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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6)

by 복음과삶 2005. 7. 2.

 

갈라디아서 강해(6)

 

M.R 디한


 

복음을 변호하면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사도 바울은 자기의 원수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도 좋을 만큼 가장 은혜롭고, 참을성이 있고, 사랑이 넘치며, 관대한 사람이었다(롬 9:3). 바울이 비록 인내하고, 사랑이 많고, 인자하고, 관대하고, 오래 참아주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얼빠진’ 사람이거나 ‘뼈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별로 핵심적인 일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조차도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었지만 진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아주 엄격하였다. 바울은 결코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의 처신에 있어서 매우 은혜롭고 관대하였지만 결코 용납지 않으려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한가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변질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은혜로써 구원받고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받지 않는다는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대함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란 오직 은혜로써(은혜+영(0)) 구원받고 보존되며,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케된다는 사실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하였다. 따라서 이 관대한 사도도 거짓된 율법주의적 선생들 - 은혜로써 구원받은 이후에는 행위로써 보존된다고 거짓되이 가르침으로써 갈라디아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망쳐 놓았던 자들 - 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이것을 변질된 복음(갈 1:7, ‘다른 복음’)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님

 

‘바울은 은혜를 통한 구원과 율법으로부터 건짐받은 것을 전파한 점에 있어서 잘못되었다’라고 하는 비난에 대하여 그는 갈라디아서 1:10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라고 생각하느냐? 만일 내가 너희와 같이 인기있는 메시지인 행위와 인간의 공로와 인간의 의를 전파하였다면 이러한 모든 핍박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거짓 선생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하늘로부터 직접 받았었다. 그래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완전하게 제시되지 않은 새로운 메시지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아직도 천국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전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을 전한 것[천국 열쇠를 사용한 것-역자 주]외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중 단 한 사람도(베드로를 포함하여) 유대인 이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은혜의 메시지를 가지고 와서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했을 때 그는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율법주의적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이곳 저곳으로 따라다니면서 이방인 회심자들을 바울의 메시지로부터 돌이키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반대하는 이유

 

바울은 이 율법주의적 선생들에게 사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열 한 사도에 의해서 세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전한 은혜의 교훈은 거절당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의 권위도 의문시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바울은 끊임없이 변호하는 입장에 놓여졌고 자기의 사도권과 권위를 입증하도록 요청되어졌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것들을 변호해야만 했다.

 

1. 자기가 사도로 임명된 곳

2. 자기가 전파한 은혜의 메시지

3. 이방인을 위한 자기의 사역

 

그가 사도로 임명된 것은 의문시되었다. 그들은 바울의 권위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른 사도들에게서 천거서(임명장)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도들이 전한 ‘천국 메시지’와는 달리 그가 전한 ‘은혜의 메시지’는 배척되고 부인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다. 그리고 셋째로 이방인을 위한 그의 사역이 비난되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아직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국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되었고 천국은 연기되었다. 따라서 ‘천국 복음’이 이 세대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등한 ‘은혜의 메시지’로 대치되었다.

 

이 세가지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변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자기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1. 그는 갈라디아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신실함을 입증토록 한다. 그는 ‘너희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자임을 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였던 사실로써 나의 권위가 입증된다’라고 말한다(갈 1:10).

 

2. 그는 자기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주장한다(갈 1:11,12).

 

3. 그는 율법주의적 유대교인으로서 자기가 누렸던 과거의 평판과 자신의 기적적인 회심 사건을 회상시킨다(갈 1:13).

 

4.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어떠한 사도들도 만나보기 훨씬 이전에 자기가 받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사도들이 전한 ‘천국 메시지’와 바울이 전한 ‘은혜의 메시지’ 사이의 차이점이 설명되었다(갈 1:14,15).

 

5.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바울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이외의 어떤 새로운 진리도 그에게 더하여 주지 못했다(갈 1:16,17).

 

6. 사도들은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사역을 인정하였으며 그것에 동의하고 그의 메시지를 보증하였다(갈 2:7-10).

 

하나님께 받은 바울의 메시지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계시의 원천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하늘로부터 온 새로운 계시였다. 그는 이 복음을 아마도 그가 회심한 후 ‘아라비아 3년간’의 수련 기간에 받았던 것 같다. 여기서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는데, 그 중의 대부분은 바울이 말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이 진리들이 구약성경에서는 발견되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이것이 아직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 은혜의 메시지를 사도들에게서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도들 자신은 그것을 완전히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별한 계시였으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3,5절)

 

그러면 이 비밀의 새로운 계시는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여기 에베소서 3:6에 나와 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이것은 새로운 계시였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자기에게 특별히 맡겨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이것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였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메시지는 한 민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대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방인은 유대교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했다. 그런데 바울은 거저 구원 얻는다는 은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어도 그리고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도 은혜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바울의 메시지에 의해서 반대자들이 격동되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진리로서 영구적인 것으로 확립되어져야 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것같이, 제1차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은혜의 메시지를 전했었고, 그래서 신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넘쳐났었다. 그런데 마침내 어떤 선생들(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와서 그들을 분란케 했던 자들과 같은 이들)이 와서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켜 버렸다. 이에 대해서 사도행전 15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1,2절)

 

행복했던 안디옥 교회는 이 율법주의적 개종자들 때문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적지 아니한 다툼이 있었다. 그것은 난폭한 집회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제의하였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다. 바울은 ‘혹평’을 무릅썼고, 거짓 복음을 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신자들)에게 할례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5)

 

이것은 공격적인 말이었다. 그래서 곧장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행 15:7)

 

베드로는 자기가 과거에 체험했던 일을 증거하고서, 자기들도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이방인에게 강요치 말자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열렬한 변론으로써 자기의 말을 맺고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0,11)

 

이 후에, 바울이 나서서 자기의 체험을 자세히 언급한다. 그리고 나서, 이 회의의 의장인 야고보가 자기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행 15:19)

 

결국 바울이 율법 없이 은혜만을 전파한 것이 옳았다고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보내기로 했다. 그 편지는 간단하지만 분명했다.

 

“…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하여 가로되,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러한 명령을 도무지 하지 않았노라.”(행 15:23,24)

 

그 판결은 이러했다 - ‘이방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 행위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 문제는 이미 2000여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회심자들을 괴롭혔던 그 평화의 교란자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분주하게 떠들어대면서, 그들의 변질되고 왜곡된 율법주의적 복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패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의탁하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만일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 규정들을 계속적이고 어김없이, 완전무결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을 마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구절들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란다(갈 3:10-12).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으로써 구원받기 위해서는 완전무결하고 지속적인 순종이 요구된다. 만일 죄인이 율법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면 믿음은 헛것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희생은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일대 실책이 되어버릴 것이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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