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7)
M.R 디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사도 바울은 자기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갔으며,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율법주의적인 거짓 선생들에게 부인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직접 사도로 임명받았으며, 따라서 그의 메시지도 하나님께 직접 계시받은 것이었고,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2,13)
이 약속은 오순절 후에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이 계시는 바울 서신, 베드로 서신, 야고보 서신, 요한 서신, 유다 서신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새로운 계시가 주어진 것은 특별히 바울을 통해서였다. 바울은 거듭 거듭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계시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인)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아라비아에서)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 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 1:15-19)
하나님께 받은 계시
바울은 이상의 구절들에서 자기의 메시지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님을 나타내 보이려고 매우 애쓰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사도들에게서 받지 않고 직접 하늘로부터 받았다. 바울은 그가 회심한 후에 가르침을 받으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로 가지 않았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근본적인 수련을 쌓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받았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도들의 메시지가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몸 -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 의 비밀에 대한 새로운 계시였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의 3년을 마치고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던 것도 바로 이 ‘아라비아 3년’ 이후의 일이었다. 바울은 그들과 단지 2주간을 함께 지냈는데, 그들은 바울이 계시받은 것 외에 무엇을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전혀 없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계시 때문에 의심을 받고,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갈라디아서 1:20에서 강력하게 단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에 주의하여 보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맹세로써 확언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 말에 대한 신적 권위를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에 반대하고 그를 배척했지만, 이방인 신자들은 그의 말을 기뻐하였다.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에게서 떠난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포기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 1:22-24)
예루살렘 대회의
갈라디아서 2장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첫 번째 교회 회의에 관한 기사로 시작된다. 이 회의가 열리게 된 동기는 모세의 율법과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다. 이 율법주의적인 평화의 교란자들은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이르러, 바울의 은혜의 메시지를 반대하면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유대인이 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행 15:24).
이에 관한 분쟁이 매우 심각했으므로,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위원회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사도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울이 회심한 이후 17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는데, 바울은 이 장(갈 2장)에서 이 회의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다. 우리는 사도행전 15:23-31에서 이 회의의 최종 결정 사항을 이미 보았다. 이것은 바울의 은혜의 메시지를 인증하는 내용이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은 은혜로 된 것이고,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 자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1,2)
사적인 만남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적으로-역자 주) 만나기를 요청했다. 이것은 그가 그들에게 원만한 이해를 촉구하고 함께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에 대하여 공동 전선을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시험적으로 이방인 디도를 데리고 갔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율법에 따라 디도에게 할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바울 자신의 메시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먼저 그들(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갔던 거짓 선생들의 주장을 침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말하기를 디도의 할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다”(갈 2:4).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은혜에 관한 자신의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5).
위대한 결정
바울은 자기의 대적들을 침묵시키고 나서, 이제 사도들에게 자기의 특별한 사명을 설득시킨 결과 원만한 동의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저 유명한 이들(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갈 2:6).
사도들과의 이러한 협의(회의)를 통해서 바울의 위치가 변한 것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그의 입장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은혜의 메시지는 사도들이 전한 천국 메시지와 모순되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심을 샀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오순절 때에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는 이러하였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메시지를 결코 전하지 않았다. 오순절날 베드로를 통해서 증거된 메시지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 때에 거기에는 이방인이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뿐이었다(행 2:10). 베드로는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한 침례(세례)’를 증거했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침례(세례)가 믿음에 대한 증거로 뒤따르게 되었다. 즉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에 있어서는 침례(세례)가 먼저이고, 죄 용서함 받는 것은 나중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있어서는 회심(회개)이 먼저이고, 침례(세례)는 나중이었다.
문제가 야기됨
그러면 누가 옳았는가? 베드로였는가, 바울이었는가? 이 질문은, 만일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끝나버린 ‘율법시대’(율법의 경륜)와 오순절 이후에 시작된 ‘은혜시대’(하나님의 은혜의 경륜)를 구분할 때에만 해답되어질 수 있다. 베드로는 율법시대가 끝나기 전에 회심했고, 바울은 은혜시대가 시작된 이후에 구원받았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은혜의 경륜’이라고 불렀다(엡 3: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대적인 진리를 증거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여,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세대적인 방법 이외의 그 무엇으로 베드로의 메시지와 바울의 메시지를 조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각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를 세대별로 구분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율법시대(율법의 경륜)와 은혜시대(은혜의 경륜) 사이의 다음과 같은 대조에 주의하기 바란다.
율법하에서 완고하고 패역한 아들이 돌로 침을 당했다(신 21:18).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방탕한 아들도 아버지께 영접을 받고 용서를 받는다(눅 15:20). 그리고 율법하에서 안식일에 나무를 주워서 밥을 짓는 자가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민 15:35).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우리는 복음의 완전한 자유 안에 있으며, 죽음의 위협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약속 때문에 그를 섬긴다. 율법하에서는 안식일에 불을 지펴서 음식을 데우거나 집안에 전등불을 켜는 자가 모두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야 되는데, 그렇다면 장의사들도 모두 꼼짝달싹하려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안식일에 사람이 죽임을 당해도 꼼짝달싹 못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당연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율법하에서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죽임을 당해야 했다(레 20:10).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용서가 주어졌고, 그 여인은 예수님의 죄용서함의 말씀과 함께 권면을 받았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그러면 우리는 동일한 죄에 대하여 전적으로 다르게 취급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는가?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율법시대하에서와 은혜시대하에서의 하나님의 경륜적인 다루심(dispensational dealings)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세대적인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것만이 성경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시대(세대, 경륜)를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베드로와 바울
이 부분도 역시 베드로의 사역과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대한 답변이다. 베드로는 천국 메시지를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마 10장). 그것은 이스라엘인에게 국한된 것이었고, 민족적인 회개에 근거하여 천국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고 메시야를 배척했다. 그리하여 천국 성취는 일시적으로 철회되었다. 즉 천국 성취는 연기되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사역은 끝이 났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시대에 새로운 은혜의 메시지를 계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한 이 새로운 메시지의 전달자로서 바울을 선택하셨다. 이제 사도들은 장면에서 사라지고, 바울이 대신 등장하여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인 16∼28장의 중심 인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세대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던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행 15장), 모든 사람에게 만족될 만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행전 15장의 기사를 바울이 우리를 위해서 기록한 것으로 여기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 대한 고발자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그 후의 기사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은혜의 복음,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천국 메시지를] 맡음과 같이 한 것을 [사도들이]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이스라엘)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 2:7-9).”
이제 이로써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스라엘로 가도록 되었다. 그러나 율법시대는 이미 끝났고, 이스라엘은 교회시대가 완성될 때까지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천국 메시지는 교회시대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취급하시기까지 철회된다. 우리는 이제 은혜 시대에(은혜의 경륜 속에)있고, 율법시대는 이미 끝나버렸다. 그래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사역과 함께 장면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들에 대한 최종적인 기사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와 있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직 교회시대가 끝난 후에야 천국 메시지는 다시 전파되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이 예고되고 사도들의 사역이 다시금 재개될 것이다(마 19:28).
이 장을 마치면서, 메시지를 요약해 보자.
이 세대를 위한 메시지는 이러하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스스로 율법 아래 들어가는 것은 저주받으러 들어가는 것이며, 스스로 잃어버린바 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죄인은 율법의 행위없이 은혜로써 구원받고, 신자는 율법의 행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써 보존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2:19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증언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당신은 구원을 당신의 공로로써 얻고자 하며, 하늘나라를 당신의 노력과 율법적 행위로써 얻으려 하는가? 당신은 결코 그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가련하며 빈 손 들고 파산된 자처럼 오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라.
나를 위해 갈라진 만세반석이여,
나를 그 속에 숨겨주소서
창에 찔리고 터진 주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주시니,
나의 죄를 이중으로 치료해주시고,
죄책과 그 권세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내 손의 노력으로는,
주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성취시킬 수 없네
내 열심 한이 없고
내 눈물 끝없이 흘려도,
이 모든 것으로는 죄를 속할 수 없으리
주께서 구원하시네, 오직 주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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