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10)
M.R 디한
사랑의 법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롬 6;14).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다(롬 7:3,4). 그리고
신자는 율법에서 벗어났다(롬 7:6). 또한 로마서 10: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바울이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해방되어 나왔던 그 율법 아래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바울은 여러 해 동안 모세의 율법 아래서 살아왔으며, 그 율법을 아주
성실히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처럼 여러
해 동안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잃어버린바 된 가련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이 완전히 헛됨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을 다시금 율법의 멍에
아래로 이끌어가려 하는 자들과 끝까지 싸우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율법은 한 사람을 동일한 범죄로 두 번
처벌할 수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한 죄들에 대한 대가를 이미 치르셨고,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믿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으며,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율법의 마침” 이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즉시 이렇게 반대한다.
“그것은 위험한 교리이다. 당신은 자신이 율법에서 자유했다고 말하며, 율법은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그것은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살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즉 법없는 사람처럼 당신 마음대로 죄를
범하며 살수도 있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너무 위험한 교리가 아니냐?”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말이다. 우리는
율법의 계명에 대해 자유하지만, 무법한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전혀 다른, 더 나은, 사랑과 헌신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자유의
법’ 이라는 최고의 법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결혼하게 하기 위함이라;
KJV 참조)”(롬 7:4)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19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이제는 사망 대신에 생명이며, 율법 대신에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이 있을
때에는 율법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이루기 때문이다. 어떤 가정에 관한 예화를 들고자 하는데, 이에 아주
적절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이 지배하고,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한 가정을 예로 들어보자. 이러한 가정에서 당신은 율법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는가?
나의 집을 막 떠나려 하는 순간을 잠깐 상상해보자. 집을 떠나기 전에 집안의 잘 보이는 곳에 대문짝 만하게 큰 푯말을
세워놓았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집을 나서려고 할 때에 아내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고 가정해 보자. “자, 당신의 남편인 내 말을 잘
들어보시오.
저기에 세워진 저 규칙들이 보이지요. 저기에는 열가지의 규칙들이 있고, 저것들은 당신이 이 가정에서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계명들이오. 그 계명들은 이렇소.
첫째 계명 - 당신은 나 이외의 다른
남편을 맞아들이지 말 것
둘째 계명 - 당신은 나가 돌아다니면서
남편인 나에 대하여 경망스런 말을 하지 말고, 내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 말 것
셋째 계명 - 당신은 당신의 남편인 나에
대하여 경망스런 말을 하지 말고, 내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 말 것
넷째 계명 - 당신은 내 자식들을 적절히
입히고, 먹일 것이며, 굶주리게 하지 말 것
다섯째 계명 - 당신은 집을 청결하게
간수하고, 먼지를 융단 밑에 쓸어 넣지 말 것
그 다음 계명은, 그 다음 계명은 하고,
열가지의 계명들을 다 말한 후에, 아내에게 경고하기를 “이러한 규칙들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은 남편인 나에게 큰 벌을 받을 것이며 이혼 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자.
당신은 내가 내 집에서 아내를 위해 이같은 푯말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한 가지의 법규(율법)쯤은
세워두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그러면 왜 하나도 필요가 없을까? 그것은 단지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사랑의 법 아래있다. 그녀는
자기 가정을 사랑하며, 자기 자녀들을 사랑한다. 그녀는 우리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것을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 안 어디에도 어떤
법규(율법)도 써 붙이지 않고, 단지 떠나려 할 때에 다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힘차게 포옹해주고 키스한 다음에 떠난다. 그리고 결코 내
가정이나 내 아내의 행실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는다. 그녀는 법(율법) 아래 있지 않다. 만일 그녀가 하녀였다면, 규칙이나 규정이나
법규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일하는 시간과 임금과 쉬는 날과 기타 여러 가지의 규칙들이 정해져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은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사랑하기 때문에 일한다. 우리 집에는 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시계가 없고, 임금이나 일하는 시간에 대한 아무런
규칙이나 법규(율법)도 없다.
사랑하는 자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봉사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나는
두려움으로써 율법과 십계명의 위협 때문에, 혹은 징계 받을까봐 두려워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정말 불쌍히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대한 무가치하고, 저속하기 그지 없는 동기이다. 또한 만일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가서 구원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섬기며, 선행을 하고,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동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고, 보잘것없고, 가치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봉사는 사랑과 헌신의 봉사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데 대한 감사와 율법의 저주로부터 건져주신데 대한 보답하는 마음의 봉사이다.
율법은 우리의 안내자인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다. 그것은 옳다. 나는 행위가 아닌 은혜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으나, 일단 구원받은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행동양식과 지침으로서 율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질문인데,
그에 대한 해답도 성경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불쌍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거듭나게 된다. 즉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오시고, 그의 삶을 주관하시며, 그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전(殿)이
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행동과 처신에 대해 인도하시는 지도자가 되신다. 이제 당신은 당신 안에 옳고
그름을 말씀해주시는 한 인격적인 분을 모시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시험을 당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알기 위해서 출애굽기 20장이나
율법을 읽으러 갈 필요가 없다. 그는 자기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줄 분을 모시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이 점을 잘 해결해 줄
것으로 확신한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1,12)
이 구절은 마치 이렇게 읽혀져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구원을 주는 모세의 율법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 아니다.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가르친다. 성령님이 주신 그리스도인의 지침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나는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나타내 보여 줄 율법이 필요하지 않는가? 또 당신은, 율법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도
율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럴까? 죄를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율법일까? 한때는 그러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나는 죄의 실제를 알려 할 때 시내 산으로 가지 않고 갈보리 산으로 간다. 저기 참혹한 십자가 위에 한
사람이 달려있다 - 아니,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가 달려있다.
그에게는 아무 죄도 없고, 그의 입에는 궤사도
없었다. 그는 선한 일 외에는 어떤 것도 한 적이 없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갈고리들이 달린 채찍에 맞아 등이 벗겨졌으며,
몸이 찢겨져 갈비뼈들이 다 드러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내 모든 뼈들을 셀 수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비열한 아첨꾼의 손에 얻어맞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이 씌워져 있었고, 찢겨진 수많은 상처들로부터 그의 무죄한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피는 움푹 패인 그의 양 눈을 타고 흘러서, 무분별한 군중들이 주먹으로 때리면서 뱉는 더러운 침과 뒤섞여 그의
양편 볼에 엉기어 붙었다. 그의 입술은 파리해지고 파래지더니 오므라들었다.
그의 손과 발에는 잔인하게 못이 박혔는데, 이
못자국에 그의 살이 당기어지므로 그는 몹시 고통스러웠으며, 그 상처들은 몸무게로 인하여 점점 더 찢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살갗은 내리
쬐이는 태양볕에 타고 있었다. 마침내 하나님 자신도 더 이상은 그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으셨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 흑암을 드리우시고 창공의
빛을 가리우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등을 돌리셨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사무친 부르짖음으로 이렇게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고통을 담당하셨으며, 죽으셨다. 왜? 왜 그랬을까? 왜 그는 거기에 달리지 않으면 안되셨는가?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하는가? 바로 죄, 죄 때문이다! 나의 죄, 그리고 당신의 죄 때문이다. 죄가 그토록 무섭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을 때, 그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냥 두실 수 밖에 없으셨다. 오, 친구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할 때, 우리는
시내산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 곁에 서면 죄가 무엇이며, 죄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잔혹한 실제를 분명히 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신 것은 나의 행한 죄 때문이었네.
놀라운 자비여! 알 수 없는 은혜여!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여!
보라, 그의 머리와 손과 발에서
슬픔과 사랑이 뒤섞여 흐르는 것을
이처럼 사랑과 슬픔이 한데 만난 적이
있었는가?
아아, 가시 면류관이라니?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었다면,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했을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3:21,22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복음)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이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바울은 말한다. 만일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결코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에게 왜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주를 필요로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보존할 수 있다면, 어찌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그를 위해 매일 중보의 기도를 드리실 필요가 있을까? 바울은 그렇지 않다(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보존할 수 없다: 역자주)고 말한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거스리는 것이 아니지만, 그 목적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율법은
죄인을 심판하고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인으로 하여금 율법과 자신의 행위에서 돌이켜 자기에게 홀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이러한 내용이 갈라디아서 2:21보다 더 잘 언급된 곳은 없다.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니, 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만일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있으며, 율법의 행위로써 그 구원을 보존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히 헛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붙들고 계명에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이며, 다시금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시인한다면, 우리는 율법의 완전함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거룩한 율법을
우리들의 불완전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된다. 이제 로마서 3:28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가치를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는 비난을 예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롬 3:31)
바울은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율법이 거룩하고 완전하며 의로운 것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나는 율법이 매우 거룩하고 의로우며 지극히 선하기 때문에,
나같이 가련하고 나약하며 타락된 죄인으로서는 그 높고 거룩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거룩함을 격찬해 마지 않으며,
율법을 지극히 높인다.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시인함으로써 율법을 확고히 세운다.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도망치듯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간청한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빈 손 들고
나아가
십자가만 붙드네
내 손의 노력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네
내 열심 끝이 없고
내 눈물
한없어도
이것으로는 내 죄를 속죄할 수 없네
주님이 구원하셔야 하네, 오직 주님만이
사랑하는 자여,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구원이다. 아, 죄인이여 그대의 노력과 행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라. 그대는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스스로 애쓰지 말고 주님께 의탁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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