반할 때마다 우리는 그러한 위반에 대한 처벌을 결코 피할 수 없었습니다.
7. 이제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보니 일꾼이 없어 만 팔천 명이 넘고 그들이 성전에서 수고하여 먹을 것을 벌어서 삯을 받지 못하여 궁핍한 것을 보고 그리고 그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그들이 끌려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곳에 보관된 보물을 그들 옆에 보관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자들을 위한 준비를 고려하는 동안; 그들은 이 보물을 그들에게 사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든지 한 시간만 일하면 즉시 급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설득하여 동쪽 회랑을 재건했습니다. 이 회랑은 바깥뜰에 속하여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고 길이가 사백 규빗에 달하는 성벽이 있고 네모난 돌과 흰 돌로 쌓았으니 그 돌의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는 6큐빗이다. 이는 솔로몬 왕이 행한 일이요(27) 그는 먼저 성전 전체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가이사에게 성전 관리를 맡긴 아그리파 왕은, 건물을 헐기는 쉽지만 다시 세우기는 어려우며, 특히 회랑에 하는 일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당한 시간과 막대한 돈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에 대한 청원자들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성읍을 흰 돌로 포장하기를 원할 때에는 그들을 막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또한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데오빌로의 아들 맛디아에게 주었습니다.
제 10 장
대제사장의 명단.
1. 그리고 이제 나는 우리 대제사장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이 역사에 합당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 위엄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 그들 중 몇 명이 있었는지. 그러므로 우선 역사는 모세의 형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이 즉시 그를 계승했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 존엄성은 그들 모두로부터 그들의 후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아론의 혈통 외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대제사장직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 나라의 풍속이므로 다른 혈통에 속한 자는 왕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그 대제사장직을 얻을 수 없느니라 . 우리가 이미 말한 아론 자손의 모든 대제사장의 수는 처음부터 파나까지 전쟁 중에 반역자들에 의해 대제사장이 된 자가 팔십삼 명이요 그 중 열세 사람은 모세 시대부터 성막이 서 있던 때부터 백성이 유대에 들어와서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광야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더라 그들은 처음에는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으나 그 후에는 살아 있는 동안 후계자가 있었느니라. 이제 아론의 두 아들의 후손인 이 열세 사람이 차례로 이 직위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정치 형태는 귀족이요 그 후에는 왕정이요 셋째는 왕의 정치니라 이 열세 사람의 통치 기간은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모세의 치세에 있더니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을 건축한 총수는 육백십이 명이었더라 이 열세 대제사장에 이어 열여덟 명이 대제사장이 되어 솔로몬 왕 때로부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성을 쳐서 성전을 불사르고 우리 민족을 멸하기까지 대제사장이 되었느니라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음 대제사장 요사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 대제사장들의 시대는 사백육십육년 육개월 십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아직 왕의 통치 아래 있었더라. 그러나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마친 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을 바빌론에서 다시 고국으로 보내어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때에 요사덱의 아들 예수께서 포로들이 집으로 돌아오매 그들을 대신하여 대제사장직을 맡았느니라. 이제 그와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Antiochus Eupator) 왕까지 15명의 자손은 모두 414년 동안 민주 정부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안티오코스와 그의 군대 장군 리시아스는 메넬라오스라고도 불리는 오니아스의 대제사장직을 박탈하고 베뢰아에서 그를 죽였습니다. 오니아의 셋째 아들을 쫓아내고 야이모를 대제사장의 자리에 세우고그 사람은 참으로 아론의 가문에 속했으나 오니아스 가문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오니아스의 조카이자 그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오니아스는 이집트로 와서 프톨레마이오스 필로메토르와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친분을 맺고 그를 설득하여 그를 최고로 높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헬리오폴리스 도에 건축한 그 성전의 제사장이었는데 이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본뜬 것이라 그러나 이집트에 건축된 성전에 관해서는 우리가 이미 자주 말하였습니다. 야키모가 제사장 직분을 삼년을 지내다가 죽으매 그를 계승한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그 성에 칠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었더라 그러나 아사모네오 자손이 나라의 통치권을 얻었으나 그들이 전쟁에서 마게도냐 사람들을 치고 요나단을 그들의 대제사장으로 삼았으니 그가 칠 년 동안 그들을 다스리니라.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리포의 배신적인 계략으로 그가 죽임을 당하자, 그의 형제 시몬이 대제사장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위의 배신으로 인해 잔치에서 죽자 그의 형보다 1년 더 오랫동안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그의 아들, 이름이 히르카누스(Hyrcanus)가 그를 계승했습니다. 이 히르카누스는 30년 동안 그 위엄을 누리다가 노인이 되어 사망하여 아리스토불루스라고도 불리는 유다에게 계승권을 남겼습니다. 그의 형제 알렉산더는 그의 후계자였습니다. 유다가 왕권과 함께 제사장의 직분을 지킨 후에 심한 질병으로 죽었느니라. 이는 유다가 일 년 동안 머리에 왕관을 쓴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왕이자 대제사장이 된 지 27년이 되었을 때, 그는 이생을 떠났고,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가 자신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히르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주었으나 자신도 9년 동안 왕국을 유지한 뒤 이생을 떠났습니다. 같은 기간 [그리고 더 이상] 그녀의 아들 Hyrcanus는 대제사장직을 누렸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가 그와 싸워 그를 때리고 그의 왕위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통치하고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3년 3개월 동안 통치했을 때 폼페이우스가 그에게 와서 예루살렘 성을 무력으로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자녀들을 결박하여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는 또한 히르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회복시키고 그를 국가의 총독으로 삼았지만 그에게 왕관 착용을 금지했습니다. 이 히르카누스는 처음 9년 외에 24년을 더 통치했는데, 파르티아의 장군 바르자파르네스와 파코루스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가 히르카누스와 싸워 그를 살려내고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낳았다. 왕; 그리고 그가 3년 3개월을 통치했을 때, 소시우스와 헤롯이 그를 포위하여 붙잡았고, 안토니우스가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가도록 하여 거기서 죽였습니다. 그 후 로마인들은 헤롯을 왕으로 삼았습니다.그러나 다시는 아사모네우스 집안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그 위엄을 부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저명한 가문 출신이 아니고 제사장이었던 사람들 중 일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시 파르티아인들에게 사로잡힌 히르카누스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만들고 그의 누이 마리암네를 아내로 삼았을 때, 그는 히르카누스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사람들이 모두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마음이 기울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를 죽였고, 우리가 이미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한 것처럼 그가 여리고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 그를 질식시킬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이후로 그는 결코 제사장 직분을 아사모네우스 자손의 후손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도 그의 아버지처럼 대제사장을 임명했고 로마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나중에 유대인들의 통치권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 시대부터 디도가 성전과 성을 빼앗고 불사르던 날까지 대제사장의 수는 모두 스물여덟 명이며 그들에게 속한 때는 백칠 년이었더라. 이들 중 일부는 헤롯의 치세와 그의 아들 아켈라오의 치세 아래서 백성의 정치적 총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에 정부는 귀족이 되었고 대제사장들은 나라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들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입니다.그리고 대제사장들은 나라를 다스릴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들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입니다.그리고 대제사장들은 나라를 다스릴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들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제 11 장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도록 요구한 총독 플로루스에 관하여. 결론.
1. 이제 네로가 알비누스의 후계자로 파견한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는 유대를 엄청난 불행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클라조메네(Clazomene)라는 도시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네로의 아내인 포페아와의 우정으로 그는 이 정부를 얻었습니다)를 데리고 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사악함에 있어서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플로루스는 너무 사악하고 그의 권위를 너무 폭력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알비누스를 그들의 은인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가져온 해악은 너무나 컸습니다. 알비누스는 자신의 사악함을 숨기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그러나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는 마치 자신의 범죄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의로 파견된 것처럼, 어떤 종류의 폭력도, 어떤 부당한 형벌도 결코 생략하지 않고 우리 나라에 거만하게 과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동정심에 감동받지 않았고, 자신의 길에서 얻은 어떤 이득에도 결코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작은 물건을 얻는 것보다 큰 일에 더 관심을 두지 않고 강도들과 동업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를 고용하고, 그가 그들의 특정한 약탈 행위에서 그들을 해롭지 않게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 행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비참함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유대인들은 강도들이 그들에게 가한 파괴를 견딜 수 없게 되자, 세상 어느 곳이든 더 쉽게 살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도망쳐야 할 필요성에 처했습니다. [자기 나라보다] 외국인. 그리고 이 머리에 대해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로마인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도록 강요한 사람이 바로 이 플로루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씩 파괴하는 것보다 즉시 파괴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전쟁은 플로루스 통치 2년, 네로 통치 1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강요받았는지, 우리가 어떤 비참함을 겪게 되었는지는 내가 유대 전쟁에 관해 쓴 책들을 정독한 사람들이라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그러므로 나는 이제 여기서 나의 고대 유물을 끝내겠습니다. 어떤 사건이 끝난 후 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대 유물에는 인간이 창조된 때부터 네로 통치 12년까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 즉 유대인과 이집트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과 우리가 겪은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앗시리아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았고, 페르시아 사람들과 마케도니아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는 로마 사람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고난을 가하였습니까? 나는 이 역사를 모든 면에서 충분히 정확하게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이천년 동안 우리가 가졌던 대제사장들의 수를 열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나는 또한 우리 왕들의 계승을 수행했으며, [상당한] 오류 없이 그들의 행동과 정치적 행정에 관해 설명했으며, 또한 우리 군주의 권력도 수행했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거룩한 책들에 기록된 대로 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역사의 시작에 약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담대하게 말하기를, 이제 나는 나 자신에게 하기로 제안한 일을 너무나 완벽하게 완수했기 때문에 유대인이든 외국인이든 그 어느 누구도 그 일에 그토록 큰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으며 그 일을 그토록 정확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이 기록을 그리스인들에게 전달하십시오. 내 동족은 내가 유대인의 학문에 있어서 그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나는 또한 헬라어를 배우고 헬라어의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우리 언어에 익숙해져 있어서 헬라어를 충분히 정확하게 발음할 수는 없지만; 우리 나라는 많은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그 시대의 부드러움으로 그들의 담론을 장식하는 사람들을 격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성취가 모든 종류의 자유인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우고 싶어하는 많은 하인에게 공통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우리 율법을 완전히 알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증언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배움을 얻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성공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즉시 좋은 보상을 받은 사람은 아직 두세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3. 그리고 이제 내가 내 가족과 내 삶의 행동에 대해 간략히 다룬다면 그것은 아마도 불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28) 내가 말하는 것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나는 이 기록으로 20권의 책 6만 구절에 달하는 이 고대 유물을 끝낼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허락하시면 잠시 이 전쟁을 뛰어넘겠습니다. (29) 그리고 바로 그날까지 그들에게 닥친 일을 덧붙이자면, 도미티아누스월 13일, 즉 서기 03년은 내가 관찰한 바로는 어느 누구도 뚜렷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한 지 13년이 되고 내 생애가 56년이 되는 바로 오늘까지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닥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또한 하나님과 그의 본질, 그리고 우리의 율법에 관한 우리 유대인의 견해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쓸 의도가 있습니다. 왜 그들에 따르면 어떤 것은 우리에게 허용되고 어떤 것은 금지됩니다.
미주
(1) 여기에 사본에 오류가 있거나 요세푸스의 실수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으로 인해 칼키스 왕 헤롯이 죽었고, 그의 방에서 칼키스의 왕이 된 작은 아그리파가 그에게 속했습니다. 그리고 요세푸스가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것처럼, 그는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까지 계속 같은 일을 했습니다. 8. 종파. , 11; 채널. 9. 종파. 1, 4, 6, 7.
(2) 요세푸스는 여기에서 독생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외에 다른 아들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2:2; 히브리서 11:17. BI ch에 대한 참고 사항을 참조하십시오. 13. 종파. 1.
(3) 노아 방주의 유적이 요세푸스 시대에 아직도 존재한다고 믿어졌다는 것은 여기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BI ch에 대한 참고 사항을 참조하십시오. 3. 종파. 5.
(4) 요세푸스는 이 세 장, 즉 3장, 4장, 5장에서 아디아베네의 왕 이자테스와 그의 아들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일을 하는 동안 신의 섭리가 이 이자테스를 얼마나 세심하게 보존했는지 관찰하면서 매우 충분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대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동기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의무.
(5)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약속한 예루살렘 유대인들에 대한 이자테스와 헬레나의 은혜에 대한 이 추가 설명은 그가 현재 저작에서 수행한 곳이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유대 지방에 발생한 이 끔찍한 기근에 대해 허드슨 박사의 기록을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아가보가 예언한 기근이니라(행 11:28) 글라우디오가 네 번째 집정관이었을 때 일어났던 것이요 다른 것은 아니니라. Scaliger가 Eusebius에 대해 말했듯이, Claudius가 두 번째로 영사였고 Cesina가 그의 동료였을 때 일어났습니다." 이제 Josephus가 조금 후에 말했을 때, ch. 5. 종파. 2,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가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의 뒤를 이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그는 즉시 덧붙여 "이 총독들 밑에서 유대에 큰 기근이 일어났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두 총독 치하에서 기근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 기근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파두스는 아그리파 왕이 죽은 후, 즉 클라우디우스 제4년 말까지 유대로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아가보가 예언한 이 기근은 발레시우스가 유세브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글라우디오 제5년, 제6년, 제7년에 일어났습니다. II. 12. 이 기근과 헬레나 여왕의 보급품 및 그녀의 기념비에 대해서는 Moses Churenensis, p. 144, 145, Pausanias가 그녀의 기념물도 언급한 메모에서 관찰됩니다.
(6) 티아라를 똑바로 세우거나 원뿔 끝을 세워서 착용하는 이 특권은 허드슨 박사가 여기에서 관찰한 것처럼 크세노폰과 다른 사람들의 위대한 왕들에게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 이자테스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유대인 또는 에비온파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합당한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채널을 참조하십시오. 6. 종파. 1. 그러나 그의 간구가 응답되었고 그는 섭리로 그가 처한 임박한 위험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8) 아디아베네의 여왕 헬레나가 예루살렘 근처에 세운 세 개의 피라미드 또는 기둥은 유세비우스가 그의 『전도서』에서 언급합니다. 역사. B.II. 채널. 12, Hudson 박사는 그 장소에 대한 Valesius의 메모를 우리에게 언급합니다. -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Pausanias도 언급했습니다. 2. 종파. 6. Reland는 현재 압살롬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9) 서기 45년이나 46년경 총독 파두스 치하에서 일어난 이 테다는 조세 시대, 키레니우스 치하에서 또는 서기 7년경에 일어난 텐다일 수 없습니다(행 36, 37절). 이전의 Theudas는 B. XVII의 메모를 참조하십시오. 채널. 10. 종파. 5.
(10) 이것과. 요세푸스에서 유대 명절에 일어난 더 많은 소요와 소요는 유대 총독들이 마태복음 26장 5절에 “명절에 예수를 데려가지 말자 소동이 일어날까 두렵다”고 말했을 때 그들의 신중한 절차를 보여줍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포효하라." Reland는 주석 장소를 잘 관찰했습니다. Josephus도 같은 내용에 주목합니다. Of the War, BI ch. 4. 종파. 삼.
(11) 갈릴리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여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 끊임없는 여행은 허드슨 박사가 올바르게 관찰한 바와 같이 동일한 목적에 대한 복음서의 여러 구절을 예시합니다. 누가복음 17:11; 요한복음 4:4. 또한 자신의 삶, 종파에서 요세푸스를 참조하십시오. 52, 그 여정은 3일로 결정됩니다.
(12) 우리 구주께서는 유대인들이 그분의 복음을 거부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이 세 가지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소요와 폭동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그들과 아내와 자녀들이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6-24을 참조하십시오.
(13) 유대 사람 벨릭스의 친구 구브로에서 태어난 이 시몬은 마술사인 척 하고 아주 사악한 것 같으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아닐 것입니다. 8:9 등등. 어떤 사람들은 가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이 시몬은 본래 유대인이 아니라 사도헌장 VI에 따라 사마리아 지방 기대에 사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7, 클레멘스의 인정, II. 6, 그리고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순교자 유스틴은 변명 I. 34에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는 또한 앞서 언급한 저자들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처럼 고대 유대인이 아니라 최초의 이방인 이단의 창시자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의미하는 것은 요세푸스가 자신이 키프로스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잘못 알고 있지 않았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시간, 이름, 직업, 사악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들을 똑같이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가 여기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그립바의 동생인 드루실라와 성 누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로 유대인 여자(행 24:24)에 관해서는 요세푸스가 언급한 시몬이 그녀의 전 남편인 아지수 왕을 떠나도록 설득했습니다. 정의의 개종자인 에메사와 유대의 이방 총독 펠릭스, 타키투스, 히스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9절에서는 그녀가 이방인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성 루가와 요세푸스에 반대되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녀. 이제 타키투스는 그 당시 유대에 있던 유대인들에 관한 문제와 아그리파 요세푸스와 함께 있었던 아그리파의 후배 자매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유대 저술가들 중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과 장소에 있어서 다소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타키투스가 이 펠릭스(클라우디우스의 제28분파에서 수에토니우스가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처럼 세 명의 아내 또는 여왕을 모두 둔 사람)가 한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손자와 결혼했다고 우리에게 알렸을 때, 타키투스가 사실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드루실라인 것을 알고는 그녀를 이름도 모르는 다른 아내로 착각했습니다.
(14) 이번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은 역사상 가장 큰 폭발 중 하나였습니다. 이 베수비오에 대한 Bianchini의 흥미롭고 중요한 관찰과 일곱 번의 큰 폭발, 그 잔해가 유리화되어 지하의 매우 다양한 지층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참조하십시오. 우리의 정확한 연대기에 따르면, 대홍수는 기독교 시대보다 2,500년 이상 앞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5) 이것은 이제 부족합니다.
(16) 이것도 지금 부족하다.
(17) 클라우디우스의 통치 기간은 허드슨 박사가 여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디오와 일치합니다. 그는 또한 Claudius가 그를 입양 한 후 처음에는 L. Domitius Aenobarbus였던 Nero의 이름이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Soleus는 [자신의 삶, 종파. 11, 마찬가지로] Dio Cassius와 Taeims가 허드슨 박사에게 알려준 대로입니다.
(18) 이것은 요세푸스가 자신의 삶에서 다른 곳에서 자주 언급한 것과 일치합니다. 즉 티베트인, 타리케아, 가말라가 이 아그리파 후배 아래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피스투스의 아들 유스투스가 유대인을 위해 붙잡혔습니다. .
(19) 이 사악한 총독 펠릭스의 계략에 의한 선한 대제사장 요나단의 이 반역적이고 야만적인 살해는 시카리족, 즉 무법자들에 의한 뒤이은 살인의 직접적인 계기였으며, 다음과 같은 끔찍한 잔인함과 비참함의 큰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에서 요세푸스가 가정하는 것처럼 유대 민족의 사람입니다. 그 나라의 끔찍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인 그 나라의 심각한 사악함을 훌륭하게 반영한 이 책은 모든 유대인과 모든 기독교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유대인 대제사장 목록에 도달하게 되므로 Reland와 함께 이 요나단을 그들 중에 삽입하고 요세푸스에서 가져온 마지막 28명의 대제사장 목록을 기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리고 헤롯 대왕이 만든 아나넬로부터 시작하세요. 안티크를 참조하세요. B.XV. 채널. 2. 종파. 4, 그리고 거기에 메모가 있습니다.
- 아나넬루스.
- 아리스토불루스.
- 파보의 아들 예수.
- 보에토스의 아들 시몬.
- 테오필투의 아들 마르디아.
- 보에투스의 아들 요아자르.
- 보에토스의 아들 엘르아자르.
- 시크의 아들 예수.
- [안나스 또는] 셋의 아들 아나누스.
- 파보의 아들 이스마엘.
- 아나누스 의 아들 엘아자르 .
- 카미도의 아들 시몬.
- 아나누스 의 사위 요세푸스 가야바 .
- 아나누스 의 아들 요나단 .
- 테오필루스는 그의 형제이자 아나누스의 아들이다.
- 보에토스의 아들 시몬.
- 마티아는 요나단의 형제이자 아나누스의 아들입니다.
- 알요네우스.
- 카미두스의 아들 요세푸스.
- 네베데우스의 아들 아나니아.
- 조나타스.
-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
- 시몬의 아들 요셉 카비.
- 아르타누스의 아들 아나누스.
- 담네타스의 아들 예수.
-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 테오필루스의 아들 마티아스.
- 사무엘의 아들 판니아.
이 목록의 중간 부분에 언급된 아나누스와 요셉 가야바는 다름 아닌 사복음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그리고 네베데우스의 아들 아나니아는 성 바울이 그 앞에서 변호한 대제사장이었다(행 24장).
(20) 이 유대인 사기꾼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더불어 유대인들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겪게 되는 다른 많은 상황과 비참함에 대하여 우리 구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Lit. 달성 선지자의 피. 58-75. 요세푸스의 이 이집트 사기꾼과 그의 추종자들의 수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1:38을 참조하십시오.
(21) 여기서의 죄악이 심히 특이하고 심히 특이하니 대제사장들이 그 형제 제사장들을 압제하여 그들 중 가장 가난한 자들을 굶겨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같은 내용을 참조하십시오. ch. 9. 종파. 2. 그러한 치명적인 범죄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든 연령대의 탐욕과 폭정입니다.
(22) 여기에는 고대에 매우 유명했던 네로의 통치 첫 5년 동안 유대인을 향한 네로의 온유함과 선함을 보여주는 한 가지 뛰어난 예가 있습니다. 아마도 요세푸스의 생애에는 또 다른 종파가 있을 것입니다. 삼; 세 번째는 비록 여기서는 성격이 매우 다르지만 종파입니다. 9, 직전. 그러나 네로의 관대하고 친절한 행위는 둘 다 그의 여왕 포페아(Poppea)에 의해 얻어졌는데, 포페아는 종교적인 여인이자 아마도 개인적으로 유대인 개종자였을 것이며, 따라서 전적으로 네로 자신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3)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요세푸스 시대에 대제사장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사두개파 사람들은 대개 매우 가혹하고 냉혹한 재판관들이었는데,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훨씬 더 온화하고 더 자비로웠는데, 이는 Reland의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습니다. 이곳과 요세푸스의 생애에 관한 종파. 31, 신약성경, 요세푸스 자신, 랍빈들에게서 발췌한 것; 또한 우리는 요세푸스 전체에서 이 대제사장 이후의 사두개파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24) 의인 야고보에 대한 이러한 정죄와 그 원인,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Prim. 그리스도. 부활하다, vol. III. 채널. 43-46. 산헤드린은 우리 구주를 정죄했지만 로마 총독의 승인 없이는 그분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그의 산헤드린은 이 야고보를 죽인 것에 대해 알비누스의 승인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25) 이 아나니아는 내가 보기에는 네베데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안나스 또는 아나누스라고 불리는 장로로서 목록에서 아홉 번째이며 오랫동안 대제사장으로 존경을 받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위 가야바 외에 그의 아들 대제사장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앞의 목록에 있는 11번, 14번, 15번, 17번, 24번이었습니다. 요세푸스가 여기에서 안나스나 아나니아에 관해 말하는 것, 즉 그가 그의 자녀들이 대제사장이 되기 오래 전에 대제사장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셋의 아들이었으며 앞의 목록에서 9번 아래의 대제사장으로 첫 번째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구리누스에 의해 만들어졌고 열 번째인 이스마엘까지 약 23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사위와 그의 다섯 자녀의 계승에 합류한 그의 대제사장직은 그를 일종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만들었고, 아마도 이전 대제사장들이 그 후에도 계속 그들의 직함을 유지하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앞에서는 거의 충족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6)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를 때 제사장의 옷을 입으라고 일부 레위인들이 무례하게 청원한 것은 아마도 이제 거만한 대제사장들이 그들의 형제 제사장들을 안으로 끌어들인 큰 우울증과 멸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중 ch를 참조하십시오. 8. 종파. 8, 그리고 채널. 9, 종파. 2.
(27) 솔로몬의 회랑들에 대하여 성전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라. 13. 요세푸스(Josephus)의 말에 따르면 그 건물은 계곡 바닥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28) 책의 시작 부분에서 생명을 참조하십시오.
(29) 여기에서 요세푸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가 지금 의도한 바를 수행했든 안 수행했든 관계없이 다른 곳에서 듣게 될 유대 전쟁의 요약을 대중에게 다시 제공하겠다는 의도를 선언했습니다. 그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이유 중 일부는 아마도 전쟁에 관한 일곱 권의 책 중 첫 두 권에서 그가 범한 많은 오류를 관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요약에서 우리는 그가 쓴 대로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여러 구절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쓴 많은 구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의 현재 작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에서 쓴 것에 대한 많은 언급과 그 자신의 오류의 대부분은 유대 전쟁의 요약에 포함될 수 없는 초기 시대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현재 그의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을 인용하는 사람 중 누구도 그러한 요약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가 그러한 작품을 전혀 출판한 적이 없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말은, 이 고대 유물에 대한 부록을 위해 그 자신이 쓴 자신의 생애와는 별개로, 이것은 이 고대 유물이 끝난 지 적어도 7년 후에 말입니다. 또한 요세푸스가 대중을 위해 의도한 대로 여기에 언급된 다른 작품을 출판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본질, 유대 율법에 관한 서너 권의 책을 의미합니다. 왜 그들에 따르면 어떤 것들은 유대인들에게 허용되었고 다른 것들은 금지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요세푸스가 이 고대사 서문의 결론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약속했던 것과 같은 일인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그 중 어느 것도 출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궁정에서 그의 모든 친구인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의 죽음과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 즉 네르바와 트라야누스가 왕위에 오르고 로마에서 유대로 이주한 것과 그에 따른 일, 그의 의도를 쉽게 방해하고 그 작품의 출판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Antiquities of the Jews - Book XX
CONTAINING THE INTERVAL OF TWENTY-TWO YEARS.
FROM FADUS THE PROCURATOR TO FLORUS.
CHAPTER 1.
A SEDITION OF THE PHILADELPHIANS AGAINST THE JEWS; AND ALSO CONCERNING THE VESTMENTS OF THE HIGH PRIEST.
1. UPON the death of king Agrippa, which we have related in the foregoing book, Claudius Caesar sent Cassius Longinus as successor to Marcus, out of regard to the memory of king Agrippa, who had often desired of him by letters, while be was alive, that he would not suffer Marcus to be any longer president of Syria. But Fadus, as soon as he was come procurator into Judea, found quarrelsome doings between the Jews that dwelt in Perea, and the people of Philadelphia, about their borders, at a village called Mia, that was filled with men of a warlike temper; for the Jews of Perea had taken up arms without the consent of their principal men, and had destroyed many of the Philadelphians. When Fadus was informed of this procedure, it provoked him very much that they had not left the determination of the matter to him, if they thought that the Philadelphians had done them any wrong, but had rashly taken up arms against them. So he seized upon three of their principal men, who were also the causes of this sedition, and ordered them to be bound, and afterwards had one of them slain, whose name was Hannibal; and he banished the other two, Areram and Eleazar. Tholomy also, the arch robber, was, after some time, brought to him bound, and slain, but not till he had done a world of mischief to Idumea and the Arabians. And indeed, from that time, Judea was cleared of robberies by the care and providence of Fadus. He also at this time sent for the high priests and the principal citizens of Jerusalem, and this at the command of the emperor, and admonished them that they should lay up the long garment and the sacred vestment, which it is customary for nobody but the high priest to wear, in the tower of Antonia, that it might be under the power of the Romans, as it had been formerly. Now the Jews durst not contradict what he had said, but desired Fadus, however, and Longinus, (which last was come to Jerusalem, and had brought a great army with him, out of a fear that the [rigid] injunctions of Fadus should force the Jews to rebel,) that they might, in the first place, have leave to send ambassadors to Caesar, to petition him that they may have the holy vestments under their own power; and that, in the next place, they would tarry till they knew what answer Claudius would give to that their request. So they replied, that they would give them leave to send their ambassadors, provided they would give them their sons as pledges [for their peaceable behavior]. And when they had agreed so to do, and had given them the pledges they desired, the ambassadors were sent accordingly. But when, upon their coming to Rome, Agrippa, junior, the son of the deceased, understood the reason why they came, (for he dwelt with Claudius Caesar, as we said before,) he besought Caesar to grant the Jews their request about the holy vestments, and to send a message to Fadus accordingly.
2. Hereupon Claudius called for the ambassadors; and told them that he granted their request; and bade them to return their thanks to Agrippa for this favor, which had been bestowed on them upon his entreaty. And besides these answers of his, he sent the following letter by them: "Claudius Caesar Germanicus, tribune of the people the fifth time, and designed consul the fourth time, and imperator the tenth time, the father of his country, to the magistrates, senate, and people, and the whole nation of the Jews, sendeth greeting. Upon the presentation of your ambassadors to me by Agrippa, my friend, whom I have brought up, and have now with me, and who is a person of very great piety, who are come to give me thanks for the care I have taken of your nation, and to entreat me, in an earnest and obliging manner, that they may have the holy vestments, with the crown belonging to them, under their power, - I grant their request, as that excellent person Vitellius, who is very dear to me, had done before me. And I have complied with your desire, in the first place, out of regard to that piety which I profess, and because I would have every one worship God according to the laws of their own country; and this I do also because I shall hereby highly gratify king Herod, and Agrippa, junior, whose sacred regards to me, and earnest good-will to you, I am well acquainted with, and with whom I have the greatest friendship, and whom I highly esteem, and look on as persons of the best character. Now I have written about these affairs to Cuspius Fadus, my procurator. The names of those that brought me your letter are Cornelius, the son of Cero, Trypho, the son of Theudio, Dorotheus, the son of Nathaniel, and John, the son of Jotre. This letter is dated before the fourth of the calends of July, when Ruffis and Pompeius Sylvanus are consuls."
3. Herod also, the brother of the deceased Agrippa, who was then possessed of the royal authority over Chalcis, petitioned Claudius Caesar for the authority over the temple, and the money of the sacred treasure, and the choice of the high priests, and obtained all that he petitioned for. So that after that time this authority continued among all his descendants till the end of the war (1) Accordingly, Herod removed the last high priest, called Cimtheras, and bestowed that dignity on his successor Joseph, the son of Cantos.
CHAPTER 2.
HOW HELENA THE QUEEN OF ADIABENE AND HER SON IZATES, EMBRACED THE JEWISH RELIGION; AND HOW HELENA SUPPLIED THE POOR WITH CORN, WHEN THERE WAS A GREAT FAMINE AT JERUSALEM.
1. ABOUT this time it was that Helena, queen of Adiabene, and her son Izates, changed their course of life, and embraced the Jewish customs, and this on the occasion following: Monobazus, the king of Adiabene, who had also the name of Bazeus, fell in love with his sister Helena, and took her to be his wife, and begat her with child. But as he was in bed with her one night, he laid his hand upon his wife's belly, and fell asleep, and seemed to hear a voice, which bid him take his hand off his wife's belly, and not hurt the infant that was therein, which, by God's providence, would be safely born, and have a happy end. This voice put him into disorder; so he awaked immediately, and told the story to his wife; and when his son was born, he called him Izates. He had indeed Monobazus, his elder brother, by Helena also, as he had other sons by other wives besides. Yet did he openly place all his affections on this his only begotten (2) son Izates, which was the origin of that envy which his other brethren, by the same father, bore to him; while on this account they hated him more and more, and were all under great affliction that their father should prefer Izates before them. Now although their father was very sensible of these their passions, yet did he forgive them, as not indulging those passions out of an ill disposition, but out of a desire each of them had to be beloved by their father. However, he sent Izates, with many presents, to Abennerig, the king of Charax-Spasini, and that out of the great dread he was in about him, lest he should come to some misfortune by the hatred his brethren bore him; and he committed his son's preservation to him. Upon which Abennerig gladly received the young man, and had a great affection for him, and married him to his own daughter, whose name was Samacha: he also bestowed a country upon him, from which he received large revenues.
2. But when Monobazus was grown old, and saw that he had but a little time to live, he had a mind to come to the sight of his son before he died. So he sent for him, and embraced him after the most affectionate manner, and bestowed on him the country called Carra; it was a soil that bare amomum in great plenty: there are also in it the remains of that ark, wherein it is related that Noah escaped the deluge, and where they are still shown to such as are desirous to see them. (3) Accordingly, Izates abode in that country until his father's death. But the very day that Monobazus died, queen Helena sent for all the grandees, and governors of the kingdom, and for those that had the armies committed to their command; and when they were come, she made the following speech to them: "I believe you are not unacquainted that my husband was desirous Izates should succeed him in the government, and thought him worthy so to do. However, I wait your determination; for happy is he who receives a kingdom, not from a single person only, but from the willing suffrages of a great many." This she said, in order to try those that were invited, and to discover their sentiments. Upon the hearing of which, they first of all paid their homage to the queen, as their custom was, and then they said that they confirmed the king's determination, and would submit to it; and they rejoiced that Izates's father had preferred him before the rest of his brethren, as being agreeable to all their wishes: but that they were desirous first of all to slay his brethren and kinsmen, that so the government might come securely to Izates; because if they were once destroyed, all that fear would be over which might arise from their hatred and envy to him. Helena replied to this, that she returned them her thanks for their kindness to herself and to Izates; but desired that they would however defer the execution of this slaughter of Izates's brethren till he should be there himself, and give his approbation to it. So since these men had not prevailed with her, when they advised her to slay them, they exhorted her at least to keep them in bonds till he should come, and that for their own security; they also gave her counsel to set up some one whom she could put the greatest trust in, as a governor of the kingdom in the mean time. So queen Helena complied with this counsel of theirs, and set up Monobazus, the eldest son, to be king, and put the diadem upon his head, and gave him his father's ring, with its signet; as also the ornament which they call Sampser, and exhorted him to administer the affairs of the kingdom till his brother should come; who came suddenly upon hearing that his father was dead, and succeeded his brother Monobazus, who resigned up the government to him.
3. Now, during the time Izates abode at Charax-Spasini, a certain Jewish merchant, whose name was Ananias, got among the women that belonged to the king, and taught them to worship God according to the Jewish religion. He, moreover, by their means, became known to Izates, and persuaded him, in like manner, to embrace that religion; he also, at the earnest entreaty of Izates, accompanied him when he was sent for by his father to come to Adiabene; it also happened that Helena, about the same time, was instructed by a certain other Jew and went over to them. But when Izates had taken the kingdom, and was come to Adiabene, and there saw his brethren and other kinsmen in bonds, he was displeased at it; and as he thought it an instance of impiety either to slay or imprison them, but still thought it a hazardous thing for to let them have their liberty, with the remembrance of the injuries that had been offered them, he sent some of them and their children for hostages to Rome, to Claudius Caesar, and sent the others to Artabanus, the king of Parthia, with the like intentions.
4. And when he perceived that his mother was highly pleased with the Jewish customs, he made haste to change, and to embrace them entirely; and as he supposed that he could not he thoroughly a Jew unless he were circumcised, he was ready to have it done. But when his mother understood what he was about, she endeavored to hinder him from doing it, and said to him that this thing would bring him into danger; and that, as he was a king, he would thereby bring himself into great odium among his subjects, when they should understand that he was so fond of rites that were to them strange and foreign; and that they would never bear to be ruled over by a Jew. This it was that she said to him, and for the present persuaded him to forbear. And when he had related what she had said to Ananias, he confirmed what his mother had said; and when he had also threatened to leave him, unless he complied with him, he went away from him, and said that he was afraid lest such an action being once become public to all, he should himself be in danger of punishment for having been the occasion of it, and having been the king's instructor in actions that were of ill reputation; and he said that he might worship God without being circumcised, even though he did resolve to follow the Jewish law entirely, which worship of God was of a superior nature to circumcision. He added, that God would forgive him, though he did not perform the operation, while it was omitted out of necessity, and for fear of his subjects. So the king at that time complied with these persuasions of Ananias. But afterwards, as he had not quite left off his desire of doing this thing, a certain other Jew that came out of Galilee, whose name was Eleazar, and who was esteemed very skillful in the learning of his country, persuaded him to do the thing; for as he entered into his palace to salute him, and found him reading the law of Moses, he said to him, "Thou dost not consider, O king! that thou unjustly breakest the principal of those laws, and art injurious to God himself, [by omitting to be circumcised]; for thou oughtest not only to read them, but chiefly to practice what they enjoin thee. How long wilt thou continue uncircumcised? But if thou hast not yet read the law about circumcision, and dost not know how great impiety thou art guilty of by neglecting it, read it now." When the king had heard what he said, he delayed the thing no longer, but retired to another room, and sent for a surgeon, and did what he was commanded to do. He then sent for his mother, and Ananias his tutor, and informed them that he had done the thing; upon which they were presently struck with astonishment and fear, and that to a great degree, lest the thing should be openly discovered and censured, and the king should hazard the loss of his kingdom, while his subjects would not bear to be governed by a man who was so zealous in another religion; and lest they should themselves run some hazard, because they would be supposed the occasion of his so doing. But it was God himself who hindered what they feared from taking effect; for he preserved both Izates himself and his sons when they fell into many dangers, and procured their deliverance when it seemed to be impossible, and demonstrated thereby that the fruit of piety does not perish as to those that have regard to him, and fix their faith upon him only. (4) But these events we shall relate hereafter.
5. But as to Helena, the king's mother, when she saw that the affairs of Izates's kingdom were in peace, and that her son was a happy man, and admired among all men, and even among foreigners, by the means of God's providence over him, she had a mind to go to the city of Jerusalem, in order to worship at that temple of God which was so very famous among all men, and to offer her thank-offerings there. So she desired her son to give her leave to go thither; upon which he gave his consent to what she desired very willingly, and made great preparations for her dismission, and gave her a great deal of money, and she went down to the city Jerusalem, her son conducting her on her journey a great way. Now her coming was of very great advantage to the people of Jerusalem; for whereas a famine did oppress them at that time, and many people died for want of what was necessary to procure food withal, queen Helena sent some of her servants to Alexandria with money to buy a great quantity of corn, and others of them to Cyprus, to bring a cargo of dried figs. And as soon as they were come back, and had brought those provisions, which was done very quickly, she distributed food to those that were in want of it, and left a most excellent memorial behind her of this benefaction, which she bestowed on our whole nation. And when her son Izates was informed of this famine, (5) he sent great sums of money to the principal men in Jerusalem. However, what favors this queen and king conferred upon our city Jerusalem shall be further related hereafter.
CHAPTER 3.
HOW ARTABANUS, THE KING OF PARTHIA OUT OF FEAR OF THE SECRET CONTRIVANCES OF HIS SUBJECTS AGAINST HIM, WENT TO IZATES, AND WAS BY HIM REINSTATED IN HIS GOVERNMENT; AS ALSO HOW BARDANES HIS SON DENOUNCED WAR AGAINST IZATES.
1. BUT now Artabanus, king of the Parthians perceiving that the governors of the provinces had framed a plot against him, did not think it safe for him to continue among them; but resolved to go to Izates, in hopes of finding some way for his preservation by his means, and, if possible, for his return to his own dominions. So he came to Izates, and brought a thousand of his kindred and servants with him, and met him upon the road, while he well knew Izates, but Izates did not know him. When Artabanus stood near him, and, in the first place, worshipped him, according to the custom, he then said to him, "O king! do not thou overlook me thy servant, nor do thou proudly reject the suit I make thee; for as I am reduced to a low estate, by the change of fortune, and of a king am become a private man, I stand in need of thy assistance. Have regard, therefore, unto the uncertainty of fortune, and esteem the care thou shalt take of me to he taken of thyself also; for if I be neglected, and my subjects go off unpunished, many other subjects will become the more insolent towards other kings also." And this speech Artabanus made with tears in his eyes, and with a dejected countenance. Now as soon as Izates heard Artabanus's name, and saw him stand as a supplicant before him, he leaped down from his horse immediately, and said to him, "Take courage, O king! nor be disturbed at thy present calamity, as if it were incurable; for the change of thy sad condition shall be sudden; for thou shalt find me to be more thy friend and thy assistant than thy hopes can promise thee; for I will either re-establish thee in the kingdom of Parthia, or lose my own."
2. When he had said this, he set Artabanus upon his horse, and followed him on foot, in honor of a king whom he owned as greater than himself; which, when Artabanus saw, he was very uneasy at it, and sware by his present fortune and honor that he would get down from his horse, unless Izates would get upon his horse again, and go before him. So he complied with his desire, and leaped upon his horse; and when he had brought him to his royal palace, he showed him all sorts of respect when they sat together, and he gave him the upper place at festivals also, as regarding not his present fortune, but his former dignity, and that upon this consideration also, that the changes of fortune are common to all men. He also wrote to the Parthians, to persuade them to receive Artabanus again; and gave them his right hand and his faith, that he should forget what was past and done, and that he would undertake for this as a mediator between them. Now the Parthians did not themselves refuse to receive him again, but pleaded that it was not now in their power so to do, because they had committed the government to another person, who had accepted of it, and whose name was Cinnamus; and that they were afraid lest a civil war should arise on this account. When Cinnamus understood their intentions, he wrote to Artabanus himself, for he had been brought up by him, and was of a nature good and gentle also, and desired him to put confidence in him, and to come and take his own dominions again. Accordingly, Artabanus trusted him, and returned home; when Cinnamus met him, worshipped him, and saluted him as a king, and took the diadem off his own head, and put it on the head of Artabanus.
3. And thus was Artahanus restored to his kingdom again by the means of Izates, when he had lost it by the means of the grandees of the kingdom. Nor was he unmindful of the benefits he had conferred upon him, but rewarded him with such honors as were of the greatest esteem among them; for he gave him leave to wear his tiara upright, (6) and to sleep upon a golden bed, which are privileges and marks of honor peculiar to the kings of Parthia. He also cut off a large and fruitful country from the king of Armenia, and bestowed it upon him. The name of the country is Nisibis, wherein the Macedonians had formerly built that city which they called Antioch of Mygodonla. And these were the honors that were paid Izates by the king of the Parthians.
4. But in no long time Artabanus died, and left his kingdom to his son Bardanes. Now this Bardanes came to Izates, and would have persuaded him to join him with his army, and to assist him in the war he was preparing to make with the Romans; but he could not prevail with him. For Izates so well knew the strength and good fortune of the Romans, that he took Bardanes to attempt what was impossible to be done; and having besides sent his sons, five in number, and they but young also, to learn accurately the language of our nation, together with our learning, as well as he had sent his mother to worship at our temple, as I have said already, was the more backward to a compliance; and restrained Bardanes, telling him perpetually of the great armies and famous actions of the Romans, and thought thereby to terrify him, and desired thereby to hinder him from that expedition. But the Parthian king was provoked at this his behavior, and denounced war immediately against Izates. Yet did he gain no advantage by this war, because God cut off all his hopes therein; for the Parthians perceiving Bardanes's intentions, and how he had determined to make war with the Romans, slew him, and gave his kingdom to his brother Gotarzes. He also, in no long time, perished by a plot made against him, and Vologases, his brother, succeeded him, who committed two of his provinces to two of his brothers by the same father; that of the Medes to the elder, Pacorus; and Armenia to the younger, Tiridates.
CHAPTER 4.
HOW IZATES WAS BETRAYED BY HIS OWN SUBJECTS, AND FOUGHT AGAINST BY THE ARABIANS AND HOW IZATES, BY THE PROVIDENCE OF GOD, WAS DELIVERED OUT OF THEIR HANDS.
1. NOW when the king's brother, Monobazus, and his other kindred, saw how Izates, by his piety to God, was become greatly esteemed by all men, they also had a desire to leave the religion of their country, and to embrace the customs of the Jews; but that act of theirs was discovered by Izates's subjects. Whereupon the grandees were much displeased, and could not contain their anger at them; but had an intention, when they should find a proper opportunity, to inflict a punishment upon them. Accordingly, they wrote to Abia, king of the Arabians, and promised him great sums of money, if he would make an expedition against their king; and they further promised him, that, on the first onset, they would desert their king, because they were desirous to punish him, by reason of the hatred he had to their religious worship; then they obliged themselves, by oaths, to be faithful to each other, and desired that he would make haste in this design. The king of Arabia complied with their desires, and brought a great army into the field, and marched against Izates; and, in the beginning of the first onset, and before they came to a close fight, those Handees, as if they had a panic terror upon them, all deserted Izates, as they had agreed to do, and, turning their backs upon their enemies, ran away. Yet was not Izates dismayed at this; but when he understood that the grandees had betrayed him, he also retired into his camp, and made inquiry into the matter; and as soon as he knew who they were that made this conspiracy with the king of Arabia, he cut off those that were found guilty; and renewing the fight on the next day, he slew the greatest part of his enemies, and forced all the rest to betake themselves to flight. He also pursued their king, and drove him into a fortress called Arsamus, and following on the siege vigorously, he took that fortress. And when he had plundered it of all the prey that was in it, which was not small, he returned to Adiabene; yet did not he take Abia alive, because, when he found himself encompassed on every side, he slew himself.
2. But although the grandees of Adiabene had failed in their first attempt, as being delivered up by God into their king's hands, yet would they not even then be quiet, but wrote again to Vologases, who was then king of Parthia, and desired that he would kill Izates, and set over them some other potentate, who should be of a Parthian family; for they said that they hated their own king for abrogating the laws of their forefathers, and embracing foreign customs. When the king of Parthia heard this, he boldly made war upon Izates; and as he had no just pretense for this war, he sent to him, and demanded back those honorable privileges which had been bestowed on him by his father, and threatened, on his refusal, to make war upon him. Upon hearing of this, Izates was under no small trouble of mind, as thinking it would be a reproach upon him to appear to resign those privileges that had been bestowed upon him out of cowardice; yet because he knew, that though the king of Parthia should receive back those honors, yet would he not be quiet, he resolved to commit himself to God, his Protector, in the present danger he was in of his life; and as he esteemed him to be his principal assistant, he intrusted his children and his wives to a very strong fortress, and laid up his corn in his citadels, and set the hay and the grass on fire. And when he had thus put things in order, as well as he could, he awaited the coming of the enemy. And when the king of Parthia was come, with a great army of footmen and horsemen, which he did sooner than was expected, (for he marched in great haste,) and had cast up a bank at the river that parted Adiabene from Media, - Izates also pitched his camp not far off, having with him six thousand horsemen. But there came a messenger to Izates, sent by the king of Parthia, who told him how large his dominions were, as reaching from the river Euphrates to Bactria, and enumerated that king's subjects; he also threatened him that he should be punished, as a person ungrateful to his lords; and said that the God whom he worshipped could not deliver him out of the king's hands. When the messenger had delivered this his message, Izates replied that he knew the king of Parthia's power was much greater than his own; but that he knew also that God was much more powerful than all men. And when he had returned him this answer, he betook himself to make supplication to God, and threw himself upon the ground, and put ashes upon his head, in testimony of his confusion, and fasted, together with his wives and children. (7) Then he called upon God, and said, "O Lord and Governor, if I have not in vain committed myself to thy goodness, but have justly determined that thou only art the Lord and principal of all beings, come now to my assistance, and defend me from my enemies, not only on my own account, but on account of their insolent behavior with regard to thy power, while they have not feared to lift up their proud and arrogant tongue against thee." Thus did he lament and bemoan himself, with tears in his eyes; whereupon God heard his prayer. And immediately that very night Vologases received letters, the contents of which were these, that a great band of Dahe and Sacse, despising him, now he was gone so long a journey from home, had made an expedition, and laid Parthis waste; so that he [was forced to] retire back, without doing any thing. And thus it was that Izates escaped the threatenings of the Parthians, by the providence of God.
3. It was not long ere Izates died, when he had completed fifty-five years of his life, and had ruled his kingdom twenty-four years. He left behind him twenty-four sons and twenty-four daughters. However, he gave order that his brother Monobazus should succeed in the government, thereby requiting him, because, while he was himself absent after their father's death, he had faithfully preserved the government for him. But when Helena, his mother, heard of her son's death, she was in great heaviness, as was but natural, upon her loss of such a most dutiful son; yet was it a comfort to her that she heard the succession came to her eldest son. Accordingly, she went to him in haste; and when she was come into Adiabene, she did not long outlive her son Izates. But Monobazus sent her bones, as well as those of Izates, his brother, to Jerusalem, and gave order that they should be buried at the pyramids (8) which their mother had erected; they were three in number, and distant no more than three furlongs from the city Jerusalem. But for the actions of Monobazus the king, which he did during the rest of his life. we will relate them hereafter.-
CHAPTER 5.
CONCERNING THEUDAS AND THE SONS OF JUDAS THE GALILEAN; AS ALSO WHAT CALAMITY FELL UPON THE JEWS ON THE DAY OF THE PASSOVER.
1. NOW it came to pass, while Fadus was procurator of Judea, that a certain magician, whose name was Theudas, (9) persuaded a great part of the people to take their effects with them, and follow him to the river Jordan; for he told them he was a prophet, and that he would, by his own command, divide the river, and afford them an easy passage over it; and many were deluded by his words. However, Fadus did not permit them to make any advantage of his wild attempt, but sent a troop of horsemen out against them; who, falling upon them unexpectedly, slew many of them, and took many of them alive. They also took Theudas alive, and cut off his head, and carried it to Jerusalem. This was what befell the Jews in the time of Cuspius Fadus's government.
2. Then came Tiberius Alexander as successor to Fadus; he was the son of Alexander the alabarch of Alexandria, which Alexander was a principal person among all his contemporaries, both for his family and wealth: he was also more eminent for his piety than this his son Alexander, for he did not continue in the religion of his country. Under these procurators that great famine happened in Judea, in which queen Helena bought corn in Egypt at a great expense, and distributed it to those that were in want, as I have related already. And besides this, the sons of Judas of Galilee were now slain; I mean of that Judas who caused the people to revolt, when Cyrenius came to take an account of the estates of the Jews, as we have showed in a foregoing book. The names of those sons were James and Simon, whom Alexander commanded to be crucified. But now Herod, king of Chalcis, removed Joseph, the son of Camydus, from the high priesthood, and made Ananias, the son of Nebedeu, his successor. And now it was that Cumanus came as successor to Tiberius Alexander; as also that Herod, brother of Agrippa the great king, departed this life, in the eighth year of the reign of Claudius Caesar. He left behind him three sons; Aristobulus, whom he had by his first wife, with Bernicianus, and Hyrcanus, both whom he had by Bernice his brother's daughter. But Claudius Caesar bestowed his dominions on Agrippa, junior.
3. Now while the Jewish affairs were under the administration of Cureanus, there happened a great tumult at the city of Jerusalem, and many of the Jews perished therein. But I shall first explain the occasion whence it was derived. When that feast which is called the passover was at hand, at which time our custom is to use unleavened bread, and a great multitude was gathered together from all parts to that feast, Cumanus was afraid lest some attempt of innovation should then be made by them; so he ordered that one regiment of the army should take their arms, and stand in the temple cloisters, to repress any attempts of innovation, if perchance any such should begin; and this was no more than what the former procurators of Judea did at such festivals. But on the fourth day of the feast, a certain soldier let down his breeches, and exposed his privy members to the multitude, which put those that saw him into a furious rage, and made them cry out that this impious action was not done to approach them, but God himself; nay, some of them reproached Cumanus, and pretended that the soldier was set on by him, which, when Cumanus heard, he was also himself not a little provoked at such reproaches laid upon him; yet did he exhort them to leave off such seditious attempts, and not to raise a tumult at the festival. But when he could not induce them to be quiet for they still went on in their reproaches to him, he gave order that the whole army should take their entire armor, and come to Antonia, which was a fortress, as we have said already, which overlooked the temple; but when the multitude saw the soldiers there, they were affrighted at them, and ran away hastily; but as the passages out were but narrow, and as they thought their enemies followed them, they were crowded together in their flight, and a great number were pressed to death in those narrow passages; nor indeed was the number fewer than twenty thousand that perished in this tumult. So instead of a festival, they had at last a mournful day of it; and they all of them forgot their prayers and sacrifices, and betook themselves to lamentation and weeping; so great an affliction did the impudent obsceneness of a single soldier bring upon them. (10)
4. Now before this their first mourning was over, another mischief befell them also; for some of those that raised the foregoing tumult, when they were traveling along the public road, about a hundred furlongs from the city, robbed Stephanus, a servant of Caesar, as he was journeying, and plundered him of all that he had with him; which things when Cureanus heard of, he sent soldiers immediately, and ordered them to plunder the neighboring villages, and to bring the most eminent persons among them in bonds to him. Now as this devastation was making, one of the soldiers seized the laws of Moses that lay in one of those villages, and brought them out before the eyes of all present, and tore them to pieces; and this was done with reproachful language, and much scurrility; which things when the Jews heard of, they ran together, and that in great numbers, and came down to Cesarea, where Cumanus then was, and besought him that he would avenge, not themselves, but God himself, whose laws had been affronted; for that they could not bear to live any longer, if the laws of their forefathers must be affronted after this manner. Accordingly Cumanus, out of fear lest the multitude should go into a sedition, and by the advice of his friends also, took care that the soldier who had offered the affront to the laws should be beheaded, and thereby put a stop to the sedition which was ready to be kindled a second time.
CHAPTER 6.
HOW THERE HAPPENED A QUARREL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AND HOW CLAUDIUS PUT AN END TO THEIR DIFFERENCES.
1. NOW there arose a quarrel between the Samaritans and the Jews on the occasion following: It was the custom of the Galileans, when they came to the holy city at the festivals, to take their journeys through the country of the Samaritans; (11) and at this time there lay, in the road they took, a village that was called Ginea, which was situated in the limits of Samaria and the great plain, where certain persons thereto belonging fought with the Galileans, and killed a great many of them. But when the principal of the Galileans were informed of what had been done, they came to Cumanus, and desired him to avenge the murder of those that were killed; but he was induced by the Samaritans, with money, to do nothing in the matter; upon which the Galileans were much displeased, and persuaded the multitude of the Jews to betake themselves to arms, and to regain their liberty, saying that slavery was in itself a bitter thing, but that when it was joined with direct injuries, it was perfectly intolerable, And when their principal men endeavored to pacify them, and promised to endeavor to persuade Cureanus to avenge those that were killed, they would not hearken to them, but took their weapons, and entreated the assistance of Eleazar, the son of Dineus, a robber, who had many years made his abode in the mountains, with which assistance they plundered many villages of the Samaritans. When Cumanus heard of this action of theirs, he took the band of Sebaste, with four regiments of footmen, and armed the Samaritans, and marched out against the Jews, and caught them, and slew many of them, and took a great number of them alive; whereupon those that were the most eminent persons at Jerusalem, and that both in regard to the respect that was paid them, and the families they were of, as soon as they saw to what a height things were gone, put on sackcloth, and heaped ashes upon their heads, and by all possible means besought the seditious, and persuaded them that they would set before their eyes the utter subversion of their country, the conflagration of their temple, and the slavery of themselves, their wives, and children, (12) which would be the consequences of what they were doing; and would alter their minds, would cast away their weapons, and for the future be quiet, and return to their own homes. These persuasions of theirs prevailed upon them. So the people dispersed themselves, and the robbers went away again to their places of strength; and after this time all Judea was overrun with robberies.
2. But the principal of the Samaritans went to Ummidius Quadratus, the president of Syria, who at that time was at Tyre, and accused the Jews of setting their villages on fire, and plundering them; and said withal, that they were not so much displeased at what they had suffered, as they were at the contempt thereby showed the Romans; while if they had received any injury, they ought to have made them the judges of what had been done, and not presently to make such devastation, as if they had not the Romans for their governors; on which account they came to him, in order to obtain that vengeance they wanted. This was the accusation which the Samaritans brought against the Jews. But the Jews affirmed that the Samaritans were the authors of this tumult and fighting, and that, in the first place, Cumanus had been corrupted by their gifts, and passed over the murder of those that were slain in silence; - which allegations when Quadratus heard, he put off the hearing of the cause, and promised that he would give sentence when he should come into Judea, and should have a more exact knowledge of the truth of that matter. So these men went away without success. Yet was it not long ere Quadratus came to Samaria, where, upon hearing the cause, he supposed that the Samaritans were the authors of that disturbance. But when he was informed that certain of the Jews were making innovations, he ordered those to be crucified whom Cumanus had taken captives. From whence he came to a certain village called Lydda, which was not less than a city in largeness, and there heard the Samaritan cause a second time before his tribunal, and there learned from a certain Samaritan that one of the chief of the Jews, whose name was Dortus, and some other innovators with him, four in number, persuaded the multitude to a revolt from the Romans; whom Quadratus ordered to be put to death: but still he sent away Ananias the high priest, and Ananus the commander [of the temple], in bonds to Rome, to give an account of what they had done to Claudius Caesar. He also ordered the principal men, both of the Samaritans and of the Jews, as also Cumanus the procurator, and Ceier the tribune, to go to Italy to the emperor, that he might hear their cause, and determine their differences one with another. But he came again to the city of Jerusalem, out of his fear that the multitude of the Jews should attempt some innovations; but he found the city in a peaceable state, and celebrating one of the usual festivals of their country to God. So he believed that they would not attempt any innovations, and left them at the celebration of the festival, and returned to Antioch.
3. Now Cumanus, and the principal of the Samaritans, who were sent to Rome, had a day appointed them by the emperor whereon they were to have pleaded their cause about the quarrels they had one with another. But now Caesar's freed-men and his friends were very zealous on the behalf of Cumanus and the Samaritans; and they had prevailed over the Jews, unless Agrippa, junior, who was then at Rome, had seen the principal of the Jews hard set, and had earnestly entreated Agrippina, the emperor's wife, to persuade her husband to hear the cause, so as was agreeable to his justice, and to condemn those to be punished who were really the authors of this revolt from the Roman government: - whereupon Claudius was so well disposed beforehand, that when he had heard the cause, and found that the Samaritans had been the ringleaders in those mischievous doings, he gave order that those who came up to him should be slain, and that Cureanus should be banished. He also gave order that Celer the tribune should be carried back to Jerusalem, and should be drawn through the city in the sight of all the people, and then should be slain.
CHAPTER 7.
FELIX IS MADE PROCURATOR OF JUDEA; AS ALSO CONCERNING AGRIPPA, JUNIOR AND HIS SISTERS.
1. SO Claudius sent Felix, the brother of Pallas, to take care of the affairs of Judea; and when he had already completed the twelfth year of his reign, he bestowed upon Agrippa the tetrarchy of Philip and Batanea, and added thereto Trachonites, with Abila; which last had been the tetrarchy of Lysanias; but he took from him Chalcis, when he had been governor thereof four years. And when Agrippa had received these countries as the gift of Caesar, he gave his sister Drusilla in marriage to Azizus, king of Emesa, upon his consent to be circumcised; for Epiphanes, the son of king Antiochus, had refused to marry her, because, after he had promised her father formerly to come over to the Jewish religion, he would not now perform that promise. He also gave Mariamne in marriage to Archelaus, the son of Helcias, to whom she had formerly been betrothed by Agrippa her father; from which marriage was derived a daughter, whose name was Bernice.
2. But for the marriage of Drusilla with Azizus, it was in no long time afterward dissolved upon the following occasion: While Felix was procurator of Judea, he saw this Drusilla, and fell in love with her; for she did indeed exceed all other women in beauty; and he sent to her a person whose name was Simon (13) one of his friends; a Jew he was, and by birth a Cypriot, and one who pretended to be a magician, and endeavored to persuade her to forsake her present husband, and marry him; and promised, that if she would not refuse him, he would make her a happy woman. Accordingly she acted ill, and because she was desirous to avoid her sister Bernice's envy, for she was very ill treated by her on account of her beauty, was prevailed upon to transgress the laws of her forefathers, and to marry Felix; and when he had had a son by her, he named him Agrippa. But after what manner that young man, with his wife, perished at the conflagration of the mountain Vesuvius, (14) in the days of Titus Caesar, shall be related hereafter. (15)
3. But as for Bernice, she lived a widow a long while after the death of Herod [king of Chalcis], who was both her husband and her uncle; but when the report went that she had criminal conversation with her brother, [Agrippa, junior,] she persuaded Poleme, who was king of Cilicia, to be circumcised, and to marry her, as supposing that by this means she should prove those calumnies upon her to be false; and Poleme was prevailed upon, and that chiefly on account of her riches. Yet did not this matrimony endure long; but Bernice left Poleme, and, as was said, with impure intentions. So he forsook at once this matrimony, and the Jewish religion; and, at the same time, Mariamne put away Archclaus, and was married to Demetrius, the principal man among the Alexandrian Jews, both for his family and his wealth; and indeed he was then their alabarch. So she named her son whom she had by him Agrippinus. But of all these particulars we shall hereafter treat more exactly. (16)
CHAPTER 8.
AFTER WHAT MANNER UPON THE DEATH OF CLAUDIUS, NERO SUCCEEDED IN THE GOVERNMENT; AS ALSO WHAT BARBAROUS THINGS HE DID. CONCERNING THE ROBBERS, MURDERERS AND IMPOSTORS, THAT AROSE WHILE FELIX AND FESTUS WERE PROCURATORS OF JUDEA.
1. NOW Claudius Caesar died when he had reigned thirteen years, eight months, and twenty days; (17) and a report went about that he was poisoned by his wife Agrippina. Her father was Germanicus, the brother of Caesar. Her husband was Domitius Aenobarbus, one of the most illustrious persons that was in the city of Rome; after whose death, and her long continuance in widowhood, Claudius took her to wife. She brought along with her a son, Domtitus, of the same name with his father. He had before this slain his wife Messalina, out of jealousy, by whom he had his children Britannicus and Octavia; their eldest sister was Antonia, whom he had by Pelina his first wife. He also married Octavia to Nero; for that was the name that Caesar gave him afterward, upon his adopting him for his son.
2. But now Agrippina was afraid, lest, when Britannicus should come to man's estate, he should succeed his father in the government, and desired to seize upon the principality beforehand for her own son [Nero]; upon which the report went that she thence compassed the death of Claudius. Accordingly, she sent Burrhus, the general of the army, immediately, and with him the tribunes, and such also of the freed-men as were of the greatest authority, to bring Nero away into the camp, and to salute him emperor. And when Nero had thus obtained the government, he got Britannicus to be so poisoned, that the multitude should not perceive it; although he publicly put his own mother to death not long afterward, making her this requital, not only for being born of her, but for bringing it so about by her contrivances that he obtained the Roman empire. He also slew Octavia his own wife, and many other illustrious persons, under this pretense, that they plotted against him.
3. But I omit any further discourse about these affairs; for there have been a great many who have composed the history of Nero; some of which have departed from the truth of facts out of favor, as having received benefits from him; while others, out of hatred to him, and the great ill-will which they bare him, have so impudently raved against him with their lies, that they justly deserve to be condemned. Nor do I wonder at such as have told lies of Nero, since they have not in their writings preserved the truth of history as to those facts that were earlier than his time, even when the actors could have no way incurred their hatred, since those writers lived a long time after them. But as to those that have no regard to truth, they may write as they please; for in that they take delight: but as to ourselves, who have made truth our direct aim, we shall briefly touch upon what only belongs remotely to this undertaking, but shall relate what hath happened to us Jews with great accuracy, and shall not grudge our pains in giving an account both of the calamities we have suffered, and of the crimes we have been guilty of. I will now therefore return to the relation of our own affairs.
4. For in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Nero, upon the death of Azizus, king of Emesa, Soemus, his brother, succeeded in his kingdom, and Aristobulus, the son of Herod, king of Chalcis, was intrusted by Nero with the government of the Lesser Armenia. Caesar also bestowed on Agrippa a certain part of Galilee, Tiberias, and Tarichae, (18) and ordered them to submit to his jurisdiction. He gave him also Julias, a city of Perea, with fourteen villages that lay about it.
5. Now as for the affairs of the Jews, they grew worse and worse continually, for the country was again filled with robbers and impostors, who deluded the multitude. Yet did Felix catch and put to death many of those impostors every day, together with the robbers. He also caught Eleazar, the son of Dineas, who had gotten together a company of robbers; and this he did by treachery; for he gave him assurance that he should suffer no harm, and thereby persuaded him to come to him; but when he came, he bound him, and sent him to Rome. Felix also bore an ill-will to Jonathan, the high priest, because he frequently gave him admonitions about governing the Jewish affairs better than he did, lest he should himself have complaints made of him by the multitude, since he it was who had desired Caesar to send him as procurator of Judea. So Felix contrived a method whereby he might get rid of him, now he was become so continually troublesome to him; for such continual admonitions are grievous to those who are disposed to act unjustly. Wherefore Felix persuaded one of Jonathan's most faithful friends, a citizen of Jerusalem, whose name was Doras, to bring the robbers upon Jonathan, in order to kill him; and this he did by promising to give him a great deal of money for so doing. Doras complied with the proposal, and contrived matters so, that the robbers might murder him after the following manner: Certain of those robbers went up to the city, as if they were going to worship God, while they had daggers under their garments, and by thus mingling themselves among the multitude they slew Jonathan (19) and as this murder was never avenged, the robbers went up with the greatest security at the festivals after this time; and having weapons concealed in like manner as before, and mingling themselves among the multitude, they slew certain of their own enemies, and were subservient to other men for money; and slew others, not only in remote parts of the city, but in the temple itself also; for they had the boldness to murder men there, without thinking of the impiety of which they were guilty. And this seems to me to have been the reason why God, out of his hatred of these men's wickedness, rejected our city; and as for the temple, he no longer esteemed it sufficiently pure for him to inhabit therein, but brought the Romans upon us, and threw a fire upon the city to purge it; and brought upon us, our wives, and children, slavery, as desirous to make us wiser by our calamities.
6. These works, that were done by the robbers, filled the city with all sorts of impiety. And now these impostors and deceivers persuaded the multitude to follow them into the wilderness, and pretended that they would exhibit manifest wonders and signs, that should be performed by the providence of God. And many that were prevailed on by them suffered the punishments of their folly; for Felix brought them back, and then punished them. Moreover, there came out of Egypt (20) about this time to Jerusalem one that said he was a prophet, and advised the multitude of the common people to go along with him to the Mount of Olives, as it was called, which lay over against the city, and at the distance of five furlongs. He said further, that he would show them from hence how, at his command, the walls of Jerusalem would fall down; and he promised them that he would procure them an entrance into the city through those walls, when they were fallen down. Now when Felix was informed of these things, he ordered his soldiers to take their weapons, and came against them with a great number of horsemen and footmen from Jerusalem, and attacked the Egyptian and the people that were with him. He also slew four hundred of them, and took two hundred alive. But the Egyptian himself escaped out of the fight, but did not appear any more. And again the robbers stirred up the people to make war with the Romans, and said they ought not to obey them at all; and when any persons would not comply with them, they set fire to their villages, and plundered them.
7. And now it was that a great sedition arose between the Jews that inhabited Cesarea, and the Syrians who dwelt there also, concerning their equal right to the privileges belonging to citizens; for the Jews claimed the pre-eminence, because Herod their king was the builder of Cesarea, and because he was by birth a Jew. Now the Syrians did not deny what was alleged about Herod; but they said that Cesarea was formerly called Strato's Tower, and that then there was not one Jewish inhabitant. When the presidents of that country heard of these disorders, they caught the authors of them on both sides, and tormented them with stripes, and by that means put a stop to the disturbance for a time. But the Jewish citizens depending on their wealth, and on that account despising the Syrians, reproached them again, and hoped to provoke them by such reproaches. However, the Syrians, though they were inferior in wealth, yet valuing themselves highly on this account, that the greatest part of the Roman soldiers that were there were either of Cesarea or Sebaste, they also for some time used reproachful language to the Jews also; and thus it was, till at length they came to throwing stones at one another, and several were wounded, and fell on both sides, though still the Jews were the conquerors. But when Felix saw that this quarrel was become a kind of war, he came upon them on the sudden, and desired the Jews to desist; and when they refused so to do, he armed his soldiers, and sent them out upon them, and slew many of them, and took more of them alive, and permitted his soldiers to plunder some of the houses of the citizens, which were full of riches. Now those Jews that were more moderate, and of principal dignity among them, were afraid of themselves, and desired of Felix that he would sound a retreat to his soldiers, and spare them for the future, and afford them room for repentance for what they had done; and Felix was prevailed upon to do so.
8. About this time king Agrippa gave the high priesthood to Ismael, who was the son of Fabi. And now arose a sedition between the high priests and the principal men of the multitude of Jerusalem; each of which got them a company of the boldest sort of men, and of those that loved innovations about them, and became leaders to them; and when they struggled together, they did it by casting reproachful words against one another, and by throwing stones also. And there was nobody to reprove them; but these disorders were done after a licentious manner in the city, as if it had no government over it. And such was the impudence (21) and boldness that had seized on the high priests, that they had the hardiness to send their servants into the threshing-floors, to take away those tithes that were due to the priests, insomuch that it so fell out that the poorest sort of the priests died for want. To this degree did the violence of the seditious prevail over all right and justice.
9. Now when Porcius Festus was sent as successor to Felix by Nero, the principal of the Jewish inhabitants of Cesarea went up to Rome to accuse Felix; and he had certainly been brought to punishment, unless Nero had yielded to the importunate solicitations of his brother Pallas, who was at that time had in the greatest honor by him. Two of the principal Syrians in Cesarea persuaded Burrhus, who was Nero's tutor, and secretary for his Greek epistles, by giving him a great sum of money, to disannul that equality of the Jewish privileges of citizens which they hitherto enjoyed. So Burrhus, by his solicitations, obtained leave of the emperor that an epistle should be written to that purpose. This epistle became the occasion of the following miseries that befell our nation; for when the Jews of Cesarea were informed of the contents of this epistle to the Syrians, they were more disorderly than before, till a war was kindled.
10. Upon Festus's coming into Judea, it happened that Judea was afflicted by the robbers, while all the villages were set on fire, and plundered by them. And then it was that the sicarii, as they were called, who were robbers, grew numerous. They made use of small swords, not much different in length from the Persian acinacae, but somewhat crooked, and like the Roman sicae, [or sickles,] as they were called; and from these weapons these robbers got their denomination; and with these weapons they slew a great many; for they mingled themselves among the multitude at their festivals, when they were come up in crowds from all parts to the city to worship God, as we said before, and easily slew those that they had a mind to slay. They also came frequently upon the villages belonging to their enemies, with their weapons, and plundered them, and set them on fire. So Festus sent forces, both horsemen and footmen, to fall upon those that had been seduced by a certain impostor, who promised them deliverance and freedom from the miseries they were under, if they would but follow him as far as the wilderness. Accordingly, those forces that were sent destroyed both him that had deluded them, and those that were his followers also.
11. About the same time king Agrippa built himself a very large dining-room in the royal palace at Jerusalem, near to the portico. Now this palace had been erected of old by the children of Asamoneus. and was situate upon an elevation, and afforded a most delightful prospect to those that had a mind to take a view of the city, which prospect was desired by the king; and there he could lie down, and eat, and thence observe what was done in the temple; which thing, when the chief men of Jerusalem saw they were very much displeased at it; for it was not agreeable to the institutions of our country or law that what was done in the temple should be viewed by others, especially what belonged to the sacrifices. They therefore erected a wall upon the uppermost building which belonged to the inner court of the temple towards the west, which wall when it was built, did not only intercept the prospect of the dining-room in the palace, but also of the western cloisters that belonged to the outer court of the temple also, where it was that the Romans kept guards for the temple at the festivals. At these doings both king Agrippa, and principally Festus the procurator, were much displeased; and Festus ordered them to pull the wall down again: but the Jews petitioned him to give them leave to send an embassage about this matter to Nero; for they said they could not endure to live if any part of the temple should be demolished; and when Festus had given them leave so to do, they sent ten of their principal men to Nero, as also Ismael the high priest, and Helcias, the keeper of the sacred treasure. And when Nero had heard what they had to say, he not only forgave (22) them what they had already done, but also gave them leave to let the wall they had built stand. This was granted them in order to gratify Poppea, Nero's wife, who was a religious woman, and had requested these favors of Nero, and who gave order to the ten ambassadors to go their way home; but retained Helcias and Ismael as hostages with herself. As soon as the king heard this news, he gave the high priesthood to Joseph, who was called Cabi, the son of Simon, formerly high priest.
CHAPTER 9.
CONCERNING ALBINUS UNDER WHOSE PROCURATORSHIP JAMES WAS SLAIN; AS ALSO WHAT EDIFICES WERE BUILT BY AGRIPPA.
1. AND now Caesar, upon hearing the death of Festus, sent Albinus into Judea, as procurator. But the king deprived Joseph of the high priesthood, and bestowed the succession to that dignity on the son of Ananus, who was also himself called Ananus. Now the report goes that this eldest Ananus proved a most fortunate man; for he had five sons who had all performed the office of a high priest to God, and who had himself enjoyed that dignity a long time formerly, which had never happened to any other of our high priests. But this younger Ananus, who, as we have told you already, took the high priesthood, was a bold man in his temper, and very insolent; he was also of the sect of the Sadducees, (23) who are very rigid in judging offenders, above all the rest of the Jews, as we have already observed; when, therefore, Ananus was of this disposition, he thought he had now a proper opportunity [to exercise his authority]. Festus was now dead, and Albinus was but upon the road; so he assembled the sanhedrim of judges, and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who was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and some others, [or, some of his companions]; and when he had formed an accusation against them as breakers of the law, he delivered them to be stoned: but as for those who seemed the most equitable of the citizens, and such as were the most uneasy at the breach of the laws, they disliked what was done; they also sent to the king [Agrippa], desiring him to send to Ananus that he should act so no more, for that what he had already done was not to be justified; nay, some of them went also to meet Albinus, as he was upon his journey from Alexandria, and informed him that it was not lawful for Ananus to assemble a sanhedrim without his consent. (24) Whereupon Albinus complied with what they said, and wrote in anger to Ananus, and threatened that he would bring him to punishment for what he had done; on which king Agrippa took the high priesthood from him, when he had ruled but three months, and made Jesus, the son of Damneus, high priest.
2. Now as soon as Albinus was come to the city of Jerusalem, he used all his endeavors and care that the country might be kept in peace, and this by destroying many of the Sicarii. But as for the high priest, Ananias (25) he increased in glory every day, and this to a great degree, and had obtained the favor and esteem of the citizens in a signal manner; for he was a great hoarder up of money: he therefore cultivated the friendship of Albinus, and of the high priest [Jesus], by making them presents; he also had servants who were very wicked, who joined themselves to the boldest sort of the people, and went to the thrashing-floors, and took away the tithes that belonged to the priests by violence, and did not refrain from beating such as would not give these tithes to them. So the other high priests acted in the like manner, as did those his servants, without any one being able to prohibit them; so that [some of the] priests, that of old were wont to be supported with those tithes, died for want of food.
3. But now the Sicarii went into the city by night, just before the festival, which was now at hand, and took the scribe belonging to the governor of the temple, whose name was Eleazar, who was the son of Ananus [Ananias] the high priest, and bound him, and carried him away with them; after which they sent to Ananias, and said that they would send the scribe to him, if he would persuade Albinus to release ten of those prisoners which he had caught of their party; so Ananias was plainly forced to persuade Albinus, and gained his request of him. This was the beginning of greater calamities; for the robbers perpetually contrived to catch some of Ananias's servants; and when they had taken them alive, they would not let them go, till they thereby recovered some of their own Sicarii. And as they were again become no small number, they grew bold, and were a great affliction to the whole country.
4. About this time it was that king Agrippa built Cesarea Philippi larger than it was before, and, in honor of Nero, named it Neronlas. And when he had built a theater at Berytus, with vast expenses, he bestowed on them shows, to be exhibited every year, and spent therein many ten thousand [drachmae]; he also gave the people a largess of corn, and distributed oil among them, and adorned the entire city with statues of his own donation, and with original images made by ancient hands; nay, he almost transferred all that was most ornamental in his own kingdom thither. This made him more than ordinarily hated by his subjects, because he took those things away that belonged to them to adorn a foreign city. And now Jesus, the son of Gamaliel, became the successor of Jesus, the son of Damneus, in the high priesthood, which the king had taken from the other; on which account a sedition arose between the high priests, with regard to one another; for they got together bodies of the boldest sort of the people, and frequently came, from reproaches, to throwing of stones at each other. But Ananias was too hard for the rest, by his riches, which enabled him to gain those that were most ready to receive. Costobarus also, and Saulus, did themselves get together a multitude of wicked wretches, and this because they were of the royal family; and so they obtained favor among them, because of their kindred to Agrippa; but still they used violence with the people, and were very ready to plunder those that were weaker than themselves. And from that time it principally came to pass that our city was greatly disordered, and that all things grew worse and worse among us.
5. But when Albinus heard that Gessius Florus was coming to succeed him, he was desirous to appear to do somewhat that might be grateful to the people of Jerusalem; so he brought out all those prisoners who seemed to him to be most plainly worthy of death, and ordered them to be put to death accordingly. But as to those who had been put into prison on some trifling occasions, he took money of them, and dismissed them; by which means the prisons were indeed emptied, but the country was filled with robbers.
6. Now as many of the Levites, (26) which is a tribe of ours, as were singers of hymns, persuaded the king to assemble a sanhedrim, and to give them leave to wear linen garments, as well as the priests for they said that this would be a work worthy the times of his government, that he might have a memorial of such a novelty, as being his doing. Nor did they fail of obtaining their desire; for the king, with the suffrages of those that came into the sanhedrim, granted the singers of hymns this privilege, that they might lay aside their former garments, and wear such a linen one as they desired; and as a part of this tribe ministered in the temple, he also permitted them to learn those hymns as they had besought him for. Now all this was contrary to the laws of our country, which, whenever they have been transgressed, we have never been able to avoid the punishment of such transgressions.
7. And now it was that the temple was finished. So when the people saw that the workmen were unemployed, who were above eighteen thousand and that they, receiving no wages, were in want because they had earned their bread by their labors about the temple; and while they were unwilling to keep by them the treasures that were there deposited, out of fear of [their being carried away by] the Romans; and while they had a regard to the making provision for the workmen; they had a mind to expend these treasures upon them; for if any one of them did but labor for a single hour, he received his pay immediately; so they persuaded him to rebuild the eastern cloisters. These cloisters belonged to the outer court, and were situated in a deep valley, and had walls that reached four hundred cubits [in length], and were built of square and very white stones, the length of each of which stones was twenty cubits, and their height six cubits. This was the work of king Solomon, (27) who first of all built the entire temple. But king Agrippa, who had the care of the temple committed to him by Claudius Caesar, considering that it is easy to demolish any building, but hard to build it up again, and that it was particularly hard to do it to these cloisters, which would require a considerable time, and great sums of money, he denied the petitioners their request about that matter; but he did not obstruct them when they desired the city might be paved with white stone. He also deprived Jesus, the son of Gamaliel, of the high priesthood, and gave it to Matthias, the son of Theophilus, under whom the Jews' war with the Romans took its beginning.
CHAPTER 10.
AN ENUMERATION OF THE HIGH PRIESTS.
1. AND now I think it proper and agreeable to this history to give an account of our high priests; how they began, who those are which are capable of that dignity, and how many of them there had been at the end of the war. In the first place, therefore, history informs us that Aaron, the brother of Moses, officiated to God as a high priest, and that, after his death, his sons succeeded him immediately; and that this dignity hath been continued down from them all to their posterity. Whence it is a custom of our country, that no one should take the high priesthood of God but he who is of the blood of Aaron, while every one that is of another stock, though he were a king, can never obtain that high priesthood. Accordingly, the number of all the high priests from Aaron, of whom we have spoken already, as of the first of them, until Phanas, who was made high priest during the war by the seditious, was eighty-three; of whom thirteen officiated as high priests in the wilderness, from the days of Moses, while the tabernacle was standing, until the people came into Judea, when king Solomon erected the temple to God; for at the first they held the high priesthood till the end of their life, although afterward they had successors while they were alive. Now these thirteen, who were the descendants of two of the sons of Aaron, received this dignity by succession, one after another; for their form of government was an aristocracy, and after that a monarchy, and in the third place the government was regal Now the number of years during the rule of these thirteen, from the day when our fathers departed out of Egypt, under Moses their leader, until the building of that temple which king Solomon erected at Jerusalem, were six hundred and twelve. After those thirteen high priests, eighteen took the high priesthood at Jerusalem, one m succession to another, from the days of king Solomon, until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made an expedition against that city, and burnt the temple, and removed our nation into Babylon, and then took Josadek, the high priest, captive; the times of these high priests were four hundred and sixty-six years, six months, and ten days, while the Jews were still under the regal government. But after the term of seventy years' captivity under the Babylonians, Cyrus, king of Persia, sent the Jews from Babylon to their own land again, and gave them leave to rebuild their temple; at which time Jesus, the son of Josadek, took the high priesthood over the captives when they were returned home. Now he and his posterity, who were in all fifteen, until king Antiochus Eupator, were under a democratical government for four hundred and fourteen years; and then the forementioned Antiochus, and Lysias the general of his army, deprived Onias, who was also called Menelaus, of the high priesthood, and slew him at Berea; and driving away the son [of Onias the third], put Jaeimus into the place of the high priest, one that was indeed of the stock of Aaron, but not of that family of Onias. On which account Onias, who was the nephew of Onias that was dead, and bore the same name with his father, came into Egypt, and got into the friendship of Ptolemy Philometor, and Cleopatra his wife, and persuaded them to make him the high priest of that temple which he built to God in the prefecture of Heliopolis, and this in imitation of that at Jerusalem; but as for that temple which was built in Egypt, we have spoken of it frequently already. Now when Jacimus had retained the priesthood three years, he died, and there was no one that succeeded him, but the city continued seven years without a high priest. But then the posterity of the sons of Asamoneus, who had the government of the nation conferred upon them, when they had beaten the Macedonians in war, appointed Jonathan to be their high priest, who ruled over them seven years. And when he had been slain by the treacherous contrivance of Trypho, as we have related some where, Simon his brother took the high priesthood; and when he was destroyed at a feast by the treachery of his son-in-law, his own son, whose name was Hyrcanus, succeeded him, after he had held the high priesthood one year longer than his brother. This Hyrcanus enjoyed that dignity thirty years, and died an old man, leaving the succession to Judas, who was also called Aristobulus, whose brother Alexander was his heir; which Judas died of a sore distemper, after he had kept the priesthood, together with the royal authority; for this Judas was the first that put on his head a diadem for one year. And when Alexander had been both king and high priest twenty-seven years, he departed this life, and permitted his wife Alexandra to appoint him that should he high priest; so she gave the high priesthood to Hyrcanus, but retained the kingdom herself nine years, and then departed this life. The like duration [and no longer] did her son Hyrcanus enjoy the high priesthood; for after her death his brother Aristobulus fought against him, and beat him, and deprived him of his principality; and he did himself both reign, and perform the office of high priest to God. But when he had reigned three years, and as many months, Pompey came upon him, and not only took the city of Jerusalem by force, but put him and his children in bonds, and sent them to Rome. He also restored the high priesthood to Hyrcanus, and made him governor of the nation, but forbade him to wear a diadem. This Hyrcanus ruled, besides his first nine years, twenty-four years more, when Barzapharnes and Pacorus, the generals of the Parthians, passed over Euphrates, and fought with Hyrcanus, and took him alive, and made Antigonus, the son of Aristobulus, king; and when he had reigned three years and three months, Sosius and Herod besieged him, and took him, when Antony had him brought to Antioch, and slain there. Herod was then made king by the Romans, but did no longer appoint high priests out of the family of Asamoneus; but made certain men to be so that were of no eminent families, but barely of those that were priests, excepting that he gave that dignity to Aristobulus; for when he had made this Aristobulus, the grandson of that Hyrcanus who was then taken by the Parthians, and had taken his sister Mariarmne to wife, he thereby aimed to win the good-will of the people, who had a kind remembrance of Hyrcanus [his grandfather]. Yet did he afterward, out of his fear lest they should all bend their inclinations to Aristobulus, put him to death, and that by contriving how to have him suffocated as he was swimming at Jericho, as we have already related that matter; but after this man he never intrusted the priesthood to the posterity of the sons of Asamoneus. Archelaus also, Herod's son, did like his father in the appointment of the high priests, as did the Romans also, who took the government over the Jews into their hands afterward. Accordingly, the number of the high priests, from the days of Herod until the day when Titus took the temple and the City, and burnt them, were in all twenty-eight; the time also that belonged to them was a hundred and seven years. Some of these were the political governors of the people under the reign of Herod, and under the reign of Archelaus his son, although, after their death, the government became an aristocracy, and the high priests were intrusted with a dominion over the nation. And thus much may suffice to be said concerning our high priests.
CHAPTER 11.
CONCERNING FLORUS THE PROCURATOR, WHO NECESSITATED THE JEWS TO TAKE UP ARMS AGAINST THE ROMANS. THE CONCLUSION.
1. NOW Gessius Florus, who was sent as successor to Albinus by Nero, filled Judea with abundance of miseries. He was by birth of the city of Clazomene, and brought along with him his wife Cleopatra, (by whose friendship with Poppea, Nero's wife, he obtained this government,) who was no way different from him in wickedness. This Florus was so wicked, and so violent in the use of his authority, that the Jews took Albinus to have been [comparatively] their benefactor; so excessive were the mischiefs that he brought upon them. For Albinus concealed his wickedness, and was careful that it might not be discovered to all men; but Gessius Florus, as though he bad been sent on purpose to show his crimes to every body, made a pompous ostentation of them to our nation, as never omitting any sort of violence, nor any unjust sort of punishment; for he was not to be moved by pity, and never was satisfied with any degree of gain that came in his way; nor had he any more regard to great than to small acquisitions, but became a partner with the robbers themselves. For a great many fell then into that practice without fear, as having him for their security, and depending on him, that he would save them harmless in their particular robberies; so that there were no bounds set to the nation's miseries; but the unhappy Jews, when they were not able to bear the devastations which the robbers made among them, were all under a necessity of leaving their own habitations, and of flying away, as hoping to dwell more easily any where else in the world among foreigners [than in their own country]. And what need I say any more upon this head? since it was this Florus who necessitated us to take up arms against the Romans, while we thought it better to be destroyed at once, than by little and little. Now this war began in the second year of the government of Florus, and the twelfth year of the reign of Nero. But then what actions we were forced to do, or what miseries we were enabled to suffer, may be accurately known by such as will peruse those books which I have written about the Jewish war.
2. I shall now, therefore, make an end here of my Antiquities; after the conclusion of which events, I began to write that account of the war; and these Antiquities contain what hath been delivered down to us from the original creation of man, until the twelfth year of the reign of Nero, as to what hath befallen the Jews, as well in Egypt as in Syria and in Palestine, and what we have suffered from the Assyrians and Babylonians, and what afflictions the Persians and Macedonians, and after them the Romans, have brought upon us; for I think I may say that I have composed this history with sufficient accuracy in all things. I have attempted to enumerate those high priests that we have had during the interval of two thousand years; I have also carried down the succession of our kings, and related their actions, and political administration, without [considerable] errors, as also the power of our monarchs; and all according to what is written in our sacred books; for this it was that I promised to do in the beginning of this history. And I am so bold as to say, now I have so completely perfected the work I proposed to myself to do, that no other person, whether he were a Jew or foreigner, had he ever so great an inclination to it, could so accurately deliver these accounts to the Greeks as is done in these books. For those of my own nation freely acknowledge that I far exceed them in the learning belonging to Jews; I have also taken a great deal of pains to obtain the learning of the Greeks, and understand the elements of the Greek language, although I have so long accustomed myself to speak our own tongue, that I cannot pronounce Greek with sufficient exactness; for our nation does not encourage those that learn the languages of many nations, and so adorn their discourses with the smoothness of their periods; because they look upon this sort of accomplishment as common, not only to all sorts of free-men, but to as many of the servants as please to learn them. But they give him the testimony of being a wise man who is fully acquainted with our laws, and is able to interpret their meaning; on which account, as there have been many who have done their endeavors with great patience to obtain this learning, there have yet hardly been so many as two or three that have succeeded therein, who were immediately well rewarded for their pains.
3. And now it will not be perhaps an invidious thing, if I treat briefly of my own family, and of the actions of my own life (28) while there are still living such as can either prove what I say to be false, or can attest that it is true; with which accounts I shall put an end to these Antiquities, which are contained in twenty books, and sixty thousand verses. And if God permit me, I will briefly run over this war (29), and to add what befell them further to that very day, the 13th of Domitian, or A.D. 03, is not, that I have observed, taken distinct notice of by any one; nor do we ever again, with what befell us therein to this very day, which is the thirteenth year of the reign of Caesar Domitian, and the fifty-sixth year of my own life. I have also an intention to write three books concerning our Jewish opinions about God and his essence, and about our laws; why, according to them, some things are permitted us to do, and others are prohibited.
ENDNOTE
(1) Here is some error in the copies, or mistake in Josephus; for the power of appointing high priests, alter Herod king of Chalcis was dead, and Agrippa, junior, was made king of Chalcis in his room, belonged to him; and he exercised the same all along till Jerusalem was destroyed, as Josephus elsewhere informs us, ch. 8. sect. , 11; ch. 9. sect. 1, 4, 6, 7.
(2) Josephus here uses the word monogene, an only begotten son, for no other than one best beloved, as does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 I mean where there were one or more sons besides, Genesis 22:2; Hebrew 11:17. See the note on B. I. ch. 13. sect. 1.
(3) It is here very remarkable, that the remains of Noah's ark were believed to he still in being in the days of Josephus. See the note on B. I. ch. 3. sect. 5.
(4) Josephus is very full and express in these three chapters, 3., 4., and 5., in observing how carefully Divine Providence preserved this Izates, king of Adiabene, and his sons, while he did what he thought was his bounden duty, notwithstanding the strongest political motives to the contrary.
(5) This further account of the benefactions of Izates and Helena to the Jerusalem Jews which Josephus here promises is, I think, no where performed by him in his present works. But of this terrible famine itself in Judea, take Dr. Hudson's note here: — "This ( says he ) is that famine foretold by Agabus, Acts 11:28, which happened when Claudius was consul the fourth time; and not that other which happened when Claudius was consul the second time, and Cesina was his colleague, as Scaliger says upon Eusebius, p. 174." Now when Josephus had said a little afterward, ch. 5. sect. 2, that "Tiberius Alexander succeeded Cuspius Fadus as procurator," he immediately subjoins, that" under these procurators there happened a great famine in Judea." Whence it is plain that this famine continued for many years, on account of its duration under these two procurators. Now Fadus was not sent into Judea till after the death of king Agrippa, i.e. towards the latter end of the 4th year of Claudius; so that this famine foretold by Agabus happened upon the 5th, 6th, and 7th years of Claudius, as says Valesius on Euseb. II. 12. Of this famine also, and queen Helena's supplies, and her monument, see Moses Churenensis, p. 144, 145, where it is observed in the notes that Pausanias mentions that her monument also.
(6) This privilege of wearing the tiara upright, or with the tip of the cone erect, is known to have been of old peculiar to great kings, from Xenophon and others, as Dr. Hudson observes here.
(7) This conduct of Izates is a sign that he was become either a Jew, or an Ebionite Christian, who indeed differed not much from proper Jews. See ch. 6. sect. 1. However, his supplications were heard, and he was providentially delivered from that imminent danger he was in.
(8) These pyramids or pillars, erected by Helena, queen of Adiabene, near Jerusalem, three in number, are mentioned by Eusebius, in his Eccles. Hist. B. II. ch. 12, for which Dr. Hudson refers us to Valesius's notes upon that place.--They are also mentioned by Pausanias, as hath been already noted, ch. 2. sect. 6. Reland guesses that that now called Absalom's Pillar may be one of them.
(9) This Theudas, who arose under Fadus the procurator, about A.D. 45 or 46, could not be that Thendas who arose in the days of the taxing, under Cyrenius, or about A.D. 7, Acts v. 36, 37. Who that earlier Theudas was, see the note on B. XVII. ch. 10. sect. 5.
(10) This and. many more tumults and seditions which arose at the Jewish festivals, in Josephus, illustrate the cautious procedure of the Jewish governors, when they said, Matthew 26:5, "Let us not take Jesus on the feast-day, lest there be an up roar among the people;" as Reland well observes on tins place. Josephus also takes notice of the same thing, Of the War, B. I. ch. 4. sect. 3.
(11) This constant passage of the Galileans through the country of Samaria, as they went to Judea and Jerusalem, illustrates several passages in the Gospels to the same purpose, as Dr. Hudson rightly observes. See Luke 17:11; John 4:4. See also Josephus in his own Life, sect. 52, where that journey is determined to three days.
(12) Our Savior had foretold that the Jews' rejection of his gospel would bring upon them, among other miseries, these three, which they themselves here show they expected would be the consequences of their present tumults and seditions: the utter subversion of their country, the conflagration of their temple, and the slavery of themselves, their wives, and children See Luke 21:6-24.
(13) This Simon, a friend of Felix, a Jew, born in Cyprus, though he pretended to be a magician, and seems to have been wicked enough, could hardly be that famous Simon the magician, in the Acts of the Apostles, 8:9, etc., as some are ready to suppose. This Simon mentioned in the Acts was not properly a Jew, but a Samaritan, of the town of Gittae, in the country of Samaria, as the Apostolical Constitutions, VI. 7, the Recognitions of Clement, II. 6, and Justin Martyr, himself born in the country of Samaria, Apology, I. 34, inform us. He was also the author, not of any ancient Jewish, but of the first Gentile heresies, as the forementioned authors assure us. So I suppose him a different person from the other. I mean this only upon the hypothesis that Josephus was not misinformed as to his being a Cypriot Jew; for otherwise the time, the name, the profession, and the wickedness of them both would strongly incline one to believe them the very same. As to that Drusilla, the sister of Agrippa, junior, as Josephus informs us here, and a Jewess, as St. Luke informs us, Acts 24:24, whom this Simon mentioned by Josephus persuaded to leave her former husband, Azizus, king of Emesa, a proselyte of justice, and to marry Felix, the heathen procurator of Judea, Tacitus, Hist. V. 9, supposes her to be a heathen; and the grand-daughter of Antonius and Cleopatra, contrary both to St. Luke and Josephus. Now Tacitus lived somewhat too remote, both as to time and place, to be compared with either of those Jewish writers, in a matter concerning the Jews in Judea in their own days, and concerning a sister of Agrippa, junior, with which Agrippa Josephus was himself so well acquainted. It is probable that Tacitus may say true, when he informs us that this Felix (who had in all three wives, or queens, as Suetonius in Claudius, sect. 28, assures us) did once marry such a grandchild of Antonius and Cleopatra; and finding the name of one of them to have been Drusilla, he mistook her for that other wife, whose name he did not know.
(14) This eruption of Vesuvius was one of the greatest we have in history. See Bianchini's curious and important observations on this Vesuvius, and its seven several great eruptions, with their remains vitrified, and still existing, in so many different strata under ground, till the diggers came to the antediluvian waters, with their proportionable interstices, implying the deluge to have been above two thousand five hundred years before the Christian era, according to our exactest chronology.
(15) This is now wanting.
(16) This also is now wanting.
(17) This duration of the reign of Claudius agrees with Dio, as Dr. Hudson here remarks; as he also remarks that Nero's name, which was at first L. Domitius Aenobarbus, after Claudius had adopted him was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 This Soleus as [own Life, sect. 11, as also] by Dio Cassius andTaeims, as Dr. Hudson informs us.
(18) This agrees with Josephus's frequent accounts elsewhere in his own Life, that Tibetans, and Taricheae, and Gamala were under this Agrippa, junior, till Justus, the son of Pistus, seized for the Jews, upon the breaking out of the war.
(19) This treacherous and barbarous murder of the good high priest Jonathan, by the contrivance of this wicked procurator, Felix, was the immediate occasion of the ensuing murders by the Sicarii or ruffians, and one great cause of the following horrid cruelties and miseries of the Jewish nation, as Josephus here supposes; whose excellent reflection on the gross wickedness of that nation, as the direct cause of their terrible destruction, is well worthy the attention of every Jewish and of every Christian reader. And since we are soon coming to the catalogue of the Jewish high priests, it may not be amiss, with Reland, to insert this Jonathan among them, and to transcribe his particular catalogue of the last twenty-eight high priests, taken out of Josephus, and begin with Ananelus, who was made by Herod the Great. See Antiq. B. XV. ch. 2. sect. 4, and the note there.
- Ananelus.
- Aristobulus.
- Jesus, the son of Fabus.
- Simon, the son of Boethus.
- Marthias, the son of Theophiltu.
- Joazar, the son of Boethus.
- Eleazar, the son of Boethus.
- Jesus, the son of Sic.
- [Annas, or] Ananus, the son of Seth.
- Ismael, the son of Fabus.
- Eleazar, the son of Ananus.
- Simon, the son of Camithus.
- Josephus Caiaphas, the son-in-law to Ananus.
- Jonathan, the son of Ananus.
- Theophilus, his brother, and son of Ananus.
- Simon, the son of Boethus.
- Matthias, the brother of Jonathan, and son of Ananus.
- Aljoneus.
- Josephus, the son of Camydus.
- Ananias, the son of Nebedeus.
- Jonathas.
- Ismael, the son of Fabi.
- Joseph Cabi, the son of Simon.
- Ananus, the son of Artanus.
- Jesus, the son of Damnetas.
- Jesus, the son of Gamaliel.
- Matthias, the son of Theophilus.
- Phannias, the son of Samuel.
As for Ananus and Joseph Caiaphas, here mentioned about the middle of this catalogue, they are no other than those Annas and Caiaphas so often mentioned in the four Gospels; and that Ananias, the son of Nebedeus, was that high priest before whom St. Paul pleaded his own cause, Acts 24.
(20) Of these Jewish impostors and false prophets, with many other circumstances and miseries of the Jews, till their utter destruction, foretold by our Savior, see Lit. Accompl. of Proph. p. 58-75. Of this Egyptian impostor, and the number of his followers, in Josephus, see Acts 21:38.
(21) The wickedness here was very peculiar and extraordinary, that the high priests should so oppress their brethren the priests, as to starve the poorest of them to death. See the like presently, ch. 9. sect. 2. Such fatal crimes are covetousness and tyranny in the clergy, as well as in the laity, in all ages.
(22) We have here one eminent example of Nero's mildness and goodness in his government towards the Jews, during the first five years of his reign, so famous in antiquity; we have perhaps another in Josephus's own Life, sect. 3; and a third, though of a very different nature here, in sect. 9, just before. However, both the generous acts of kindness were obtained of Nero by his queen Poppea, who was a religious lady, and perhaps privately a Jewish proselyte, and so were not owing entirely to Nero's own goodness.
(23) It hence evidently appears that Sadducees might be high priests in the days of Josephus, and that these Sadducees were usually very severe and inexorable judges, while the Pharisees were much milder, and more merciful, as appears by Reland's instances in his note on this place, and on Josephus's Life, sect. 31, and those taken from the New Testament, from Josephus himself, and from the Rabbins; nor do we meet with any Sadducees later than this high priest in all Josephus.
(24) Of this condemnation of James the Just, and its causes, as also that he did not die till long afterwards, see Prim. Christ. Revived, vol. III. ch. 43-46. The sanhedrim condemned our Savior, but could not put him to death without the approbation of the Roman procurator; nor could therefore Ananias and his sanhedrim do more here, since they never had Albinus's approbation for the putting this James to death.
(25) This Ananias was not the son of Nebedeus, as I take it, but he who was called Annas or Ananus the elder, the ninth in the catalogue, and who had been esteemed high priest for a long time; and, besides Caiaphas, his son-in-law, had five of his own sons high priests after him, which were those of numbers 11, 14, 15, 17, 24, in the foregoing catalogue. Nor ought we to pass slightly over what Josephus here says of Annas, or Ananias, that he was high priest a long time before his children were so; he was the son of Seth, and is set down first for high priest in the foregoing catalogue, under number 9. He was made by Quirinus, and continued till Ismael, the 10th in number, for about twenty-three years, which long duration of his high priesthood, joined to the successions of his son-in-law, and five children of his own, made him a sort of perpetual high priest, and was perhaps the occasion that former high priests kept their titles ever afterwards; for I believe it is hardly met with be fore him.
(26) This insolent petition of some of the Levites, to wear the sacerdotal garments when they sung hymns to God in the temple, was very probably owing to the great depression and contempt the haughty high priests had now brought their brethren the priests into; of which see ch. 8. sect. 8, and ch. 9, sect. 2.
(27) Of these cloisters of Solomon, see the description of the temple, ch. 13. They seem, by Josephus's words, to have been built from the bottom of the valley.
(28) See the Life at the beginning of the volume.
(29) What Josephus here declares his intention to do, if God permitted, to give the public again an abridgement of the Jewish War hear of it elsewhere, whether he performed what he now intended or not. Some of the reasons of this design of his might possibly be, his observation of the many errors he had been guilty of in the two first of those seven books of the War, which were written when he was comparatively young, and less acquainted with the Jewish antiquities than he now was, and in which abridgement we might have hoped to find those many passages which himself, as well as those several passages which others refer to, as written by him, but which are not extant in his present works. However, since many of his own references to what he had written elsewhere, as well as most of his own errors, belong to such early times as could not well come into this abridgement of the Jewish War; and since none of those that quote things not now extant in his works, including himself as well as others, ever cite any such abridgement; I am forced rather to suppose that he never did publish any such work at all; I mean, as distinct from his own Life, written by himself, for an appendix to these Antiquities, and this at least seven years after these Antiquities were finished. Nor indeed does it appear to me that Josephus ever published that other work here mentioned, as intended by him for the public also: I mean the three or four books concerning God and his essence, and concerning the Jewish laws; why, according to them, some things were permitted the Jews, and others prohibited; which last seems to be the same work which Josephus had also promised, if God permitted, at the conclusion of his preface to these Antiquities; nor do I suppose that he ever published any of them. The death of all his friends at court, Vespasian, Titus, and Domitian, and the coming of those he had no acquaintance with to the crown, I mean Nerva and Trajan, together with his removal from Rome to Judea, with what followed it, might easily interrupt such his intentions, and prevent his publication of those works.
출처 : https://www.earlyjewishwritings.com/text/josephus/ant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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