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4)
M.R 디한
은혜 더하기 제로(0)
‘좋은 선물은 작은 꾸러미 속에 전달된다’는 잘 알려진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경우에는 그것이 사실이다. 이 갈라디아서는 아주 긴 서신에 속하지 않고 단지 여섯장으로 된 비교적 간략한 서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교리들과 실제적인 진리들이 가득 함축되어 있다. 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는 아무도 은혜, 믿음과 행위,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서신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1절), 소아시아 지방의 한 지역인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전달되었다(2절). 그리고 서신의 주제는 3절에 주어져 있다.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서신의 핵심적인 단어는 은혜이며, 은혜의 열매는 평강이다. 4절에서 우리는 절망중에 있는 죄인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기초를 발견한다. 이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은혜의 충만함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다음 사실들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2.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 그것은 이 현재의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다.
3. 이 은혜의 근원.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목적이다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4.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이유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를 적절히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 대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나 그것을 충분히 묘사하는데는 모두 실패했다. 어떤 이는 “은혜란 온전히 범죄하고 파멸에 이른 죄인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무 공로없이 거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은혜란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정의가 사실이긴 하나 그것은 단지 피상적인 묘사에 불과하다. 은혜란 지극히 천한 죄인을 지극히 높은 하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죄인에게 어떤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은혜는 인간의 모든 노력, 행위, 의, 혹은 선을 일절 배제한다는 것을 유의하라.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아주 적은 행위나, 공적이나, 인간의 의나 노력이라도 은혜에 덧붙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바울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은혜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배제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다. 디모데후서 1:9에 나와있는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귀기울이라. 우리 구주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름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당신은 이 구절에서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공헌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다. 그분이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기로 뜻하셨고, 그분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 일을 결정하셨다. 그분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고(엡 1:4), 이러한 구원의 은혜는 세상이 시작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손으로 그것을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없다.
한나의 정의
우리가 이 은혜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의 본질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이 갈라디아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율법주의 교사들에게서 구원은 은혜 ‘더하기’ 행위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들의 행위와 일, 율법 준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바울은 이 서신을 쓰게 되었는데, 즉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보존되고 마침내 은혜로 하나님 앞에 흠없이 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은혜에 지극히 적은 분량의 행위라도 더한다면 그것은 은혜를 전적으로 망쳐버린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상 2:6-9의 감사의 기도에서 은혜에 대한 놀라운 정의를 보여준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6-9).
이 은혜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케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그분이 또한 그것을 완성하신다. 그것은 모두 은혜요, 모두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나는 고백한다.
그분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가난한 자를 일으키기도 하시고 빈천한 자를 거름구덩이에서 건지기도 하시며, 추하고 무가치한 걸인을 하늘나라 보화의 상속자로 만들기도 하신다. 사무엘상 2:9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은 구원하실뿐만 아니라 안전을 보장하기도 하신다.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이제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이 확실히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지극히 적은 인간의 도움도 은혜를 완전히 망쳐버린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로 밀미암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로마서 11:6의 바울의 말에 다시 한번 귀기울여 보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행위되지 못하느니라.”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바울이 이 은혜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지 주의하여 보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3,4).
이 말씀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셨다고 한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나 여기서는(갈 1:4) 예수님이 자기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분의 희생은 자발적이었다. 그분은 죄인 대신 죽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 구절은 “그가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한다. 인간의 말로써는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는 이 말씀의 깊은 의미가 완전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 말씀 속에는 거래와 교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고서,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신다. 그는 그 죄인(우리)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어떠한 값이라도 지불하시려고 한다. 그 값은 율법의 형벌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묵인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납하시기 전에 먼저 반드시 죄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가 제거되기 위해서는 형벌이 집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형벌이란 영원한 사망,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지불할 수 없다.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주께서 관여하신다. 율법에 의하면 죄인은 저주받고 정죄되며, 영원한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죄인을 구원할 것을 제안하신다. 그렇지만 먼저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어야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공의를 범할 수는 없다. 그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자신의 말씀을 무시하실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인간의 죄를 지고 그것을 책임지겠다. 내가 그 형벌을 지고 그 죄인을 대신하겠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본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문구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게 되자, 하나님은 그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시키셨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나, 성경은 명백히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선지자 이사야는 수백년 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그 형벌을 치르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좀더 깊이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21절).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죄인이 아니라)가 되셨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자,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그대로 보고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바라보셨을 때, 죄 - 우리의 죄 - 를 보게 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낯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저주스런 것이 되었다. 이것은 실로 엄위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갈라디아서 3:13에서 바울은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그러자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셔서 죄로부터 낯을 돌리셨다. 이제 우리는 영광스런 완성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은 바로 그의 몸으로써였다. 그리스도의 영은 죄에 오염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을 때, 그 죄는 단지 예수님의 몸과만 관련되었고, 그분은 그 몸으로써 감당하신 그 죄 때문에 죽으셔야만 했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분이 담당하신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는데 그분은 속죄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드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죄를 위한 댓가로서 죄를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기에 진정한 문제가 있다. 성경이 그 해답을 제시한다. 예수님의 영혼은 우리의 죄에 오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분은 그 몸으로 담당한 그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죄없이 온전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기 위한 한 제물(속죄제물)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 제물은 죄의 형벌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담당하신 우리의 죄에 대한 댓가로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분의 영혼은 음부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분은 그 영혼으로써 죄의 형벌을 당하셨을 때 다음과 같이 부르짖으셨다.
“내 마음(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
그분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제물로서 그의 더럽혀지지 않은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이것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사 53:10).
그렇다. 그것은 또한 갈라디아서 1:4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것은 바로 ‘그가 그 영혼을 드리셨다’는 말씀과 동일하다. 영혼이 진정한 자아이다. 몸은 영혼의 집에 불과하며, 영혼을 위한 표현 수단에 불과하다. 영혼이 진정한 여러분 자신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의 육체가 죽는다는 것일뿐, 그의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죽음에 넘겨주셨지만 자신의 영혼(바로 예수님 자신)은 죄를 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리고 그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되었고, 그의 부활하심으로써 인증을 받았다. 그의 부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하신 증표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음부로부터 그의 영화롭게 된 죄없는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댓가가 지불되지 않는 죄는 하나도 없다는 데 대한 증거이다. 이제 그 값이 다 치뤄진 것이다.
이제 다 지불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모두 이루셨으니, 모든 것이 다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무것도 여기에 첨가될 수 없다. 단지 그대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을 자기 자신에 대한 아무런 주장없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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