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6. 10.

2024.06.09.(주일예배).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창세기 18:1~8, 19:16~23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세기 18:1~8)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창세기 19:16~23)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신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19장으로 이어지는 일명 이 소돔과 고모라 심판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누가 하나님 앞에서 죽는가를 보여주는 구원과 심판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심판하시는 그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좀 어렵긴 하지만 하나님의 의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옳다라고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겁니다. 이 사람은 안 된다! 이렇게 판단하시는 겁니다. 그게 그 사람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구원과 심판의 근거가 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의롭다고 하십니까? 누구를 옳다고 하시죠? 지금까지 배운 바에 의하면 그 의를 얻는 유일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라고 그랬어요. 여러분이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셔야 돼요. 그냥 내가 교회 다니니까 구원받겠지! 우리 집안이 원래 기독교 집안이니까 나도 당연히 부모님 따라서 구원받겠지! 난 어렸을 때 교회 다닌 적이 있었으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구원받겠지! 다 우리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돼요. 창세기 15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여러분! 이 상황은 아브람이 그렇게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약속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집안에서 길리운 엘리에셀이나 상속자로 하시죠? 그랬던 상황에서 하나님이 마치 아브람의 손을 잡고 끌고 나가듯이 밤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너의 자손이 이렇게 별처럼 많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게 믿어졌어요. 그게 믿어진 것을 하나님도 아셨어요. 그러니까 그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하나님은 무엇으로 여기셨어요? 의롭다! 너 옳다! 됐다! 이렇게 여기셨다라고 나오는 거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과 롯은 살아납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살았고 반면에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은 불과 유황 심판을 받고 다 멸망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멸망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단순하죠.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쁜 일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 너 의롭다! 그리고 살려주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의문이 생겨납니다. 과연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느냐 하는 것이에요. 어떻습니까?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를 여러분이 볼 때 과연 그들이 하나님이 옳다 의롭다라고 여기실 정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기 어렵죠? 엘리에셀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16장에서는 부부가 결탁하여 여종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얻어내서 하나님 이스마엘로 하시죠! 뭐 우리한테 그런 것을 기대하십니까? 왜 그런 일을 일으키시려고 합니까라고 했던 사람이 아브람과 사래잖아요. 근데 과연 이들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갖고 있었느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느냐! 게다가 롯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롯은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람과의 다툼을 통해서 자기의 눈에 보이는 그러한 육신의 땅 욕망의 땅을 선택해서 들어갔던 사람이 롯이에요. 하나님이 머물라고 하는 그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약속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그 멸망하는 땅으로 들어간 사람이 롯인데, 하나님은 왜 그를 옳다고 여기시느냐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롯을 하나님 말씀을 믿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구원해 주시느냐 하는 거죠. 도대체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구원의 모습을 허락해 주시고 또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또 다른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기 원하시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다닌다고 다 구원받을 수 없어요. 맞죠? 교회 다닌다고 무조건적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또 믿음의 삶을 산다고 다 똑같은 구원 받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이런 구원의 모습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구원의 모습이 있어요. 우리는 거기에 신앙의 긴장감을 가지셔야 됩니다.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시는 그 바울 사도의 권면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무엇을 알기를 원하시는 걸까? 창세기 18장에서 19장에 이어지는 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롯에게 직접 찾아가신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롯의 경우에는 두 천사가 찾아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한테도 나타나셨었고, 또 바벨탑 사건에서도 내려오시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아브라함한테 음성으로 약속도 주셨어요. 그런데 오늘 1819장처럼 마치 육신을 입은 것처럼 인간들 앞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 본문을 우리는 굉장히 낯설게 읽으셔야 합니다. 그냥 뭐 찾아왔나 보구나! 오셔서 그냥 심판을 했나 보구나! 그 정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을 마치 처음 읽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읽으면서 도대체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잘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1절에서 8절까지는 아브라함에 관한 것인데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찾아오게 됩니다. 191절에서 3절은 롯과 관련된 건데 두 명의 천사가 찾아오는 차이점을 갖고 있어요.

아브라함 (18) (19)
사람 셋 (2) 두 천사 (1)
마므레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 (1) 소돔과 고모라 (1)
장막 문 (1) 소돔 성문 (1)
날이 뜨거울 때에 (1) 저녁 때에 (1)

 

이것을 도표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람 셋이 찾아갔어요. 롯에게는 두 천사가 찾아갑니다. 장소가 어디였느냐? 마무레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일상생활을 하는 그런 장소예요. 롯의 경우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찾아갑니다. 멸망 받을 도시죠. 더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냐면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장막문에서 이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늘 문 열고 닫고 하는 그런 장막이에요. 들락날락하는 장소, 일상의 장소입니다. 롯의 경우는 소돔 성문에서 다소 좀 도시의 큰 문 앞에서 천사를 맞이하게 되죠. 시간적 배경은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대낮에 만납니다. 날이 뜨거울 때 요즘 날이 굉장히 뜨거운데 한참 대낮에 일도 할 수 없는 쉬어야만 되는 그런 시간대에 이 세 사람의 존재가 등장하게 됩니다. 롯의 경우에는 해가 저물어가는 약간 상징적 의미도 있죠. 하루에 해가 저물어가는 그때 두 명의 천사가 등장하게 돼요.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 가지 면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찾아온 존재가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찾아갔고 롯에게는 두 명의 천사가 찾아갔습니다. 특별히 18장에 보면 1절의 말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무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창세기 18:1)


18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18장이 끝나는 마지막 33절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창세기 18:33)

 

1절과 33절에서 어떤 내용이 등장하고 있어요? 누가 오셨다고 그래요? 여호와께서 오셨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대화를 끝내시고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문학적으로 말하면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라는 게 있어요. 더 쉽게 말하면 햄버거, 샌드위치 양쪽에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안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죠.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 그 가운데 있는 내용이 세 사람으로 됐다가 두 사람으로 됐다가 헷갈리고 힘들고 혼동스러울지라도 그분은 바로 누구다!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가 있어요. 3명이 2명이 됐다가 2명이 1명이 됐다가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온 존재들은 2절에 보면 세 사람이라고 표현돼 있지만 여호와의 나타나심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존재 중에 적어도 하나 혹은 세 존재 모두가 여호와를 의미한다라고 우리에게 지금 알려주고 있는 거죠. 아주 신비로운 방식입니다. 본문 중에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지칭할 때에 3절에 보면 단수로 표현하고 있고요. 그 외에 대부분에서 복수로 표현하고 있어요. 182절 보시겠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세기 18:2)

 

몇 명을 봤다고요? 세 명. 복수입니다.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을 본 거예요. 그런데 그다음에 3절에 가보면 이런 표현이 있어요.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창세기 18:3)

 

여기는 내 주여! 단수죠? 분명히 복수로 영접을 했는데 이야기를 나눌 때 단수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이렇게 말을 해요. 반면에 19장에서 롯에게 방문한 존재가 두 천사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롯 역시도 그들을 부를 때에 단수와 복수를 혼용하고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데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노라.” (창세기 19:18~19)

 

여러분! 여기 처음에 18절에 보면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라고 복수로 말하면서 실제로 대화의 내용은 내 주여! 그러면서 대상이나 동사가 다 단수로 사용이 돼 있어요. 참 신비로운 방식이죠. 성경이 멜기세덱이라든가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표현을 쓴다든가 여러 가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소개하고 계시는데, 아브라함과 롯을 만나는 이 장면에서 굉장히 신비한 더욱더 신비한 마치도 기독교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듯한 진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만나셨습니까? 어떤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아브라함처럼 만나셨습니까? 롯처럼 만나셨습니까?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점점 어려워지죠. 여하튼 오늘 본문이 놀라운 신비의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아브라함과 롯이 머물던 장소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롯이 각각 머물던 장소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람과 롯 사이에 재산권 분쟁이 일어났어요. 가난하면 싸우지 않는데 서로 많으니까 많은 사람들끼리 싸우게 돼 있어요. 누가 더 이익을 차지할까! 도무지 엄청나게 많이 불어난 가축들 때문에 롯의 목자들과 아브람의 목자들이 한 땅에 공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가라.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갈게. 그래서 약속을 받은 아브람은 헤브론 마무레 상수리 숲으로 이동해 거기서 단을 쌓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마치 애굽의 그 풍요로운 땅처럼 판단이 되어서 동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롯은 욕망의 땅으로 자기가 찾아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장소가 중요하죠.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3:18)

 

이에 롯의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여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0~13)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1810절 이하에 보면 아들의 출생을 다시 한번 알려주세요. 아들이 출생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소돔의 멸망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역사를 알려주시면서 동시에 사탄의 나라가 멸망할 것을 직접 찾아오셔서 설명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이제 간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건 참으로 놀라운 변화예요. 하나님과 대화를 해요. 마치도 거래를 하듯이 하나님 그렇게 소돔 고모라 함부로 멸망시키는 거 하나님 속성에 맞는 거예요? 아니 의인을 멸하실 수 없는 건데 거기 단 50명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그래 그럼 네 말대로 할게! 30명이면요. 그래도 네 말대로 하고, 아니 10명이라도 네 말대로 할게! 아브라함이 그런 존재로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와 설명해 주시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로 인하여 그와 같은 놀라운 존재로 변화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땅으로 들어가 그 땅에 머물렀던 롯은 어떻게 되었는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그 자리에 내려놓고 겨우 몸만 빠져나오는 긴박한 탈출을 하게 되죠. 물론 이 역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하신 일이에요. 우리 1929절 한번 볼까요?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그렇지만 성경을 읽어보시면 롯과도 하나님은 친절하게 대화를 하세요. 찾아가셔서 보호해 주시고, 머뭇거리는 그의 손을 붙잡고 끌고 나오시고요. 또 소알에 머물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고 롯이 거기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까지 다 해주세요. 이것을 단순히 심판의 이야기로만 볼 수 있는가! 단순히 누군가는 천국 가고 누군가는 지옥 가는 이야기로만 읽어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지금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 둘 다 믿음의 백성들입니다. 둘 다 약속의 자손들이에요. 언약의 당사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와 구원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이건 아주 심각한 도전입니다. 그 사람이 그냥 남들이 볼 때 굉장히 지루하고 답답하고 뭐 이런 게 될까 하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단을 쌓는 이 현대인들에게 굉장히 낯설고 우스운 그런 자리에 있느냐! 아니면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 되어서 끝까지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그 자리에 있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결정하고 구원의 최종적 모습을 결정한다는 거죠.

 

여러분! 아브라함은 지금 어떤 사람이 됩니까? 누군가를 기도하여서 살리는 사람이 돼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살려내는 생명의 주인공으로 변화되고 있어요.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은 그냥 믿음은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존재는 알고 있으나 일평생을 자기 몸뚱어리를 위해서 육신의 땅에 욕망의 땅에 살다가 겨우 자기 한 몸만 구출해내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여러분도 살고 누군가를 살려내시는 그런 자리에 그런 일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두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구에게는 직접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뜻을 직접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믿으세요? 하나님과 친구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뭐냐 하면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찾아오세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휴식을 하시고 그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또 그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을 마치 친구가 수다를 떨듯이 그 다른 친구에게 다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성경에서 놀라운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하나도 안 숨기겠다는 거예요. 그 엄청난 사건을 그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그 도를 내가 이제부터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도 숨기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사야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사야 41:8)

 

얼마나 따뜻한 말입니까?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불러다가 노예처럼 군림하면서 이용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에요. 이 땅에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친구처럼 여기시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이런 말을 하죠.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23)

 

이 사람이 의롭다라고 하는 말과 이 사람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는 말을 같이 두고 있어요. 이 사람이 이 땅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린다라는 말과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다라는 말을 야고보서 저자는 하나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야고보서를 로마서와 대립되는 지푸라기 복음으로 보지 말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저 그냥 구원 받습니까?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받아놓고 이 땅에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과 사귀며 산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자기 자아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생각과 신념과 사고방식과 세상의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것을 지배하고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을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이 땅을 겨우 살다가 구원받는 사람 되지 마시고 이미 구원받으셨으니까 영적인 존재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친한 친구 관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숨기시지 않는대요. 친구인 아브라함에게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대요.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기도하셔야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크고 비밀한 것을 여러분에게 다 알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내 문제 해결하는 것으로 내 가족들 좀 잘 사는 것으로 건강 좀 유지하고 연장시키는 것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계획까지도 알게 되는 그 신앙의 깊이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세 사람, 롯에게는 두 천사가 나타나신 이 여호와께서 주로 이야기를 보면 복수 호칭으로 사용되죠. 반면에 아브라함은 183절에서 딱 한 번 단수로 하나님 나타나시고, 롯의 경우는 1919절에서 딱 한 번 단수로 호칭이 사용이 됩니다.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단수입니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데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창세기 18:3)

 

다음 롯의 경우입니다.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창세기 19:19)


아브라함과 롯은 각각 복수로 찾아온 존재들을 맞이한 게 확실해요. 그런데 딱 한 번씩만 주님이라는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에 주목하셔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들 이렇게 말 안 해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그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 하나님이시여!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냥 단수로 말을 해요. 신비죠. 이게 어느 경우에만 해당하느냐! 공교롭게도 은혜를 입다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될 때만 하나님이 이 두 사람에게 단수로 다가오십니다. 은혜를 입었어요. 여러분! 이 은혜를 입었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아주 독특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가 뭐냐는 거예요. 이게 영어로 말하면 이런 표현입니다.

 

“If I find the grace in your eyes.”


이게 직역하면 만약 내가 당신의 눈 속에서 은혜를 발견한다면다시, 만약 부족한 제가 마땅히 믿음 없어서 버림받아야 되고, 마땅히 하나님은 저를 찾아와서는 안 되는 그런 미물 같은 존재이지만 만약 하나님 당신의 눈 속에서 내가 은혜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 좀 있다 가세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눈 속에 나에 대한 은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이 절망의 상황에서 제발 저 산으로 제가 원하는 곳.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를 저 산에 머물도록 해주세요라고 하는 그 은혜에 대한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단수로 나에게 찾아오시게 된다라고 하는 일종의 문학 장치다라고 신학자들이 말합니다. 이건 다 성도들이 경험하는 거예요. 신비로운 주제죠.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알려주실 때 단수로 등장하시고 그래서 단수로 사용된 곳에서는 각각 자신에게 찾아온 존재가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임을 그들이 깨달았다라고 하는 일종의 신학적 장치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83절에서 세 사람을 보고 영접했을 때이고 롯의 경우는 1919절에서 소돔을 탈출하는 중에 하나님임을 깨달았다는 것이 차이점이에요.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을 만나시려고 합니까? 지금입니까? 아니면 죽기 직전입니까? 매일매일 만나시겠습니까? 아니면 매일매일 내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 인생이 끝났구나. 이제는 그분의 품에 가야겠구나. 바로 그때입니까? 여러분! 언제입니까? 언제 하나님을 만나셔야겠어요? 매일매일 일주일에 한번 교회 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나의 일상의 현장에서 마치도 아브라함이 늘 거하던 장막 문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여러분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일터 오고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롯처럼 살지 마세요. 겨우 자기 몸 살리기 위해서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가는 그런 인생이 되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아 아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친밀하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약속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까지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신앙에 이런 맛이 있어야 돼요. 종교 생활하시면 안 돼요. 힘들어요. 피곤하다니까요. 매일매일같이 하나님을 만나세요. 일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친구처럼 친밀하게 만나는 자리,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소통하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 하나님 나라의 크고 비밀한 것들을 깨닫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