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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알란 레드파

피해야 할 위험들

by 복음과삶 2005. 7. 2.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18장. 피해야 할 위험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18:3]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을 취하기 위해 싸운 7년은 본장의 단계에서 끝이 난다. 요단의 도강은 성공하였고 여리고도 정복했으며 적도 물리쳤다. 그래서 가나안 땅이 각 지파에 따라 분배되었다. 이제 남은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였다. 여기서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요단을 건너고 적을 무찌른 일이 다 허사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일이 사실이었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백배나 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위기나 뜨거운 감정의 연속으로 원래 짜여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면전을 목표로 하고 안정되고 진취적인 승리의 행군을 하는 것이다. 물론 도중에 중요한 위기가 있다. 요단은 건너가야 하고 패배의 광야가 축복과 승리의 땅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적은 필연코 무찔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기 영혼의 적을 정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의 땅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어떻게 머무르는가를 익혀야 함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구속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람이라도 가나안에서 광야로 돌아갈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승리에서 패배로 이송될 수 있다. 한동안은 잘 달려서 요단을 건넘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했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종착지에서 자신이 애굽의 국경선에 가까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중에 하나는 앞 장에서 삶의 용량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배웠을 줄 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믿는 생활이 내주하는 주님의 생명을 받는 용량을 확대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지고 다시 더 충만한 은혜로 나아가게 됨을 알았다.

 

여호수아서의 종결부는 축복의 땅에서 사는 3가지 특별한 비결을 다루고 있다. 18장에서 22장은 피해야 할 위험들을 말하고 23장은 따라야 할 원칙들을 그리고 마지막 24장은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들을 말해준다.

 

이 장들에서 우리들은 승리의 길과 충만한 구원의 경지로 들어가는 길에 대한 원칙들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결심이나 산정의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날마다의 일상 일들에서 자신의 신앙을 닦고 지켜야 한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이다. 송별예배를 보고 선교지를 향해 떠날 때는 수백 명의 본토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기대와 포부를 가질지 모르나 실상 선교지에 가보면 날마다 평범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일상의 허드렛일을 해낼 준비가 안된 처지라면 그 사람의 사역은 내려갈 뿐이다.

 

축복의 땅에서 사는 방법은 우리들 모두에게 필수적인 주제가 되어야 한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교인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경험 중의 하나로서 거의 전율에 가깝다. 그 이유는 그런 그리스도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영적 능력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일은 하나의 축복이다. 그럼 하나님이 저한 곳이 어디건 그 땅에서 살며 모든 것을 즐기면서 신앙생활의 높은 가능성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여기 세 가지 피해야 할 위험들이 있다.

 

여호수아 18:3절을 읽어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첫 번째 위험은 나태의 위험이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그들을 모아놓고 주님을 순종하면 바로 들어가서 땅을 소유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예로서, 베냐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는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그리고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신33:12] 주님의 어깨 사이에서 살 게 된다니 이 얼마나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인가?

 

잇사갈에 대해서는 그들이 바다의 보물과 모래에 감추인 보석들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신33:19] 잇사갈 지파는 그들에게 할당된 분깃을 소유만 하면 귀한 선물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소유를 취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의 대양을 경험하며 그리스도인의 빛나는 성품의 보석을 얻게 된다.

 

아셀 지파에 대해서는 그들이 포도주가 넘치는 기름진 땅에 있게 되고, 그들의 발은 기름에 잠길 것이라고 하였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33:24,25] 아셀 지파는 결코 늙거나 쇠퇴하는 일이 없을 것이었다. 항상 원기가 있고 새로운 힘을 계속 받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이 부어주시는 기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인생의 여행을 하는 동안 모든 상황에 넉넉히 대처할 수 있는 힘을 대주신다.

 

납달리에 대해서는 주님의 축복에 차서 더함이 없는 만족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더 열거할 필요도 없이 이들은 깊고 원대한 경험의 약속을 보장받았다. 즉 안전, 성령의 부음, 능력, 축복, 한없는 은혜 등이었다. 그들이 만약 전진하여 차지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적을 격파한 이 거대한 백성들이 정착할 즈음에 이렇게 질문하였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친애하는 교우여,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승리와 충만한 축복의 경험은 가나안이 광야를 넘어서 있듯이 보통의 교인생활의 수준을 지나서 있다.

 

나는 매우 귀한 실화가 얽혀 있는 한 장소를 알고 있다.

 

그곳은 잉글런드와 스콧틀란드의 국경지대에 있는 하드리안 성벽의 잔해가 있는 땅인데, 남쪽으로 약 80마일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는 한때 로마제국의 세력이 미쳤던 곳으로 당시의 제국에 얽힌 여러 사건들을 그려볼 수 있다. 이 지역을 거닐어 보면 고색이 창연한 고대 성탑들이 혹은 무너진 채, 혹은 예나 다름없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다. 파괴된 성과 지켜진 성에는 몰락과 안전에 대한 비화가 있다. 수백년 전 잉글런드와 스콧틀란드는 원수지간이었다. 당시 국경에 가까운 잉글란드의 한 도인 노섬브란드는 계속 스콧틀란드의 침입을 받고 가축과 곡물을 늘 빼앗겼었다. 그래서 잉글런드 사람들이 국경 근처에 여러 성들을 지어 방어책을 세웠다. 그런데 어떤 성들에는 비밀 우물이 있어서 물 걱정이 없었지만, 다른 성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파이프로 물을 공급받았다. 스콧틀란드의 침입자들은 영악하여서 수로 파이프를 끊고는 성 밖에서 성민들이 기아와 갈증으로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지만 성 안에 비밀 우물을 가지고 있던 성들은 공격을 당하여도 끄떡없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 성들은 난공불락의 성들로서 산 증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성들은 부서지고 무너진 채로 놓여 있다.

 

우리 속에는 누구에게나 생명의 샘이 있다. 그런데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아직 못 찾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자꾸만 밖으로만 나가서 안일과 탐닉에 젖고 있다. 그러다가 얼마 안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는 교인생활로 끝맺는다. 한편 약속의 땅을 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는 유일한 방법을 터득한 그리스도인들은 쉬지 않고 속에 있는 생명의 비밀 원천에서 생명수를 길어낸다. 이들은 예수님이 모든 마음의 소원을 다 만족시켜 준다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향해 행군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습관이나 죄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안일한 생활과 세상에 집착된 생활,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눈들을 모두 무시하거나 제쳐놓아야 하므로 축복의 땅으로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진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의 성취 속에서 만족하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스스로 하나님의 축복을 업신여기고 다른 교인들을 방해하며 사탄을 격려하는 일이다. 어떤 교인이든 주저앉으면 경주에서 이길 수 없다. 승리의 문턱에서 휴가를 바라는 자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단 일분이라도 주님과의 동행에서 벗어나서 딴청을 부릴 수 없다. 손에 거의 들어온 승리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탈락된다면 얼마나 슬픈일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런데도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들이 할당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전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태를 극복해야 한다.

 

당신은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바랬던 적이 과연 언제였는가? 당신은 습관에 따라 교회에 가서 자기의 맡은 찬양이나, 혹은 주일학교를 인도하거나, 광고를 하거나, 안내를 맡거나, 행사에 참석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 축복하시기를 빈다. 그러나 역시 영적나태에 빠질 수 있다. 과거의 세대에 위대한 일을 하신 하나님이 다시 그의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계속 기대하라. 하나님은 능하시다. 우리들의 위험은 게으름에 있다. 그저 상관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혹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사는 태도는 교인의 신앙생활에서 지워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 안에 두신 것을 소유하려면 앞으로 전진하라. 나태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두 번째 위험은 여호수아 22장에 있다. 즉, 불화의 위험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도무지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다. 잠시 이 불화의 내력을 살펴보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7년전에 요단강의 광야 쪽에서 살겠다고 고집했었다. 여호수아는 한 가지 조건, 즉 그들이 가나안 땅의 적을 함께 몰아낸 후에 원하는 땅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내걸고 이를 허락했었다. 본장은 어떻게 그들이 실제로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여호수아는 공적으로 이 지파들이 관용과 함께 싸운 선행을 칭찬해 주고 돌아가는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도록 기원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강둑에 이르러 갑자기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다. 22:24,25을 보자.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이렇게 마을 들을까 봐 그들은 염려한 나머지 요단의 서쪽 둑에 제사용이 아닌 제단을 세워 그들도 요단 건너의 백성들과 같은 족속임을 증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강 이쪽편의 지파들은 단단히 오해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제단의 목적이 경배나 희생을 위해서라고 결론짓고 이는 배도라고 믿으며 하나님과 율법을 무시하는 무엄한 짓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있던 지파들은 이 배도자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이들은 공격 전에 위원회를 구성하여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의 근본외도를 조사하고 우선 강력히 항의하기로 하였다. 조사단은 이들이 불충하고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비난한 후 이 그릇된 처사를 계속하면 무서운 결과가 그들에게는 물론 온 이스라엘에게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두 지파와 반 지파는 조사단에게 자기들의 제단 설립동기는 순전히 하나의 증거물을 세우는 것이었지 예배를 위한 제단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다른 하나님께 드릴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다른 형제들과의 연합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누누히 강조하여 오해를 풀었다. 하마터면 비극으로 끝날 뻔한 것이 오히려 더 가까운 연합이 되게 하였다.

 

여기에는 큰 교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를 일으킬 위험이 얼마나 큰가? 얼마나 오해를 하기 쉽고 그에 따라 많은 오해를 입게 되는지 모른다. 일단 이 위험에 걸려들면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악화된다. 복음적인 교회들이 이 죄 때문에 완전히 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왜 우리들은 소문에 얼른 귀를 기울이는가? 왜 우리는 남의 동기를 최악의 것으로 늘 간주하는가? 왜 우리는 남의 인격에 대한 비난을 재빨리 듣고 몇 배나 과장해서 남에게 전달하는가?

 

오늘날 교회가 이런 종류의 죄에서 벗어난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탄은 험담꾼들을 이용하여 남의 순수한 동기를 악평하고 나쁘게 해석하게 한다. 아무리 주일날 좋은 설교를 듣고 감흥과 감동에 싸여도 다른 형제교인을 중상하고 악하게 말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하등의 유익이 없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에는 남의 모략이나 험담을 받고 마음이 무척 상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목이 막혀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잔인한 핍박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이 받은 상처는 깊은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찬송하고 있지만, 마음은 원망에 차 있으므로 영적으로 시들어간다. 마음에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오해하고 악평하며 미워한 형제들이다. 그렇지만 그 형제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은혜 중에서 자라간다. 반면에 늘 원망하며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험담꾼들은 영적으로 말라간다. 같은 선교회 내에서, 혹은 같은 동네에서, 심지어 같은 교회 건물 안에서 당신과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 중에는 남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남녀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남을 모질 게 판단하고, 성미가 고약하며, 성급히 일을 결정하는 것으로 인생을 출발한다. 그렇지만 비록 우리의 고집이 세어 양보하지 못하고 험악한 입을 다물 수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점차 넘어진 형제를 부드럽게 대해주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짐을 나누어지고 온순한 마음으로 형제를 받아들여 이를 제일 큰 이득으로 생각한다. 논쟁이나 냉소로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형제를 주님께로 데려간다. 불화의 위험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20장에서 본인이 발견한 세 번째 위험은 무지의 위험이다. 축복의 땅에서 이 위험은 치명적이다. 본 장에는 알다시피 도피성에 관한 것으로 요단의 양쪽 편에 각각 3개씩 도합 6개의 도피성을 세우 상대편에서 이용하기 좋게 하였다. 이 성들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마련되었다. 민수기 19장에 그 자세한 내막이 실려 있다. 여기서는 무지나 사고로 인한 죄, 또는 악의가 없이 뜻밖에 저지른 죄들이 자비의 원칙에서 다루어져 있다. 불의의 사고로 죄를 지은 자는 이 성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는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그 다음 가해자는 레위인의 재판을 받고 악의가 없었음이 판명되면 그 성에서 사건 당시에 재임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거주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안전히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당신은 우리들이 짓는 죄가 대부분 무지의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완벽한 성결과 배치되는 것은 모두 죄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당신은 우리들이 부주의와 경박과 남을 오해하는 일로 늘 하나님을 거스리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가? 비록 의도적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죄다. 오!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는 지금 당장 생명의 샘으로 가서 불의의 사고로 무의식 중에 남에게 피해를 입힌 죄를 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피성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의 죄를 보상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피성으로 가서 죄를 고백하고 피로 씻음을 받으면 자유의 몸으로 보호를 받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더 절실하게 주님께로 나아가서 우리들의 봉사가 흠이 많고 유익을 끼치지 못한 사실에 대해 용서를 빌고 정결을 받아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은혜를 모르고 사는 죄에 대해서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겠는가! 우리들의 대제사장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피성에서 언제나 안전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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