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3부 생활을 통해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5장 부흥 기관에 대한 경고
잭 R. 테일러 |
제 5장 부흥 기관에 대한 경고
이것은 경고이다.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보다 더 위험한 시기는 없다. 이 기간은 사탄이 부흥을 막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기이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이 부흥하지 못하도록 막지 못할 경우, 그들을 극단과 혼돈으로 밀어버린다. 사탄은 부흥하는 상태를 싫어하여 축복받고 있는 교회나 개인을 방해하기 위해 모든 기동력을 다 동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관적인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비관적인 요인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다. 이것은 단지 부주의에 대한 경고일 뿐이다.
나는 이 장이 축복받고 있는 개인이나 교회를 위해서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 필자 역시 몇 가지 위험을 물리치지 못했었다. 우리는 이런 위험에 대한 문제의 표면만을 검토 토의하고 넘어가 버렸다.
사탄의 방법에 대한 무지(無知)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사탄에 대하여 실재적으로 느껴보거나 혹은 여러분의 개인적인 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부흥 기간에 그의 존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의 계속적인 약점의 하나는 과신(過信)이다. 그는 갈보리에서도 그러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완전히 죽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영광의 주님을 죽일 수 없었다. 오늘날 신자들이 사탄과 사탄의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깜짝 놀랄 일이다. 사탄은 방해자요 사기꾼이요 고소하는 자이다. 베드로는 사탄을 가리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고 말했다(벧전 5:8). 바울은 영적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입고 당당히 나서라고 경고했다(엡 6:10-17). 심지어는 악마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실감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사탄은 이런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사탄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에게, 만약 네가 아침에 일어나서 악마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악마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사탄에 대해서 반드시 깊이 연구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스스로 사탄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악마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권능을 깨달은 후에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악마의 지배를 받아 오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권위를 깨닫고 이를 행사한 후에 악마를 몰아낼 수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전도하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하고 보고했다. 예수께서는 당연한 일인듯 이렇게 답변하셨다 :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8-19). 이 마지막 구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중요성을 띠고 있으나 사람들은 마치 그 말을 모르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라. 악마는 우리를 해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의 간교한 계교를 모르면 우리는 그에게 이용당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해치게 될지 모른다. 악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반적인 오해가 있다. 그 하나는 그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악마를 이길 수 있는 최강의 비결은-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즉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이다.
영적 자랑
나는 세상에는 네 가지 자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용모에 대한 자랑, 인종에 대한 자랑, 지위에 대한 자랑 및 은혜에 대한 자랑이라고 한다. 만약 사람의 자랑이 이렇게 넷으로 나눠질 수 있다면 은혜에 대한 자랑이 가장 훌륭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영적 우월성에 대한 기쁨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것이, 사람을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스스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볼 때는, 헛된 자랑으로 인해서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영적 축복을 많이 받을 때는 자기의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천박한 자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듯이 보기 쉽다.
대개의 경우, 승리 생활의 비결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곤 한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축복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들보다 더 축복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현세적 그리스도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자랑하는 태도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약은 겸손이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무시하거나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며 그것은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구 위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우리가 다 보고 경탄한 일들이다.
수많은 영적 승리가 교만과 부주의로 인해서 상실되어 왔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유용성(有用性)의 갑옷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원해 왔다. 유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유용성 그 자체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것, 즉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지난 날 우리에게 그런 축복이 갑자기 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그것만을 기쁨으로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R서 내게 베푸신 축복을 감사하다가, 문득 하나님께서 내게, “너는 내가 너를 축복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만큼 나를 사랑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가 우리에게 해주신 일 보다는 그 자신에게 감사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하나님이라는 그 존재만을 위하여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유용성을 너무 강조하면 구세주에 대한 경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그 무엇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리는 부흥의 축복과 개인의 유용성에 있어서도 완전히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죽고 그리스도만이 살아서 우리를 다스려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며 우리의 생활의 십자가를 적용시킬 것이다. 이런 수준에서는 개인의 유용성이 그의 타락을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부흥이 일어날 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부흥 그 자체가 하나님보다 더 존경을 받을 때 그의 권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 우리는 단지 그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 만으로 그를 찬양하자. 할렐루야, 우리 주님을 찬양하세!
부흥과 감정적 요소
최초의 부흥의 바람이 지나고 나면 지금까지 우리가 증거한 이상으로 감정이 고조된 상태가 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시며 누구든지 마음을 활짝 여는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조된 감정은 그것이 인간인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에 곧 시들고 만다. 처음 부흥이 시작될 때 일어나던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날 수도 있으나 감정은 사그러지기 마련이며, 언제인가는 그것이 다른 면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가장 고조된 감정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될 때 감정적인 것을 유도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만약 감정을 위한 감정을 유도하는 일이 있다면 즉시로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불이나 바람같은 것으로 극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항상 불과 바람 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조용하고 작은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다.
감정적 기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얻는 것이지 그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가 이런 문제를 유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자(尺)가 높은 곳을 가리키지 못할 경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부흥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이것은 악마가 우리에게 교사하는 일이다. 악마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하나님과의 깊고 순수한 교재(감정에 의존하지 않는)를 방해하고 축복의 와중에서 우리를 쓰러뜨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눈금을 스스로 점검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의 생활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의 도구가 되어왔다는 자만심을 버려야겠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자만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방법을 구사하신다. 우리는 그 방법을 기대하고 의심을 품지는 말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조용한 방법으로 하든 극렬한 방법으로 하든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자.
기도생활의 실패
축복의 계절은 계속적인 기도생활을 요구한다. 이것은 있으면 좋을 일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 받는 중에 기도의 의무를 망각하기 쉽다. 이런 시기에는 기도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 만약 이런 때 기도를 등한히하면 즉시 그 댓가를 치루게 된다. 우리는 남을 위한 중제의 기도를 배워야 한다. 일찍이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라고 말했다. 기도는 영적인 일인 동시에 전쟁이다. 기도는 단순한 헌신일 뿐 아니라, 영적 생존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기도의 한 부분으로 저항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은 악마와 싸우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악마는 영적 축복의 시기에 간교를 부리는 방해자이며 모든 문제를 다 방해하려고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을 설명한 수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바울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경고하였다. 기도하지 않는 태도는 악마에게 틈을 준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살전 5:17).
우리는 찬양을 배워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마귀들은 말할 수 없는 좌절감에 빠진다. 우리 교회에는 미학령 아동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을 들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는 어떤 어린이가 내게 곧 걸어오며, “목사님께 말씀할께요…하나님을 찬양하세”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귀여운 일일 뿐 아니라, 그 아이가 내가 어릴 때 하지 못하던 일을 훌륭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충만한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찬양의 두루마기를 주신다. 찬양보다 좋은 습관은 없다. 찬양만큼 확실한 예배도 없다. 시편의 저자가 우리게에 “여호와를 찬양하세”라고 노래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축복의 주인보다 축복을 더 사랑하는 태도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쳐두고 영적 축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과 버금가는 만큼 중요한 것을 인간에게 주신 일이 없다. 승리의 생활에는 많은 축복이 있고, 그것은 다 우리가 얻으려는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즉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최상의 목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갈라디아서 5:22-23에 언급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다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 구절을 문자대로 풀이하면, “성령이 너희를 온전히 하면 그는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킬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예배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무장은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를 얻는 것만큼 큰 축복은 없다. 우리는 축복을 주시는 자 이상으로 축복을 존중해서는 안된다.
부흥의 과정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바람이……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마치 바람과 같이 가고자 하는 곳에 가서 역사하신다.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할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오?”하고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성령께 맡기고 그의 분부를 순종하면 그만이다.
사업계에서 오래 종사한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업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은 전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필요로 하신다. 그는 부흥의 과정을 체크하는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담대한 마음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법궤에 손대지 말라
사무엘 하 6장에 기록된 웃사의 교훈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웃사는 법궤를 옮기는 인부 중의 하나였으며 법궤가 기우뚱하자 그것을 바로하기 위해서 거기에 손을 대다가 죽음을 당했다. 부흥, 즉 은혜로 주시는 것 역시 법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에 관여하는 인간에게 너그럽기만 할 수는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감동을 깊이 느끼면서도 손을 뻗쳐 하나님의 축복의 대리자 행세를 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물론 이 결과는 즉각적인 죽음은 아닐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그의 은혜로부터 격리된 삶을 가져다 주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려는 일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이 비록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감히 거기에 관여할 수는 없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것같이 보이는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다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비록 우리의 부흥의 법궤가 기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줄 믿고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안일하고 주제넘은 생각
은혜의 기간 중에서 안일과 주제넘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이것은 부흥을 죽이고 영적 축복의 기쁨을 말살하는 악명 높은 쌍둥이다.
부흥에 있어서 경박한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안이한 태도를 취할 때 근심하신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이런 과오에 빠지기 쉽다. 또한 우리는 호기심으로 거룩한 일들을 가지고 희롱하기 쉽다.
이러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우리 안에서 주님으로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자신을 죽은 자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면 우리는 이런 위험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근본 의무의 소홀
부흥이 와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새로운 기쁨에 빠지게 된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대개 몇 가지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갑자기 분주해진다.
이런 때 우리는 우리가 은혜받기 전에 속해 있던 환경과 그 때의 의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필요로 하는 가족의 일원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우리가 새로운 일들 때문에 과거의 의무와 책임을 등한히 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제사장 엘리는 이런 문제에 대한 우리의 본과 경고가 된다. 그는 성전의 일이 너무 바빠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의 자녀들은 불량배가 되어 아버지와 하나님께 그들 자신의 공적에 누를 끼치게 되었다. 그는 비록 훌륭한 제사장이었으나 후세에 너무 바빠서 좋은 아버지가 못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숫자 요술
하나님께서 숫자로 헤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실 때, 수를 센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우리가 크게 조심하지 않으면 성령충만의 과정에서 일어난 온갖 일들을 숫자로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랑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참된 부흥은 숫자로 평가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우리가 숫자로 우리의 부흥을 표시해 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실 때 헛된 숫자를 다 제거하실 것이다. 기드온에게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의 영광스러운 성공을 숫자로 표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32,000명의 군사를 300명으로 줄인 후에 그는 떳떳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여러분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드온의 지원병들은 실상 자원하는 마음도 부족했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많은 수에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만약 숫자로 성령님의 사업의 훌륭함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 많은 숫자가 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하는 길 뿐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살피기 위해 숫자를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거두시고,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릇된 선입관념(先入觀念)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영적 체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그것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이 너무 깊어질 경우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체험과 환겨이 우리의 영적 체험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영적 발견의 효력을 의심하는 일까지 범한다. 성령 충만과 부흥의 시작은 각각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건으로 그리고 다른 환경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공통되는 요소도 많이 있겠지만 각 사람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개인적인 특수성을 가진다.
몇 개월 전에 나는 미시건주 스프링 아볼(Spring Avor, Michigan)에 있는 자유감리교회(Free Methodist Church)에서 택서스 주의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었다. 여러분은 택서스주의 남침례교 목사가 미시건주의 자유 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곳의 부흥도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프링 아볼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곳 교회는 우리 지역의 교회와 다르며 사람도 다르고 표현 방법도 다르며 부흥의 양상도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 한 가지 반갑고도 영광스러운 공통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같은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점과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는 해주시지 않은 일을 그들을 위해 하시려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시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위해서도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 같았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일을 우리 각자 가운데서 자유스럽게 하시도록 한다면, 우리는 함께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모든 교훈은 은혜 받는 시기에 필요한 경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업이나 그의 축복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우리의 모든 축복이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영적 축복을 받는 시기에는 분별의 은사를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실 때,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있다(골 2:3).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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