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주일예배). 환대인가? 폭력인가? 창세기 18:1~8, 19:1~3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세기 18:1~8)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창세기 19:1~3)
창세기 14장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때 갑자기 등장한 한 왕이 있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죠. 아브라함이 고대 근동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거기에서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한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혈통이 없어요. 연고가 없어요. 어디 소속이 없어요. 갑자기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떡을 주고 또 아브라함한테 십일조를 받고 또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하고 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한 왕이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의의 왕이죠. 평강의 왕이고 참으로 신비한 왕인데 성경은 창세기 14장에서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얘기했어요. 모세가 앞으로 등장하고 모세를 통해서 제사법이 형성이 되고 제사장 등장하기 훨씬 전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이 사람을 얘기하냐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이렇게 선언을 했어요. 신약의 히브리서가 이 신비로운 존재인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 했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밝히고 있어요. 5장, 6장, 7장, 계속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5:5~6)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이어지는 6장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6:19~20)
계속 멜기세덱의 이야기예요. 이어지는 7장 보시겠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브리서 7:1~3)
참으로 신비한 인물이죠.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다는 표현을 히브리서 저자가 하고 있어요. 이분께서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렇게 성경이 창세기 14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그런 성육신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서 하나님의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셨어요. 하나님은 이런 모습이다. 이와 같은 분이시다라고 하는 것을 신비로운 방식으로 알려주셨어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잖아요. 보았지만 다양하게 경험을 이야기하니까 어떻게 한 특정한 형식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그 정수를 소개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잠깐 보여준 거예요. 잠깐 나타나서 아브라함 앞에 나 이런 존재야라고 보여주고 사라지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일도 나타나셨어요.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또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고 또 그 자손을 통해 찬송받고 영광 받으시는 그러한 사역을 할 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잠깐 보여주시고 사라지신 거예요.
그런 다음에 창세기 18장에 와서 다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세 명의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알려주셨죠. 너의 아내 사라가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또 다른 소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소돔과 고모라성이 망할 것이다. 심판을 알려주세요. 한쪽은 흥할 것이지만 한쪽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 한쪽으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거지만 반드시 한쪽에서는 죽음의 역사, 멸망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인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그 계획과 뜻을 알려주셨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도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요. 맞죠? 물론 우리가 오래 살고 우리가 잘 되고, 우리 자녀들이 잘 되고, 우리 집안이 잘 되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관심이지만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을 뛰어넘어 부흥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회복되고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으시고 가셔야 돼요.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교회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수십 년 전의 신앙생활과 지금의 신앙생활이 질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확장시키실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악의 세력은 아무리 거대해 보이고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 같고, 돈이 이기고 권력이 이기고 모든 것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도 여러분 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실 때 또다시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에게 알리실 때 그 사건과 19장에 롯을 방문하면서 이제 소돔 성 즉 사탄의 나라는 멸망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해 주시러 방문하셨을 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에피소드가 바로 나그네의 방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돔 성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빠져 자기의 나라를 형성하고 자기의 세계를 구축할 때에 멸망 직전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모르고 살아갈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와 손님의 모습으로 방문하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오신지 누가 알겠어요? 이 나그네를 대하는 방식, 즉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구분 짓는 결정적 기준점이 됩니다.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 즉 아브라함이 늘 머물렀던 그 일상의 삶을 반복했던 그 장소에 낯선 사람 세 명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 사람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대접을 해요.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에 보면 좀 지나치게 마치 큰 왕이라도 행차한 것처럼 급하게 뛰어나가서 무릎을 꿇고 제발 우리 집에서 쉬어가세요. 물을 떠다 줄 테니까 발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쉬시면서 음식도 드시라고 부탁을 합니다. 또한 떡을 하고 송아지도 잡습니다. 송아지 아무나 잡는 거 아니에요! 근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너무 오버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이 사람이 뭐라고 그렇게 뛰어나가서 급하게 대접을 하냐는 거예요. 소돔 성을 방문했던 이 두 천사를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 역시도 19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 정도는 아니지만 대단히 극진하게 대접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낯선 사람을 재워주는 거니까 어렵잖아요. 그런데 롯은 식탁도 마련하고 그 두 천사를 집에 재워줍니다. 지나치지 않나 하는 거예요. 어때요? 여러분 생각에 여러분 같으면 하시겠어요?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가 이러한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부여했어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1~2)
여기 말씀에 보면 형제 사랑하기 하고 손님 대접하는 것, 천사 대접하는 것이 다 같은 맥락에 있죠? 형제 사랑하는 것, 쉽게 얘기하면 내 형제, 내 가족, 내 이웃, 가까운 사람들 사랑하는 거하고 손님 대접하는 것, 즉 손님은 문맥상 보면 이방인인 거예요. 형제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원수일 수도 있고 잘못하면 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손님 대접하기를 절대로 잊지 말아라. 그러면서 이로써 뭐 하는 중에? 부지 중에! 무슨 말이에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잖아요.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서 같이 오신 것 같아! 이렇게 깨닫고 대접한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형제와 나그네를 손님을 대접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누구를 대접한 거예요? 천사를! 신적 존재를! 하나님을 대접한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죠.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이 처음부터 하나님인 줄 알아보고 섬겼다라고 말하지 않죠. 처음에는 몰랐어요. 몰랐지만 이 낯선 손님들을 대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천사들을 하나님을 대접한 것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반면에 소돔 성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아브라함이나 롯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라요.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세기 19:4~5)
여러분 어떤 상황인지 조금 감이 오세요? 롯! 그 두 남자들 끌어내!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 무슨 말이에요? 이 정황이 다소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이 단어 ‘상관하리라’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어 ‘야다’라고 하는 말인데 ‘알다’라는 뜻이에요. 아주 평범한 단어입니다. ‘I know him.’ ‘나는 그를 안다.’ ‘ㅣknow you.’ ‘난 너를 안다.’ 그런 말이에요. ‘안다’ ‘이해한다’ ‘인식하다’라고 하는 단순한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성적인 관계를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됐어요. 창세기 4장 1절과 연결되는데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יָדַע)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그의 아내 하와와 아담이 어떻게 했어요? 동침을 했어요. 그것이 히브리어의 단어로 뭐냐? 그게 바로 ‘야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무슨 뜻이에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그 여자는 남자를 모르는 여자예요. 이 뜻이 이해되세요? 무슨 뜻이에요? 성적 경험이 없다는 뜻이죠.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다 이런 의미가 통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노소를 막론하고 몰려와서 이 남자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 한번 알아보겠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겠어요?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겠어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사기 19장에 가보면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사사기 19:22)
레위 지파 한 사람의 첩이 레위 지파가 섞인 모든 동족의 한 지파로부터 윤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큰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에 정황에서 이 ‘야다’라고 하는 단어는 바로 남색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성경에서 보면 ‘야다’라고 하는 말 ‘알다’라고 하는 말이 묘하게 인간이 타락했을 때 뱀의 유혹을 받을 때에 ‘알다’ ‘알까 하노라’ 그것이 걱정되어서 못 먹게 하였다. 그것을 먹고 났더니 서로가 벗었음을 ‘알았더라’ 하는 단어와 묘하게 함께 등장을 하게 되요. 인간의 어떤 성적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하나님과는 어떤 신적 합의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지식의 단계를 말하는데, 이것이 인간 세계 안에서는 폭력적인 성폭력과 남색까지를 해당하는 그런 말로 적용이 되게 됩니다. 아주 극단적이죠. 아브라함과 롯, 소돔 성 사람들은 이 낯선 사람 대하기라고 하는 이슈 앞에서 날카롭게 대조가 되고 있어요. 사람을 대하는 방식, 약자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죠. 이게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는 기준이 돼요. 상대방이 약자라 할지라도 상대방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섬기며 알아가는 그런 아브라함과 롯이 있고 상대방이 약자이기 때문에 상대를 나의 힘으로 눌러서 제압하고 알아가려고 하는 소돔 성 사람들의 그룹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런 일이 성경에 등장하는 고대 근동에만 있는 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안전하다라고 생각하는 가정 안에 매일 반복되는 직장 안에 심지어는 한 인간을 교육으로 형성해 나가는 학교 안에 누군가의 안전을 지킨다라고 하는 군대 안에 여전히 이와 같은 성폭력이 이 땅 안에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죠. 사탄적이죠. 마귀적이죠. 여러분! 교회 안에는 어떨까요? 교회 안에는 성폭력이 없을까요? 입에 담기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떤 타인, 심지어는 나에게 해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그 어떠한 그 낯선 사람을 환대하느냐! 아니면 폭력을 행사하느냐로 혹은 성폭력으로 둘 중 하나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상대가 중심이에요. 저 사람이 중심이에요. 마치 종처럼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소돔 성 사람들은 나의 욕망이 중심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어요. 아브라함과 롯은 상대의 존재가 목적입니다. 하나의 소우주예요. 내가 내 인생에 우주인 것처럼 내가 우주잖아요. 나 사라지고 나 없어지면 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절대적이죠. 그것과 마찬가지로 저 한 사람을 하나의 우주로 절대적인 목적으로 생각하는 건데 소돔 성 사람들은 그냥 상대가 나의 욕망의 도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죽어 나가도 아무 눈깜짝 안 해요. 잔인한 사회죠.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모습이에요. 맞죠? 하나님이 우리 앞에 그렇게 군림하신 적 있어요? 정말 미련하실 정도로 우리 앞에 뭐라 그럴까! 비굴하시잖아요. 인간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만 뭘 이렇게 오래 기다리셔요! 가망성도 없는데! 그냥 우리 앞에 오시면 너무 작아지시고 낮아지시고 그냥 어떻게든지 우리 마음을 좀 얻어보려고 그죠? 그런 분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소돔 성 사람들의 폭력은 사탄이 인간을 다루는 모습이에요. 사탄은 인간을 이용하다가 결국에는 죽여버려요. 이 소돔 왕 베라가 했던 거하고 똑같아요.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는 하나님 나라 모습이지만 소돔 성 사람들의 폭력은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의 모습이죠.
여러분! 지옥이 따로 있지 않아요. 현실이 지옥이에요. 지금 현실을 지옥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이 땅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다소 평안하게 여유 있게 또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지만 이 지구상에는요! 아니 너무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이 땅 안에도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죽을 것처럼 숨을 못 쉬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의 나라죠. 지옥의 모습이죠.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여전히 죽음이 있고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하죠. 우리 모두는 어쩌면 소돔 성 사람들처럼 내 마음대로 내 방식으로 내 욕망대로 상대방을 길들이고 굴복시키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너를 아는 방식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정에서 직장에서는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물질이 있고 조금이라도 어떤 갑의 위치에 올라가면 여지없이 그 마음에 있는 폭력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게 인간이에요. 나와 너의 가운데 이 관계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직접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 인간은 본성상 상대방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이 본 훼퍼 목사님의 견해예요. 누구든!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예수가 계셔야 됩니다. 예수가 중재자가 되셔야 됩니다. 그 예수를 통과하며 그 사람을 대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다!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다! 심지어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하나님이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 되었던 사람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려고 했던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대해주셨어요. 그 방식으로 네 이웃을 대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죠. 나그네를 대하는 방식의 문제는 어떤 나의 윤리적 결단이 아니에요. 사회적 합의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고, 나그네를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 가운데 선명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는 거예요. 신명기 10장 말씀 보시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 10:17~19)
분명하게 나오죠. 원래 네가 나그네야. 지금도 나그네나 마찬가지야.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나그네야. 그리고 말이야 나는 이 땅을 방문할 때마다 유난히 고아나 과부에게 관심이 많아. 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 인정받는 사람들,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나그네 같은 사람들, 집도 없고 거처도 없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런 약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죠. 나그네가 누구인가? 고아나 과부와 함께 가장 연약한 자예요. 아무 보호자도 없이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삶의 안전과 안정을 취할 수 없는 존재 바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존재에 보호자로 자처를 하고 나서신 겁니다.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신 가운데 신이라고 소개돼 있죠.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만유의 주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이 땅에서는 유난히 약한 자들의 보호자와 대변자가 되시기로 작정하셨어요. 왜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라고 소개하고 계신 거죠. 세상 나라가 어떻게 살았든지 세상 나라가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나는 상관없어. 나는 그런 방식이 아니야. 내가 보여줄게. 약자를 대하는 방식이야. 그게 곧 나를 대하는 방식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죠.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 그리고 소돔 성 사람들을 강렬하게 대조시키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의 모습과 그렇지 못한 하나님 앞에서 심판당할 자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강렬하게 대조시켜 드러내고 있어요.
여러분! 언약의 자손들입니까? 여러분! 약속의 자손들 맞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맞습니까? 삶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환대라고 하는 거, 누군가를 대접한다라고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에요. 구원의 조건은 뭐예요? 당연히 믿음이죠. 하나님 말씀 믿어야 구원받죠. 맞죠? 근데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믿음의 강함과 적음을 떠나서 반드시 하나님의 흔적이 남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 흔적이 뭐겠어요? 불쌍한 사람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요. 외면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의 마음이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이 안에 있으니까! 다른 것이 생각나도 하나님이 성령이 생각나게 하시니까! 도와줘! 도와줘야지! 네가 도와줘야지! 그렇게 하게 하시니까! 그리고 그게 하나님의 나라니까!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라고 하시는 이 그림, 그 미래에 대한 그림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나그네를 돌보고 억울하게 갇힌 자들을 돌본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 첫 번째로는 내 이기적인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나도 살기 어려운데! 내 가족 돌봐야지! 내가 누구를 도와줘! 두 번째로는 나를 해치거나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장애인 시설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그죠? 왜요? 피해를 보니까! 아파트값 떨어지니까! 이런 세상이 돼버리고 말았어요. 옛날에는 시골에서 장애인이 태어나도 같이 사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모여서 같이 사는 거예요. 가난한 집도 부자도 그냥 같이 기대고 그냥 옆집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고 이렇게 사는 세상이었어요.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야 됩니까? 환대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고요?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아십니까? 세 번째로는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는 허무와도 싸워야 하는 씨름의 과정입니다. 근데 성경에는 그런 조건이 없어요. 여러분! 아무 조건도 없다니까요.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도와주래요. 그것도 부지 중에! 내가 내 욕망과 싸워 약자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게 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게 되요? 하나님을 만난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아니 이 사람 도와주다가 나중에 너 그때 그 사람 도와줬어. 착한 일 했네. 그래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부지 중에 그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 어찌 우리가 그 자리로 안 가겠어요? 어찌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모이겠습니까? 여러분! 어찌 예배의 현장만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은 저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지 몰라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저 세상,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세상에 이럴 수 있느냐라고 울부짖는 저 세상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서 그들을 섬기기를 원하시죠! 왜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물론 여기도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라고 동일시하고 계시고, 예수님 자신도 이 나그네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어요. 이게 성육신의 원리예요. 마태복음 25장에 가보면 아주 길지만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비유가 하나 등장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태복음 25:31~38)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오실 건데 영광의 보좌 앞에 딱 앉을 거고 모든 민족 사람들 다 집합시켜놓고 오른편에는 양, 왼편은 염소로 나누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운명이 달라요. 그때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아라. 이렇게 된 겁니다. 상 받은 이유가 뭐냐? 너희는 말이야! 내가 주릴 때 먹을 거 줬어. 목마를 때 마실 거 줬어.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을 해줬네. 그리고 말이야. 헐벗었을 때 옷 줬지! 병들었을 때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도 와서 봤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뒷이야기는 똑같아요. 의인들은 자기가 한 착한 일을 모르고 있어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그때 몰랐어요. 그때 나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혹시나 이거 도와줬다가 하나님 나라에 지장이 되는 건 아닌가? 그런데 자꾸 도와주라는 마음이 생겨서 불가피하게 도와줬단 말이에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25:41~43)
반대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저주를 받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로 들어가라. 그다음 이야기는 안 읽어봐도 알겠죠? 이유가 뭐예요? 내가 주릴 때 너 먹을 거 안 줬잖아! 너 내가 나그네 되였을 때 나 대접 안 해줬잖아! 갇혔을 때 돌보지도 않았잖아! 그러니까 뭐라고 질문합니까?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을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44~46)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뒷이야기는 안 읽어봐도 알아요!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주님 그때 제가 해드렸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저희가 언제 그랬어요? 저희는 할 일 다 했는데 저희는 거룩하고 위대한 선교 일도 하고 전도도 하고 나름 열심히 다 일을 했는데요.
두 부류가 동일한 반응이죠? 자기가 한 착한 일을 모르고 한쪽은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몰라요. 그죠?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한쪽은 영벌에 한쪽은 영생에 들어가라 하시니라. 충격적인 선언이죠? 만약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이신데 이 땅에도 왕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누가 예수님을 멸시하고 천대했겠습니까? 누가 그를 핍박하고 고난을 주고 십자가에 못 박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유난히도 약한 자의 모습을 오셨어요. 그죠? 그리고 그 고난과 죽음을 다 종처럼 순종하셨어요. 마치 자기가 받아야 되는 그런 것처럼 마땅히 받으셨어요.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하는 것처럼 그는 아무 볼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침을 뱉고 저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을 사람이어서 벌을 받는 거라고 조롱하고 멸시했어요. 우리도 그렇게 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에 오셨을 때만 그렇게 오시느냐! 그렇지 않다고 성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거죠. 지금도 끊임없이 예수님은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고 계신다는 거예요. 믿으십니까? 이렇게 보좌에 떡 하고 앉아서 너희끼리 잘해봐! 나중에 한번 보자고! 그러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런 예수님이 아니고, 이 성경에 의하면 지금도 약자들 속에 장애인들 속에 사회적 약자들, 난민들, 외국인 노동자들, 이 땅에 터를 잡을 수 없는 나그네 같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성육신하여 이 땅 가운데 임하고 계신다 하는 거죠.
그런 고난의 주님, 그런 초라한 주님, 그렇게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으신 주님을 나의 구주로 섬기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예수님께서 참되신 왕으로 역사하시는 거고,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가 된다는 것이죠. 무엇이 교회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십자가 세워놓으면 무조건 교회인가? 목사 있고 성도 있고 매주마다 예배 있으면 무조건 교회인가?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방식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처럼 약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곧 나에게 하신 것이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 그 사람들의 모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인가! 아니면 사탄의 나라인 소돔인가! 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 가시더라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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