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3장 댓가를 치르고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3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수1:11)
앞에서 우리는 구약의 가나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충만한 축복의 땅에 비견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불러낸 후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데 있다.
이 땅은 도덕적인 노력이나 윤리적인 달성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다만 구약에서 세워진 대표자인 여호수아, 즉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으로 입성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축복들을 우리들에게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 축복들을 달라고 주장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축복들을 우리들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3일간을 기다려야 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다루게 된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약속의 성취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서 큰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3일간을 지나야 요단을 건너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첫째, 구원을 받아야 할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으로 두명의 정탐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라합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에는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결코 깊거나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지만 라합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고 이 사실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라합은 믿음이 있었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으므로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축복에 끼일 수 있었다. 라합의 믿음은 행위를 가져왔고 그 행위는 축복을 불러왔다. 여리고에는 구원을 받아야 할 한 영혼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 영혼을 구할 때까지 심판을 미루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대하시는 방법이다.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여리고처럼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멸망할 세상과 타협살일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우리들은 이 시대의 병든 정신을 꾸짖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도전해야 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오른 편에서 구주 예수님의 피가 외치고 있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목적하신 모든 영혼들이 구속을 받을 때까지 심판은 지체되고 있다.
라합은 어디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그녀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일이 없었다. 라합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음을 알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유력한 요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삶을 통해 보여주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실재이다. 즉 자기 생애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증거가 외부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들의 정확한 신조에서보다 우리들의 성품 속에서 더욱 드러나야 한다. 세상이 바라보는 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광야를 건너던 중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는 매우 비옥한 땅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가축들을 위해 이상적인 초원과 들을 보았다. 그들은 가축이 많은 부유한 지파들이었다. 그래서 모세에게 가서 이런 뜻으로 말하였다. "우리들은 요단 동편에 그냥 머물고자 합니다. 이 땅은 누구든지 원하는 옥토입니다. 가나안에는 갈 마음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여러 가지 일로 번거롭게 사느니 차라리 여기 사는 것이 편한 줄 압니다." 모세는 그들의 결심을 받아들였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활수준을 결정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을 억지로 가나안으로 끌고갈 수 없었다. 그들은 요단의 동편에서 안주하도록 허가를 받고 가나안 전투에 참여할 것을 조건으로 가나안의 들판 동쪽의 땅을 상속받았다. 모세는 이들에게 이스라엘 군대를 선두에서 인도하는 특권까지 허락하였다.
그우벤, 갓, 므낫세 지파는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리고 성을 돌며 선두적 위치에서 행군하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이들이 가나안 땅의 열매를 맛보고 승리의 환희를 체험한 후에도 정말 광야의 변두리 땅으로 갈 것인지를 확인할 심산이었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 지파들에게 그들의 결정을 상기시키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들의 선택은 확정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종전의 약속대로 군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싸워 승리를 얻은 후에 다시 광야의 안일과 향락으로 돌아갈 결심을 재삼 확인하였다.
구속을 받은 모든 영혼들은 그들의 믿음이 크건 작건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안에서 마련해 주신 처소에서 산다. 하나님은 구속의 영원한 목적을 둔 사람들을 모두 들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곳으로 옮기셨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서 투쟁할 필요가 없다.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도 축복을 성취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려고 준비한 것을 모두 받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입장이다. 당신이 주 예수를 믿는 신자라면 아무리 세속적이고 육신적이며 아무리 믿음이 약하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마련한 구속의 터 위에 서 있다. 이것이 우리들이 처해있는 구속의 위치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어떤 수준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 나는 가나안의 축복을 잠시 즐길 수도 있고, 만복의 땅으로 곧장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광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상과 함께 요단을 건너 갈 수도 있고, 혹은 예수님 안에 간직된 승리를 조금 취한 후에 계속 죄에 묶여 광야에 머물면서 타협에 눌리어 마귀의 밥이 될 수도 있다.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선택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는 역대기상 5장에서 읽어보라. 이 지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의 축복과 승리를 맛보았고 축복의 땅으로 하나님의 군대들을 인도했었다. 그러나 앗수르인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이들이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으며 축복도 받았었다. 그러나 세속에 묶여 환락과 탐닉을 추구한 너머지 죄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것보다 어떻게 끝맺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계속 걷고 있는가? 당신은 온갖 반대와 시험 앞에서 끈기있게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은 넘어지고 지칠 때 다시 일어나서 얖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탐닉과 죄 속으로 빠져 버리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우리들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들이 하늘의 항구에 이르게 될 때 대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우리들의 상처와 고통은 사라지고 지금까지의 모든 투쟁이 값있는 것이었음을 알 게 될 것이다.
셋째,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서 한가지 더 배워야 할 것은 성결을 이루어야 한다. "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하나님의 기사는 항상 자기 백성들의 성결에 달려 있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통해 심판 아래 있는 세상에게 말씀을 주는 일에 큰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님앞에 성도들이 거룩하게 나아갈 수 있는 준비를 시키는 일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수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수준에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들은 평강의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화될 수 있다. 그런데 성결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성령의 내주와 채움이다. 즉, 내 속에 있는 주 예수님의 삶을 표현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알려진 모즌 죄를 내어보내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이렇게 하였는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부흥을 주실만큼 깨끗한가? 하나님이 우리들을 쓰실 만큼 꺾여지고 겸손해져 있는가? 아니면 실패의 광야 수준에 계속 머물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가 받고 있는 도전은 신약시대의 경우와 흡사하다. 오른쪽에는 신학이 도산된 사두 개인들이 있어 모든 것을 현대주의에 따라 설명해 버린다. 두 차례의 걸친 세계대전 이후 침식되어 오는 교회의 기초는 패배를 금치 못하고 있다. 왼쪽에는 바리새리인들이 있어 자신의 종교와 율법과 신학으로 잔뜩 교만해져 있다. 이른 바 근본주의자들이 보수니 복음주의니 하며 온갖 울타리와 선을 긋고 자기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과는 누구와도 교제를 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자유주의자들 못지 않게 오늘의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도 못주는 무용지물이다. 근본주의라는 이름의 장벽뒤에서 이들은 자기들의 형제를 놓고 신조를 따지며 논박은 할망정 사랑이나 자비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른쪽에는 자유주의로 파산이 되고, 왼쪽에는 근본주의로 좌절되어 있다. 그러니 하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공격하게 하자. 패배한 자유주의와 부서진 근본주의 사이에는 중간 지점이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진영에서는 그들의 모든 신조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신앙을 받고 한마디도 놓치지 말자. 자유주의자들의 진영에서는 그들의 사랑, 성실, 그리고 개방된 자세를 받아들이자. 양진영에서 최선의 것들을 다 모은 후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공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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