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21)
M.R 디한
성령의
열매
The Fruit of the Spirit
신자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갈 3:13). 신자는 이제 은혜를 통한 자유 속에서 해방감을 누리면서, 이제
주님을 섬기고 있다. 이것은 강요나 형벌의 위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처럼 크신 구원을 주신데 대한 감사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 때문에 주님을 섬긴다면 이것은 아주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자가 누리는 은혜 안에서 자유함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들에 대한 신적인 분별력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일과 율법에로 되돌아가려는 위험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이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주의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다시 구약시대의 규례와 율법과 안식일 준수와 계명들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지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리고 7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갈 5:7)
“‘너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경건한
척 말은 하지만, 실제는 거짓된 이 선생들은 누구냐?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님을 너희가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이 말을 멋지게 하고 복음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은 은혜의 메시지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갈 5:8)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는, 즉 율법과 은혜를 혼합시키는 가르침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 확실히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은혜에 행위를 조금이라도 더하는 것은 은혜를 완전히 망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율법의 행위가 구원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율법 전체를 온전히 지켜야 하며, 계속해서 지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행위일지라도, 그것은 은혜를 은혜답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느니라”(갈 5:9)
성경에서 ‘누룩’은 언제나 악, 곧 도덕적이거나 교리적인 악과 연관되어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누룩은 ‘악한 교리’, 즉 은혜에 행위를 첨가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엄중한 말로 경고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0,12)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말은 참으로 강력한 말이다.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나는 너희
가운데 문제를 일으키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베어 버리기를 바란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 거짓된 교훈을 모두 다 말하지 않고, 오직 할례 의식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 왜 그들은 “당신은 희생제사와 헌물과 의식과 음식과 안식일과 성일에 관한 모든 규정들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오직 할례만을 문제 삼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은 전략적인 계략일 뿐이고, 일단 당신이 이 할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배경이 되는 다른 모든 잘못된 교훈들을 당신에게 주입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구절(12절)의 의미라는
사실은 바로 앞 절에 바울이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때 분명하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
만일 내가 조금만 타협을 하여 구원이란
‘은혜 더하기 할례(즉 율법)’라고 동의하였더라면, 내가 현재 받고 있는 모든 핍박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즉 만일 내가 할례를 전파한다면, 나는 십계명과 모든 시민법과 의식법들과 율법 전체를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은 하나님의 법이고, 의식법은 모세의 법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속임수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할례를 전파하면, 나머지의 모든 율법도 역시 전파해야 한다.”
당신은 속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단순한 할례 의식의 문제,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부분의 율법이나 한 가지의 계명 아래 놓여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건전하고 호소력 있는
말같이 들릴지 모르나, 그것은 결국 우리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율법적인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의식과, 음식에 관한 규정과, 성일들을 지키는 규정들 아래 있어야 한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온전히 은혜든지, 아니면 온전히 율법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그 양자 모두일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율법
아래 있다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면,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이다.
그러면 죄를
범할 것인가?
이제 중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신자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을 행하여야
한다고 우리가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며, 또한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종종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합치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타락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이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오늘 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완전히 거룩한 삶을 살았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요구에 완전히 합치된 삶을 살았다. 나는 일 분 일초도 허비하지 않았고, 단 한
가지의 의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완수했으며, 나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모두 다 이행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아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역시 부족했다고 고백할 것이다. 이 때문에 죄를 사해주시는 일이
예비되어 있다(요일 1:9). 이 때문에 능력을 주시리라는 말씀이 약속되어 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그러나 자신은 항상 이것을 실천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 다음 절은 너무도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흔히 있는
사실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그 해답이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모든 신자들은 여전히 자기 속에 옛 성품, 곧 육신을 가지고 있다.
이 옛 성품은 근절되지는 않으나, 새로운 성품에 의해서 정복되고 복종되도록 되어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범하고 있는 무서운 실수는 하나님의 성령께 온전한 헌신과 복종 대신에 자신의 노력과 율법의 행위로써 승리의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우리가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희망은 율법의 행위나 우리의 선한 결심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혜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디도서 2:11,12에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1,12)
바울은 이것을 다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예화를 통한
설명
다음에는 육신과 성령 간의 뚜렷한 대조와
이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갈라디아서 5:19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그러나 22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갈 5:22)
여기서 일과 열매(Works and Fruit)라는 이 두 단어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여기서 ‘일 또는 행위들’이란 노력과 기술과 애쓰고 수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들은 피곤함과 연약함과 종종 좌절을 초래한다. 또한 이러한 일들(행위들)에는 많은 육신적인 노력과 자랑과 망치질하고
톱질하는 소리와 같은 요란한 소음이 수반된다. 그러나 열매는 얼마나 다른가! 열매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단지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수납한 결과이다. 이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진지하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육신적인 행위들을 19-21절에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러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러한
것들은 옛 성품의 행위들로서 성령을 좇아 행하고(16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18절), 성령으로 살므로써(25절) 극복되어져야 할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뒤따르게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것들은 열매들이 아니고 열매이다. 육신의 “일들(행위들)”은 복수형이다. 바울은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열일곱 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단수이며, 다음과 같은 세 부류의 덕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1. 개인적인 열매 - 사랑과,
희락(joy)과, 화평(peace). 이것들은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개인 생활과 관계가 있다.
2. 타인에게 미치는 열매 - 오래참음, 자비(친절), 양선(착함).
이것들은 타인에 대하여 은혜롭게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한다.
3. 하나님께 대한 열매 - 충성(믿음, 신실함), 온유, 절제.
이상은 한
열매의 아홉 가지 부분들로서, 모두 성령님이 공급해주시는 것들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료와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것은 다음과 같은 율법의 모든 기초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대한 의무.
2. 타인에 대한
의무.
3. 자신에 대한 의무.
자유의
법
그러므로 문제는 “율법이 이것을
금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를 묻는 데 있지 않고, “이러한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며, 나의 개인적인 성화(聖化)를 이루느냐” 의 여부를 묻는 데 있다. 이제 육신을 통하여 시험이 다가오면, 나는 십계명으로 달려가서
거기에 그것이 금지되어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없다. 세상에는 그릇된 일들이지만 특별히 율법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는 일인가? 이것이 나의 이웃을 도와주는 일인가?’ ‘이것이
나에게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가져다주는 것인가?’ 그래도 의심스러운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물어보기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 유익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 이것이 나의 영성을 증진시킬 것인가?’ 그래도 여전히
의심스럽다면, 그것을 하지 말라.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장하시고,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딛
2:12) 도록 우리를
가르쳐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지옥에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그분을 통하여 지옥과 저주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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