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8)
M.R 디한
율법에 대하여 죽었음
사도 바울은 기독교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규정에 따라 임명된 목회자가 아니었다. 바울은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학위도 없었고, 여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적도 없다. 바울은 장로회나 감독회로부터 안수를 받지도 않았다. 바울은 어떤 유명한 신학기관으로부터 받은 졸업장도 없었다. 그는 장로협의회, 주교회의, 혹은 목사협회로부터 설교하도록 면허장을 받지도 않았다. 그는 그 어떤 목사협회(노회)에 소속되지도 않았으며, 바울이 목사님(Reverend, Dominie), 박사님(Doctor), 혹은 신부님(Parson) 등의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신학박사 바울 목사’라고 서명한 적도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바울은 당시의 종교적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거절을 당해야 했다. 바울은 그들이 설립한 신학교 출신이 아니었고, 그들의 교단에서 강도사 인가를 받거나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었다. 이처럼 바울은 그들 교파의 협의회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소명과 은혜의 메시지를 직접 하늘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오직 이스라엘인에게만 전파하도록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겨진 메시지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10:7)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인에게만 해당된 천국 메시지였다. 반면 바울의 메시지는 이방인에 대한 것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처럼 명백히 서로 모순되는 메시지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파송되었다.
판결
많은 토론이 있은 후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도로 부르셨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롬 11:13)로 세우셨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고, 사도들은 ‘할례자들에게로’(갈 2:9) 가도록 결정되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며, ‘은혜의 복음’의 권위 - 즉 지금 이 은혜의 시대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고, 이 세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율법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 - 를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로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았고, 베드로는 새로 발견한 은혜의 자유를 기뻐하면서, 안디옥 교회에 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과 바울의 믿음이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 안디옥에서 중대한 일이 발생했다. 즉 사도 바울이 베드로의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그를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주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율법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갈 2:19).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바울은 여기서 “율법이 죽었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율법에는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율법에 관한 한, 나는 죽었다’고 말한다. 율법의 견지에서 볼 때,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은 이제 나의 존재를 도무지 인식할 수가 없다. 율법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며, 나에게 전혀 적용되지도 못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바울은 ‘율법이 죽었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지금도 분명히 살아있다(유효하다). 율법은 여전히 죄인을 저주하며 정죄하고 있다. 그리고 율법은 여전히 사망을 위하여 역사하고 있다.
율법은 아직도 율법을 범한 자(범죄자)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 있어서 율법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cannot touch). 나는 영원히 율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왜냐하면,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에게 있어서 사실인 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사실이다. 로마서 7: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리고 또한 로마서 6:14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율법에 대하여 죽었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다’. 바울의 이 유명한 말은,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그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한 데 대하여 언급한 말이다. 바울은 은혜, 은혜를 전파해 왔었다. 그리고 구원이란 전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전파해 왔었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은혜로써 거룩하게 되었고, 은혜로써 보존된다고 가르쳐 왔었다. 베드로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이러한 바울의 입장을 인정하였으며, 오직 은혜에 근거하여 이방인 신자들과 하나된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어떤 율법주의자들, 곧 율법을 전하는 자들이 바울이 가진 자유를 염탐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이르렀고, 베드로는 그들에게서 미움 사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금새 겁을 집어먹고서 이방인들로부터 물러났다. 이처럼 베드로는 다시금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자로 처신하였다. 이 때문에 바울은 매우 분개하여 베드로를 공중 앞에서 책망하였다. 즉 그러한 베드로의 일관성 없는 행동을 보고서 꾸짖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잘못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각각 이중적인 행동 기준을 가지고 처신한데 있었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을 대할 때에는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처신했고, 이방인을 대할 때에는 은혜 아래 있는 자처럼 처신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심히 분개하게 되었다. 이제 갈라디아서 2:12-16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바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다른)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2-16절).
이후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2:19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증언을 한다. 베드로여, 내게 있어서 율법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자면,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하나의 예화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한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이제 말하게 될 한 두 가지의 예화로써 그 뜻이 분명해질 줄로 확신한다. 어떤 사람이 무슨 범죄, 이를테면 살인죄를 범했다고 가정하자. 그는 법에서 정한 형벌에 따라 종신형이나 사형을 받아 마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가게 되었으며,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증인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소환되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 사람의 유죄를 증언했다. 이제 그를 위한 변론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는 유죄이며, 법에 따라서 사형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판결이 선고되거나 신문이 종료되기 전에,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한다. 즉 그가 서서 신문을 받고 있는 동안, 갑자기 목을 움켜쥐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동자는 커지며, 모든 근육이 뻣뻣해지더니, 의자에 쓰러져 죽어버렸다. 의사가 소환되었고, 이내 진찰해 보고서는 그 범죄자가 죽었음을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선언한다.
이제 판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신문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증언들을 계속해서 들을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법률(율법)은 죽은 사람을 신문할 수 없다. 법률(율법)은 오직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그 사람(범죄자)은 이미 죽었다. 그 사람은 법률(율법)이 미치는 영향권 너머에 있다. 그래서 판사는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린 후에 재판의 종료와 법정의 정회를 엄숙히 선언한다. 이제 그 사람은 죽었다. 물론 법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도 그 사람은 죽은 것이다. 따라서 법률(율법)은 죽은 사람은 재판할 수가 없다.
바울도 역시 죽었음
이제 바울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러나 위의 예화에서 본 그 사람의 경우에는 법을(법의 처형을) 요행히 피한 것이다. 법률(율법)은 그를 사형에 처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거기에서 벗어나 버렸다. 즉 그는 법률(율법)이 형벌을 집행하기 전에 죽어버렸다. 그 사람은 법률(율법)이 마땅히 자기에게 행할 수 있는 권리, 즉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리를 이행하기 전에 죽어버림으로써, 법률(율법)을 교묘히 피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은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아주 달랐다. 실로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바로 율법이 그를 죽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갈라디아서 2:19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두마디 ‘율법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바울은 여기서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란 이 말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그렇다. 바울은 실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인데, 그를 처형하고 죽게 한 것은 바로 율법이었다.
또 하나의 예화
다시금 예화를 들어보도록 하자. 앞에서 언급한 범죄자, 사형에 해당하는 그 죄수가 또 다시 여기에 있다. 그는 기소되어, 법정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증인들이 소환되었는데, 모두 한결같이 그 사람의 유죄를 증언했다. 피고가 그 사건에 대하여 간략히 진술한다. 그리고 기소자(검사)가 그 사건을 간략히 진술한 다음에 그 죄수를 사형에 처해주도록 요청한다. 그리하여 판사가 그 죄수를 유죄, 살인죄로 판결한다. 그리고 나서, 형을 선고하는 날, 판사가 준엄하게 구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법률에 의거하여 오는 목요일에 당신을 사형(교수형)에 처할 것을 선고한다.”
그리하여 목요일이 되었다. 그 사람은 감방에서 불려나와, 교수형을 받으러 간다. 그리고 죽음의 밧줄 고리가 그의 목에 드리워졌다. 그리고 나서, 신호에 따라 순간적으로 의자가 튕겨져 나가고, 그 사람의 목이 밧줄 끝에 대롱대롱 매어달리게 된다. 그의 목은 부러지고, 그의 얼굴은 점점 잿빛이 된다. 순식간에 그는 시체가 되어 교수대 위에 축 늘어뜨리우게 된다. 의사가 들어와서 그에게 법적이고 공식적인 죽음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그 사실이 법률책(율법책)에 기록된다. 이제 법률(율법)은 완전히 충족되었다. 이제 법률(율법)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고, 무엇을 더 요구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은 이제 종료되었다.
율법에 대하여, 그리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음
당신이 아는 바대로, 이 사람은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이다. 율법(법률)은 이미 그를 죽였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죽었던 그 사람이 살아서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을 당신이 3일 후에 목격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분명히 그 사람이었다. 틀림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경찰관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고, 그 다음에 판사에게 달려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을 출동시키시오. 저 살인자를 체포하도록 하시오. 그 살인자가 거리를 활보하며 다니고 있어요”.
그러나 그 판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제가 기록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부를 펼쳐서,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법률(율법)에 대해서 분명히 죽었음을 확인한다.
그 사람이 3일 후에 다시 살아난 사실은 전혀 법률(율법)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법률(율법)은 부활을 예기치 않았다. 법률(율법)은 죽음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죄수의 죽음까지만을 규정하고 있다. 죽음과 동시에 법률(율법)의 영향력과 규정은 완전히 정지된다. 그래서 판사는 이렇게 말한다. “안됐지만, 그 사람은 이미 법적으로 죽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진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저는 법률(율법)에서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사람을 두 번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을 전혀 찾을 수 없군요”. 법률(율법)은 부활에 관한 것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법률(율법)은 무덤에서 끝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며, 갈라디아서 2:19에 기록된 증언의 의미이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어떻게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만일 당신이 그 다음 구절인 갈라디아서 2:20을 읽는다면, 당신은 거기서 바울 자신이 제시해 주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을 읽기 전에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해 주기 바란다. 이 구절은 바울이 실제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된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매우 자주 자주 인용하면서도, 19절과 연관시키지 않고 그냥 인용하는 이상한 구절이다. 갈라디아서 2:20이하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0,21절).
여기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설명은 아주 놀랍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믿는 구주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내게 전가시켜 주신다. 따라서 구주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충족시키셨고, 형벌을 감당하셨으며,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셨으므로) 동일한 형벌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나를, 마치 내가 실제로(그리고 개인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율법의 완전한 형벌인 영원한 죽음을 당한 자로 간주하신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는,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고 참으로 말할 수 있다.
율법에서 자유했네, 아 기쁘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 용서함 받았네
율법으로 저주받고, 타락하여 멸망 가운데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구속하셨네
단번에 영원히, 아, 죄인이여 이것을 받으라.
단번에 영원히, 아, 의심하는 자여 이것을 믿으라.
십자가로 나오라. 죄짐이 풀리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구속하셨도다.
'강해 > 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디아서 강해(10) (0) | 2005.07.02 |
---|---|
갈라디아서 강해(9) (0) | 2005.07.02 |
갈라디아서 강해(7) (0) | 2005.07.02 |
갈라디아서 강해(6) (0) | 2005.07.02 |
갈라디아서 강해(5) (0) | 200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