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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알란 레드파

자유의 율법

by 복음과삶 2005. 7. 2.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10장. 자유의 율법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수8:30)

 

여호수아 8장은 수치스런 패전 후에 있었던 아이에서의 종국적인 승전을 주로 기록하였다. 먼저 본 장을 모두 읽고서 여호수아가 패전에서 잃은 것을 어떻게 메꾸었는지를 이해하기 바란다. 여호수아의 전략은 후퇴를 가장하고 싸움에 진 것처럼 하여 적을 속인 후 복병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전선에는 정예부대들이 배치되어 아이의 정복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아이는 여리고만큼 강적이 아니었지만 패전의 경험이 있는 후로는 정복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성경을 앞에 펼쳐놓고 본문의 사건을 숙고해 보면 놓친 부분을 보충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볼 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짐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단 30분간 의식적으로 저지른 불순종이 30년간의 축복을 놓치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남자 교인이 있었는데 그는 일년간 주를 위해 밤낮으로 봉사 한 후 잠시 여름 휴가를 갔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는 어떤 교제에 빠지게 되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맺게 된 이 관계로 그는 수 년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피해의 복구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인두질을 하듯이 새겨두면,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 현재에 자주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더욱 그런 죄를 범하는 일을 삼가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하는 세상을 건질 꿈이나 잃어 버린 영혼을 위한 심적 고민이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참 마음이 없이 중년에 접어들고 있다. 자신에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어보면 젊었을 때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최선의 길을 떠나서 거룩하지 못한 일에 빠진 때가 있어서 이것들이 힘을 죽이고 능력을 마비시킨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성령을 섭섭하게 하였으므로 아직 설교도 하고 가르치고 남을 인도할 망정 하나님에게는 쓸모없는 도구가 되어 축복에서 벗어나 있음을 또한 인정할 것이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당신의 가슴 속에 이 교훈을 담아주시기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피해의 복구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본장은 이 사실을 중심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이에서 받은 피해를 회복하느라고 애를 쓰는 모습과 그 결과가 소상하게 적여 있다. 그들이 범죄하고 나서 다시 패전을 역전시키자 즉시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원칙들이 각자의 심령에 새겨졌다. 다시는 동일한 실수에 빠지지 않는 이 비결들은 무엇일까?

 

그들은 팔레스틴에서 매우 아름다운 곳의 하나인 세겜 골짜기로 30마일 행진에 나갔다. 거기서 그들은 자유의 율법을 배웠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 거민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이 생활에 젖어 있어야 함을 배웠다. 또 축복을 받는 길과 저주를 받는 길을 배웠다. 그들에게는 양쪽을 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지켜야 할 법들이 있다. 바울이 크게 우려한 것은 남에게는 법을 전해놓고 자기는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고전9:27) 8장에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자유의 율법들이 세워져 있다.

 

세겜의 계곡은 얼마나 아름다운 계곡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지금 온 것은 처음도 아니요 마지막도 아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고, 야곱의 우물이 발견된 곳도 이곳이었다. 이 우물 곁에서 여행에 지치셨던 주님이 앉아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었다. 이 여인은 물론 죄의 씻음을 받고 돌아갔었다. 이 아름다운 계곡은 극적이며 영혼을 뒤 흔드는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난 곳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사건이 없었다.

 

세겜의 계곡 양편에는 2마일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산들이 서 있다. 한 쪽은 거칠고 조악한 바위산이고 다른 쪽은 나무가 많고 아름다운 그리심산이다. 오늘날 팔레스틴을 지나는 여행자는 누구나 목청을 높이지 않고서 에발산 꼭대기에 서서 그리심산 위에 있는 사람에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계곡을 가운데 둔 이 자연 음향장치는 너무도 완벽하여 양쪽 산정에서 주고받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의 마루턱에 도착해서 제단을 쌓았다. 그런데 이 제단은 사람의 손으로 깎거나 세공을 하여 만든 것이 아닌 신령한 제단이었다. 이 위에 모세가 두 돌판 위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었다. 요단강을 지난 후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에다 마음을 두게 되었다. 교제와 예배와 단련과 순종의 제단 위에서 그 위에 쓰여진 하나님의 율법 위에 백성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백성들은 반씩 나누어서 에발산과 그리심산으로 올라갔다. 에발산 위에서는 불순종에 대한 심판과 저주의 선고가 내려졌고, 그리심산 위에서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따를 때에 오는 기쁨과 영광의 축복이 낭독되었다.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지파는 에발산으로 올라갔는데 이 중 두 지파는 이미 가나안으로 떨어져서 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면 너무 큰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가족들과 가축들을 모두 요단 동쪽에 남겨두었었다. 에발산 위에서의 이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오는 저주를 다 들었다. 르우벤과 갓 지파의 비극적인 종말을 살펴보라. 그들의 쓰라린 경험은 우리들의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지파는 복종에 따르는 축복의 약속을 듣기 위해서 그리심산으로 올라갔다. 이 두 산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언약궤가 여호수아와 제사장들과 함께 서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 훌륭한 자연음향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저주와 축복,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을 선포하였다. 그는 불순종을 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순종을 하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아멘" 으로 답하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음성이 산위에서 메아리쳤다. 양 편 산정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판결에 모두 동의하였다. 그 내용은 우리들이 순종치 않으면 죽게 되고 순종하면 살며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하고 하나님을 따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엄숙하며 획기적인 순간인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 사건은 어떤 뜻이 있을까? 여기에는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가르침이 담겨 있다. 우선, 하나님의 율법이 심판의 산 기슭에서 기록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타인의 죽음에 의해서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율법이 지우는 책임과 의무에서 해제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설교자였던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얼마나 축복된 진리의 말씀인지 모른다! 회개하고 믿어서 부활하고 승리하신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정죄가 없다. 율법의 선고가 자기의 대속자에게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의 눈에서 본 우리들의 입장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즉, 이런 뜻이다. 내가 하나님의 요구를 채워드리는 순간, 그러니까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하고 그의 아들을 믿는 순간에 다른 한 법이 하늘에서 발효된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피로 인봉이 된 계약을 자기 아들과 하셨기 때문이다. 이 계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회개하고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 삶의 원칙이 되는 성령을 내려주시게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의 하나이신 성령을 모시고 살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다.

 

우리들이 이 기적을 조금이라도 의심할까 봐 바울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즉, 우리들이 약함과 죄와 실패로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의 생명 속에는 새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즉, 심중으로 부활의 생명을 받았으며 완전하고 순결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기 위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이 아들은 완전한 삶을 사셨고 속죄의 죽음을 당하셨으며 무덤에서 보좌로 승천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은 누구든지 새 생명의 원칙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을 받는다.

 

당신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바울의 다음 말씀에 나와 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 끝낸 것이 아니다. 물론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지만 율법의 요구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거룩이란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병폐는 교인이 되기만 하였지 거룩하고 박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주님의 존전에서 자기들이 소중하게 지녔던 신조와 교리와 믿는다고 장담하던 성경이 그들을 고작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사실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영혼에 전율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의 신조가 실천없는 빈 말에 그쳤고, 그들의 성경은 사장된 책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은 거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판의 산 기슭에서 낭독된 율법은 성취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들에 의해서 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감사하면서 지적할 것이 있다. 즉, 율법이 제단 위에 새겨진 사실이다. 제단은 아름다운 그리심산에 세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죄를 받은 사람들에게 심판이 내려진 에발산의 황무한 기슭에 세워졌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잇는 교인은 한 사람도 없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사람 중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는 정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저는 율법의 선고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오 하나님, 저는 자신을 성령님께 맡기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하였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실패와 죄와 불신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제단 위에는 율법이 새겨졌다. 제단은 희생의 피가 흘려지고 교제와 회복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가식과 허구와 육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서 교인으로서의 실패와 죄를 자백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1:7) 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 이기 때문이다(요일1:9).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이 율법에 직면해서 그 요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 율법은 조금도 수준을 낮추지 않고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렇다고 당신은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하나의 의무로서 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 속에 넓게 퍼져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하는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대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중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에 대하여 자신을 위해서보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하며 탄식한다. 그리고 "오 하나님, 저를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이 권면하는 행위와 헌신과 영감 속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불타기 때문에 감동과 복종의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승리와 사랑

내 영혼에 넘쳐오네

내 마음 배회 않고

하나님께 안기어

그 얼굴 보는 중에

모든 것 잊어 버리네

 

오, 내 속에 있는

성스러운 주님의 불

끝까지 타올라

나의 티끌 태우소서

영혼의 맑은 샘이

솟아흐를 때까지

 

율법은 제단 위에 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율법을 깨뜨렸다고,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헌신을 저 버렸다고 시인하는가? 그렇다면 어서 이 교제의 제단으로 돌아가라.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놓고 해야 하느냐 안해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어색한 질문들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겠는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만일 나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그의 율법을 던져 버렸다면 이는 내가 마음 속으로 십자가의 예배를 내던졌다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일에 냉담하거나,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거나 성경의 말씀에 흥미가 없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갈보리에서의 예배를 내던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죽은 사람은 세상의 일들이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하고 안해야 하는 일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라고 외친다.

 

본장을 끝내면서 당신에게 심판의 산과 축복의 산 사이에 서 있는 법궤를 묵상해 보라고 권면한다. 이 두 개의 현실을 가르는 계곡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있었다. 누구도 여기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떤 이들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도 하고 혹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도 하며 회개를 하고 겸비해지기도 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존전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속히 당신은 결정해야 한다. 안일하게 성경말씀만 듣고 하나님과 적당하게 지나면서 신약의 성결을 적당히 취급하려는 처신을 삼가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당신의 마음 속에 진정이 없으면 당신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다. 우리들이 당면한 과제는 중대한 것이다. 주님께서 곧 재림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온은 3천명의 군사보다 3백명의 소수로 더 잘 싸웠다. 이것 저것 얽히고 매여서 붙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청한다. 나의 친애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과 바르게 되기 위해서 십자가로 나아가라!

 

인간의 길에는 중립이 없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장면에서 나는 예수님의 재림때에 있을 예언적 광경을 본다. 주님은 그때 온 민족들을 다 모으시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한 편과 다른 편으로 구분하실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생명이 아니면 죽음이다. 축복과 저주 중에 가질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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