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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알란 레드파

봉사의 힘

by 복음과삶 2005. 7. 2.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20장. 봉사의 힘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24:19]

 

이제 여호수아서의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영적생활의 심화와 봉사의 새로운 계시가 절박하게 요청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여호수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들이 연합됨으로 충만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 세대의 가장 큰 신앙문제를 풀어주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고별사는 봉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깊은 체험의 생활로 인도하는 새로운 진리의 계시는 새로운 봉사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봉사가 짐이 되고 싫증이 나는 것은 성경의 말씀으로 진리의 계시를 받고 하늘의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들을 계시하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간증하였다.

 

형제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구원사역을 하신 주 예수님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성화의 사역도 하셔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이 두 가지는 다 절대적인 경험이어야 한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 진리는 우리들의 경험 속에 들어야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알고 증명하고 느낀 것들이라면 봉사의 일들이 짐이 될 리가 없다.

 

여호수아서의 공부를 마치기 전에 나는 본서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다음 3가지 질문을 하고 하나씩 다루어 보기로 한다.

 

1) 여호수아서의 계시는 무엇인가?

2)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참 삶의 체험은 무엇인가?

3) 여호수아서가 바라는 봉사의 수준은 어떤 것인가?

 

첫째, 계시에 관해서 본장의 2~13절까지를 훑어보자. "내가...이끌어내어 내가 보내었고...내가 인도하여 내었었노라...내가...내가...내가..."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켰는데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대명사가 17회나 나온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출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에 모든 힘을 입었다.

 

신약에서 이 진리는 우리들의 구원과 직결되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전적으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잠시 여호수아서의 주석인 신약의 에배소서를 참고해 보자. 특히 2장을 주의해 보자. 첫째 "계시" 가 나온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2:4~6]. 그 다음 "체험" 이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7~9]. 다음에는 "봉사" 가 나온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여기에 계시, 체험, 봉사가 다 나와 있다.

 

그럼 우리들의 생활과 구원에 비추어 어떤 계시가 있는지를 알아보자. 우리들의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님의 전능하신 역사이다.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들의 멍에를 풀고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셨다. 주님은 우리들의 적들을 분쇄시키고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해 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진보를 하는 것은 모두 성령의 덕택이다. 성령의 사역은 당신과 나의 생애를 속박에서 풀어내고 광야에서 충만한 구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들이 죄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성령의 내주하는 능력을 깨닫고 이를 체험케 하는 데 있다. 이 원대한 계획의 종국적인 목적은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 앞에 완전하게 내세우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완전한 위치에 있고 완숙한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계시는 우리들이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안에서 서 있는 것은 전부 주님의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발전이 있고 성장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당신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당신 스스로의 행위에서나 결심에서가 아니고,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선택을 받고 어느 날 성령에 의해 죄의 확신을 받아 갈보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마음을 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신은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날부터 당신이 받은 모든 축복과 성장은 당신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주 예수님의 날이 오기까지 계속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받은 복들이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구원을 받은 그날부터 시작하여 슬픔, 실망, 시험, 기쁨, 그 어떤 경우를 당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것은 여호수아서의 계시일 뿐 아니라, 전 성경의 계시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신령한 체험에 관한 것이다. 15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비추어 백성들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말하였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주를 섬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뜻밖에도 "너희들이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 고 말하였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모순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셨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실제의 경험이 아닌가? 예수님의 주장에 신속히 응답하고서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고 말하고서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마음먹은 대로 살지 못한다.

 

신약에서 주님이 이에 대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우리들은 그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고 하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3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이렇게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성공과 실패 중 어느 편이 더 많은가? 마음은 냉담하거나 아니면 감정의 노예가 되기가 일쑤다. 지속적이고 줄기찬 신앙생활을 당신은 과연 몇 해나 계속해 왔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서도 그와의 교제를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생명이 있을지 모르나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살 수 있다. 우리들은 칭의를 받았을지라도 성화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우리들의 신앙고백과 실제 경험 사이에 있는 커다란 간격을 메꾸는 방법을 시급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이루어 주신 공로로 구속의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의 신령한 체험들은 먼 거리에 있다. 말하자면 신자로서 자격적인 면과 체험적인 면 사이에 뚜렷한 간격이 놓여져 있다는 것은 한심하고 애석한 일이다.

 

나는 우리 각자가 즉각적인 관심으로 칭의와 성화사이, 보혈에 의한 구속과 성령에 의한 성결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심각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현대교회의 부흥은 이 내주하는 생명으로 휘덮여서 넘치는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에 그 참 뜻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계시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곧 무너지게 될 것이다. 또 계시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체험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 계시는 차거워지고, 멀지 않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때 스크로기 박사가 이렇게 말씀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풍성한 삶을 갖고 있지는 않다. 건강을 잃고도 생명을 지속 될 수 있다. 진전이 없이도 활동은 있을 수 있다. 전쟁은 하지만 패배에 그칠 수 있다. 우리들은 봉사의 삶을 살지만 성공을 못할 수 있다. 애쓰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생명을 소유하는 일과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것 사이에 있다. 이 풍성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충만한 생명 속에 놓여 있다. 이 생명은 성령의 오심으로 인해 내게 참다운 사실과 체험으로 인식된다. 많은 교인들이 부활의 정로에 서 있으면서 오순절의 오로(誤路)를 걷고 있다. 용서는 제대로 받았지만 능력은 제대로 못 받고 있다." 우리들은 칭의를 입었지만 성화는 못 받았다. 용서를 받은 것으로 성경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성화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혹자들은 현대교회의 대문제는 교리의 혼란으로 빚어지는 경험의 혼란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50%의 구원으로 철저하게 만족하고 있는 데 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패배와 속박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통해 예시되어 있다. 또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죄의식으로 부터의 구속과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자유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를 예시하였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바울은 다툼과 분열과 성장이 없는 육적인 유치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교인들의 예를 부활과 오순절 사이에서 공포에 잠겨 참된 사역의 정신이 없던 초기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당신은 베드로가 이들에게 서글프고 초라한 목소리로 "나는 고기잡이 간다" 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베드로는 소명감도 사명감도 없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소명감과 사명감이 결여된 사람은 충만한 생활을 살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끝까지 치열한 투쟁에서 견디는 사람은 사명감과 소명감이 있고 단련의 진가를 깊이 인식하고 사는 자들이다. 문제는 우리들의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적은 데 있다. 여호수아의 고별 메시지는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리라" 는 엄연한 말씀으로 귀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놀라운 역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이루셨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도록 기대하시지만 우리는 무력하여 "우리가 주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는 두려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봉사를 기대하실까? 우리들이 이 체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다수의 교인들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철저한 무기력을 매일의 신앙생활에서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들의 소원과 관심과 열심에도 아랑곳 없이 우리들의 육신은 너무도 무력하여 하나님을 전혀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풍족한 생활과 성화의 승리의 생활을 제시받고 있다.

 

나의 무기력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확실한 경험과 함께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살고 있다. 이 심화의 신앙체험을 가지고 산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거듭날 때처럼 분명하고 확연한 체험을 지니고 많은 교인들이 광야에서 나와 풍족한 생활로 옮겨져서 산다. 당신도 지금 이 충만한 삶을 갖기를 희구하고 있지 않은가!

 

스코틀란드의 글라스고우에서 디.엘 무디는 이렇게 말했었다. "뉴욕에서 있었던 어느 날이었다. 오, 얼마나 귀한 날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필설로 이를 형용할 수 없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말하기에도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하나님이 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고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어찌나 놀라운 경험을 했는지 하나님께 제발 이제 멈추어 달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다시 설교를 하러 나갔다. 내 설교는 전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어떤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지 않아도 수백 명의 결신자가 나왔다. 나는 글라스고우 시를 다 받는다 해도 이같은 체험이 있기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무디는 완전 다른 수준에서 새롭고 깊은 심화의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선명한 체험을 가졌던 것이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는 그의 전기에 나와 있듯이 자기 앞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깨닫게 될 때에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마음이 굳은 인도의 금욕주의 자들에게 설교하였는데, 낫 앞에 베어지는 풀처럼 수백명의 영혼들이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는 새 선교사들을 뽑기 위해 잉글런드로 돌아왔었다. 어느 날 그는 앉아서 명상을 하는 중에 전에 없이 자신의 무력함과 무용함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허드슨 테일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느냐가 중요하다." 이날부터 그는 그가 부르는 "교체된 생활" 즉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있는 새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 당신은 이런 사람들은 예외라고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이 신앙의 거인들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을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충만한 삶에 대한 진리를 숨기고 우리들이 50%의 구원으로 만족하기를 바란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을 따르고 의지하며 성경에서 약속한 것을 청구한 사람들이다. 만일 이들의 경험이 예외적인 것이라면 우리들에게는 비극이다. 하나님에게는 편애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평상교인들의 광야의 수준을 능가하는, 마치 우리들의 중생한 후의 생활이 중생 이전과 판이하듯이 전혀 새롭고 높은 체험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향하라" [수24:23].

 

나는 여기서 자신의 간증을 함에 있어 상당히 주저하고 있다. 혹시 영적으로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나는 어느 날 하나님이 이상의 말씀으로 나를 대면하신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설교자로서 내가 버려야 할 우상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담배쌈지였고, 다른 것들은 하나님의 뜻밖에 있는 애착물들이었다. 또 남에게 나누어 줄 줄 모르는 인색한 돈의 우상과 나의 성경관과 다른 형제들은 교제를 거절하는 혹평의 혀를 가지고 있었다. 냉담한 가슴 때문에 기도가 적은 우상도 있었다. 나는 이런 우상들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꺾으신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감히 자신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나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에게는 보다 풍성한 삶이 주어졌음을 날마다 더욱 깊은 수준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시작의 위기로서 과정을 거쳐가는 출발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들을 사모할 때 예수님의 충만을 점점 더 깊게 느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나의 모든 기업을 청구하는 데 있어 종결적인 경험은 있을 수 없다. 당신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살아갈 때에 당신의 용량이 늘어나서 주님에 대한 경험이 확대되고 삶이 더욱 높아진다. 한편 당신 자신은 줄어들고 예수 그리스도는 더없이 아름다운 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봉사를 하려면 먼저 자신을 주께 내맡겨야 하고, 극복을 하려면 우선 순종하여야 한다. 봉사는 단순한 의식 이상의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성품이 주님의 순결을 반영케 하는 일이다. 동시에 이는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희생의 공로로 가엾고 거룩하지 못한자를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끌어 주는 일이다. 주 안에서의 봉사는 내가 칭의를 입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성화가 이루어지고 거룩이 체험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봉사는 믿음의 전부이다. 그것은 자력으로 얻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성결과 거룩을 취하려고 내가 애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내게 내놓으시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들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얼마나 복된 날인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힘과 능력이 되시려고 자신을 제공하신다. 당신은 애써 보았지만 실패하였다. 이제 하나님을 신뢰해 보지 않겠는가? 당신은 자기 힘으로 힘써 보았지만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주님의 능력을 붙잡아 보지 않겠는가? 당신이 정말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들이 세속의 것들에 매달려서 살아가기 때문에 세속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이니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할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당신이 더 풍성한 생활로 들어가기를 원하면 당신의 사랑으로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시험해 보라. 갈보리를 쳐다보는 시야에 어떤 불순물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한때 어거스틴은 자신의 생활원칙을 이렇게 말하였다. "내 자신에게는 강철같은 심장을, 동료에게는 사랑의 가슴을, 하나님에게는 불타는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바라시는 봉사의 생활의 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당신에게 제시한 참된 봉사와 진실된 경험이다.

 

"너희 섬길 자를 오날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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