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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매킨토시 모세5경/창세기

Genesis 1 - 15

by 복음과삶 2020. 9. 20.

C. H. Mackintosh.

 

 

창세기 1장

성신이 이 숭고한 책을 펼치는 방식에는 뭔가 독특하고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존재의 본질적인 충만함과 그분의 행위의 고독함 속에서 우리를 즉시 하나님에게 소개하십니다. 서론적인 내용은 모두 생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인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실 수 있는 영역을 개발하실 목적으로 세상의 침묵을 깨뜨리고 땅의 어둠을 비추시는 그분의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에는 쓸데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쌍한 인간의 마음이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마음과 이해력에 작용하는 도덕적 힘 안에는 신성한 진리의 숭고함과 현실성이 있습니다. 호기심 많은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헛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의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내부를 탐사하여 거기에서 신의 기록에 추가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모순되는 물질을 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화석 유적에 대해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신성한 기쁨으로 영감의 페이지 위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는 읽고, 믿고, 예배합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나는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심오한 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성전에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성경의 귀한 내용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참된 예배의 정신으로 항상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신성한 정경의 첫 번째 문장은 모든 참된 축복의 무한한 원천이신 그분의 면전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는 정교한 논거가 없습니다. 성령은 그런 종류의 어떤 것에도 임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행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리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느니라.” “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여, 주의 하신 일은 크고 기이하도다.” 불신자나 무신론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논쟁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입의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시고, 자신을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라 선포하신 분, “하나님” 외에는 무엇이든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보라, 누가 이런 것들을 창조하였는가? 그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시느니라. 그의 능력이 크므로 그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능력이 강함이라 하나도 실패하지 아니하느니라.”( 사 40:26 ) “이방의 신들은 우상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느니라.” 욥기 38-41 장에서 우리는 가장 장엄한 묘사를 호소합니다. 창조 사업에 대한 여호와의 무한한 우월성을 증명하는 논증으로서 이 호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이해하기 전에 제시하는 동시에 그 놀라운 일로 마음을 감동시킨다. 위엄과 사랑, 능력과 부드러움은 모두 신성한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진실로 여기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행동하실 수 있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 이후로 마음의 교만함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였지만 다른 활동 영역과 훨씬 더 높은 영역에서 하나님을 간섭할 준비가 너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장면에서 인간은 실제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력의 주체가 되기 전까지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홀로 계셨습니다. 그분은 광활한 황무지에 있는 그분의 영원한 빛의 거처에서 내다보셨고, 그곳에서 그분의 놀라운 계획과 계획이 아직 펼쳐지고 실현되지 않은 영역을 보셨습니다. 경이로운 세계의 눈에 신격의 영광스러운 완전성을 나타내기 위해 간증하고, 피를 흘리고, 죽으십시오. 모든 것은 어둠과 혼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육체적, 도덕적, 지적, 영적인 관점에서 보든 어둠과 혼란은 그분의 임재 안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분은 미래에 활동하실 현장을 곰곰이 생각하며 앉아 계셨습니다. 정말 어두운 장면입니다. 빛과 생명의 하나님이 활동하실 여지가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그분만이 어둠을 밝히고, 생명이 돋아나게 하며, 혼돈을 질서로 대체하고, 물 사이에 궁창을 열어 생명이 죽음의 두려움 없이 드러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신적인가!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고,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느니라.” 불신앙은 "어떻게? 어디서? 언제?"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입니다. ( 히브리 11:3 ) 이것은 가르치기 쉬운 영을 만족시킵니다. 철학은 이것에 대해 경멸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무례한 무지 또는 맹목적인 경신이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반미개한 시대에는 충분히 적합하지만, 박물관과 망원경이 세계사의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감받은 필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지혜? 무슨 학습? 그렇습니다, 오히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말도 안되는 일입니까, 신성한 성경의 범위와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우리를 천문학자나 지질학자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또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모든 남학생 앞에 제시하는 세부 사항으로 우리를 사로 잡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예배자로서 우리를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가르치고 합당하게 다스리는 마음과 이해력을 가지고 그분의 임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실한 말씀의 제자의 저속하고 편협한 편견을 경멸하고 대담하게 망원경을 잡고 먼 하늘을 탐색하거나 깊은 곳으로 여행하는 소위 철학자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층, 지형, 화석을 찾기 위해 지구의 움푹 들어간 곳을 탐험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영감받은 이야기와 완전히 모순되지 않으면 크게 향상됩니다.

그러한 "거짓 소위 과학의 반대"에 대해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위로 하늘에서나 아래로 땅에서나 땅 아래 물에서" 모든 참된 발견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판단에서 완전히 경멸받을 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마음에 큰 안식을 주며, 학식 있는 추측과 거창한 이론을 생산하고,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경우에 합리주의와 적극적인 불신앙의 냄새를 풍깁니다. 성경의 충만함, 권위, 완전함, 위엄, 완전한 영감에 관해 마음을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이것이 독일의 합리주의와 로마의 미신에 대항하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보호 장치임이 밝혀질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그에 대한 깊은 복종은 현재 가장 필요한 것 입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크신 은혜로 우리 가운데 이 사람과 저 사람 모두를 풍성히 증가시키시기를 바랍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여기에는 말씀 전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는 두 가지 큰 상징이 있습니다. 빛의 존재가 하루를 만든다. 그것이 없으면 밤이 된다. 영혼의 역사도 이와 같다.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뚜렷하고 엄숙한 구별이다. 생명의 빛이 비치는 모든 사람, 곧 “위에서 오는 여명”의 유효하게 임함을 받은 모든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받은 모든 사람,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 첫 번째 부류에 속하며 "빛의 아들들이요, 낮의 아들들"입니다.

반면에 아직 본성의 어둠, 본성의 눈먼 상태, 본성의 불신 속에 있는 모든 사람, 아직 믿음으로 의의 태양의 환호하는 광선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한 모든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그늘에 싸여 있습니다. 영적인 밤은 “어둠의 아들들”, “밤의 아들들”입니다.

독자들이여, 잠시 멈춰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 앞에서 지금 이 두 부류 중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이 둘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은 가난하고, 멸시받고,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통해 당신을 "세상의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시키는 고리가 있다면, 당신은 진실로 낮의 아들이며, 머지않아 그 빛을 빛나게 될 운명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영원히 중심 태양이 될 영광의 지역인 천구. 이것은 당신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그분의 희생을 통해 빛과 생명, 기쁨과 평안을 주신 하나님 자신의 계획과 운행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신성한 빛의 신성한 활동과 영향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어떤 아름다움도 보지 못했다면, 비록 당신이 뉴턴의 모든 학식을 갖고 있고 부유하더라도 인간 철학의 모든 보화를 가지고, 비록 당신이 인간 과학의 모든 흐름을 열성적으로 흡수하고,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의 학교와 대학이 수여할 수 있는 모든 학식 있는 칭호로 장식되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밤," "어둠의 아들," 그리고 만약 당신이 현재의 상태로 죽는다면 당신은 영원한 밤의 암흑과 공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친구여, 당신이 "낮"에 속하는지 "밤"에 속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다른 페이지를 읽지 마십시오.

제가 다루려는 다음 요점은 빛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라 또 그것들로 징조와 사시와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그 광명들로 궁창에 있으라 하늘의 궁창을 만들어 땅을 비추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고”

태양은 빛의 큰 중심이자 우리 시스템의 중심입니다. 그 주위에는 작은 구체가 회전합니다. 그들 역시 그에게서 빛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곧 일어나셔서 치유의 날개를 가지고 오시는 그분에 대한 적절한 상징으로 매우 정당하게 간주될 수 있습니다. 상징의 적합성과 아름다움은 밤새도록 지켜보면서 동쪽 하늘의 밝은 광선으로 금빛으로 빛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충분히 나타날 것입니다. 밤의 안개와 그늘은 모두 흩어지고, 모든 창조물은 돌아오는 빛의 구체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머지않아 의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도 그러하리라. 밤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구름 없는 아침”이 밝아오고, 밝고 끝이 없는 영광의 날이 밝아옴으로 모든 피조물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달은 그 자체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모든 빛을 태양으로부터 얻습니다. 달은 지구와 그 영향이 개입할 때를 제외하고 항상 태양의 빛을 반사합니다.* 태양이 우리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자마자 달은 자신의 광선을 받아 어두운 세상에 다시 반사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낮에도 그녀는 항상 창백한 빛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뛰어난 밝기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결과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세상이 때때로 개입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검은 구름, 짙은 안개, 차가운 증기도 지구 표면에서 일어나서 우리가 볼 수 없는 은빛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강력한 망원경으로 본 달은 거대한 자연 폐허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이제 태양이 아름답고 그리스도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듯이, 달은 우리에게 교회를 놀랍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 빛의 샘은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그녀는 그분을 봅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광선을 반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 외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영감받은 사도는 “너희는 우리의 편지니 …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밝혀진 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 고후 3:2-3 .)

정말 책임감 있는 곳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모든 길에서 그리스도의 하늘 빛이 반사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해야 합니까! 그러나 그녀는 이 빛을 어떻게 반사할 것인가? 그것이 그녀에게 희미하지 않은 광채로 빛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행한다면 분명히 그분의 빛을 반사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는 언제나 올바른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달빛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세상 앞에 자신을 내놓으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빛을 반영하는 단순한 채무자입니다. 그녀는 여기 있는 동안 그분이 밟으신 길을 거룩한 근면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 길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아아! 안개와 구름과 증기로 땅이 개입하여 빛을 가리고 서신을 흐리게 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그분의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품성의 특성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유사성보다는 겸허한 대조를 보인다. 우리가 더욱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연구하여 그분을 더욱 신실하게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별은 먼 빛입니다. 그들은 다른 영역에서 빛나고, 그들의 반짝임을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이 체계와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별 하나는 영광이 다른 별과 다릅니다." 다가오는 아들의 왕국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있고 영원한 광채로 빛날 것입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는 그분의 빛을 사방에 충실하게 반사할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의로운 심판관이 그분이 없는 어두운 밤 동안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에게 할당하는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빛날 것입니다. 이 생각은 우리가 부재중이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더욱 열렬하고 힘차게 추구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누가 복음 19:12-19 참조 )

다음으로 낮은 창조 순서가 소개됩니다. 바다와 땅은 생명과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양한 경륜의 시대와 그 위대한 특징적인 행동 원칙을 예표하는 것처럼 매일의 연속적인 운영에 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말씀을 이런 식으로 다룰 때에는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상상의 작용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일반적인 비유에 엄격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슬픈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해석을 할 자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 본문의 분명한 의미라고 믿는 것에 국한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맡은 인간의 위치를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정돈되었으므로 머리 직분을 맡으려면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땅에 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 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독자들은 "그"가 "그들"로 바뀌는 것을 관찰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장까지 여자의 형성에 대한 실제적인 사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공동으로 우주 통치의 자리를 주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모든 하위 계층의 창조계는 그들의 공동 지배하에 놓였습니다. 하와는 아담 안에서 모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에게서도 그녀는 존엄성을 얻었습니다. 비록 아직 실제 존재로 부름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남자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 “나의 지체들이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고, 아직 한 사람도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을 때에도 계속 이루어졌나이다.”

둘째 사람의 신부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보여졌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의 단 한 사람도 생명의 숨을 쉬기 전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 안에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고는 신비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 교회가 필요하도록 만듭니다. 교회는 "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 플레로마 ]"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놀라운 칭호이며, 교회의 위엄과 중요성, 영광을 많이 드러냅니다.]

구원을 단지 개인 영혼의 축복과 안전에만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은 너무 일반적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받아들이기에는 완전히 너무 낮은 견해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에게 속한 모든 것이 가장 온전한 방식으로 보장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가장 작은 부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교회의 존재에 관여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훨씬 더 위엄 있고 깊이 있고 강력한 진리입니다. 성경의 권위에 따라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실제로 필요한 것의 일부로 간주할 자격이 있다면, 나는 나의 모든 개인적인 필요 사항에 대한 완전한 공급이 있는지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께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 정말이에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에게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리고 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였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느니라... 그러나 여자 없이 남자가 없느니라. 남자가 없어도 주 안에 있느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고린도전서 11:8-12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무력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지, 즉 그분이 그의 죄를 도말하시고 그를 신성한 의의 능력으로 받아주실 수 있는지는 더 이상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도우미” 없이 “첫 사람”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둘째"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이브가 없었다면 창조에 공백이 있었을 것이므로 정말 놀라운 생각입니다! — 후자의 경우, 신부인 교회가 없다면 새 창조에는 공백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와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장의 내용 중 일부를 예상해야 합니다. 모든 창조 질서를 통틀어 아담을 위한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깊은 잠”이 떨어져야 하며, 그의 통치와 축복을 공유할 파트너가 그 자신으로부터 형성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니라.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지으시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데려오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 창 2:21-23 .)

{*70인역 여백에 "건축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okodomesen 으로 렌더링합니다 . Eph 의 원본에 대한 참조입니다 . 2:20 , 22은 독자에게 "건축되다"와 "함께 건축되다"로 번역된 단어가 같은 동사의 어형 변화라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으로 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충분히 보증하는 대로,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성취된 사실이 되어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녀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목받고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과 그 계시와 성취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의 구성 부분과 관련하여 신성한 목적이 실현되기 전에, 아들이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고, 그분이 높은 자리에 앉으셔야 했으며,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일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영혼들이 소생하고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확실히 그랬습니다. 비록 그 희생이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아담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대대로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개별 영혼의 구원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한 독특한 교회의 형성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론적으로 유지되는 경우에도 그렇게 엄청난 진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실제 결과는 거의 수반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독특한 위치 "하늘에서 오신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 교회의 독특한 특권과 위엄 —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면 가장 부유하고, 가장 희귀하고, 가장 많은 것을 낳게 될 것입니다. 향기로운 과일. ( 에베소서 5:23-32 참조 )

우리 앞에 놓인 유형을 살펴보면 교회의 입장과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따라야 할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어떤 애정을 갖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참으로 친밀함을 즐겼습니다! 얼마나 친밀한 친교입니까! 그의 모든 생각에 참으로 온전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위엄과 영광 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하나였습니다. 그는 통치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통치했습니다. 그분은 모든 창조물의 주님이셨고, 그녀는 그와 하나였습니다. 그렇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녀는 그에게서 주목을 받고 축복을 받았느니라. "그 남자"가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 관해서는 그녀가 그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유형만큼 더 심오하게 흥미로운 것은 없습니다. 남자가 먼저 세워지고, 여자가 그 안에서 관찰되고, 그런 다음 그에게서 형성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가장 인상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의 유형을 형성합니다. 교리가 모형에 기초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가 말씀의 다른 부분에 완전하고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모형을 이해하고 감상하고 존경할 준비가 됩니다.

시편 8편 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맡은 인간에 대한 훌륭한 견해를 제공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기억하시나이까? 인자를 찾아보시나이까 인자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사오며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셨으니 발은 모든 양과 소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모든 것이니라." 여기에서는 여자에 대한 뚜렷한 언급 없이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성격이 강한데,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 안에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

구약의 어느 부분에서도 교회의 ​​신비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가 없습니다.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세대에서는 우리 인생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제는 성령으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셨으니." ( 에베소 3:1-11 ) 그러므로 방금 인용한 시편에는 “그 사람”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한 머리 아래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가올 시대에 완전한 반대 유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신 참 사람이 보좌에 앉으시고,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회복된 창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살아나며 “그의 몸과 살과 뼈의 일부”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는 머리이고 그녀는 몸이므로 한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부인 교회는 영광 가운데 아주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와만큼 아담과 가까운 피조물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피조물은 아담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관련하여 교회는 다가올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될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입니까? 이제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몸입니다. 이제 그녀는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아,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현재가 그러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미래의 존엄성은 확실히 거룩하고, 헌신적이고, 분리되고, 고귀한 행보를 하는 것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성신께서 이러한 일들을 우리 마음에 더욱 완전하고 강력하게 펼쳐 주시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높은 소명에 합당한 품행과 성품에 대해 더 깊은 감각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소망과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이며 그의 힘으로 역사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우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재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컬어지는 모든 이름을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엡 1:18-23 .)

 

창세기 2장

이 장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 즉 "일곱째 날"과 "강"을 소개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안식일” 교리만큼 오해와 모순이 만연한 주제도 거의 없습니다. 둘 중 하나에 대한 기초가 조금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 전체가 가능한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단어 안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분명한 계명이 출애굽기를 묵상할 때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 앞에 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장에는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이 일곱째 술에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라”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그 날에 쉬셨음이니라." 여기서는 사람에게 주어진 계명이 없습니다. 단순한 창조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식을 누렸다고 우리는 간단히 듣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 일하시던 분이 일을 멈추고 안식을 누렸습니다. 모든 것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매우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 자신이 만드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안에서 쉬셨습니다.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하였느니라.” 창조의 일이 끝나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고 계셨다.

그리고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성격이라는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영감받은 기록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한, 하나님께서 기념하신 유일한 안식일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령하셨으나 사람이 전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쉬셨다”라는 말을 다시는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이다. ( 요한 5:17 ) 엄밀하고 적절한 의미에서 안식일은 실제로 할 일이 없을 때만 기념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럽혀지지 않은 창조물, 즉 어떤 죄의 흔적도 분별할 수 없는 창조물 안에서만 기념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서는 안식을 취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피조물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신음하는 피조물의 우울하고 굴욕적인 다른 수만 가지 열매와 함께 우리 앞에 일어나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셔야 함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덤불과 찔레 가운데서 안식하실 수 있겠습니까? 폐허가 된 세상의 한숨과 눈물, 탄식과 슬픔, 질병과 죽음, 타락과 죄악 가운데서 그분이 안식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앉아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안식일 외에는 아직 하나님께 안식일이 없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조 사역의 완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창조 사업은 손상되었고 일곱째 날의 안식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부터 성육신까지 하나님은 일하셨다. 성육신부터 십자가까지, 성자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그리고 오순절부터 지금까지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안식일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의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복되고 영광스럽게 완수하셨지만 안식일을 어디에서 보내셨습니까? 무덤에서! 그렇습니다. 독자 여러분,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어둡고 조용한 무덤에서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목소리가 없나요? 그것은 가르침을 전달하지 않습니까? 그 날이 안식과 평화 가운데 보내진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일곱째 날에 무덤에 누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의미에서요? 불가능한!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제시된 것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증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곱째 날에 그런 사람이 그 무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무덤 옆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은 타락하고, 파멸되고, 죄를 지은 존재입니다. 그의 오랜 죄악의 생애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무덤에서 떠나시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 입구에 큰 돌을 놓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무덤에 계시는 동안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그리스도께서는 깨어진 안식일을 고치기 위해 무덤에 계셨는데, 인간은 마치 안식일을 전혀 어기지 않은 것처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안식일이지 하나님의 안식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없는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도 없고 신도 없는 형식이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력하고 무가치한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날은 바뀌었지만 그에 속한 모든 원칙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성경이 그러한 생각에 대한 어떤 기초도 제공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술에 대한 신성한 보증은 어디에 있습니까? 확실히 성경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대로 그 구별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완벽하게 유지됩니다. 그 증거로 주목할만한 구절을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안식 후 첫날이 밝아오매.” ( 마태 28:1 ) 여기에는 일곱째 날이 첫째 날로 바뀌었다는 언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을 한 날에서 다른 날로 옮기는 일도 아직 없습니다. 주의 첫날은 안식일이 변경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날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첫날이지 옛 시대의 마지막 날이 아니다. 일곱째 날은 땅과 땅의 안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주의 첫날은 우리에게 천국과 천국의 안식을 소개합니다.

이는 원칙에 큰 차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볼 때 그 차이는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일곱째 날을 기념한다면 그것은 나를 세상 사람으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분명히 땅의 나머지 날, 즉 창조의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영의 가르침을 받아 주의 첫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루는 새롭고 하늘에 속한 사물의 질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즉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기초. 일곱째 날은 이스라엘과 땅에 속한 날이었습니다. 주의 첫날은 교회와 천국에 속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주일의 첫날을 누리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이스라엘의 도덕적 상태를 시험 하는 것이었다. 후자는 교회가 영원히 받아들여진다는 중요한 증거 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 을 할 수 있는지 를 보여주었습니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완벽하게 선언합니다 .

묵시록의 첫 번째 장에서 주의 첫날이라고 부르는 주의 날( e kuriake emera ,) 의 가치와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은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승리를 제시하는 날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일의 첫날 축하를 속박의 문제로 여기거나 그리스도인의 목에 멍에를 메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행복한 날을 축하하는 것이 그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첫날이 무엇보다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빵을 떼기 위해 함께 모였던 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의 그 시기에 안식일과 주일의 첫날 사이의 구별이 완전히 유지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음으로써 전자를 기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빵을 떼기 위해 모임으로써 후자를 축하했습니다. 한 주의 첫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성경 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그것들의 전체적인 구별성에 대한 가장 풍부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에 기초가 없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까? 가능한 한 주일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축하하십시오. 사도처럼 “영 안에” 있기를 구하십시오. 세속적인 일로부터의 은퇴를 가능한 한 최대한 깊게 하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그것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적절한 위치를 지정하십시오. 적절한 원칙을 이해합니다. 그것에 적절한 특성을 부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철칙처럼 일곱째 날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첫째 날을 지키는 것이 그의 높고 거룩한 특권입니다. 그가 쉴 수 있는 하늘에서 그가 쉴 수 없는 저주받고 피묻은 땅으로 그를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무덤에서 보내신 그 축복받은 날 대신에 그 날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마십시오. ( 마태복음 28:1-6 ; 마가복음 16:1-2 ; 누가복음 24:1 ; 요한복음 20:1 , 19 , 26 ; 사도 행전 20:7 ; 고린도전서 16:2 ; 요한계시록 1: 10 ; 사도행전 13:14 ; 사도행전 17:2 ; 골로새서 2:16 .)

그러나 우리가 안식일을 이스라엘 땅과 온 피조물이 다시 기념할 것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확실히 그럴 것입니다. “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 sabbatismos )이 남아 있다.” ( 히브리 4:9 )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자손, 사람의 아들이 온 땅을 다스리는 정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때, 죄가 결코 방해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안식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거절당하셨습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이 거절하신 가운데 그분과 함께 자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히브리 13:13 ) 땅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면 비난받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언하는 교회가 주의 첫날을 안식일로 삼으려고 노력한다는 바로 그 사실은 깊은 원칙을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적인 지위와 세상적인 도덕률로 돌아가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성실하게 안식일을 그렇게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양심을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들의 양심적 신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완벽하게 정당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양심을 넘어뜨리거나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양심이나 양심의 확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안식일 문제라고 불리는 것의 뿌리에 있는 원칙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 독자들에게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전체 범위와 정신, 즉 일곱째 날이나 안식일의 축하, 또는 주의 첫날이나 주일의 축하에 더 부합하는 것입니다. ?*

{*이 주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출애굽기 20장 에서 다시 우리 앞에 나올 것입니다 .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중요한 주제와 관련된 공격과 오해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열심으로 인해 안식일을 언급하면서 오히려 정직한 양심의 주장과 신약에서 주의 날이 차지하는 위치를 간과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그들의 자유를 보여주기 위해 주간 직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많은 불필요한 범죄를 일으켰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결코 제안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처럼 분명하고 자유롭다면 나는 내 형제들의 양심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주일과 관련된 참되고 귀중한 특권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 우리는 모든 세속적인 직업과 산만함을 없애고 우리의 자유를 보여주기 위해 그것에 의지할 것을 생각하는 것에 너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는 대영제국 전역에 걸쳐 그분의 백성을 위해 마련하셨으므로 그들은 금전적 손실 없이 주의 날의 남은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은 사업을 삼가야 합니다. 잘 통제된 모든 마음은 이것을 자비로 간주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그렇게 명령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주일에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아름다운 특권을 어떻게 빼앗아 갈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교통에 대한 끊임없는 참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밤까지 마트, 시장, 공장의 빽빽한 분위기를 호흡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의 공개적인 모독을 위한 조치를 도입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은 좋은 징조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불신앙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심화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의 날"로 충분히 적절하게 번역된 e kuriake emera 라는 표현은 "주의 날"을 의미하며, 추방된 사도는 말하자면 천국으로 끌려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날의 영. 나는 원본이 그러한 해석을 담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게다가 데살로니가 전서에도 있습니다. 5:2 , 베드로후서 3:10 , 정확한 단어는 "주의 날"인데, 그 원문은 위에서 언급한 표현과 상당히 다르며, e kuriake emera 가 아니라 e emera kurion 입니다 . 단순한 비판에 관한 한 이것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합니다. 그리고 해석에 있어서 묵시록의 대부분이 "주의 날"이 아니라 그 이전의 사건으로 채워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안식일과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은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하여 소개된 “하나님의 강”에 대해 우리가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면서 안식하실 때 온 세상이 그 축복과 안식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는 것과 땅이 안식일의 신성한 영향력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상의 안식의 현장인 에덴에서 흘러나온 강물은 신속히 중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창조물이 죄로 인해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죄가 그분의 활동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영역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분이 행동하시는 모습이 보이는 곳마다 강물이 흐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속받은 군대를 사막의 메마른 모래 위로 인도하시는 그분을 발견할 때, 그곳에서 우리는 강물이 에덴에서가 아니라 침침한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주권적인 은혜가 죄인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근거! 이것은 단순한 창조가 아닌 구원이었습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를 맞으셨습니다. 매 맞은 반석은 성막에 있는 여호와의 자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연결에는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휘장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매 맞은 반석에서 마시는 이스라엘, 열린 모든 귀에 음성을 주셨고 할례받은 모든 마음에 깊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 출애굽기 17:6 )

계속해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길의 역사에서 우리는 강이 다른 수로로 흐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흘러나리라” 생수의 강이요." ( 요한복음 7:37-38 ) 여기서 우리는 강이 다른 근원에서 나와 다른 수로를 통해 흐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강의 근원은 항상 하나님 자신이셨다. 그러나 그 분은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원리를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따라서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주 예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질서 밖에서 영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을 생수의 강 근원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채널이 되십시오. 옛날에 에덴은 기름지게 하는 강을 내보내는 일에 온 땅에 빚진 자였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 반석은 부딪혔을 때 이스라엘의 목마른 군대에게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주변 환경에 빚진 자로서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상쾌한 물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다양한 은혜가 궁핍한 세상에 흘러나오는 통로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더 자유롭게 교통할수록 그는 더 자유롭게 받게 될 것입니다. “흩어지게 하여도 커지는 사람이 있고, 과도하게 아껴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가장 좋은 특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가장 엄숙한 책임을 부여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분의 은혜를 끊임없이 증거하고 나타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가 특권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그는 더 많은 책임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습관적으로 그리스도를 먹고 있다면 그는 그분을 드러내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면 할수록 그의 마음은 그분의 사랑스러운 인격으로 더욱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그의 삶과 성품은 그분의 은혜를 명백히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사역의 힘이자 간증의 힘이며 예배의 힘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효한 종이도, 신실한 증인도,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경건과 헌신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영적이고 참된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묵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셨느니라.” “한 강이 있어 그 시내들로 하나님의 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느니라.” 이곳은 우리가 강을 발견한 마지막 장소이다. 그 소스는 다시는 건드릴 수 없으며 채널은 다시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한 안정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임재는 그것이 성취된 구속의 직접적인 근거에 기초한 것임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창조나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좌가 아닙니다. 그러나 구속에 있습니다. 어린양을 볼 때 나는 죄인인 나와 그 어린양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 자체가 나를 단념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인격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때 마음은 매혹되고 양심은 평안해집니다.

{* 에스겔도 비교하십시오. 47:1-12 ; 슥 14:8 .}

어린 양의 피는 죄의 모든 티와 얼룩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죄를 용납하지 않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해줍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모든 요구가 완벽하게 응답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자를 더 많이 이해할수록 전자에 대해 더 감사하게 됩니다.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높을수록 십자가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평가도 높아질 것입니다.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이 완전한 구속의 귀한 열매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으려면 먼저 십자가의 부활 편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에덴에서 아담의 위치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전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둘째 사람”을 절대적으로 그림자로 가리킬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책임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창조의 현장 가운데 주 하나님께서 증거를 세우셨는데, 이 증거는 피조물에게도 시험이 되었습니다.  속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상하고 엄숙한 소리. 그래도 꼭 필요한 소리였습니다. 아담의 생명은 그의 엄격한 순종으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그를 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준 연결 고리는 그를 존엄한 위치에 있게 하신 분에 대한 암묵적인 신뢰, 즉 그분의 진리에 대한 확신,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 바탕을 둔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털어놓는 동안에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장을 검토할 때 이것의 진실과 힘을 더욱 완전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내 독자는 두 번째 장에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별에는 많은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관련하여 행동하시는 것으로 보일 때 그분은 주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취하십니다." — (여호와 엘로힘;) 그러나 사람이 현장에 나타날 때까지 "주"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 구별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 많은 구절 중에서 세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모든 육체의 남자와 여자로 하나님(엘로힘)이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고 그리고 여호와(여호와)가 그를 가두셨으며( 창 7:16 ) 엘로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돌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엘로힘)이 계신 줄을 온 땅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또 이 무리로 여호와(여호와)의 구원하심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c. ( 사무엘상 17:46-47 ) 온 땅은 엘로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호와의 행하심을 인식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사밧이 부르짖으매 여호와(여호와)가 그를 도우시고 하나님(엘로힘)이 그들을 감동시켜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 역대 둘째 18:31 ) 여호와께서는 잘못을 저지른 불쌍한 종을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엘로힘은 알지 못하지만 할례받지 않은 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셨습니다.}

나는 여기서 독자들에게 에덴에서 세워진 증언과 지금 세워진 증언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생명이 있을 때 하나님은 죽음 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지금은 온통 죽음뿐인 지금, 하나님은 생명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네가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그 단어는 "믿고 살아라 "입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원수가 그 열매를 먹은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의 증거를 무효케 하려 한 것 같이 이제 그는 복음을 믿은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의 증거를 얻으려고 힘쓰느니라.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 리라 그러나 뱀이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3:16)라고 분명히 선언할 때, 같은   사람들 에게 영생이 없으며 감히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 그들이 먼저 모든 종류의 일을 행하고 느끼고 경험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

나의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아직 신성한 기록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면, “주의 음성”이 뱀의 쉭쉭 소리보다 우세하도록 간청하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복음 5:24 )

 

창세기 3장

우리 책의 이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고 있는 전체 장면의 해체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당하게도 모든 시대에 걸쳐 인간의 파멸과 하나님의 치료법에 관한 진리를 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주제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뱀은 신성한 계시에 관한 대담한 질문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이것은 그 이후로 그런 사람들이 제기한 모든 불신앙적인 질문의 끔찍한 모델이자 선구자입니다. 최고 권위자만이 직면할 수 있는 세상 문제에 있어서 뱀의 대의를 너무나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성경의 신성한 위엄.

“참으로 하나님께서 너희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은 사탄의 교활한 탐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의 마음에 풍성히 거했다면 그녀의 대답은 직접적이고 단순하며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질문과 제안에 응하는 참된 방법은 그것을 그의 것으로 대하고 말씀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그것들을 마음 가까이 두는 것은 그것들에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마귀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나는 그분을 욕하고 여러분을 파멸시키려고 왔습니다.” 이것은 뱀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조물의 마음에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실제로 이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가?"라는 질문을 인정하자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내가 알 때 그것은 명백한 불신앙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하와의 경우에 그녀가 대답하는 형태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뱀의 교활한 탐구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엄격히 고수하는 대신에 실제로 그 말씀에 덧붙인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가감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에 거하지도 않고 내 양심을 다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증명합니다. 사람이 순종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그것이 그의 양식이고 그의 음료라면, 그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면, 그는 확실히 그분의 말씀을 알게 되고 온전히 살게 될 것입니다. 단어. 그는 그것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주 예수께서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그 말씀을 정확하게 적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말씀을 의지하여 살았고 그 말씀을 그분의 필수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단어를 잘못 인용하거나 잘못 적용하실 수도 없었고, 그것에 무관심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덧붙였습니다. 그분의 명령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먹지 말라.” 여기에 하와는 "너희도 만지지 말라"는 자신의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하와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잘못된 인용이 무지에서 비롯되었거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거나, 자의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거나, 이 세 가지 모두에서 비롯되었든, 그녀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신뢰와 복종이라는 참된 근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거룩한 말씀. “주의 입의 말씀으로 나를 지켜 멸망시키는 자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셨나이다.”

거룩한 정경 전체에 걸쳐 말씀이 어디에서나 제시되는 방식과 거기에 대한 엄격한 순종의 엄청난 중요성보다 더 강력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 질문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정당하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이것을 "맹목적인 순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지적인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가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는 눈멀고 어두움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나 주위에 신성한 빛의 광선은 단 한 줄기도 없고 하나님의 순수하고 영원한 말씀에서 나오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순종은 지능적인 행동의 가장 높은 수준이 됩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올라갈 때, 그것은 가장 높은 권위의 원천에 도달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말에 순종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의 주장은 오만하고 불경건합니다. 그녀는 순종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양보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권리를 도적질합니다. 그녀는 주제넘게 자신을 하나님과 양심 사이에 두려고 합니다. 누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람은 반드시 순종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양심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사이에 인간의 권위를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 모두로 인해 사실상 말씀을 빼앗기고 결과적으로 순종의 깊은 축복을 빼앗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순종의 행위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주저하는 순간, 적이 유리해집니다. 그는 확실히 그것을 사용하여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냐?”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어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공개적인 모순이 뒤따랐습니다. 이 엄숙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충만하고 진실한 질문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세련된 합리주의는 대담한 불신앙에 매우 가깝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하와가 이전에 그분의 말씀에 대해 느슨함과 무관심에 빠지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반대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가만히 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 역시 "신앙의 단계",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신앙의 단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녀의 마음과 양심과 이해력에 대한 합당한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신성하지 않은 합리주의의 올무에 빠질 위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엄숙한 경고를 제공합니다. "모든 성경"의 완전한 영감과 최고의 권위에 대한 깊은 믿음 외에는 진정한 안전이 없습니다. 이것을 부여받은 영혼은 로마 출신이든 독일 출신이든 모든 반대자에게 승리의 대답을 하게 됩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지금 유럽 대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걸쳐 종교적 사고와 감정의 원천 자체를 부패시키고 있는 바로 그 악은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마음을 폐허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하향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갔고, 마침내 뱀 앞에 절하고 그를 자기의 신이자 진리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자 여러분, 뱀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뱀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후손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뱀의 거짓말은 그랬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형성을 조사해 보면, 그 안에 사탄의 거짓말이 들어갈 자리는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전혀 들어갈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너희는 거듭나야 하리라”는 말씀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뱀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브의 신뢰를 흔들고 그녀를 불신한 "이성"의 세력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방식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녀의 확신을 흔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증언이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그녀의 확신을 흔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6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서 빼앗고자 하신 그 열매를 먹으면 긍정적인 유익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왜 하나님의 증거를 믿어야 하느냐? 너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자를 의지할 수 없느니라." ,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셨다면 왜 당신이 긍정적인 특권을 누리는 것을 금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추론의 영향으로부터 하와의 안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 안에서의 단순한 안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뱀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참된 좋은 것을 거두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열매가 나에게 좋았다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나에게 더 나은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며 또한 당신은 악한 자임을 믿습니다. 와서 내 마음을 선과 진리의 샘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노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것은 고귀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진리와 사랑에 대한 그녀의 확신은 무너졌고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자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에도 자리가 거의 없음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워지기 전까지는 둘 다에 대해 낯선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 관한 사탄의 거짓말에서, 자신의 참된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해 아버지 품에서 나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으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은혜와 진리”, 즉 인간이 타락하여 잃어버린 바로 그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 요한 1:17 ) 그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실한 증인”이었습니다. ( 계시 1:5 ) 진리는 하나님의 계신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완전한 은혜의 계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인은 하나님이 무엇인지에 대한 계시가 그의 멸망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구원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요한복음 17:3 )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도 갖지 못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상실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생명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삶을 우리 자신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존재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내가 어느 정도 자기 지식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자신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전자와 관련이 있고 후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자”는 “그의 면전에서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성격과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지식임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그의 성격을 표시하고 내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생각도 악하고, 말도 악하고, 행동도 악한가요? 그것은 모두 그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결과입니다. 반면에 그는 생각이 순수하고 대화가 거룩하며 행동이 은혜롭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실제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끝없는 행복, 즉 영원한 영광의 견고한 기초입니다.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며, 양심을 평온하게 하고, 애정을 고양시키며, 품성과 행동 전체를 성화시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빼앗는 것이 사탄의 웅대한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는 축복받은 하나님을 잘못 표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친절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장난의 비밀스런 샘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죄가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가 어떤 경로를 통해 흘러갔는지, 어떤 머리 아래에서 퍼져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즉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가장 세련되고 교양 있는 도덕가, 가장 독실한 종교가, 자비로운 자선가라도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면 세리와 창녀처럼 생명과 참된 거룩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탕자는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던 때와 마찬가지로 문턱을 넘었을 때에도 아버지께로부터 크게 멀어진 죄인이었습니다. ( 누가복음 15:13-15 ) 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그분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하는 위치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전복시키기 위해 사탄에게 사용된 것처럼 감각의 지배에 자신을 버렸습니다.

여섯 번째 구절은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데, 사도가 말한 대로 이 세 가지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이 배제되었을 때 반드시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그분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대한 행복한 확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위의 원칙들 중 누군가의 정부에 나 자신을 굴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탄 정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자치된다면 사실상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이제 사탄이 일하는 세 가지 큰 대리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유혹 가운데 사탄이 주 예수님께 제시한 것들입니다. 그는 두 번째 사람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위치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그분은 첫 사람의 경우처럼 자신이 아닌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모든 영광과 함께 세상 왕국의 제안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아래에 모인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도록 유혹했습니다. ( 마 4:1-11을 누가 4:1-13 과 비교하라 .) 각 시험의 단순한 계획은 복되신 분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위치에서 물러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헛된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라고 유일하게 의존하고 자기를 비우고 완전한 사람이 한결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관리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그를 대신하여 관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충실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가까이 하셔서 승리하셨습니다. 성령의 검 외에 다른 어떤 무기도 없이 그분은 그 싸움에 서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첫째 아담과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할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분께 대항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경우에는 모든 즐거움을 갖춘 정원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결핍과 함께 ​​광야입니다. 하나는 사탄에 대한 신뢰입니다.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한 쪽에서는 완전한 패배입니다. 상대방의 완전한 승리. 정복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에게 우리의 도움을 주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을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이제 아담과 하와가 뱀이 약속한 이점을 어느 정도 깨달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탐구는 인간의 타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점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타락을 통해 인간이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양심, 즉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분명히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악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악에 대해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순진한 상태, 즉 악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양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심의 첫 번째 효과가 그를 겁쟁이로 만드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사탄은 그 여자를 완전히 속였습니다. 그는 “너희 눈이 밝아져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물질적인 부분을 생략하여 그들이 선을 알 수 있게 했으나 그것을 행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악을 피할 힘은 없지만 악을 알아야 합니다. 도덕적 존재의 수준에서 자신을 높이려는 그들의 시도 자체가 참된 높이의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타락하고, 무력하고, 사탄의 노예가 되고, 양심에 찔리고, 겁에 질린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으니" 그러나 슬프게도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발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 곧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련한" 자신들의 상태를 보고 눈을 떴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느니라” – 지식의 나무의 슬픈 열매! 그들이 얻은 것은 신성한 탁월함에 대한 어떤 새로운 지식도 아니었고, 그 순수하고 영원한 샘에서 나오는 신성한 빛의 신선한 광선도 아니었습니다. 아아, 아니, 지식을 얻으려는 그들의 불순종한 노력의 가장 빠른 결과는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양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아는 것, 즉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양심이 우리를 겁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운영되었습니까? 확실히 그렇지 않으며, 어떤 죄인의 경우에도 그러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니?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믿음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나를 하나님께로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 불가능한; 그것은 수치심, 자책, 후회, 괴로움을 낳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것이 드러내는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나 자신의 노력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시야에서 그분을 가리는 맹목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는 그들의 벌거벗음이 발견되자 그들 스스로 그것을 가리기 위한 노력이 뒤따랐습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치마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방법으로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세심한 고려는 우리에게 모든 시대의 인간 종교의 실제 성격에 대해 적지 않은 교훈을 줄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아담의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경우에 자신의 상태를 고치려는 인간의 노력이 자신의 벌거벗음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백컨대 그는 벌거벗었고 그의 모든 행위는 그가 벌거벗었음으로 인한 결과이다. 이것은 결코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일을 행하려면 먼저 내가 옷 입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 그리스도교와 인간 종교의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사람이 옷을 입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후자는 그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다. 전자는 출발 지점이고 후자는 목표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가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즉 완벽하게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종교인이 옷을 입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가 인간 종교의 천재성을 모든 단계에서 조사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상태를 개선하는 데, 심지어 인간 자신의 감각에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한동안은 아주 잘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음과 심판, 하나님의 진노를 멀리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실제로는 그의 종교가 너무 짧아서 몸을 눕힐 수 없는 침대이고, 몸을 감싸기에는 너무 좁은 덮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 두려웠 ”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고백한 대로 “내가 벌거벗었”기 때문입니다. 예, 그는 앞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알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덮개가 그분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지도 못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만일 그의 양심이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면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리라.” ( 요한일서 3:20-21 ) 그러나 인간의 양심조차도 인간의 종교적 노력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얼마나 안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담의 앞치마는 하나님의 눈에서 그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벌거벗은 채로 그분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숨기려고 도망쳤다. 이것이 양심이 항상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게 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 자신의 종교성이 그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피하는 은신처일 뿐입니다. 그는 언젠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비참한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나쁜 양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면 그는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비참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만나기에 자신의 부적합함만을 아는 사람의 비참함을 완성하는 데는 지옥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알았더라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 안에 눈물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요일 4:17-18 .) 그러나 아담은 뱀의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에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의 마지막 생각은 그분의 임재 안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할 수 없었다. 죄가 거기에 있었고, 하나님과 죄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양심에 죄가 있는 한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눈이 정결하여 악을 보지 못하며 불의를 보지 못하느니라.” ( 하박국 1:13 ) 거룩함과 죄는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죄는 어디에 발견되든 오직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만 대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양심 외에 다른 것이 있습니다 .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계시가 있습니다 . 그리고 후자는 인간의 타락을 실제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 Theiotes)을 보여 주셨 지만 그분의 본성과 성품의 깊은 비밀을 모두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간섭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영원한 패배와 혼란의 도구임이 증명되었을 뿐이며, "그의 난폭한 처사"는 영원히 "그의 몫"에 임할 것입니다. 그의 거짓말은 하나님에 관한 온전한 '진리'를 드러낼 기회를 제공했을 뿐입니다. 창조물은 결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분 안에는 능력과 지혜 이상의 무한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과 의로움과 양선과 자비와 오래 참음이 있었습니다. 죄인의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이 어디에 나타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처음에 창조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뱀이 창조물에 간섭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주 하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에서 드러났습니다. “주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두 가지를 증명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찾으러 오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놀라운 충실함? 놀라운 은혜 신실하심은 질문 자체에서 인간의 상태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질문을 하신 바로 그 사실 속에서 타락한 인간과 관련하여 그분의 성품과 태도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남성. 사람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으러 내려오셨습니다. 그 은신처인 동산 나무 뒤에 그를 데리고 나오셔서, 그가 믿음에 대한 행복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였습니다.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는 것이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땅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도자라는 생각에 포함된 모든 것을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나요? 세존께서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사람을 찾게 하셨겠습니까? 목자가 잃은 양에게서 본 것과 똑같습니다. 또는 그 여자가 잃어버린 은화에서 본 것; 또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에게서 본 것. 죄인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렇게 영원해야 하는지는 밝혀질 것이다.

{* 테이오테스 ( 롬 1:20 ) 라는 단어 와 테오테스 ( 골 2:9) 라는 단어를 비교하면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 제시 됩니다. 둘 다 "신격"으로 번역되지만 매우 다른 생각을 제시합니다. 창조에는 초인간적인 것, 신성한 것이 있었지만 순수하고 본질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신성이 사랑스러운 성자 안에 거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죄인은 복되신 하나님의 신실하고 은혜로운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아아! 대답은 그가 타락한 악의 끔찍한 깊이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네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더니 이르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명령한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네가 먹지 말라 하였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제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타락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하게 하신 상황에, 즉 간접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비난을 받지만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확신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죄를 지은 것은 내가 아니냐”는 것은 참으로 겸손한 영혼의 질문입니다. 아담이 자신을 알았더라면 그의 스타일은 얼마나 달라졌을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도 하나님도 알지 못했고,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인간의 끔찍한 위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의 통치, 그의 위엄, 그의 행복, 그의 순결, 그의 평화 등 모든 것이 그에게서 사라졌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 일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길을 잃고 파멸되고 죄가 있으면서도 자기를 변호하는 죄인으로 서 있었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인간은 타락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비난할 뿐만 아니라, 회복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더 나아가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주체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복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완전히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그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행복한 주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 앞에 제시된 분명한 증거를 믿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마음의 슬픈 악을 드러내며,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증거를 거부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아시는 심오한 비밀인 하나님의 법령을 행하는 이유로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테살로니카 1장 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 1:8-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 인간은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으며, 믿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무엇이든 알 책임이 없으며, 따라서 그에 관한 무지에 따른 죄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사랑하는 형제들을 알며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신 것을 알며”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은밀하고 영원한 율례가 담긴 페이지를 접함으로써였는가? 결코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요? “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요 오직 능력으로 된 것이니라” ( hoti ). ( 살전 1:4-5 ) 이것이 누구의 택하심을 아는 길입니다. 복음이 능력을 발휘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나는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증거를 거절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고를 근거로 탄원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기 위한 어설픈 변명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얄팍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신성모독적인 주장을 하는 것보다, 그렇게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할 것입니다. 이제 급속도로 다가오는 심판 날의 공포 속에서 그러한 간청은 그들에게 별로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사랑을 구속하려는 그분의 목적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평화와 축복의 참된 기초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거나 계시하시기 전에 그 장면에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헛된 주장, 헛된 자랑, 신성 모독적인 추론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동산 나무들 뒤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상한 씨를 통하여 그분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을 평화롭고 확신 있게 하나님의 면전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귀중한 진리의 원리를 배웁니다.

양심은 결코 이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되었습니다. 양심은 아담을 동산 나무 뒤로 몰았습니다. 계시는 그를 하나님의 면전으로 데려갔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이 그에게 겁을 주었다. 하나님이 무엇인지에 대한 계시가 그를 안정시켰습니다. 이것은 죄의 짐을 진 불쌍한 마음에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나의 존재의 실재는 하나님의 실재와 만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은혜로든 심판으로든 하나님과 사람이 반드시 만나야 할 지점이 있고, 그 지점에서 둘 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은혜 안에서 그 지점에 도달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입니다. 그분은 계신 그대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부정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긍정적인 상태까지 은혜 가운데 가장 낮은 깊이로 내려오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완전한 평화를 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실제 상황에서 나를 만나시고 적절한 치료법을 마련해 주셨다면 모든 것이 영원히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으로 십자가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을 만나야 할 것이며, 심판에서 그분은 그분의 어떠하심에 따라 그들의 어떠함을 처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실제 상태를 알게 되는 순간,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자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믿는 영혼의 안식처이자 은신처이십니다. 이는 동시에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의를 올바른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안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은 양심이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희생 외에는 안식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아담은 “여자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증언에 비추어 그의 무화과나무 잎 앞치마가 무가치함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의 규모는 죄인이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죄를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이니라. 뱀의 머리가 상함을 입어야 하였으니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아니, 그는 뱀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아니, 그는 이미 그들을 발로 짓밟았습니다. 죽음은 폐지되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아니, 그는 죄로 인해 그것을 도입하고 무서운 고통을 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보든 우리는 죄인의 완전한 무력함을 보게 되며,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엄청난 구속 사업에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의 주제넘은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담이 은혜를 통해 해야 할 모든 일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음을 보고 느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그 일의 모든 일점 일획을 이루시겠다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분이 은혜롭게 모든 문제를 자신의 손에 맡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자신과 뱀 사이의 문제로 삼았습니다. 비록 남자와 여자가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죄의 쓰라린 열매를 거두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네가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파멸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씨가 구원의 근원이 될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이 모든 것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으로 “그의 아내의 이름을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불렀 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의 귀한 열매였느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하와는” 어머니라고 불렸을 것이다. 죽어 가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 ." 그러나 믿음의 판단에 따르면 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였습니다 .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베노니라 불렀다. (내 슬픔의 아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내 오른손의 아들)이라 불렀느니라."

아담이 자신이 행한 일의 끔찍한 결과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힘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도록 부르심을 받기 전에 뱀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 자신만 바라보도록 요구받는 것은 절망입니다. 십자가에 피신하지 않는 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행한 일의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을 참을 수 있는 타락한 아담의 자녀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보내져야 하는 그곳에서는 희망이 올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눈은 자신들이 무엇인지, 그들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피난처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어떠함은 절망적인 멸망을 수반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제 영원한 구원도 포함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원히 그들을 대적할 것입니다. 지금은 믿는 모든 사람이 기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을수록 나의 안전함을 더욱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들의 경우에는 바로 그 거룩함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승인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엄숙한 – 말할 수 없이 엄숙한 – 반성!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주신 일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진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에는 신성한 의에 대한 위대한 교리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앞치마가 사람이 준비하였기 때문에 무익한 덮개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옷은 효과적인 덮개였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옷은 피흘림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담의 앞치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의는 행위, 곧 죄로 얼룩진 그 자신의 손으로 행한 행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담이 가죽옷을 입고 서 있었을 때 그는 "내가 벗었다"고 말할 수 없었고 자신을 숨길 기회도 없었습니다. 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완전히 안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안식을 느끼는 것은 단지 추측이나 무지의 결과일 뿐입니다. 내가 입는 옷과 내가 앞에 나타나는 옷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것이므로 내 마음을 완전한 안식에 두어야 합니다. 다른 것에는 참되고 영원한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은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에서 그에게 끝없는 비참함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에서는 뒤섞이지 않은 비참함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오직 부활 안에서만 맛볼 수 있습니다. 허약한 장막에서, 죄와 죽음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는 그를 타락의 슬픈 결과를 보여주는 세상으로 몰아냈습니다. 그룹들과 화염검도 타락한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는 것을 금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계시는 그에게 여자의 후손의 죽음과 부활, 즉 사망의 권세 너머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낙원 안에 있는 것보다 낙원 밖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생명이 안에서는 그 자신에게 달려 있었지만 밖에서는 약속된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들어 “그룹들과 화염검”을 보았을 때,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그들을 그 곳에 세운 손에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로 가는 더 안전하고 행복한 길. 그룹들과 화염검이 낙원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비교 요한 복음 14:6 ; 히브리서 10:20 ) 이 사실을 알고 신자는 이제 저주 아래 있는 세상, 즉 죄의 흔적이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세상을 통과하여 전진합니다. 그분은 믿음으로 아버지의 품에 이르는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은밀히 쉴 수 있는 동안, 그를 그곳으로 인도하신 분이 아버지 집의 많은 처소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고, 곧 다시 오셔서 그를 영접하실 것이라는 복된 확신으로 인해 그는 기뻐합니다. 당신 자신이 아버지 나라의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아버지의 품과 집과 왕국에서 자신의 현재 분깃과 미래의 집과 보상을 찾습니다.

 

창세기 4장 & 창세기 5장

창세기의 각 부분이 우리 앞에 열릴 때, 우리는 최근 한 작가가 “성경 전체의 씨앗”이라고 잘 표현한 바 있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 전체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4장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인물을 통해 세상의 종교인과 진정한 신앙인의 첫 번째 예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에덴 밖에서 태어나 타락한 아담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죄인이었습니다. 둘 다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둘 다 결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실재와 믿음의 온전함이 완전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구별이 자연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들은 필연적인 결론으로서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타락한 본성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의 타락의 상황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온다. 그러므로 은혜를 나타내거나 믿음을 행사할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역사에 명백히 제시된 사실을 명백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천국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무고한 아담의 아들들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로서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연, 즉 타락하고, 파괴되고, 회복될 수 없는 자연이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요) 영이니라.” ( 요한복음 3장 )

자연의 독특한 특성, 능력, 자원 및 경향이 나타날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있었다면 가인과 아벨의 생애가 그것을 제공했습니다. 자연에 잃어버린 순수함을 회복하고 에덴의 경계 안에 다시 자리잡을 수 있는 의무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자연을 드러낼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절한 것은 없었습니다. 둘 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였습니다. 그들은 순진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순진함을 잃었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인"이 된 타락한 인류의 머리로만 볼 수 있습니다 . (고전 5:19 ) 그는 개인적으로 타락한 근원이 되었으며, 거기서부터 파멸되고 죄 있는 인류의 부패한 흐름이 흘러나왔고, 그 죽은 줄기에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은 인류의 가지가 돋아났습니다. 죽은.

사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자신도 은혜의 주체가 되었고, 약속된 구주에 대한 생생한 믿음의 소유자이자 전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이 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유전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믿음을 가인이나 아벨에게 물려줄 수도, 전해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소유한 것은 단순히 신성한 사랑의 열매였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능력으로 그의 영혼에 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무엇이든 아담은 자연의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파멸의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아들도 파멸의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낳은 자가 그러하고 그에게서 난 자도 그러하니라.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태어난 분의 본성을 취해야 합니다. "흙에 속한 사람이 그러하듯 흙에 속한 자도 그러하니라." ( 고전 15:48 )

연방의 머리 직분에 대한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독자가 잠시 동안 로마를 살펴보겠습니다. 5:12-21 에서 그는 영감받은 사도가 온 인류를 두 머리 아래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 구절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지 당면한 주제와 관련하여 그것을 언급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역시 비슷한 성격의 교훈을 제공할 것입니다. 첫 사람 안에는 죄와 불순종과 사망이 있었습니다. 둘째 사람 안에는 의와 순종과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자로부터 본성을 파생하는 것처럼 후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각각의 본성은 각각의 특정한 경우에 그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소유한 각 개인에게 고유한 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이고 추상적이고 긍정적인 본성을 절대적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첫 번째 사람으로부터 본성을 파생시키는 방식이 탄생에 의한 것인 것처럼, 우리가 두 번째 사람으로부터 본성을 파생시키는 방식은 새로운 탄생에 의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전자의 본성을 갖게 됩니다. "거듭나기" 때문에 우리 는 후자의 본질에 참여하게 됩니다. 새로 태어난 유아는 비록 아담을 타락한 존재의 상태로 만드는 행위를 전혀 수행할 능력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 즉 새로 거듭난 영혼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순종을 이루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전 본성에 붙어 죄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후자에 의가 붙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인간의 죄; 후자에 있는 하나님의 의: 그러나 그 동안에는 실제 적인 본성의 참된 참여가 존재합니다. 부가적인 것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인간의 본성과 그 부속물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신성한 본성과 그 부속물에 참여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뜻”을 따른 것이고( 요한복음 1장 ) 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성 야고보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가르친 바와 같이, “그가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야고보서 1:18 )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에서 볼 때, 아벨은 그의 형제 가인과 어떤 자연적인 면에서도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의 구별은 그들의 본성이나 상황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에 관해서는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할 수 있는 만큼 간단합니다. 차이점은 그 자체나 본성,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희생 에 달려 있습니다 . 이것은 진정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에게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타락한 본성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죄인이라고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가장 간단해집니다. 아벨의 역사는 그러한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께 접근하고, 그 앞에 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근거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그에게 자연에 속하거나 자연에 속한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 밖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격과 일 안에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의 관계의 참되고 영원한 기초를 찾아야 합니다 . 히브리서 11장은 가장 명확하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전체 주제를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 플레오나 소이안 )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parturountos )하셨느니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결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그들의 "제사"에 대해서만 문제가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그의 제물에 대해서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 가인과 아벨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 독자는 이 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인의 입장에 관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제물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그 소산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열납하셨으니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느니라” ( 창세 4:3-5 ) 이것은 우리 앞에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저주받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바쳤고, 더욱이 저주를 없애기 위한 피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피 없는 제사”를 바쳤습니다. 만약 그가 그 신성한 원리를 소유했다면, 이 순간에도 그에게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 히 9장 ) 이것은 위대한 기본 진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카인은 죄인이었고, 따라서 그와 여호와 사이에는 죽음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물에서는 이 사실이 전혀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거룩함의 요구를 충족시키거나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참된 상태에 응답하기 위해 희생된 삶을 제시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마치 저주받은 땅의 죄로 얼룩진 열매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과 같은 분인 것처럼 대했습니다.

이 모든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가인의 “피 없는 희생”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 사항, 잃어버린 바 되고 죄인인 자신의 성격과 상태, 그리고 그가 바치려고 했던 열매인 그 땅의 실제 상태에 대해 전혀 무지함을 드러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이성은 “사람이 자기 손의 수고와 이마에 땀을 흘려 만들어 낸 것보다 더 기쁘게 받을 만한 제물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성, 심지어 인간의 종교적 마음까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생각과 반드시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된 삶이 있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치시므로 믿음이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사역을 볼 때, 만약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모든 봉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확립과 관련하여 전혀 쓸모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평생 동안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휘장을 찢은 것은 그분의 죽음이었습니다. ( 마태 27:61 ) 그분의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두루 다니면서 선한 일을 행”했다면 휘장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예배자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이 제물을 드리는 자와 예배자로 섰던 거짓된 입장을 볼 수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여호와 앞에 나아와 “피 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추정을 가진 죄인으로만 간주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제물을 만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야? 죄인의 수고가 죄의 저주와 얼룩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습니까? 죄로 인한 형벌을 면제해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죽음의 쏘는 것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무덤에서 승리를 빼앗을 수 있습니까? 이 중 일부 또는 전부를 수행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가인의 “피 없는 제사”는 다른 모든 피 없는 제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자신에게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단순한 종교인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Cain은 각 시대에 걸쳐 수백만 명의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가인 숭배는 전 세계적으로 넘쳐났습니다. 그것은 회심하지 않은 모든 아들의 예배이며, 해 아래서 모든 거짓 종교 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주는 분이 아니라 받는 분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은 더 복된 자리를 갖고 계실 것입니다. "모든 모순이 없다면, 적은 것이 더 좋은 것의 축복입니다." " 그에게 먼저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것을 당신께 주었나이다”라는 말씀에 담긴 심오한 진리를 배운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작은 선물도 받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감히 “첫 번째” 주는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굶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하리라”입니다. “그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예배를 받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가 모든 사람 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 을 주시는 까닭이니라. 만물을 주시는 위대하신 분은 결코 “아무것도 부족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 드릴 수는 있으나 이것은 우리의 죄가 모두 없어졌다는 온전하고 분명한 예지로만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성취된 속죄의 덕을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여기서 잠시 멈춰서 다음 성구, 즉 시편 1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 이사야 1:11-18 ; 사도행전 17:22-34 , 그는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참된 지위와 예배의 합당한 근거에 관한 진리가 명백히 제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벨의 희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자기 양 떼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는 믿음으로 영광스러운 진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즉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자신과 그의 죄의 결과 사이에 두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는 것,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성품의 속성에 대한 요구는 흠 없는 제물의 피, 곧 제물로 바쳐진 제물의 피에 의해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와 죄인의 깊은 필요를 충족시키십시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교리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죄인의 양심이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성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모든 죄인은 죽음과 심판이 "자기 행위에 합당한 보상"으로 자기 앞에 놓여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의무로 그 운명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수고할 수도 있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제물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서약과 결심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적인 성격을 개혁할 수도 있다. 그는 절제하고, 도덕적이고, 정직하며, 인간이 받아들이는 바에 따르면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믿음이 전혀 없더라도 읽고, 기도하고,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심판”이 그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지평선 위로 모인 두 개의 무거운 구름을 흩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거기 그들은 서 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순간에 대한 우울한 기대 속에서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그의 죄 많은 머리에 터질 것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행위로 사망과 심판의 반대편에 있는 생명과 승리에 자신을 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행위 자체는 가능하다면 그를 준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만 수행됩니다. 두려운 현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은 그의 모든 죄와 그의 모든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마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죽음과 심판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생명과 영광이 자리 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신자에 관한 한 죽음과 심판의 전망을 깨끗이 하시고 생명과 의와 영광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느니라” ( 디모데후서 1:10 )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거룩하고 행복한 임재에서 영원히 분리시키게 될 것을 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없애셨고” 그러므로 죄는 사라졌습니다. ( 히브리 9:26 ) 이 모든 것은 예표적으로 아벨의 “더 나은 제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벨 편에서는 자신의 상태와 죄인으로서의 합당한 위치에 관한 진리를 제쳐두려는 시도가 없었습니다. 화염검의 날을 비껴가서 생명나무로 돌아가도록 강요하려는 시도도 없었습니다. — 피 없는 제사를 주제넘게 바치지 않음" — 저주받은 땅의 열매를 여호와께 바치지 않음 — 그분은 죄인의 실제 입장을 취하셨고, 따라서 희생자의 죽음을 그와 그의 죄 사이에 두셨습니다. 그의 죄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 이것은 가장 단순한 것이었는데 아벨은 죽어야 마땅하고 심판을 받았으나 대신할 자를 찾았느니라.

이것은 모든 가난하고, 무력하고, 자책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죄인에게 해당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대속물이요, 그의 대속물이요, 그의 가장 뛰어난 희생이요, 그의 전부이십니다. 그러한 사람은 아벨처럼 땅의 소산이 그에게 결코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가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다 하더라도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죄로 얼룩진 양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장 풍성한 과일과 가장 향기로운 꽃도 양심에서 단 하나의 얼룩도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희생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과 양심에 위안을 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 신성한 실재를 붙잡는 모든 사람은 세상이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현재 이 평화를 소유하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롬 5:1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취된 사실에 대한 믿음, 즉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의 영혼에 역사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마음의 느낌이나 지성의 동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느낌은 믿음이 아니다. 지적 동의는 믿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특정 명제에 대한 지성의 단순한 동의로 여깁니다. 이것은 매우 거짓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반면 실제로는 신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사람의 수준으로 낮추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늘이나 내일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근원, 곧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불멸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영혼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두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정과 감상은 그것이 나오는 근원을 결코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한 말씀과 관련이 있으며, 그것을 소유한 마음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연결하는 살아있는 연결 고리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은 아무리 세련되어도 영혼을 하나님과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성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지만, 인간적이고 덧없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리는 요나의 박과 같습니다. 그다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 귀중한 원리는 그것이 나오는 근원과 그것이 관련되는 대상의 모든 가치, 모든 힘, 모든 현실에 참여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정당화합니다. ( 로마 5:1 ) 그것은 마음을 정결하게 합니다. ( 사도 15:9 )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 갈 5:6 ) 그것이 세상을 이기느니라. ( 요한 1서 5:4 ) 감정이나 감정으로는 결코 그러한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자연과 땅에 속하고, 믿음은 하나님과 하늘에 속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있고, 믿음은 그리스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안쪽과 아래쪽을 바라보지만, 믿음은 바깥쪽과 위쪽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영혼을 어둠과 의심 속에 남겨두고 믿음은 영혼을 빛과 평화로 인도합니다. : 그것들은 자신의 변동하는 상태와 관련이 있고, 믿음은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영원히 지속되는 희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믿음은 영적인 느낌과 진실한 감정을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열매는 결코 믿음 자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감정에 의해서도, 믿음의 감정에 의해서도 의롭게 되지 않고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됩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그분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과 의와 평강입니다. 현재와 ​​영원한 모든 축복의 총합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발견할 때, 영혼은 현세나 내세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직 그분 자신의 계시와 그분 자신이 나누어주시는 믿음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습니다. , 게다가 그것은 항상 신성한 계시를 그 고유한 대상으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는 말씀의 의미와 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피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피와 기름"을 모두 드렸는데, 이는 생명의 표현과 그리스도의 인격의 고유한 탁월성을 모형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피"는 전자를 설명합니다. "지방"은 후자를 가리켰다. 모세의 경제 하에서는 피와 지방을 모두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피는 생명이다. 그리고 법 아래서 인간에게는 생명에 대한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서는 피를 먹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그분 밖에는 생명의 불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죽음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다른 누구에게도 생명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축복받은 분이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혔을 때 그 생명에는 전가에 의해 죄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써 그에 따른 죄도 버리셨고, 그 죄는 효과적으로 제거되어 그분의 무덤에 남겨졌고, 그분은 새 생명의 능력으로 승리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이 의는 분명히 그 자체에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포기하신 그 생명에 대해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있느니라”라고 사용하신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살과 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부활하실 때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당신의 거룩한 인격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제단 위에 주어 너희 영혼을 속죄하게 하였노니 이는 피가 영혼을 속죄함이니라” ( 레위 17:11 ) 이 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인식이 우리 영혼에 깊어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깊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우리의 간증과 봉사와 관련하여 우리의 평화를 더욱 완전하게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인과 아벨의 역사에서 많은 관심과 가치가 있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즉, 각각이 그가 바친 제물과 완전히 동일시된다는 것입니다. 내 독자가 이것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의 제물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다”고 읽게 됩니다. 그분은 아벨을 증거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제사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화평과 용납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근거를 확실하게 정해줍니다.

우리가 성신에 의해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마음 속에는 우리 자신 안이나 주변의 어떤 것에 우리의 평안과 수용을 근거로 삼으려는 끊임없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신께서 항상 우리에게 밖을 내다보게 하실 때 끊임없이 안을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 모든 신자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왔으므로 그분과 완전히 동일시되었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더욱이 그분의 이름으로 오신 분보다 더 이상 거절당할 수 없습니다. 가장 연약한 신자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분명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안전은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는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자신은 가련하고 무가치한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왔으며,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묶음으로 묶였습니다.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의 은사니라 그의 선물은 그리스도니라 이 모든 것이 가장 평온하고 위안이 됩니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모든 반대와 모든 반대자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성된 속죄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한 특권입니다. 우리의 모든 샘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그분 안에서 자랑합니다. 우리의 확신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신 그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붙잡고 그분의 사역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격을 바라보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육신의 마음은 신자의 마음을 매우 기쁘게 하고 만족시키는 이 모든 진리에 대해 즉시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심히 노하여 안색이 변하시더라.” 아벨을 평안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 가인을 진노로 가득 채웠습니다. 가인은 불신앙으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멸시했습니다. 그는 피를 드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피 없이는 사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그의 죄 가운데서 영접을 받지 못하였고 , 아벨은 그의 제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분노하시고 그 안색이 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는 그의 죄와 함께 받아들여지든지, 아니면 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들과 함께 영접하실 수 없었으며, 그 사람도 홀로 속죄하는 피를 가져오려 하지도 아니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거절당했고, 거절당하면서 그의 방식으로 부패한 종교의 열매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참된 증인, 즉 받아들여지고 의롭게 된 사람, 즉 믿음의 사람을 박해하고 살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거짓 종교가들의 모델이자 선구자가 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종교적 이유로 박해할 준비가 더 되어 있음을 보여 왔습니다. 이것은 카인과 같은 것입니다. 칭의 - 오직 믿음으로만 완전하고 완전하며 조건 없는 칭의는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만들고 사람을 아무 것도 없게 만듭니다. 사람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안색을 떨어뜨리고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것은 결코 사람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벨이 그 자신 안에 있는 정당한 근거로 받아들여졌다면, 실제로 가인의 분노와 그의 타락한 얼굴은 어떤 정당한 기초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자신의 제물로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증언하신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의 예물에 대한 것이므로 그의 진노는 전혀 정당한 근거가 없었느니라. 이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 .아벨은 받아들일 만한 제사 뒤에 자신을 숨김으로써 선을 행했고, 가인은 피 없는 제물을 가져옴으로써 악을 행했으며, 그의 모든 행위는 그의 거짓 예배의 정당한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더라.” 항상 그랬습니다. 가인들은 아벨들을 박해하고 살해했습니다. 언제나 인간과 인간의 종교는 동일합니다. 신앙과 종교는 동일합니다. 그들이 만나는 곳마다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살인 행위는 그의 거짓 예배의 진정한 결과, 즉 합당한 열매였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의 기초도 나빴고, 그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도 나빴다. 그는 살인 행위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용서받기를 절망한 그는 하나님의 복된 면전에서 나가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가족 중에 유용하고 장식적인 과학을 재배하는 사람들, 즉 농업학자, 음악가, 노동자들을 두었습니다. 금속에서. 그는 신의 성품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죄를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타락의 끔찍한 열매를 충분히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없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근거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부패했습니다. 근본적으로 틀렸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벗어나 세상과 그 추구에 빠져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아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존경할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세상을 최선을 다해 꾸미기 시작했고, 그 자신도 그 안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 그는 도망자이자 방랑자였습니다.

{*가인이 사용한 단어는 시편에 나옵니다. 32:1 그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 LXX는 그것을 aphethenai 로 표현하여 송금되도록 합니다.}

이것이 바로 " 가인의 길" 이며,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품성에서 종교적 요소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자기 수고의 결과를 그분께 바치는 것이 옳은 줄로 여기나니 그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여러 면에서 삶을 기분 좋게 만들고자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니라.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장면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치료법이 거부되고 개선 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그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유다서 11 ) .

그리고 독자 여러분, 이 "길이 현재 어떻게 널리 퍼져 있는지" 보려면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비록 세상이 "보다 더 큰" 아벨의 피, 곧 그리스도의 피로 얼룩져 있지만, 그러나 보십시오. 가인의 시대와 같이 "수금과 오르간"의 감사하는 소리가 의심할 바 없이 완전히 묻혀서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이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아니하였나니 이제 사람의 귀에는 갈보리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 그리고 그의 눈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천재적인 자원 역시 이 세상을 가장 희귀한 형태로 생산되는 온실로 만들기 위해 사용됩니다. , 자연이 그토록 열렬히 갈망하는 모든 과일.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의 실제적인 욕구가 충족될 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천재적인 천재성은 사물을 고안할 목적으로 작동하도록 설정되었습니다. 눈이 보는 순간, 마음은 갈망하고, 갈망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 없이는 삶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는 사람들이 100마일을 여행하는 데 3~4일을 투자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너 시간 안에 그 일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5분이나 10분 늦으면 슬프게 불평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생활의 어려움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지치지 않고 여행해야 하고, 인내심을 갖지 않고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방식으로 "더 이상 바다가 없을"* 밝고 행복한 시대를 예상하는 것처럼 땅 위에 철 난간을 깔고 바다 아래 전선을 놓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도 그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것들을 발생시키고 특징짓는 정신을 우리가 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소위 종교가 풍부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자선 그 자체는 종교로 간주되는 것의 대부분이 인간의 편의와 인간의 승영을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의 나사일 뿐이라는 우려를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종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시간 중 7분의 1을 종교에 바치는 데 만족합니다. 또는 그가 생각하고 공언하는 대로 그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7분의 6을 자신의 현세적 이익에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현세를 위해 일하든 영원을 위해 일하든 그것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이다. 독자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길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며 어디에서 끝나는지 보게 하라.

믿음의 사람의 길은 얼마나 다른가! 아벨은 저주를 느꼈고 소유했습니다. 그는 죄의 얼룩을 보았고, 거룩한 믿음의 힘으로 죄에 맞는 것을 드렸으며, 철저하게 죄를 만났습니다. 즉 신성하게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찾았습니다. 땅 위에 도시를 건설하는 대신에 그는 그 품속에 무덤만 발견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인과 그 가족의 천재성과 활력이 돋보였던 땅의 밑바닥은 의로운 사람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교회를 의롭게 하는 바로 그 피가 세상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어두운 그림자는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덧없는 세상의 모든 반짝임과 눈부심 위에 어렴풋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유행은 지나가느니라." 현재 상황에 관한 한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입니다. "가인의 길" 뒤에는 "발람의 오류"가 최종 형태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나서 "코어의 반대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구덩이”는 그 입을 열어 악인들을 받아들이고 다시 닫아서 그들을 “영원히 흑암에 가두어 두느니라.” ( 유다서 13 )

앞의 내용을 충분히 확인하면서 5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서 인간의 약함과 죽음의 지배에 대한 빛나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백 년을 살며 "아들과 딸들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 그가 죽었다 "고 기록되어야만 한다. “아담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하였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인간은 이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증기나 전기 또는 그의 천재성 범위 내의 어떤 것으로도 끔찍한 고통의 죽음을 무력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의 안락함과 사치를 이룰 수는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사형 선고를 피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이 이상하고 두려운 것, 죽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 로마 5:12 )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근원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죄는 피조물을 살아계신 하나님과 묶어 놓은 고리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죽음의 권세에 넘겨졌습니다. 그 권세는 그 권세를 떨쳐버릴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 중 하나입니다. 생명의 능력 외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연적인 근거에서는 교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죽음과 교제할 수 없고, 빛과 어둠이, 거룩함이 죄와 교제할 수 없듯이.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기반, 즉 믿음이라는 새로운 원칙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 아래 팔린" 자신의 위치, 즉 죽음에 종속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생명, 즉 죽음의 권세를 초월한 생명, 즉 원수가 결코 만질 수 없고 우리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이 신자의 생명의 안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기신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의 삶은 그 자신의 순종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그가 불순종했을 때, 생명은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의 모든 상황을 가능한 모든 형태로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복종함으로써 그 권세를 가진 자를 멸망시키셨고, 부활하셔서 그분의 가장 뛰어난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의가 되셨습니다.

이제 사탄이 이 생명의 근원, 경로, 능력, 천국, 영역, 지속 기간 등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근원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통로, 성신, 그 능력; 천국, 그 영역; 그리고 그 기간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이 경이로운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전체 장면이 바뀌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해야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죽음 가운데서 우리는 삶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영역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가 그것을 폐지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폐지되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폐지되었다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자리를 비우시고 생명으로 채우셨으니 이는 사망이 아니요 오직 영광이 신자 앞에 있는 것이요 사망이 그 뒤에 영원히 있느니라. 미래에 관해서는 그것은 모든 영광, 구름 없는 영광입니다. 사실, "잠드는 것", 즉 "예수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 ​​그의 몫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진지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떠난다는 단순한 문제는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과 같이 되는 신자의 구체적인 소망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창 5장의 통치에 대한 유일한 예외를 형성하는 에녹에게서 매우 아름다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 규칙은 "그는 죽었다"입니다. 예외는 "그는 죽음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그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히브리서 11:5 ) 에녹은 “아담의 일곱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일곱째”를 이기기 위해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사망의 모든 권세에 대한 영광스러운 승리의 전리품으로 삼으셨습니다. 마음은 "그가 죽었다"는 슬픈 기록을 여섯 번 읽은 후에 일곱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합니다. 우리가 물었을 때 이건 어땠나요? 그 대답은 “믿음으로”입니다. 에녹은 변화된 신앙을 가지고 살았고,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실질적으로 모든 곳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필연적으로 이 세상 생각의 영역 밖에 있어야 합니다. 에녹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대에는 세상의 정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도 지금과 같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반대하였느니라.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 인내하는 증인이 되는 것 외에는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가인의 아들들은 저주받은 세상을 개선하려는 헛된 시도에 힘을 쏟았을지 모르지만, 에녹은 더 나은 세상을 발견하고 그 힘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세상을 개선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이 "두 세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세상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이 세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얼마나 분리되고 극기적인가! 얼마나 거룩하고 도덕적 순결한가! 얼마나 은혜롭고 온유하며,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그런데 무슨 열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인내하고 오래 참음이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신실하고 타협하지 않는 결정이었는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신성한 생명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그분의 성품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분과 맺고 있는 관계의 지성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규칙과 규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 계획을 세우지도 않습니다. 이것저것 하려고 여기저기로 가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은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때로 사람들, 심지어 우리 형제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적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은 또한 인간의 올바른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과 에녹에게서 믿음의 기초가 되는 희생에 관해 가장 귀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고 현재 희망이 기대하는 전망에 관해서; 동시에 "하나님과의 동행"은 이 두 지점 사이에 있는 실제 삶의 모든 세부 사항을 포함합니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광을 주시리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은혜와 앞으로 나타날 영광 사이에는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편) 는 행복한 확신이 있습니다. :11 )

“십자가와 주님의 재림은 지상에서의 교회 존재의 종말을 형성하며” 이 종말은 아벨의 희생과 에녹의 승천으로 예표된다는 것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자신의 칭의 전체를 알고 있으며, 그분께서 오셔서 교회를 당신께로 영접하실 날을 기다립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느니라.” ( 갈라디아 5:5 ) 그녀는 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은혜로 이미 의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합당한 희망을 기다립니다.

나의 독자는 이것에 대해 명확히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부 예언적 진리를 해설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구체적인 위치와 역할, 희망을 보지 못해 슬픈 실수를 범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교회의 올바른 소망인 “밝은 새벽별” 주위에 너무 많은 먹구름과 짙은 안개를 던져서 현재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소망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들은 “의의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라기 4장)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나타나시기 전에 다양한 사건과 상황을 알아보도록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희망의 도덕적 힘을 박탈당했습니다. 유대인의 회복, 느부갓네살의 형상의 형성, 불법의 사람의 나타남, 이 모든 것이 유지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신약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통해 증명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그것들을 추가하기에 적합한 장소라면 말입니다.

교회는 에녹처럼 주변의 악과 다가올 악으로부터 제거될 것입니다. 에녹은 세상의 악이 머리 위로 떠오르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 위에 쏟아지는 것을 보도록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깊음의 샘이 터지는 것도 보지 못하였고 하늘의 문이 열린 것도 보지 못하였느니라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옮겨져 가서 저들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믿음의 눈 앞에 섰느니라.”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변화되리라.”( 고전 15:51-52 ) 에녹의 소망은 죽음이 아니라 변화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느니라”(살 1:10)라고 간략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예언을 아주 깊이 연구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는 마땅히 그에게 속한 천적 소망의 축복과 실재와 위로와 능력과 고양시키고 구별시키는 미덕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의 소망은 단순히 "의의 해"가 그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복이 있는지 보는 것이 아니라 "광명한 새벽 별"( 계 2:2) 을 보는 것입니다. 28. ) 자연계에서 새벽별이 해가 뜨기 전에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 보이는 것과 같이 새벽별이신 그리스도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볼 수 있기 전에 교회에 의해 보일 것입니다 태양 광선.

 

창세기 6장  창세기 9장

이제 우리는 책의 매우 중요하고 뚜렷한 구분에 도달했습니다. 에녹은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그의 행하심은 그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하기 전, 즉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지기 전에 그분은 끌려가셨습니다. 그의 행로와 번역이 세상에 얼마나 적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6장의 처음 두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이 섞이는 것은 악의 특별한 형태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훼손시키는 사탄의 손에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이러한 연합은 흔히 매우 바람직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하나님께 속한 것의 더 넓은 선포, 즉 신적인 영향력의 더 완전하고 더 활발하게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는 한탄하기보다는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전적으로 다음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되는 관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빛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의 자녀들과 연합할 때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혼합으로 인해 부패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진리를 선포하고 지상에서 그분을 위한 증인의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신성한 방법이 아닙니다. 모든 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진실에 대한 심각한 훼손 없이는 결코 침해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이 가장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 연합의 열매는 인간의 판단에 있어서 매우 공정해 보였습니다. "이들은 고대에 용사요 유명한 사람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본다.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악만  – “항상 악”이었습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섞는 것은 이만큼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만일 거룩한 씨가 순결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지상에서의 증거는 모두 상실될 것입니다. 사탄의 첫 번째 노력은 거룩한 씨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이었지만, 그 일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부패시킴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의 목적과 성격과 결과를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 가장 깊은 순간입니다. 오늘날에는 일치를 위해 진리를 타협하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는 주의 깊게 보호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희생시키면서 연합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토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유지하십시오. 이러한 방식으로 연합이 촉진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지만 진리를 유지하십시오"입니다. 반대로 편의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선언될 수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연합을 촉진하십시오. 진실도 유지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지만 연합을 촉진하십시오." 이 후자의 원리는 간증의 방식에서 신성한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진리가 상실된 곳에서는 참된 간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홍수 전 세계의 경우에 우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신성하지 못한 결합이 단지 악을 전면에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이 쏟아졌다.

{*우리는 "위에서 난 지혜는 먼저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 야고보서 3:17 ) 아래에서 오는 지혜는 '평화'를 첫째로 두므로 결코 순수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사람을 멸하리라” 그 이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길을 부패시켰던 것들이 완전히 멸망되어야 합니다. “용사와 유명한 자들”은 모두 차별 없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모든 육체”는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므로 제외되어야 합니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그것은 단지 어떤 육체의 종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모두 부패했습니다. 모두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도되었고 부족함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는 고퍼나무로 방주를 지으라”는 말로 노아에게 그분의 치료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주변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는 인간의 눈이 자만심과 교만으로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뿌리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뛰어난 예술인, 기술인, “유능한 사람”, “유명한 사람”의 대열을 따라 내려갈 때 인간의 마음은 자부심으로 부풀어오르고 가슴은 감동으로 들끓을 것입니다. 오르간은 영혼 전체에 스릴을 보내는 동시에 땅이 경작되고 인간의 필수품이 심판에 다가가는 것과 관련하여 모든 생각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제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 나는 그 엄숙한 말을 " 나는 파괴할 것이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빛나는 장면 위에 얼마나 무거운 암울함을 드리울 것인가! 인간의 천재성은 어떤 탈출구를 고안할 수 없을까? "용사가 그 많은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아니다: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피할 기회를 얻었으나 믿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요 보는 데에 나타난 것이 아니요 이성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요 상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 하심을 받아 경외함 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써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히 11:7 )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모든 것에 빛을 비추느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검이 걸려 있는 헛되고 기만적이며 지나가는 세상을 뱀이 덮고 있는 금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아직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경고"를 받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자연은 보는 것에 의해 지배되고, 감각에 의해 지배되고, 믿음은 순수한 말씀에 의해 지배됩니다. (이 어두운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보물!") 이것은 안정성을 제공하며, 겉모습은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심판이 임박했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과 믿음을 혼합할 수 있는 마음에 그것을 현재의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믿기 전에 사물을 보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영혼에 완전한 확신을 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성경의 한 줄은 인간 마음의 모든 추론과 모든 상상에 대한 풍부한 답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신념의 기초로 삼을 때 그는 인간의 의견과 편견의 조수에 침착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노아의 오랜 봉사 기간 동안 그의 마음을 지탱해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말씀이 그날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여 수백만 명의 하나님의 성도들을 지탱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높은 가치를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은 어두운 불확실성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빛과 평화입니다. 그것이 빛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확실하고 복된 길을 표시해 줍니다. 그것이 빛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 전통의 어리둥절한 미로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의 근거로 삼지 않았다면 어떻게 120년 동안 “의를 전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불신앙적인 세상의 비웃음과 비웃음을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지평선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데, 그가 어떻게 “다가올 심판”을 계속해서 증거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섰던 기반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영”은 그로 하여금 거룩한 결단력을 가지고 그 높고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기독교 독자 여러분, 지금과 같은 악한 시대에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가지고 서 있어야 합니까? 물론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성령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갖추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범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 디모데후서 3:16-17 ) 마음을 위한 쉼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모든 형상과 사람의 상상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됩니까! 하나님의 순결하고 썩지 아니하며 영원한 말씀 헤아릴 수 없는 보배로 인해 우리 마음이 그분을 경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의 마음의 단순한 안식처였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드라. 여기에 인간의 파멸이 있고 하나님의 구제책이 있느니라. 인간은 자신의 경력을 최대한 추구하고 자신의 원칙을 따르도록 허용받았습니다. 누룩이 역사하여 그 무리를 가득 채웠고 악이 극에 달하였느니라 모든 육체가 심히 악하여 더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멸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였느니라 동시에,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당시 존재했던 유일한 의인인 "제8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교리를 매우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자연과 그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발견하며, 동시에 인간의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완전하게 적용되는 그분의 구원 은총의 계시를 발견합니다. 그들의 도덕적 형편을 친히 판단하셨느니라 (새벽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였느니라.” ( 누가복음 1:78 )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가 죄인인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파멸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죄인의 모든 상태에는 축복받은 새벽의 빛이 스며들지 않은 지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침투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야 합니다. 빛은 모든 것을 자신과 반대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모든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드러내는 동시에 잃어버린 바 되고 죄를 지은 죄인을 위한 그분의 구원을 드러냅니다. 죄는 완벽하게 심판받았고, 죄인은 완벽하게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계시되고 완벽하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독자가 잠시 베드로전서를 살펴보면 이 전체 주제에 대해 많은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성령) 그가 가서 (노아를 통하여)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 저희는 전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 곧 노아의 날 방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니 사람이 적으니 여덟 영혼이 물( 디우다토스 ) 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에 대한 대조( 안티투폰 ) 세례가 이제 우리를 구원하나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물과 같이)* 대답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위의 놀라운 구절에서 성령께서 침례 의식을 다루시는 방식에서 볼 수 있듯이 성신의 지혜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세례가 악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세례가 그릇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에만 속한 효능이 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례 - 우리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은혜가 어떻게 물세례로 옮겨졌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이 문제를 보호하시는 방식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물로 씻는 것처럼 육체의 더러움을 단순히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대답은, 우리가 얻는 대답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세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왕국의 예식으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음이라” 범죄한 자들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세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우 의미가 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실체 대신에 비유를 놓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사탄의 활동을 폭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것은 방주의 교리와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관계를 우리 앞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대홍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모든 파도와 파도가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심판 위에 지나갔습니다. 피조물은 여호와의 의로운 진노의 홍수 아래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은 “주의 모든 큰 파도와 파도가 나를 덮쳤나이다”라고 외치십니다. ( 시 42:7 ) 여기에 신자의 마음과 양심을 위한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모든 큰 파도와 파도”는 흠 없으신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위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복된 결과로서 그 중 어느 것도 신자의 인격을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갈보리산에서 우리는 진실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문들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주의 물 뿜는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마시고 진노를 온전히 견디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의 모든 빚을 법적으로 담당하시고 영광스럽게 그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영혼에 안정된 평화를 줍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를 대적할 모든 것을 만나셨고, 모든 방해를 제하여 주셨고, 죄를 없이 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진노와 심판의 잔을 다하셨으며, 모든 구름의 전망이 있으니 우리는 안정된 평화를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평화는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속하시는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성취하신 사역의 의로운 기반 위에 부여할 수 있는 깊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과 거룩한 안전이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물결에 대해 조금이라도 염려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는 " 모든 것 "이 쏟아져 나왔고 그 자신도 쏟아지는 파도에 의해 구름 없는 평화의 지역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는 바로 그 물 위에 평화롭게 둥둥 떠 계셨습니다. 그는 넣어졌습니다.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 그리고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직접 두셨습니다. 그는 로마서 8 장의 승리의 언어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는 창세기 7장 1 절에서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라는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직접 초대하셨습니다 . 그가 거기 자리를 잡았을 때 " 여호와께서 그를 가두셨으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확실히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위한 완전하고 완전한 안전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문을 지키셨고, 그분 없이는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갈 수 없었습니다. 방주에는 창문과 문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손으로 문을 확보하시고, 노아에게 창문을 남겨 두셨는데, 그곳에서 그는 모든 심판이 나온 곳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에게 어떤 심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가족은 창문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창 6:16 ) 위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 그들은 심판의 물도 볼 수 없었고, 그 물로 인한 죽음과 황폐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즉 “잣나무”가 그들과 이 모든 것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정죄하고 구원하신 분의 영원한 거처인 구름 없는 하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를 가두셨으니”라는 말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완전한 안전을 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으신 것을 누가 열 수 있겠습니까? 없음.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수 있는 만큼 안전했습니다. 방주의 문을 터뜨려 물을 들여보낼 수 있는 능력은 천사나 인간이나 악마나 어떤 권세도 없었습니다. 그 문은 하늘 문을 열고 샘을 터뜨리신 바로 그 손에 의해 닫혔습니다. 큰 깊음의.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 계시 3:7 ) 그분은 또한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십니다. ( 계시록 1:18 ) 그분 없이는 누구도 무덤 문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분 안에서 신자는 완전히 안전합니다. ( 마 28:18 ; 엡 1:22 ) 누가 노아를 만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누가 믿음으로 십자가 그늘 아래로 물러난 사람들을 만질 수 있겠습니까? 모든 원수를 만나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잠잠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이의제기에 승리로 응답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부활은 우리를 받아들이는 그분의 의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의 확신의 기초가 되는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만족에 대한 만족스러운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방주의 문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안전하게 확보되었으므로 우리에게는 창문을 즐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즉, 우리를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다가올 영광의 상속자와 기대하는 자로 삼으신 그분과 행복하고 거룩한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소경이 되어 멀리 보지 못하며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 베드로후서 1:9 )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슬픈 상황이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가두어 두신 그분과의 부지런하고 기도하는 마음의 교통을 배양하지 않은 데 따른 확실한 결과입니다.

이제 노아의 역사를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그가 오랫동안 의를 전파해 온 사람들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 들을 살펴보았습니다 . 이제 잃어버린 자 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우리는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 이제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사람들이 물과 함께 솟아오르는 자비의 그릇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아! “문이 닫혔”습니다. 은혜의 날은 끝났습니다. 간증의 시간은 닫혔고, 그들에게는 영원히 그 시간이 끝났습니다. 노아를 가두셨던 그 손이 그들을 내어 주셨으니, 안에 있는 자들이 들어가는 것과 같이 밖에 있는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느니라. 전자는 복구 불가능하게 손실되었습니다. 후자는 효과적으로 저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분의 종의 간증이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현재의 것들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노스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 누가복음 17:26-27 ) 추상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은 행해진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믿음으로만 행해졌다면, 그 모든 일은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절되었습니다. 그분은 심판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와 파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치료법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과 추측을 계속했고,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지구가 영원히 임대를 통해 자신들의 소유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항복 조항이 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 ~까지 " 그 엄숙한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은 쫓겨났습니다.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요.”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즐거움을 행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나타나시기 전에 이 땅이 이 땅에서 저 끝까지 의의 아름다운 옷으로 덮이게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믿게 합니다. 그들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관들의 결과로서 의와 평화의 통치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짧은 구절은 그러한 모든 헛되고 기만적인 기대를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립니다. 노아의 때에는 어떠하였는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의가 땅을 덮었느냐? 하나님의 진리가 지배적이었는가? 땅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찼느냐? 성경은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대답합니다. "땅에서 모든 육체가 자기 길을 부패시켰느니라." “땅도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더라.” 그렇다면 “ 인자의 때에도 이러하리라 ”. 이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의"와 "폭력"은 서로 그다지 유사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사악함과 보편적인 평화 사이에는 유사점이 없습니다. 오직 말씀에 복종하고 선입견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 "인자가 오는 것" 직전의 시대의 참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가 미혹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경건하게 성경에 머리를 숙이게 하십시오. 세상의 상태를 살펴보게 하십시오. 홍수 전과 같이" 그리고 "그 때 와 같이 " 이 시대의 끝에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것은 가장 간단하고 가장 결정적이다. 국가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 온 우주의 정의와 평화는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은 세상을 자신에게 편안하고 쾌적한 장소로 만드는 데 풍부한 에너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곳을 하나님께 적합한 장소로 만드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 삶의 길에서 돌을 제거하고 그것을 가능한 한 매끄럽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한 대로를 곧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여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명이 승리합니다. 그러나 문명은 정의가 아니다. 청소와 장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집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집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오점과 결점을 자신의 옷의 주름으로 덮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덮여 있어도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그 어느 때보다 더 끔찍한 기형을 겪게 될 것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홍색 그림은 곧 지워질 것이며, 조각한 백향목은 파괴될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불행의 급류를 막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댐은 그 압도적인 힘 앞에 곧 무너져야 합니다. 아담스 후손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타락을 인간의 자비심이 고안한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판명되어야 합니다. 증언이 나왔습니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그것은 사람 앞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말하는 조롱하는 자들의 음성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웃는 자들이 대답을 얻게 될 순간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불탔어." ( 베드로후서 3:4-10 ) 독자 여러분, 이것은 이 세상 자녀들의 지적인 조롱에 대한 대답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애정과 기대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후자는 악이 정점에 도달하기 전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그 위에 쏟아지기 전에 공중에서 신랑을 만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이 불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광명한 새벽별”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보든,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든, 영혼의 비전에 나타나는 대상이 영광의 교회이든지, 불꽃 속의 세상이든지, 신랑의 강림이든지, 아니면 도둑의 침입, 새벽 별, 뜨거운 태양, 변화, 대홍수 등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현재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는 말할 수 없는 중요성을 느껴야 합니다. “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 은 구원의 날이로다.” ( 고후 6:2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으니.” ( 고후 5:19 ) 그분은 지금 화해하고 계시며, 조만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모두 진노가 될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그분은 그것을 지옥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풍성하고, 가장 값없는 은혜의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귀중한 희생을 통한 성취된 구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니라.”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고 오직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베드로후서 3 ) 이 모든 것이 현재 순간을 유난히 엄숙한 순간으로 만듭니다. 섞이지 않은 은혜가 선포되었습니다! — 섞이지 않은 진노가 임박했습니다. 얼마나 엄숙한가! 얼마나 엄숙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펼쳐지는 것을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러한 것들에 빛을 비춥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했듯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지나가는 사건을 멍하니 쳐다볼 필요가 없는 빛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작용하고 있는 모든 원리의 직접적인 경향을 완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지류가 빠르게 흘러가는 소용돌이를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남자들은 황금시대를 꿈꾼다. 그들은 천년의 예술과 과학을 약속합니다. 그들은 “내일도 오늘과 같고 더 풍성할 것”이라는 생각을 먹고 산다. 하지만, 아! 그 모든 생각과 꿈과 약속이 얼마나 헛된가! 믿음은 세상의 지평선 주위에 구름이 빽빽하게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진노의 날이 가까웠느니라. 곧 문이 닫힐 것이다. "강력한 망상"이 곧 시작될 것이며, 끔찍한 강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 즉 신실한 증언을 통해 인간의 불쌍한 자기 만족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악을 예언했다는 아합이 미가야에 대해 제기한 비난에 노출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하는 것을 예언하자. 그리고 단지 “사람을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이것을 행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 아래에서 빈 기초를 제거할 뿐이며, 그 대신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기초를 놓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망상적인 희망을 빼앗아가는 대신에 “부끄럽게 하지 않는 희망”을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만세의 반석”을 주기 위해 “부러진 갈대”를 제거합니다. 그것은 “물을 담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그 자리에 두고 “생수의 근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는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강이 없을 때”라고 외치지 않을 것입니다. "단련되지 않은 모르타르를 바르지 마십시오." 그분은 죄인의 마음을 쉬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의 영원한 안전한 방주에서 그분과 현재의 교제를 즐기며 다정하게 소중히 여기시며; 모든 파멸과 황폐와 심판이 지나간 후에 회복된 창조물 안에서 그와 함께 안식하게 되리라는 소망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아에게로 돌아가서 그를 새로운 위치에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방주를 짓는 것을 보았고, 그가 방주 안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이제 우리는 그가 방주에서 나와 신세계에서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이상한 심판의 역사가 끝나고 구원받은 가족과 그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기억됩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흐르게 하시니 물이 줄어들고 깊은 샘과 하늘의 창문들이 그치며 하늘에서 비가 그치니라 이제 햇빛이 있던 세상에 작용하기 시작하니라” 심판의 세례를 받으셨느니라 심판은 하나님의 “이상한 일”이라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나 그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나니 그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어다 그는 언제나 심판의 자리를 떠나 자비의 자리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도다 , 왜냐하면 그분은 자비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의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하기 위해 나는 특별히 "세대의 진리"라고 불리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매우 친숙한 생각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에녹과 노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전자는 제거되었습니다. 심판이 내리기 전에; 후자는 판결을 통해 수행되었습니다. 이제 에녹은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하기 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끌려가게 될 교회의 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노아는 깊은 고난의 물을 통과하게 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불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덕분에 천년왕국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구약의 두 아버지와 관련하여 이러한 생각을 확실히 받아들인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나는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범위와 비유를 완전히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40일이 지나매 노아가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내보내니 까마귀가 물이 마르기까지 이리저리 왕래하더라” 지구." 그 부정한 새는 탈출했고, 의심할 바 없이 떠다니는 시체 위에서 쉴 곳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방주를 찾지 않았습니다. 비둘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발바닥이 쉴 곳을 찾지 못하여 방주로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더니... 하나님이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시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들어왔는데, 보라, 안. 그 입은 뽑힌 올리브 잎사귀 같더라." 황폐한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과 몫을 찾고 발견하는 새롭게 된 마음의 감미로운 상징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업의 보증을 굳게 붙잡고 심판이 지나갔으며 새로워진 땅이 온전히 보이느니라 하는 복된 증거를 제시하시느니라. 반면에 육신적인 생각은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 모든 것에 안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더러움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올리브 잎"에는 매력이 없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것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으므로 새로운 세계와 그 영광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가르치고 훈련받는 마음은 하나님이 안식하고 기뻐하시는 곳에서만 안식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그분의 구원의 방주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영원한 안식과 분깃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에서 그들을 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둘기는 노아에게로 돌아가 그가 안식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가올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승영과 영광을 누리실 때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우리의 자리를 영원히 찾을 것입니다. “오실 이는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이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약간의 인내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그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방주에서 나오라 하시니라.” “방주를 만들라”,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나가서 …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모든 것은 단순한 순종입니다. 믿음의 순종과 믿음의 예배가 있습니다. 이 둘은 함께 갑니다. 바로 직전에 모든 것이 죽음과 심판의 현장이었던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심판의 물 위로 안전하게 태웠습니다. 그것이 그를 옛 세상에서 신세계로 데려갔고, 이제 그는 그곳에서 숭배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그가 “주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미신은 방주를 구원의 수단으로 숭배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분의 규례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마음의 경향입니다. 이제 방주는 매우 뚜렷하고 명백한 규례였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믿음은 방주를 넘어 방주의 하나님께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곳에서 나왔을 때 그것을 미련한 눈길로 돌리거나 경배나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분께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는 결코 들리지 않았습니다. 또.

{*가장 중요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침례 의식과 관련하여 방주와 대홍수에 관한 이 전체 주제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 즉 사도가 말했듯이 "자기에게 전해진 교훈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영과 원칙에 있어서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 옮겨간 사람입니다. 믿음. 물이 그의 몸 위로 굴러다니는 것은 그의 옛 사람이 장사되고, 자연 속에서 그의 위치가 무시되고, 그의 옛 본성이 완전히 제쳐져 있음을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가 물속에 잠길 때, 그의 이름, 장소, 존재가 자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표현됩니다. 육체와 그에 속한 모든 것과 그 죄와 불의와 책임은 그리스도의 무덤에 장사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물에서 올라오실 때, 그는 오직 새 생명,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유자로 올라오신다는 진리가 표현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면 신자는 물에서 나올 수 없고 자연에 의롭게 속한 장소의 단순한 표현으로서 물 표면 아래에 묻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새 생명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우리 죄를 완전히 없이 하시고 우리도 물에서 올라오나니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신성한 의가 불가분하게 결합된 새 생명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로마서 6 장 과 골 2장을 보라 . passim. 또한 베드로전서 3:18-22을 비교 하라) 이 모든 것이 세례 제도를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가득한 제도로 만든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단순하지만 동시에 매우 적절한 교훈을 줍니다. 마음이 하나님 자신의 실재를 놓치는 순간, 그 쇠퇴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우상 숭배로 가는 고속도로에 있습니다. 믿음의 판단에서 의식은 살아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을 영혼에게 전달할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그분 자신의 지정에 따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한 말입니다. 이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마음과 그분의 귀중한 사역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격 사이에 끼어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규례가 아니며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미신의 심판에서는 규례가 전부이고 하나님은 배제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그 규례를 높이고 그 규례가 인간의 마음을 깊이 붙잡고 인간의 마음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놋뱀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그들에게 축복의 통로였던 그것은 하나님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자 미신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그것을 부수고 그것을 "놋 조각"이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그 자체로는 단지 "느후스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에는 풍성한 축복의 수단이었습니다. 이제 믿음은 그것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미신은 언제나 그렇듯이 신성한 계시를 배 밖으로 던져 사물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하고 실제로 사물 자체를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열왕기하 18:4 참조 )

그리고 독자 여러분, 이 모든 것에는 현 시대를 위한 깊은 교훈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규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언하는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그리스도의 영혼과 그분의 신성한 완전한 구원을 빼앗는 전통 종교의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전통이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담하게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훨씬 더 사악하고 위험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규례가 더하여졌느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와 규례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왜냐하면 후속편에서는 그리스도와 규례가 규례일 뿐 그리스도가 아님이 증명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식의 종교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엄숙한 고려 사항입니다.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없으시리라.”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이시거나 아니면 전혀 그리스도가 아니어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그분의 의식을 중시할 때 그리스도를 존경한다고 설득합니다. 반면에 그는 그들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제쳐두고 그 의식을 신성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단지 다른 곳에서 한 말, 즉 미신이 그 규례의 모든 것을 만든다는 말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불신앙과 신비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용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 부분을 내가 규정한 한계를 훨씬 넘어 확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9장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며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그 안에는 대홍수 후에 창조가 세워진 새 언약과 그 언약의 증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인간이 회복된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은 그 땅을 다시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의 일부가 아니라 지구.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집중된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창 11장 에서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무시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다른 모든 피조물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등한 창조 질서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봉사는 “두려움과 공포”의 제한된 결과임에 틀림없습니다. 살 때나 죽을 때나 하등동물은 인간을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의해 두 번째 홍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구원되었습니다. 심판은 다시는 그런 형태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 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하신 바 되어 경건 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땅은 한때 물로 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불에 의해 정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정화에서는 죽음의 깊은 물을 통과하고 신성한 심판의 불을 만난 그분께 피난처를 찾아 도망한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것이 언약의 증거니라…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고… 내 언약을 기억하리라.” 모든 피조물은 두 번째 대홍수로부터의 면제와 관련하여 영원한 안정 위에 안식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 활이 그 표징이니라 그리고 활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눈이 그 위에 머무른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하고 가장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억에 의존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이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뜻하시는지, 무엇을 기억하지 않으실지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지만 자기 백성의 죄는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자를 승인하는 십자가는 후자를 멸합니다. 괴로워하고 불안한 양심에 평안을 줍니다.

“내가 구름을 땅 위에 가져오면 무지개가 구름 속에 보이리라.” 아름답고 가장 표현력이 풍부한 엠블럼! 심판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반사되는 태양 광선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을 기억하심을 말하여 마음을 평온하게 합니다. 귀중하고 가장 귀중한 햇빛은 그것을 반사하는 바로 그 구름으로부터 추가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냅니다! 구름 속에 있는 이 활은 우리에게 갈보리를 얼마나 강력하게 상기시켜 주는가? 참으로 구름이 있습니다. 어둡고 두껍고 무거운 심판의 구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의 거룩한 머리 위에 내려앉고 있습니다. 구름이 너무 어두워서 심지어 한낮에도 “온 땅을 어두움이 덮”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은 이제까지 모인 저 가장 무거운 구름 속에서 이제까지 나타난 것 중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활을 분별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무서운 어둠을 뚫고 구름 속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밝은 광선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 나오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서 창조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지파들과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완전히 비준되었음을 인식합니다. .

이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굴욕적인 광경을 보여줍니다. 창조주께서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십니다. “노아가 농부가 되어 포도원을 가꾸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유일한 의인이자 의의 전파자인 노아가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조건은 참으로 어떠합니까? 사람이 뭐예요?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그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실패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에덴에서 그는 실패했습니다. 회복된 땅에서 그는 실패합니다. 가나안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실패합니다. 천년의 행복과 영광 앞에서 그는 실패합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범사에 실패합니다. 그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장점은 더욱 커지고, 그의 특권은 더욱 커지고, 그의 지위는 더욱 바람직해지고, 그는 실패와 죄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를 두 가지 방식, 즉 모형 과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 그리고 그 모형은 아름다움과 의미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인간은 죄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흠 없는 의의 옷을 그의 몸에 입혀 주셨습니다. 노아가 그의 벌거벗음을 드러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연약한 상태에서 그를 바라보지 아니하시고 신성하고 영원하신 의의 충만한 능력 안에서 그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이 얼마나 완전히 빗나갔는지, 즉 함이 그가 택한 길에서 얼마나 하나님과 그분의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죄악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의 행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셈과 예벳은 그들의 행동에서 인간의 벌거벗음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방법의 훌륭한 표본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축복을 상속받는 반면 함은 저주를 상속받습니다.

 

창세기 10장

우리 책의 이 부분은 노아의 세 아들의 세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영감의 페이지에서 매우 눈에 띄는 위치를 차지하는 이름인 바벨 또는 바빌론 왕국의 창시자인 니므롯에 주목합니다. 바빌론은 잘 알려진 이름, 즉 잘 알려진 영향력입니다. 창세기 10장 부터 요한계시록 18장 까지 바벨론은 계속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며, 당분간은 하나님을 공적으로 증거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적대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바벨론을 묵시록의 바벨론과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전자가 도시라고 믿는다. 후자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도시와 제도 모두 하느님의 백성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에 참전하자마자 "바벨론의 옷"이 더러움과 슬픔, 패배와 혼란을 군대에 가져왔을 때였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통해 바벨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 도시가 소개되는 다양한 구절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단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단체적인 증인을 가지실 때마다 사탄은 그 증인을 훼손하고 부패시킬 바벨론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땅에 있는 도시와 연결하실 때 바벨론은 도시의 형태를 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교회와 연결시키실 때 바벨론은 “큰 음녀”,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불리는 부패한 종교 체제의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사탄의 바벨론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나 지금의 교회에서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항할 목적으로 항상 그의 손으로 빚고 만든 도구로 여겨집니다.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과 바벨론은 반대되는 규모로 보여집니다. 이스라엘이 올라가면 바벨론은 내려갑니다. 바벨론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은 무너집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완전히 실패하자 “바벨론 왕이 그 뼈를 꺾고” 그를 삼켜 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어야 할 하나님의 전 기구들이 바벨론 성으로 옮겨졌느니라 그러나 이사야는 그의 숭고한 예언을 통해 우리를 이 모든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별이 상승하고 바벨론이 완전히 가라앉는 그림을 가장 장엄한 형태로 제시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두려움과 및 네가 섬기게 된 심한 종살이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속담을 지어 , 이르기를 학대하는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금성  그쳤 나이까 … ( 이사야 14:3-8 .)

구약성서의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의 바벨론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계시록 17장  18장만 보면 그 성격과 결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큰 맷돌처럼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모든 행복과 영광과 함께 어린 양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추구하려고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단지 니므롯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그것을 흘끗 보았을 뿐입니다. 나는 독자가 바빌론이라는 이름이 소개된 모든 성경을 면밀히 조사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 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가 땅에서 처음으로 큰 자가 되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큰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일컬어지기를 이르기를 여호와 앞에서 니므롯의 큰 사냥꾼과 같다 하였느니라 그의 나라의 시작은 바벨이요 시날 땅에는 에렉과 악갓과 갈네를 낳았느니라 ' 그렇다면 여기에는 바벨론의 창시자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는 " 땅에서 큰 사냥꾼"이었습니다 . "여호와 앞에서 큰 사냥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기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책 전체에 걸쳐서 그 성격은 그 성격과 현저하게 일치합니다. 그것은 항상 땅에서 강력한 영향력으로 여겨지며, 하늘에 기원을 둔 모든 것에 긍정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작용합니다. 이 바벨론이 완전히 멸하여져서야 위의 군대 가운데서 "알렐루야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는 외침이 들리게 될 것이다. 들짐승을 사냥해서 제압합니다. 또는 영혼을 사냥하여 파괴합니다. 그 모든 힘, 그 모든 영광, 그 모든 화려함과 교만, 그 부와 사치, 그 빛과 기쁨, 그 반짝임과 눈부심, 그 강력한 매력과 널리 퍼진 영향력은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녀는 파멸의 폭풍에 휩쓸려 영원한 밤의 어둠과 공포와 황폐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창세기 11장

이것은 영적인 마음에 매우 깊은 관심을 끄는 장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큰 사실, 즉 바벨탑 건설과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부양하려는 노력과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에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땅에 자신을 세우려는 시도 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하늘 에서 자신의 몫과 거처를 찾게 하신 것입니다 .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고 말이 하나였더라 그들이 동으로 옮기다가 시날 땅에 한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며…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인간의 마음은 항상 땅에서 이름과 몫과 중심을 구합니다. 그것은 천국, 천국의 하나님, 천국의 영광을 향한 열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자체로 내버려두면, 그것은 이 낮은 세계에서 언제나 그 목표를 찾을 것입니다. 항상 "하늘 아래 건설"하십시오. 마음을 이 현 세상 위로 높이려면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비천한 피조물이고 하늘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땅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장면에서는 그분을 우러러보거나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혀 인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장소를 마련하는 것, 즉 하나님을 위한 처소를 지을 목적으로 재료를 모으는 것도 인간의 마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그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는 것이 사람의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이후로 그의 목표였습니다. 시날 평야에 있는 사람이든 테베레 강둑에 있는 사람이든 우리는 그 사람이 전체적으로 똑같은 이기적이고 자기를 높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피조물임을 발견합니다. 그분의 모든 목적과 원칙과 방법에는 우울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차단하고 자신을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바벨 연합을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의 천재성과 활력이 초기에 나타난 것을 보는 것이 가장 유익합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연합이나 연합의 뚜렷한 경향을 쉽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선사업이든, 종교든, 정치든, 정기적으로 조직된 남성 연합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원리를 보는 것, 즉 그 초기 작업을 표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영감의 페이지가 시날 평야에서 그 설계, 대상, 시도, 활동에 있어서 인간과의 연관성을 제공하는 최초의 모델을 보는 것은 좋습니다. 타도.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전체 장면이 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명명하는 것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 마음의 목적만큼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 첫 번째가 인간의 이익을 확립하고 인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시날 연합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몽되고 문명화된 시대. 그러나 믿음의 판단에는 한 가지 큰 결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인간을 높이려는 시도는 인간을 어지러운 높이까지 높이는 것이고, 결국 인간은 절망적인 혼란과 돌이킬 수 없는 파멸 속으로 추락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의 연합체만을 알아야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증인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령에 의해 통합되어 신자들을 한 몸으로 세례를 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거처로 구성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만을 알아야 합니다. 장소. 바벨론은 모든 면에서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귀들의 처소"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 계시록 18 참조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 백성이 하나이고 언어가 하나이라 그들이 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의 뜻을 막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자, 우리가 내려가자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성 건설하기를 그쳤느니라.” 이것이 인간의 첫 교제의 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너희 백성들아 연맹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패망하리라... 허리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 이사야 8:9 )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연합시키시는 것은 참으로 다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죄로 인해 처해진 바로 그 상황에서 인간을 만나기 위해 무한한 은혜 가운데 내려오시는 복되신 분을 봅니다. 성령께서는 은혜의 사자들이 각자가 태어난 바로 그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미로운 은혜의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귀중한 증거입니다! 불산의 법은 이렇게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마땅히 어떠해야 할지 말씀하실 때 한 방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실 때 많은 말로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는 사람의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쌓은 장벽을 허무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 곧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듣고 깨닫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이것이 무슨 목적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중심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원리 위에, 실제로 그들에게 하나의 언어, 하나의 중심, 하나의 대상, 하나의 희망, 하나의 생명을 주시고, 결코 그들이 결코 해서는 안 될 방식으로 그들을 모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흩어지고 흩어지게 하고 그들에게 영원히 있을 이름과 처소를 주고 그들을 위하여 탑과 성을 건설하여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뿐 아니라 그 썩지 아니할 기초를 하늘에 두리라 전능하신 이가 그것은 부활하시고 높이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격 주위에 그들을 모으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하나의 웅장한 계획으로 그들을 모두 연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가 요한 계시록 7장을 펴면 그 끝부분에서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어린양 주위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모든 찬양을 그분께 돌립니다. 따라서 그는 세 가지 성구를 가장 흥미롭고 유익하게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창 11 장 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심판 의 표현으로 다양한 방언을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 2장 에서 그분은 은혜 의 표현으로 다양한 방언을 주셨습니다 .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서 우리는 모든 혀가 영광 중에 어린 양 주위에 모이는 것을 봅니다 . 그러므로 인간의 교제에서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는 것이 얼마나 더 낫습니까! 전자는 영광으로 끝나고 후자는 혼란으로 끝난다. 전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추진되고, 후자는 타락한 인간의 거룩하지 못한 능력에 의해 추진됩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후자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 교제의 참된 성격과 대상과 문제를 진심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창세기 11 장의 첫 구절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반면에 하나님의 연합의 탁월함, 아름다움, 능력, 영속적인 특성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신약에서 교회라고 불리는 거룩하고 살아 있는 하늘에 속한 단체를 보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어린양의 신부이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믿음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만 그것들이 우리 영혼에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흥미롭더라도 진실의 요점; 아무리 심오하고 광범위하더라도 경전 지식; 아무리 정확하고 가치 있는 성경 비평이라도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애정을 식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찾았으면 믿음으로 그분을 먹습니다. 이것은 형식주의가 얼어붙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신선함, 기름부음, 능력, 활력, 활력, 강렬함을 부여할 것입니다. 그분의 강력하고 개인적인 매력으로 알려진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없다면 소름끼치는 정통교리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의심할 바 없이 건전한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신실한 종은 “바른 말의 틀을 굳게 지키”라는 긴급한 부르심을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바로 혼이요 생명이요, 관절과 골수, 힘줄과 동맥이요, 건전한 교리의 본질이요 실체이시다. 우리가 성신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은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보고 바벨론의 정신과 원칙에서 멀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는 다음 섹션에서 창세기 11 장의 나머지 부분을 고려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창세기는 대부분 일곱 사람, 즉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사람들 각자와 관련하여 밝혀진 특정한 진리의 노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아벨에게서 나는 사람이 속죄의 길, 즉 믿음으로 얻은 속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위대한 기초 진리를 얻었습니다. 에녹에게서 우리는 하늘 가족의 합당한 분깃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는 우리에게 지상 가족의 운명을 제시합니다. 에녹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노아는 심판을 통해 회복된 땅으로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 뚜렷한 진리의 특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뚜렷한 믿음의 단계를 갖게 됩니다. 나의 독자는 히브리서 11장 과 관련하여 그 주제를 충분히 탐구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나는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관심과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의 당면 주제인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다루겠습니다.

창세기 12:1 , 창세기 11:31 , 사도행전 7:2-4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영혼에 매우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 . 아브라함의 마음과 양심에 작용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장 명확한 성격의 의사소통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네 본토 친척 중에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에 그가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떠나 하란 곧 하란에 거주하다가 그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2-2) 4 ) 이 의사소통의 결과는 창세기 11장 31 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갈대아 우르에서 그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더니 하란 에 이르러 거기 거하고 …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느니라.”

이 모든 구절을 통해 우리는 자연의 결합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영혼의 온전한 응답을 방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죽음으로 인해 무너질 때까지 하란에 머물렀고,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부르신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의미가 가득합니다. 자연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충만하고 실제적인 능력에 언제나 적대적입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것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생각의 높이까지 올라가고 그분이 계시하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면 큰 단순성과 믿음의 성실성이 필요합니다.

사도의 기도( 에베소서 1:15-22 )는 교회가 “ 하나님의 부르심 의 소망 과 성도의 풍성함”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그가 성령의 힘으로 얼마나 온전히 들어섰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도 안에서  기업 의 영광이요 " 왜냐하면 분명히 우리가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면 그에 합당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곳으로 가기 전에 내가 부르심을 받은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영혼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진리의 능력 아래 온전히 있었다면 그는 가나안에 있었고 그것도 "그의 기업"이었으므로 그는 차란에 머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의 집, 우리의 몫, 우리의 소망, 우리의 유업은 모두 위,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위를 유지하거나 이름을 구하거나 유업을 쌓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이 문제를 보는 참된 방법이다. 하늘의 부르심은 공허한 교리나 무력한 이론이나 조야한 추측이 아니며, 그것은 신적인 실재이거나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아브라함의 소명이었다. 가나안에 대한 추측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그가 말하거나 논쟁할 수 있는 단순한 이론이었는가? 동시에 그는 차란에 계속 머물렀다? 확실히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진리, 신성한 진리, 강력하게 실제적인 진리였다. 가나안 땅으로 부르심을 입었으나 하나님께서 거기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실 수 없으셨느니라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하였고 우리에게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려거든 나는 믿음으로 구해야 하리라 즉, 우리는 경험과 실천과 도덕적 성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지점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지점은 그분의 아들과의 완전한 교제입니다. 아래에서는 거절당하신 하나님과 위에서는 받아들이심으로 그분과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이 그를 Charran과 묶었던 연결을 깨뜨린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 자연이 우리를 이 현재 세계에 묶는 연결을 끊는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 즉 자연과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존재했던 것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스라엘에게 홍해와 같았던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 즉 죽음과 심판의 땅에서 우리를 영원히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우리의 높고 거룩하며 하늘의 부르심,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잠시 동안 두 가지 주요한 기본 단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우리의 예배와 평화와 증언,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인 십자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세계의 관계.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으로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그 안에서 내 평화의 영원한 기초를 봅니다. 나는 나의 “죄”가 그 뿌리나 원리에 있어서 제거되는 것을 봅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실제로 계시고, 더 나아가 나의 양심의 가책을 받은 바로 그 상태에 있음을 봅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친구이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가장 경건하지 않은 죄인을 의롭게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서 가장 놀라운 성품을 지닌 그분을 드러냅니다. 창조는 결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섭리는 결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위엄과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체를 추상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세와 위엄과 지혜도 나의 죄를 없이할 수 없고,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입으로 사물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무한히 영광스럽게 하도록 죄를 다루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신성한 속성의 장엄한 표현과 완벽한 조화를 봅니다. 나는 사랑을 봅니다. 그러한 사랑은 내 마음을 사로잡고 확신시키며, 내가 깨닫는 정도에 따라 내 마음을 다른 모든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나는 지혜를 봅니다. 그러한 지혜는 악마를 당황하게 하고 천사를 놀라게 합니다. 나는 힘을 보고 있으며, 모든 반대를 압도하는 힘을 봅니다. 나는 거룩함, 즉 도덕적 세계의 가장 먼 곳까지 죄를 물리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가장 강렬하게 표현하는 거룩함을 봅니다. 나는 은혜를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는 죄인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를 그분의 품에 안겨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 어디에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은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을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이 두 가지 큰 요점, 즉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과 “땅에서는 평화”를 그토록 축복적으로 결합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단계에서 죄인의 평화의 기초, 그의 예배의 기초, 그리고 그토록 복되고 영광스럽게 계시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의 기초로서 십자가는 얼마나 귀중한가? 그분의 모든 비길 데 없는 완전성을 완전히 드러내고 죄인을 대하는 그분의 가장 은혜로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의로운 기반을 그분께 제공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어느 작가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은혜로 자녀들을 구원하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셔서 사람들과 마귀들이 그에게 쌓일 수 있는 모든 수치와 고통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영원토록 그분의 사랑을 가장 충만하게 표현하여 매력의 중심지가 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적인 제자도와 간증의 기초로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심오한 고려를 요구합니다. 이 측면에서는 전자만큼 완벽하다고 말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나를 하나님과 연결하는 동일한 십자가가 나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분명히 죽은 사람은 세상과 끝났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세상과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 새 성품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는 거부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진행됩니다. 전자는 그를 하늘의 예배자와 시민으로 만들고, 후자는 그를 땅에서 증인과 나그네로 만듭니다. 그것은 그를 휘장 안으로 데려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진영 밖에 있게 됩니다. 하나는 다른 것만큼 완벽합니다. 십자가가 나와 죄 사이에 있었다면 그것은 나와 세상 사이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나를 하나님과의 평화의 자리에 두게 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도덕적 관점에서 나를 세상과 적대적인 위치에 놓이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나를 십자가에 나타난 귀중하고 측량할 수 없는 영원한 은혜에 대한 인내심 있고 겸손한 증인으로 만듭니다.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의 두 단계를 분명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한 가지를 누리노라고 공언하면서 다른 것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의 귀가 열려 휘장 안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진 밖에서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십자가가 성취한 속죄에 참여한다면, 그는 또한 그것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거절도 깨달아야 합니다. 전자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가지셨던 부분에서 흘러나온다. 후자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분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끝났을 뿐 아니라 세상도 끝났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한 특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교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나에게는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므로 신자와 세상에 관해서는 이중 십자가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그 둘을 합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러한 것들을 깊이, 정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해 봅시다. 그리고 성신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두 단계의 완전한 실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이 자연의 방해에서 벗어나 당신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을 때까지 은혜롭게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상황에 따라 그 명령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에게서 온전한 순종의 온전한 축복을 빼앗으실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무는 동안 그의 영혼에는 새로운 계시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달된 빛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진실한 제자의 길로 인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길을 특징짓는 도덕적 탁월성이 크게 부족할 것입니다. 그분은 형언할 수 없는 축복으로 인도하는 길로 우리를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끄 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자연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비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아! 우리 마음은 이것에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귀에 부르심을 받은 분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길을 따라 달려가는 대신 희생과 방해와 어려움에 대해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순종의 모든 단계에는 영혼에 참된 축복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와 교통 속으로 이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종을 살펴보면, 순종이 모든 면에서 합법성과 얼마나 뚜렷하게 구별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후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사람이 자신의 죄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끊임없는 고문을 당하며, 순종의 길로 달려가기는커녕 첫 걸음도 떼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에 참된 순종은 은혜 안에서 전달되는 새로운 성품의 표현 또는 유출일 뿐입니다. 이 새로운 성품에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그 인도를 위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의 계명에 따라 인도되는 신의 본성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합법화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합법성을 구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옛 성품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하나님의 순수하고 거룩한 율법으로 규제하려는 시도는 그 무엇보다도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타락한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순수한 대기를 호흡할 수 있었습니까? 불가능한. 분위기와 성격 모두 신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되신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신성한 본성을 부여하시고 하늘의 교훈으로 그 본성을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본성에 적합한 희망과 기대를 두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느니라."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그의 영혼의 비전 앞에 매력적인 대상, 곧 " 내가 네게 보여 줄 땅 "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매력이었다. 하나님의 땅 새 인간의 판단에 있어서 믿음의 판단이 우르나 하란보다 훨씬 나았느니라 비록 그 땅을 보지 못하였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땅이므로 믿음은 그것을 가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느니라 가질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현재의 것을 항복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느니라.” 즉 “그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마음으로 믿었으니 믿음이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의 샘이 되었느니라. 믿음은 우리의 감각의 증거 곧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견고한 기초 위에 있으니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속일 수 없느니라

이제 신의 본성에 대한 전체 진리는 이를 인도하는 교훈과 그것을 생기 있게 하는 희망, 즉 이러한 것들에 관한 신적 교리 전체가 율법주의 체계에 의해 완전히 배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천국에 가려면 땅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타락한 자연이 자신과 연합한 자연을 어떻게 항복할 수 있습니까? 아무런 매력도 없는 것에 어떻게 매력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천국에는 자연에 대한 매력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은 그것이 발견되고 싶은 가장 마지막 장소입니다. 자연은 천국이나 그 직업, 그 거주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그곳에서 자신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땅을 포기할 능력도 없고 천국을 얻고자 하는 욕구도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지옥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우울함, 비참함을 피하는 것은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과 천국을 얻고자 하는 소망은 매우 다른 두 가지 근원에서 나옵니다. 전자는 옛 본성 안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새로운 것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지옥에 “불못”이나 “벌레”가 없다면 자연은 그렇게 위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동일한 원칙이 자연의 모든 추구와 욕구와 관련하여 적용됩니다. 율법주의자는 우리가 의로움을 얻으려면 먼저 죄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연은 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에 관해서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미워합니다. 사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종교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가 지옥불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영혼에게 현재의 하나님과 그분의 길의 즐거움을 소개하기 때문에 종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은 모든 면에서 이 비참한 율법주의 제도와 얼마나 다른가! 이 복음은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은혜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희생으로 죄를 없애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절대적인 방법으로 영원한 의를 근거로 하여 그것을 버리셨으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시고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 곧 부활하고 높여지고 영광을 받으신 그분의 아들의 부활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이제는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 그와 함께 있느니라. 우리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본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적용되는 그분의 거룩한 말씀의 교훈을 통해 은혜롭게 인도하십니다. 또한 그는 파괴할 수 없는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그 삶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분은 멀리서 “영광의 소망” – “기초가 있는 성” –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 – “아버지 집의 많은 저택”, 높은 곳에 – “금 거문고”를 계시하십니다. - "푸른 종려나무"와 "흰 옷" - "움직일 수 없는 왕국" - 행복과 빛의 지역, 슬픔과 어둠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그분 자신과의 영원한 연합 - 온 세상에서 인도받는 말할 수 없는 특권 셀 수 없이 많은 영원의 시대,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구속하는 사랑을. 이 모든 것이 율법주의자들의 생각과 얼마나 다릅니까? 체계적 종교의 교리에 따라 고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본성을 교육하고 관리하여 내가 사랑하는 땅을 포기하고 내가 미워하는 천국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부르시는 대신에, 그분께서는 무한한 은혜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취된 희생을 근거로 나에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본성과 그 본성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국뿐 아니라 그분 자신도 온 하늘의 기쁨의 변함없는 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방법입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아브라함을 다루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다소의 사울을 다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우리를 다루신다. 영광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우르나 하란보다 더 나은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다소의 사울에게 너무나 밝은 영광을 보여 세상의 가장 빛나는 영광에 그의 눈을 감았으며 그 영광을 모두 "똥으로" 여기게 하였으니, 그에게 나타난 복된 자를 얻으려 하심이니라. 그의 가장 깊은 영혼에게 말했다. 그는 영광 중에 계신 하늘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 내내 질그릇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늘의 영광이 그의 온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에 이르니라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였더라.” 하나님의 땅에 가나안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시련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과 희망에 대한 요구, 마음의 훈련, 인내의 시련이 될 것입니다. 그는 우르와 차란을 뒤로 하고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말한 땅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가나안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두 진술 사이의 연결은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눈이 현재 그 땅의 소유자인 가나안 사람에게 머물지 않도록 여호와께서 그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실 분으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데려가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은 사탄의 능력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를 유업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이해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영역이 우리의 갈등의 영역이다. 이것이 우리를 겁나게 해야 할까요? 결코 아니다. 우리는 거기에 그리스도를 갖고 있습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그 안에서 우리는 "승리하는 자보다 더 나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의 영”에 빠지는 대신 예배의 영을 배양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 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쳤습니다 .” 제단과 장막은 아브라함의 품성의 두 가지 큰 특징을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세상에서 낯선 사람 – 가장 축복받은 특성! 이 땅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갖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발을 디딜 만한 것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그에 따른 시련과 그에 따른 답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상황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거친 바다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만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더 깊고 성숙한 경험으로 그를 인도하도록 은혜롭게 계획되었습니다. 하늘에 항상 구름이 없고 바다에 잔물결이 없다면 신자는 자신이 상대하는 하나님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아아! 우리는 환경의 평화를 하나님의 평화로 착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쉬운지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원활하고 즐겁게 진행될 때, 우리의 재산은 안전하고, 우리의 사업은 번영하고, 우리의 아이들과 하인들은 기분 좋게 지내고, 우리의 주거는 편안하고, 우리의 건강은 훌륭하고, 모든 것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얼마나 실수하기 쉬운가?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평화, 곧 실현된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떤 식으로든 들어오셔서 보금자리를 뒤흔드십니다. 즉, 우리가 그분 자신이 아닌 환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 면제를 통해 그 길의 정당성을 판단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 반대의 경우 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순종의 길은 종종 혈과 육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곳에서 가나안 사람을 만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땅에 기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올바른 위치에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어야 했습니까?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결코 행하지 않는 바로 그 일을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마음에 대한 깊은 시련이었고 자연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모든 것이 단순하고 쉬웠습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된 곳은 빌립보 감옥이었습니다. 친교가 없는 마음에는 이것이 선교 전체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입장이 정당한지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모든 것이 그래야만 하는 것과 같다고 확신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는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 중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인간적으로 말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그가 있는 바로 그 곳에 쫓겨나지 않았다면 복음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마귀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귀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도 기근에 관해 같은 방식으로 추론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신 바로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는 그곳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기근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집트는 압력으로부터 구원을 제공하기 위해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종의 길은 분명했습니다. 가나안에서 굶어 죽는 것이 이집트에서 사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 사탄의 길에서 안일한 것보다 하나님의 길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부자가 되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한 것이 더 낫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양과 소가 있었고 그에게는 나귀와 남종과 여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나귀와 낙타가 있었느니라.” 육신적인 마음은 의심할 바 없이 그의 발걸음이 의롭다고 말할 것입니다. 애굽이로다 그러나 아 그에게는 제단도 없고 교제도 없었느니라 애굽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아니었도다 그가 그리로 가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도다 항상 그러하니 그 무엇도 우리의 친교의 상실을 보상할 수 없느니라 일시적인 압력으로부터의 면제와 가장 큰 부의 획득은 순종의 곧은 길에서 머리카락 한 톨이라도 벗어남으로써 잃는 것에 대한 보잘것없는 등가물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에 아멘을 덧붙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길과 관련된 시련과 훈련을 피하기 위해 이 악한 현 세상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어 그들의 영혼에 야위함과 메마름, 무거움과 우울함을 가져왔습니까? "돈을 벌었다"는 말은 그들의 가게를 늘리고 세상의 호의를 얻었으며 파라오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과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 마음의 교제의 자유, 순결하고 정죄함이 없는 양심, 감사하고 예배하는 정신, 활발한 증언, 효과적인 봉사에 대한 적절한 등가물입니까? 아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비교할 수 없는 모든 축복은 종종 약간의 용이함, 약간의 영향력, 약간의 돈을 위해 팔렸습니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이여, 좁지만 안전하고 때로는 거칠지만 항상 즐거운 단순하고 온 마음을 다한 순종의 길 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경계합시다 . 그 어떤 것도 보상할 수 없는 “믿음과 깨끗한 양심”을 질투하고 조심스럽게 경계합시다. 시련이 닥치면 애굽으로 돌아가는 대신 하나님을 기다리자. 그러므로 시련은 걸림돌이 되기는커녕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조에 빠져들도록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대로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를 기억하자.”(갈라디아서 2:13 ) (벧전 1:4 )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의 참 성격을 이같이 아시고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몸을 버리셨다면 우리가 그를 부인하고 그의 세상의 참 모습을 다시 그 속에 빠뜨려 그를 부인하겠느냐 십자가가 영원히 우리를 건지셨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의 참모습을 볼 때까지, 그와 같이 되어 영원히 그와 함께 할 때까지 우리를 그의 손 아래, 그의 날개 그늘 아래에 지키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13장

이 장의 시작은 우리에게 마음의 엄청난 관심을 끄는 주제, 즉 신성한 회복의 참된 성격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영적 상태가 쇠퇴하고 교통을 상실할 때, 그는 양심이 작용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합당한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신성한 회복의 표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자신에게 합당하게 행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개종시키시고, 회복시키시고, 공급하시든지 오직 그분 자신처럼만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 합당한 것은 영원하고 유일한 그분의 행동 표준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한, 이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회복하시는 은혜만큼 우리가 그분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건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구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 처음 에 장막을 쳤던 곳, … : 아브라함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방황하는 자와 타락한 자와 관련하여 그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독선적인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이 이전에 차지했던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장점이나 성격에 관한 문제라면 그는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에 회복의 표준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분의 표준은 다음 구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일이며,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전혀 회복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확대하고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나병환자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실제로 “회중의 장막 문으로” 인도되었습니다.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회복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서서 “너희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자를 부인하였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스스로 행한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경우와 추가될 수 있는 더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의 완전성을 봅니다. 그분은 항상 은혜의 충만한 능력과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 영혼을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당신이 돌아오려면 나에게 돌아오십시오 ." “아브라함이 처음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렀느니라 .

그러면 하나님의 회복의 도덕적 효과에 관해서는 가장 심오하게 실제적입니다. 율법주의가 회복의 성격 에서 답을 얻는다면 , 도덕률폐기주의는 회복의 결과 에서 답을 얻는다 . 회복된 영혼은 자신이 구원받은 악에 대해 매우 깊고 예리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며, 이는 질투하고 기도하는 마음과 거룩하고 신중한 영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되는 것은 우리가 더 가볍게 가서 다시 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성한 회복의 은혜 에 대한 나의 감각이 깊어질수록 , 그것의 거룩함 에 대한 나의 감각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 이 원리는 경전 전체에 걸쳐 가르치고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잘 알려진 두 구절, 즉 시. 23:3 , 요한 일서 1:9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그리고 다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신성하게 회복된 영혼을 위한 올바른 길은 "의의 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의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불의 가운데 행하면서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만일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였은즉 또한 의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흘러넘치는 데서 나타나느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는 은혜가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니 이것들은 결코 나누지 못할 것이니라 함께 하면 인간 마음의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에 대한 승리의 대답을 제시하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기근보다 더 깊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개인적인 믿음의 힘이나 개인적인 책임의 실현 가운데 행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데서 발생하는 시련이었습니다. 롯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보다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영향력과 모범에 의해 성장해 나갔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일으키신 모든 위대한 운동에서 그 운동을 일으킨 권세에 개인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어떤 개인들이 어떻게 그 운동에 참여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그러한 사람들은 간증에 무거운 짐이 되거나 적극적으로 방해가 되어 한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경우에 주님은 그에게 그의 친척을 떠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의 친족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데라는 죽음이 그를 방해할 때까지 그의 움직임을 지연시켰습니다. 롯은 "다른 것들의 정욕"이 그를 압도할 때까지 그를 조금 더 따라갔고, 그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는 대이동에서도 똑같은 일이 관찰됩니다. "중다한 잡족"이 그들을 따랐고 많은 더러움과 약함과 슬픔을 일으켰습니다. 민수기 11장 에서 "그들 중에 섞인 무리가 탐욕에 빠졌고 이스라엘 자손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 교회 초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부흥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영향력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신성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렇게 행동한 사람들은 조만간 포기하고 적절한 수준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나와 살아계신 하나님 사이의 연결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안정성도 없고 그 안에서 일관성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그들의 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각 사람에게 걸어야 할 길과 움직여야 할 영역, 성취해야 할 책임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과 그 기능을 알아야 하며, 매일 우리 영혼에 베푸시는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그분의 영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척도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말입니다. 우리는 “다섯 달란트”를 가질 수도 있고, “한 달란트”만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눈을 고정한 채 “하나”를 사용한다면 마치 “다섯”을 사용한 것처럼 그분의 은혜로운 입술에서 “잘하였도다”라는 말을 확실히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무적입니다.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분량, 즉 특별한 사역을 가졌습니다. 모두 마찬가지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방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수는 톱과 대패, 망치와 끌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사용합니다. 모방보다 더 가치없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계에서 창조의 다양한 질서를 살펴보면 모방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적절한 영역과 적절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도 그러하다면, 영적인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필드는 모두에게 충분히 넓습니다. 모든 집에는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모양의 그릇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들 모두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가 신의 영향 아래 걷고 있는지 인간의 영향 아래 걷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인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동료의 모범과 영향력으로 지탱을 받든,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으로 지탱받든 말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의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 형제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은 행복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들에 의해 지탱된다면 우리는 곧 파선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면 우리의 행동은 긴장되고 보기 흉하며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분량에 따라 일하고 있는지 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모든 가식, 가정, 모방은 극도로 경멸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위대해질 수는 없지만 정직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훌륭할 수는 없지만 진실해지도록 합시다. 사람이 수영할 줄 모르고 자신의 깊이 이상으로 가면 그는 반드시 허둥대게 될 것입니다. 선박이 항해에 적합하지 않고 손질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바다에 나가면, 반드시 다시 항구로 돌아가거나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롯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소돔 평야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의 마음에 이르지 못했고, 하나님의 유업이 그의 비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엄숙한 생각! 깊이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의 종들에게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그분의 승인하시는 얼굴의 빛이 빛나며 그 길을 걷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분의 승인은 그분을 아는 마음에 충분합니다. 사실, 우리는 항상 형제들의 승인과 동의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날”은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찬송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 날을 만족스럽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롯이 공개 증언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역사에는 위기가 있으며, 그 위기에서는 그가 어떤 기반에 안주하고 있는지, 어떤 동기로 행동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활력을 주는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롯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Charran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돔에 떨어졌다. 그가 타락한 표면적인 원인 은 그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 사이의 불화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 정말로 한쪽 눈과 정화된 애정으로 걷고 있지 않다면, 걸려 넘어질 돌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에 찾지 못하면 다른 번에 찾을 것입니다. 여기서 찾지 못하면 거기서 찾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외면하는 명백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원인은 일반적인 관찰과는 거리가 먼, 어떤 형태로든 세상이 추구되는 마음의 애정과 욕망의 숨겨진 방에 있을 수 있습니다. 목자들 사이의 분쟁은 아브라함이나 롯에게 영적인 손상을 주지 않고 쉽게 해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전자에게 그것은 믿음의 아름다운 힘과 도덕적 고양, 믿음이 항상 그 소유자로 삼는 하늘의 유리한 입장을 보여줄 기회만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후자에게는 그것이 자기 마음의 철저한 세속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분쟁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낳지 못한 것처럼 롯에게도 세속성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각각의 경우에 실제로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드러냈을 뿐입니다.

항상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논쟁과 분열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걸려 넘어지고 어떤 식으로든 세상으로 쫓겨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논쟁과 분열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것들은 영혼의 실제 상태와 마음의 구부러짐을 발전시키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 속에 있었고 어떤 경로 로든 도달 할 수 있었습니다 . 문제의 뿌리가 내부에 있을 때 인간과 사물을 비난하는 데에는 도덕적 탁월함이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논쟁과 분열이 깊이 개탄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앞에서 형제들이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애통하고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항상 "나와 당신 사이에 다툼이 없게 하라...우리는 형제임이니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소돔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 분쟁이 그를 세상으로 내몰지 않았습니까? 왜 그것은 그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에게는 롯의 마음만큼 강력하게 “물이 많은 들판”에 매료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이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롯에게 선택을 맡기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도록 맡겼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지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행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굳게 하시고 또한 그것을 선하게 하시도록 허락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몫으로 늘 만족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쾌적한 장소에 선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나는 좋은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판단에 있어서 그 줄은 항상 “좋은 곳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선택을 하도록 쉽게 허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무관심과 도덕적 고양을 갖고 있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안전합니까! 자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가장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가장 대담하고 높은 도약을 하게 된다면, 신앙의 보화에 손을 얹는 위험은 결코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 몫을 찾을 것입니다. 믿음은 자연이 결코 탐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접근하는 것에 관해서는,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연이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데 있어 완벽하게 안전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무관심합니다.

그러면 롯은 선택을 받았을 때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그는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심판을 받으러 갔던 바로 그 장소. 그런데 이건 어땠나요? 왜 그런 장소를 선택합니까? 왜냐하면 그는 겉모습을 보았지 본질적인 성격이나 미래의 운명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성격은 " 사악하다 "였습니다. 그 미래의 운명은 “ 심판 ”, 즉 “하늘에서 내리는 불과 유황”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롯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자기의 기업을 택하시도록” 허락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멸망시키려는 장소를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소돔은 그에게는 적합했지만 하나님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물이 풍부한 평지”에 머물렀고 그의 마음은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소돔을 향해 장막을 쳤습니다 ." 이것이 바로 자연의 선택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느니라." 롯도 같은 이유로 아브라함을 버렸습니다. 그분은 증언의 자리를 떠나 심판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네가 보는 온 땅을 바라보라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 “분쟁”과 “분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상태를 손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하늘의 원칙을 완전히 드러내고 그의 영혼에 믿음의 삶을 강화시켰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에게 전망을 밝혀 주고, 막중한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의 무리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선한 일을 하여 축복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남성이 자신의 적절한 수준을 찾는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은 가장 엄숙하면서도 가장 고무적인 일입니다. 보내지 않은 채 달리고 어떤 식으로든 무너지고 자신이 떠났다고 공언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 반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은혜로 보호를 받습니다. "그들의 길은 돋는 광선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느니라." 이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겸손하고 깨어 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왜냐하면 진실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원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든 폭넓은 도덕적 의미를 갖습니다. 많은 선박이 환호와 함성을 지르며 일류 항해에 대한 많은 공정한 약속을 가지고 용감한 스타일로 모든 캔버스를 펼치고 항구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아! 폭풍, 파도, 떼, 바위, 유사 등이 사물의 양상을 변화시켰습니다. 희망으로 시작된 항해는 재앙으로 끝났다. 나는 여기서 단지 봉사와 간증의 길만을 언급할 뿐,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받아들여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습니다.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신 이 후자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 자신에게 안식하지 아니하시고, “내가 내 양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분과 함께 안식하십니다. "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어떤 특별한 봉사나 간증의 과정을 시작하다가 얼마 후에는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십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더욱이 매우 많은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행동 원칙을 고백하는데, 그 원칙은 그들이 신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 또는 그 결과가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게 고려되지 않은 것, 그리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자신도 바로 그 원칙을 공개적으로 위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므로 조심스럽게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진리의 원수들로 하여금 모욕적인 말을 하게 만듭니다. 각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아야 합니다.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특별한 봉사에 부르신 모든 사람을 틀림없이 그 직무에 유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비용으로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견되지 않은 채 달려간다면, 우리는우리의 어리석음을 배우십시오 .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십시오 .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어떤 원리의 흉내를 내거나 특별한 성격의 봉사나 간증의 모범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 금지. 이것은 가장 지독한 어리석음이요, 공허한 자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교사의 일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뜻을 제시하는 것은 종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인정되는 동안, 우리는 탑을 쌓거나 전쟁에 나가기 전에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일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우리 가운데 혼란과 실패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길로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은 그를 기다리셨다. 그가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에게 인도가 필요할 때 그분은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다툼과 분리가 있을 때 그분은 그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오, 주를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 곧 주를 의뢰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서 이루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싸움으로 아무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전에도 천막과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장막과 제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롯은 소돔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구하고 찾았습니다. 소돔에는 제단이 없었습니다. 아아! 그 방향으로 여행하는 모든 사람은 그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목적을 달성해야 하지만,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끝나나요? 바로 이렇습니다. "그가 그들의 요구를 주셨으나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느니라."

 

창세기 14장

여기서 우리는 그델라오멜의 손에서 나온 다섯 왕의 반역과 그에 따른 전투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왕들과 그 군대”의 움직임에 관여하실 수 있으며, 그러한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아브라함은 개인적으로 반란이나 그 결과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의 "장막과 제단"은 전쟁을 선포할 기회를 제공할 것 같지 않았고 전쟁의 발발이나 결과에 의해 아직 큰 영향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의 합당한 몫은 결코 탐욕을 유혹할 수 없으며 이 세상의 왕들과 정복자들의 야망을 자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왕과 다섯 왕'의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롯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입장은 그 사건 전체에 그를 개입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통해 단순한 믿음의 길을 추구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이 세상 상황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로서 우리의 높고 거룩한 지위를 버리고 땅에서 이름과 장소와 몫을 구한다면 우리는 땅의 진동과 변천에 참여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가 소돔 평지에 거주하였으므로 소돔 전쟁으로 말미암아 깊고도 지각 있는 영향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반드시 그러하리라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의 자녀들과 섞이는 것은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이니라 그는 결코 그 자신의 영혼과 그에게 맡겨진 증언에 심각한 손상을 끼치지 않고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소돔에서 롯이 무슨 증언을 하였습니까? 설령 하나라도 매우 연약한 증언입니다. 소돔과 그 길에 대하여 말로 말하면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 되리니 그가 왜 거기 있었느냐 그러나 실상은 전혀 드러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소돔을 향하여 장막을 치는 것"에서 그의 목적의 일부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족의 이익이 그의 마음에서 행동의 주요 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날마다 악인의 더러운 대화로 말미암아 영혼이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러나 비록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 있더라도 그에 대항할 힘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동시에 두 가지 대상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세상적인 관심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관심을 내 마음 속에 사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목적으로 어떤 도시에 간다면, 분명히 사업이 나의 목적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나는 의심할 바 없이 사업에 참석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함께 할 것을 나 자신에게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둘 중 하나가 나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가장 복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사업에도 참석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사업이 아니라 복음이 그의 목적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장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복음이지 장막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업을 목표로 삼는다면 복음 전파는 곧 형식적이고 무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나의 탐심을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마음은 매우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특별한 점을 얻고자 할 때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는지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풍부하게 제시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 이해의 눈은 사리사욕이나 판단할 수 없는 고의로 인해 눈이 멀어서 그 타당성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면서도 더 넓은 범위의 유용성을 누리게 되기를 간청하면서 그 입장을 계속 옹호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러한 모든 추론에 대해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는 명확하고 강력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과 롯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었습니까? 이 두 사람의 역사는 세상을 섬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세상과 분리되고 반대 증언함으로써 세상에 충실하는 것임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과의 진정한 분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교통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킬 수도 있고 수도승이나 냉소주의자처럼 내 존재의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분리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는 차갑고 수축되고, 다른 하나는 따뜻해지고 팽창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스스로에게 몰아넣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것이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우리의 중심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우리의 중심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경우, 그가 별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적인 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사람에게 효과적인 봉사를 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조카가 사로잡혔다 함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의 재물과 여자들과 백성도 그러하니라." 결국 롯은 아브라함의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형제애가 실천되어야 합니다. "형제는 역경을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역경의 시기가 오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심지어 우리가 헤어져야 했던 사람에게서조차 친절을 베풀기 쉽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사로잡았더라” 라고 읽은 반면, 14절에서는 “아브람이 그 형제가 사로잡혔다 함을 들었을 때에”라고 읽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형제의 어려움에 대한 요구는 형제의 마음속 애정으로 응답됩니다. 이것은 신성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우리를 독립적으로 만들어 주지만 결코 무관심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형제가 추위에 떨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양털로 몸을 감싸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행하는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정화한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그리고 이 모든 믿음의 결과는 이 경우에 아브라함에게서 아름답게 나타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소돔의 오염으로부터 정결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 롯에게 진정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왕들에게 완전히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귀중한 열매, 즉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도 원수의 공격에서 면제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승리 직후 새로운 유혹에 직면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그델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그를 맞으러 나갔더라.” 분명히 이 운동에는 적의 매우 깊고 교활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소돔 왕"은 "그데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사상을 제시하고 적의 힘에 대한 매우 다른 국면을 보여줍니다. 전자에서는 오히려 뱀의 쉭쉭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후자에서는 사자의 포효; 그러나 그것이 뱀이든 사자이든 주님의 은혜가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가장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순간에 주님의 종에게 베풀어졌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더라 그가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당신의 대적을 당신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되소서.” 여기서 우리는 먼저 멜기세덱이 등장하는 특별한 지점을 언급해야 합니다. 둘째, 그의 사역의 이중 효과. 아브라함이 그델라오멜을 쫓을 때에 나오신 것이 아니요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쫓을 때에 나오셨느니라. 이것은 도덕적으로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갈등의 더 깊은 성격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깊은 친교의 성격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에 관해서는 그 "빵과 포도주"가 그델라오멜과의 싸움 후에 아브라함의 정신을 소생시켰습니다. 축복은 소돔 왕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그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복자였으나 이제 곧 전투원이 될 참이었습니다. 왕의 제사장은 정복자의 정신을 소생시키고 전투원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생각에 하나님을 소개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은 특히 감미롭습니다. 그는 그분을 “하늘과 땅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가 소돔 왕이 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적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주재"가 그의 비전을 가득 채웠다면 소돔의 "재물"은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상할 수 있듯이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주고 물건은 네가 취하라”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이시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을까 두려워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올이라도 빼앗지 아니하고 네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부요함을 거부합니다. 롯 자신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어떻게 롯을 세상의 권세에서 구원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전달하는 유일하고 참된 방법은 나 자신을 철저히 전달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 속에 있는 한, 그 불에서 다른 것을 뽑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분리의 길은 평화와 축복의 길이기 때문에 힘의 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온갖 다양한 형태로 그리스도의 종들의 손을 약화시키고 애정을 멀어지게 하기 위해 사단이 사용하는 위대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음이 그분께 진실할 때, 그분은 항상 적절한 때에 격려하고 힘을 주고 강화시키기 위해 들어오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느니라.” ( 역대하 16:9 ) 이것은 우리의 가난하고 소심하고 의심하고 흔들리는 마음에 격려가 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과 방패가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싸우는 날에 우리 머리를 덮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손을 가르치시어 싸우게 하시며 우리 손가락을 가르쳐 싸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은 곧 사탄을 우리 발 아래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적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마음에 말할 수 없이 위로가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주변의 올가미 상황 속에서도 우리 마음을 그분에게 진실되게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5장

“이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당신의 종이 패배자가 되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소돔 왕의 후원 아래 피신하는 것보다 여호와의 방패 뒤에 숨는 것이 훨씬 더 나았습니다. 그리고 소돔의 “재물”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의 “심히 큰 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장의 첫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놓인 위치는 모든 영혼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들어가는 위치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방패”가 되어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상”이셨고 그는 그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현재의 안식과 현재의 평안과 현재의 안전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찾습니다. 원수의 어떤 다트도 예수님을 믿는 가장 연약한 신자를 가리고 있는 방패를 뚫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채우십니다. 소중한 부분! 소중한 희망! 결코 고갈될 수 없는 부분, 결코 부끄럽지 않을 희망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권고와 그리스도의 성취된 속죄에 의해 틀림없이 보장됩니다. 현재의 즐거움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신자가 세상적인 직업을 추구하거나 세상적, 육욕적인 욕망에 탐닉하고 있다면 그는 “방패”나 “보상”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만일 성령께서 근심하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합당한 몫, 즉 합당한 소망을 누리도록 사역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아브라함의 역사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왕들을 살육하고 돌아와서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했을 때 여호와께서 이중적 성격으로 그의 영혼 앞에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지극히 큰 상을 받으시느니라." 마음으로 이 점을 숙고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심오하고 실제적인 진리가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아들의 신분과 상속자의 신분이라는 두 가지 큰 원칙을 우리에게 밝혔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무자하니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내 집 청지기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이르되 보소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고 아들이 났나이다 내 집에는 내 상속자가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한 권위에 따라 그의 "씨"가 땅을 상속받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창세 13:15 ) 아들 자격과 상속 재산은 하느님의 생각에 있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네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아들의 명분은 모든 것의 합당한 기초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야고보서에서 “그가 자기의 뜻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읽은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운행의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부활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아브라함의 몸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경우에도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명분은 부활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합니다. 자연은 죽었으므로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낳을 수도 잉태할 수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장엄한 규모로 족장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유산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속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아브라함의 몸과 사라의 태가 모두 "죽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행동하실 대상은 바로 "죽은 몸"이었습니다. 자연이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시기 전에 자연을 죽였어야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가장 적합한 극장은 자연과 그 모든 자랑스러운 능력과 공허한 허식이 사형 선고로 완전히 추방된 극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였습니다. 부활의 하나님께서 환상을 가득 채우시면 영혼의 축복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그분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의로움이 전가되는 것은 그가 주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것에 근거합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이 성품에서입니다. 그리고 어떤 영혼이 그분을 믿을 때, 그 영혼은 그분 앞에서 의로운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협력을 차단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현장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그가 무덤의 문을 열 수 있습니까? 그는 죽음의 권세에서 자신을 구출하고 그 음울한 영역을 넘어 생명과 자유를 누리며 나아갈 수 있습니까?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는 의를 행할 수도 없고, 아들의 신분을 확립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사람이 사망의 권세 아래 있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그는 아들의 지위를 알 수 없고, 정의의 조건.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아들들의 양자를 주실 수 있고 그분만이 의를 입힐 수 있으며 둘 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으로 믿는 믿음과 연결됩니다.

로마서 4 장에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 “저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는 우리도 위함이니 ,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우리가 믿으면." 여기에서 부활의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에게도" 제시되며, 그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 의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됩니다. 아브라함이 무수한 별들로 반짝이는 하늘의 궁창을 올려다본 다음 "이제 죽은 자기 몸"을 바라보았다면, 그 별만큼 많은 씨가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한. 그러나 그가 자기 몸을 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보았으니 그것이 씨 맺는 능력이니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느니라 참으로 미약한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의 효과를 어떤 자연물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죄인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을 때, 만일 그가 하나님의 임재의 ​​순수한 빛을 우러러 본 다음, 그 자신의 악한 본성의 탐구되지 않은 심연을 내려다본다면, 그는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내가 거기까지 간 적 있어? 내가 어떻게 그 빛 속에 거하기에 적합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자체로? 아니, 하나님은 찬송받으소서. 그러나 품에서 십자가와 무덤까지, 그리고 거기에서 보좌까지 여행하시고, 그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 극단 사이의 모든 공간을 채우신 그 복된 분 안에서 말입니다. 아들의 영원한 거처인 하나님의 품보다 더 높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무덤보다 더 낮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나는 그 둘 모두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나는 그분을 품에서 발견하고 무덤에서도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죄와 불법의 모든 무게를 먼지 속에 남겨 두시기 위해 죽음 속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무덤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모든 것의 끝, 즉 죄의 끝, 사탄의 능력의 한계를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의 무덤은 죽음의 장엄한 종착지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를 이 한계 너머로 데려가며,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축복이 영원히 머무는 불멸의 기초를 구성합니다. 믿음의 눈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머무르는 순간, 죄와 심판과 죽음과 무덤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한 승리의 응답이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만나신 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하늘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분의 영이 신자 안에서 그를 아들로 삼으십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너희의 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시고 너희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 골로새서 2:13 )

그러므로 부활에 기초를 둔 아들의 명분은 완전한 칭의, 즉 완전한 의,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가 있는 상태에서 우리를 그분의 임재 안에 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아들딸들에게 죄의 한 점이나 얼룩도 겪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먼 나라의 누더기 옷을 입은 탕자를 식탁  모실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누더기 옷을 입고 그를 만나러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 누더기를 입은 채 그의 목에 엎드려 키스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 에 합당하고 아름다운 특징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를 누더기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히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를 탕자에게로 인도하신 은혜가 탕자를 아버지에게로 인도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느니라 만일 아버지가 아들이 자신이 준비한 옷을 입기를 기다렸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그를 데려오는 것은 의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가서 탕자의 목을 밟았을 때 은혜와 의가 각각의 광채와 아름다움으로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고상하고 행복한 자리에 걸맞은 옷을 입고 치장을 할 때까지는 그에게 식탁에 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상태의 가장 낮은 지점까지 몸을 굽히셨습니다. 이는 인간을 굽힘으로써 자신과 교제하는 축복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높이시기 위함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의 아들 신분은 그에 따른 모든 존엄성과 특권을 포함하여 우리와 완전히 독립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체와 사라의 죽은 자궁이 하늘을 장식하는 별이나 해변의 모래만큼 많은 씨와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것과 관련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 하나님은 기초를 놓으시고, 성신 하나님은 상부 구조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 상부 구조에는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은혜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에서는 우리의 견해에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주제, 즉 상속권을 열어줍니다 . 아들 자격과 의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신성하고 무조건적으로 해결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여기에는 상속권에 대한 중대한 문제가 나와 있으며, 선택된 상속자들이 약속된 기업에 도달하기 전에 따라야 할 특별한 길은 무엇입니까?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왕국으로 가는 우리의 길은 고난과 역경과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믿음으로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간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는 것이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환난 중에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과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는 높은 영예요 참된 특권이니라 우리는 복된 주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로 세례를 받으며, 영광스러운 유업으로 곧장 인도하는 길을 따라 그와 함께 복된 동반자로 여행할 것입니다. 고통.

그러나 공동 상속자들이 참여하는 고통에는 형벌적인 요소가 없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죄로 인해 무한한 정의의 손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신성한 희생물이 채찍에 맞아 신성한 머리를 숙였을 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리고 그 "한 번"은 나무 위에 있었고 다른 곳에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전에도 죄로 인해 고난을 받으신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죄로 인해 고난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 세상 끝에(모든 육체의 끝)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리사 죄를 없이 하시려고 나타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제사를 드린 바 되셨습니다."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께 상함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전자에서는 그분이 홀로 서셨습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전자에서는 그분이 혼자 서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가 그분과 함께 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밭을 갈지도, 씨를 뿌리지도 않은 거친 골짜기”로 홀로 여행하셨고, 그곳에서 우리 죄에 대한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셨습니다. 이것 에 대해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영원히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전리품을 우리와 나누십니다. 그분은 무서운 구덩이와 진창 속에 홀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의 영원한 “반석” 위에 직접 발을 디디시고 우리를 그분과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분은 홀로 외치셨고, 함께 “새 노래”를 부르 셨습니다 . ( 시 40:2-3 )

이제 문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고난을 받으신 분과 함께 사람의 손에서 고난을 받는 것을 거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은 성령께서 그것과 관련하여 “만일”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신 것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다스릴 것이다." 아들 신분에 관한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아들의 높은 존엄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에 기초를 둔 성령의 살리시는 능력을 통해서 도달합니다. 이건 절대 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가족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 사도는 “너희 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 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이미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국을 향하여 묶여 있었습니다. 그 왕국으로 가는 그들의 길은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왕국을 위한 고난의 정도는 왕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순응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더 유사할수록 우리는 그분 과 함께 더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 그분과의 교통이 깊어질수록 영광 속에서의 교통도 깊어질 것입니다. 아버지의  과 아들의 왕국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전자의 경우 능력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할당된 위치에 대한 문제입니다. 내 아이들은 모두 내 식탁에 둘러싸일 수 있지만 나와 함께 있고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은 전적으로 그들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로서 내 무릎에 앉아 자신의 관계를 온전히 즐기면서도 내가 말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화에서 남다른 지능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내 무릎 위에 앉은 아기보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 대한 봉사의 문제가 되거나 나에 대한 공적인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집의 능력과 아들의 왕국에서 지정된 지위에 대한 개념을 미약하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은 속박의 멍에가 아니라 특권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철칙이 아니라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강제적인 예속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빌립보 1:29 ) 더욱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진정한 비결은 마음의 애정을 그분께 집중시키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그분과 더 가까워지고, 그분과 더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분을 더욱 신실하게 닮게 되며, 그분을 더욱 신실하게 닮을수록 그분과 함께 고난도 더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사랑에서 그리스도께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법적 정신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에 율법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아들의 명분의 복을 알지 못하며 아직 은혜 안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길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 하기보다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가족에게 이르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주님의 잔과 세례를 받기를 꺼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가 보장하는 유익을 누린다고 공언하면서도 그 십자가가 수반하는 거절을 거부하지 맙시다. 우리는 왕국으로 가는 길이 이 세상의 은총의 햇빛으로 밝혀지지도 않고 번영의 장미꽃이 뿌려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진보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높고 영향력 있는 지위였습니까? 결코 아니다. 그럼 어쩌지?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정죄받은 두 범죄자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에 계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진실; 그러나 인간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후자의 진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계속 교제하기만 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거부를 필연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그리스도의 동행은 나를 땅에서 내쫓는다. 그리고 전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후자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땅에 계시다면 그분의 길은 어떠할 것입니까?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어디에서 종료됩니까? 우리는 그분과 함께 걷고 싶습니까? 말씀의 가장자리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 아래서 그러한 질문에 답합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가 부재하고 거절당한 십자가에 못 박힌 스승에게 충실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가득 차서 그는 고난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는 그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눈이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다면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영광에 비하면 고난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상속이라는 주제는 내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장의 마지막 구절에 설명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매우 의미심장한 환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더니 심연의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 땅에서 객이 되리라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섬기리니 그들이 사백년 동안 괴롭게 할 것이며 그들이 섬기는 그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있고 타는 등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는 '풀무'와 '등불'이라는 두 인물로 요약됩니다. 전자는 그들이 고통과 시련을 겪었던 역사의 기간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장기간 속박, 가나안 왕들에 대한 복종, 바빌론 포로, 현재의 분산되고 타락한 상태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기간 동안 그들은 훈제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 신명기 4:20 ; 열왕기상 8:51 ; 이사야 48:10 참조 )

다음으로, 타오르는 등불에는 이스라엘의 다사다난한 역사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은혜롭게 나타나셨는데, 예를 들어 모세를 통해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여러 재판관의 사역을 통해 그들을 가나안 왕들의 지배 아래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일 것입니다. 유업은 풀무를 통해서 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풀무의 연기가 짙을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등불은 더욱 밝고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원칙은 단지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완전히 적용됩니다. 종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등불을 누리기 전에 풀무불을 견뎠습니다. “큰 흑암의 공포”가 아브라함의 정신을 가로질러 지나갔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극심한 고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지하 감옥에서 고난의 풀무를 발견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종들 도 그러해야 합니다 . 그들은 먼저 “시험을 받아야” “신실”하다는 것이 밝혀져 “직분에 임명”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성 바울의 말로 표현됩니다. “초심자가 되지 말라 교만하여 마귀의 정죄에 빠질까 두려워함이니라.” ( 디모데전서 3:6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 나는 내 아이를 매우 사랑하지만, 아이에게 내 정원에서 일을 하게 하면 아이는 유익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칠 수 있습니다. 왜?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그러나 그는 숙련된 하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차이를 만듭니다. 관계와 사무실은 별개의 것입니다. 현재 여왕의 자녀 중 누구도 총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할 일, 고난 받을 일, 배울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공 봉사와 사적 규율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공개적으로 많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밀한 징계의 확실하고 아름다운 결과인 징계된 정신, 성숙한 판단력, 굴복하고 절제된 마음, 깨어진 의지, 부드러운 음색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위의 도덕적 자격이 어느 정도 없이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조만간 무너질 것입니다.

주 예수여, 당신의 연약한 종들을 당신의 지극히 복되신 분 가까이, 당신의 손 안에 있게 하소서!

 

C. H. Mackintosh.

 

Genesis 1

There is something peculiarly striking in the manner in which the Holy Ghost opens this sublime book. He introduces us, at once, to God, in the essential fullness of His Being, and the solitariness of His acting. All prefatory matter is omitted. It is to God we are brought. We hear Him, as it were, breaking earth's silence, and shining in upon earth's darkness, for the purpose of developing a sphere in which He might display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There is nothing here on which idle curiosity may feed — nothing on which the poor, human mind may speculate. There is the sublimity and reality of DIVINE TRUTH, in its moral power to act on the heart, and on the understanding. It could never come within the range of the Spirit of God to gratify idle curiosity, by the presentation of curious theories. Geologists may explore the bowels of the earth, and draw forth from thence materials from which to add to, and, in some instances, to contradict, the divine record. They may speculate upon fossil remains; but the disciple hangs, with sacred delight, over the page of inspiration. He reads, believes, and worships. In this spirit may me pursue our study of the profound book which now lies open before us. May we know what it is to "enquire in the temple" May our investigations of the precious contents of holy scripture be ever prosecuted in the true spirit of worship.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first sentence in the divine canon sets us in the presence of Him who is the infinite source of all true blessedness. There is no elaborate argument in proof of the existence of God. The Holy Ghost could not enter upon anything of the kind. God reveals Himself. He makes Himself known by His works.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and the firmament shows his handiwork." "All thy works shall praise thee, O Lord." "Great and marvellous are thy works, Lord God Almighty." None but an infidel or an atheist would seek an argument in proof of the Being of One who, by the word of His mouth, called worlds into existence, and declared Himself the All wise, the Almighty, and the everlasting God. Who but "God" could "create" anything.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s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s out their host by number; he calls them all by names, by the greatness of his might, for that he is strong in power; not one fails." (Isa. 40:26) "The gods of the heathen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In the Book of Job 38-41 we have an appeal of the very grandest description, on the part of Jehovah Himself, to the work of creation, as an unanswerable argument in proof of His infinite superiority; and this appeal, while it sets before the understanding the most vivid and convincing demonstration of God's omnipotence, touches the heart, also, by its amazing condescension. The majesty and the love, the power and the tenderness, are all divine.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Here was, in good truth, a scene in which God alone could act. Man, in the pride of his heart, has since proved himself but too ready to interfere with God in other and far higher spheres of action; but, in the scene before us, man had no place until, indeed, he became, like all the rest, the subject of creative power. God was alone in creation. He looked forth from His eternal dwelling-place of light upon the wild waste, and there beheld the sphere in which His wondrous plans and counsels were yet to be unfolded and brought out — where the Eternal Son was yet to live, and labour, and testify, and bleed, and die, in order to display, in the view of wondering worlds, the glorious perfections of the Godhead. All was darkness and chaos; but God is the God of light and order. "God is light, and in Him is no darkness at all." Darkness and confusion cannot live in His presence, whether we look at it in a physical, moral, intellectual, or spiritual point of view.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He sat brooding over the Scene of His future operations. A dark scene, truly; and one in which there was ample room for the God of light and life to act. He alone could enlighten the darkness, cause life to spring up, substitute order for chaos, open an expanse between the waters, where life might display itself without fear of death. These were operations worthy of Go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How simple! And yet how Godlike! "He spake, and it was done. He commanded, and it stood fast." Infidelity may ask, "How? where? when?" The answer is,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Heb. 11:3) This satisfies the teachable spirit. Philosophy may smile contemptuously at this, and pronounce it rude ignorance, or blind credulity, suitable enough for an age of semi-barbarism, but quite unworthy of men living in an enlightened age of the world's history, when the museum and the telescope have put us in possession of facts of which the inspired penman knew nothing. What wisdom? What learning? Yea, rather, what folly What nonsense What total inability to grasp the scope and design of sacred scripture? It, assuredly, is not God's object to make us astronomers or geologists; or to occupy us with details which the microscope or the telescope lays before every school-boy. His object is to lead us into His presence, as worshippers, with hearts and understandings taught and duly governed by His holy Word. But this would never do for the so-called philosopher, who, despising what he terms the vulgar and narrow-minded prejudices of the devout disciple of the Word, boldly seizes his telescope, and therewith scans the distant heavens, or travels into the deep recesses of earth in search of strata, formations, and fossils — all of which, according to his account, greatly improve, if they do not flatly contradict, the inspired narrative.

With such "oppositions of science, falsely so called," we have nothing to do. We believe that all true discoveries, whether "in the heavens above, i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under the earth," will harmonise with that which is written in the word of God; and if they do not thus harmonise, they are perfectly contemptible in the judgement of every true lover of scripture. This gives great rest to the heart in a day like the present, so productive of learned speculations and high-sounding theories, which, alas in too many instances, savour of rationalism and positive infidelity. It is most needful to have the heart thoroughly established as to the fullness, the authority, the completeness, the majesty, the plenary inspiration of the sacred volume. This will be found to be the only effectual safeguard against the rationalism of Germany and the superstition of Rome. Accurate acquaintance with, and profound subjection to, the Word, are the great desiderata of the present moment. May the Lord, in His great grace, abundantly increase, in our midst, both the one and the other.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vid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Here we have the two great symbols so largely employed throughout the Word. The presence of light makes the day; the absence thereof makes the night Thus it is in the history of souls. There are "the sons of light" and "the sons of darkness." This is a most marked and solemn distinction. All upon whom the light of Life has shone — all who have been effectually visited by "the dayspring from on high" — all who have received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Jesus Christ — all such, whoever and wherever they may be, belong to the first class, are "the sons of light, and the sons of the day."

On the other hand, all who are still in nature's darkness, natures blindness, nature's unbelief — all who have not yet received into their hearts, by faith, the cheering beams of the Sun of righteousness, all such are still wrapped in the shades of spiritual night, are "the sons of darkness," "the sons of the night."

Reader, pause and ask yourself, in the presence of the Searcher of hearts, to which of these two classes do you, at this moment, belong. That you belong to either the one or the other is beyond all question. You may be poor, despised, unlettered; but if, through grace, there is a link connecting you with the Son of God, "the light of the world," then you are, in very deed, a son of the day, and destined, ere long, to shine in that celestial sphere, that region of glory, of which "the slain Lamb" will be the central sun, for ever. This is not your own doing. It is the result of the counsel and operation of God Himself, who has given yon light and life, joy and peace, in Jesus, and His accomplished sacrifice. But if you are a total stranger to the hallowed action and influence of divine light, if your eyes have not been opened to behold any beauty in the Son of God, then, though you had all the learning of a Newton, though you were enriched with all the treasures of human philosophy, though you had drunk in with avidity all the streams of human science, though your name were adorned with all the learned titles which the schools and universities of this world could bestow, yet are you "a Son Of the night," "a son of darkness;" and, if you die in your present condition, you will be involved in the blackness and horror of an eternal night. Do not, therefore, my friend, read another page, until you have fully satisfied yourself as to whether you belong to the "day" or the "night."

The next point on which I would dwell is the creation of lights.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s in the firmament of the heaven, to divide the day from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years. And let them be for lights in the firmament of the heaven,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ights; the greater light to rule the day, and the lesser light to rule the night: he made the stars also."

The sun is the great centre of light, and the centre of our system. Round him the lesser orbs revolve. From him, too, they derive their light. Hence, he may, very legitimately, be viewed as an apt symbol of Him who is soon to arise, with healing in His wings, to gladden the hearts of those that fear the Lord. The aptness and beauty of the symbol would fully appear to one who, having spent the night in watching, beholds the rising sun gilding, with his bright beams, the eastern sky. The mists and shades of night are all dispersed, and the whole creation seems to hail the returning orb of light. Thus will it be, by and by, when the Son of righteousness arises. The shadows of night shall flee away, and the whole creation shall be gladdened by the dawning of "a morning without clouds," the opening of a bright and never-ending day of glory.

The moon, being in herself opaque, derives all her light from the sun. She always reflects the sun's light, save when earth and its influences intervene.* No sooner has the sun sunk beneath our horizon than the moon presents herself to receive his beams and reflect them back upon a dark world, or should she be visible during the day, she always exhibits a pale light, the necessary result of appearing in the presence of superior brightness. True it is, as has been remarked, the world sometimes intervenes; dark clouds, thick mists, and chilling vapours, too, arise from earth's surface, and hide from our view her silvery light.

{*It is an interesting fact that the moon, as viewed through a powerful telescope, presents the appearance of one vast ruin of nature.}

Now, as the sun is a beautiful and an appropriate symbol of Christ, so the moon strikingly reminds us of the Church. The fountain of her light is hidden from view. The world sees Him not, but she sees Him; and she is responsible to reflect His beams upon a benighted world. The world has no other way in which to learn anything of Christ but by the Church. "Ye," says the inspired apostle, "are our epistle, … known and read of all men." And again, "Forasmuch as ye are manifestly declared to be the epistle of Christ." (2 Cor. 3:2-3.)

What a responsible place! How earnestly should she watch against everything that would hinder the reflection of the heavenly light of Christ, in all her ways! But how is she to reflect this light? By allowing it to shine upon her, in its undimmed brightness. If the Church only walked in the light of Christ, she would, assuredly, reflect His light; and this would ever keep her in her proper position. The light of the moon is not her own. So is it with the Church. She is not called to set herself before the world. She is a simple debtor to reflect the light which she herself receives. She is bound to study, with holy diligence, the path which He trod, while down here; and by the energy of the Holy Ghost, who dwells in her, to follow in that path. But, alas! earth with its mists, its clouds, and its vapours, intervenes, and hides the light and blots the epistle. The world can see but little of the traits of Christ's character in those mho call themselves by His name; yea, in many instances, they exhibit an humbling contrast, rather than a resemblance. May we study Christ more prayerfully, that so we may copy Him more faithfully.

The stars are distant lights. They shine in other spheres, and have little connection with this system, save that their twinkling can be seen. "One star differs from another star in glory." Thus will it be in the coming kingdom of the Son. He will shine forth in living and everlasting lustre. His body, the Church, will faithfully reflect His beams on all around; while saints individually shall shine in those spheres which a righteous Judge shall allot to them, as a reward of service during the dark night of His absence. This thought should animate us to a more ardent and vigorous pursuit after conformity to our absent Lord. (see Luke 19:12-19.)

The lower orders of creation are next introduced. The sea and the earth are made to team with life. Some May feel warranted in regarding the operations of each successive day, as foreshadowing the various dispensations, and their great characteristic principles of action. I would only remark, as to this, that there is great need, when handling the word in this way, to watch, with holy jealousy, the working of imagination; and also to pay strict attention to the general analogy of scripture, else we may make sad mistakes. I do not feel at liberty to enter upon such a line of interpretation; I shall therefore confine myself to what I believe to be the plain sense of the sacred text.

We shall now consider man's place, as set over the works of God's hands. All having been set in order, one was needed to take the headship.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upon the earth.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upon the earth." My reader will observe the change from "him" to "them." We are not presented with the actual fact of the formation of the woman, until the next chapter; though here we find God blessing "them" and giving "them" jointly the place of universal government. All the inferior orders of creation were set under their joint dominion. Eve received all her blessings in Adam. In him, too, she got her dignity. Though not yet called into actual existence, she was, in the purpose of God, looked at as part of the man. "In thy book were all my members written, which, in continuance were fashioned, when as yet there was none of them."

Thus it is with the Church — the bride of the Second Man. She was viewed from all eternity in Christ, her Head and Lord; as we read in the first chapter of Ephesians, "According as He has chosen us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at we should be holy and without blame before him in love." Before a single member of the Church had yet breathed the breath of life, all were, in God's eternal mind, predestinat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e counsels of God render the Church necessary to complete the mystic man. Hence the Church is called "the fullness [pleroma] of Him that fills all in all." This is an amazing title, and it develops much of the dignity, importance, and glory of the Church.]

It is too common to view redemption as bearing merely upon the blessedness and security of individual souls. This is entirely too low a view to take of the matter. That all which pertains, in any way, to the individual is, in the fullest manner, secured, is, blessed be God, most true. This is the least part of redemption. But that Christ's glory is involved in, and connected with, the Church's existence, is a truth of far more dignity, depth, and power. If I am entitled, on the authority of Holy Scripture, to regard myself as a constituent part of that which is actually needful to Christ, I can no longer entertain a doubt as to whether there is the fullest provision for all my personal necessities. And is not the Church thus needful to Christ? Yes, truly.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n help meet for him." And, again, "For the man is not of the woman; but the woman of the man; neither was the man created for the woman; but the woman for the man … Nevertheless, neither is the man without the woman. neither the woman without the man in the Lord. For as the woman is of the man, even so is the man also by the woman; but all things of God." (1 Cor. 11:8-12) Hence, it is no longer the mere question whether God can save a poor, helpless sinner — whether He can blot out his sins, and receive him in the power of divine righteousness. God ha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He left not "the first man" without "an help meet;" neither would He leave the "Second." As, in the case of the former, there would have been a blank in the creation without Eve, so stupendous thought! — in the case of the latter, there would be a blank in the new creation without the Bride, the Church.

Let us, now, look at the manner in which Eve was brought into being, though, in so doing, we shall have to anticipate part of the contents of the next chapter. Throughout all the orders of creation there was not found an help meet for Adam. "A deep sleep" must fall on him, and a partner be formed, out of himself, to share his dominion and his blessedness. "And the Lord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Adam,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stead thereof. And the rib, which the Lord God had taken from man, builded* he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And Adam said, This is now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she shall be called Woman,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Gen. 2:21-23.)

{*The Hebrew word which is rendered "builded" in the margin the LXX. render by okodomesen. A reference to the original of Eph. 2:20, 22 will show the reader that the words rendered "built" and "builded together" are inflexions of the same verb.}

Looking at Adam and Eve as a type of Christ and the Church, as scripture fully warrants us to do, we see how that the death of Christ needed to be an accomplished fact, ere the Church could be set up; though, in the purpose of God, she was looked at, and chosen in Christ,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ere is, however, a vast difference between the secret purpose of God and the revelation and accomplishment thereof. Before the divine purpose could be actualised in reference to the constituent parts of the Church, it was necessary that the Son should be rejected and crucified — that He should take His seat on high — that He should send down the Holy Ghost to baptise believers into one body. It is not that souls were not quickened and saved, previous to the death of Christ. They assuredly were. Adam was saved, and thousands of others, from age to age, in virtue of the sacrifice of Christ, though that sacrifice was not yet accomplished. But the salvation of individual souls is one thing; and the formation of the Church, as a distinctive thing, by the Holy Ghost, is quite another.

This distinction is not sufficiently attended to; and even where it is in theory maintained, it is accompanied with but little of those practical results which might naturally be expected to flow from a truth so stupendous. The Church's unique place her special relationship to "the Second Man, the Lord from heaven" her distinctive privileges and dignities — all these things would, if entered into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produce the richest, the rarest, and the most fragrant fruits. (See Eph. 5:23-32.)

When we look at the type before us, we may form some idea of the results which ought to follow from the understanding of the Church's position and relationship. What affection did not Eve owe to Adam? What nearness she enjoyed! What intimacy of communion! What full participation in all his thoughts! In all his dignity, and in all his glory, she was entirely one. He did not rule over, but with her. He was Lord of the whole creation, and she was one with him. Yea, as has already been remarked, she was looked at, and blessed in him. "The man" was the object; and as to "the woman," she was needful to him, and therefore she was brought into being. Nothing can be more profoundly interesting as a type. Man first set up, and the woman viewed in, and then formed out of him-all this forms a type of the most striking and instructive character. Not that a doctrine can ever be founded upon a type, but when we find the doctrine fully and clearly laid down in other parts of the Word, we are then prepared to understand, appreciate, and admire the type.

Psalm 8 furnishes a fine view of man set over the work of God's hands: "when I consider thy heavens, the work of thy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thou hast ordained: what is man that thou art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thou visitest him? For thou hast made him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and hast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ur.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all sheep and oxen, yea, and the beasts of the field; the fowl of the air,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s through the paths of the sea." Here man is looked at, without any distinctive mention of the woman; and this is quite in character, for the woman is looked at in the man.

There is no direct revelation of the mystery of the Church, in any part of the Old Testament. The apostle expressly says, "in other ages it was not made known to the sons of men us it is now revealed to his holy apostles and prophets (of the New Testament) by the Spirit." (Eph. 3:1-11) Hence, in the Psalm just quoted, we have only "the man" presented to us; but we know that the man and the woman are looked at under one head. All this will find its full anti type in the ages to come. Then shall the True Man, the Lord from heaven, take His seat on the throne, and, in companionship with His bride, the Church, rule over a restored creation. His Church is quickened out of the grave of Christ, is Part "of his body, of his flesh, and of his bones." He the Head and she the body, making one Man, as we read in the fourth chapter of Ephesians.

"Till we all come, in the unity of the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to a perfect man, 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The Church, being thus part of Christ, will occupy a place, in the glory, quite unique. There was no other creature so near to Adam as Eve, because no other creature was part of himself. So, in reference to the Church, she will hold the very nearest place to Christ, in His coming glory.

Nor is it merely what the Church will be that commands our admiration; but what the Church is. She is now the body of which Christ is the Head; she is now the temple of which God is the Inhabitant. Oh what manner of people ought we to be? If such is the present, such the future dignity of that of which we, through God's grace, form a part, surely a holy, a devoted, a separated, an elevated walk is what becomes us.

May the Holy Ghost unfold these things, more fully and powerfully, to our hearts, that so we may have a deeper sense of the conduct and character which are worthy of the high vocation wherewith we are called. "The eyes of your understanding being enlightened; that ye may know what is the hope, of his calling, and what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s inheritance in the saints, and what is the exceeding greatness of his power to usward who believe, according to the working of his mighty power, which he wrought in Christ when he raised him from the dead, and set him at his own right hand in the heavenly places, far above all principality, and power, and might, and dominion, and every name that is named, not only in this world, but also in that which is to come; and has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and gave him to be the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him that fills all in all." (Eph. 1:18-23.)

Genesis 2

The chapter introduces to our notice two prominent subjects, namely, "the seventh day" and "the river." The first of these demands special attention.

There are few subjects on which so much misunderstanding and contradiction prevails as the doctrine of "the Sabbath." Not that there is the slightest foundation for either the one or the other; for the whole subject Is laid down in the word, in the simplest possible manner. The distinct commandment, to "keep holy the Sabbath day" will come before us, the Lord permitting, in our meditations on the book of Exodus. In the chapter now before us, there is no command given to man, whatever; but simply the record that, "God rested on the seventh dray." "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And on the seventh day God end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sanctified it; because that in it he ha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and made." There is no commandment given to man, here. We are simply told that God enjoyed His rest, because all was done, so far as the mere creation was concerned. There was nothing more to be done, and, therefore, the One who had, during six days, been working, ceased to work, and enjoyed His rest. All was complete; all was very good; all was just as He Himself had made it; and He rested in it. "The morning stars sang together; and all the sons of God shouted for joy." The work of creation was ended, and God was celebrating a Sabbath.

And, be it observed, that this is the true character of a Sabbath. This is the only Sabbath which God ever celebrated, so far as the inspired record instructs us. After this, we read of God's commanding man to keep the Sabbath, and man utterly failing so to do; but we never read again the words, "God rested;" on the contrary, the word is, "My Father works hitherto, and I work." (John 5:17) The Sabbath, in the strict and proper sense of the term, could only be celebrated when there really was nothing to be done. It could only be celebrated amid an undefiled creation — a creation on which no spot of sin could be discerned. God can have no rest where there is sin; and one has only to look around him in order to learn the total impossibility of God's enjoying a rest in creation now. The thorn and the thistle, together with the ten thousand other melancholy and humiliating fruits of a groaning creation, rise before us, and declare that God must be at work and not at rest. Could God rest in the midst of thorns and briers? Could He rest amid the sighs and tears, the groans and sorrows, the sickness and death, the degradation and guilt of a ruined world? Could God sit down, as it were, and celebrate a Sabbath in the midst of such circumstances?

Whatever answer may be given to these questions, the word of God teaches us that God has had no Sabbath, as yet, save the one which the 2nd of Genesis records. "The seventh day," and none other, was the Sabbath. It showed forth the completeness of creation work; but creation work is marred, and the seventh day rest interrupted; and thus, from the fall to the incarnation, God was working; from the incarnation to the cross, God the Son was working; and from Pentecost until now, God the Holy Ghost has been working.

Assuredly, Christ had no Sabbath when He was upon this earth. True, He finished His work — blessedly, gloriously finished it but where did He spend the Sabbath day? In the tomb! Yes, my reader, the Lord Christ. God manifest in the flesh, the Lord of the Sabbath, the Maker and Sustainer of heaven and earth, spent the seventh day in the dark and silent tomb. Has this no voice for us? Does it convey no teaching? Could the Son of God lie in the grave on the seventh day, if that day were to be spent in rest and peace; and in the full sense that nothing remained to be done? impossible! We want no farther proof of the impossibility of celebrating a Sabbath than that which is afforded at the grave of Jesus. We may stand beside that grave amazed to find it occupied by such an one on the seventh day; but, oh! the reason is obvious. Man is a fallen, ruined, guilty creature. His long career of guilt has ended in crucifying the Lord of glory; and not only crucifying Him, but placing a great stone at the mouth of the tomb, to prevent, if possible, His leaving it.

And what was man doing while the Son of God was in the grave? He was observing the Sabbath day! What a thought! Christ in His grave to repair a broken Sabbath, and yet man attempting to keep, the Sabbath as though it were not broken at all! It was man's Sabbath, and not God's. It was a Sabbath without Christ — an empty, powerless, worthless, because Christless and Godless, form.

But some will say, "the day has been changed, while all the principles belonging to it remain the same." I do not believe that scripture furnishes any foundation for such an idea. Where is the divine warrant for such a statement? Surely if there is scripture authority, nothing can be easier than to produce it. But the fact is, there is none; on the contrary, the distinction is most fully maintained in the New Testament. Take one remarkable passage, in proof:" In the end of the Sabbath, as it began to dawn towards the first day of the week." (Matt. 28:1) There is, evidently, no mention here of the seventh day being changed to the first day; nor yet of any transfer of the Sabbath from the one to the other. The first day of the week is not the Sabbath changed, but altogether a new day. It is the first day of a new period, and not the last day of an old. The seventh day stands connected with earth and earthly rest; the first day of the week, on the contrary, introduces us to heaven and heavenly rest.

This makes a vast difference in the principle; and when we look at the matter in a practical point of view, the difference is most material. If I celebrate the seventh day, it marks me as an earthly man, inasmuch as that day is, clearly, the rest of earth — creation rest; but if I am taught by the Word and Spirit of God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first day of the week, I shall at once apprehend its immediate connection with that new and heavenly order of things, of whic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form the everlasting foundation. The seventh day appertained to Israel and to earth. The first day of the week appertains to the Church and to heaven. Further, Israel was commanded to observe the Sabbath day; the Church is privileged to enjoy the first day of the week. The former was the test of Israel's moral condition; the latter is the significant proof of the Church's eternal acceptance. That made manifest what Israel could do for God; this perfectly declares what God has done for us.

It is quite impossible to over-estimate the value and importance of the Lord's day, (e kuriake emera,) as the first day of the week is termed, in the first chapter of the Apocalypse. Being the day on which Christ rose from the dead, it sets forth, not the completion of creation, but the full and glorious triumph of redemption. Nor should we regard the celebration of the first day of the week as a matter of bondage, or as a yoke put on the neck of a Christian. It is his delight to celebrate that happy day. Hence we find that the first day of the week was pre-eminently the day on which the early Christians came together to break bread; and at that period of the Church's history, the distinction between the Sabbath and the first day of the week was fully maintained. The Jews celebrated the former, by assembling in their synagogues, to read "the law and the prophets;" the Christians celebrated the latter, by assembling to break bread. There is not so much as a single passage of scripture in which the first day of the week is called the Sabbath day; whereas there is the most abundant proof of their entire distinctness.

Why, therefore, contend for that which has no foundation in the Word? Love, honour, and celebrate the Lord's day as much as possible; seek, like the apostle, to be "in the spirit" thereon; let your retirement from secular matters be as profound as ever you can make it; but while you do all this, call it by its proper name; give it its proper place; understand its proper principles; attach to it its proper characteristics; and, above all, do not bind down the Christian, as with an iron rule, to observe the seventh day, when it is his high and holy privilege to observe the first. Do not bring him down from heaven, where he can rest, to a cursed and bloodstained earth, where he cannot. Do not ask him to keep a day which his Master spent in the tomb, instead of that blessed day on which He left it. (see, carefully, Matt. 28:1-6; Mark 16:1-2; Luke 24:1; John 20:1, 19, 26; Acts 20:7; 1 Cor. 16:2; Rev. 1:10; Acts 13:14; Acts 17:2; Col. 2:16.)

But let it not be supposed that we lose sight of the important fact that the Sabbath will again be celebrated, in the land of Israel, and over the whole creation. It assuredly will. "There remains a rest (sabbatismos) for the people of God." (Heb. 4:9) When the Son of Abraham, Son of David, and Son of man, shall assume his position of government over the whole earth, there will be a glorious Sabbath rest which sin shall never interrupt. But now, He is rejected, and all who know and love Him are called to take their place with Him in His rejection; they are called to "go forth to Him without the camp, bearing his reproach." (Heb. 13:13) If earth could keep a Sabbath, there would be no reproach; but the very fact of the professing church's seeking to make the first day of the week the Sabbath, reveals a deep principle. It is but the effort to get back to an earthly standing, and to an earthly code of morals.

Many may not see this. Many true Christians may, most conscientiously, observe the Sabbath day, as such; and we are bound to honour their consciences, though we are perfectly warranted in asking them to furnish a scriptural basis for their conscientious convictions. We would not stumble or wound their conscience, but we would seek to instruct it. However, we are not now occupied with conscience or its convictions, but only with the principle which lies at the root of what may be termed the Sabbath question; and I would only put the question to the Christian reader, which is more consonant with the entire scope and spirit of the New Testa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venth day or Sabbath, or the celebration of the first day of the week or the Lord's day?*

{*This subject will, if the Lord permit, come before us again in Exodus 20; but I would, here, observe, that very much of the offence and misunderstanding connected with the important subject of the Sabbath, may be justly traced to the inconsiderate and injudicious conduct of some who, in their zeal for what they termed Christian liberty, in reference to the Sabbath, rather lose sight of the claims of honest consciences and also of the place which the Lord's day occupies in the New Testament. Some have been known to enter upon their weekly avocations, simply to show their liberty, and thus they caused much needless offence. Such acting could never have been suggested by the Spirit of Christ. If I am ever so clear and free, in my own mind, I should respect the consciences of my brethren: and, moreover, I do not believe that those who so carry themselves, really understand the true and precious privileges connected with the Lord's day. We should only be too thankful to be rid of all secular occupation and distraction, to think of having recourse to them, for the purpose of showing our liberty. The good providence of our God has so arranged for His people throughout the British Empire, that they can, without pecuniary loss, enjoy the rest of the Lord's day, inasmuch as all are obliged to abstain from business. This must be regarded, by every well-regulated mind, as a mercy; for, if it were not thus ordered, we know how man's covetous heart would, if possible, rob the Christian of the sweet privilege of attending the assembly, on the Lord's day. And who can tell what would be the deadening effect of uninterrupted engagement with this worlds traffic? Those Christians who, from Monday morning to Saturday night, breathe the dense atmosphere of the mart, the market, and the manufactory, can form some idea of it.

It cannot be regarded as a good sign to find men introducing measures for the public profanation of the Lord's day. It, assuredly, marks the progress of infidelity and French influence.

But there are some who teach that the expression e kuriake emera, which is rightly enough translated, "the Lord's day," refers to "the day of the Lord" and that the exiled apostle found himself carried forward, as it were, into the Spirit of the day of the Lord. I do not believe the original would bear such an interpretation; and, besides, we have in 1 Thess. 5:2, and 2 Peter 3:10, the exact words, "the day of the Lord," the original of which is quite different from the expression above referred to, being not e kuriake emera, but e emera kurion. This entirely settles the matter, so far as the mere criticism is concerned; and as to interpretation, it is plain that by far the greater portion of the Apocalypse is occupied, not with "the day of the Lord" but with events prior thereto.}

We shall now consider the connection between the Sabbath, and the river flowing out of Eden. There is much interest in this. It is the first notice we get of "the river of God" which is, here, introduced in connection with God's rest. When God was resting in His works, the whole world felt the blessing and refreshment thereof. It was impossible for God to keep a Sabbath, and earth not to feel its sacred influence. But alas, the streams which flowed forth from Eden-the scene of earthly rest — were speedily interrupted, because the rest of creation was marred by sin.

Yet, blessed be God, sin did not put a stop to His activities but only gave them a new sphere; and wherever He is seen acting, the river is seen flowing. Thus when we find Him, with a strong hand, and an outstretched arm, conducting His ransomed hosts across sterile sand of the desert, there we see the stream flowing forth, not from Eden, but from the smitten Rock — apt and beautiful expression of the ground on which sovereign grace ministers to the need of sinners! This was redemption and not merely creation. "That rock was Christ," Christ smitten to meet His people's need. The smitten rock was connected with Jehovah's place in the Tabernacle; and truly there was moral beauty in the connection. God dwelling in curtains, and Israel drinking from a smitten rock, had a voice for every opened ear, and a deep lesson for every circumcised heart. (Ex. 17:6)

Passing onward, in the history of God's ways, we find the river flowing in another channel. "In the last day, that great day of the feast, Jesus stood, and saying, If any man thirst, let him come to me, and drink. He that believes on me, as the Scripture said, out of his belly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John 7:37-38.) Here, then, we find the river emanating from another source, and flowing through another channel; though, in one sense, the source of the river was ever the same, being God Himself; but, then, it was God, known in a new relationship and upon a new principle. Thus in the passage just quoted, the Lord Jesus was taking His place, in spirit, outside of the whole existing order of things, and presenting Himself as the source of the river of living water, of which river the person of the believer was to be the channel. Eden, of old, was constituted a debtor to the whole earth, to send forth the fertilising streams. And in the desert, the rock, when smitten, became a debtor to Israel's thirsty hosts. Just so, now, every one who believes in Jesus, is a debtor to the scene around him, to allow the streams of refreshment to flow forth from him.

The Christian should regard himself as the channel, through which the manifold grace of Christ may flow out to a needy world; and the more freely he communicates, the more freely will he receive, "for there is that scatters, and yet increases; and there is that withholds more than is meet, and it tends to poverty." This places the believer in a place of sweetest privilege, and, at the same time, of the most solemn responsibility. He is called to be the constant witness and exhibitor of the grace of Him on whom He believes.

Now, the more he enters into the privilege, the more will he answer the responsibility. If he is habitually feeding upon Christ, he cannot avoid exhibiting Him. The more the Holy Spirit keeps the Christian's eyes fixed on Jesus, the more will his heart be occupied with His adorable Person, and his life and character bear unequivocal testimony to His grace. Faith is, at once, the power of ministry, the power of testimony, and the power of worship. If we are not living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us, and gave himself for us" we shall neither be effectual servants, faithful witnesses, nor true worshippers. We may be doing a great deal, but it will not be service to Christ. We may be saying a great deal, but it will not be testimony for Christ. We may exhibit a great deal of piety and devotion, but it will not be spiritual and true worship.

Finally, we have the river of God, presented to us in the last chapter of the Apocalypse.* "And he showed me a river of water of life, clear as crystal, out of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There is a river, the streams whereof shall make glad 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 This is the last place in which we find river. Its source can never again be touched — its channel never again interrupted. "The throne of God" is expressive of eternal stability; and the presence of the Lamb marks it as based upon the immediate ground of accomplished redemption. It is not God's throne in creation, nor in providence; but in redemption. When I see the Lamb, I know its connection with me as a sinner. "The throne of God," as such, would but deter me; but when God reveals Himself in the Person of the Lamb, the heart is attracted, and the conscience tranquillised.

{*Compare also Ezek. 47:1-12; Zech 14:8.}

The blood of the Lamb cleanses the conscience from every speck and stain of sin, and sets it, in perfect freedom in the presence of a holiness which cannot tolerate sin. In the cross, all the claims of divine holiness were perfectly answered; so that the more I understand the latter, the more I appreciate the former. The higher our estimate of holiness, the higher will be our estimate of the work of the cross. "Grace reigns, through righteousness, to eternal life, by Jesus Christ our Lord." Hence the Psalmist calls on the saints to give thanks at the remembrance of God's holiness. This is a precious fruit of a perfect redemption. Before ever a sinner can give thanks at the remembrance of God's holiness, he must look at it by faith, from the resurrection side of the cross.

Having thus traced the river, from Genesis to Revelation, we shall briefly look at Adam's position in Eden. We have seen him as a type of Christ; but he is not merely to be viewed typically, but personally; not merely as absolutely shadowing forth "the second man, the Lord from heaven," but also as standing in the place of personal responsibility. In the midst of the fair scene of creation, the Lord God set up a testimony, and this testimony was also a test for the creature. It spoke of death in the midst of life.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thou shalt surely die." Strange, solemn sound. Yet, it was a needed sound. Adam's life was suspended upon his strict obedience. The link which connected him with the Lord God*  was obedience, based on implicit confidence in the One, who had set him in his position of dignity — confidence in His truth — confidence in His love. He could obey only while he confided. We shall see the truth and force of this, more fully, when we come to examine the next chapter.

{*My reader will observe the change in the second chapter from the expression "God" to Lord God." There is much importance in the distinction. When God is seen acting in relation with man, He takes the title Lord God," — (Jehovah Elohim;) but until man appears on the scene, the word "Lord': is not used. I shall just point out three out of many passages in which the distinction is very strikingly presented. "And they that went in, went in male and female of all flesh, as God (Elohim) had commanded him; and the Lord (Jehovah) shut him in (Gen. 7:16) Elohim was going to destroy the world which He had made; but Jehovah took care of the man with whom He stood in relation. Again, "that all the earth may know that there is a God (Elohim) in Israel. And all this assembly shall know that the Lord (Jehovah) saves," &c. (1 Sam. 17:46-47) All the earth was to recognise the presence of Elohim; but Israel was called to recognise the actings of Jehovah, with whom they stood in relation. Lastly, "Jehoshaphat cried out, and the Lord (Jehovah) helped him; and God (Elohim) moved them to depart from him." (2 Chr. 18:31) Jehovah took care of His poor erring servant; but Elohim, though unknown, acted upon the hearts of the uncircumcised Syrians.}

I would here suggest to my reader the remarkable contrast between the testimony set up in Eden, and which is set up now. Then, when all around was life, God spoke of death; now, on the contrary, when all around is death, God speaks of life: then the word "in the day thou eatest thou shalt die;" now the word is, "believe and live." And, as in Eden, the enemy sought to make void God's testimony, as to the result of eating the fruit, so now, he seeks to make God's testimony as to the result of believing the gospel. God had said,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thou shalt surely die. But the serpent said, Ye shall not surely die." And now, when God's word plainly declares that "he that believes on the has everlasting life," (John 3:16) the same serpent seeks to persuade people that they have not everlasting life, nor should they presume to think of such a thing, until they have, first, done, felt, and experienced all manner of things.

My beloved reader, if you have not yet heartily believed the divine record, let me beseech you to allow "the voice of the Lord" to prevail above the hiss of the serpent. "He that hears my word, and believes on him that sent me, has everlasting life, and shall not come into condemnation; but is passed from death to life." (John 5:24)

Genesis 3

This section of our book sets before us the breaking up of the whole scene on which we have been dwelling. It abounds in very weighty principles; and has, very justly, been, in all ages, resorted to as a most fruitful theme for those who desired to set forth the truth as to man's ruin and God's remedy. The serpent enters, with a bold question as to divine revelation — terrible model and forerunner of all infidel questions since raised by those who have, alas! too faithfully served the serpent's cause in the world questions which are only to be met by the supreme authority and. divine majesty of Holy Scripture.

"Yea, has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This was Satan's crafty enquiry; and had the word of God been dwelling richly in Eve's heart, her answer might have been direct, simple, and conclusive. The true way in which to meet Satan's questions and suggestions, is to treat them as his, and repel them by the word. To let them near the heart, for a moment, is to lose the only power by which to answer them. The devil did not openly present himself and say, "I am the devil, the enemy of God, and I am come to traduce Him, and ruin you." This would not be serpent-like; and, yet, he really did all this, by raising questions in the mind of the creature. To admit the question, "has God said?" when I know that God has spoken, is positive infidelity; and the very fact of my admitting It, proves my total incapacity to meet it. Hence, in Eve's case, the form of her reply evidenced the fact that she bad admitted to her heart serpent's crafty enquiry. Instead of adhering strictly to the exact words of God, she, in her reply, actually adds thereto.

Now, either to add to, or take from, God's word, proves very clearly, that His word is not dwelling in my heart, or governing my conscience. If a man is finding his enjoyment in obedience, if it is his meat and his drink, if he is living by every word that proceeds out of the mouth of Jehovah, he will, assuredly, be acquainted with, and fully alive to, His word. He could not be indifferent to it. The Lord Jesus, in His conflict with Satan, accurately applied the word, because He lived upon it, and esteemed it more than His necessary food. He could not misquote or misapply the word, neither could He be indifferent about it. Not so Eve. She added to what God had said. His command was simple enough, "Thou shalt not eat of it." To this Eve adds her own words, "neither shall ye touch it." These were Eve's words, and not God's. He had said nothing about touching; so that whether her misquotation proceeded from ignorance, or indifference, or a desire to represent God in an arbitrary light, or from all three together, it is plain that she was entirely off the true ground of simple confidence in, and subjection to, God's holy word. "By the words of thy mouth, I have kept me from the paths of the destroyer."

Nothing can possess more commanding interest than the way in which the word is everywhere put forward throughout the sacred canon, together with the immense importance of strict obedience thereto. Obedience is due from us to God's word, simply because it is His word. To raise a question, when He has spoken, is blasphemy. We are in the place of the creature. He is the Creator; He may, therefore, justly claim obedience from us. The infidel may call this "blind obedience;" but the Christian calls it intelligent obedience, inasmuch as it is based upon the knowledge that it is God's word to which he is obedient. If a man had not God's word, he might well be said to be in blindness and darkness, for there is not so much as a single ray of divine light, within or around us, but what emanates from God's pure and eternal word. ALL that we want to know is that God has spoken, and then obedience becomes the very highest order of intelligent acting. When the soul gets up to God, it has reached the very highest source of authority. No man, nor body of men, can claim obedience to their word, because it is theirs ; and hence the claims of the Church of Rome are arrogant and impious. In her claiming obedience, she usurps the prerogative of God; and all who yield it, rob God of His right. She presumes to place herself between God and the conscience; and who can do this with impunity? When God speaks, man is bound to obey. Happy is he if he does so. Woe be to him if he does not. Infidelity may question if God has spoken; superstition may place human authority between my conscience and what God has spoken; by both I like I am effectually robbed of the word, and, as a consequence, of the deep blessedness of obedience.

There is blessing in every act of obedience; but the moment the soul hesitates, the enemy has the advantage; he will, assuredly, use it, to thrust the soul further and further from God. Thus, in the chapter before us, the question, "Has God said?" was followed up, "Ye shall not surely die." That is to say, there was first the question raised, as to whether God had spoken, and then followed the open contradiction of what God had said. This solemn fact is abundantly sufficient to show how dangerous it is to admit near the heart a question as to divine revelation, in its fullness and integrity. A refined rationalism is very near akin to bold infidelity; and the infidelity that dares to judge God's Word is not far from the atheism that denies His existence. Eve would never have stood by to hear God contradicted, if she had not previously fallen into looseness and indifference as to His word. She, too, had her "phases of Faith," or, to speak more correctly, her phases of Infidelity: she suffered God to be contradicted by a creature, simply because? His word had lost its proper authority over her heart, her conscience, and her understanding.

This furnishes a most solemn warning to all who are in danger of being ensnared by an unhallowed rationalism. There is no true security, save in a profound faith in the plenary inspiration and supreme authority of "ALL SCRIPTURE." The soul that is endowed with this has a triumphant answer to every objector, whether he issue from Rome or Germany.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The self-same evil which is now corrupting the very springs of religious thought and feeling, throughout the fairest portion of the continent of Europe, was that which laid Eve's heart in ruins, in the garden of Eden. The first step in her downward course was her hearkening to the question, "Has God said." And then, onward she went, from stage to stage, until, at length, she bowed before the serpent, and owned him as her god, and the fountain of truth. Yes, my reader, the serpent displaced God, and the serpent's lie God's truth. Thus it was with fallen man; and thus it is with fallen man's posterity. God's word has no place in the heart of the unregenerated man; but the lie of the serpent has. Let the formation of man's heart be examined, and it will be found that there is a place therein for Satan's lie, but none whatever for the truth of God. Hence the force of the word to Nicodemus, "Ye must be born again."

But, it is important to observe the mode in which the serpent sought to shake Eve's confidence in God's troth, and thus bring her under the power of infidel "reason." It was by shaking her confidence in God's love. He sought to shake her confidence in what God had said by showing that the testimony was not founded in love. "For," said he,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Ver. 6.) In other words, "There is positive advantage connected with the eating of that fruit of which God is seeking to deprive you; why, therefore, should you believe God's testimony? you cannot place confidence in one who, manifestly, does not love you, for, if He loved you, why should He prohibit your enjoying a positive privilege?'

Eve's security against the influence of all this reasoning, would have been simple repose in the infinite goodness of God. She should have said to the serpent, "I have the fullest confidence in God's goodness, therefore, I deem it impossible that He could withhold any real good from me. If that fruit were good for me, I should surely have it; but the fact of being forbidden by God proves that I would be no better, but much worse off by the eating of it. I am convinced of God's love and I am convinced of God's truth, and I believe, too, that you are an evil one come to draw my heart away from the fountain of goodness and truth. Get thee behind me, Satan." This would have been a noble reply. But it was not given. Her confidence in truth and love gave way, and all was lost; and so we find that there is just as little place in the heart of fallen for God's love, as there is for God's truth. The heart of man is a stranger to both the one and the other, until renew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Now, it is deeply interesting to turn from Satan's lie in reference to the truth and love of God, to the mission of the Lord Jesus Christ, who came from the bosom of the Father in order to reveal what He really is. "Grace and truth" — the very things which man lost, in his fall — "came by Jesus Christ." (John 1:17) He was "the faithful witness" of what God was. (Rev. 1:5) Truth reveals God as He is; but this truth is connected with the revelation of perfect grace; and thus the sinner finds, to his, unspeakable joy, that the revelation of what God is, instead of being his destruction, becomes the basis of his eternal salvation. "This is life eternal,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John 17:3.) I cannot know God and not have life. The loss of the knowledge of God was death; but the knowledge of God is life. This, necessarily, makes life a thing entirely outside of ourselves, and dependent upon what God is. Let me arrive at what amount of self-knowledge I may, it is not said that "this is life eternal, to know themselves;" though, no doubt,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knowledge of self-will go very much together; still, "eternal life" is connected with the former, and not with the latter. To know God as He is, is life; and "all who know not God" shall be "punished with everlasting destruction from His presence."

It is of the utmost importance to see that what really stamps man's character and condition is his ignorance or knowledge of God. This it is that marks his character here, and fixes his destiny hereafter. Is he evil in his thoughts, evil in his words, evil in his actions? It is all the result of his being ignorant of God. On the other hand, is he pure in thought, holy in conversation, gracious in action? It is but the practical result of his knowledge of God. So also as to the future. To know God is the solid ground of endless bliss — everlasting glory. To know Him not is "everlasting destruction." Thus the knowledge of God is everything. It quickens the soul, purifies the heart, tranquillises the conscience, elevates the affections, sanctifies the entire character and conduct.

Need we wonder, therefore, that Satan's grand design was to rob the creature of the true knowledge of the only true God? He misrepresented the blessed God: he said He was not kind. This was the secret spring of all the mischief. It matters not what shape sin has since taken it matters not through what channel it has flowed, under what head it has ranged itself, or in what garb it has clothed itself; it is all to be traced to this one thing, namely, ignorance of God. The most refined cultivated moralist, the most devout religionist, the benevolent philanthropist, if ignorant of God, is as far from life and true holiness, as the publican and harlot. The prodigal was just as much a sinner, as positively awry from the Father, when he had crossed the threshold, as when he was feeding swine in the far country. (Luke 15:13-15.) So, in Eve's case. The moment she took herself out of the hands of God, out of the position of absolute dependence upon, and subjection to, His word, she abandoned herself to the government of sense, as used of Satan for her entire overthrow.

The sixth verse presents three things; namely, "the lust of the flesh, the lust of the eye, and the pride of life:" which three, as the apostle states, comprehend "all that is in the world." These things necessarily took the lead, when God was shut out. If I do not abide in the happy assurance of God's love and truth, His grace and faithfulness, I shall surrender myself to the government of some one, or it may be all, of the above principles; and this is only another name for the government of Satan. There is, strictly speaking, no such thing as man's free-will. If man be self-governed, he is really governed by Satan; and if not, he is governed by God.

Now, the three great agencies by which Satan works are "the lust of the flesh, the lust of the eye, and the pride of life." These are the things presented by Satan to the Lord Jesus, in the temptation. He began by tempting the Second Man to take Himself out of the position of absolute dependence upon God. "Command these stones that they be made bread" He asked Him to do this, not, as in the case of the first man, to make Himself what He was not, but to prove what He was. Then followed the offer of the kingdoms of the world, with all their Glory. And, finally, conducting Him to a pinnacle of the temple, he tempted Him to give Himself, suddenly and miraculously, to the Admiration of the assembled people below. (Comp. Matt. 4:1-11 with Luke 4:1-13.) The plain design of each temptation was to induce the Blessed One to step from the position of entire dependence upon God, and perfect subjection to His will. But all in vain. "it is written," was the unvarying reply of the only dependent, self-emptied, perfect man. Others might undertake to manage for themselves; none but God should manage for Him.

What an example for the faithful, under all their circumstances! Jesus kept close to scripture, and thus conquered; without any other weapon, save the sword of the Spirit, He stood in the conflict, and gained a glorious triumph. What a contrast with the first Adam! The one had everything to plead for God; the other had everything to plead against Him. The garden, with all its delights, in the one case; the wilderness, with all its privations, in the other: confidence in Satan, in the one case; confidence in God in the other: complete defeat in the one case; complete victory in the other. Blessed for ever be the God of all grace, who has laid our help on One so mighty to conquer — mighty to save!

Let us now inquire how far Adam and Eve realised the serpent's promised advantage. This inquiry will lead us to a deeply important point in connection with the fall of man. The Lord God had so ordered it, that in and by the fall, man should get, what previously, he had not, and that was, a conscience, a knowledge of both good and evil. This, man, evidently, could not have had before. He could not have known ought about evil, inasmuch as evil was not there to be known. He was in a state of innocence, which is a state of ignorance of evil. Man got a conscience in, and by, fall; and we find that the very first effect of conscience was to make him a coward. Satan had utterly deceived the woman. He had said,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But he had left out a material part of the truth, that they should know good, without the power to do it; and that they should know evil, without the power to avoid it. Their very attempt to elevate themselves in the scale of moral existence, involved the lose of true elevation. They became degraded, powerless, Satan-enslaved, conscience-smitten, terrified, creatures.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no doubt; but alas! to what a sight! It was only to discover their own nakedness. They opened their eyes upon their own condition, which was "wretched, and miserable, and poor, and blind, and nake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 sad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It was not any fresh knowledge of divine excellence they had attained, no fresh beam of divine light from the pure and eternal fountain thereof — alas! no; the very earliest result of their disobedient effort after knowledge, was the discovery, that they were naked.

Now, it is well to understand this; well, too, to know how conscience works, — to see that it can only make cowards of us, as being the consciousness of what we are. Many are astray as to this; they think that conscience will bring us to God. Did it operate thus, in the case of Adam and Eve? Assuredly not, nor will it, in the case of any sinner. How could it? How could the sense of what I am ever bring me to God, if not accompanied by the faith of what God is? Impossible; it will produce shame, self-reproach, remorse, anguish. It may, also, give birth to certain efforts, on my part, to remedy the condition which it discloses; but these very efforts, so far from drawing us to God, rather act as a blind to hide Him from our view. Thus, in the case of Adam and Eve, the discovery of their nakedness was followed by an effort of their own to cover it. "They sewed fig-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aprons." This is the first record we have of man's attempt to remedy, by his own device, his condition; and the attentive consideration thereof will afford us not a little instruction as to the real character of human religiousness in all ages. In the first place we see, not only in Adam's case, but in every case, that man's effort to remedy his condition is based upon the sense of his nakedness. He is, confessedly, naked, and all his works are the result of his being so. This can never avail. I must know that I am clothed, before I can do anything acceptable in the sight of God.

And this, be it observed, is the difference between true Christianity and human religiousness. The former is founded upon the fact of a man's being clothed; the latter, upon the fact of his being naked. The former for its starting post what the latter has for its goal. that a true Christian does, is because he is clothed — perfectly clothed; all that a mere religionist does, in order that he may be clothed. This makes a vast difference. The more we examine the genius of man's religion, in all its phases, the more we shall see its insufficiency to remedy his state, or even to meet his own sense thereof. It may do very well for a time. It may avail so long as death, judgement, and wrath of God are looked at from a distance, if at all; but, when a man comes to look these realities straight in the face, he will find, in truth, that his religion is a bed too short for him to stretch himself upon, and a covering too narrow for him wrap himself in.

The moment Adam heard the voice of the Lord in Eden, "he was afraid," because, as he himself confessed, "I was naked." Yes, naked, although he had his apron on him. But it is plain that that covering did not even satisfy His own conscience. Had his conscience been divinely satisfied, he would not have been afraid. "If our heart condemn us not, then have we confidence toward God." (1 John 3:20-21.) But if even the human conscience cannot find repose in man's religious efforts, how much less can the holiness of God. Adam's apron could not screen him from the eye of God; and he could not stand in His presence naked; therefore he fled to hide himself. This is what conscience will do at all times. It will cause man to hide himself from God; and, moreover, all that his own religiousness offers him is a hiding-place from God. This is a miserable provision, inasmuch as he must meet God, some time or other; and if he has nought save the bad Conscience of what he is, he must be afraid — yea, he must be wretched. Indeed, nothing is needed, save hell itself, to complete the misery of one who feels he has to meet God, and knows only his own unfitness to meet Him.

Had Adam known God's perfect love, he would not have been afraid. "There is no tear in love; but perfect love cast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rment. He that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1 John 4:17-18.) But Adam knew not this, because he had believed the serpent's lie. He thought that God was anything but love; and, therefore, the very last thought of his heart would have been to venture into His presence. He could not do it. Sin was there, and God and sin can never meet; so long as there is sin on the conscience, there must be the sense of distance from God. "He is of purer eyes than to behold evil, and cannot look upon iniquity." (Hab. 1:13) Holiness and sin cannot dwell together. Sin, wherever it is found, can only be met by the wrath of God.

But, blessed be God, there is something beside the conscience of what I am. There is the revelation of what He is; and this latter the fall of man really brought out. God had not revealed Himself, fully, in creation: He had show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Theiotes but He had not told out all the deep secrets of His nature and character. Wherefore Satan made a grand mistake in coming to meddle with God's creation. He only proved to be the instrument of his own eternal defeat, and confusion, and "his violent dealing" shall for ever "come down upon his own pate." His lie Only gave occasion for the displays of the full 'truth in reference to God. Creation never could have brought out what God was. There was infinitely more in Him than power and wisdom. There was love, mercy, holiness, righteousness, goodness, tenderness, long-suffering. Where could all these be displayed, in a world of sinners? God, at the first, came to create; and, then, when the serpent presumed to meddle with creation, God came down to save. This brought out in the first words uttered by the Lord God, after man's fall. "And the Lord God called to Adam, and said to him, Where art thou?" This question proved two things. It proved that man was lost, and that God had come to seek. It proved man's sin, and God's grace. "Where art thou?" Amazing faithfulness? Amazing grace Faithfulness, to disclose, in the very question itself, the truth as to man's condition: grace, to bring out, in the very fact of God's asking such a question, the truth as to His character and attitude, in reference to fallen man. Man was lost; but God had come down to look for him — to bring him out of his hiding place, behind the trees of the garden, in order that, in the happy confidence of faith, he might find a hiding place in Himself. This was grace. To create man out of the dust of the ground was power; but to seek man in his lost estate was grace. But who can utter all that is wrapped up in the idea of God's being a seeker? God seeking a sinner? What could the Blessed One have seen in man, to lead Him to seek for him? Just what the shepherd saw in the lost sheep; or what the woman saw in the lost piece of silver; or what the father saw in the lost son. The sinner is valuable to God; but why he should be so eternity alone will unfold.

{*There is a profoundly interesting thought suggested by comparing the word Theiotes (Rom. 1:20) with the word Theotes (Col. 2:9 They are both rendered "Godhead;" but they present a very different thought. The heathen might have seen that there was something superhuman, something divine, in creation; but pure, essential, incomprehensible Deity dwelt in the Adorable Person of the Son.}

How, then, did the sinner reply to the faithful and gracious inquiry of the Blessed God? alas! the reply only reveals the awful depth of evil into which he had fallen.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Here, we find him actually laying the blame of his shameful fall on the circumstances in which God had placed him, and thus, indirectly, upon God Himself. This has ever been the way with fallen man. Everyone and everything is blamed but self. In the case of true conviction, the very reverse is exhibited. "Is it not I that have sinned" is the inquiry of a truly humbled soul. Had Adam known himself, how different would have been his style! But he neither knew himself nor God, and, instead of throwing the blame entirely upon himself, he threw it upon God.

Here, then, was man's terrible position. He had lost all. His dominion — his dignity — his happiness — his purity — his peace — all was gone from him; and, what was still worse, he accused God of being the cause of it.* There he stood, a lost, ruined, guilty, and yet, self-vindicating, and, therefore, God-accusing sinner.

{*Man not only accuses God of being the author of his fall, but also blames Him for his non-recovery. How often do we hear persons say that they cannot believe unless God give them the power to believe; and, further, that unless they are the subjects of God's eternal decree, they cannot be saved.

Now it is perfectly true, that no man can believe the gospel, except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and it is also true, that who so believe the gospel are the happy subjects of God's eternal counsels. But does all this set aside man's responsibility to believe a plain testimony set before him in God's Word. It most certainly does no such thing. But it does reveal the sad evil of man's heart, which leads him to reject Gods testimony which is plainly revealed, and to give as a reason for so doing God's decree which is a profound secret, known only to Himself However it will not avail, for we read in 1 Thess. 1:8-9, that those "Who obey not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Christ, shall be punished with everlasting destruction." Men are responsible to believe the gospel, and they will be punished for not believing it. They are not responsible to know anything about God's counsels, inasmuch as they are not revealed, and, therefore, there can be no guilt attached to ignorance concerning them. The apostle could say to the Thessalonians, "knowing brethren beloved, our election of God." How did he know it? Was it by having access to the page of God's secret and eternal decrees? By no means. How then? "Because (hoti) our gospel came not to you in word only, but also in power." (1 Thess. 1:4-5) This is the way to know the election of any. When the gospel comes in power, it is a plain proof of God's election.

But, I doubt not, the people who draw a plea from the divine counsels for rejecting the divine testimony, only want some flimsy excuse to continue in sin. They really do not want God; and it would be far more honest in them to say so, plainly, than to put forward a plea which is not merely flimsy, but positively blasphemous. Such a plea will not avail them much amid the terrors of the day of judgement now fast approaching.}

But, just at this point, God began to reveal Himself, and His purposes of redeeming love; and herein lay the true basis of man's peace and blessedness. when man has come to the end of himself, God can show what He is; but not until then. The scene must be entirely cleared of man, and all his vain pretensions, empty boastings, and blasphemous reasonings, ere God can or will reveal Himself. Thus it was when man was hidden behind the trees of the garden, that God unfolded His wondrous plan of redemption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the bruised seed of the woman. Here we are taught a valuable principle of truth as to what it is which alone will bring a man, peacefully and confidingly, into the presence of God.

It has been already remarked that conscience will never effect this. Conscience drove Adam behind the trees of the garden; revelation brought him forth into the presence of God. The consciousness of what he was terrified him; the revelation of what God was tranquillised him. This is truly consolatory for a poor sin burdened heart. The reality of what I am is met by the reality of what God is; and this is salvation.

There is a point where God and man must meet, whether in grace or judgement, and that point is where both are revealed as they are. Happy are they who reach that point in grace! Woe be to them who will have to reach it in judgement! It is with what we are that God deals; and it is as He is that He deals with us. In the cross, I see God descending in grace to the lowest depths, not merely of my negative, but my positive condition, as a sinner. This gives perfect peace. If God has met me, in my actual condition, and Himself provided an adequate remedy, all is eternally settled. But all who do not thus, by faith, see God, in the cross, will have to meet Him, by and by, in judgement He will have to deal, according to what He is, with what they are.

The moment a man is brought to know his real state, he can find no rest until He has found God, in the cross, and then he rests in God Himself. He, blessed be His name is the rest and hiding-place of the believing soul. This at once, puts human works and human righteous in their proper place. We can say, with truth, that those who rest in such things cannot possibly have arrived at the true knowledge of themselves. It is quite impossible that a divinely quickened conscience can rest in ought save the perfect sacrifice of the Son of God. All effort to establish one's own righteousness must proceed from ignorance of the righteousness of God. Adam might learn, in the light of the divine testimony about "the seed of the woman," the worthlessness of his fig-leaf apron. The magnitude of that which had to be done, proved the sinner's total inability to do it. Sin had to be put away Could man do that? Nay, it was by him it had come in. The serpent's head had to be bruised Could man do that? Nay, he had become the serpent's slave. God's claims had to be met. Could man do that? Nay, he had, already, trampled them under foot. Death had to be abolished. Could man do that? Nay, he had, by sin, introduced it, and imparted to it its terrible sting.

Thus, in whatever way we view the matter, we see the sinner's complete impotency, and, as a consequence, the presumptuous folly of all who attempt to assist God in the stupendous work of redemption, as all assuredly do who think to be saved in any other way but "by grace, through faith."

However, though Adam might, and, through grace, did, see and feel that he could never accomplish all that had to be done, yet God revealed Himself as about to achieve every jot and tittle thereof, by the seed of the woman. In short, we see that He graciously took the entire matter into His own hands. He made it, altogether, a question between Himself and the serpent; for although the man and the woman were called upon, individually, to reap, in various ways, the bitter fruits of their sin, yet it was to the serpent that the Lord God said,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e serpent was the source of the ruin; and the seed of the woman was to be the source of the redemption. Adam heard all this, and believed it; and, in the power of that belief, "he called his wife's name the mother of all living. This was a precious fruit of faith in God's revelation. Looking at the matter from nature's point of view, Eve might be mother called, "the mother of all dying." But, in the judgement of faith,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His mother called him Ben-oni; (the son of my sorrow;) but his father called him Benjamin (the son of my right hand)."

It was through the sustaining energy of faith that Adam was enabled to endure the terrible results of what he had done. It was God's wondrous mercy to allow him to hear what He said to the serpent, before he was called to listen to what He had to say to himself. Had it not been so, he must have been plunged in despair. It is despair to be called upon to look at myself, without being able to look at God, as revealed in the cross, for my salvation. There is no child of fallen Adam who could bear to have his eyes opened to the reality of what he is, and what he has done, without being plunged in despair, unless he could take refuge in the cross. Hence, in that place to which all who reject Christ must finally be consigned, hope cannot come. There, men's eyes will be opened to the reality of what they are, and what they have done; but they will not be able to find relief and refuge in God. What God is, will, then, involve hopeless perdition; as truly as what God is, doth, now, involve eternal salvation. The holiness of God will, then, be eternally against them; as it is now that in which all who believe are called to rejoice. The more I realise the holiness of God, now, the more I know my security; but, in the case of the lost, that very holiness will be but the ratification of their eternal doom. Solemn —  unspeakably solemn — reflection!

We shall, now, briefly glance at the truth presented to us in God's providing a coats for Adam and Eve. "Unto Adam, also, and to his wife, did the Lord God make coats of skins, and clothed them." We have here, in figure, the great doctrine of divine righteousness set forth. The robe which God provided was an effectual covering, because He provided it just as the apron was an ineffectual covering, because man had provided it. Moreover, God's coat was founded upon blood-shedding. Adam's apron was not. So also, now God's righteousness is set forth in the cross; man's righteousness is set forth in the works, the sin-stained works of his own hands. When Adam stood clothed in the coat of skin he could not say, "I was naked,'' nor had he any occasion to hide himself. The sinner may feel perfectly at rest, when, by faith, he knows that God has clothed him: but to feel at rest till then, can only be the result of presumption or ignorance. To know that the dress I wear, and in which I appear before? God, is of His own providing, must set my heart at perfect rest. There can be no true, permanent rest in ought else.

The closing verses of this chapter are full of instruction. Fallen man, in his fallen state, must not be allowed to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for that would entail upon him endless wretchedness in this world To take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 ever, in our present condition, would be unmingled misery. The tree of life can only be tasted in resurrection. To live for ever, in a frail tabernacle, in a body of sin and death, would be intolerable. Wherefore, the Lord God "drove out the man." He drove him out into a world which, everywhere, exhibited the lamentable results of his fall. The Cherubim and the flaming sword, too, forbid fallen man to pluck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while God's revelation pointed him to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the seed of the woman, as that wherein life was to be found beyond the power of death.

Thus Adam was a happier and a safer man, outside the bounds of Paradise, than he had been within, for this reason — that, within, his life depended upon himself whereas, outside, it depended upon another, even a promised Christ. And as he looked up, and beheld "the Cherubim and the flaming sword," he could bless the hand that had set them there,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inasmuch as the same hand had opened a better, a safer, and a happier way to that tree. If the Cherubim and flaming sword stopped up the way to Paradise, the Lord Jesus Christ has opened "a new and living way" into the holiest of all.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man comes to the Father, but by me." (Compare John 14:6; Heb. 10:20.) In the knowledge of this, the believer now moves onward through a world which is under the curse — where the traces of sin are visible on all hands. He has found his way, by faith, to the bosom of the Father; and while he can secretly repose there, he is cheered by the blessed assurance that the one who has conducted him thither, is gone to prepare a place in the many mansions of the Father's house, and that he will soon come again and receive him to Himself, amid the glory of the Father's kingdom. Thus, in the bosom, the house, and the kingdom of the Father, the believer finds his present portion, his future home and reward.

Genesis 4 & Genesis 5

As each section of the Book of Genesis opens before us, we are furnished with fresh evidence of the fact that we are travelling over, what a recent writer has well termed, "the seed-plot of the whole Bible;" and not only so, but the seed-plot of man's entire history.

Thus, in the fourth chapter, we have, in the persons of Cain and Abel, the first examples of a religious man of the world, and of a genuine man of faith. Born, as they were, outside of Eden, and being the sons of fallen Adam, they could have nothing, natural, to distinguish them, one from the other. They were both sinners. Both had a fallen nature. Neither was innocent. It is well to be clear in reference to this, in order that the reality of divine grace, and the integrity of faith, may be fully and distinctly seen. If the distinction between Cain and Abel were founded in nature, then it follows, as an inevitable conclusion, that they were not the partakers of the fallen nature of their father, nor the participators in the circumstances of his fall; and, hence, there could be no room for the display of grace, and the exercise of faith.

Some would teach us that every man is born with qualities and capacities which, if rightly used, will enable him to work his way back to God. This is a plain denial of the fact so clearly set forth in the history now before us. Cain and Abel were born, not inside, but outside of Paradise. They were the sons, not of innocent, but of fallen Adam. They came into the world as the partakers of the nature of their father; and it mattered not in what ways that nature might display itself, it was nature still — fallen, ruined, irremediable nature.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not merely fleshly, but)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not merely spiritual, but) spirit." (John 3)

If ever there was a fair opportunity for the distinctive qualities, capacities, resources, and tendencies of nature to manifest themselves, the lifetime of Cain and Abel furnished it. If there were ought in nature, whereby it could recover its lost innocence, and establish itself again within the bounds of Eden, this was the moment for its display. But there was nothing of kind. They were both lost. They were "flesh. They were not innocent. Adam lost his innocence and never regained it. He can only be looked at as the head of a fallen race, who, by his "disobedience," were made "sinners." (Rom. 5:19) He became, so far as he was personally concerned, the corrupt source, from whence have emanated the corrupt streams of ruined and guilty humanity — the dead trunk from which have shot forth the branches of a dead humanity, morally and spiritually dead.

True, as we have already remarked, he himself was made a subject of grace, and the possessor and exhibitor of a lively faith in a promised Saviour; but this was not anything natural, but something entirely divine. And, inasmuch as it was not natural, neither was it within the range of nature's capacity to communicate it. It was not, by any means, hereditary. Adam could not bequeath nor impart his faith to Cain or Abel. His possession thereof was simply the fruit of love divine. It was implanted in his soul by divine power; and he had not divine power to communicate it to another. Whatever was natural Adam could, in the way of nature, communicate; but nothing more. And seeing that he, as a father, was in a condition of ruin, his son could only be in the same. As is the begetter, so are they also that are begotten of him. They must, of necessity, partake of the nature of him from whom they have sprung. "as is the earthy, such are they also that are earthy." (1 Cor. 15:48)

Nothing can be more important, in its way, than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 of federal headship. If my reader will turn, for a moment, to Rom. 5:12-21, he will find that the inspired apostle looks at the whole human race as comprehended under two heads. I do not attempt to dwell on the passage; but merely refer to it, in connection with the subject in hand. The fifteenth chapter of first Corinthians will also furnish instruction of a similar character. In the first man, we have sin, disobedience, and death. In The Second man, we have righteousness, obedience, and life. As we derive a nature from the former, so do we also from the latter. No doubt, each nature will display, in each specific case, its own peculiar energies; it will manifest in each individual possessor thereof, its own peculiar powers. Still, there is the absolute possession of a real, abstract, positive nature.

Now, as the mode in which we derive a nature from the first man is by birth, so the mode in which we derive a nature from the Second man is by new birth. Being born, we partake of the nature of the former; being "born again," we partake of the nature of the latter. A newly born infant, though entirely incapable of performing the act which reduced Adam to the condition of a fallen being, is, nevertheless, a partaker of his nature; and so, also, a newly born child of God — a newly regenerated soul, though having nothing whatever to do with the working out of the perfect obedience of "the man Christ Jesus," is, nevertheless, a partaker of His nature. True it is that, attached to the former nature, there is sin; and attached to the latter, there is righteousness. man's sin, in the former case; God's righteousness in the latter: yet, all the while, there is actual, bona fide participation of a real nature, let the adjuncts be what they may. The child of Adam partakes of the human nature and its adjuncts; the child of God partakes of the divine nature and its adjuncts. The former nature is according to "the will of man," (John 1) the latter is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as St. James, by the Holy Ghost, teaches us, "Of his own will begat he us by the word of truth, (James 1:18)

From all that has been said, it follows, that Abel was not distinguished from his brother Cain by anything natural. The distinction between them was not grounded upon ought in their nature or circumstances, for, as to these, "there was no difference." What, therefore, made the vast difference? The answer is as simple as the gospel of the grace of God can make it. The difference was not in themselves, in their nature, or their circumstances; it lay, entirely, in their sacrifices. This makes the matter most simple, for any truly convicted sinner — for any one who truly feels that he not only partakes of a fallen nature, but is himself, also, a sinner. The history of Abel opens, to such an one, the only true ground of his approach to, his standing before, and his relationship with, God. It teaches him, distinctly, that he cannot come to God on the ground of anything in, of, or pertaining to, nature; and he must seek, outside himself, and in the person and work of another, the true and everlasting basis of his connection with the Holy, the Just, and only True God. The eleventh chapter of Hebrews sets the whole subject before us, in the most distinct and comprehensive way. "By faith Abel offered to God a more excellent sacrifice (pleiona thusian) than Cain, by which he obtained witness that he was righteous, God bearing witness (parturountos) to his gifts; and by it he being dead yet speaks." Here we are taught that it was, in no wise, a question as to the men, but only as to their "Sacrifice" — it was not a question as to the offerer, but as to his offering. Here lay the grand distinction between Cain and Abel. My reader cannot be too simple in his apprehension of this point, for therein lies involved the truth as to any sinner's standing before God.

And, now, let us enquire what the offerings were. "And in process of time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ruit thereof. And the Lord had respect to Abel, and to his offering; but to Cain and to his offering, he had not respect." (Gen. 4:3-5) This sets the difference clearly before us: Cain offered Jehovah the fruit of a cursed earth, and that, moreover, without any blood to remove the curse. He presented "An unbloody sacrifice," simply because he had no faith. Had he possessed that divine principle, it would have taught him, even at this early moment, that "Without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remission." (Heb 9) This is a great cardinal truth. The penalty of sin is death. Cain was a sinner, and, as such, death stood between him and Jehovah. But, in his offering, there was no recognition whatever of this fact. There was no presentation of a sacrificed life, to meet the claims of divine holiness, or to answer to his own true condition as a sinner. He treated Jehovah as though He were, altogether, such an one as himself, who could accept the sin-stained fruit of a cursed earth.

All this, and much more, lay involved in Cain's "unbloody sacrifice." He displayed entire ignorance, in reference to divine requirements, in reference to his own character and condition, as a lost and guilty sinner, and in reference to the true state of that ground, the fruit of which he presumed to offer. No doubt, reason might say, "what more acceptable offering could a man present, than that which he had produced by the labour of his hands, and the sweat of his brow?" Reason, and even man's religious mind, may think thus; but God thinks quite differently; and faith is always sure to agree with God's thoughts. God teaches, so faith believes, that there must be a sacrificed life, else there can be no approach to God.

Thus, when we look at the ministry of the Lord Jesus, we see, at once, that, had He not died upon the cross, all His services would have proved utterly unavailing as regards the establishment of our relationship with God. True, "He went about doing good" all His life; but it was His death that rent the veil. (Matt. 27:61) Nought but His death could have done so. Had he continued, to the present moment, "going about doing good," the veil would have remained entire, to bar the worshipper's approach into" the holiest of all." Hence we can see the false ground on which Cain stood as an offerer and a worshipper. An unpardoned sinner coming into the presence of Jehovah, to present "an unbloody sacrifice," could only be regarded as guilty of the highest degree of presumption. True, he had toiled to produce his offering; but what of that? Could a sinner's toil remove the curse and stain of sin Could it satisfy the claims of an infinitely holy God! Could it furnish a proper ground of acceptance for a sinner? Could it set aside the penalty which was due to sin? Could it rob death of its sting, or the grave of its victory? Could it do any or all of these things? Impossible. "Without shedding of blood is no remission." Cain's "unbloody sacrifice," like every other unbloody sacrifice, was not only worthless, but actually abominable, in the divine estimation. It not only demonstrated his entire ignorance of his own condition, but also of the divine character. "God is not worshipped with men's hands as though he needed anything." And yet Cain thought he could be thus approached. And every mere religionist thinks the same. Cain has had many millions of followers, from age to age. Cain-worship has abounded all over the world. It is the worship of every unconverted son, and is maintained by every false system of religion under the sun.

Man would fain make God a receiver instead of a giver; but this cannot be; for,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and, assuredly, God must have the more blessed place. "Without all contradiction, the less is blessed of the better." "Who has first given to him?" God can accept the smallest gift from a heart which has learnt the deep truth contained in those words, "Of thine own have we given thee;" but, the moment a man presumes to take the place of the "first" giver, God's reply is, "if I were hungry, I would not tell thee;" for "He is not worshipped with men's hands, as though he needed anything, seeing he gives to all "life and breath and all things." The great Giver of "all things" cannot possibly "need anything." Praise is all that we can offer to God; but this can only offered in the full and clear intelligence that our sins are all put away; and this again can only be known by faith in the virtue of an accomplished atonement.

My reader may pause, here, and read prayerfully the following scriptures, namely, Psalm 1; Isaiah 1:11-18; Acts 17:22-34, in all of which he will find distinctly laid down the truth as to man's true position before God, as also the proper ground of worship.

Let us now consider Abel's sacrifice.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In other words, he entered, by faith, into the glorious truth, that God could be approached by sacrifice; that there was such a thing as a sinner's placing the death of another between himself and the consequence of his sin, that the claims of God's nature and the attributes of His character could be met by the blood of a spotless victim — a victim offered to meet God's demands, and the sinner's deep necessities. This is, in short, the doctrine of the cross, in which alone the conscience of a sinner can find repose, because, therein, God is fully glorified.

Every divinely convicted sinner must feel that death and judgement are before him, as "the due reward of his deeds;" nor can he, by ought that he can accomplish, alter that destiny. He may toil and labour; he may, by the sweat of his brow, produce an offering; he may make vows and resolutions; he may alter his way of life; he may reform his outward character; he may be temperate, moral, upright, and, in the human acceptation of the word, religious; he may, though entirely destitute of faith, read, pray, and hear sermons. In short, he may do anything, or everything which lies within the range of human competency; but, notwithstanding all, "death and judgement" are before him. He has not been able to disperse those two heavy clouds which have gathered upon the horizon. There they stand; and, so far from being able to remove them, by all his doings, he can only live in the gloomy anticipation of the moment Then they shall burst upon his guilty head. It is impossible for a sinner, by his own works, to place himself in life and triumph, at the other side of "death and judgement — yea, his very works are only performed for the purpose of preparing him, if possible, for those dreaded realities.

Here, however, is exactly where the cross comes in. In that cross, the convicted sinner can behold a divine provision for all his guilt and all his need. There, too, he can see death and judgement entirely removed from the scene, and life and glory set in their stead. Christ has cleared the prospect of death and judgement, so far as the true believer is concerned, and filled it with life, righteousness, and glory. "He has abolished death, and brought life and incorruptibility to light, through the gospel." (2 Tim. 1:10) He has glorified God in the putting away of that which would have separated us for ever, from His holy and blissful presence. "He has put away sin," and, hence it is gone. (Heb. 9:26) all this is, in type, set forth in Abel's "more excellent sacrifice." There was no attempt, on Abel's part, to set aside the truth as to his own condition, and proper place as a guilty sinner — no attempt to turn aside the edge of the flaming sword, and force his way back to the tree of life — no presumptuous offering of an unbloody sacrifice" — no presentation of the fruit of a cursed earth to Jehovah — he took the real ground of a sinner, and, as such, set the death of a victim between him and his sins, and between his sins and the holiness a sin-hating God. This was most simple. Abel deserved death and judgement, but he found a substitute.

This is it with every poor, helpless, self-condemned, conscience-smitten sinner. Christ is his substitute, his ransom, his most excellent sacrifice, his ALL. Such an one will feel, like Abel, that the fruit of the ground could never avail for him; that were he to present to God the fairest fruits of earth, he would still have a sin-stained conscience, inasmuch as "without shedding of blood is no remission." The richest fruits, and the most fragrant flowers, in the greatest profusion, could not remove a single stain from the conscience. Nothing but the perfect sacrifice of the Son of God can give ease to the heart and conscience. All who by faith lay hold of that divine reality, will enjoy a peace which the world can neither give nor take away. It is faith which puts the soul in present possession of this peace. "Being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Rom. 5:1) "By faith Abel offered to God a more excellent sacrifice than Cain."

It is not a question of feeling, as so many would make it. It is entirely a question of faith in an accomplished fact, faith wrought in the soul of a sinner,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This faith is something quite different from a mere feeling of the heart, or an assent of the intellect. Feeling is not faith. Intellectual assent is not faith. Some would make faith to be the mere assent of the intellect to a certain proposition. This is fearfully false. It makes the question of faith human, whereas it is really divine. It reduces it to the level of man, whereas it really comes from God Faith is not a thing of today or tomorrow. It is an imperishable principle, emanating from an eternal source, even God Himself; it lays hold of God's truth, and sets the soul in God's presence.

Mere feeling and sentimentality can never rise above the source from whence they emanate; and that source in self; but faith has to do with God and His eternal word, and is a living link, connecting the heart that possesses it with God mho gives it. Human feelings, however intense; human sentiments, however refined, could not connect the soul with God. They are neither divine nor eternal, but are human and evanescent. They are like Jonah's gourd, which sprang up in a night, and perished in a night. Not so faith. That precious principle partakes of all the value, all the power, and all the reality of the source from whence it emanates, and the object with which it has to do. It justifies the soul; (Rom. 5:1) it purifies the heart; (Acts 15:9) it works by love; (Gal. 5:6) it overcomes the world. (1 John 5:4) Feeling and sentiment never could accomplish such results; they belong to nature and to earth, faith belongs to God and to heaven; they are occupied with self, faith is occupied with Christ; they look inward and downward, faith looks outward and upward; they leave the soul in darkness and doubt, faith leads it into light and peace; :they have to do with one's own fluctuating condition, faith has to do with God's immutable truth, and Christ's eternally enduring sacrifice.

No doubt, faith will produce feelings and sentiments spiritual feelings and truthful sentiments — but the fruits of faith must never be confounded with faith "itself. I am not justified by feelings, nor yet by faith feelings, but simply by faith. And why? Because faith believes God when He speaks; it takes Him at His word; it apprehends Him as He has revealed Himself in the Person and work of the Lord Jesus Christ. This is life, righteousness, and peace. To apprehend God as He is, is the sum of all present and eternal blessedness. When the soul finds out God, it has found out all it can possibly need, here or hereafter; but He can only be known by His own revelation, and by the faith which He Himself imparts, and which, moreover, always sees divine revelation as its proper object.

Thus, then, we can, in some measure, enter into the meaning and power of the statement, "By faith Abel offered to God a more excellent sacrifice than Cain." Cain had no faith, and, therefore, he offered an unbloody sacrifice. Abel had faith, and, therefore, he offered both "blood, and fat," which, in type, set forth the presentation of the life, and also the inherent excellency of the Person of Christ. "The blood," set forth the former; "the fat," shadowed forth the latter. Both blood and fat were forbidden to be eaten, under the Mosaic economy. The blood is the life; and man, under law, had no title to life. But, in the sixth of John, we are taught, that unless we eat blood, we have no life in us. Christ is the life. There is not a spark of life outside of Him. ALL out of Christ is death. "In him was life," and in none else.

Now, He gave up His life on the cross; and, to that life, sin was, by imputation, attached, when the blessed One was nailed to the cursed tree. Hence, in giving up His life, He gave up, also, the sin attached thereto, so that it is, effectually, put away, having been left in His grave from which He rose triumphant, in the power of a new life, to which righteousness as distinctly attaches itself, us did sin to that life which He gave up on the cross. This will help us to an understanding of an expression used by our blessed Lord, after His resurrection, "a spirit has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we have." He did not say, "flesh and blood;" because, in resurrection, He had not assumed, into His sacred person, the blood which He had shed out upon the cross, as an atonement for sin. "The life of the flesh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upon the altar, to make an atonement for your souls: for it is the blood which makes an atonement for the soul." (Lev. 17:11) Close attention to this point will have the effect of deepening, in our souls, the sense of the completeness of the putting away of sin, by the death of Christ; and we know that whatever tends to deepen our sense of that glorious reality, must, necessarily, tend to the fuller establishment of our peace, and to the more effectual promotion of the glory of Christ, as connected with our testimony and service.

We have, already, referred to a point of much interest and value, in the history of Cain and Abel, and that is, the entire identification of each with the offering which he presented. My reader cannot possibly bestow too much attention upon this. The question, in each case, was not as to the person of the offerer; but, entirely, as to the character of his offering. Hence, of Abel we read that "God testified of his gifts." He did not bear witness to Abel, but to Abel's sacrifice; and this fixes, distinctly, the proper ground of a believer's peace and acceptance before God.

There is a, constant tendency, in the heart, to ground our peace and acceptance upon something in or about ourselves even though we admit that that something is wrought by the Holy Ghost. Hence arises the constant looking in, when the Holy Ghost would ever have us looking out. The question for every believer is not, "what am I" but, "what is Christ?" Having come to God "in the name of Jesus," he is wholly identified with Him, and accepted in His name, and, moreover, can no more be rejected than the One in whose name he has come. Before ever a question can be raised as to the feeblest believer, it must be raised as to Christ Himself. But this latter is clearly impossible, and thus the security of the believer is established upon a foundation which nothing can possibly move. Being in himself a poor worthless sinner, he has come in the name of Christ, he is identified with Christ, accepted in and as Christ, bound up in the same bundle of life with Christ. God testifies, not of him, but of his gift, and his gift is Christ. ALL this is most tranquillising and consolatory. It is our happy privilege to be able, in the confidence of faith, to refer every objection, and every objector, to Christ, and His finished atonement. ALL our springs are in Him. In Him we boast all the day long. Our confidence is not in ourselves, but in Him who has wrought everything for us. We hang on His name, trust in His work, gaze on His Person, and wait for His coming.

But the carnal mind, at once, displays its enmity against all this truth which so gladdens and satisfies the heart of a believer. Thus it was with Cain. "He was very wroth, and his countenance fell." That which filled Abel with peace, filled Cain with wrath. Cain in unbelief, despised the only way in which a sinner could come to God. He refused to offer blood, without which there can be no remission; and, then, because he was not received, in his sins, and because Abel was accepted, in his gift, "he was wroth, and his countenance fell." And yet, how else could it be? He should either be received with his sins, or without them; but God could not receive him with them, and he would not bring the blood which alone makes atonement; and, therefore, he was rejected, and, being rejected, he manifests in his ways, the fruits of corrupt religion. He persecutes and murders the true witness — the accepted, justified man — the man of faith; and, in so doing, he stands as the model and forerunner of all false religionists, in every age.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men have shown themselves more ready to persecute on religious grounds, than on any other. This is Cain-like. Justification — full, perfect, unqualified justification, by faith only, makes God everything, and man nothing: and man does not like this; it causes his countenance to fall, and draws out his anger. Not that he can give any reason for his anger; for it is not, as we have seen, a question of man at all, but only of the ground on which he appears before God. Had Abel been accepted on the ground of ought in himself, then, indeed, Cain's wrath, and his fallen countenance, would have had some just foundation; but, inasmuch as he was accepted, exclusively, on the ground of his offering; and, inasmuch as it was not to him, but to his gift, that Jehovah bore testimony, his wrath was entirely without any proper basis. This is brought out in Jehovah's word to Cain:" If thou doest well, (or, as the LXX reads it, if thou offer correctly, (orthos prosenegkes) shalt thou not be accepted?" The well-doing had reference to the offering. Abel did well by hiding himself behind an acceptable sacrifice. Cain did badly by bringing an offering without blood; and all his after-conduct was but the legitimate result of his false worship.

"And Cain talked with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Thus has it ever been; the Cains have persecuted and murdered the Abels. At all times, man and his religion are the same; faith and its religion are the same: and wherever they have met, there has been conflict.

However, it is well to see that Cain's act of murder was the true consequence — the proper fruit — of his false worship. His foundation was bad, and the superstructure erected thereon was also bad. Nor did he stop at the act of murder; but having heard the judgement of God thereon, despairing of forgiveness through ignorance of God, he went forth from His blessed presence, and built a city, and had in his family the cultivators of the useful and ornamental sciences-agriculturists, musicians, and workers in metals. Through ignorance of the divine character, he pronounced his sin too great to be pardoned.* It was not that he really knew his sin, but that he knew not God. He fully exhibited the terrible fruit of the fall in the very thought of God to which he gave utterance. He did not want pardon, because he did not want God. He had no true sense of his own condition; no aspirations after God; no intelligence as to the ground of a sinner's approach to God. He was radically corrupt — fundamentally wrong; and all he wanted was to get out of the presence of God, and lose himself in the world and its pursuits. Be thought he could live very well without God, and he therefore set about decorating the world as well as be could, for the purpose of making it a respectable place, and himself a respectable man therein, though in God's view it was under the curse, and he was a fugitive and a vagabond.

{*The word used by Cain occurs in Ps. 32:1 whose transgression is forgiven. The LXX renders it by aphethenai, to be remitted.}

Such was "the way of Cain in which way millions are, at this moment, rushing on. Such persons are not, by any means, divested of the religious element in their character. They would like to offer something to God; to do something for Him. They deem it right to present to Him the results of their own toil. They are ignorant of themselves, ignorant of God; but with all this there is the diligent effort to improve the world; to make life agreeable in various ways; to deck the scene with the fairest colours. God's remedy to cleanse is rejected, and man's effort to improve is put in its place. This is "the way of Cain." (Jude 11)

And, my reader, you have only to look around you to see how this "WAY is prevailing at the present moment. Though the world is stained with the blood of "a greater than" Abel, even with the blood of Christ; yet see what an agreeable place man seeks to make of it As in Cain's day, the grateful sounds of "the harp and organ," no doubt, completely drowned, to man's ear, the cry of Abel's blood; so now, man's ear is filled with other sounds than those which issue from Calvary; and his eye filled with other objects than a crucified Christ. The resources of his genius, too, are put forth to render this world a hot-house, in which are produced, in their rarest form, all the fruits for which nature so eagerly longs. And not merely are the real wants of man, as a creature, supplied, but the inventive genius of the human mind has been set to work for the purpose of devising things, which, the moment the eye sees, the heart desires, and not only desires, but imagines that life would be intolerable without them. Thus, for instance, some years ago, people were content to devote three or four days to the accomplishing of a journey of one hundred miles; but now they can accomplish it in three or four hours; and not only so, but they will complain sadly if they happen to be five or ten minutes late. In fact, man must be saved the trouble of living. He must travel without fatigue, and he must hear news without having to exercise patience for it. He will lay iron rails across the earth, and electric wires beneath the sea, as if to anticipate, in his own way, that bright and blissful age, when "there shall be no more sea."*

{*True, the Lord is using all those things for the furtherance of His own gracious ends; and the Lord's servant can freely use them also; but this does not hinder our seeing the spirit which originates and characterises them.}

In addition to all this, there is abundance of religion, so called; but, alas charity itself is compelled to harbour the apprehension, that very much of what passes for religion is but a screw in the vast machine, which has been constructed for man's convenience, and man's exaltation. Man would not be without religion. It would not be respectable; and, therefore, he is content to devote one-seventh of his time to religion; or, as he thinks and professes, to his eternal interests; and then be has six-sevenths to devote to his temporal interests; but whether he works for time or eternity, it is for himself, in reality. such is "the way of Cain." Let my reader ponder it well. Let him see where this way begins, whither it tends, and where it terminates.

How different the way of the man of faith! Abel felt and owned the curse; he saw the stain of sin, and, in the holy energy of faith, offered that which met it, and met it thoroughly — met it divinely. He sought and found a refuge in God Himself; and instead of building a city on the earth, he found but a grave in its bosom. The earth, which on its surface displayed the genius and energy of Cain and his family, was stained underneath with the blood of a righteous man. Let the man of the world remember this; let the man of God remember it; let the worldly-minded Christian remember it. The earth which we tread upon is stained by the blood of the Son of God. The very blood which justifies the Church condemns the world. The dark shadow of the cross of Jesus may be seen by the eye of faith, looming over all the glitter and glare of this evanescent world. "The fashion of this world passes away." It will soon all be over, so far as the present scene is concerned. "The way of Cain" will be followed by "the error of Balaam," in its consummated form; and then will come "the gainsaying of Core;" and what then "The pit" will open its mouth to receive the wicked, and close it again, to shut them up in "blackness of darkness for ever." (Jude 13)

In full confirmation of the foregoing lines, we may run the eye over the contents of Chapter 5 and find therein the illuminating record of man's weakness, and subjection to the rule of death. He might live for hundreds of years, and "beget sons and daughters;" but, at last, it must be recorded that "he died." "Death reigned from Adam to Moses." "It is appointed to men once to die." Man cannot get over this. He cannot, by steam, or electricity, or anything else within the range of his genius, disarm death of its terrible sting. He cannot, by his energy, set aside the sentence of death, although he may produce the comforts and luxuries of life.

But whence came this strange and dreaded thing, death? Paul gives us the answer: "By one man sin entered into the world, and death by sin." (Rom. 5:12) Here we have the origin of death. It came by sin. Sin snapped asunder the link which bound the creature to the living God; and, that being done, he was handed over to the dominion of death, which dominion he had no power whatever to shake off. And this, be it observed, is one of the many proofs of the fact of man's total inability to meet God. There can be no fellowship between God and man, save in the power of life; but man is under the power of death; hence, on natural grounds, there can be no fellowship. Life, can have no fellowship with death, no more than light with darkness, or holiness with sin. Man must meet God on an entirely new ground, and on a new principle, even faith; and this faith enables him to recognise his own position, as "sold under sin," and, therefore, subject to death; while, at the same time, it enables him to apprehend God's character, as the dispenser of a new life — life beyond the power of death — a life which can never be touched by the enemy, nor forfeited by us.

This it is which marks the security of the believer's life — a risen, glorified Christ — a Christ victorious over everything that could be against us. Adams life was founded upon his own obedience; when he disobeyed, life was forfeited. But Christ, having life in Himself, came down into this world and fully met all the circumstances of man's sin, in ever possible form; and, by submitting to death, destroyed him who had the power thereof, and, in resurrection, becomes the life and righteousness of all who believe in His most excellent name.

Now, it is impossible that Satan can touch this life, either in its source, its channel, its power, heaven its sphere, or its duration. God is its source; a risen Christ, its channel, The Holy Ghost, its power; heaven, its sphere; and eternity its duration. Hence, therefore, as might to one possessing this wondrous life, the whole scene is changed; and while, in one sense, it must be said, "in the midst of life we are in death," yet, in another sense it can be said, "in the midst of death we are in life". There is no death in the sphere into which a risen Christ introduces His people. How could there be? Has not he abolished it? It cannot be an abolished and an existing thing at the same time, and to the same people; but God's word tells us it is abolished. -Christ emptied the scene of death, and filled it with life and, therefore, it is not death, but glory that lies before the believer, death is behind him for ever. As to the future, it is all glory, cloudless glory. True, it may be his lot to "fall asleep" — to "sleep in Jesus" — but that is not death, but "life in earnest." The mere matter of departing to be with Christ cannot alter the specific hope of the believer, which is to meet Christ in the air, to be with Him, and like Him, for ever.

Of this we have a very beautiful exemplification in Enoch, who forms the only exception to the rule of Gen. 5. The rule is, "he died;" the exception is, "he should not see death." "By faith Enoch was translated that he should not see death; and was not found, because God had translated him; for before his translation be had this testimony, that he pleased God." (Heb. 11:5.) Enoch was "the seventh from Adam;" and it is deeply interesting to find, that death was not suffered to triumph over "the seventh;" but that, in his case, God interfered, and made him a trophy of His own glorious victory over all the power of death. The heart rejoices, after reading, six times, the sad record, "he died," to find, that the seventh did not die; and when we ask, how was this? the answer is, "by faith." Enoch lived in the faith of his translation, and walked with God three hundred years. This separated him, practically, from all around. To walk with God must, necessarily, put one outside the sphere of this world's thoughts. Enoch realised this; for, in his day, the spirit of the world was manifested; and then, too, as now, it was opposed to all that was of God. The man of faith felt he had nought to do with the world, save to be a patient witness, therein, of the grace of God, and of coming judgement. The sons of Cain might spend their energies in the vain attempt to improve a cursed world, but Enoch found a better world and lived in the power of it.* His faith was not given him to improve the world, but to walk with God.

{*It is very evident, that Enoch knew nothing whatever about of "making the best of both worlds." To him there was but one world. Thus it should be with us}

And, oh! how much is involved in these three words, "walked with God!" What separation and self-denial! what holiness and moral purity! what grace and gentleness what humility and tenderness! and yet, what zeal energy? What patience and long-suffering! and yet what faithfulness and uncompromising decision! To walk with God comprehends everything within the range of the divine life, whether active or passive. It involves the knowledge of God's character as He has revealed it. It involves, too, the intelligence of the relationship in which we stand to Him. It is not a mere living by rules and regulations! nor laying down plans of action; nor in resolutions to go hither and thither to do this or that. To walk with God is far more than any or all of these things. Moreover, it will sometimes carry us right athwart the thoughts of men, even of our brethren, if they are not themselves walking with God. It may, sometimes, bring against us the charge of doing too much; at other times, of doing too little; but the faith that enables one to "walk with God," enables him also to attach the proper value thoughts of man.

Thus we have, in Abel and Enoch, most valuable instruction as to the sacrifice on which faith rests; and, as to the prospect which hope now anticipates; while, at the same time," the walk with God" takes in all the details of actual life which lie between those two points. Lord will give grace and glory;" and between the grace that has been, and the glory that is to be, revealed, there is the happy assurance, that "no good thing will he withhold from them that walk uprightly." (Psalm 84:11)

It, has been remarked, that "the cross and the coming of the Lord form the termini of the Church's existence on earth," and these termini are prefigured in the sacrifice of Abel, and the translation of Enoch. The Church knows her entire justification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and she waits for the day, when He shall come and receive her to Himself. She, "through the Spirit, waits for the hope of righteousness by faith." (Gal. 5:5) She does not wait for righteousness, inasmuch as she, by grace, has that already; but she waits for the hope which properly belongs to the condition into which she has been introduced.

My reader should seek to be clear as to this. Some expositors of prophetic truth, from not seeing the Church's specific place, portion, and hope, have made sad mistakes. They have, in effect, cast so many dark clouds and thick mists around "the bright and morning star," which is the proper hope of the Church, that many saints, at the present moment, seem unable to rise above the hope of the God-fearing remnant of Israel, which is to see "the Sun of Righteousness arise with healing in his wings." (Mal. 4) Nor is this all. Very many have been deprived of the moral power of the hope of Christ's appearing, by being taught to look for various events and circumstances previous to the moment of His manifestation to the Church. The restoration of the Jews, the development of Nebuchadnezzar's image, the revelation of the man of sin — all these things, it is maintained. must take place ere Christ comes. That this is not true, might be proved from numerous passages of New Testament scripture, were this the fitting place to adduce them.

The Church, like Enoch, will be taken away from the evil around, and the evil to come. Enoch was not left to see the world's evil rise to a head, and the judgement of God poured forth upon it. He saw not the fountains of the great deep broken up," nor "the windows of heaven opened." He was taken away before any of these things occurred; and he stands before eye of faith as a beautiful figure of those," who shall not all sleep, but shall all be changed, in a moment in the twinkling of an eye." (1 Cor. 15:51-52) Translation, not death, was the hope of Enoch; and, as to the Church's hope, it is thus briefly expressed by the apostle, "To wait for the Son from heaven." Thess. 1:10) This, the simplest and most unlettered Christian can understand and enjoy. Its power, too be can, in some measure, experience and manifest. He may not be able to study prophecy very deeply, but he can, blessed be God, taste the blessedness, the reality, the comfort, the power, the elevating and separating virtue of that celestial hope, which properly belongs to him as a member of that heavenly body, the Church; which hope is not merely to see "the Sun of Righteousness" how blessed soever that may be in its place, but to see "the bright and morning star." (Rev. 2:28.) And as in the natural world, the morning star is seen, by those who watch for it, before the sun rises, so Christ, as the morning star, will be seen by the Church, before the remnant of Israel can behold the beams of the Sun.

Genesis 6  Genesis 9

We have, now, arrived at a deeply-important and strongly-marked division of our book. Enoch has passed off the scene. His walk, as a stranger on earth, has terminated in his translation to heaven. He was taken away before human evil had risen to a head, and, therefore, before the divine judgement had been poured out. How little influence his course and translation had upon the world, is manifest from the first two verses of chapter 6. "And it came to pass, when men began to multiply on the face of the earth, and daughters were born to them, that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en that they were fair; and they took them wives of all which they chose."

The mingling of that which is of God with that which is of man, is a special form of evil, and a very effectual engine, in Satan's hand, for marring the testimony of Christ on the earth. This mingling may frequently wear the appearance of something very desirable; it may often look like a wider promulgation of that which is of God — a fuller and a more vigorous outgoing of a divine influence — a something to be rejoiced in rather than to be deplored: but our judgement as to this will depend entirely upon the point of view from which it is contemplated. If we look at it in the light of God's presence, we cannot possibly imagine, that an advantage is gained when the people of God mingle themselves with the children of this world; or when the truth of God is corrupted by human admixture. Such is not the divine method of promulgating truth, advancing the interests of those, who ought to occupy the place of witnesses for Him on the earth. Separation from all evil is God's principle; and this principle can never be infringed without serious damage to the truth.

In the narrative now before us, we see that the union of the sons of God with the daughters of men led to the most disastrous consequences. True, the fruit of that union seemed exceedingly fair, in man's judgement, as we read,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ich were of old, men of renown;" yet, God's judgement was quite different. He sees not as man sees. His thoughts are not as ours. "God saw that the wickedness of man was great in the earth, and that 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Such was man's condition before God — "evil only" — "evil continually." So much for the mingling of the holy with the profane. Thus it must ever be. If the holy seed will not maintain its purity, all must be forfeited as regards testimony on the earth. Satan's first effort was to frustrate God's purpose by putting the holy seed to death, and when that failed; he sought to gain his end by corrupting it.

Now it is of the deepest moment, that my reader should clearly understand the aim, the character, and the result of this union between "the sons of God" and the daughters of men. There is great danger, at the present day of compromising truth for the sake of union. This should be carefully guarded against. There can be no union attained at the expense of truth. The true Christian's motto should ever be — "maintain truth at all cost; if union can be promoted in this way, so much the better, but maintain the truth." The principle of expediency, on the contrary may be thus enunciated, — "promote union at all cost; if truth can be maintained as well, so much the better, but promote union." This latter principle can only be carried out at the expense of all that is divine in the way of testimony.* There can, evidently, be no true testimony where truth is forfeited; and hence, in the case of the antediluvian world, we see that the unhallowed union between the holy and the profane-between that which was divine and that which was human, only had the effect of bringing the evil to a head, and then God's judgement was poured out.

{*We should ever bear in mind, that "the wisdom which is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peaceable." (James 3:17) The wisdom which is from beneath would put "peaceable" first, and, therefore, it can never be pure.}

"The Lord said, I will destroy man." Nothing less would do. There must be the entire destruction of that which had corrupted God's way on the earth. "The mighty men, and men of renown," must all be swept away, without distinction. "all flesh" must be set aside, as utterly unfit for God. "The end of all flesh is come before me." It was not merely the end of some flesh; no, it was all corrupt, in the sight of Jehovah — all irrecoverably bad. It had been tried, and found wanting; and the Lord announces His remedy to Noah in these words,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

Thus was Noah put in possession of God's thoughts about the scene around him. The effect of the word of God was to lay bare the roots of all that which man's eye might rest upon with complacency and pride. The human heart might swell with pride, and the bosom heave with emotion, as the eye ran down along the brilliant ranks of men of art, men of skill, "men of might "men of renown." The sound of the harp and the organ might send a thrill through the whole soul, while at the same time, the ground was cultivated, and man's necessities were provided for in such a way as to contradict every thought in reference to approaching judgement. But oh I those solemn words, "I will destroy"; What a heavy gloom they would necessarily cast over the glittering scene! Could not man's genius invent some way of escape? Could not "the mighty man deliver himself by his much strength?" Alas! no: there was ONE way of escape, but it was revealed to faith, not to sight, not to reason, not to imagination.

By faith Noah, being warned of God, of things not seen as yet, moved with fear (eulabetheis) prepared an ark to the saving of his house; by the which he condemned the world, and became heir of the righteousness which is of faith; (Heb 11:7) The word of God brings His light to shine upon all that by which man's heart is deceived. It removes completely the gilding with which the serpent covers a vain, deceitful, passing world over which hangs the sword of divine judgement. But it is only faith that will be "warned of God," when the things of which He speaks are "not seen as yet; Nature is governed by what it sees — it is governed by it's senses, Faith is governed by the pure word of God; (inestimable treasure in this dark world!") This gives stability, let outward appearances be what they may. When God spoke to Noah of judgement impending, there was no sign of it. It was "not seen as yet;" but the word of God made it a present reality to the heart that was enabled to mix that word with faith. Faith does not wait to see a thing, ere it believes, for "faith comes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All that the man of faith needs, is to know that God has spoken; this imparts perfect certainty to his soul. "Thus says the Lord," settles everything. A single line of Sacred Scripture is an abundant answer to all the reasonings and all the imaginations of the human mind; and when one has the word of God as the basis of his convictions, he may calmly stand against the full tide of human opinion and prejudice. It was the word of God which sustained the heart of Noah during his long course of service; and the same word has sustained the millions of God's saints, from that day to this, in the face of the world's contradiction. Hence, we cannot set too high a value upon the word of God. Without it, all is dark uncertainty; with it, all is light and peace. Where it shines, it marks out for the man of God a sure and blessed path; where it shines not, one is left to wander amid the bewildering mazes of human tradition. How could Noah have "preached righteousness," for 120 years, if he had not had the word of God as the ground of his preaching? How could he have withstood the scoffs and sneers of an infidel world? How could he have persevered in testifying of "judgement to come," when not a cloud appeared on the world's horizon? Impossible. The word of God was the ground on which he stood, and "the Spirit of Christ" enabled him to occupy, with holy decision, that elevated and immovable ground.

And now, my beloved Christian reader, what else have we wherewith to stand, in service for Christ, in an evil day, like the present? Surely, nothing; nor do we want ought else. The word of God, and the Holy Ghost by whom, alone, that word can be understood, applied or used, are all we want to equip us perfectly-to furnish us thoroughly, "to all good works," under whatever head those works may range themselves. (2 Tim. 3:16-17) What rest for the heart? What relief from all Satan's imagery, and man's imaginations! God's pure, incorruptible, eternal word May our hearts adore Him for the inestimable treasure "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man'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but God's word as the simple resting-place of Noah's heart.

"God said to Noah, The end of all flesh is come before me … Make thee an ark of gopher wood. Here was man's ruin, and God's remedy. Man had been allowed to pursue his career to the utmost limit, to bring his principles and ways to maturity. The leaven had worked and filled the mass. The evil had reached its climax. "All flesh" had become so bad that it could not be worse; wherefore nothing remained but for God to destroy it totally; and, at the same time, to save all those who should be found, according to His eternal counsels, linked with "the eighth person" — the only righteous man then existing. This brings out the doctrine of the cross, in a very vivid manner. There we find, at once, God's judgement of nature with all its evil; and, at the same time, the revelation of His saving grace, in all its fullness, and in all its perfect adaptation to those who have really reached the lowest point of their moral condition, as judged by Himself. (The day-spring from on high has visited us." (Luke 1:78) Where? Just where we are, as sinners. God has come down to the very deepest depths of our ruin. There is not a point in all the sinner's state to which the light of that blessed day-spring has not penetrated; but, if it has thus penetrated, it must, by virtue of what it is, reveal our true character. The light must judge everything contrary to itself; but, while it does so, it also "gives the knowledge of salvation through the remission of sins." The cross, while it reveals God's judgement upon" all flesh," reveals His salvation for the lost and guilty sinner. Sin is perfectly judged — the sinner perfectly saved — God perfectly revealed, and perfectly glorified, in the cross.

If my reader will turn, for a moment, to the First Epistle of Peter, he will find much light thrown upon this entire subject. At the third chapter, verse 18, we read, "for Christ also has once suffered for sins, the just for the unjust,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quickened by the Spirit: by which (Spirit) he went and preached (through Noah) to the spirits (now) in prison; which once were disobedient, when the long-suffering of God waited in the days of Noah, while the ark was being prepared, wherein few, that is eight souls, were saved through water (di udatos); to which the anti type (antitupon) baptism doth also now save us, not the putting away of the filth of the flesh, (as by water,)* but the answer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who, having gone into heaven, 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gels, and authorities, and powers, being made subject to him."

{*It is impossible to over-estimate the wisdom of the Holy Ghost, as seen in the way in which He treats the ordinance of baptism, in the above remarkable passage. We know the evil use which bas been made of baptism, — we know the false place it has gotten in the thoughts of many, — we know how that the efficacy, which belongs only to the blood of Christ, has been attributed to the water of baptism, — we know how the regenerating grace of the Holy Ghost has been transferred to water baptism; and, with the with the knowledge of all this, we cannot but be struck with the way in which the Spirit of God guards the subject, by stating, that it is not the mere washing away of the filth of the flesh, as by water, But the answer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which "answer" we get, not by baptism, how important soever it may be, as an ordinance of the kingdom, but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Who was delivered for our offences, and raised again for our justification."

Baptism, I need hardly say, as an ordinance of divine institution, and in its divinely-appointed place, is most important and deeply significant; but when we find men, in one way or another, putting the figure in place of the substance, we are bound to expose the work of Satan by the light of the word of God.}

This is a most important passage. It sets the doctrine of the ark and its connection with the death of Christ very distinctly before us. As in the deluge, so in the death Christ, all the billows and waves of divine judgement passed over that which, in itself, was without sin. The creation was buried beneath the flood of Jehovah's righteous wrath; and the Spirit of Christ exclaims, "All thy billows and thy waves have gone over me." (Ps. 42:7) Here is a profound truth for the heart and conscience of a believer. "All God's billows and waves" passed over the spotless Person of the Lord Jesus, when He hung upon the cross; and, as a most blessed consequence, not one of them remains to pass over the person of the believer. At Calvary we see, in good truth, "the fountains of the great deep broken up, and the windows of heaven opened." "Deep calls to deep at the noise of thy waterspouts." Christ drank the cup, and endured the wrath perfectly. He put Himself, judicially, under the full weight of all His people's liabilities, and gloriously discharged them. The belief of this gives settled peace to the soul. If the Lord Jesus has met all that could be against us, if He has removed out of the way every hindrance, if He has put away sin, if He has exhausted the cup of wrath and judgement on our behalf, if He has cleared the prospect of every cloud, should we not enjoy settled peace? Unquestionably. Peace is our unalienable portion. To us belong the deep and untold blessedness, and holy security, which redeeming love can bestow on the righteous ground of Christ's absolutely accomplished work.

Had Noah any anxiety about the billows of divine judgement? None whatever. How could he? He knew that "all" had been poured forth, while he himself was raised, by those very outpoured billows, into a region of cloudless peace. He floated in peace on that very water by which "all flesh" was judged. He was put. beyond the reach of judgement; and put there, too, by God Himself. He might have said, in the triumphant language of Romans 8, "If God be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He had been invited in by Jehovah Himself, as we read in Genesis 7:1, "Come thou and all thy house into the ark;" and when he had taken his place there, we read, "the Lord shut him in" Here assuredly, was full and perfect security for all within. Jehovah kept the door, and no one could go in or out without him. There was both a window and a door to the ark. The Lord secured, with His own omnipotent hand, the door, and left Noah the window from which he might look upward to the place from whence all the judgement had emanated, and see that no judgement remained for him. The saved family could only look upward, because the window was "above" (Gen. 6:16) They could not see the waters of judgement, nor the death and desolation which those waters had caused. God's salvation — the "gopher wood," stood between them and all these things. They had only to gaze upward into a cloudless heaven, the eternal dwelling-place of the One who had condemned the world, and saved them.

Nothing can more fully express the believer's perfect security in Christ than those words, "the Lord shut him in." Who could open what God had shut? None. The family of Noah were as safe as God could make them. There was no power, angelic, human, or diabolical, which could possibly burst open the door of the ark, and let the waters in. That door was shut by the selfsame hand that had opened the windows of heaven, and broken up the fountains of the great deep. Thus Christ is spoken of as the One" that has the key of David, he that opens and no man shuts, and shuts and no man opens." (Rev. 3:7) He also holds in His hand" the keys of hell and of death." (Rev. 1:18) None can enter the portals of the grave, nor go forth there from, without him. He has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He is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and in Him the believer is perfectly secure. (Matt. 28:18; Eph. 1:22) Who could touch Noah? What wave could penetrate that ark which was "pitched within and without with pitch?" Just so now, who can touch those who have, by faith, retreated into the shadow of the cross? Every enemy has been met and silenced — yes, silenced for ever. The death of Christ has triumphantly answered every demur; while, at the same time, His resurrection is the satisfactory declaration of God's infinite complacency in that work which is, at once, the basis of His righteousness in receiving us, and of our confidence in drawing nigh to Him.

Hence, therefore, the door of our ark being secured, by the hand of God Himself, nothing remains for us but to enjoy the window; or, in other words, to walk in happy and holy communion with Him, who has saved us from coming wrath, and made us heirs and expectants of coming glory. Peter speaks of those, who "are blind, and cannot see afar off and have forgotten that they were purged from their old sins." (2 Peter 1:9.) This is a lamentable condition for any to be in, and it is the sure result of not cultivating diligent, prayerful communion with Him, who has eternally shut us in in Christ.

Let us, now, ere we proceed further with Noah's history, glance, for a little, at the condition of those, to whom he had so long preached righteousness. We have been looking at the saved, let us now look at the lost; we have been thinking of those within the ark, let us now think of those without. No doubt, many an anxious look would be cast after the vessel of mercy, as it rose with the water; but, alas! "the door was shut" the day of grace was over — the time of testimony closed, and that for ever, so far as they were concerned. The same hand which had shut Noah in, had shut them out, and it was as impossible for those without to get in, as it was for those within to get out. The former were irrecoverably lost; the latter, effectually saved. The long-suffering of God, and the testimony of His servant had both been slighted. Present things had engrossed them. "They did eat, they drank, they married wives, and were given in marriage, until the day that Nosh entered into the ark, and the flood came and destroyed them all." (Luke 17:26-27) There was nothing wrong in any of these things, abstractedly looked at. The wrong was not in the things done, but in the doers of them. Every one of them might be done in the fear of the Lord, and to the glory of His Holy name, were they only done in faith. But, alas! they were not so done. The word of God was rejected. He told of judgement; but they did not believe. He spoke of sin and ruin; but they were not convinced. He spoke of a remedy; but they would not give heed. They went on with their own plans and speculations, and had no room for God. They acted as if the earth belonged to them, by a lease, for ever. They forgot that there was a clause of surrender. They thought not of that solemn "until." God was shut out. "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their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and hence, they could do nothing right. They thought, spake, and acted for themselves. They did their own pleasure, and forgot God.

And, my reader, remember the words of the Lord Jesus Christ, how He said, "as it was in the days of Noah, so shall it be in the days of the Son of man." Some would have us to believe, that ere the Son of man appears in the clouds of heaven, this earth shall be covered, from pole to pole, with a fair mantle of righteousness. They would teach us to look for a reign of righteousness and peace, as the result of agencies now in operation; but the brief passage just quoted cuts up by the roots, in a moment, all such vain and delusive expectations. How was it in the days of Noah? Did righteousness cover the eart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Was God's truth dominant? Was the earth filled with the knowledge of the Lord? Scripture replies,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ALL flesh had corrupted his way on the earth." "The earth also was corrupt before God." Well, then, "so shall it be in the days of the Son of man." This is plain enough." "Righteousness" and "violence" are not very like each other. Neither is there any similarity between universal wickedness and universal peace. It only needs a heart subject to the Word, and freed from the influence of preconceived opinions, in order to understand the true character of the days immediately preceding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Let not my reader be led astray. Let him reverently bow to Scripture. Let him look at the condition of the world, "in the days before the flood;" and let him bear in mind, that "as" it was then, "so" shall it be at the close of this present period. This is most simple — most conclusive. There was nothing like a state of universal righteousness and peace then, neither shall there be anything like it by and by.

No doubt, man displayed abundant energy in making the world a comfortable and an agreeable place for himself; but that wa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making it a suitable place for God. So, also, at this present time; man is as busy as he can be, in clearing the stones off the pathway of human life, and making it as smooth as possible; but this is not "making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nor is it making "the rough places smooth," that all flesh may see the salvation of Jehovah. Civilisation prevails; but civilisation is not righteousness. The sweeping and garnishing are going forward; but it is not in order to fit the house for Christ, but for Antichrist. The wisdom of man is put forth in order to cover, with the folds of his own drapery, the blots and blemishes of humanity; but, though covered, they are not removed! They are and will, ere long, break out in more hideous deformity than ever. The painting of vermilion will soon be obliterated, and the carved cedar wood destroyed. The dams, by which man sedulously seeks to stem the torrent of human wretchedness, must soon give way before the overwhelming force thereof. All the efforts to confine the physical, the mental, and the moral degradation of Adams posterity within those enclosures, which human benevolence, if you please, has devised, must, in the sequel, prove abortive. The testimony has gone forth. "The end of all flesh has come before me." It has not come before man; but it has come before God; and, albeit, the voice of the scoffers may be heard, saying, "Where is the promise of his coming? For, since the fathers fell asleep, all things continue as they were 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yet the moment is rapidly hastening on, when those scoffers will get their answer.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as a thief in the night, in the which the heavens shall pass away with a great noise, and the elements shall melt with fervent heat, the earth also, and the works that are therein, shall be burnt up." (2 Peter 3:4-10) This, my reader, is the answer to the intellectual scoffs of the children of this world, but not to the spiritual affections and expectations of the children of God. These latter, thank God, have a totally different prospect, even to meet the Bridegroom in the air, before evil shall have reached its culminating point, and, therefore, before the divine judgement shall be poured forth thereon. The Church of God looks not for the burning up of the world, but for the arising of "the bright and morning Star."

Now, in whatever way we look at the future, from whatever point of view we contemplate it, whether the object, which presents itself to the soul's vision be the Church in glory, or the world in flames, the coming of the Bridegroom, or the breaking in of the thief, the morning Star, or the scorching sun, the translation, or the deluge, we must feel the unspeakable importance of attending to God's present testimony in grace, to lost sinners. "Now is the accepted time; behold, now is the day of salvation." (2 Cor. 6:2)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imputing their trespasses to them." (2 Cor. 5:19) He is reconciling now, He will be judging by and by; it is all grace now; it will be all wrath then; He is pardoning sin now, through the cross; He will punish it then, in hell, and that for ever. He is sending out a message of purest, richest, freest grace. He is telling sinners of an accomplished redemption through the precious sacrifice of Christ. He is declaring that all is done. He is waiting to be gracious. "The long-suffering of our Lord is salvation." "The Lord is not slack concerning his promise as some men count slackness, but is long-suffering to usward, not willing that any should perish, that all should come to repentance." (2 Peter 3) All this makes the present moment one of peculiar solemnity. Unmingled grace declared! — unmingled wrath impending. How solemn! How deeply solemn!

And, then, with what profound interest should we mark the unfolding of the divine purposes! Scripture sheds its light upon these things; and such a light, too, that we need not, as another has said," vacantly stare on passing events, as those, who know not where they are, and whither they are going." We should accurately know our bearings. We should fully understand the direct tendency of all the principles now at work. We should be well aware of the vortex, toward which all the tributary streams are rapidly flowing on. Men dream of a golden age; they promise themselves a millennium of the arts and science; they feed upon the thought, that "tomorrow shall be as this day, and more abundant." But, oh! how utterly vain are all those thoughts, dreams, and promises. Faith can see the clouds gathering thickly around the world's horizon. Judgement is coming. The day of wrath is at hand. The door will soon be shut. The "strong delusion" will soon set in, with terrible intensity. How needful, then, it is, to raise a warning voice — to seek, by faithful testimony, to counteract man's pitiable self-complacency. True, in so doing, we shall be exposed to the charge which Ahab brought against Micaiah, of always prophesying evil: but no matter for that. Let us prophesy what the word of God prophesies, and let us do this simply for the purpose of "persuading men." The Word of God only removes from beneath our feet a hollow foundation, for the purpose of placing instead thereof, a foundation which can never be moved. It only takes away from us a delusive hope, to give us, instead, "a hope which makes not ashamed." It takes away "a broken reed," to give us "the rock of ages." It sets aside "a broken cistern, which can hold no water," to set in its place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This is true love. It is God's love. He will not cry "peace, peace, when there is no peace;" nor "daub with untempered mortar." He would have the sinner's heart resting; sweetly in His own eternal Ark of safety, enjoying a present communion with Himself, and fondly cherishing; the hope, that, when all the ruin, the desolation, and the judgement, have passed away, it shall rest with him in a restored creation.

We shall now return to Noah, and contemplate him in a new position. we have seen him building the ark, we have seen him in the ark, and we shall now view him going forth of the ark, and taking his place in the new world.* "And God remembered Noah." The strange work of judgement being over, the saved family, and all in association with them, come into remembrance. "God made a wind to pass over the earth; and the waters assuaged; the fountains also of deep and the windows of heaven were stopped, and the rain from heaven was restrained. The beams of sun now begin to act upon a world that had been baptised with a baptism of judgement. Judgement is God's "strange work." He delights not in, though He is glorified by, it. Blessed be His name, He is ever ready to leave the place of judgement, and enter that of mercy, because He delights in mercy.

{*I would here mention, for my reader's prayerful consideration, a thought very familiar to the minds of those who have especially given themselves to the study of what is called "dispensational truth." It has reference to Enoch and Noah. The former was taken away, as we have seen. before the judgement came; whereas the latter was carried through the judgement. Now, it is thought that Enoch is a figure of the Church, who shall be taken away before human evil reaches its climax, and before the divine judgement falls thereon. Noah, on the other hand, is a figure of the remnant of Israel, who shall be brought through the deep waters of affliction. and through the fire of judgement, and led into the full enjoyment of millennial bliss, in virtue of God's everlasting covenant. I may add, that I quite receive this thought in reference to those two Old Testament fathers. I consider that it has the full support of the general scope and analogy of Holy Scripture.}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forty days, that Noah opened the window of the ark which he had made: and he sent forth a raven, which went forth, to and fro, until the waters were dried up from off the earth." The unclean bird made its escape, and found, no doubt, a resting-place on some floating carcass. It sought not the ark again. Not so the dove. "She found no rest for the sole of her foot, and she returned to him into the ark … and again he sent forth the dove out of the ark: and the dove came in to him, in the evening; and, lo, in her mouth was an olive leaf, pluckt off." Sweet emblem of the renewed mind, which, amid the surrounding desolation, seeks and finds its rest and portion in Christ; and not only so, but also lays hold of the earnest of the inheritance, and furnishes the blessed proof, that judgement has passed away, and that a renewed earth is coming fully into view. The carnal mind, on the contrary, can rest in anything and everything but Christ. It can feed upon all uncleanness. "The olive leaf" has no attraction for it. It can find all it needs in a seen of death, and hence is not occupied with the thought of a new world and its glories; but the heart, that is taught and exercised by the Spirit of God, can only rest and rejoice in that in which He rests and rejoices. It rests in the Ark of His salvation "until the times of the restitution of all things." May it be thus with you and me, beloved render; may Jesus be the abiding rest and portion of our hearts, that so we may not seek them in a world which is under the judgement of God. The dove went back to Noah, and waited for his time of rest: and we should ever find our place with Christ, until the time of His exaltation, and glory, in the ages to come. "He that shall come, will come, and will not tarry." ALL we want, as to this, is a little patience. May God direct our hearts into His love, and into "the patience of Christ."

"And God spake to Noah, saying, go forth of the ark." The same God that had said, "make thee an ark," and "come thou into the ark, "now says, "go forth of the ark." "And Noah went forth … and builded an altar to the Lord." ALL is simple obedience. There is the obedience of faith and the worship of faith: both go together. The altar is erected, where, just before, all had been a scene of death and judgement. The ark had borne Noah and his family safely over the waters of judgement. It had carried him from the old into the new world, where he now takes his place as a worshipper.* And, be it observed, it was "to the Lord" he erected his altar. Superstition would have worshipped the ark, as being the means of salvation. It is ever the tendency of the heart to displace God by His ordinances. Now, the ark was a very marked and manifest ordinance; but Noah's faith passed beyond the ark to the God of the ark; and, hence, when he stepped out of it, instead of casting back a lingering look at it, or regarding it as an object of worship or veneration, he built an altar to the Lord, and worshipped Him: and the ark is never heard of again.

{*It is interesting to look at this entire subject of the ark and deluge in connection with that most important and deeply significant ordinance of baptism. A truly baptised person, that is, one who as the apostle says, "obeys from the heart that type of doctrine to which he is delivered" is one who has passed from the old world into the new, in spirit and principle, and by faith. The water rolls over his person, signifying that his old man is buried, that his place in nature is ignored — that his old nature is entirely set aside; in short, that he is a dead man. When he is plunged beneath the water, expression is given to the fact, that his name, place and existence, in nature, are put out of sight; that the flesh, with all that pertained thereto, its sins, its iniquities, its liabilities, is buried in the grave of Christ, and never can come into God's sight again.

Again when he rises up out of the water, expression is given to the truth that he only comes up as the possessor of a new life, even the resurrection of Christ. If Christ had not been raised from the dead, the believer could not come up out of the water, but should remain buried beneath its surface, as the simple expression of the place which righteously belongs to nature. But inasmuch as Christ rose from the dead in the power of a new life, having entirely put away our sins, we also come up out of the water; and, in so doing set, forth the fact that we are put, by the grace of God, and through the death of Christ, in full possession of a new life to which divine righteousness inseparably attaches. "We are buried with Him by baptism into death; that like as Christ was raised up from the dead by the glory of the Father, even so we also should walk in newness of life." (See Rom 6 and Col 2. passim. Comp. also 1 Peter 3:18-22) All this makes the institution of baptism one of immense importance, and pregnant with meaning}

This teaches us a very simple, but, at the same time, a very seasonable lesson. The moment the heart lets slip the reality of God Himself, there is no placing a limit to its declension; it is on the highway to the grossest forms of idolatry. In the judgement of faith, an ordinance is only valuable as it conveys God, in living power, to the soul; that is to say, so long as faith Can enjoy Christ therein, according to His own appointment. Beyond this, it is worth just nothing; and if it, in the smallest degree, comes between the heart and His precious work and His glorious Person, it ceases to be an ordinance of God, and becomes an instrument of the devil. In the judgement of superstition, the ordinance is everything, and God is shut out; and the name of God is only made use of to exalt the ordinance, and Give it a deep hold of the human heart, and a mighty influence over the human mind. Thus it was that the children of Israel worshipped the brazen serpent. That, which had once been a channel of blessing to them, because used of God, became, when their hearts had departed from the Lord, an object of superstitious veneration; and Hezekiah had to break it in pieces, and call it "a piece of brass. In itself it was only a "Nehushtan," but, when used of God, it was a means of rich blessing. Now, faith owned it to be what divine revelation said it was; but superstition, throwing, as ever does, divine revelation overboard, lost the real purpose of God in the thing, and actually made a god of the thing itself. (See 2 Kings 18:4)

And, my reader, is there not a deep lesson in all this for the present age? I am convinced there is. We live in an age of ordinances. The atmosphere, which enwraps the professing church, is impregnated with the elements of a traditionary religion, which robs the soul of Christ and His divinely full salvation. It is not that human traditions boldly deny that there is such a person as Christ, or such a thing as the cross of Christ: were they to do so, the eyes of many might be opened. However, it is not thus. The evil is of a far more invidious and dangerous character. Ordinances are added to Christ and the work of Christ, The sinner is not saved by Christ alone, but by Christ and ordinances. Thus he is robbed of Christ altogether; for it will, assuredly be found that Christ and ordinances will prove in the sequel, to be ordinances, and not Christ. This is a solemn consideration for all who stand up for a religion of ordinances. "If ye be circumcised Christ will profit you nothing." It must be Christ wholly, or not at all. The devil persuades men, that they are honouring Christ when they make much of His ordinances. whereas, all the while, he knows full well, that they are, in reality, setting Christ entirely aside, and deifying the ordinance. I would only repeat here a remark which I have made elsewhere, namely, that superstition makes everything of the ordinance; infidelity, and mysticism, make nothing of it; faith uses according to divine appointment.

But I have already extended this section far beyond the limit which I had prescribed for it. I shall, therefore, close it with a hasty glance at the contents of Gen. 9. In it we have the new covenant, under which creation was set, after the deluge, together with the token of that covenant.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Observe, God's command to man, on his entrance into the restored earth, was to refill that earth; not parts of the earth, but the earth. He desired to have men dispersed abroad, over the face of the world, and not relying upon their own concentrated energies. We shall see, in Gen. 11, how man neglected all this.

The fear of man is now lodged in the heart of every other creature. Henceforth the service, rendered by the inferior orders of creation to man, must be the constrained result of "fear and dread." In life, and in death, the lower animals were to be at the service of man. ALL creation is delivered, by God's everlasting covenant, from the fear of a second deluge. Judgement is never again to take that shape. "The world that then was, being overflowed with water, perished: but the heavens and the earth, which are now, by the same word are kept in store, reserved to fire against the day of judgement and perdition of ungodly men." The earth was once purged with water; and it will be again purged by fire; and in this second purgation none will escape, save those, who have fled for refuge to Him, who has passed through the deep waters of death, and met the fire of divine judgement.

"And God said, This is the token of the covenant ..I do set my bow in the cloud … and I will remember my covenant," The whole creation rests, as to its exemption from a second deluge, on the eternal stability of God's covenant, of which the bow is the token; and it is happy to bear in mind, that when the bow appears, the eye of God rests upon it; and man is cast not upon his own imperfect and most uncertain memory, but upon God's. "I" says God, "Will remember." "How sweet to think of what God will, and what He will not remember! He will remember His own covenant, but He will not remember His people's sins. The cross, which ratifies the former, puts away the latter. The belief of this gives peace to the troubled and uneasy conscience.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I bring a cloud over the earth, that the bow shall be seen in the cloud." Beautiful and most expressive emblem! The beams of the sun, reflected from that which threatens judgement, tranquillise the heart, as telling of God's covenant, God's salvation, and God's remembrance. Precious, most precious sunbeams, deriving additional beauty from the very cloud which reflects them! How forcibly does this bow in the cloud remind us of Calvary. There a cloud indeed — a dark, thick, heavy cloud of judgement discharging itself upon the sacred head of the Lamb of God  - a cloud so dark, that even at mid-day "there was darkness over all the earth." But, blessed be God, faith discerns, in that heaviest cloud that ever gathered, the most brilliant and beauteous bow that ever appeared, for it sees the bright beams of God's eternal love darting through the awful gloom, and reflected in the cloud. It hears, too, the words, "it is finished," issuing from amid the darkness, and in those words it recognises the perfect ratification of God's everlasting counsels, not only as to creation, but the tribes of Israel and the Church of God.

The last paragraph of this chapter presents a humiliating spectacle. The lord of creation fails to govern himself: "And Noah began to be an husbandman, and he planted a vineyard;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within his tent." What a condition for Noah, the only righteous man, the preacher of righteousness, to be found in. Alas! what is man? Look at him where you will, and you see only failure. In Eden, he fails; in the restored earth, he fails; in Canaan, he fails; in the Church, he fails; in the presence of millennial bliss and glory, he fails. He fails everywhere, and in all things: there is no good thing in him. Let his advantages be ever so great, his privileges ever so vast, his position ever so desirable, he can only exhibit failure and sin.

We must, however, look at Noah in two ways, namely, as a type, and as a man; and while the type is full of beauty and meaning, the man is full of sin and folly; yet the Holy Ghost has written these words, "Noah was a just man, and perfect in his generation; and Noah walked with God." Divine grace had covered all his sins, and clothed his person with a spotless robe of righteousness. Though Noah exposed his nakedness, God did not see it, for He looked not at him, in the weakness of his own condition, but in the full power of divine and everlasting righteousness. Hence we may see how entirely astray — how totally alienated from God and His thoughts, Ham was, in the course he adopted; he evidently knew nothing of the blessedness of the man, whose iniquity is forgiven, and his sin covered; on the contrary, Shem and Jepheth exhibit, in their conduct, a fine specimen of the divine method of dealing with human nakedness; wherefore they inherit a blessing, whereas Ham inherits a curse.

Genesis 10

This section of our book records the generations of Noah's three sons, noticing, especially, Nimrod, the founder of the kingdom of Babel, or Babylon, a name which occupies a very prominent place on the page of inspiration. Babylon is a well-known name — a well known influence. From Genesis 10 to Revelation 18 Babylon, again and again, appears before us, and always as something decidedly hostile to those who occupy, for the time being, the position of public testimony for God. Not that we are to look upon the Babylon of Old Testament scripture as identical with the Babylon of the apocalypse. By no means. I believe the former is a city; the latter, a system; But both the city and system exert a powerful influence against God's people. Hardly had Israel entered upon the wars of Canaan when "a Babylonish garment" brought defilement and sorrow, defeat and confusion, into the host. This is the earliest record of Babylon's pernicious influence upon the people of God; but every student of Scripture is aware of the place which Babylon gets throughout the entire history of Israel.

This would not be the place to notice, in detail, the various passages in which this city is introduced. I would only remark, here, that whenever God has a corporate witness on the earth, Satan has a Babylon to mar and corrupt that witness. When God connects His name with a city on the earth, then Babylon takes the form of a city; and when God connects His name with the Church, then Babylon takes the form of a corrupt religious system, called "the great whore," "the mother of abominations," &c. In a word, Satan's Babylon is always seen as the instrument moulded and fashioned by his hand, for the purpose of counteracting the divine operations, whether in Israel of old, or the Church now. Throughout the Old Testament Israel and Babylon are seen, as it were, in opposite scales: when Israel is up, Babylon is down; and when Babylon is up, Israel is down. Thus, when Israel had utterly failed, as Jehovah's witness, "the king of Babylon broke his bones," and swallowed him up. The vessels of the house of God, which ought to have remained in the city of Jerusalem, were carried away to the city of Babylon. But Isaiah, in his sublime prophecy, leads us onward to the opposite of all this. He presents, in most magnificent strains, a picture, in which Israel's star is in the ascendant, and Babylon entirely sunk.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e day that the Lord shall give thee rest from thy sorrow, and from thy fear, and from the hard bondage wherein thou wast made to serve, that thou shalt take up this proverb against the king of Babylon, and say, How has the oppressor ceased! the golden city ceased! … since thou art laid down, no hewer is come up against us." (Isa. 14:3-8.)

Thus much as to the Babylon of the Old Testament. Then, as to the Babylon of Revelation, my reader has only to turn to Rev. 17 and Rev. 18 to see her character and end. She is presented in marked contrast with the bride, the Lamb's wife; and as to her end, she is cast as a great millstone into the sea; after which we have the marriage of the Lamb, — with all its accompanying bliss and glory.

However, I could not attempt to pursue this most interesting subject here: I have merely glanced at it in connection with the name of Nimrod. I feel assured that my reader will find himself amply repaid, for any trouble he may take in the close examination of all those scriptures, in which the name of Babylon is introduced. We shall now return to our chapter.

"And Cush begat Nimrod: he began to be a mighty one in the earth. He was a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wherefore it is said, Even as Nimrod the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And the beginning of his kingdom was Babel, and Erech, and Accad, and Calneh, in the land of Shinar." Here, then, we have the character of the founder of Babylon. He was" a mighty one in the earth" — "a mighty hunter before the Lord." Such was the origin of Babylon; and its character, throughout the entire book of God, remarkably corresponds therewith. It is always seen as a mighty influence in the earth, acting in positive antagonism to everything which owes its origin to heaven; and it is not until this Babylon has been totally abolished, that the cry is heard, amid the hosts above, "'Alleluia'; for the Lord God omnipotent reigns" Then all Babylon's mighty hunting will be over for ever, whether it be its hunting of wild beasts, to subdue them; or its hunting of souls, to destroy them. ALL its might, and all its glory, all its pomp and pride, its wealth and luxury, its light and joy, its glitter and glare, its powerful attractions and wide-spread influence, shall have passed away for ever. She shall be swept with the besom of destruction, and plunged in the darkness, the horror and desolation, of an everlasting night. "How long, O Lord?"

Genesis 11

This is a chapter of very deep interest to the spiritual mind. It records two great facts, namely, the building of Babel, and the call of Abraham; or, in other words, man's effort to provide for himself, and God's provision made known to faith; man's attempt to establish himself in the earth, and God's calling a man out of it, to find his portion and his home in heaven.

"And the whole earth was of one language and of one speech. And it came to pass, as they journeyed from the east, that they found a plain in the land of Shinar; and they dwelt there … And they said, Go to, let us build us a city, and a tower, whose top may reach to heaven; and let us make us a name, lest we be scattered abroad up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The human heart ever seeks a name, a portion, and a centre in the earth. It knows nothing of aspirations after heaven, heaven's God, or heaven's glory. Left to itself, it will ever and find its objects in this lower world; ever "build beneath the skies." It needs God's call, God's revelation, and God's power, to lift the heart above this present world, for man is a grovelling creature, alienated from heaven, and allied to earth. In the scene now before us, there is no acknowledgement no looking up to, or waiting on, Him; nor was it the thought of the human heart to set up a place in which God might dwell — to gather materials for the purpose of building a habitation for Him — alas! no; His name is never once mentioned. To make a name for himself was man's object on the plain of Shinar; and such has been his object ever since. Whether we contemplate man on the plain of Shinar, or on the banks of the Tiber, we find him to be the same self-seeking, self-exalting, God-excluding creature, throughout. There is a melancholy consistency in all his purposes his principles, and his ways; he ever seeks to shut out God, and exalt himself.

Now, in what light soever we view this Babel confederacy, it is most instructive to see in it the early display of mans genius and energies regardless of God. In looking down along the stream of human history, we may easily perceive a marked tendency to confederacy or association. Man seeks, for the most part to compass his great ends in this way. Whether it be in the way of Philanthropy, Religion, or Politics, nothing can be done without an association of men regularly organised. It is well to see this principle — well to mark its incipient working — to see the earliest model which the page of inspiration affords of a human association, as exhibited on the plain of Shinar, in its design, its object, its attempt, its overthrow. If we look around us, at the present moment, we see the whole scene filled with associations. To name them were useless, for they are as numerous as are the purposes of the human heart. But it is important to mark, that the first of all these was the Shinar association,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human interests, and the exaltation of the human name — objects which may well be set in competition with any that engage the attention of this enlightened and civilised age. But, in the judgement of faith, there is one grand defect, namely, God is shut out; and to attempt to exalt man, without God, is to exalt him to a dizzy height, only that he may be dashed down into hopeless confusion, and irretrievable ruin. The Christian should only know one association, and that is,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incorporated by the Holy Ghost, who came down from heaven as the witness of Christ's glorification, to baptise believers into one body, and constitute them God's dwelling-place. Babylon is the very opposite of this, in every particular; and she becomes at the close, as we know, "the habitation of devils." (See Rev. 18)

"And the Lord said, Behold, the people is one, and they have all one language; and this they begin to do: and now nothing will be restrained from them, which they have imagined to do. Go to, let us go down, and there confound their language, that they may not understand one another's speech. So the Lord scattered them abroad from thence upon the face of all the earth; and they left off to build the city." Such was the end of man's first association. Thus it will be to the end, "Associate yourselves, O ye people, and ye shall be broken in pieces … gird yourselves, and ye shall be broken in pieces; gird yourselves, and ye shall be broken in pieces." (Isa. 8:9) How different it is when God associates men! In the second chapter of Acts, we see the blessed One coming down, in infinite grace, to meet man, in the very circumstances in which his sin had set him. The Holy Ghost enabled the messengers of grace to deliver their message in the very tongue wherein each was born. Precious proof this, that God desired to reach man's heart with the sweet story of grace! The law from the fiery mount was not thus promulgated. When God was telling what man ought to be, He spoke in one tongue; but when He was telling what He Himself was, He spoke in many. Grace broke through the barrier which man's pride and folly had caused to be erected, in order that every man might hear and understand the glad tidings of salvation — the wonderful works of God." And to what end was this? Just to associate men on God's ground, round God's centre, and on God's principles. It was to give them, in reality, one language, one centre, one object, one hope, one life. It was to gather them in such a way as that they never should be scattered or confounded again; to give them a name and a place which should endure for ever; to build for them a tower and city which should not only have their top reaching to heaven, but their imperishable foundation laid in heaven, by the omnipotent hand of God Himself. It was to gather them around the glorious Person of a risen and highly exalted Christ, and unite them all in one grand design of magnifying and adoring Him.

If my reader will turn to Revelation 7, he will find, at the close thereof, "ALL nations, and kindreds, and people, and tongues," standing round the Lamb; and, with one voice, ascribing all praise to Him. Thus the three scriptures may he read in most interesting and profitable connection. In Gen. 11 God gives various tongues as an expression of His judgement; in Acts 2 He gives various tongues as an expression of grace; and in Rev. 7 we see all those tongues gathered round the Lamb, in glory. How much better it is, therefore, to find our place in God's association than in man's! The former ends in glory, the latter in confusion; the former is carried forward by the energy of the Holy Ghost, the latter by the unhallowed energy of fallen man; the former has for its object the exaltation of Christ, the latter has for its object the exaltation of man, in some way or other.

Finally, I would say, that all who sincerely desire to know the true character, object, and issue of human associations, should read the opening verses of Genesis 11; and, on the other hand, all who desire to know the excellency, the beauty, the power, the enduring character of divine association, should look at that holy, living, heavenly corporation, which is called, in the New Testament,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the body of Christ, the bride of the Lamb.

May the Lord enable us to look at, and apprehend, all these things, in the power of faith; for only in this way can they profit our souls. Points of truth, however interesting; scriptural knowledge, however profound and extensive; Biblical criticism, however accurate and valuable, may all leave the heart barren, and the affections cold. We want to find Christ in the Word; and, having found Him, to feed on Him by faith: This would impart freshness, unction, power, vitality, energy, and intensity, all of which we deeply stand in need of, in this day of freezing formalism. What is the value of a chilling orthodoxy without a living Christ, known in all His powerful, personal attractions? No doubt, sound doctrine is immensely important. Every faithful servant of Christ will feel himself imperatively called upon to "hold fast the form of sound words." But, after all, a living Christ is the very soul and life, the joints and marrow, the sinews and arteries, the essence and substance of sound doctrine. May we,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see more beauty and preciousness in Christ, and thus be weaned from the spirit and principles of Babylon.

We shall, God willing, consider the remainder of Gen. 11 in the next section.

Genesis 12

The book of Genesis is, for the most part, taken up with the history of seven men, namely, Abel, Enoch, Noah, Abraham, Isaac, Jacob, and Joseph. There is, I doubt not, a specific line of truth brought out in connection with each of those men. Thus, for example, In Abel me have the great foundation truth of man's coming to God, in the way of atonement — atonement apprehended by faith. In Enoch, we have the proper portion and hope of the heavenly family; while Noah presents to us the destiny of the earthly family. Enoch was taken to heaven before the judgement came; Noah was carried through the judgement into a restored earth Thus, in each, we have a distinct character of truth, and, as a consequence, a distinct phase of faith. My reader can pursue the subject fully, in connection with Hebrews 11; and I feel assured he will find much interest and profit, in so doing. We shall now proceed with our immediate theme, namely, the call of Abraham.

By comparing Gen. 12:1, Gen. 11:31, with Acts 7:2-4, we learn a truth of immense practical value to the soul. "The Lord had said to Abram, Get thee out of thy country, and from thy kindred, and from thy father's house, to a land that I will show thee. (Gen. 12:1) Such was the communication made to Abraham — a communication of the most definite character, designed of God to act upon Abraham's heart and conscience. "The God of glory appeared to our father Abraham, when he was in Mesopotamia, before he dwelt in Charran, and said to him, Get thee out of thy country, and from thy kindred, and come into a land that I shall show thee. Then went he forth out of the land of the Chaldeans, and dwelt in Charran, (or Haran;) and from thence, when his father was dead, he removed him into this land wherein ye now dwell." (Acts 7:2-4) The result of this communication is given in Gen. 11:31, "And Terah took Abram his son, and Lot the son of Haran, his son's son, and Sarai his daughter-in-law, his son Abram's wife; and they went forth with them from Ur of the Chaldees, to go the land of Canaan: and they came to Haran, and dwelt there … and Terah died in Haran."

From all these passages taken together, we learn that ties of nature hindered the full response of Abraham's soul to the call of God. Though called to Canaan, he, nevertheless, tarried at Haran, till nature's was snapped by death, and then, with unimpeded step he made his way to the place to which "the God glory" had called him. This is full of meaning. influences of nature are ever hostile to the full and practical power of "the calling of God." We are sadly prone to take lower ground than that which the divine call would set before us. It needs great simplicity and integrity of faith to enable the soul to rise to the height of God's thoughts, and to make our own of that which He reveals.

The apostle's prayer (Eph. 1:15-22) demonstrates how fully he, by the Holy Ghost, entered into the difficulty with which the Church would ever have to contend in seeking to apprehend "the hope of God's calling and the riches of the glory of his inheritance in the saints;" because, evidently, if we fail to apprehend the calling, we cannot walk worthy" thereof. I must know where I am called to go, before I can go thither. Had Abraham's soul been fully under the power of the truth" that God's calling was to Canaan, and that too, lay "his inheritance," he could not have remained in Charran. And so with us. If we are led by the Holy Ghost into the understanding of the truth, that we are called with a heavenly calling; that our home, our portion, our hope, our inheritance, are all above, where Christ sits at God's right hand," we could never be satisfied to maintain a standing, seek a name, or lay up an inheritance, on the earth. The two things are incompatible: this is the true way to look at the matter. The heavenly calling is not an empty dogma, a powerless theory, nor a crude speculation. It is either a divine reality, or it is absolutely nothing. Was Abraham's call to Canaan a speculation? Was it a mere theory about which he might talk or argue, while, at the same time, he continued in Charran? Assuredly not. It was a truth, a divine truth, a powerfully practical truth. He was called to Canaan, and God could not, possibly, sanction his stopping short thereof. Thus it was with Abraham, and thus it is with us. If we would enjoy the divine sanction and the divine presence, me must be seeking, by faith, to act upon the divine call. That is to say, we must seek to reach, in experience, in practice, and moral character, the point to which God has called us, and that point is full fellowship with His own Son — fellowship with Him in His rejection below, fellowship with Him in His acceptance above.

But, as in Abraham's case, it was death that broke the link by which nature bound him to Charran; so, in our case, it is death which breaks the link by which nature ties us down to this present world. We must realise the truth that we have died in Christ, our head and representative — that our place in nature, and in the world, is amongst the things that were — that the cross of Christ is to us what the Red sea was to Israel, namely, that which separates us, for ever, from the land of death and judgement. Thus only shall we be able to walk, in any measure, "worthy of the calling wherewith we are called" — our high, our holy, our heavenly calling — our "calling of God in Christ Jesus."

And, here, I would dwell, for a little, on the cross of Christ in its two grand, fundamental phases, or in other words, the cross as the basis of our worship and our peace and our testimony, our relation with God, and our relation with the world. If, as a convicted sinner, I look at the cross of the Lord Jesus Christ I behold in it the everlasting foundation of my peace, I see my "sin" put away, as to the root or principle thereof, and I see my "sins" borne. I see God to be in very deed, "for me," and that, moreover, in the very condition in which my convicted conscience tells me I am. The cross unfolds God as the sinner's Friend. It reveals Him in that most wondrous character, as the righteous Justifier of the most ungodly sinner. Creation never could do this. Providence never could do this. Therein I may see God's power, His majesty, and wisdom: but what if all these things should be ranged against me? Looked at, in themselves, abstractly they would be so, for I am a sinner; and power, majesty, and wisdom, could not put away my sin, nor justify God in receiving me.

The introduction of the cross, however, changes the aspect of things entirely. There I find God dealing with sin in such a manner us to glorify Himself infinitely. There I see the magnificent display and perfect harmony of all the divine attributes. I see love, and such love as captivates and assures my heart, and weans it, in proportion as I realise it, from every other object. I see wisdom, and such wisdom as baffles devils and astonishes angels. I see power, and such power as bears down all opposition. I see holiness, and such holiness as repulses sin to the very furthest point of the moral universe, and gives the most intense expression of God's abhorrence thereof, that could possibly be given. I see grace, and such grace as sets the sinner in the very presence of God — yes, puts him into His bosom. Where could I see all these things but in the cross? Nowhere else. Look where you please, and you cannot find aught that so blessedly combines those two great points, namely,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How precious, therefore, is the cross, in this its first phase, as the basis of the sinner's peace, the basis of his worship, and the basis of his eternal relationship with the God who is there so blessedly and so gloriously revealed? How precious to God, as furnishing Him with a righteous ground on which to go in the full display of all His matchless perfections, and in His most gracious dealings with the sinner! So precious is it to God that, as a writer has well remarked, "All that He has said — all that He has done, from the very beginning, indicates that it was ever uppermost in His heart. And no wonder! His dear and well-beloved Son was to hang there, between heaven and earth, the object of all the shame and suffering that men and devils could heap upon Him, because He loved to do His Father's will, and redeem the children of His grace. It will be the grand centre of attraction, as the fullest expression of His love, throughout eternity."

Then, as the basis of our practical discipleship and testimony, the cross demands our most profound consideration. In this aspect of it, I need hardly say, it is as perfect as in the former. The same cross which connects me with God, has separated me from the world. A dead man is, evidently, done with the world; and the believer, having died in Christ, is done with the world; and, having risen with Christ, is connected with God, in the power of a new life, a new nature. Being thus inseparably linked with Christ, he, of necessity, participates in His acceptance with God, and in rejection by the world. The two things go together. The former makes him a worshipper and a citizen in heaven, the latter makes him a witness and a stranger on earth. That brings him inside the veil; this puts him outside the camp. The one is as perfect as the other. If the cross has come between me and sins, it has just as really come between me and the world. In the former case, it puts me into the place of peace with God; in the latter, it puts me into the place of hostility with the world, i.e., in a moral point of view; though, in another sense, it makes me the patient, humble witness of that precious, unfathomable, eternal grace which is set forth in the cross.

Now the believer should clearly understand, and rightly distinguish between, both the above phases of the cross of Christ. He should not profess to enjoy the one while he refuses to enter into the other. If his ear is open to hear Christ's voice within the veil, it will be open also to hear His voice outside the camp. If he enters into the atonement which the cross has accomplished, he should also realise the rejection which it necessarily involves. The former flows out of the part which God had in the cross; the latter, out of the part which man had therein. It is our happy privilege, not only to be done with our sins, but to be done with the world also. All this is involved in the doctrine of the cross. Well, therefore, might the apostle say, "God forbid that I should glory, save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by which the world is crucified to me, and I to the world." Paul looked upon the world as a thing which ought to be nailed to the cross; and the world, in having crucified Christ, had crucified all who belonged to Him. Hence there is a double crucifixion, as regards the believer and the world; and were this fully entered into, it would prove the utter impossibility of ever amalgamating the two. Beloved reader, let us deeply, honestly, and prayerfully ponder these things; and may the Holy Ghost give us the ability to enter into the full practical power of both the phases of the cross of Christ.

We shall, now, return to our theme.

We are not told how long Abraham tarried at Haran; yet God graciously waited on His servant until, freed from nature's clog, he could fully obey His command. There was, however, no accommodation of that command to the circumstances of nature. This would never do. God loves His servants too well to deprive them of the full blessedness of entire obedience. There was no fresh revelation to Abraham's soul during the time of his sojourn in Haran. It is well to see this. We must act up to the light already communicated, and then God will give us more. "To him that has shall more be given." This is God's principle. Still, we must remember, that God will never drag us along the path of true-hearted discipleship. This would greatly lack the moral excellency which characterises all the ways of God. He does not drag, but draw, us along the path which leads to ineffable blessedness in Himself; and if we do not see that it is for our real advantage to break through all the barriers of nature, in order to respond to God's call, we forsake our own mercies. But, alas! our hearts little enter into this. We begin to calculate about the sacrifices, the hindrances, and the difficulties, instead of bounding along the path, in eagerness of soul, as knowing and loving the One whose call has sounded in our ears.

There is much true blessing to the soul in every step of obedience, for obedience is the fruit of faith; and faith puts us into living association and communion with God Himself. Looking at obedience, in this light, we can easily see how distinctly it is marked off, in every feature of it, from legality. This latter sets a man, with the entire burden of his sins on him, to serve God, by keeping the law; hence, the soul is kept in constant torture, and, so far from running in the path of obedience, it has not even taken the very first step. True obedience, on the contrary, is simply the manifestation or outflow of a new nature, communicated in grace. To this new nature God graciously imparts precepts for its guidance; and it is perfectly certain that the divine nature, guided by the divine precepts, can never, by any possibility, resolve itself into legality. What constitutes legality is the old nature taking up God's precepts and assaying to carry them out. To attempt to regulate man's fallen nature, by God's pure and Holy law, is as useless and absurd as anything can be. How could fallen nature breathe an atmosphere so pure? Impossible. Both the atmosphere and the nature must be divine.

But not only does the blessed God impart a divine nature to the believer, and guide that nature by His heavenly precepts, He also sets before it suited hopes and expectations. Thus, in Abraham's case, The God of glory appeared to him." And for what purpose? To set before His soul's vision an attractive object — "a land that I will show thee." This was not compulsion, but attraction. God's land was, in the judgement of the new nature — the judgement of faith far better than Ur, or Charran: and albeit, he had not seen the land, yet inasmuch as it was God's land, faith judged it to be worth having, and, not only worth having, but, also, fully worth the surrender of present things. Hence, we read, "by faith Abraham, when he was called to go out into a place which he should after receive as an inheritance, obeyed, and he went out, not knowing whither he went." That is to say, "he walked by faith, not by sight." Though he had not seen with his eyes, he believed with his heart, and faith became the great moving spring in his soul. Faith rests on a far more solid ground than the evidence of our senses, and that is, the word of God. Our senses may deceive us, but Gods word never can.

Now, the entire truth of the divine nature, together with the precepts which guide, and the hopes which animate it — the whole of the divine doctrine respecting these things, is completely thrown overboard by the system of legalism. The legalist teaches that we must surrender earth in order to get heaven. But how can fallen nature surrender that to which it is allied? How can it be attracted by that in which it sees no charms? Heaven has no charms for nature; yea, it is the very last place it would like to be found in. Nature has no taste for heaven, its occupations, or its occupants. Were it possible for nature to find itself there, it would be miserable. Thus, then, nature has no ability to surrender earth, and no desire to get heaven. True, — it would be glad to escape hell and its ineffable torment, gloom, and misery. But the desire to escape hell, and the desire to get heaven, spring from two very different sources. The former may exist in the old nature; the latter can only be found in the new. Were there no "lake of fire," and no "worm" in hell, nature would not so shrink from it. The same principle holds good in reference to all of nature's pursuits and desires. The legalist teaches that we must give up sin before we can get righteousness. But nature cannot give up sin; and as to righteousness, it absolutely hates it. True, it would like a certain amount of religion; but it is only with the idea that religion will preserve it from hell fire. It does not love religion because of its introducing the soul to the present enjoyment of God and His ways.

How different from all this miserable system of legalism, in every phase thereof, is "the gospel of the glory of the blessed God!" This gospel reveals God Himself coming down in perfect grace, and putting away sin by the sacrifice of the cross; putting it away, in the most absolute manner, on the ground of eternal righteousness, inasmuch as Christ suffered for it, having been made sin for us. And not only is God seen putting away sin, but also imparting a new life, even the risen life of His own risen, exalted, and glorified Son, which life every true believer possesses, in virtue of being linked, in God's eternal counsels, with Him who was nailed to the cross, but is now on the throne of the Majesty in the heavens. This nature, as we have remarked, He graciously guides by the precepts of His holy word, applied in power by the Holy Ghost. He also animates it by the presentation of indestructible hopes. He reveals, in the distance, "the hope of glory" — "a city which has foundations" — "a better country, that is an heavenly" — "the many mansions" of the Father's house, on high — "golden harps" — "green palms," and "white robes" — "a kingdom which cannot be moved" — everlasting association with Himself, in those regions of bliss and light, where sorrow and darkness can never enter — the unspeakable privilege of being led, throughout the countless ages of eternity, "beside the still waters, and through the green pastures" of redeeming love. How different is all this from the legalist's notion? Instead of calling upon me to educate and manage, by the dogmas of systematic religion, an irremediably corrupt nature, in order that thereby I may surrender an earth that I love, and attain to a heaven which I hate, He, in infinite grace, and on the ground of Christ's accomplished sacrifice, bestows upon me a nature which can enjoy heaven, and a heaven for that nature to enjoy; and, not only a heaven, but Himself the unfailing spring of all heavens joy.

Such is God's most excellent way. Thus He dealt with Abraham. Thus He dealt with Saul of Tarsus. Thus He deals with us. The God of glory showed Abraham a better country than Ur or Charran. He showed Saul of Tarsus a glory so bright, that it closed his eyes to all earth's brightest glories, and caused him to count them all "but dung," that He might win that Blessed One who had appeared to him, and whose voice had spoken to his inmost soul. He saw a heavenly Christ in glory; and, throughout the remainder of his course, notwithstanding the weakness of the earthen vessel, that heavenly Christ and that heavenly glory engrossed his whole soul.

"And Abram passed through the land to the place of Sichem, to the plain of Moreh. And the Canaanite was then in the land." The presence of the Canaanite in God's land would, necessarily, prove a trial to Abraham. It would be a demand upon his faith and hope, an exercise of heart, a trial of patience. He had left Ur and Charran behind, and come into the country of which "the God of glory" had spoken to him, and there he finds "the Canaanite." But there, too, he finds the Lord. "And the Lord appeared to Abram, and said,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The connection between the two statements is beautiful and touching. "The Canaanite was then in the land," and lest Abraham's eye should rest upon the Canaanite, the present possessor of the land, Jehovah appears to him as the One who was going to give the land to him and to his seed for ever. Thus Abraham was taken up with the Lord, and not with the Canaanite. This is a full of instruction for us. The Canaanite in the land is the expression of the power of Satan; but, instead of being occupied with Satan's power to keep us out of the inheritance, we are called to apprehend Christ's power to bring us in. "We wrestle, not with flesh and blood, … but with spiritual wickedness in the heavenlies." The very sphere into which we are called is the sphere of our conflict. Should this terrify us? By no means. We have Christ there — a victorious Christ, in whom we are "more than conquerors." Hence, instead of indulging "a spirit of fear," we cultivate a spirit of worship. "And there builded he an altar to the Lord, who appeared to him." "And he removed from thence to a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The altar and the tent give us the two great features of Abraham's character. A worshipper of God, a stranger in the world — most blessed characteristics! Having nothing on earth — having our all in God. Abraham had not so much as to set his foot upon;" but he had God to enjoy, and that was enough.

However, faith has its trials, as well as its answers. It is not to be imagined that the man of faith, having pushed out from the shore of circumstances, finds it all smooth and easy sailing. By no means. Again and again, he is called to encounter rough seas and stormy skies; but it is all graciously designed to lead him into deeper and more matured experience of what God is to the heart that confides in Him. Were the sky always without a cloud, and the ocean without a ripple, the believer would not know so well the God with whom he has to do; for, alas! we know how prone the heart is to mistake the peace of circumstances for the peace of God. When everything is going on smoothly and pleasantly, our property safe, our business prosperous, our children and servants carrying themselves agreeably, our residence comfortable, our health excellent, everything, in short, just to our mind, how apt we are to mistake the peace which reposes upon such circumstances, for that peace which flows from the realised presence of Christ. The Lord knows this; and, therefore, He comes in, in one way or another, and stirs up the nest, that is, if we are found nestling in circumstances, instead of in Himself.

But, again, we are frequently led to judge of the rightness of a path by its exemption from trial, and vice versa. This is a great mistake. The path of obedience may often be found most trying to flesh and blood. Thus, in Abraham's case, he was not only called to encounter the Canaanite, in the place to which God had called him, but there was also "a famine in the land." Should he, therefore, have concluded that he was not in his right place? Assuredly not. That would have been to judge according to the sight of his eyes, the very thing which faith never does. No doubt it was a deep trial to the heart, an inexplicable puzzle to nature; but to faith it was all plain and easy. When Paul was called into Macedonia, almost the first thing he had to encounter was the prison at Philippi. This, to a heart out of communion, would have seemed a death-blow to the entire mission. But Paul never questioned the rightness of his position. He was enabled to "sing praises" in the midst of it all, assured that everything was just as it should be: and so it was; for in the prison of Philippi was one of God's vessels of mercy, who could not, humanly speaking, have heard the gospel, had not the preachers of it been thrust into the very place where he was. The devil was made, in spite of himself, the instrument of sending the gospel to the ears of one of God's elect.

Now, Abraham should have reasoned in the same way, in reference to the famine. He was in the very place in which God had set him; and, evidently, he received no direction to leave it. True, the famine was there; and, moreover, Egypt was at hand, offering deliverance from pressure; still the path of God's servant was plain. It is better to starve in Canaan, if it should be so, than live in luxury in Egypt. It is better far to suffer in God's path, than be at ease in Satan's. It is better to be poor with Christ, than rich without Him. Abraham had sheep, and oxen, and he asses, and men servants, and maid servants, and she asses, and camels." Substantial proofs, the natural heart would, doubtless, say, of the rightness of his step, in going down to Egypt. But, ah! he had no altar — no communion. Egypt was not the place of God's presence. He lost more than he gained by going thither. This is ever the case. Nothing can ever make up for the loss of our communion with God. Exemption from temporary pressure, and the accession of the greatest wealth, are but poor equivalents for what one loses by diverging a hair's breadth from the straight path of obedience. How many of us can add our amen to this? How many, in order to avoid the trial and exercise connected with God's path, have slipped aside into the current of this present evil world, and thereby brought leanness and barrenness, heaviness and gloom, into their souls? It may be they have, to use the common phrase, "made money," increased their store, obtained the world's favour, been "entreated well" by its Pharaohs, gotten a name and a position amongst men; but are these a proper equivalent for joy in God, communion liberty of heart, a pure, uncondemning conscience, a thankful, worshipping spirit, vigorous testimony, and effectual service? Alas! for the man that can think so. And yet all the above incomparable blessings have been often sold for a little ease, a little influence, a little money.

Christian reader, let us watch against the tendency to slip aside from the narrow, yet safe, the sometimes rough, yet always pleasant, path of simple, wholehearted obedience. Let us keep guard — jealous, careful guard, over "faith and a pure conscience," for which nothing can compensate. Should trial come, let us, instead of turning aside into Egypt, wait on God; and thus the trial, instead of proving an occasion of stumbling, will prove an opportunity for obedience. Let us, when tempted to slip into the course of the world, remember Him: 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that he might deliver us from this present evil world,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and our Father." (Gal. 1:4) If such was His love for us, and such His sense of the true character of this present world, that He gave Himself, in order to deliver us from it, shall we deny Him by plunging again into that from which His cross has for ever delivered us? May God Almighty forbid! May He keep us in the hollow of His hand, and under the shadow of His wings, until we see Jesus as He is, and be like Him, and with Him for ever.

Genesis 13

The opening of this chapter presents to us a subject of immense interest to the heart, namely, the true character of divine restoration. When the child of God has, in any way, declined in his spiritual condition, and lost his communion, he is in great danger, when conscience begins to work, of failing in the apprehension of divine grace, and of stopping short of the proper mark of divine restoration. Now, we know that God does everything in a way entirely worthy of Himself. Whether He creates, redeems, converts, restores, or provides, He can only act like Himself. What is worthy of Himself is, ever and only, His standard of action. This is unspeakably happy for us, inasmuch as we would ever seek to "limit the Holy One of Israel;" and in nothing are we so prone to limit Him as in His restoring grace. In the case now before us, we see that Abraham was not only delivered out of Egypt, but brought back "to the place where his tent had been at the beginning, … 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de there at the first: and there Abraham called on the name of the Lord." Nothing can satisfy God, in reference to a wanderer or backslider, but his being entirely restored. We, in the self-righteousness of our hearts, might imagine that such an one should take a lower place than that which he had formerly occupied; and so he should, were it a question of his merit or his character; but, inasmuch as it is, altogether, a question of grace, it is God's prerogative to fix the standard of restoration; and His standard is set forth in the following passage "If thou wilt return, O Israel, return to me." It is thus that God restores, and it would be unworthy of Himself to do anything else. He will either not restore at all, or else restore, in such a way, as to magnify and glorify the riches of His grace. Thus, when the leper was brought back, he was actually conducted "to the door of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hen the prodigal returned, he was set down at the table with the father. When Peter was restored, he was able to stand before the men of Israel and say, "ye denied the Holy One, and the Just" — the very thing which he had done himself, under the most aggravated circumstances. In all these cases, and many more which might be adduced, we see the perfectness of God's restoration. He always brings the soul back to Himself, in the full power of grace, and the full confidence of faith. "If thou wilt return, return to me." "Abraham came to the place where his tent had been at the beginning.

Then, as to the moral effect of divine restoration, it is most deeply practical. If legalism gets its answer in the character of the restoration, antinomianism gets its answer in the effect thereof. The restored soul will have a very deep and keen sense of the evil from which it has been delivered, and this will be evidenced by a jealous, prayerful, holy, and circumspect spirit. We are not restored in order that we may, the more lightly, go and sin again, but rather that we may "go and sin no more." The deeper my sense of the grace of divine restoration, the deeper will be my sense of the holiness of it also. This principle is taught and established throughout all scripture; but especially in two well-known passages, namely, Ps. 23:3, and 1 John 1:9; "He restores my soul: He leads me in the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And, again,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The proper path for a divinely-restored soul, is "the path of righteousness." In other words, having tasted divine grace, we walk in righteousness. To talk of grace, while walking in unrighteousness, is, as the apostle says, to turn "the grace of our God into lasciviousness." If grace reigned through righteousness to eternal life," it also manifests itself in righteousness, in the outflow of that life. The grace that forgives us our sins, cleanses us from all unrighteousness. Those things must never be separated. When taken together, they furnish a triumphant answer to the legalism and antinomianism of the human heart.

But there was a deeper trial for Abraham's heart than even the famine, namely, that arising from the company of one who, evidently, was not walking in the energy of personal faith, nor in the realisation of personal responsibility. It seems plain that Lot was, from the very beginning, borne onward rather by Abraham's influence and example, than by his own faith in God. This is a very common case. If we look down along the history of the people of God, we can easily see how that, in every great movement produced by the Spirit of God, certain individuals have attached themselves thereto who were not personally participators of the power which had produced the movement. Such persons go on for a time, either as a dead weight upon the testimony, or an active hindrance to it. Thus, in Abraham's case, the Lord called him to leave his kindred; but he brought his kindred with him. Terah retarded him in his movement, until death took him out of the way. Lot followed him somewhat further, until "the lusts of other things" overpowered him, and he entirely broke down.

The same thing is observable in the great movement of Israel out of Egypt. "A mixed multitude" followed them, and caused much defilement, weakness, and sorrow, for we read, in Numbers 11, "the mixed multitude that was among them fell a lusting: and the children of Israel also wept again, and said, who shall give us flesh to eat." So also, in the early days of the Church; and not only so, but in every revival which has taken place therein, down to the present day, many have been acted upon by various influences, which, not being divine, proved evanescent; and the persons so acted upon, sooner or later, gave way, and found their proper level. Nothing will endure but that which is of God. I must realise the link between me and the living God. I must know myself as one called of Him into the position which I occupy, else I shall have no stability, and exhibit no consistency therein. It will not do for us to follow in the track of other people, merely because it is their track. God will graciously give each a path to walk in, a sphere to move in, and a responsibility to fulfil; and we are bound to know our calling and the functions thereof, that, by His grace ministered to our souls daily, we may work therein effectually, to His glory. It matters not what our measure may be, provided it be what God has dealt to us. We may have "five talents," or we may have but "one;" still if we use the "one," with our eye fixed on the Master, we shall just be as sure to hear from His gracious lips the words, "well done," as if we had used the "five." This is encouraging. Paul, Peter, James, and John had each his peculiar measure, his special ministry; and so with all; none needs to interfere with another. A carpenter has a saw and a plane, a hammer and a chisel, and he uses each as he needs it. Nothing can be more worthless than imitation. If, in the natural world, we look at the various orders of creation, we see no imitation. All have their proper sphere, their proper functions. And if it be thus in the natural world, how much more in the spiritual. The field is wide enough for all. In every house there are vessels of various sizes and various shapes. The master wants them all.

Let us, therefore, my beloved reader, search and see whether we are walking under a divine or a human influence; whether our faith stands in the wisdom of man, or in the power of God; whether we are doing things because others have done them, or because the Lord has called us to do them; whether we are merely propped up by the example and influence of our fellow, or sustained by personal faith in God. These are serious inquiries. It is, no doubt, a happy privilege to enjoy the fellowship of our brethren; but if we are propped up by them, we shall soon make shipwreck. So also, if we go beyond our measure, our action will be strained and unsightly, uneasy and unnatural. It is very easy to see when a man is working in his place, and according to his measure. All affectation, assumption, and imitation, is contemptible in the extreme. Hence, though we cannot be great, let us be honest; and though we cannot be brilliant, let us be genuine. If a person goes beyond his depth, without knowing how to swim, he will surely flounder. If a vessel put out to sea, without being sea-worthy and in trim, it will surely be beaten back into harbour, or lost. Lot left "Ur of the Chaldees," but he fell in the plains of Sodom. The call of God had not reached his heart, nor the inheritance of God filled his vision. Solemn thought! may we ponder it deeply! Blessed be God, there is a path for each of His servants, along which shines the light of His approving countenance, and to walk therein should be our chief joy. His approval is enough for the heart that knows Him. True, we may not always be able to command the approval and concurrence of our brethren; we may frequently be misunderstood; but we cannot help these things. "The day" will set all this to rights, and the loyal heart can contentedly wait for that day, knowing that then "every man shall have praise of God."

But it may be well to examine, more particularly, what it was that caused Lot to turn aside off the path of public testimony. There is a crisis in every man's history, at which it will, assuredly, be made manifest on what ground he is resting, by what motives he is actuated, and by what objects he is animated. Thus it was with Lot. He did not die at Charran; but he fell at Sodom. The ostensible cause of his fall was the strife between his herdmen and those of Abraham; but the fact is, when one is not really walking with a single eye and purified affections, he will easily find a stone to stumble over. If he does not find it at one time, he will at another. If he does not find it here, he will find it there. In one sense, it makes little matter as to what may be the apparent cause of turning aside; the real cause lies underneath, far away, it may be, from common observation, in the hidden chambers of the heart's affections and desires, where the world in some shape or form, has been sought after. The strife between the herdmen might have been easily settled without spiritual damage to either Abraham or Lot. To the former, indeed, it only afforded an occasion for exhibiting the beautiful power of faith, and the moral elevation, the heavenly vantage ground, on which faith ever sets the possessor thereof. But to the latter, it was an occasion for exhibiting the thorough worldliness of his heart. The strife no more produced the worldliness in Lot than it produced the faith in Abraham; it only manifested, in the case of each, what was really there.

Thus it is always: controversies and divisions arise in the Church of God, and many are stumbled thereby, and driven back into the world, in one way or another. They then lay the blame on the controversy and division, whereas the truth is, that these things were only the means of developing the real condition of the soul, and the bent of the heart. The world was in the heart, and would be reached by some route or another; nor is there much of moral excellency exhibited in blaming men and things, when the root of the matter lies within. It is not that controversy and division are not to be deeply deplored: assuredly they are. To see brethren contending in the very presence of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is truly lamentable and humiliating. Our language should ever be, "Let there be no strife, I pray thee, between me and thee … for we are brethren." Still, why did not Abraham make choice of Sodom? Why did not the strife drive him into the world? Why was it not an occasion of stumbling to him? Because he looked at it from God's point of view. No doubt, he had a heart that could be attracted by "well-watered plains," just as powerfully as Lot's heart; but then he did not allow his own heart to choose. He first let Lot take his choice, and then left God to choose for him. This was heavenly wisdom. This is what faith ever does: it allows God to fix its inheritance, as it also allows Him to make it good. It is always satisfied with the portion which God gives. It can say, the lines are fallen to me in pleasant places; yea, I have a goodly heritage." It matters not where "the lines" fall; for, in the judgement of faith, they always "fall in pleasant places," just because God casts them there.

The man of faith can easily afford to allow the man of sight to take his choice. Because, "If thou wilt take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hou depart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What beautiful disinterestedness and moral elevation we have here! and yet what security! It is certain that, let nature range where it will, let it take its most comprehensive grasp, its boldest and highest flight, there is never the slightest danger of its laying its hand upon faith's treasure. It will seek its portion in quite an opposite direction. Faith lays up its treasure in a place which nature would never dream of examining; and, as to its approaching thereto, it could not if it would; and it would not if it could. Hence, therefore, faith is perfectly safe, as well as beautifully disinterested, in allowing nature to take its choice.

What, then, did Lot choose, when he got his choice? He chose Sodom. The very place that was about to be judged. But how was this? Why select such a spot? Because he looked at the outward appearance, and not at the intrinsic character and future destiny. The intrinsic character was "wicked." Its future destiny was "judgement" — to be destroyed by "fire and brimstone out of heaven." But, it may be said, "Lot knew nothing of all this." Perhaps not, nor Abraham either; but God did; and had Lot allowed God to "choose his inheritance for him," He, certainly, would not have chosen a spot that He Himself was about to destroy. He did not, however. He judged for himself. Sodom suited him, though it did not suit God. His eye rested on the "well-watered plains," and his heart was attracted by them. "He pitched his tent toward Sodom." Such is nature's choice! "Demas has forsaken me, having loved this present world." Lot forsook Abraham for the same reason. He left the place of testimony, and got into the place of judgement.

"And the Lord said to Abram, after that Lot was separated from him, Lift up now thine eyes, and look from the place where thou art, northward, and southward, and eastward, and westward; for all the land which thou seest, to thee will give it, and to thy seed for ever." The "strife" and "separation," so far from damaging Abraham's spiritual condition, rather brought out, in full relief, his heavenly principles, and strengthened, in his soul, the life of faith. Moreover, it cleared the prospect for him, and delivered him from the company of one who could only prove a dead weight. Thus it worked for good, and yielded a harvest of blessing. It is, at once, most solemn, and yet most encouraging, to bear in mind that, in the long run, men find their proper level. Men who run unsent, break down, in one way or another, and find their way back to that which they profess to have left. On the other hand, those who are called of God, and lean on Him, are, by His grace, sustained. "Their path is as the shining light, which shines more and more to the perfect day." The thought of this should keep us humble, watchful, and prayerful. "Let him that thinks he stands take heed lest he fall," for, truly, "there are first that shall be last, and there are last that shall be first." "He that endures to the end, the same shall be saved," is a principle which, whatever be its specific application, has a wide moral bearing. Many a vessel has sailed out of harbour, in gallant style, with all its canvass spread, amid cheering and shouting, and with many fair promises of a first-rate passage; but, alas! storms, waves, shoals, rocks, and quicksands, have changed the aspect of things; and the voyage that commenced with hope, has ended in disaster. I am, here, only referring to the path of service and testimony, and, by no means, to the question of a man's eternal acceptance in Christ. This latter, blessed be God, does not, in any wise, rest with ourselves, but with Him who has said, "I give to my sheep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neither shall any pluck them out of my hand." But, do we not know, that many Christians set out on some special course of service or testimony, under the impression that they are called of God thereto, and, after a time, they break down? Unquestionably. And, further, very many set out in the profession of some special principle of action, respecting which they have not been divinely taught, or the consequences of which they have not maturely considered in the presence of God, and, as a necessary result, they themselves have been found, after a time, in the open violation of those very principles. All this is deplorable, and should be carefully avoided. It tends to weaken the faith of God's elect, and causes the enemies of the truth to speak reproachfully. Each one should receive his call and his commission directly from the Master Himself. All whom Christ calls into any special service, He will, infallibly, maintain therein, for He never sent any one a warfare at his own charges. But if we run unsent, we shall not only be left to learn our folly, but to exhibit it.

Yet, it is not that any one should set himself up as the impersonation of any principle, or as an example of any special character of service or testimony. God forbid. This would be the most egregious folly, and empty conceit. It is a teacher's business to set forth Gods Word; and it is a servant's business to set forth the Master's will; but while all this is fully understood and admitted, we must ever remember the deep need there is of counting the cost, ere we undertake to build a tower, or go forth to war. Were this more seriously attended to, there would be far less confusion and failure in our midst. Abraham was called of God from Ur to Canaan, and, hence, God led him forth on the way. When Abraham tarried at Charran, God waited for him; when he went down into Egypt, He restored him; when he needed guidance, He guided him; when there was a strife and a separation, He took care of him; so that Abraham had only to say, "Oh, how great is thy goodness which thou hast laid up for them that fear thee; which thou hast wrought for them that trust in thee, before the sons of men." He lost nothing by the strife. He had his tent and his altar before; and he had his tent and his altar afterwards. "Then Abram removed his tent, and came and dwelt in the plain of Mamre, which is in Hebron, an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Lot might choose Sodom; but as for Abraham, he sought and found his all in God. There was no altar in Sodom. Alas! all who travel in that direction are in quest of something quite different from that. It is never the worship of God, but the love of the world, that leads them thither. And even though they should attain their object, what is it? How does it end? Just thus, "He gave them their request, but sent leanness into their souls."

Genesis 14

We are, here, presented with an historic record of the revolt of five kings from under the hand of Chederlaomer, and a battle consequent thereon. The Spirit of God can occupy himself with the movements of "kings and their armies," when such movements are in anywise connected with the people of God. In the present case, Abraham personally had nothing whatever to do with the revolt or its consequences. His "tent and altar" were not likely to furnish an occasion for the declaration of war, nor yet to be much affected by the outbreak or issue thereof. The proper portion of a heavenly man could never, by any possibility, tempt the cupidity nor excite the ambition of the kings and conquerors of this world.

However, although Abraham was not affected by the battle of "four kings with five," yet Lot was. His position was such as to involve him in the whole affair. So long as we are enabled, through grace, to pursue the path of simple faith, we shall be thrown completely outside the range of this world's circumstances; but if we abandon our high and holy position as those whose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seek a name, a place, and a portion in the earth, we must expect to participate in earth's convulsions and vicissitudes. Lot had taken up his abode in the plains of Sodom, and was, therefore, deeply and sensibly affected by the wars of Sodom. It must ever be thus. It is a bitter and a painful thing for the child of God to mingle himself with the children of this world. He can never do so without serious damage to his own soul, as well as to the testimony with which he is entrusted. What testimony had Lot in Sodom? A very feeble one, indeed, if one at all. The very fact of his settling himself there was the death blow to his testimony. To have spoken a word against Sodom and its ways, would have been to condemn himself, for why was he there? But, in truth, it does not, by any means, appear that, to testify for God, formed any part of his object in "pitching his tent toward Sodom." Personal and family interests seem to have been the leading springs of action in his heart: and though, as Peter tells us, "his righteous soul was vexed with the filthy conversation of the wicked, from day to day," yet had he but little power to act against it, even if inclined so to do.

It is important, in a practical point of view, to see that we cannot be governed by two objects at the same time. For example, I cannot have before my mind, as objects, my worldly interests and the interests of the gospel of Christ. If I go to a town for the purpose of setting up in business, then, clearly, business is my object, and not the gospel. I may, no doubt, propose to myself both to attend to business and to preach the gospel as well; but, all the while, either one or the other must be my object. It is not that a servant of Christ may not most blessedly and effectually preach the gospel and attend to business also; he assuredly may; but, in such a case, the gospel will be his object, and not business. Paul preached the gospel and made tents; but the gospel was his object, and not tent making. If I make business my object, the gospel preaching will speedily prove to be formal and unprofitable work; yea, it will be well if it be not made use of to sanctify my covetousness. The heart is very treacherous; and it is often truly astonishing to see how it deceives us when we desire to gain some special point. It will furnish, in abundance, the most plausible reasons; while the eyes of our understanding are so blinded by self-interest, or unjudged wilfulness, as to be incapable of detecting their plausibility. How frequently do we hear persons defending a continuance in a position which they admit to be wrong, on the plea that they thereby enjoy a wider sphere of usefulness. To all such reasoning, Samuel furnishes a pointed and powerful reply, "To obey is better than sacrifice, and to hearken than the fat of rams." Which was, Abraham or Lot, able to do the more good? Does not the history of those two men prove, beyond a question, that the most effectual way to serve the world is to be faithful to it, by separating from, and testifying against it?

But, be it remembered, that genuine separation from the world can only be the result of communion with God. I may seclude myself from the world, and constitute myself the centre of my being, like a monk or a cynic; but separation to God is a totally different thing. The one chills and contracts, the other warms and expands. That drives us in upon ourselves; this draws us out in love and interest for others. That makes self and its interests our centre; this makes God and His glory our centre. Thus, in Abraham's case, we see that the very fact of his separation enabled him to render effectual service to one who had involved himself in trouble by his worldly ways. "When Abraham heard that his brother was taken captive, he armed his trained servants, born in his own house, three hundred and eighteen, and pursued them to Dan … and he brought back all the goods, and also brought again his brother Lot, and his goods, and the women also, and the people." Lot was Abraham's brother, after all; and brotherly love must act. "A brother is born for adversity;" and it often happened that a season of adversity softens the heart, and renders it susceptible of kindness, even from one with whom we have had to part company; and it is remarkable that, while, in verse 12, we read, "they took Lot, Abraham's brother's son," yet, in verse 14, we read, "when Abram heard that his brother was taken captive." The claims of a brother's trouble are answered by the affections of a brother's heart. This is divine. Genuine faith, while it always renders us independent, never renders us indifferent. It will never wrap itself up in its fleece while a brother shivers in the cold. There are three things which faith does; it "purifies the heart;" it "works by love;" and it "overcomes the world;" and all these results of faith are beautifully exhibited in Abraham on this occasion. His heart was purified from Sodom's pollutions; he manifested genuine love to Lot his brother; and, finally, he was completely victorious over the kings. Such are the precious fruits of faith, that heavenly, Christ honouring principle.

However, the man of faith is not exempt from the assaults of the enemy; and it frequently happens that immediately after a victory, one has to encounter a fresh temptation. Thus it was with Abraham. "The king of Sodom went out to meet him, after his return from the slaughter of Chederlaomer, and of the kings that were with him." There was, evidently, a very deep and insidious design of the enemy in this movement. "The king of Sodom" presents a very different thought, and exhibits a very different phase of the enemy's power, from what we have in "Chederlaomer and the kings that were with him." In the former, we have rather the hiss of the serpent; in the latter, the roar of the lion; but whether it were the serpent or the lion, the Lord's grace was amply sufficient; and most seasonably was this grace ministered to the Lord's servant, at the exact moment of need. "And Melchisedek, king of Salem, brought forth bread and wine, and he was the priest of the most high God. And he blessed him, and said, Blessed be Abram of the most high God, possessor of heaven and earth; and blessed be the most high God, which has delivered thine enemies into thy hand." We have, here, to remark, first, the peculiar point at which Melchisedek enters the scene; and, secondly, the double effect of his ministry. He did not come forth when Abraham was in pursuit of Chederlaomer, but when the king of Sodom was in pursuit of Abraham. This makes a great moral difference. A deeper character of communion was needed to meet the deeper character of conflict.

And, then, as to the ministry, the "bread and wine" refreshed Abraham's spirit, after his conflict with Chederlaomer; while the benediction prepared his heart for his conflict with the king of Sodom. Abraham was a conqueror, and yet he was about to be a combatant, and the royal priest refreshed the conqueror's spirit, and fortified the combatant's heart.

It is peculiarly sweet to observe the manner in which Melchizedek introduces God to the thoughts of Abraham. He calls Him "the most high God, possessor of heaven and earth;" and, not only so, but pronounces Abraham "blessed" of that same God. This was effectually preparing him for the king of Sodom. A man who was "blessed" of God, did not need to take aught from the enemy; and if "the possessor of heaven and earth" filled his vision, "the goods" of Sodom could have but little attraction. Hence, as might be expected, when the king of Sodom made his proposal, "give me the persons, and take the goods to thyself," Abraham replies, "I have lift up my hand to the Lord, the most high God, the possessor of heaven and earth, that I will not take from a thread even to a shoe latchet, and that I will not take anything that is thine, lest thou shouldest say, I have made Abram rich." Abraham refuses to be enriched by the king of Sodom. How could he think of delivering Lot from the power of the world, if he himself were governed thereby? The only true way in which to deliver another is to be thoroughly delivered myself. So long as I am in the fire, it is quite impossible I can pluck another out of it. The path of separation is the path of power, as it is also the path of peace and blessedness.

The world, in all its various forms, is the great instrument of which Satan makes use, in order to weaken the hands, and alienate the affections, of the servants of Christ. But, blessed be God, when the heart is true to Him, He always comes in to cheer, to strengthen, and to fortify, at the right time. "The eyes of the Lord run to and fro, throughout the whole earth, to show himself strong in the behalf of them whose heart is perfect toward him." (2 Chr. 16:9) This is an encouraging truth for our poor, timid, doubting, faltering hearts. Christ will be our strength and shield. He will "cover our heads in the day of battle;" He will "teach our hands to war, and our fingers to fight;" and finally, "He will bruise Satan under our feet shortly." All this is unspeakably comforting to a heart sincerely desirous of making way against "the world, the flesh, and the devil." May the Lord keep our hearts true to Himself, in the midst of the ensnaring scene around us.

Genesis 15

"After these thing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saying, Fear not, Abram. I am thy shield, and thy exceeding great reward." The Lord would not suffer His servant to be a loser, by rejecting the offers of this world. It was infinitely better for Abraham to find himself hidden behind Jehovah's shield, than to take refuge beneath the patronage of the king of Sodom; and to be anticipating his "exceeding great reward," than to accept "the goods" of Sodom. The position into which Abraham is put, in the opening verse of our chapter, is beautifully expressive of the position into which every soul is introduced by the faith of Christ. Jehovah was his "shield," that He might rest in Him; Jehovah was his "reward," that he might wait for Him. So with the believer now: he finds his present rest, his present peace, his present security, all in Christ. No dart of the enemy can possibly penetrate the shield which covers the weakest believer in Jesus.

And then, as to the future, Christ fills it. Precious portion! Precious hope! A portion which can never be exhausted: a hope which will never make ashamed. Both are infallibly secured by the counsels of God, and the accomplished atonement of Christ. The present enjoyment thereof is by the ministry of the Holy Ghost who dwells in us. This being the case, it is manifest that if the believer is pursuing a worldly career, or indulging in worldly, or carnal desires, he cannot be enjoying either the "shield" or the "reward". If the Holy Ghost is grieved, He will not minister the enjoyment of that which is our proper portion — our proper hope. Hence, in the section of Abraham's history now before us, we see that when he had returned from the slaughter of the kings, and rejected the offer of the king of Sodom, Jehovah rose before his soul in the double character, as his "Shield and his exceeding great reward." Let the heart ponder this, for it contains a volume of deeply practical truth. We shall now examine the remainder of the chapter.

In it we have unfolded to us the two great principles of sonship and heirship. "And Abram said, Lord God, what wilt thou give me, seeing I go childless, and the steward of my house is this Eliezer of Damascus? And Abram said, Behold, to me thou hast given no seed: and lo, one born in my house is mine heir." Abraham desired a son, for he knew, upon divine authority, that his "seed" should inherit the land. (Gen. 13:15) Sonship and heirship are inseparably connected in the thoughts of God. "He that shall come forth out of thine own bowels shall be thine heir." Sonship is the proper basis of everything; and, moreover, it is the result of God's sovereign counsel and operation, as we read in James, "of his own will begat he us." Finally, it is founded upon God's eternal principle of resurrection. How else could it be? Abraham's body was "dead;" wherefore, in his case, as in every other, sonship must be in the power of resurrection. Nature is dead, and can neither beget nor conceive ought for God. There lay the inheritance stretching out before the patriarch's eye, in all its magnificent dimensions; but where was the heir? Abraham's body and Sarah's womb alike answered "death." But Jehovah is the God of resurrection, and, therefore, a "dead body" was the very thing for Him to act upon. Had nature not been dead, God should have put it to death ere He could fully show Himself. The most suitable theatre for the living God is that from which nature, with all its boasted powers and empty pretensions, has been totally expelled by the sentence of death. Wherefore, God's word to Abraham was, "look now toward heaven, and tell the stars, if thou be able to number them; and he said to him, so shall thy seed be." When the God of resurrection fills the vision there is no limit to the soul's blessing, for He who can quicken the dead, can do anything.

"And he believed in the Lord, and he counted it to him for righteousness."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to Abraham is, here, founded upon his believing in the Lord as the Quickener of the dead. It is in this character that He reveals Himself in a world where death reigns; and when a soul believes in Him, as such, it is counted righteous in His sight. This necessarily shuts man out, as regards his co-operation, for what can he do in the midst of a scene of death? Can he raise the dead? Can he open the gates of the grave? Can he deliver himself from the power of death, and walk forth, in life and liberty, beyond the limits of its dreary domain? Assuredly not. Well, then, if he cannot do so, he cannot work out righteousness, nor establish himself in the relation of sonship. "God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and, therefore, so long as a man is under the power of death, and under the dominion of sin, he can neither know the position of a son, nor the condition of righteousness. Thus, God alone can bestow the adoption of sons, and He alone can impute righteousness, and both are connected with faith in Him as the One who raised up Christ from the dead.

It is in this way that the apostle handles the question of Abraham's faith, in Romans 4, where he says, "It was not written for his sake alone, that it was imputed to him; but for us also to whom it shall be imputed, if We believe on him that raised up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Here, the God of resurrection is presented "to us also," as the object of faith, and our faith in Him as the alone ground of our righteousness. If Abraham had looked up into heaven's vault, spangled with innumerable stars, and then looked at "his own body now dead," how could he ever grasp the idea of a seed as numerous as those stars? Impossible. But he did not look at his own body, but at the resurrection power of God, and, inasmuch as that was the power which was to produce the seed, we can easily see that the stars of heaven and the sand on the sea-shore are but feeble figures indeed; for what natural object could possibly illustrate the effect of that power which can raise the dead ?

So also, when a sinner hearkens to the glad tidings of the gospel, were he to look up to the unsullied light of the divine presence, and then look down into the unexplored depths of his own evil nature, he might well exclaim, How can I ever get thither? How can I ever be fit to dwell in that light? Where is the answer? In himself? Nay, blessed be God, but in that blessed One, who travelled from the bosom to the cross and the grave, and from thence to the throne, thus filling up, in His Person and work, all the space between those extreme points. There can be nothing higher than the bosom of God — the eternal dwelling-place of the Son; and there can be nothing lower than the cross and the grave; but, amazing truth! I find Christ in both. I find Him in the bosom, and I find Him in the grave. He went down into death in order that He might leave behind Him, in the dust thereof, the full weight of His people's sins and iniquities. Christ, in the grave, exhibits the end of everything human — the end of sin — the full limit of Satan's power. The grave of Jesus forms the grand terminus of death. But resurrection takes us beyond this terminus, and constitutes the imperishable basis on which God's glory and man's blessing repose for ever. The moment the eye of faith rests on a risen Christ, there is a triumphant answer to every question as to sin, judgement, death, and the grave. The One who divinely met all these, is alive from the dead; and has taken His seat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the heavens; and, not only so, but the Spirit of that risen and glorified One, in the believer, constitutes him a son. He is quickened out of the grave of Christ: as we read, "and you, being dead in your sins, and the uncircumcision of your flesh, has he quickened together with him, having forgiven you all trespasses." (Col. 2:13)

Hence, therefore, sonship, being founded on resurrection, stands connected with perfect justification — perfect righteousness — perfect freedom from everything which could, in any wise, be against us. God could not have us in His presence with sin upon us. He could not suffer a single speck or stain of sin upon His sons and daughters. The father could not have the prodigal at His table with the rags of the far country upon him. He could go forth to meet him in those rags. He could fall upon his neck and kiss him, in those rags. It was worthy, and beautifully characteristic of his grace so to do; but then to seat him at his table in the rags would never do. The grace that brought the father out to the prodigal, reigns through the righteousness which brought the prodigal in to the father. It would not have been grace had the father waited for the son to deck himself in robes of his own providing; and it would not have been righteous to bring him in in his rags; but both grace and righteousness shone forth in all their respective brightness and beauty when the father went out and fell on the prodigal's neck; but yet did not give him a seat at the table until he was clad and decked in a manner suited to that elevated and happy position. God, in Christ, has stooped to the very lowest point of man's moral condition, that, by stooping He might raise man to the very highest point of blessedness, in fellowship with Himself. From all this, it follows, that our sonship, with all its consequent dignities and privileges, is entirely independent of us. We have just as little to do with it as Abraham's dead body and Sarah's dead womb had to do with a seed as numerous as the stars which garnish the heavens, or as the sand on the seashore. It is all of God. God the Father drew the plan, God the Son laid the foundation, and God the Holy Ghost raises the superstructure; and on this superstructure, appears the inscription, "THROUGH GRACE, BY FAITH, WITHOUT WORKS OF LAW'

But, then, our chapter opens another most important subject to our view, namely, heirship. The question of sonship and righteousness being fully settled — divinely and unconditionally settled, the Lord said to Abraham, "I am the Lord that brought thee out of Ur of the Chaldees, to give thee this land to inherit it." Here comes out the great question of heirship, and the peculiar path along which the chosen heirs are to travel ere they reach the promised inheritance. "If children, then heirs, heirs of God, and joint-heirs with Christ; if so be that we suffer with him, that we may be also glorified together." Our way to the kingdom lies through suffering, affliction, and tribulation; but, thank God, we can, by faith, say," the sufferings of this present time are not worthy to be compared with the glory which shall be revealed in us. And further, we know that "our light affliction which is but for a moment, works out for us a far more exceeding and eternal weight of glory." Finally, "we glory in tribulation, knowing that tribulation works patience, and patience experience, and experience hope." It is a high honour and a real privilege to be allowed to drink of our blessed Master's cup, and be baptised with His baptism; to travel in blest companionship with Him along the road which leads directly to the glorious inheritance. The Heir and the joint-heirs reach that inheritance by the pathway of suffering.

But let it be remembered that the suffering of which the joint-heirs participate has no penal element in it. It is not suffering from the hand of infinite justice, because of sin; all that was fully met on the cross, when the divine victim bowed His sacred head beneath the stroke. "Christ also has once suffered for sins," and that "once," was on the tree and nowhere else. He never suffered for sins before and He never can suffer for sins again. "Once, in the end of the world, (the end of all flesh,) has he appeared to put away sin, by the sacrifice of himself." "Christ was once offered."

There are two ways in which to view a suffering Christ: first, as bruised of Jehovah; secondly, as rejected of men. In the former, He stood alone; in the latter, we have the honour of being associated with Him. In the former, I say, He stood alone, for who could have stood with Him? He bore the wrath of God alone; He travelled in solitude, down into "the rough valley that had neither been eared nor sown," and there He settled, for ever, the question of our sins. With this we had nothing to do, though to this we are eternally indebted for everything. He fought the fight and gained the victory, alone; but He divides the spoils with us. He was in solitude in the horrible pit and miry clay;" but directly He planted His foot on the everlasting "rock" of resurrection, He associates us with Him. He uttered the cry alone; He sings the "new song" in company. (Ps. 40:2-3)

Now, the question is, shall we refuse to suffer from the hand of man with Him who suffered from the hand of God for us? That it is, in a certain sense, a question is evident, from the Spirit's constant use of the word "if" in connection with it. "If so be we suffer with him." "If we suffer, we shall reign." There is no such question as to sonship. We do not reach the high dignity of sons through suffering, but through the quickening power of the Holy Ghost, founded on the accomplished work of Christ, according to God's eternal counsel. This can never be touched. We do not reach the family through suffering. The apostle does not say, "that ye may be counted worthy of the family of God for which ye also suffer." They were in the family already; but they were bound for the kingdom; and their road to that kingdom lay through suffering; and not only so, but the measure of suffering for the kingdom would be according to their devotedness and conformity to the King. The more like we are to Him, the more we shall suffer with Him; and the deeper our fellowship with Him in the suffering, the deeper will be our fellowship in the glory.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house of the Father and the kingdom of the Son: in the former, it will be a question of capacity; in the latter, a question of assigned position. All my children may be round my table, but their enjoyment of my company and conversation will entirely depend on their capacity. One may be seated on my knee, in the full enjoyment of his relationship, as a child, yet perfectly unable to comprehend a word I say; another may exhibit uncommon intelligence in conversation, yet not be a whit happier in his relationship than the infant on my knee. But when it becomes a question of service for me, or public identification with me, it is, evidently, quite another thing. This is but a feeble illustration of the idea of capacity in the Father's house, and assigned position in the kingdom of the Son.

But let it be remembered that our suffering with Christ is not a yoke of bondage, but a matter of privilege; not an iron rule, but a gracious gift; not constrained servitude, but voluntary devotedness. "Unto you it is given, in the behalf of Christ, not only to believe on him, but also to suffer for his sake." (Phil. 1:29) Moreover, there can be little doubt but that the real secret of suffering for Christ is to have the heart's affections centred in Him. The more I love Jesus, the closer I shall walk with Him, and the closer I walk with Him, the more faithfully I shall imitate Him, and the more faithfully I imitate Him, the more I shall suffer with Him. Thus it all flows from love to Christ; and then it is a fundamental truth that "we love him because he first loved us." In this, as in everything else, let us beware of a legal spirit; for it must not be imagined that a man, with the yoke of legality round his neck, is suffering for Christ; alas! it is much to be feared that such an one does not know Christ; does not know the blessedness of sonship; has not yet been established in grace; is rather seeking to reach the family by works of law, than to reach the kingdom by the path of suffering.

On the other hand, let us see that we are not shrinking from our Master's cup and baptism. Let us not profess to enjoy the benefits which His cross secures, while we refuse the rejection which that cross involves. We may rest assured that the road to the kingdom is not enlightened by the sunshine of this world's favour, nor strewed with the roses of its prosperity. If a Christian is advancing in the world, he has much reason to apprehend that he is not walking in company with Christ. "If any man serve me, let him follow me; and where I am, there shall also my servant be." What was the goal of Christ's earthly career? Was it an elevated, influential position in this world? By no means. What then? He found His place on the cross, between two condemned malefactors. "But," it will be said, "God was in this." True; yet man was in it likewise; and this latter truth is what must inevitably secure our rejection by the world, if only we keep in company with Christ. The companionship of Christ, which lets me into heaven, casts me out of earth; and to talk of the former, while I am ignorant of the latter, proves there is something wrong. If Christ were on earth, now, what would His path be? Whither would it tend? Where would it terminate? Would we like to walk with Him? Let us answer those enquiries under the edge of the word, and under the eye of the Almighty; and may the Holy Ghost make us faithful to an absent — a rejected — a crucified Master. The man who walks in the Spirit will be filled with Christ; and, being filled with Him, he will not be occupied with suffering, but with Him for whom he suffers. If the eye is fixed on Christ, the suffering will be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the present joy and future glory.

The subject of heirship has led me much further than I intended; but I do not regret it, as it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Let us now briefly glance at the deeply significant vision of Abraham as set forth in the closing verses of our chapter. "And when the sun was going down, a deep sleep fell upon Abram; and, lo, an horror of great darkness fell upon him. And he said to Abram, know of a surety, that thy seed shall be a stranger in a land that is not theirs, and shall serve them; and they shall afflict them four hundred years: and also that nation, whom they shall serve, will I judge: and afterward shall they come out with great substance …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the sun was going down, and it was dark, behold, a smoking furnace, and a burning lamp that passed between those pieces."

The entire of Israel's history is summed up in those two figures, the "furnace" and the "lamp." The former presents to us those periods of their history in which they were brought into suffering and trial; such, for example, as the long period of Egyptian bondage, their subjection to the kings of Canaan, the Babylonish captivity, their present dispersed and degraded condition. During all these periods they may be considered as passing through the smoking furnace. (See Deut. 4:20; 1 Kings 8:51; Isa. 48:10.)

Then, in the burning lamp, we have those points in Israel's eventful history at which Jehovah graciously appeared for their relief, such as their deliverance from Egypt, by the hand of Moses; their deliverance from under the power of the kings of Canaan, by the ministry of the various judges; their return from Babylon, by the decree of Cyrus; and their final deliverance, when Christ shall appear in His glory. The inheritance must be reached through the furnace; and the darker the smoke of the furnace, the brighter and more cheering will be the lamp of God's salvation. Nor is this principle confined merely to the people of God, as a whole; it applies, just as fully, to individuals. Who have ever reached a position of eminence as servants, have endured the furnace before they enjoyed the lamp. "An horror of great darkness" passed across the spirit of Abraham. Jacob had to endure twenty-one years of sore hardship, in the house of Laban. Joseph found his furnace of affliction in the dungeons of Egypt. Moses spent forty years in the desert. Thus it must be with all God's servants. They must be "tried" first, that, being found "faithful," they may be "put into the ministry." God's principle, in reference to those who serve Him, is expressed in those words of St. Paul, "not a novice, lest being lifted up with pride, he fall into the condemnation of the devil." (1 Tim. 3:6)

It is one thing to be a child of God ; it is quite another to be a servant of Christ. I may love my child very much, yet, if I set him to work in my garden, he may do more harm than good. Why? Is it because he is not a dear child? No; but because he is not a practised servant. This makes all the difference. Relationship and office are distinct things. Not one of the Queen's children is, at present, capable of being her prime minister. It is not that all God's children have not something to do, something to suffer, something to learn. Undoubtedly they have; yet it ever holds good, that public service and private discipline are intimately connected in the ways of God. One who comes forward much, in public, will need that chastened spirit, that matured judgement, that subdued and mortified mind, that broken will, that mellow tone, which are the sure and beautiful result of God's secret discipline; and it will, generally, be found that those who take a prominent place without more or less of the above moral qualifications, will, sooner or later, break down.

Lord Jesus, keep thy feeble servants very near to thine own Most Blessed Person, and in the hollow of thine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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