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2)
M.R 디한
전혀 새로운 은혜의 메시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1, 2).
신약성경 안에는 27권의 책이 있다. 이 27권의 책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 사람, 바울 사도에 의해 기록되었다. 만일 히브리서가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인정한다면 신약성경 27권중 14권이 바울에 의해 기록된 셈이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두드러진 사도이다. 그의 서신은 성경의 다른데서는 발견되지 않은 계시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신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의 기능과 활동 및 장래에 대한 진리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을 것이다. 바울의 메시지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이요, 새로운 메시지 -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계시로서 하늘로부터 직접 받은 메시지 - 였다. 이 새로운 메시지의 핵심은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율법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전 구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민족에만 국한되었으며, 이방인들은 유대인이 됨으로서, 즉 할례의식에 순복하고 이스라엘민족의 율법과 의식 아래 처함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유대교로 개종한 자라 불렀다.
인간 바울
바울이 은혜의 메시지를 들고 나오자,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천국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던 열한 사도들은 그 일을 크게 염려했다. 신약성경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인 까닭에 우리는 바울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언급할 수 있는데 이는 유대주의자들의 그러한 반대와 거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시민의 아들이었다. 그는 다소에서 세속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예루살렘에서 위대한 스승 가말리엘 문하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행 22:3).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종교기구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으며 바리새파라는 가장 엄격한 종파의 뛰어난 일원이었다. 그는 유대교에 헌신적이었으며 자기가 믿는 종교가 유일한 참 종교라고 옹호하는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는 스데반을 순교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의 잔혹한 대적이 되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려고 파송받아 가는 도중에 주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극적으로 회심하였다. 그는 3일 동안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다가 그 다메섹의 멸시받는 신자 중 하나인 아나니아에게 돌봄과 침례를 받고 이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울의 준비
바울은 회심한 후 잠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으나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곧 그곳을 떠나 고향인 다소로 갔다. 그리고 나서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보냈는데 거기서 그는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과, 은혜시대에 관한 새로운 메시지를 계시받았다. 그가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된 것들을 듣고 본 것은 이 아라비아에 있을 때였음이 틀림없다. 3년후에 그는 다소로 돌아왔는데 거기서 바나바가 그를 찾아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갔다. 안디옥에서 그들은 1년간 수고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모습을 보았다.
1차 전도여행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1년간 사역한 후에 가난과 핍박 중에 있는 유대인 제자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전부가 사도 바울의 여행과 사역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앞에 그 일을 보고하고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설명할 것을 요청받았다(행 15장). 그의 대적들이 그가 이단을 전파한다고 고소했기 때문에 사도들 앞에서 보고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은혜의 메시지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온 그리스도의 메시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경우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왕국메시지를 지닌 베드로와 나머지 열한 사도는 무대에서 사라졌고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제쳐지고 왕국은 연기되고 이제 바울이 가져온 은혜의 새로운 메시지가 온 세상에 나아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바울이 전파한 메시지와 사도들에게 맡겨진 메시지간의 예리하고 분명한 차이점을 주목할 수 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인 반면 ,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다. 이 점 또한 인정되었는데 갈라디아서 2:7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7, 9절) 사도들은 왕국 메시지를 가지고 유대인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다. 단 한 번 한 사도가 이방인에게 갔을 뿐인데 즉,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마지막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행 10장). 사도들은 유대 지방 이외에는 아무런 교회도 세우지 않았고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에게만 전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교회가 흩어진 후에도 사도들은 줄곧 예루살렘에 머물며 이스라엘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스데반이 죽은 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그런데 이 흩어진 자들조차도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때에 ...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행 1:19).
그러다가 흩어진 자들 중 몇 사람이 헬라인(헬라파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사도들이 그 일을 알아보기 위해 바나바를 파송했다(행 11:22). 그러나 바나바는 이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것을 보고 자기를 파송한 사도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즉시 다소에 가서 바울을 찾아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다. 바나바는 사도들의 메시지는 안디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바울이 은혜의 새로운 메시지를 떠맡은 사람임을 알았다.
열한 사도는 어떤 이방인 교회도 세우지 않았다. 이 세대를 위해 보냄받은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바울이었다. 바울의 사역의 결과로 안디옥, 고린도,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등지에 이방인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만일 우리가 바울의 독특한 메시지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바울이 전파한 복음과 사도들의 메시지를 조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배경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바울이 육체를 따른 동족들에게 극심한 핍박을 받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더러운 개요, 은혜 언약 밖에 있는 자들로 취급하도록 가르침 받아왔다. 그러기에 바울이 그러한 이방인들에게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극렬하게 반대하고 마침내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배경을 기억함으로써 바울이 가는 곳마다 늘 자기의 사도권을 변호하도록 요청받은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바울을 사도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도들로부터 위임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도들의 메시지
이 서론적인 글을 마치기 전에, 열두 사도들에게 주어지고 또 그들에 의해 전파된 왕국메시지와, 바울에게 맡겨진 은혜의 메시지간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례요한과 사도들에 의해 전파된 천국메시지는 마태복음 10장에 요약되어 있다. 이 메시지는 오직 사도들과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었다. 다음 기록을 보라.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이 구절을 오늘날 귀신을 쫓아내고 무분별한 치료행위를 하는데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구절로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권능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는 먼저 자기가 열두 사도들 중 하나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은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그 뒤에 열거되어 있다.
이어서 그들의 사역을 제한하는 명령이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 그 말씀은 명명백백하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 6).
왕국 메시지는 교회를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지였다. 이제 그 메시지에 주의하라. 그것은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적 회개의 조건하에 메시야 왕국이 세워진다는 제안이었다. 이는 바울이 전파한 메시지가 아니다. 그의 메시지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것이었다. 이어서 왕국의 표적이 뒤따른다. 왕국 메시지의 증거는 표적과 기사들이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이 구절을 신유(神癒)를 지지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극히 간단한 이성과 논리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사도들은 병든 자를 고쳤을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였다.
이어서 이 일꾼들에 대한 지원을 살펴보라. 그들은 어떤 사례도 받아서는 안되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9, 10)
이 왕국메시지를 소유한 전도자들은 전적으로 자선에 의존해야 했다. 이것을, 이 마태복음 10장을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처신을 지지하는 근거로 인용하는 일부 사람들의 방법과 비교해 보라.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고, 얼마나 그것이 오늘날 자기가 사도적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방법과 대치되는지를 보라.
바울의 메시지
바로 위와 같은 것이 사도들이 전한 왕국 메시지였다. 그러나 교회시대가 완성되고 이 세대가 끝날 때까지 사도들의 계획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후에,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은 얼마나 대조되는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왕국 메시지와, 이스라엘이 왕국 제안을 거절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은혜의 메시지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일어나는 모든 혼란의 근본원인이다. 만일 하나님의 시대적인 경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성경은 온통 모순투성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왕국 메시지를 교회에 적용하고, 율법과 은혜를 뒤섞는 것은 혼란과 혼돈과 광신주의와 오류와 오해를 초래한다.
예컨대, 어떻게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원수들을 진멸하고 그 남녀와 자녀들을 죽이며 그 성읍들을 불태우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온 세상에 구원을 전파하라고 명하신 신약성경의 은혜의 메시지를 서로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으로만 가라’고 하신 말씀과(마 10장), 다음과 같은 로마서 10장의 메시지를 서로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2, 13).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시대에 간음하는 남녀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온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는가? 율법은 부모에게 패역한 자식을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했으나(신 21:18-21), 은혜는 탕자를 사랑으로 영접했다(눅 15:11-25). 율법하에서 강도는 정죄를 당했으나(출 21:16), 십자가의 강도는 용서를 받았다.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고 말하지만(출 21:24), 은혜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말한다(롬 12:20).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세대적인 경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구절들을 조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지만 은혜는 죄인을 용서한다.
사도 바울이 핍박을 당하고 결국 처형당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왕국 메시지와 은혜 메시지간의 차이를, 율법과 은혜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을 세대적으로 연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 간의 모든 오해와 분열의 원인이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문제의 90%는 해결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지를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단지 혼란만 야기시킬 뿐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것은 바로 그러한 해로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기도하건대, 갈라디아서에 대한 본서의 메시지가 율법주의의 휘장을 제거해버리고, 많은 사람들로 그 눈이 열려 은혜의 자유를 보게 하여, 은혜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은혜로 살아갈’수 있게 하는데 기여하기를 소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이끌림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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