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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9. 3.

2024.06.23.(주일예배).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세기 18:9~15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세기 18:9~1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몇 살 때 부름을 받았나요? 75세에 부름을 받았어요. 적은 나이가 아니죠? 고령의 나이입니다. 75세에 부름을 받고 이때부터 99살이 될 때까지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세 번 받습니다. 더군다나 두 번의 약속은 그의 나이가 99세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24년 동안이나 약속 또 약속 그리고 또 약속이 계속되었을 뿐 그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창세기 15장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창세기 15:4) 네 몸에서 나오는 자식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때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다라고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쪼개짐의 언약이 등장하고 있어요. 짐승을 쪼개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횃불이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그래 네가 나의 언약의 파트너이다. 하지만 내가 다 감당할 거야라고 하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때 주십니다.

 

두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이때 나이가 86세입니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 약속이 17장에 주어지게 되는데 13년이 지난 그의 나이 99세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똑같은 약속을 주셨어요. 1715절 이하죠. 어떤 약속입니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다른 여인이 아니라 하갈이 아니라 너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약속을 또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믿었습니까? 웃었어요. 어떻게 했다고요? 아브라함이 웃었다니까요. 그리고 나서 곧바로 할례 언약이 또 성사가 됩니다. 남성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 언약이죠. 그래도 너는 나와 역시 파트너야. 네 몸에 이걸 새기고 마음의 할례를 받도록 하는 할례의 언약을 이때 두 번째로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은 본문 18장으로서 이제 사람의 몸으로 나그네와 손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여호와께서 10절 말씀에 보니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똑같은 약속입니다. 거듭거듭 약속을 주셨어요. 이 약속을 듣고 이번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내 사라가 웃었어요. 남편이 웃으니까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 사라도 덩달아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아브라함과 상의하시면서 결정하시게 되죠. 이것을 도표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약속 (15)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15:4) 아브람은 약속을 믿었다. 쪼개짐의 언약
두 번째 약속 (17)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17:15~16) 아브라함은 웃었다. 할례 언약
세 번째 약속 (18)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8:10) 사라가 웃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첫 번째 약속 15, 두 번째 17, 세 번째 18, 약속은 똑같아요. 네 몸에서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상속자가 될 것이다. 첫 번째 약속 때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어요. 두 번째는요. 아브라함이 웃어버려요. 세 번째는 이번에 사라가 웃어요. 쪼개짐의 언약과 할례 언약과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반응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되죠. 중요한 것은 약속 때마다 보여주었던 아브라함의 반응이에요.

 

첫 번째 약속할 때 아브라함이 아들 주실 것을 어떻게 했다고요? 믿었단 말이에요. 이거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그것을 또 의로 여겨주셨다고 그랬어요. 이걸 믿어? 알았어! 의로워! 의로운 걸로 여겨줄게. 두 번째 약속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을 듣고 웃었습니다. 이 믿음이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도대체 하나님을 처음에 믿었던 그 믿음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창세기 17:17)

 

속으로 웃어버려요. 하나님이라도 그렇지 뭐!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시나! 99세에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비현실적이죠.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현실적이에요? 비현실적이에요? 비현실적이에요. 가능한 사건이에요? 불가능한 사건이에요? 누가 보더라도 이건 불가능한 사건이에요. 저라도 웃었을 거예요. 여러분들이라도 웃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믿음은 어디로 갔느냐 하는 거예요.

 

세 번째 약속에서 아내 사라가 오늘 본문에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사실상 사라의 현실 진단도 정확하다고 볼 수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세기 18:12)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어떤 웃음이겠어요? 즐거움의 웃음이 아니잖아요. 이건 기대감과 어떤 소망의 웃음이 아니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아무리 하나님이라고도 그렇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 우리 남편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정확한 합리적 현실적 진단입니다. 그러자 더 중요한 게 뭐냐? 이러한 인간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에요. 여러분! 이게 복음이에요. 인간의 반응이 복음이 아니에요. 정확히 아셔야 돼요.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반응이 더 중요한 거예요! 그게 복음이에요. 오늘 14절 말씀 한번 읽어볼까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세기 18:14)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여호와께서는 사라의 웃음을 당연하게 여긴 듯이 보여요. 웃어? 아브라함? 웃어? 사라? 너 웃어? 너 진짜 그럴 줄 몰랐는데! 관둬 그럼! 이게 우리 반응인 거죠? 너 그것밖에 안 돼? 나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잖아요. 당연하듯이 마치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시는 걸 보게 되는 거예요. 화내거나 짜증 내시질 않아요? 너 그것밖에 안 돼? 이런 말이 없어요.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웃지 않았다라고 하자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세기 18:15) 이렇게 못을 박아버려요. 거짓말은 하지 말지. 속으로 웃어놓고 또 하나님이 웃었다고 그러니까 난 안 웃었어요. 우리하고 똑같죠? 그렇게 살아와 놓고 그렇게 생각해서 기도 안 해놓고, 기도했다고!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막 그러잖아요. 아니야 사라 너 웃었잖아!

 

이렇게 두 번째 약속에서는 남편 아브라함의 불신의 웃음이 등장하고 있고, 세 번째 약속에서는 마치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듯이 아내 사라의 불신의 웃음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서 확인되고 있죠. 웃음이 포인트입니다. ‘웃음’, ‘비웃음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기 전에 과연 꼭 필요했던 건 뭘까? 아니 약속하고 바로 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기도하면 기도하는 대로 다 들으시고 다니엘 같은 데 읽어보면 이미 결제가 끝나거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오래 기다려요? 24년이라는 기간을! 도대체 뭐가 필요한 거예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일하시기 전에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인간의 불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대가 아니에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기대감이 아니에요. 실망과 웃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요! 불가능해요 하나님! 하나님이라도 불가능해요! 이것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약속에서 주어졌던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게 과연 뭐냐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로마서까지 가거든요. 믿었었는데 그 믿음을 그냥 의로 여겨주신 거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도 100%의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아직도 가능성이 남아있는 자신에 근거한 믿음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누구에게 근거한? 나한테 근거한!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남아있어! 그래 그거 믿어요. 그러면 일어날 수도 있겠네요. 나 아직 살아있으니까! 나 아직 능력 조금 있으니까! 그런 일도 일어나겠네요! 라고 하는 믿음이었다라고 하는 거죠. 이제 자신의 능력과 상황에 대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죠. 그때 가졌던 믿음마저 사라지고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웃음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거죠. 사라에게도 마찬가지고.

 

이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어떤 권사님이 자꾸 떠올라요. 권사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고쳐주실 거예요.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권사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목사님 몰라서 그러신다고!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어차피 내가 기도해봤자 그 기도대로 안 하시고 자기 마음대로 하신다는 거예요. 그때는 얼마나 인간적으로 섭섭했던지 그래도 목사가 말을 하면 그냥 앞에서는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시던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게 참 깊은 믿음이었다. 아버지께서 마음대로 하시는 게 맞아요. 그래야 되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거기에 단 1%의 가능성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고 사람의 일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의 세계가 뭔가? 도대체 말씀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그 세계에 역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죠. 참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역설의 진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불신이다. 인간의 웃음이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 불신을 구조적으로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거는 당연히 인간의 믿음이죠. 인간의 신뢰가 없다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믿어지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야 된다는 거죠. 첫 번째 약속에서 어느 정도 아브라함이 믿음을 보였어요.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가능성이 더해진 믿음이었다. 복음은 이 부분에서 훼손이 되는 거예요. 아예 믿지 않는 사람에 의해서 복음이 훼손됩니까?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훼손됩니까? 여러분! 그럴 리는 없어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초대교회 역사에도 보고 신약의 역사에도 보면 반드시 이렇게 섞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어떤 경험이나 지혜나 지식을 섞어버리는 게 문제가 됩니다. 그런 믿음이었다고 오늘 성경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자신의 신체 능력, 즉 혈과 육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나마 믿어졌었다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경우 이런 공식이 성립하는 거죠.

 

믿음 = 하나님의 말씀 + 자신의 가능성?


하나님의 말씀 더하기 자신의 가능성? 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질 않을까! 왜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능력 있는 일들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지 않을까! 바로 저 부분! 자신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부분이예요. 자신의 능력! 자신에 대한 가능성이 사라지게 될 때 그나마 있었던 말씀에 대한 믿음마저도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성도들 가운데 많이 일어나요. 처음에 하나님 말씀을 뜨겁게 믿어요. 그러다가 자신의 가능성을 보태서 뭔가를 시도해보다가 거기서 실패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그 말씀에 대한 믿음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이예요.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실체를 알게 되죠.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믿음은 바로 불신의 믿음이다. 따라서 해볼까요? 불신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게 웬 또 선문선답이야? 또 이 말씀을 따라 읽으시고 지금부터 주무시면 끝나고 나서 오늘 담임 목사님께서 불신이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전 끝나는 거예요. 무엇을 불신해야 합니까?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불신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불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에요. 주님 나는 나를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나 다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게 믿음이에요. 반대로 말하면 나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나에게 하나님만이 전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나에게 생명이 됩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자신을 부인한다는 거는 어려운 일이에요. 내 의지로도 어려운 일이에요. 왜 내 삶에 가능성이 남아있는데, 이걸 어떻게 부정해!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걸 부정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야말로 자신이 죽게 되자 생물학적으로 볼 때도 나이로 볼 때도 이제 나는 끝났구나라고 했을 때 그동안 자기가 믿었던 말씀까지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불신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죠.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기서 정확히 를 빼내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방해하는 건 바로 나예요.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내 삶에 일어나지 않는가! 내 가정에 왜 역사하지 않는가! 내 교회 가운데 왜 역사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 그 나가 또 모여서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죠.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없어요. 내가 살아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불신의 대상일 뿐이고 웃음의 대상일 뿐이고 실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말씀 들으면서 웃는 분 없나요? 목사님 몰라서 그렇다고!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고! 아무리 성경이 그렇게 말을 해도 목사님! 내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러신 분 없나요? 그게 내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도 자기가 답을 가지고 기도를 해요. 그러니까 기도를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자기 답이 있어요. 자기 신념이 있어요. 하나님은 그래서 이렇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신념이지! 그러니까 그 응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또 다 사탄이 돼버리는 거예요. ? 나는 그렇게 응답을 받았는데! 말씀을 따라가지 않는 거예요. 언약의 세계에서는 나의 죽음을 인정해야 언약이 현실이 됩니다.

 

기도가 뭐예요? 나를 죽이는 시간이라니까요. 기도는 나를 활성화시키는 시간이 아니에요. 말씀 앞에 선다는 건 뭐예요? 나의 말을 다 죽인다는 뜻이에요. 세상의 모든 언어를 하나님의 언어 앞에서 죽여버린다는 뜻이에요. 그게 언약의 세계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언약의 세계는 그저 웃음의 세계로 남을 뿐이에요. 노아가 방주 만들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다 비웃었을 겁니다. 그죠?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당할 때 그 롯의 사위들이 어떻게 했어요? 농담으로 여겼더라. 원문으로 보면 웃었다는 뜻이에요. 큰 웃음을 쳤다는 뜻이예요. 무슨 소돔이 망해! 이렇게 화려한 도시가! 그 세상의 웃음으로부터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정확하게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어요. 그러나 다른 편의 강도는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죠.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조차도 복음을 미련한 것이다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했어요. 세상의 웃음을 기준으로 하여 구원과 멸망이 구분되고 결정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라의 웃음은 사탄의 웃음이죠. 창세기 1장에서부터 시작된 그 사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도 시작부터 쫓아다녔던 그 사탄! 십자가에서 뭘 이루겠느냐고 조롱했던 그 사탄의 웃음이 오늘 사라의 얼굴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냐고! 여러분!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상 사람은 몰라도 우리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어야겠죠. 왜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사람이 말한 게 아니고 사람이 지어낸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게 잘 믿어지지 않아도 웃지 말고 비웃지 말고 믿게 해달라고 믿어지도록 해달라고 내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남는가? 아까 공식에서 봤죠. 하나님의 말씀만 남아요. 말씀의 세계는 그래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세계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할 존재가 필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시는 거예요. 성경은 치밀하게 전능한 하나님인간의 웃음을 구조적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웃기 전에 하나님께서 전능한 하나님으로 자기를 소개하셨어요. 그리고 사라가 웃은 후에도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어요. 웃음과 웃음 사이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난 거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 웃음들을 감싸고 있는 구조입니다. 한번 볼까요?

 

전능한 하나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창세기 17:1)
웃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이르되 창세기 17:1)
할례 언약 (창세기 17:26~27)
웃음 (사라가 웃고 이르되 창세기 18:13)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세기 1814)

 

 

웃음이 등장해요. 또 웃음이에요. 그 시작과 마지막을 뭐가 감싸고 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감싸고 있어요. 그리고 그 중앙에 십자가를 상징하는 할례 언약이 등장합니다. 안전하죠.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신하고 비웃었지만 심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그 불신과 웃음을 덮어버리셨어요. 덮어놓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 아버지의 은혜,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웃음의 세계를 살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앞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답하지 못했던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 질문하셨는데 이제 그 질문에 답하게 될 거예요. 24년 동안이나 약속, 약속, 그리고 또 약속을 주신 것은 결국에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아니요!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시원한 답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것이죠. 이제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질문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해?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어? 라고 질문하십니다. 여러분이 답하셔야 됩니다. 이 질문을 깊이 묵상하시고 믿음으로 답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