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12장. 최후의 일각까지
"여호수아가 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같이 하시리라." (수10:25)
이상한 역설 같지만 충만한 축복의 땅은 치열한 전쟁터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복을 배우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는 우리들의 소유를 점유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가나안 땅의 진격을 공부하면서 이 사건을 충만한 축복의 시작으로 보았다. 가나안 정벌에는 세가지 구체적인 전략이 있었다. 첫째는 중심부를 강타하여 적을 갈라놓음으로써 남북의 연합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남쪽의 적을 파멸시키고 마지막으로 북쪽을 공격하여 정벌을 끝마쳤다. 이 모든 전략은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과 구상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할 때에 언제나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서 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광야에서 주님을 정면으로 공격한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탄을 반격할 때에는 흔히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 너무 성급한 방법과 미온적인 태도로 적을 대하다가 참패를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중부전선에서는 여리고와 아이성에서, 남부전선에서는 기브온과 벧호론에서(수10장), 그리고 북부전선에서는 메롬 물가에서(수11장) 결정적인 전투를 치렀다. 아마 이외에도 여러 전투가 있었겠지만 이상 언급한 전투는 전쟁의 방향을 결정짓는 대전들이었다.
나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는 한 번의 패전이 궁극적인 패배가 아니라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점에서 우리들이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전 영역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은 여호수아의 중부전선 전투를 통해서 불순종과 무기로는 패배를 자초하지만 순종과 경계와 주님에 대한 완전한 의존은 승리를 보장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이 교훈들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잘 익혀두어야 한다. 그러면 여러 상황에서 크게 유익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럼 남부전선의 전투를 살펴보고 새로운 환경과 여건에서 믿음과 실천과 타협이 없는 용맹한 돌진이 어떻게 완승을 가져왔는지를 배우도록 하자.
잠시 다소 긴 본장을 개괄해 보자. 가나안의 다섯왕들은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함께 맺은 동맹을 무척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기브온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연합전선을 폈다. 이에 기브온은 즉각 동맹을 맺은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승리의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는 길갈의 기지에서 나와 적을 섬멸하였다. 이때 역사장 가장 큰 대전의 하나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편에서 직접 나와 싸우셨다. 하나님은 밤을 억제하시고 낮을 길게 하여 이스라엘의 승리가 완전히 쟁취되도록 하셨다. 5명의 왕들은 포로가 되어 감금되었다.
전투가 끝나자 여호수아는 군장들을 불러 놓고 잡힌 왕들을 끌어낸 후 그들의 목을 밟으라고 명하였다. 이는 적국의 왕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 다음 여호수아는 자기 군대를 바라보며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같이 하시리라"(수10:25) 하였다. 아마 당신은 이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호수아는 그렇지 않았다. 왕들에게 수모를 준 후 그는 이들의 목을 자르고 모두 나무에 매달았다. 당신은 여호수아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전투의 결과는 21절에 확연히 기술되어 있다.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두려운 존재로 알려졌다.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는 여리고나 아이에서의 전투가 우연한 승리가 아니었음을 싫증하였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이들이 보통 백성들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이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요단을 건너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무너뜨린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고 있는 두려운 민족이었다.
나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교회가 두려운 존재로 알려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교회라는 건물을 두고 말한다면 여기에는 중생한 사람들이 아니면 두려워서 들어오기를 꺼리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교제는 간증대로 살며 믿음을 지키고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 교회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한 경건과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물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이 두려워하는 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속한다. 그리스도인은 행위가 의롭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며 주님께 대한 헌신이 깊고 희생적인 봉사를 하며 생활이 청결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교우들이 알면 창피한 일들을 뒤에서 몰래 숨어서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인의 생애는 가장 호된 비판이라도 견디고도 긁힌 데가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받게 된 구속에 비추어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라. 신자들과 목사의 가슴 속에 과연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으며, 주일마다 나오는 교회에 하늘의 것들로 채워진 자리가 얼마나 되는가? 신자들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말씀을 전하는 이마다 하늘의 권위와 거룩의 실재를 보여주는 주일이 계속될 수는 없을까?
과연 그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여호수아에서의 전투는 여호수아가 먼저 주도적으로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는 없었음을 주목하라. 주 예수님은 지옥의 문들이 자기 교회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적이 있다. 주님은 지옥의 문들이 갑자기 일어 나와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돌진해 온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은 지옥의 문들이 성령으로 채워진 하나님의 무리들이 감행하는 공격을 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공격적이어야 하지 수비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들은 걸핏하면 도망하고 마귀를 피해 숨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총공격을 퍼부어야 한다.
나는 승리의 신앙에 관한 해답을 벧호론이라는 곳에서 당한 다섯 왕들의 재난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가지 입장에서 이를 고찰해 보자.
첫 번째, 17절을 보면 이 왕들이 굴에 숨었다고 되어 있다. 이 왕들은 많은 군사력과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굴에 숨는 신세가 되었을까? 여호수아는 어떻게 하여 이처럼 큰 승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본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당신은 동일한 말이 다섯 번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길갈" 이다. 이 단어는 성공의 열쇠이다.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적을 맞기 위해 출발했었다. 그는 전투 도중에 이곳에 다시 들렀었고 전쟁이 끝나고 승리를 한 때에 다시 들렸었다. 여호수아는 전투중 줄곧 길갈과의 통신을 유지했었다. 길갈의 교훈이 이제 당신의 몸에 배어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길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신약의 진리와 구원의 대 어휘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뜻에서 약술한다.
길갈은 기억(Remembrance)의 장소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모여서 요단에 내려가 죽었던 곳이다.
길갈은 부활(Resurrection)의 장소였다.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 생명으로 올라왔다.
길갈은 단념(Renunciation)의 장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광야의 육적인 요소들을 집어던졌다.
길갈은 회복(Restoration)의 장소였다. 그들은 주님과의 교제를 다시 갖게 되었다.
길갈은 인식(Realization)의 장소였다. 백성들은 가나안의 풍성한 음식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길갈은 계시(Revelation)의 장소였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칼을 빼어든 그들의 군대장관을 만났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갈보리에 깊이 뿌리가 박혀 있다. 이곳에서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그와 함께 살아났다. 여기서 우리들은 육을 끊어 버린다고 선언하고 주님과의 산 교제를 가졌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맛보기 시작하였고 우리들의 생활에서 하늘의 군대장관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길갈은 처음에 한 번 딛고 끝나는 곳이 아니다. 전투를 행하면서 줄곧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장소이다. 벧호론에서 파죽지세의 승전을 이룬 비결은 본부와의 지속적인 통신에 있었다.
당신의 생활과 하늘의 보좌가 오늘 바른 통신을 유지하고 있는가? 이 통신이 연결되지 않으면 승리는 오지 않는다. 당신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가 당신에게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당신은 길갈에서 주님께 한 번 헌신한 것으로 다 끝났다고 여길런지 모른다. 헌신은 일회의 행위가 아니고 영구한 자세이다. 지속적인 헌신의 자세가 있을 때에만 능력의 비결을 발견 할 수 있다.
두 번째 적군의 왕들이 치욕을 받는 것을 주목하자. 24절을 보면 이 왕들을 땅바닥에 완전히 눕히고 여호수아의 군장들이 그들의 목을 밟고 서 있었다. 이렇게 공적으로 수치를 당하게 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는 승리를 가져온 분은 주님이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사랑하는 형제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나를 위해서 갈보리에서 대신 싸워주시고 승리를 거두셨다. 당신의 생애에 아무리 깊히 뿌리박힌 죄나 버릇이나 약점도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다 씻음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의 구원은 전적인 구원이다. 주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셨다. 형제여, 승리를 거두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 또 한가지 명심할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셨다는 것뿐 아니라, 이 승리를 각자가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아마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투쟁이 아닌 믿음의 생활이다" 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굴복시킨 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다. 당신의 삶에서 죄된 모든 것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하지 않는 한 당신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를 맛볼 수 없다. 당신과 내가 질투와 교만과 비방이나 모진 혀를 가지고 사는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흐리게 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고 사는 한 죽을 때까지 마귀의 저항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내가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은 이 전쟁에서 지금 힘껏 싸우고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만, 이기심, 혀, 시기, 영예를 공격하려고 투쟁을 각오하였는가? 당신은 이 전쟁에서 끝까지 승리를 주장해야 한다.
세 번째 주목할 점은 다섯 명의 왕들이 다섯 개의 나무에 매달린 사실이다. 이 왕들은 처음에 굴에 숨었다가 끌려나왔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의 군장들이 목을 밝고 지나갔었다. 이 정도로 하고 다시 굴속으로 돌려보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두려워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잔인하다고 생각될른지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 말들을 상기해 보라.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서 가지신 목적은 베들레헴, 갈보리, 오순절이었다. 그런데 이 땅의 거민들은 죄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가차없이 제거해야 한다. 다섯 왕들이 굴 속에서 머뭇거리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모두 죽어야만 하였다.
내가 말하는 것은 헌신이 아니고 성화이다. 이 진리를 성령께서 당신의 가슴에 심어주도록 간절히 기도하라. 우리 각자는 옛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 옛 사람은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정죄를 받았다. 이 옛 성품은 거룩의 능력이 없다. 한편 우리 속에는 새 성품이 있다. 이 새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성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의 승리를 즐기려면 자아를 십자가의 상처와 못에 맡겨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아직도 꿈틀거리는 죽지 않은 죄를 그냥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기뻐하는가? 당신은 예수님의 피로 가리워져서 하늘로 가는 길이라고 기뻐하는가? 나 역시 그렇게 된 것을 기뻐한다. 당신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으므로 다시는 정죄가 없다고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줄 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한번도 고백하거가 드러내 놓지 않은 숨은 죄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신의 생애가 빛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당신의 혀는 남을 악평하는 악습에 젖어 아직 죽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혹은 못박히지 않은 교만이나,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은 정욕이나 또는 자기를 높이려는 이기심이 당신 속에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용서를 받았으며 주님의 피 아래 있다. 그래서 정죄가 없다. 할렐루야! 그러나 당신은 경험을 통해서 이런 갖가지 죄들이 불현 듯 밖으로 튀어나와 시시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은 때때로 불친절이나 비평, 혹은 나쁜 성미의 노예가 되고 있다. 사탄은 숨어 있다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을 사로잡는다.
승리의 대로는 하나뿐이다. 한결같이 지녀야 할 자세와 주장해야 할 승리와 피해야 할 위험의 길은 단 한 길만이 있다.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예수님의 상처에서 은신처를 구하라. 죄는 결코 옆으로 제쳐놓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당신의 가슴 안에서 꾸물대는 뱀과 전면전을 개시하라. 이 뱀의 목을 어떻게 자를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이미 뱀을 처단하셨다.
승리의 경험 속으로 공격적인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들은 승리의 경험속으로 계속 나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형제나 자매를 찾아가서 사과하며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고 모든 것을 고백할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신의 시기심이나 거짓된 입이나 악평에 찬 비판이나 그 외 온갖 죄들을 다 정복하시고 승리를 가져다 주심을 감사할 것이다.
그 다음 그런 사람은 살아계신 주님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믿음으로 적의 목을 발로 밟으며 이렇게 말 할 것이다. "내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하여 처음으로 아직 청산되지 못한 죄들을 향해 전면공격을 선포하고 승리의 영적투쟁을 감행하게 될 것이다.
힘을 다해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스도는 너의 힘이시오 오른팔이라
생명을 붙잡고 나아가라
주는 너의 기쁨이시오
영원한 면류관이시라.
'강해 >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알란 레드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들의 분깃 (0) | 2005.07.02 |
---|---|
승리의 열매 (0) | 2005.07.02 |
적의 전략 (0) | 2005.07.02 |
자유의 율법 (0) | 2005.07.02 |
후퇴의 원인과 치료 (0) | 200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