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1부. 장애물
제 1장 삶의 목표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1:2)
여호수아서에 나와있는 군사적 승리와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사가 성경에 이처럼 장황하게 기록된 것은 내적인 의미가 분명히 들어있다.
잘못하면 찬송가의 가사처럼 요단을 죽음에, 가나안을 천국에 비유하는 곁길로 빠질 위험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가나안이 전쟁터라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물론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어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싸워야 할 적이 있다.
여호수아서의 해석에 관건이 되는 말씀은 에베소서와 히브리서라고 생각한다. 그 예로서 히브리서 3,4장은 가나안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안식, 즉 모든 신자들이 지상에서 즐길 수 있는 영적 안식과 승리로 묘사되었다. 또 에베소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생활, 즉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한 이 땅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일치시키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구약에서의 여호수아서가 신약에서의 에베소서에 해당한다고 볼 때에 비로소 여호수아서의 참뜻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는다.
우선 가나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는 목적지였다.
바꾸어 말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일은 가나안의 안식을 즐기게 하기 위한 준비였었다. 만일 이들이 가나안의 안식처로 인도되지 않았다면 유월절을 비롯하여 피 흘림, 홍해의 건넘, 바로 군사의 멸망 등이 모두 무익한 일들이었을 것이다.
신약의 유명한 구절들은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주신 말씀이기 보다는 성도들에게 완숙과 거룩한 삶의 길을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믿음의 터전인 중생과 칭의는 성화와 거룩의 집을 짓기 위해 다져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미흡한 수준에서 살고 있다. 그저 의롭게만 되었을 뿐 그리스도안에 있는 온갖 유산들을 받아 즐기지 못한 채 광야의 경험으로 당신은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패배와 광야와 승리의 땅 사이에서 어느쪽에 서 있는가?
한가지 더 살펴볼것은..
율법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이 약하고 죄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은 중생한 사람들이 겪는 경험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법을 의롭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반면에 이 하나님의 법을 대항하여 싸우는 또 하나의 법이 자기 지체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이 악한 법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우리들이 성취하지 못하고 완전한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들의 모든 공로와 노력을 전제로 하면 받을 수 없다. 오직 아무것도 없이 벌리는 믿음의 빈 손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승리를 향해서 힘써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위에서 내려온다. 우리들은 십자가와 빈 무덤에 의지하여 승리의 쪽으로 애써 나가지 않고 승리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한 사람의 대표자가 맡았다. 가나안에 있는 것은 모두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서 여호수아의 책임은 이 땅을 지파의 요구에 따라 합당하게 분배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 일이 얼마나 완벽하게 성취되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위한 모든 축복을 받고 우리들이 이를 청구할 때까지 간수하는 책임을 맡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마귀의 능력을 분쇄할 수 있는 권능을 주기 위해서 모든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주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믿음으로 청구할 때에 다 받게 된다. 우리들은 받을 자격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모든 축복을 충분히 요구해야 한다. 당신의 회개하는 순간에 그리스도는 모두 당신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믿음으로 청구하는 그 만큼만의 주님만 받게 된다.
계속해서 좀 더 살펴보자.
가나안 땅에 실제로 도착하기 전에 애굽을 떠난 모든 세대가 광야에서 죽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주님을 온전히 따른 여호수아나 갈렙과 같은 교인들은 겨우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드물 게 있을 뿐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말씀은 "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요단을 건너가라" 고 지금도 권면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축복의 땅으로 전진하가 않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가나안은 강적의 처소였다. 주님안에 있는 복음의 땅에도 투쟁과 적들이 있다. 성도들의 영적 투쟁을 극적으로 표현한 에베소서 6장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교인 생활에서 충만한 축복을 받으려면 축복을 간절히 바라는 영적 소원과 갈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주신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이 축복의 처소를 사탄이 드나들며 분노에 찬 화살을 아직도 던질 수 있다. 하나님은 축복을 갈망하지 않는 자녀에게 무턱대고 복을 내려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수준은 이보다 높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적의 온갖 공격에 맞서서 행진하기를 바라신다. 즉, 우리들의 싸움은 사령관이신 우리들의 여호수아께서 이미 싸워 이겼던 전쟁임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유산을 청구하기를 바라신다.
여호수아서를 단지 역사적인 사건의 기록으로만 생각해 온 사람들은 이 기회에 하나님께 남김없이 자신을 옮겨놓은 삶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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