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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5)

by 복음과삶 2005. 7. 2.

 

갈라디아서 강해(5)

 

M.R 디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6,7).

 

이 구절의 중심문구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이 처음에는 바울의 은혜의 메시지를 그처럼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나중에는 율법주의적 유대주의 교사들의 가르침 - 이들은 바울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불신케 하고 신자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으며 모세의 율법에 구속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 에 그처럼 쉽게 미혹되고만 그들의 변덕스러움에 대하여 놀라움과 좌절감을 표하고 있다. 바울은 오직 은혜만으로(은혜+0) 구원받는다고 그들에게 전파한바 있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그 자신의 몸으로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주셨던 주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바울은 일찌기 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로 행복하고 기쁘게, 그리고 은혜의 자유를 누리면서 주님을 섬기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압박감이나, 구원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은헤로 큰 구원을 받은데 대한 감사와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에게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알려 주었기에 바울을 열렬히, 헌신적으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지금과 같이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자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움으로 그들을 다시 종삼으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은 받았으나 행위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은혜에 근거하지 않고 행위와 율법 준수에 근거하도록 만듦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주의적인 그릇된 종교에로 개종시키려는 자들이었다. 이 율법주의적 유대주의 율법 교사들은 신자들을 다시금 종삼아,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게”(갈 4:10) 하려고 했다. 그들은 골로새서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바울의 경고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이 갈라디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들이 경건한 척하며 폄론하는 것과 임의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에 미혹되었으며, 은혜와 율법의 혼합된 복음을 전하는 그 교활한 설교자들에게 속임을 당했다.

 

바울을 불신케 함

 

자연히 이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불신케 하고, 그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그들의 말은 바울이 거짓된 복음을 끌어들였으며, 적어도 불완전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금이 가게 만들었으며,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불신케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이 거짓 교사들에게 매혹되어 갔으며, 점점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식어갔다. 이 때문에 바울은 매우 슬퍼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들은 다름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로 불러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울을 열렬히 사랑했었는데, 이제는 돌연히 율법주의적 교사들에게 충동질 받아서, 바울을 거의 원수와같이 여기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너희를 불러낸 자를 이같이 속히 떠난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란 말씀의 분명한 의미이다. 여기에서 “불러낸 자”는 바울 자신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떠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가 다시금 떠날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이 이 서신에서 바로 잡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릇된 가르침이다.

 

바울은 그들이 유대주의로 개종한 자들에게 악영향을 받아서 바울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데 대해 슬퍼하고 있으며, 그들의 그러한 변덕스러움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뽑아줄 만큼 바울을 사랑했었다(갈 4:15). 또한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사자와 같이 영접했었다(갈 4:14).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개종한 율법주의자들)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15-17절)

 

너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던 나에 대한 너희의 이전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때문에 나를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느냐? 이것은 너희가 율법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너희의 생활 가운데 받아들인 결과가 아닌가? 바울은 “만일 그 열심이 사랑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외식적인 열심에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그들이 너희를 열심내게 하나(너희가 그들의 열심에 감동을 받으나) 그것은 선한 열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친구를 이간시키며 분열을 조장하고 편협한 신앙과 불관용을 조장하려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유대주의 교사들)은 너희에게 아첨하고 친절히 대하면서 너희를 현혹시키려고 열심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존경할 만한 것이거나 가치있는 것이거나 어떤 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나에게서 너희를 분리시켜서 자기들의 편이 되게 하며, 너희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서 아첨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다른 복음

 

바울은 이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일컫고 있다. 그들의 근엄한 가르침들은 복음처럼 들렸지만 바울의 복음이 아니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7).

 

유대주의 교사들이 끌어들인 메시지는 매우 호소력있고 건전한 것처럼 들렸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는 신자들이 그 오류를 알아채지 못한 잘못이 뒤섞인 진리들이 많았다. 그들의 율법주의는 복음적인 표현들로 기막히게 위장된 까닭에 의심치 않는 갈라디아 신자들은 그 이단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단순히 성경을 인용하고, 예수님과 은혜와 칭의와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서 다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밖에 또 무엇을 믿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엄청난 속임수

 

바울의 메시지를 부인한 이 율법주의자들은 간교한 거짓말장이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미혹하는 자들, 꾀는 자들’이라고 했다(갈 3:1).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근엄한 폄론에 속지 말라고 호소하면서, 그것은 또 하나의 복음처럼 들리지만 전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과 은혜를, 그리고 믿음과 행위를 혼합할 수는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7).

 

특히 7절의 한 단어에 주목하라. ‘변하려 한다.’ 이 단어는 원어로 ‘메타스트레포’인데, 성경낱말사전에는 ‘비틀다, 곡해하다’로 풀이되어 있다. 이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곡해나 왜곡은 하나님의 은혜에 어떤 것을 더함으로 행해진다. 이 거짓 교사들의 경우에 그것은 은혜에 어떤 것을 덧붙여 전파하는 것(은혜+어떤 것)이었다. 그들은 은혜의 복음과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전파했다. 그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그 다음에는 행위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을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곡해 내지 왜곡시킨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매우 흥분되어 그의 모든 서신들 중에서 극히 의미심장한 두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이것은 참으로 강력한 말이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잃어버림을 당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밝히기를, 나의 은혜의 복음을 공격하고 있고, 너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율법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은혜로 말미암은 너희의 구원이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또한 은혜로 구원은 받지만 행위가 있어야만 보존된다고 전하는 교사들은 복음을 왜곡시키는 자들이요, 여전히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했다. 율법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으며 다만 죄인을 저주할 뿐이다. 그리고 너희 자신을 율법 아래 놓는 것은 그 저주 아래 자신을 놓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지고 9절에서도 다음과 같은 깜짝 놀랄만한 정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그러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것은 은혜의 메시지였다. 복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은혜이다. 만일 당신이 듣고 있는 메시지가 복음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려면, 오직 ‘이것이 은혜의 메시지 -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오직 은혜의 메시지인가’를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참된 복음을 밝히는 시금석은 은혜이다. 만일 그 메시지에 은혜가 배제되어 있거나, 칭의나 성화의 수단으로서 율법이 은혜에 혼합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바울은 이 모두를 갈라디아서 2:21에 요약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의가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 말은 하나님이 헛되이 자기 아들을 죽게 했다고 비난하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모든 법적인 요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인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것을 위해 일하면, 당신은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어떤 행위 때문에 당신을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빚을 지시는 셈이 된다.

끝으로 로마서 4:4 말씀을 주목하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만일 당신이 열심히 일해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거나 당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구원을 품삯(노동에 대한 댓가)으로 지불해야 하고, 당신은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연히 그것을 당신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아무도 스스로 노력하여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만약 우리에게 은혜로 천국길을 출발하도록 허락하신 다음에, “이제 네 스스로의 힘으로 계속 가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긴 했지만, 그 후로 내가 계속 달려서 여기에 도착했다”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은혜는 교만의 죽음이다. 은혜는 모든 자만심을 죽여버린다. 하나님의 은혜 만큼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교만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거들먹거리며 활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혹 당신이 당신의 구원에 대해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셨다면, 당신은 천국에서 뽐내고 다니는 지극히 골치아픈 존재가 될 것이다. 천국에서는 결코 그러한 일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결코 그러한 말을 하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은 누구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전에 무디 성경학교의 교장이셨던 고(故) 제임스 그레이 박사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네

주님을 믿은 이후로 은혜로 거저 받았네

자랑도 버렸고 교만도 버리네

나는 다만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네!

죄인은 마음속에 고통이 가득할 때도

자기 구주를 사랑하면서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한다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네

나는 다만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그것이 전적으로 은혜로 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을 위한 한 가닥 희망이나 빛도 얻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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