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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매킨토시 모세5경/창세기

Genesis 16 - 50

by 복음과삶 2020. 9. 20.

C. H. Mackintosh.

 

창세기 16장

여기에서 우리는 불신이 아브라함의 정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잠시 동안 그를 하나님에 대한 단순하고 행복한 확신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출산을 막으셨느니라” 이 말은 불신의 일반적인 조급함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그에 따라 대하고 주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은 기다리는 태도보다 무엇이든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 그러한 자세를 유지하기보다는 어떤 편법, 어떤 계획, 어떤 자원으로든 전환할 것입니다. 약속을 처음에 믿는 것과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별을 어린이에게서 지속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이에게 무엇이든 약속하면 아이는 내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취의 시기와 방식에 있어서는 가능한 가장 큰 불안과 조바심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현자라도 어린아이의 행동에서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진정한 거울을 찾을 수 없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창 15장 에서 믿음을 보였지만 창 16장 에서는 인내에 실패했습니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 에 나오는 “ 믿음과 인내 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라는 사도의 말씀의 힘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믿음은 그것을 믿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예상합니다. 인내심은 조용히 그것을 기다립니다 .

상업계에는 어음이나 약속어음의 '현재 가치'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돈을 기다리도록 요청받은 경우에는 기다린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앙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현재 가치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규제되는 척도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경험적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나의 평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겸손하고 인내하는 정신은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될 때까지 그분을 기다리면서 풍성하고 온전한 보상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경우,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한 말의 실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나니 혹시 내 애굽 여종이 나의 자원이 될지라." 불신의 영향을 받은 마음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까움, 그분의 무오하신 신실하심, 그리고 한결같은 충족하심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을 때, 우리가 하게 될 사소한 일들을 관찰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의 합당한 간증에 꼭 필요한 평온하고 균형잡힌 영혼의 상태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이를 "칭찬할 만한 수단의 사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끌어내는 것은 쓰라린 일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할 것입니다. 사라가 '자연은 나를 실망시켰지만 하나님은 나의 자원이시다'라고 말했다면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이것이 그녀의 적절한 근거였을 것입니다. 자연이 정말로 그녀를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형태의 자연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자연을 다른 형태로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형태의 자연에서 눈을 떼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판단에 의하면 하갈의 자연은 사라의 자연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자연은 늙든 젊든 하나님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의 중심을 실험적으로 찾을 때에만 우리는 이 진리의 능력 안에 있게 됩니다. 그 영광스러운 존재의 눈을 떼면 우리는 가장 비열한 불신의 계략에 대비하게 됩니다.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흐름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게 참되시고 유일하신 지혜로우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의지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성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도구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시는 분 때문에 도구를 소중히 여깁니다. 불신은 도구만을 바라보며, 은혜 안에서 그것을 사용하시는 분의 충분하심 대신에 그 도구의 겉보기 효율성으로 문제의 성공 여부를 판단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보고 그 블레셋 사람을 보고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니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은 그가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실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길은 매우 단순하고 좁은 길입니다. 한편으로는 수단을 신격화하지도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수단인 한 그것을 높이 평가할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섬기기 위해 피조물을 사용하시는 것과 내가 그것을 사용하여 그분을 쫓아내시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사용하여 엘리야를 섬기셨지만, 엘리야는 까마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수단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모든 방법으로 그분이 축복하시고, 봉사하실 것이며, 공급하실 것이라는 감미로운 확신 속에서 그분을 기다립니다.

이제 우리 앞에 있는 이 장의 경우에는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분은 의심할 바 없이 아들을 약속하셨지만 이 아들이 하갈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에게 의지함으로써 “그들의 슬픔을 더하게 하였”다는 것을 이야기에서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가 잉태한 것을 보고 그 여주인이 그 눈 앞에서 멸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자원을 서둘러 찾으려는 데서 흘러나온 늘어나는 슬픔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사라의 위엄은 이집트 여종에게 짓밟혔고, 그녀는 약함과 멸시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존엄성과 권력이 있는 유일한 참된 장소는 약함과 의존성을 느끼는 장소입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행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사람만큼 주위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자연이나 세상에 빚진 자가 되는 순간, 그는 존엄성을 잃고 곧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서 입은 손실을 추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은 시련과 훈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특별히 속한 축복과 기쁨은 균형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들이 돌아서게 되면 훨씬 더 깊은 시련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사래가 이르되 내 죄는 너에게 있으리라 하였더라 .” 우리가 잘못 행동하면 종종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제안한 대로 열매를 거두었을 뿐인데도 아브라함에게 “나의 죄가 너에게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의 허락을 받아 그녀는 자신의 조급함이 그녀에게 가져온 시련을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네 여종이 네 손에 있으니 네 뜻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라가 그에게 애쓰니라 그가 그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였느니라.” 이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본종녀'는 가혹한 대우로 제거될 수 없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그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강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그 결과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자주 시도하지만 이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 확실합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을 했다면,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라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잘못했다는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기는커녕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을 완전히 고백하기 전에 우리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우리의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이 항상 발견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갈은 돌아와서 그녀의 아들을 낳아야 했고, 그 아들은 전혀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음이 입증되었지만, 후속편에서 보게 되겠지만, 아브라함과 그의 집에 매우 큰 시련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에게 많은 가치가 있는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둘째, 교리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첫째,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가르침에 관해 우리는 우리 마음의 불신으로 인해 실수를 범할 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계획에 의해서도 고쳐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것은 영감의 페이지에서, 그리고 개인 역사의 페이지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만나는 변경될 수 없는 원칙입니다. 은혜는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소생시키나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리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수년 동안 여종과 그 아들의 존재를 견뎌야 했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특별한 축복이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지금 이 경우에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여종과 그 아들의 존재로 인해 결코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자연에 빚진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를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아! 우리는 종종 “멍에를 메지 못하는 황소와 같”습니다. 그러나 “어미에게서 젖뗀 어린아이와 같이 조용하고 처신”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완고한 황소와 젖뗀 아이보다 더 반대되는 인물은 없습니다. 전자는 상황의 멍에 아래서 무의미하게 고군분투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그의 멍에를 더욱 괴로워지게 만드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후자는 모든 것에 온유하게 손을 굽히고 정신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몫을 더욱 달콤하게 만드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장의 교리적 관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을 행위 언약의 상징으로 볼 권한과 그로 인해 속박된 모든 사람을 볼 권한이 있습니다. ( 갈라디아 4:22-25 ) 이 중요한 구절에서 "육체"는 "약속"과 대조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신성한 개념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안주하지 않고 하갈을 통해 씨를 얻으려는 아브라함의 노력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언약은 하갈과 사라에 의해 비유되었으며 서로 정반대입니다. 속박으로 성별화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인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삶을 전적으로 그 능력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서 살리라.” 이것이 하갈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라 언약은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으로 계시하는데, 이 약속은 사람과 전혀 무관하며, 그것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 거기에는 "만일"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무조건 그것을 만들고 그것을 성취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마음의 완전한 자유 가운데 그분 안에 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데에는 자연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실패한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장되었습니다. 이것이 불신의 큰 실수입니다. 그 불안한 활동으로 그것은 영혼 주위에 흐릿한 안개를 일으켜 신성한 영광의 광선이 도달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능히 능력을 행하실 수 없느니라.” 믿음의 가장 큰 특징적인 미덕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실 수 있도록 플랫폼을 항상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인간은 행복한 예배자의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인들이 빠져든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위해 성취하신 것에 자연적인 것을 추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전파되었고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한 단순한 제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분명하니라.”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럽게 성취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에 관한 모든 것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뒤흔들거나 뒤흔들려고 했습니다. 사도가 그들에게 가르친 것처럼,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원자 이시거나 전혀 구원자가 아니시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 너희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는 순간 , 그는 기독교를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길을 잃고 죄가 있고 자멸한 죄인인  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 더욱이 나의 모든 죄의 완전한 사함과 나의 잃어버린 지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가지고 오시는데, 이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이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당신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모든 영광을 빼앗고 나의 모든 평화를 빼앗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존재나 행위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가장 큰 기본 원리는 하나님은 전부이고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복음의 평안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역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히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그 자체처럼 완전하게 만듭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려고 가만히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며, 사람의 경우에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영감받은 사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아무 효력이 없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 en nomoo ,) 은혜에서 떨어진 자니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만일 인간이 이 문제에 관해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배제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배제된다면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잃어버린 피조물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은혜 에 관한 문제라면 그것은 모두 은혜여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절반, 율법의 절반이 될 수 없습니다. 두 언약은 완전히 구별됩니다. 사라의 절반과 하갈의 절반이 될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여야 합니다. 하갈이라면 하나님은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으십니다. 사라라면 사람은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서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을 시험하여 사람의 참 가치를 알아보고 사람을 멸망케 하며 저주 아래에 두느니라. 그리고 그를 그 아래에 두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일에 전념하고 있는 한,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곳에 가두어 두십니다. “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 그 사람에 관한 한 그 통치는 필연적으로 중단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하는 권한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복음은 인간이 잃어버린 바 되고, 망하고, 죽은 존재라고 가정하여,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계시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의 구원자,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파산으로 죽은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 그러나 구속에 있어서 그분 자신의 독립적인 은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차이를 가져오며 갈라디아서에 사용된 다음과 같은 언어의 놀라운 힘을 설명할 것입니다. " — "그들이 당신을 괴롭히는 일이라도 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그리스도와 완전한 구원의 가치를 아시는 성령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에 대한 지식이 잃어버린 죄인에게 얼마나 필수적인지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없습니다. 비록 고린도인들 사이에는 바로잡아야 할 가장 심각한 무질서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의 실패와 오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옴으로써 바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이 장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 육신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고안될 수 있습니까? 혼자서 무엇이든 바로잡을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오류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율법으로부터는 “저주”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가장 뛰어난 은혜로 우리 마음을 굳건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7장

여기에서 우리 앞에 아브라함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 이것은 가장 포괄적인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관련하여 사라의 방법을 택했을 때,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걷고 있지 않았음이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전능하신 분 앞에서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불신은 언제나 자기 자신, 상황, 제2의 원인 등을 밀어붙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기쁨을 빼앗기고, 따라서 한 분이신 분의 팔에 의지하는 데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고양과 거룩한 독립을 빼앗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있어서 마땅히 그러해야 할, 또는 우리가 좀 더 단순한 믿음과 의존으로 행할 것만큼 영속적인 실재가 아니십니다.

{*여기서 "완벽하다"라는 단어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완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이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가 마음 앞에 있는 대상과 관련하여 완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희망과 기대가 완전하고도 온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중심에 있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완전하다"라는 단어가 적어도 네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매트 에서 . 5:48 에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하다"라는 단어가 우리의 행실의 원칙을 의미한다는 것을 문맥에서 배웁니다. 44절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 따라서 Matt의 의미에서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 5:48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해를 끼치고 적대적인 사람들에게까지 은혜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송을 제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아버지처럼 온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은혜로 다루시는 반면 그는 의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질문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에 관해서는 고린도전서 6장이 결정적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직접적인 성격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것과는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분은 세상과 함께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지금 심판석에 앉아 계시지 않고 은혜의 보좌인 속죄소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하신다면 지옥에 가게 될 사람들에게 그분의 축복을 쏟아부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심판대 앞으로 데려갈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Matt 의 마지막에 . 18절 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은혜의 성격과 그 합당한 효능에 대해 무지한 자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 종은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요구하는 데 있어서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례했습니다. 그는 주인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지만 고작 백 데나리온으로도 동료의 목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그는 고 문자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는 은혜에 대한 행복한 감각을 잃었고, 그 자신이 은혜의 주체이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쓰디쓴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만 달란트”  빚을 졌기 때문이 아니라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종”이라고 불렸습니다. 주인에게는 전자를 해결하는 데 충분한 은혜가 있었지만 후자를 해결하는 은혜는 없었습니다. 이 비유는 소송을 제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엄숙한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적용할 때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롭게 행동하면 은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됩니다.

히브리서 9 장에서 우리는 "완전하다"라는 용어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문맥이 단어의 의미를 결정짓는다. 그것은 “양심상 온전”합니다. 이것은 용어의 매우 중요한 사용입니다. 율법 아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결코 완전한 양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이유로도 그는 완전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소와 염소의 피는 일시적으로 만 역사하였지만 영원히 할 수는 없었 으므로 온전한 양심을 주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는 가장 연약한 신자라도 완전한 양심을 갖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왜? 율법 아래서 예배하는 자보다 더 나은 사람 이기 때문입니까 ? 아니; 하지만 그는 더 나은 희생을 얻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히 완전하다면 신자의 양심도 영원히 완전합니다.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진행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양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불명예를 돌리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희생이 일시적일 뿐이며 그 효과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을 모세 경제 하에서 희생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육체의 완전함과 양심의 완전함을 구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전자를 가장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후자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는 완전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반면에 성 바울은 완전한 육체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육신은 말씀에서 완전하게 될 것으로 제시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큰 차이를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죄가 있지만 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왜? 왜냐하면 죄가 전혀 없으셨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죄를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에서. 3 우리는 "완벽하다"라는 단어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 “완전한 자는 이와 같이 생각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전자는 사도들이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완전하고 영원히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자는 우리가 마음의 애정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사로잡는 대상으로 갖는 것을 가리킨다.}

"  앞에서 걸어라 ." 이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이렇게 행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 앞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내가 나의 기대를 사람과 사물 위에 둔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과 사물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게,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온전히 채워주 실까요 ? 사람이나 환경이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생물에게 할당된 공간이 있나요? 세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현장을 하나님으로 완전히 채워서 피조물이 들어갈 자리도, 세상이 들어갈 자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시야를 전부 채우시면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  바라라 . 나의 소망은 그에게서 나느니라. 그는 오직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시 62:5-6 ) “오직”이라는 단어는 깊이 탐구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대담하고 신성모독적인 회의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히 " 그만이…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 삶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서도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피조물과 공유하지 않으실 것임을 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이 피조물의 어떤 자원에 실제로 기대어 있는 동안 우리 입술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마음을 시험하실 것이다. 그는 믿음을 풀무불에 넣을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하여 우리는 적절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영혼이 은혜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소중히 여기던 기대를 모두 없앨 수 있게 되면, 그때에만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도록 할 준비가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행동하실 때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하실 것입니다. 한결같은 지혜와 전능하신 능력, 무한한 사랑이 결합될 때, 신뢰하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어떤 상황을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단 하나의 불안한 생각을 발견할 적절한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이며,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이 장에서 아브라함이 찾을 수 있는 축복된 위치에 두도록 탁월하게 계산된 진리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라. 그러면 내가 너의 가장 큰 소망과 기대 이상으로 그것을 너를 위해 해결해 주겠다. 자손과 상속 재산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영원히 확정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 이어서 "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참으로 축복받은 태도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공허하고 연약하고 무익한 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만물의 주재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차지하기에 합당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흙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부복, 즉 완전한 약함과 무(無)의 의미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관찰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의 확실한 전조입니다. 피조물이 낮아지는 순간,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의 흐릿하지 않은 광채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으며, 그 계시에 비추어 사람이 예배하도록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자기의 합당한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이 장과 앞장에서 아브라함의 태도는 얼마나 다른가! 그곳에서 그는 자연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여기 그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곳에서 그는 배우였습니다. 여기 그는 예배자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사라의 고안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과 환경, 현재와 미래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서, 그를 위해, 그를 통해 행동하시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만들겠다, 세우리라, 주리라, 축복하리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 그분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무엇이든 배운 불쌍한 마음을 위한 진정한 안식입니다.

이제 할례 언약이 소개되었습니다. 믿음의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그 언약의 인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네 집에서 난 자든지 네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와 같이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할례를 받은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우리는 로마서 4장 에서 할례가 “믿음의 의의 인”임을 배웠습니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렇게 의롭다고 여겨짐을 받은 하나님은 그에게 “인”을 치셨습니다.

이제 신자가 인을 받는 인은 육체에 있는 표가 아니라 "약속의 성령이시니 이로써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으셨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연결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분과의 완전한 동일성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너희도 그 안에서 온전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신의 죄의 몸을 벗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 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가 , 그가 너희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와 함께 살리셨느니라." 이것은 할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참된 개념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구절입니다. 모든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 교회의 완전한 칭의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폐지하신 그분과의 살아있는 연합으로 인해 "할례자"에 속합니다. 양심에는 죄의 티끌도 없었고, 그분의 백성의 본성에는 죄의 원칙도 없었습니다. 이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누웠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그분 안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십자가. 육체에는 사망의 선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영광 중에 부활하신 그분의 머리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위의 구절에서 사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살아났다고 가르칩니다. 더욱이 그 여자의 모든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같이 완전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후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결과, 즉 "그의 능력의 힘의 힘에 따라"( 엡 1:19 ) 라고 번역할 수 있듯이, 참으로 놀라운 표현이었습니다. 구원의 규모와 영광은 물론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견고한 기초를 제시하기 위해 계산되었습니다.

마음과 양심이 여기에 있는 안식, 즉 완전한 안식은 무엇입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심령에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지요! 그리스도의 무덤에 장사된 우리의 모든 죄는 단 하나도, 심지어 가장 작은 죄도 없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예리한 눈이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스도의 머리에 얹혀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대신 영원히 지옥에서 그분을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놀랍고 심오하며 영원한 권고의 귀중한 열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체에 어떤 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온 가족은 이렇게 인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위엄과 가치와 변함없는 효능은 성령께서 그것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 안에 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입니다. 오 주님, 당신의 성령의 은총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8장

이 장은 순종하고 분리된 행보의 결과에 대한 아름다운 예를 제공합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 계 3:20 ) 다시, 우리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마련하리라”고 읽습니다. 그와 함께." ( 요한복음 14:23 ) 우리 장과 관련하여 취한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영혼이 세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친교의 특성을 누린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용서나 칭의의 문제와는 아주 거리가 먼 문제도 다루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는 똑같은 흠 없는 의의 옷을 입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눈 아래서 하나의 공통된 칭의 안에 서 있습니다. 한 생명은 하늘에 계신 머리로부터 땅에 있는 모든 지체를 통하여 흘러내립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위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교리는 말씀 속에 완전히 확립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을 통해 계속해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칭의와 그 열매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과 순종하는 아이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순종적인 자녀를 사랑하며 그러한 자녀를 자신의 생각과 계획의 보관소로 삼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관해서도 이것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요한복음 14:23은 이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의 사랑 안에서 걷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명령하는 일을 행함으로써 증명됩니다. 마음이 갈 생각이 전혀 없는 동안에는 "가겠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세부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단순하며 숭고한 동행을 한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그의 역사의 흥미로운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세 가지 특별한 특권, 즉 주님  새 힘을 드리는 것을 누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 주님  온전한 교제를 누리고 , 주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재해 주십시오. 이는 높은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순종하고 구별되고 거룩한 행실의 결과일 뿐입니다. 순종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분 자신의 은혜의 열매로서 주님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유일하게 완전한 사람에게서 그분이 어떻게 끊임없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기쁘게 해 드렸는지 봅니다. 거듭거듭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하늘에서 “사랑하시는 아들, 기뻐하시는 아들”로 증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천국을 향한 끊임없는 잔치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길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향기로운 향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중단도, 변화도, 두드러진 점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유일하게 완전한 분이었습니다. 오직 영만이 아래에서 완전한 삶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영감의 흐름을 따라 여기저기서 우리는 때때로 천국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우리 앞장에서 우리는 마므레에 있는 이방인의 장막이 주님 자신에게 신선한 휴식을 제공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사랑으로 제공되고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신선한 휴식입니다. (버전 1-8)

그런 다음 우리는 아브라함이 첫째로 자신의 개인적 이익과 관련하여(9-15절), 둘째로 소돔의 운명과 관련하여 주님과 깊은 교통을 누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16, 21절) 절대적인 약속( 사라 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얼마나 확증이 되었는가!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웃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어떤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분명한 방법으로 나타나실 때 우리 입에 가득 채우는 웃음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이키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자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 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그들이 이방인 중에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뻐하노라' ( 시 126:1-2 )

또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커서 우리의 좁은 마음이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또는 눈에 보이는 대리자가 그분의 장대한 계획을 성취하기에는 너무 작다고 판단할 때 불신앙이 우리 입에 가득 차는 웃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 첫 번째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온의 아들들은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 시 126:2 ) 여호와께서 우리를 웃게 하시면 우리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습니다. “사라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두려워서 웃지 아니하였느니라” 불신은 우리를 겁쟁이와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믿음은 우리를 담대하고 진실되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가 “담대히 나아가”고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더욱이 아브라함은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보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그 일과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그는 주님과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관해 그분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길은 그 계획과 추측에 있어서 그것과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고 그분의 말씀에 더 많이 복종할수록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생각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위해 신문을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그 순수하고 성스러운 페이지에서 나는 세상의 성격, 과정, 운명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웁니다. 반면에 내가 소식을 얻기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가면 악마가 그들을 이용하여 내 눈에 먼지를 던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의 사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소돔을 방문했다면, 소돔의 현재 상태와 미래의 전망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자 그 도시의 몇몇 지도자들에게 문의했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했을 것입니까?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농업과 건축 계획, 즉 국가의 광대한 자원에 그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팔고, 짓고 심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광활하고 혼합된 장면을 그의 눈앞에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결코 심판을 꿈도 꾸지 않을 것이며 만일 누군가 그것에 대해 언급했다면 그들의 입에는 불신앙적인 웃음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돔은 소돔의 종말을 알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니요;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섰던 곳"은 전체 전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적절한 지점을 제공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돔의 지평선에 모인 안개와 안개를 완전히 넘어 설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명료함과 고요함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지식과 높은 지위를 어떻게 활용했습니까? 그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점유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우리는 이 장에서 축복사가 누리는 세 번째 특별한 특권을 알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 . 그는 소돔의 더러움에 연루되어 소돔의 심판에 연루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자리를 만드는 행복하고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믿음의 확신 속에서, 마음과 양심이 완전히 안식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영혼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해 중재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사람은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 이것은 하늘로 올라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의 중보에 대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을 보여 주는가! 그분께서는 모든 신의 계획 안에서 무한한 안식을 누리시며, 그분께서는 하늘에 계신 위엄의 광채 가운데 보좌에 앉아 계시며, 더러움 가운데서 수고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 위엄 앞에서 얼마나 큰 힘으로 간구하시는지요. 이 모든 중보기도의 대상인 그들은 행복하고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동시에 행복하고 안전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들어갈 마음,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통으로 넓어진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무한한 은혜의 충만함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한 그분의 공급의 적합성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구에서 아브라함의 중보가 얼마나 축복받았을지 모르지만 중보자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것은 필요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 아직 이번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 라고 말하다가 마치 무한한 은혜의 창고에 너무 큰 환어음을 제출한 것이 두려운 듯이, 또는 믿음의 수표가 아직 하나님의 은행에서 부도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을 멈췄습니다. 그가 하나님 안에서 궁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아니다. 그가 세 사람이나 한 사람에게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의 사랑하는 종의 말을 들었을 때 그에게는 풍성한 은혜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좌에서 초과 인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구하기를 그쳤고, 하나님도 주기를 그쳤습니다. 우리의 축복받은 중보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그분은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 … 그가 항상 살아서 중보하시느니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모든 필요와 약함과 갈등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그분께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을 마무리하기 전에 나는 이 부분이 그 안에 포함된 진리에서 적절하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 발언을 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교회의 구체적인 희망을 구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구약의 예언 전체와 신약의 대부분은 전자를 다루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나라들과 함께 무엇을 하고 계시고, 또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아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두로, 바벨론, 니느웨,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읽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집트와 앗수르와 이스라엘 땅에 관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구약의 예언 전체는 모든 참된 신자들의 기도하는 마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점은 거기에는 교회의 올바른 희망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교회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교회가 그곳에서 가장 행복하고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도덕 원칙의 풍성한 수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곳에서 그녀의 고유한 존재와 구체적인 희망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예언 중 상당 부분이 교회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적용은 전체 주제를 그러한 안개와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단순한 마음은 연구에서 겁을 먹고, 예언 연구를 등한히 함으로써 예언과 전혀 다른 것, 즉 적절하게 소위 말하는 것까지도 등한히 했습니다. 잘 기억해야 할 교회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민족들과 함께 행하실 일이 아니라, 하늘 구름 속에서 주 예수님을 만나 영원히 그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분처럼.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예언할 머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 아마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 확실히 당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비록 예언적 탐구에 대한 능력이 없을지라도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할 것입니다. 다정한 아내에게는 남편의 일에 개입할 머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귀환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장부와 일기장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발자취를 알고 그의 목소리를 알아봅니다. 가장 배우지 못한 성도라도 주 예수라는 인격에 대한 애정만 갖고 있다면 그분을 보고자 하는 가장 강렬한 열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희망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 데살로니가 전 1:9-10 ) 이제 분명히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개종하는 순간에 예언이나 그에 관한 특별한 주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순간에 교회의 특별한 희망, 곧 아들의 오심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그러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거기에는 예언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도덕적 정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희망, 즉 단순하고, 방해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희망은 신랑이 돌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구절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에 "그 복된 소망"을 되살려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택하신 자들의 수를 모으시고 "주를 위하여 예비된 백성을 준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9장

이 현 세상에서 마음을 멀어지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은혜롭게 채택하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위에 있는 것"의 매력과 안정성을 그 앞에 두는 것입니다. 둘째, '땅에 있는 것들'의 덧없고 흔들리는 속성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 장의 끝 부분에서는 이러한 방법 각각에 대한 아름다운 예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모든 기쁨과 특권을 가지고 시온산에 왔다는 진리를 말한 후,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요 하물며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이를 배반하면 우리가 어찌 피하지 못하겠느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만드신 것들처럼 흔들리는 것들을 제거하시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있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는 땅의 슬픔에 이끌리는 것 보다 하늘의 기쁨에 이끌리 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신자는 현세에서 흔들리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세상을 포기하기 전에, 세상이 그를 포기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늘의 것들과 교통하는 능력으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세상을 버리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청소부에게 연간 1만 재산이 남게 된다면 그는 오랫동안 거리를 청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몫을 깨닫고 있다면, 우리는 지상의 기만적인 기쁨을 포기하는 데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제시된 영감받은 역사의 엄숙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롯이 권위의 장소인 “소돔 성문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분명히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성공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행로는 성공적인 행로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소돔을 향하여 장막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그 길을 찾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문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눈에 띄고 영향력 있는 자리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앞 장의 시작 부분과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아! 독자 여러분,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 믿음으로 아브람은 낯선 땅 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장막에 거하였느니라.” 롯에 관하여는 그러한 진술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아! 아니요; 그는 신앙의 힘에 대한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의 고귀한 군대 가운데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의 올가미였고, 현재의 사물은 그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들과 일시적인 것들”을 보았지만,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보았습니다. 비록 함께 출발했지만 공개 증언에 관한 한 매우 다른 목표에 도달한 두 사람 사이에는 매우 실질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롯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은 "불에 탄 것 같더라". 왜냐하면 진실로 "그의 업적이 타버렸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얻었”습니다.

{*모든 일과 관련하여 "내가 믿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마음에 대한 매우 예리한 질문을 제공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더욱이, 우리는 롯이 아브라함이 누렸던 높은 구별과 특권을 누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롯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그의 의로운 영혼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는 주님 과의 교제를 누리는 대신에 주님 으로부터 애석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재하는 대신 자신을 위해 중재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찾았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과 교통하기 위해 남아 계셨고 다만 그분의 천사들을 소돔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롯의 집에 들어가도록 유도되거나 그의 환대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 얼마나 큰 책망입니까! “네가 말한 대로 그대로 행하라”는 말로 표현된 아브라함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어떤 사람의 환대에 참여하는 행위에는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현명하게 바라볼 때 그분과의 온전한 교제를 표현합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그도 나와 함께 하리로다.” “만일 너희가 나를 여호와 믿는 자로 여기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그들이 그녀를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녀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롯에게 보낸 천사의 말에는 소돔에서의 그의 지위에 대한 가장 무조건적인 정죄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지붕 아래로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밤새도록 거리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소돔에 온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롯을 구출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역시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평지의 성을 멸하실 때에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느니라.” 이것은 강력하게 표시됩니다. 롯이 살아남은 것은 단지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적인 마음을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롯을 범죄한 도시의 더러운 가운데 정착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결코 그를 거기에 두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마음은 결코 그를 거기에 두지 않습니다. "그의 의로운 영혼"은 그를 결코 거기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먼저 " 선택 "하고 그 다음에는 "장막을 치고" 마지막으로 "소돔 성문에 앉게" 한 것은 이 악한 현 세상에 대한 단순한 사랑이었습니다 . 그리고, 아! 그가 선택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그것은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부러진 갈대가 그의 손을 찔렀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을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쓰라린 일입니다. 우리는 가장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모든 길을 명령하시도록 하고,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우리를 위해 그토록 원하시고 관리하실 수 있는 그분께 그 모든 길을 맡기는 것이 무한히 더 좋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축복받은 손에 펜을 쥐어 주시고, 그분 자신의 틀림없는 지혜와 무한한 사랑에 따라 우리의 전체 과정을 그려 가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롯은 소돔으로 이사했을 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속편에서는 그가 얼마나 완전히 실수를 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귀에 가장 엄숙한 목소리, 즉 세상적인 영의 초기 작용에 우리가 어떻게 굴복하는지 조심하라고 말하는 목소리로 들립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 왜? 당신이 세상에서 너무 잘 지내기 때문입니까? 당신의 불쌍하고 방황하는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환경에는 헛된 욕망이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까? 이것이 우리 만족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까? 결코 아니다. 그럼 어쩌지?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축복받은 부분! 롯이 그것으로 만족했다면 그는 결코 물이 풍부한 소돔의 평야를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족한 정신을 행사하도록 유도할 추가 근거가 필요하다면 이 장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롯은 행복과 만족을 통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실제로는 거의 없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그의 집을 둘러싸고 그 집에 침입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는 가장 굴욕적인 제안으로 그들을 달래려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사람이 자기 확장을 목적으로 세상과 어울리려면 슬픈 결과를 견디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없으며 동시에 세상의 사악함에 대해 효과적인 증언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우거하러 들어왔으니 그가 재판관이 되어야 하리라."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심판의 길은 바리새주의의 오만한 정신이 아니라 은혜의 도덕적 능력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교제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면서도 세상의 방식을 책망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세상은 그러한 책망과 그러한 증언에 별로 무게를 두지 않을 것입니다.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한 증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조롱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심판받는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의 자리와 몫과 누림을 찾으면서 심판에 접근한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심판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심판에 관해 말할 수 있는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마므레에 있는 이방인의 장막은 위험하지 않았지만 소돔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오! 우리 마음은 이방인이 된 귀한 열매를 더 갈망하여 불쌍한 롯처럼 주력에 의해 세상 밖으로 끌려가는 대신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거룩한 민첩함으로 , 레이서처럼 목표를 향해 전진합니다.

분명히 롯은 천사의 능력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장면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그를 붙잡아 임박한 심판에서 그를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가 난파선에서 구원할 수 있는 전부) 권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산으로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옵나이다 내 주여 보소서 이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내게 베푸신 자비를 크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셨으니 내가 산으로 도망갈 수 없나이다 어떤 재앙이 일어나서 내가 죽으리니 이제 이 성읍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도다 나로 그 곳에 도망하게 하소서(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정말 멋진 사진이에요! 그는 떠다니는 깃털이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익사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천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작은 도시", 즉 세상의 작은 조각이라는 생각에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서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악을 두려워했으며, 자신이 고안한 어떤 작은 도시에서만 안전을 바랄 수 있었습니다. 오! 그리 하면 내 영혼이 살리라." 참으로 슬프다.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길 수는 없다. 아아, 그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걸었고, "성"의 짙은 대기를 너무 오랫동안 호흡했다. 하나님의 임재의 ​​순수한 공기를 감상할 수 있거나 전능자의 팔에 의지할 수 있느니라 그의 영혼은 완전히 흔들리는 듯 보였고 그의 세상 보금자리는 갑자기 무너져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할 수 없었느니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통을 계발하지 않았으며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엄청난 속도로 그의 발 밑에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그의 희망과 모든 애정은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도둑이 그에게 침입했고, 그는 영적인 용기와 침착함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강한 세속적 요소가 우세합니다. , 그리고 그는 "작은 성"에서 그의 유일한 피난처를 찾았으나 그곳에서도 편하지 못하니, 이는 그가 그곳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의 명령에도 하지 않을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의 최후를 보아라! 그의 자녀들이 그를 취하게 하고, 그의 술 취함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단호한 원수인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을 존재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여기에는 얼마나 엄숙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까! 오! 독자 여러분, 세상이 어떤 것인지 여기에서 보십시오! 마음이 그 일을 따르도록 허용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보십시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간단하지만 포괄적인 훈계에 대한 롯의 역사는 얼마나 놀라운 해설입니까? 이 세상의 소돔과 그 소알은 다 똑같습니다. 그 안에는 안전도 없고 평화도 없고 안식도 없고 마음에 견고한 만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장면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래 참으심으로 자비를 베푸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며 칼을 거두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의 거룩한 분리의 길을 추구합시다. 우리는 그 전체 범위 밖에 서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이도록 합시다. 물이 풍부한 평원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않기를 바랍니다. 장차 올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그 영예와 탁월함과 부요함을 우리가 모두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거룩한 족장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면전으로 일어나 그 높은 곳에서 널리 퍼진 파멸과 황폐의 현장을 바라보고 믿음의 예견적인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흡연 폐허. 그럴 것이다 . “땅과 거기에 있는 것들이 다 타버릴 것임이니라.”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토록 몹시 염려하고 그 후에 그토록 열렬히 붙잡고자 하는 모든 것,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다투는 모든 것, 모두가 다 불살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말할 수 있습니까? 소돔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모라는 어디에 있나요? 평지의 도시들, 한때 생명이 있었고, 떠들썩하고 떠들썩했던 그 도시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절되었습니다. 그분의 불과 유황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심판이 이 범죄한 세상에 달려 있습니다.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심판이 임박한 동안 은혜의 감미로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믿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견고한 산으로 도피하는 자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뒤에 피신하여 그 안에서 용서와 평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죄에서 깨끗해진 양심과 세상의 더러운 영향력에서 깨끗해진 마음의 애정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오실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0장

이 장에는 두 가지 뚜렷한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때때로 겪는 도덕적 타락입니다. 둘째,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그 사람에게 속한 도덕적 존엄성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그가 그랄에 우거하며 그 곳 사람들을 두려워하느니라. 그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다고 판단하여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는 그들보다 강하신 분보다는 그랄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하고 몇 년 전 애굽에서 채택했던 것과 동일한 계략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매우 훈계입니다. 충실한 자의 아버지는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끌려갔습니다. 그는 잠시 동안 하나님 안에 있는 중심을 잃어버렸고, 그리하여 굴복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약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매달릴 때에만 우리가 강해진다는 것이 참으로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정하신 길에 있는 한 그 무엇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단순히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면 그랄 사람들은 그에게 간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옹호하는 것이 그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그 결과 모든 비상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세상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는 것은 종종 마음에 슬픔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사는 한, 우리는 모든 형태와 형태에 있어서 세상보다 위에 있을 것입니다. 믿음만큼 도덕적 존재 전체를 고양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이 세상의 생각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믿음을 전달합니다. 세상 사람들, 심지어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믿음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끌어당기는 샘은 그들의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 사물의 표면에 살고 있습니다. 희망과 확신을 위한 적절한 기초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한, 그들은 희망과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한다는 생각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연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면 속에서도 침착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판단으로 볼 때 믿음은 무모하고 경솔하며 공상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믿음의 행위를 승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그러한 행위의 견고하고 참으로 합리적인 근거를 실제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불신의 세력 아래 있을 때 자신의 행위로 인해 실제로 세상 사람들의 책망과 비난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믿음 외에는 어떤 것도 사람의 행로와 품성을 참으로 향상시킬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올바르고 명예로운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자연의 올바름과 명예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쁜 기초 위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어느 순간 굴복하기 쉽습니다. 진정으로 고상한 도덕적 어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살아 있는 능력을 지닌 영혼을 참된 도덕성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과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데려오신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낮은 위치로 가라앉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역사의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많은 관심과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여러 해 동안 악한 일을 품고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의 영혼에 어떤 여유를 갖고 자신의 길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예비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사라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다면 어떤 유보나 속임수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질병으로부터 그녀를 둘러싸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잠들지 않는 보호 아래 행복한 신민인 이들에게 누가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긍휼을 통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어 철저히 자백하고 판단하여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동 방법입니다. 누룩의 모든 입자가 빛 가운데로 나와 발 아래 짓밟힐 때까지는 참된 축복과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없습니다. 그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참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룩이 알려져 있고 심판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분은 결코 영혼을 축복과 능력의 정점으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관점에서 후자의 도덕적 존엄성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우리가 그들을 전체로 보든 개인으로 보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보시기에 보이는 것과 세상이 보기에 보이는 것 사이의 놀라운 차이에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백성을 보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을 “점이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보신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위에 있어서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느니라.”

그러나 그 자체로는 가난하고, 약하고, 불완전하고, 걸림돌이 되고, 일관성이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지식을 얻는 것은 그 자체로서,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에 신적인 평가와 인간의 평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백성의 아름다움과 존엄성과 완전성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부여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그분의 독점적인 특권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입혀주신 아름다움으로 인해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선언하는 것은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그분은 자신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그 일을 행하시며, 원수가 와서 상처를 입히고 저주하고 비난할 때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락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저주하려고 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은 “내가 야곱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보지 못하였음이라”고 하신 것이다. “야곱아 네 장막이여, 이스라엘이여 네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다시, 사탄이 여호수아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꾸짖으시니… 그러므로 그분은 항상 그분의 백성과 그들을 비난하는 모든 혀 사이에 자신을 두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어떤 사람인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인지를 언급하여 비난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분 자신이 그들을 만드셨고 어디에 두셨는가를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눈에 자신을 낮출 수도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를 꾸짖어야 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처리하러 오셨을 때, 그분은 아비멜렉에게 “보라, 너는 죽은 자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이 온전하고 손이 깨끗”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랄 왕은 “죽은 자”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 가족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잘못을 범하고 일관성이 없는 낯선 사람의 기도에 빚진 자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실제적인 방식을 근거로 그분의 자녀와 많은 은밀한 논쟁을 벌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가 그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할 때 여호와께서는 항상 그의 종의 주장을 변호하십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상하지 말라.” "너희를 만지는 자는 내 눈동자를 만지는 자니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원수의 화살이 그 방패를 뚫지 못하느니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사신 양 떼 중에서 가장 약한 어린 양을 그 방패 뒤에 숨기셨느니라 그가 자기 백성을 자기 장막에 숨기시며 만세의 반석 위에 그들의 머리를 드시고 주위에 있는 그들의 원수들 위로 그들의 마음을 채우시며 그의 침 구원의 영원한 기쁨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우시느니라.

그의 이름이 영원히 찬양되리로다!

 

창세기 21장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약속, 즉 하나님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복된 열매를 성취했습니다. 아무도 헛되이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 영혼은 결코 그를 실망시키지 않는 안정된 현실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대로 모든 충실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장면의 불만족스러운 그림자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몫과 안식처로 삼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의 닻을 휘장 안에 던지기 위해; 우리 영혼의 위로와 평안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두 가지 불변의 요소인 하나님의 말씀과 맹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실로서 아브라함의 영혼 앞에 섰을 때, 그는 그 성취를 이루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한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연의 애정이 서로 얽힐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나중에 아브라함이 수행해야 할 더 어려운 작업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발전시키거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자연은 결코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방문하셔야 하고 주님은 "행해야" 하며 믿음은 기다려야 하며 자연은 고요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죽은 무가치한 것으로 버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신성한 영광이 빛날 수 있고, 믿음은 그 모든 풍성하고 감미로운 보상보다 더 빛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라가 임신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기한이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 하나님의 “정한 때”, 그의 “정한 때” 같은 것이 있으며, 이를 위해 충실한 자들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고, 연기된 희망이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확신에서 안도감을 찾을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으니 그 종말이 이르고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아니하고 정녕 응하리라 …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 하박국 2:3-4 ) 이 놀라운 믿음이여!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의 모든 능력을 우리 현재에 가져오며, 현재의 현실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먹여 살립니다. 모든 외적인 것이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힘으로 영혼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입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았을 때에 백세였더라.” 그러므로 자연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였습니다." 사라가 말했습니다. “ 하나님이 나를 웃게 만드셨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 모든 것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제 이삭의 탄생이 사라의 입에 웃음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집에 완전히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습니다. 자유여인의 아들은 여종의 아들의 진정한 성격을 매우 빠르게 발전시켰습니다. 실제로 이삭은 원칙적으로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죄인의 영혼에 새 성품을 심는 것이 무엇인지 증명했습니다. 이스마엘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 여종의 아들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큰 나라가 될 수도 있고, 광야에 거할 수도 있고, 활 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열두 방백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내내 여종의 아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삭은 아무리 약하고 멸시받을지라도 자유가 있는 여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지위와 품성, 그의 지위와 전망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거듭남은 옛 성품의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성품의 도입이다. 그것은 성신의 역사에 의해 둘째 아담의 본성과 생명이 이식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속 위에 기초를 두고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나 계획을 완전히 준수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순간 새 생명을 얻은 자,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유가 있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 롬 10:9 ; 골로새 3:4 ; 요한 1서 3:1-2 ; 갈라디아 3:26 ; 갈라디아 4:31 참조 )

또한 이 새로운 성품의 도입은 옛 성품의 참되고 본질적인 성품을 조금도 바꾸지 않습니다. 후자는 이전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어떤 면에서도 더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요소에 반대되는 악한 성격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을 거스리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이니라.” 거기에는 그것들이 뚜렷하게 존재하며, 그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서만 부각됩니다.

나는 신자의 두 본성에 관한 이 교리가 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무지가 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지위와 특권에 관하여 마음은 완전히 바다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거듭남을 옛 본성이 겪는 어떤 변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변화는 점진적으로 작용하여 마침내는 인간 전체가 변화됩니다. 이 생각이 건전하지 않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다양한 인용문을 통해 입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습니까? 사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복종 할 수 없다면 어떻게 개선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육신으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육신은 언제나 육신입니다. 솔로몬이 말했듯이, “네가 절구와 밀 사이에서 유봉으로 미련한 자를 울릴지라도 그의 미련함이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 잠언 27:22 )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리석음에만 지배되어 온 마음에 하늘의 지혜를 도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렸느니라.” ( 골로새 3:9 ) 그분은 너희가 "옛 사람"을 향상시켰거나 향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미루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생각을 줍니다. 낡은 옷을 수선하려고 하는 것과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과 새 옷을 입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인용된 구절의 사상입니다.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뚜렷하거나 단순한 것은 없습니다.

옛 본성이 점진적으로 개선된다는 점에서 이론의 불건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즉 옛 본성이 죄로 죽었고, 전혀 갱신할 수 없고 개선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구절을 쉽게 늘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늘에 부활하신 머리와 연합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새 생명의 능력으로 그것을 우리 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이스마엘을 향상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약속의 자녀에 대한 그의 진정한 반대를 불러일으켰을 뿐입니다. 그는 이삭이 나타날 때까지 매우 조용하고 질서 있게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부활의 자녀를 핍박하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치료법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마엘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8-10) 여기에 유일한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비뚤어진 것은 곧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부러진 것을 완전히 제거하고 신적으로 곧은 것에 전념하기만 하면 됩니다.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개선한 이후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전혀 헛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가꾸고 개선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한히 더 나은 일, 즉 당신이 창조한 것을 경작할 수 있는 일을 주셨으며, 그 열매는 그들이 결코 자연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갈라디아 교회가 빠진 오류는 자연에 호소하는 내용을 도입한 것입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구원은 사람이 될 수 있거나, 사람이 할 수 있거나,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알고 있듯이 오직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그가 행하신 일에만 의존하는 구원의 영광스러운 구조 전체를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을 인간 안에 있거나 인간이 행한 모든 것에 가장 먼 방식으로 의존시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제쳐두는 것입니다. 즉, 이스마엘은 완전히 추방되어야 하며, 아브라함의 모든 희망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행하시고 주신 일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만약 현재나 미래의 축복이 자연에 이루어진 신성한 변화에 달려 있다면 육체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비록 나의 성품이 향상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에게 속한 것이 될 것이며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누리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새로운 피조물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시고, 성숙하시고, 발전시키신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배우이시고 나는 예배자입니다. 그는 축복자이고 나는 축복받은 자입니다. 그는 "더 나은 것"이고 나는 "더 적은 것"입니다. ( 히브리 7:7 ) 그분은 주는 분이시고 나는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현재의 기독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을 루마니아, 푸세이주의, 또는 다른 어떤 사상이든 태양 아래 인간 종교의 모든 체계와 구별합니다. 인간의 종교는 피조물에게 어느 정도 장소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여종과 그녀의 아들을 집에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랑할 만한 것을 줍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구원 사업에 대한 모든 간섭으로부터 피조물을 배제합니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시고 모든 영광을 오직 그분께 돌리시느니라.

하지만 이 여종과 그녀의 아들이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 장은 이 두 가지 요점에 관해 충분한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여종은 한마디로 율법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율법 행위" 또는 그 원칙에 따른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ex ergon nomou ). 이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여종은 속박으로 성별을 정할 뿐, 결코 자유인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법은 결코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법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 로마 7:1 ) 나는 누구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동안에는 법이 나를 다스립니다. 그리고 죽음 외에는 그 무엇도 나를 그 지배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복된 교리이다 . 7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시집가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자유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6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자의 자녀니라. ( 갈라디아서 4:31 )

이제 우리는 이 자유의 힘으로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면 나는 여종을 집에 가두는 등 가능한 가장 이상한 방법으로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즉, 법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의를 확립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속박의 요소를 쫓아내는 데는 투쟁이 수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는 우리 마음에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때문에 그 일이 심히 괴로웠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갈 5:1 )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마련의 축복에 완전하고 실험적으로 들어가서 육신에 대한 모든 생각과 육신이 할 수 있고 행하며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자연에 대한 모든 호소를 완전히 불필요하고 헛되게 만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기 22장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을 가장 혹독한 시험에 빠뜨릴 수 있는 적절한 도덕적 위치에 있습니다. 창 20장 에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예비품이 그의 마음에서 나오며, 여종과 그 아들이 그의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창 21장 에서와 같이 이제 그는 모든 영혼이 차지할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손에서 심판받는 자리에 놓일 수 있습니다. 시련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즉 사탄의 손에서 오는 시련입니다. 주변 상황에서 재판; 그러나 시련의 가장 높은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의 실제성을 시험할 목적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풀무불에 넣으실 때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에게는 실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나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위선이나 거짓 고백의 요소가 마음에 머물지 않도록 마음의 밑바닥까지 조사되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주어라 ." 그분은 “네 머리나 지능이나 재능이나 혀나 돈을 나에게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네 마음을 내게 주소서” 그리고 이 은혜로운 명령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분은 우리 마음과 매우 가까운 곳에 손을 얹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의." 이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매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를 탐색하는 도가니를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진실함을 요구하시느니라.” 입술에는 진실이 많고 지성에는 진실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마음에서 찾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사랑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일반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그분 자신도 일반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아들을 주셨고, 우리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에도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대한 매우 놀라운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실 때 우리에게 큰 영예를 주신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롯을 시험하셨다”는 말을 결코 읽지 못합니다. 아니요; 소돔은 롯을 유혹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손에 의해 시련을 받을 만큼 충분히 높은 곳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과 주님 사이에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그러므로 그것을 꺼내기 위해 풀무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소돔은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유혹도 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14장에서 소돔 왕과의 인터뷰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소돔보다 그를 훨씬 더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물건에 손을 얹음으로써 그 누구보다 그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데려가라.” 그렇습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소망의 대상이요, 부모의 사랑의 대상이요,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자 이삭이니라. 이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이는 실로 믿음을 시련함이라. 이는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온 영혼이 단순히 주님께만 머물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살피는 명령에 주저 없이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그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살아 있고 변함없는 버팀목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원천을 찾은 영혼은 어떤 이의도 없이 모든 피조물의 흐름에서 물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를 발견했거나 경험적으로 알게 된 정도에 따라 피조물을 포기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 신앙의 힘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보이는 것을 포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장 무익한 노동입니다.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을 발견할 때까지 나의 이삭을 금식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러므로 땅이 옮겨질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산이 바다 가운데로 옮겨지느니라." ( 시 46:1-2 )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준비된 순종이 있습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서두르고 지체하였나이다.” 믿음은 상황을 살펴보거나 결과를 숙고하는 데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이렇게 표현된다; “내 모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갈라디아 1:1 , 5 , 16 ) 우리가 혈과 육으로 대화하는 순간 우리의 증언과 섬김은 훼손됩니다. 혈과 육은 결코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찍 일어나서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받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우리 행동의 기초로 삼는 것은 우리 행동에 언제나 힘과 안정성을 더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면, 충동이 가라앉으면 행동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꾸준하고 일관된 행동 과정에 필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즉 행동의 능력인 성신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친숙한 예를 사용하자면, 철로에서 우리는 철로가 단단히 놓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증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전자는 우리가 움직이는 힘이다. 후자는 방향이다. 레일이 증기 없이는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두 가지 모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행동의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동하라는 명령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의 헌신은 매우 분명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헌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활동을 따르지 않는 의지의 방종한 활동에 불과한 것을 자주 발견합니다. 그러한 겉으로 보이는 헌신은 모두 무가치하며, 그 헌신의 정신은 매우 빠르게 증발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울 수 있습니다. 즉, 헌신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넘어설 때마다 그것은 의심스럽습니다. 이 범위에 미치지 못한다면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 없이 흐르면 ​​그것은 불규칙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고 일반적인 한계를 뛰어 넘는 특별한 활동과 방법이 있음을 확실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증거가 모든 영적 마음에 확신을 심어줄 만큼 충분히 강력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참된 헌신이 언제나 신성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 원칙에 의해 다스려질 것이라는 원칙의 진리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가장 특별한 헌신의 행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 행위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는 참된 헌신과 관련된 또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들의 정신입니다. "나와 그 아이는 저쪽으로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정말로 헌신된 종은 자신의 봉사가 아무리 크더라도 눈을 떼지 않고 주인을 바라볼 것이며, 이것이 예배의 영을 낳을 것입니다. 내가 육신으로 내 주인을 사랑하면 그의 신발을 닦아주든지 그의 마차를 몰든지 상관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나 내가 그 사람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면 구두를 신는 것보다 마부가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분만을 생각한다면 교회를 세우는 일과 천막을 짓는 일은 나에게 똑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의 사역에서도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사가 군대를 파괴하기 위해 파견되었는지, 구원의 상속자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는지 여부는 천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비전을 완전히 채우는 분은 바로 스승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만약 두 천사가 하늘에서 파견되어 한 사람은 제국을 다스리고 다른 한 사람은 거리를 청소하게 된다면 그들은 각자의 일에 관해 논쟁을 벌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사실이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은 언제나 예배자와 결합되어야 하며, 우리 손의 일은 우리 영혼의 뜨거운 호흡으로 향기로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나와 아이가 저기 가서 예배하리라"라는 기억에 남는 말씀의 정신으로 우리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빠져들기 쉬운 단순한 기계적인 봉사로부터 우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해 줄 것입니다. 일을 하기 위해 일하며, 우리 주인보다 우리 일에 더 열중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자기의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히브리 11:17 )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에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일을 시작하고 계속하고 끝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의 아들을 바치러 나섰을 뿐만 아니라 계속 나아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매” “아브라함이 거기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잡으려 하더라.” 그의 아들." 이것은 진정한 일, 즉 최고의 의미에서 “믿음의 일이자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었습니다. 입술로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마음은 멀었지만, "선생님, 저는 가다가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심오한 현실이었고, 그러한 믿음은 언제나 산출하기를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구가 없을 때 헌신을 과시하는 것은 쉽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영원히 버릴지라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나는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요점은 재판을 견디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험을 받았을 때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믿음은 결코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지 않고 주님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공허한 허식의 정신보다 더 철저히 무가치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기초만큼이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시험을 받을 때에”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눈에 띄지 않고 침묵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러한 거룩한 믿음의 활동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나오는 샘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직접적인 대상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전체 역사에서 모리아 산의 장면만큼 하나님께서 그토록 영광을 받으셨던 장면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신선한 샘물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다는 사실, 즉 이삭의 출생 이전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감동적인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안식하는 것과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축복이 흘러가는 통로가 내 눈앞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채널이 완전히 중단되었을 때 그분을 신뢰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탁월함을 입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이 건강하고 활력있게 그 앞에 서 있는 동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씨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단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단에서 담배를 피우는 희생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였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자신감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창조주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피조물에 의해 뒷받침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그것은 하나의 단단한 받침대, 즉 하나님 자신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느니라." 그는 결코 이삭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이삭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삭 없이는 하나님만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원칙이며 마음을 가장 날카롭게 시험하기 위해 탁월하게 계산된 원칙입니다. 내가 받은 모든 축복의 통로가 말라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나는 예배하는 정신으로 피조물의 모든 강물이 말라가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샘물 근처에 충분히 살고 있습니까? 나는 이것이 검색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손을 뻗어 칼을 잡고 내 아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단순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눈이 부활의 하나님께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느니라.”

한마디로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는 타격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대한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넘어갈 수 없는 선까지 이르렀습니다. 세존께서는 당신 자신의 마음을 아끼지 않으셨던 고통, 심지어 당신 아들을 치는 고통까지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끼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한계를 뛰어넘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상함을 주기를 기뻐하사 그에게 질고를 당하게 하셨느니라.” 갈보리산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바치셨을 때 하늘에서는 아무런 음성도 없었습니다. 아니요; 그것은 완벽하게 성취된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취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평화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헌신은 충분히 입증되었고, 온전히 받아들여졌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마크는 "이제 알아요"입니다. 이전에는 증명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거기 있었고, 만일 거기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의 제단에서 제공된 뚜렷한 증거를 통해 그것에 대한 지식을 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행동으로 증명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것에서 나오는 열매로 증명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 2:21 ) 누가 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빼앗아 가면 아브라함은 모리아에 살인자요 미치광이로 나타납니다. 믿음을 고려하면 그는 헌신적인 예배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믿음은 증명되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다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 야고보서 2:14 ) 무력하고 무익한 고백에 하나님이나 사람이 만족할 것입니까?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은 현실을 찾으시고 그가 보시는 곳에서 그것을 존중하십니다. 인간은 행위로 나타나는 생생하고 이해 가능한 신앙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믿음의 표현은 모든 입술에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 희귀한 보석입니다. 사람이 현재 상황의 해안에서 밀려나 파도와 바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믿음, 그리고 그것을 만날 뿐만 아니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믿음입니다. 베개 위에서 자고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여기서 나는 칭의라는 주제에 관해 야고보와 바울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완전 영감이라는 중요한 진리에 고개를 숙이는 총명하고 영적인 독자는 이 문제에 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울이나 야고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은혜롭게 사용하신 성령께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깃펜이나 쇠펜을 들고 내 생각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펜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하나다. 그러므로 두 개의 천체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궤도를 따라 움직이다가 충돌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두 작가가 충돌할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두 사도 사이에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조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칭의라는 주제에 있어서 전자는 후자의 대응물이거나 지수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내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야고보는 그 원리의 외적인 발전을 제시합니다. 전자는 숨겨진 생명을 나타내고, 후자는 나타난 생명을 나타낸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 원합니다. 내면은 외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면이 없으면 겉은 무가치하고 무력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의롭게 되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쳤”을 때 “의롭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의 비밀스러운 입장이 있습니다. 후자에서는 하늘과 땅이 그를 공개적으로 인정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는 하늘로부터 아무 음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거기 있었고 그 당시에는 “의롭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아들을 제단에 바쳤을 때” 하나님은 “이제 내가 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아브라함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하고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내적인 원리가 있는 곳에는 외적인 행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모든 가치는 전자와의 연관성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가 제시한 아브라함의 행동과 바울이 제시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잠시 분리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에는 어떤 의로운 능력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가치, 모든 효능, 모든 미덕은 그것이 그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졌습니다.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놀라운 조화, 또는 오히려 바울이나 야고보의 음성인 성령의 음성의 통일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장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영혼이 믿음의 시련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되면 분명히 그분의 성품과 관련하여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이는 시험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손을 뻗지 않았다면, 그는 여기서 그가 하나님께 부여한 칭호, 즉 “여호와 이레”의 풍부하고도 놀라운 깊이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시험을 받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발견하게 됩니다. 시련이 없다면 우리는 단지 이론가일 뿐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깊은 곳, 즉 그분과 개인적으로 교통하는 신성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다른 감정과 확신을 갖고 모리아에서 브엘세바까지 자신의 발걸음을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맹세의 우물까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참으로 다릅니다! 이삭의 생각은 참으로 달랐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은 얼마나 다른가! 진실로 우리는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주신 영예이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경험의 깊은 축복은 쉽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시편 107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리할 때까지" 하나님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때입니다. 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은혜를 구하옵시며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나타내고 그 이름이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장에 대한 나의 설명을 마치기 전에 내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행동을 행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입니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 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네 자손으로 번성하여 네 씨로 번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 네 자손이 그 대적 의 문을 얻으 리라 천하 만민이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순종하였음이니라”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우리 앞에 제시된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한 성령의 주의와 아름답게 일치합니다 . 11 그리고 야고보서 2 장에서도 그는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으로 간주됩니다. 전체 문제에 전달되는 중요한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을 완전히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더욱이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구성하고 자리잡게 한 것도 바로 이 원리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충만함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는 말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 나 자신 ”이라는 놀라운 단어는 믿음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그가 더 큰 자로 맹세할 수 없으므로 자기를 두고 맹세하노니… 사람이 진실로 더 큰 자로 맹세하리니 확정을 위하여 맹세하면 모든 싸움이 그 사람에게 있느니라.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보이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맹세는 인간 의지의 모든 노력과 활동을 끝내야 하며, 이 폭풍우가 치는 세상의 모든 요동과 소란 속에서도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닻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마음에 있는 능력이 적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정죄해야 합니다. 그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고 공언합니다. 하지만 아!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만큼 깊고, 영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위로”를 그것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우리 이삭을 죽일 준비가 얼마나 부족합니까! 우리는 그분 자신을 믿는 믿음의 삶의 복된 실재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은혜롭게 기뻐하시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요한의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곧 너희 믿음이니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불신은 우리를 현세의 권세 아래 놓이게 합니다. 즉, 세상이 우리에 대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충만함을 깨닫게 된 영혼은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말입니다.

 

창세기 23장

영감의 이 작은 부분은 영혼에 달콤하고 유익한 많은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 안에서 성령께서는 믿음의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방식을 우리 앞에 아름답게 보여 주십니다. 믿음이 사람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독립하게 한다는 것은 신성한 사실이지만, 믿음이 그에게 정직하게 세상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도록 가르친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정직하게 행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 살전 4:12 )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제공하며” ( 고후 8:21 ) “아무에게도 빚지지 말 것.” ( 로마 13:8 ) 이것은 중대한 계율입니다. 이 계율은 뚜렷한 선언이 있기 전에도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들이 합당하게 지켰지만, 현대에는 아쉽습니다! 충분히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3일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인물, 즉 애도자의 인물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하여 애통하고 애곡하러 왔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다른 사람들처럼 만나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큰 사실은 그에게 안도감을 주고 그의 슬픔에 아주 독특한 특징을 부여합니다. ( 살전 4:13-14 ) 믿음의 사람은 오랫동안 포로로 잡혀 있지 않을 것이라는 행복한 의식 속에서 형제나 자매의 무덤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영혼의 구원은 육체의 구원을 보장합니다. 우리는 전자를 갖고 있고 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롬 8:23 )

이제 나는 아브라함이 막벨라를 매장지로 구입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그의 믿음을 표현했다고 믿습니다. " 그는 죽기 직전 에 일어났다 ." 믿음은 오랫동안 죽음을 염두에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부활은 언제나 믿음의 비전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그 결과에 너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를 훨씬 더 완전하게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죽음은 사탄의 권세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은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의 잠자리로 삼았을 때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관한 아브라함의 생각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다가올 시대에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알았고,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사라의 시체를 무덤에 안치할 수 있었습니다.

헷 자손은 이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족장의 영혼을 채우고 있던 생각은 할례받지 않은 헷 족속에게는 전혀 낯선 생각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어디에 장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작은 일로 보였지만 그에게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나그네이고 우거하는 자이니 당신들과 함께 나에게 매장지를 소유로 주어 내가 내 죽은 자를 내 눈앞에서 장사하게 하라.” 무덤에 관해 그렇게 많은 야단법석을 피우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고,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함 같이 우리를 알지 못하느니라.” 신앙의 가장 훌륭한 특성과 특징은 자연인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경우에 아브라함의 행동에 특징을 부여하는 기대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가 땅을 얻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그는 단지 죽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 즉 부활의 아침을 기다릴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 그는 헷 족속과 논쟁할 것이 없다고 느꼈으 므로 그의 머리를 무덤에 묻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그와 함께, 그를 통해 행하시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니( kata pistin )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자기들은 나그네와 나그네임을 시인하였으니” 지구." ( 히브리 11:13 )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참으로 아름다운 특징입니다.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증인"들입니다 . 11 그들은 단지 믿음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땅에 매장지를 구입한 것이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신앙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구입에 그토록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는 의로운 원칙에 따라 에브론의 밭과 동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를 그토록 열망했습니까? "상인에게 현재 유효한" 전체 가격을 평가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답입니다. 그는 그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그는 그 땅이 그의 장래에 있다는 것과 그의 후손이 영광 중에 그 땅을 소유할 것이며 그때까지는 아직 땅을 빼앗길 사람들에게 빚진 자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장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 앞에 명백하고 실제적인 원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사람에게 항상 활력을 불어넣어 줄 복된 소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점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예를 갖게 됩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 앞에 제시된 소망은 영광스러운 불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 세상의 모든 영향력 위로 마음을 높이는 한편, 외부인과의 모든 대화를 다스리는 높고 거룩한 원칙을 제공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의 도덕적 효과는 무엇입니까?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일 3:2-3 ) 내가 차츰차츰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지금 가능한 한 그분과 닮아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볼 때 순결과 성실과 도덕적 은혜 가운데 행하기를 항상 추구해야 합니다.

헷 족속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장에 설명된 그의 모든 품행과 행위는 매우 순수한 고상함과 무관심으로 특징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그들 중에 막강한 방백”이었으며 그들은 기꺼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부활의 하나님에게서만 은혜를 받는 법을 배웠으며, 막벨라를 위해 그 은혜를 지불하는 동시에 가나안을 위해 그분을 바라볼 것이었습니다 . 헷 자손은 “상인에게 통용되는 돈”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의 가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보다 그에게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땅이 은 사백 세겔”의 가치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영원한 유업의 보증으로서 값진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영원한 유업이었으므로 오직 부활의 능력으로만 소유될 수 있었느니라.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의 미래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사물을 보며, 성소의 판단대로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총명으로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나 매장지를 구입했는데, 이는 부활에 대한 그의 소망과 그 위에 세워진 유업에 대한 뜻을 분명히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4장

이 장과 앞의 두 장의 연관성은 주목할 만하다. 창 22장 에서는 아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창 23장 에서 사라는 제쳐두었습니다. 그리고 창 24장 에서는 비유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영접을 받은 그를 위해 신부를 얻기 위해 종을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연관성은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교회의 부르심과 관련된 사건의 순서와 일치합니다. 이 우연의 일치가 신성한 기원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는 일부 사람들의 마음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큰 사건은 첫째, 그리스도의 거절과 죽음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육신을 따라 버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양의 신부라는 높은 지위를 차지하도록 교회를 부르십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이 장과 앞의 두 장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교회가 제대로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성취된 사실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 새 사람”이 발전하려면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져야 합니다 . 교회가 하나님의 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대 경제가 존재하는 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가장 엄격한 분리가 유지되었으며, 따라서 두 사람이 한 새 사람으로 연합한다는 개념은 유대인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방인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방인을 전혀 부정한 사람으로 여기므로 그들에게 들어가는 것이 불법이라 ( 행 10:28 )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그들에게 주신 관계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들은 분리되고 우월한 특별한 위치에 계속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명과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증거를 거절함으로써 그들의 죄악의 분량을 채웠을 때, 우리는 성 바울이 새 일의 사역자로 일으킴을 받은 것을 발견합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에게 증거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막으셨느니라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즉, 신약의 선지자들, tois hagiois apostolois autou kai 선지자들 )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서로 교제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자요 한 몸이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니라" ( 에베소 3:1-6 )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하늘에 계신 영광의 머리와 연합된 교회의 비밀은 바울 시대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 신비에 대하여 사도는 계속해서 “ 하나님이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7절)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말하자면 이 영광스러운 건물의 첫 번째 층을 형성했습니다. (참조 에베소 2:20 )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건축은 이전에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 건축이 아벨의 시대부터 계속 진행되었다면 사도는 “구약 성도의 터”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지위가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까지 하나님의 목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몸에 속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 그리고 그에 따른 성신의 강림. 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고, 교회와 함께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일부를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더욱 정교하게 입증하는 것이 이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라면 쉬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창세기 24장의 입장에서 제시된 매우 흥미로운 문제에 대해서만 다루면서 이 장을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 매우 흥미로운 성경 부분을 성신이 교회를 부르시는 일의 유형 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 나로서는 단지 그 영광스러운 작품의  로서 그것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가족 계약의 단순한 세부 사항으로 유난히 긴 장을 차지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계약이 어떤 위대한 진리를 대표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라." 이것은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나는 그것이 교회의 위대한 신비에 대한 아름다운 예시와 예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이 신비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가 없지만,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이 신비를 그림자처럼 드러내는 장면과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있는 장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들은 상징적으로 제물로 바쳐지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으셨다. 말하자면 원래의 어버이 줄기는 옆으로 치워져 있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한 신부를 마련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합니다.

이제 전체 장의 내용을 명확하고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사항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즉, 1, 맹세; 2, 증언; 3, 결과. 리브가의 부르심과 승영이 아브라함과 그의 종 사이의 맹세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이 모든 일의 주체가 되었지만 이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전체와 각 구성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지체가 하나도 없을 때에도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 시 139:16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 엡 1:3-4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로마 8:29-30 ) 이 성구들은 모두 바로 앞에 있는 요점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부르심, 칭의, 영광은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즉 아들의 죽음과 부활과 승영으로 확증된 그분의 말씀과 맹세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 아득히 먼 옛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마음 깊은 곳에는 교회에 관한 이 놀라운 목적이 놓여 있었으며, 이 목적은 결코 아들의 영광에 관한 신성한 생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종 사이의 맹세의 목적은 아들의 짝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가 후일의 존엄을 얻게 된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기쁘다. 교회의 안전과 축복이 어떻게 그리스도 및 그분의 영광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볼 수 있어 기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이니라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느니라.” ( 고린도 첫째 11:8-9 ) 결혼 잔치에 관한 아름다운 비유에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마태복음 22:2) 아들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계획의 가장 큰 대상이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축복이나 영광이나 위엄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그분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모든 권리는 물론 생명 자체에 대한 모든 권리도 죄로 인해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한 모든 형벌을 치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스스로 책임지셨습니다. 그는 그녀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분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그녀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 모든 무게를 지고 무덤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반대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교회를 구출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죄가 놓여진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녀가 가진 삶은 가능한 모든 요구가 충족된 후에 죽음의 반대편에서 취해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신성한 의와 연결되고 그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소유권은 그분이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소모하신 데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교회의 생명이십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신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녀는 신성한 의 안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활력을 주는 희망은 의의 희망입니다. (다른 많은 성경 구절 중에서 요한복음 3:16 , 36 ; 요한복음 5:39-40 ; 요한복음 6:27 , 40 , 47 , 68 ; 요한복음 11:25 ; 요한복음 17:2 ; 로마서 5:21 ; 로마서 참조) 6:23 , 딤전 1:16 , 요한1서 2:25 , 5:20 , 유다서 21 , 에베소서 2:1-6 , 14 , 15 , 골로새서 1:12-22, 골로새서 2:10- 15 ; 로마서 1:17 ; 로마서 3:21-26 ; 로마서 4:5 , 23-25 ; 고후 5:21 ; 갈 5:5 )

이 성구들은 세 가지 요점, 즉 교회의 생명, 의, 소망을 가장 완전하게 확립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교회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과 하나됨에서 흘러나옵니다. 이제 교회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필수적이라는 확신만큼 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 고전 11:7 ) 그리고 다시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 일컬어집니다. ( 에베소 1:23 ) 이 마지막 표현은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충만”으로 번역된 단어는 보완물, 즉 다른 것에 더해져서 전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한 새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 에베소 2:15 ) 이런 관점에서 문제를 보면, 교회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녀를 독생자의 몸, 신부, 동반자, 배필로 볼 때, 창세 전부터 그녀를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은혜로 인한 놀라운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고,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높은 운명에 대해 아직 무지한 가운데 은밀한 조언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모두 이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리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 아들의 아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이는 교회에 대한 매우 깊고 복된 관점을 열어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그녀는 그리스도께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업을 통해 교회가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은 신성한 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의 성격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하나님께서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지 여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당신 아들을 위해 “결혼”하기를 원하시고, 교회는 예정된 신부입니다. 교회는 아버지의 목적의 대상이고, 아들의 사랑의 대상이며, 성령의 증거입니다. 아들의 모든 위엄과 영광을 나누는 자가 되십시오. 마치 아들이 영원한 목적으로 삼으신 모든 사랑을 그녀가 공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 복음 17:22-23 ) 이로써 모든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방금 인용된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한 생각을 알려줍니다. 교회는 주님과 같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된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4:17 ) 이것은 영혼에 완전한 확신을 줍니다. “우리는 참되신 이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요일 5:20 ) 여기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랑의 신부를 위해 모든 것이 보장되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의 것이기 때문에 이삭에게 속한 모든 것이 리브가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교회에 공개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21-23 )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 엡 1:22 )이시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교회를 영원히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다만 하나님의 반영일 것임이니라 천사들과 정사들은 교회에서 지혜와 권능과 하나님의 놀라운 나타남을 볼 것임이니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 즉 증언을 살펴보겠습니다 . 아브라함의 종은 매우 뚜렷한 간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라 여호와께서 내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사 그가 창대하게 하시며 그에게 양과 소와 은과 금과 남종과 여종과 내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내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셨나이다' (34-36절) 아버지와 아들을 나타내십니다. 그의 간증은 이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막대한 자원과 아들이 "독생자"이고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부여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간증으로 그는 아들의 신부를 구하려고 합니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것은 오순절 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증거를 놀랍게 예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 요 15:26 ) 또 이르시되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나타내시리라 너희 장래 일을 그가 내게 영광을 돌리리니 그가 내 것을 받아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내 것을 가져다가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 요한 16:13-15 ) 이 말이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교훈적이고 흥미를 줍니다. 그가 리브가의 마음을 끌려고 한 것은 이삭에 대한 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을 죄와 어리석음의 세상에서 이끌어 그리스도의 몸의 복되고 거룩한 연합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노력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내 것을 가져다가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나 그분의 사역을 보도록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더 진실로 영적인 사람일수록 그는 더욱 온전히 그리스도께 점유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영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발견한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성의 큰 표시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그것은 영성의 증거가 되기는커녕 그 반대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내 것을 가져다가 너희에게 보이시리라”고 분명히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성령이 역사하신 증거를 토대로 건축할 때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이다.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영생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성신을 통한 아버지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대답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마태 16:17-18 ) 무슨 바위입니까? 베드로? 신 금지. "이 반석"( taute te petra )은 단순히 아버지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것을 의미하며,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모임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제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의 참된 성격을 열어줍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계시입니다. 단지 교리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한 인격, 즉 아들의 인격에 대한 계시입니다. 믿음으로 받은 이 계시는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며, 생명과 능력의 샘, 즉 회원의 근거, 친교의 힘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 &c. 여기서 우리는 "반석"의 참된 원리,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계시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상부구조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 견고한 기초 위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4장에서 성신의 사명과 특별한 간증에 대한 그토록 뚜렷하고 아름다운 예시를 찾는 것은 특히 교훈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하면서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했던 모든 위엄과 부를 설명합니다. 그가 대상이었던 사랑; 간단히 말해서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사물에서 마음을 떼어 놓도록 계산된 모든 것입니다. 멀리 있는 물체를 리브가에게 보여 주시며, 그 사랑하고 총애받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축복과 현실을 그녀 앞에 제시하셨습니다. 이삭에게 속한 모든 것은 리브가의 일부가 되었을 때 리브가에게도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간증은 이러했습니다. 성신의 간증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의 충만함, 그리스도의 은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그분의 위엄, 그분의 사역의 완전함에 대해 말합니다.

더욱이 그는 “그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들”인 그러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설명합니다. 성령의 증거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가르침과 설교를 시도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가장 영적인 가르침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완전하고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러한 가르침의 부담을 떠맡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 위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그분에 관해 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매력과 탁월함을 설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사역할 때 그의 사역에는 항상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역에는 인간의 논리와 추론이 들어갈 여지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일이 아주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하는 모든 사람이 잘 기억하는 성령의 유일한 목적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의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 진실과 진실의 실제 적용은 매우 다른 두 가지입니다. 교회의 특별한 영광에 관해 말하는 것과 그 영광에 의해 실제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리브가의 경우 그 효과는 가장 뚜렷하고 결정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은 그녀의 귀와 마음에 스며들어 주변 사물에 대한 그녀의 마음의 애정을 완전히 분리시켰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붙잡힌 이유를 깨닫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뒤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이 그러한 높은 운명의 주체라고 믿으면서도 자연의 상황 속에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미래에 관한 보고가 사실이라면 현재에 대한 집착은 최악의 어리석음이다. 이삭의 신부, 그의 모든 위엄과 영광의 공동 상속자가 되겠다는 희망이 현실이라면, 라반의 양 떼를 계속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녀 앞에 두신 모든 것을 실질적으로 멸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포기하기에는 전망이 너무 밝았습니다. 사실, 그녀는 아직 이삭도 본 적도 없고 유산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한 보고와 증언을 믿었고, 말하자면 그것에 대한 열렬한 편지를 받았고, 이것이 그녀의 마음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 "나는 갈 것이다"라는 기억에 남는 말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현합니다. "그녀는 멀리 있는 사물과 그와 관련된 영광에 대해 그녀에게 말해 준 사람과 함께 미지의 길로 들어갈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길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갈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서 ​​자기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느니라.” 이것은 성령의 지도 아래 있는 교회에 대한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예입니다. 하늘의 신랑을 맞으러 나아가는 유령. 이것이 교회가 되어야 할 모습이로다 그러나 슬프게도 여기에는 슬픈 실패가 있습니다. 우리 길의 거룩한 인도자시요 동행자시니 그의 직분과 기쁨은 예수의 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니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것을 리브가에게 보여 준 것과 같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느니라 또한 그는 그녀의 모든 기쁨과 영광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아들에 관한 새로운 간증을 그녀의 귀에 쏟아 붓는 데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하늘 인도자이자 동반자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기뻐합니다. “그가 내 것을 가져다가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그리고 다시 “그가 장래 일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사역은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영원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땅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킬 것입니다. 리브가가 이삭과 연합할 수 있다는 희망 외에는 리브가의 “형제와 어머니가 이르되 며칠, 적어도 열흘은 우리와 함께 지내게 하라”고 했을 때 리브가가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분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 외에는 그분이 순결하신 것처럼 우리도 순결할 수 있거나 이끌 수 없습니다.

 

창세기 25장

이 장의 시작 부분에는 아브라함의 두 번째 결혼이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데, 이 사건은 우리가 앞 장에서 고려한 것과 관련하여 볼 때 영적인 마음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신약의 예언서가 제공하는 빛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택받은 신부가 완성되고 받아들여진 후에 아브라함의 씨가 다시 눈에 띄게 될 것임을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삭이 결혼한 후에 성신은 아브라함 역사의 다른 점들과 육신에 따른 그의 자손의 역사와 함께 새로운 결혼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의 역사를 취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떤 특별한 해석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그것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에 관한 어떤 사람의 말을 언급했습니다. 즉 창세기에는 “만물의 씨가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포괄적인 페이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것이 신약성서에 더욱 정교하게 제시된 진리의 모든 기본 원칙과 짝을 이루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에는 이러한 원칙이 예시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신약에서는 교훈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는 매우 흥미롭고, 영혼에 힘을 실어 진리를 깨닫게 해줄 탁월한 계산이 되어 있습니다.

이 장의 끝에서 우리는 매우 엄숙하고 실제적인 성격의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야곱의 성품과 행동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앞으로 더욱 완전하게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장자권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하여 에서의 행위를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타고난 마음은 하나님의 일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막연하고 무가치하며 무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물은 사람의 평가에 큰 비중과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믿음이 아닌 시각에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현재가 전부이다. 미래는 그저 영향력이 없는 것, 즉 가장 불확실한 문제일 뿐입니다. 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그릇된 추론은 "보라, 나는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이 장자권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무슨 이상한 추론인가? 현재가 내 발 밑에서 미끄러지고 있으니 나는 미래를 경멸하고 완전히 놓아버리겠는가 ?" 시간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니 그러므로 나는 영원에 대한 모든 관심을 버리리라! "이같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멸시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땅을 멸시하였고( 시 106:24 ) 그리스도를 멸시하였느니라( 슥 11:13 ) 그러므로 혼인 잔치 청함을 받은 자들은 그 청함을 멸시하였느니라 ( 마 22:5 )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는 마음이 없고 현재가 모든 것이라 가나안 땅을 얻는 것보다 한 그릇의 팥죽이 나으니라 그러므로 에서가 장자권을 경시한 바로 그 이유가 그가 그것을 더 열렬히 붙잡았어야 했던 이유였느니라. 내가 인간의 현재의 허무함을 더 분명히 알수록 나는 더욱 하나님의 미래를 붙잡을 것이다. 믿음의 판단. “ 이 모든 것이 풀어지거든 우리가 모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느냐 그 날에는 하늘이 불에 풀어지고 만물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벧후 3:11-13 )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그러므로 믿음의 생각이니라. 보이는 것은 해체되리니 그런즉 우리가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멸시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현재는 속히 지나가느니라 우리의 자원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것은 새롭게 된 마음의 심판이며, 다른 심판은 오직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의 심판 일 뿐입니다( 히 12:16 ). 그의 판단대로 되느니라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니라.

 

창세기 26장

이 장의 첫 구절은 창 12장 과 연결된다 . “아브라함 시대에 첫 번째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시련은 그 과정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찾았는지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감미로운 교제를 통해 이곳의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드문 일입니다. 우리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애굽과 그랄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나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참된 지위에 미치지 못하게 하는 큰 유혹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습니다.” 애굽과 그랄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집트는 천연 자원과 하나님의 독립성을 통해 세계를 표현합니다. "나의 강은 나의 강이다"라는 말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그분을 마땅히 바라볼 생각도 하지 않은 이집트 사람의 말입니다. 이집트는 지역적으로 그랄보다 가나안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영혼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랄은 창세기 10장 에서 이렇게 언급됩니다. “가나안 사람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과 라사까지니라.” (19절) 우리는 “그랄에서 예루살렘까지 사흘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애굽에 비하면 진보된 위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매우 위험한 영향의 범위 내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이 장에서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부인했고,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특히 엄숙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악에 빠지는 것을 보면 그 곳의 영향력이 좋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가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에게 아내를 부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니라. 그러나 참된 행동 방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영적인 약점이 더욱 커집니다. 베드로가 자기 주를 부인한 것은 대제사장의 불 옆에 서서 몸을 녹일 때였습니다. 이제 이삭이 그랄에서 별로 행복하지 않았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얼마나 자주 당신의 백성이 처해 있는 상태에 도덕적으로 적합한 지시를 주시고, 그들이 그 상태에 대한 참된 감각을 일깨우도록 계획하셨는가? 그는 민수기에서 모세를 지시했습니다. 13 사람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시고 그러나 그들이 낮은 도덕적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그러한 조치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때 믿음이 “ 정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다시, 그분은 모세에게 그 일을 도울 장로 칠십 명을 뽑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의 지위의 위엄과 축복을 충분히 누리게 된다면 그러한 지시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세우는 것과 관련하여 삼상 11:13. 8 . 그들에게는 왕이 필요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시에 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전에 지시를 받은 개인이나 민족의 상태를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그랄에서 이삭의 지위가 틀렸다면,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를 얻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매"라고 어떻게 읽을 수 있습니까? (12절) 나는 대답합니다. 형편이 좋다고 해서 사람의 형편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와 그분의 축복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 없이 후자를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마음은 이 둘을 다른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즉 현존에 축복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적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동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갖지도 원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축복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위대해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여 매우 위대해질 때까지 양 떼와 소 떼와 종들을 많이 소유"할 수 있지만, 그 동안에는 방해받지 않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 양떼와 소떼는 주님이 아닙니다. 이런 것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부러워할 수도 있었으나 여호와의 임재로 말미암아 결코 그를 부러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감미롭고 풍성한 교제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이해하거나 감사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감상할 수 있는 양 떼, 소떼, 하인, 우물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렀습니다. “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 (24절) 마가복음, 그것은 단지 주님의 축복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는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시기와 다툼과 분쟁을 뒤로하고 브엘세바로 갔음이더라. 여기서 주님은 당신의 종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의 관대한 손은 그가 그랄에 머무는 동안 그를 따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즐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려면 우리는 그분이 계신 곳에 있어야 하며, 그분은 불경건한 세상의 다툼과 다툼 가운데서 발견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그러한 모든 것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 안에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체류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 방식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 자신을 혼합함으로써 그들을 섬긴다고 상상하는 것은 매우 흔한 실수입니다. 그들을 섬기는 참된 길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능력 안에서 그들과 떨어져 서서 그들에게 더 훌륭한 길의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삭의 영혼의 진보와 그의 행로의 도덕적 결과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가 거기서 올라오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장막을 치고”, “그의 종들이 우물을 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축복받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는 힘에서 힘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참된 예배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나그네와 나그네의 성격을 나타냈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 없었기 때문에 막을 수 없었던 평화로운 원기 회복과 확실한 샘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이삭 자신과 관련하여 축복받은 결과였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십시오. “아비멜렉이 그랄에서 그에게로 왔고 그의 친구 아훗삿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를 떠나 보내었으니 어찌하여 내게로 오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확실히 보고 우리 사이에 맹세하자 하였노라 하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에 작용하는 참된 길은 그들에게 완전한 은혜를 베풀면서 그들과 단호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다툼과 다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슬픔을 거두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가는 순간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어 그를 따르며 언약을 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여기에 전개된 원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예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요점은 우리의 위치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지, 그리고 위치뿐만 아니라 아들의 도덕적 상태에서도 올바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행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올라가 예배자로 자리 잡은 순간, 그 자신의 영혼이 소생되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데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계속 낮은 위치에 있는 한, 우리는 축복을 빼앗고 간증과 봉사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위치에 있을 때 종종 하는 것처럼 "더 나은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기 위해 멈춰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악행을 그치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거룩한 계명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얻게 되는데, 즉 "선행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행을 그치기" 전에 "선행하는 법을 배우라"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착각하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 ek ton nekron .) 그럼 뭐죠?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실 것이다." ( 엡 5:14 )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이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일을 하고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소유한 것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악행을 그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이 말씀에 순종할 때, 당신은 당신의 길에 대해 오랫동안 무지 속에 남겨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나는 더 나은 것을 찾을 때까지는 악행을 멈출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은 순전한 불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눈과 유순한 정신을 주소서.

 

창세기 27-35장

이 장들은 우리에게 야곱의 역사, 즉 적어도 그 역사의 주요 장면을 제시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은 첫째, 무한한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가장 깊은 교훈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둘째, 인간 본성의 완전한 무가치함과 부패성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 25 장에는 야곱에 관한 진리를 우리 앞에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여기서 다루려고 의도적으로 건너뛴 구절이 있습니다 .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매 자녀들이 그로 말미암아 다투었더니 그가 이르되 그렇다면 내가 어찌하여 이리로되이까” ?그가 여호와께 가서 물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민족이 네 태중에 있느니라 두 민족이 네 창자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그 족속은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사람이 어린 사람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말라기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사랑하였거늘 네가 어디서 우리를 사랑하였느냐 하는 말이냐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 이것은 로마서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9 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장로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은혜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매우 분명하게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가식을 현장에서 추방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실 하나님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가장 마지막으로 중요합니다. 피조물은 주권적인 은혜에 머리를 숙일 때까지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가 죄인이고, 그 자체로 행동하거나 지시할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합당한 일입니다. 이 기반에서 자신을 찾는 것의 큰 가치는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기를 기뻐하시는가에 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탕자는 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그것이 사막에 관한 문제라면 그는 실제로 종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가 기꺼이 주신 것을 취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높은 자리, 곧 자신과의 교제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영원한 날 동안 모든 일에 은혜를 베푸소서." 그렇게 되어 기쁘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면서 계속 나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발 아래에 하나님의 은혜의 견고한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성장하는 자기 지식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파멸은 절망적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무한해야 합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요, 그 통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적용하고 누리는 능력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관련하여 드러납니다.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느니라” 이 은혜의 통치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속에서만이다. 우리는 창조에서 지혜와 능력의 통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섭리 가운데 선하심과 오래 참음의 통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구속을 통해서만 우리는 은혜의 통치를 볼 수 있으며, 그것도 의의 원칙에 따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의 인물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 본성의 힘을 놀랍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자연의 모든 비스듬함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도덕적 아름다움과 힘 속에서 은혜를 봅니다. 그의 놀라운 이력을 보면 그가 태어나기 전, 태어나던 순간, 그리고 태어난 후에 자연의 비범한 에너지가 보여진 것 같습니다. 그분이 태어나시기 전에 우리는 “자녀들이 그 안에서 함께 싸우더라”라고 읽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손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후 - 그렇습니다. 창세기 32장 에서 그의 역사의 전환점 까지 - 그의 행로는 자연의 가장 불쾌한 특성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값없는 은혜를 가장 감미롭게 표현하는 이름인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특별히 감동적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시기 위해 겸손하신 그분의 은혜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제 각 장을 연속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창 27장은 관능, 기만, 교활함에 대한 가장 겸손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하여 그러한 일들을 생각할 때, 그것은 극도로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얼마나 참되고 신실하신가! 그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부분적인 그림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인간의 역사를 준다면, 그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하며, 인간이 아닌 그대로 묘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길을 계시하신다면, 그분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하시지만 은혜와 자비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모든 궁핍과 비참함과 타락에 내려오셔서 그곳에서 그분을 다루시고 그 가운데서 그를 완전하게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 그분의 존재의 모든 현실 속에서 그분 자신과의 방해받지 않는 교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신실한 사랑으로 인간 품성의 모든 특성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찬미하고 우리 영혼을 훈계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결코 죄에 대한 기억을 영속시키고 그분의 눈앞에서 영원히 지워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오점, 실패, 오류는 완벽하게 씻겨졌고, 그들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영감의 책에 남아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경고합니다. 더욱이 복되신 하나님께서 완전한 남자와 여자를 다루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정욕”을 가진 자들을 대하심을 분명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애도하는 오류와 동일한 오류입니다. 이것은 특히 마음에 위안을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전기가 대부분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오류와 허약함이 없는 존재의 역사를 발견하는 대부분의 인간 전기가 기록되는 방식과 현저한 대조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는 그것을 읽는 사람을 교화하기보다는 낙담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실제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되어야 할 존재에 대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습니다. 참으로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악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대하신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교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의 장에서는 이 사실을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로한 족장 이삭을 봅니다. 말하자면 영원의 문턱에 서 있는 것입니다. 땅과 자연은 그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맛있는 음식"에 전념하고 있으며 곧 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 대신에 큰 사람을 축복함으로써 조언합니다. 진실로 이것은 자연이었고, "눈이 어두워진" 자연이었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다면, 이삭은 사슴 고기 한 그릇에 축복을 베풀려고 했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서야 하며, 그분은 그분의 모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믿음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힘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은 결코 할 수 없으며 스스로 발명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역사에서 드러난 두 가지 중요한 요점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음모나 계획도 없이 그 목적이 틀림없이 달성했을 것을 달성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계략을 꾸미는 자연입니다. 이것은 놀랍도록 야곱의 역사를 단순화하고,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영혼의 관심도 고조시킵니다. 아마도 인내하고 자기를 포기하여 하나님께 의존하는 은혜만큼 우리에게 그토록 부족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자연은 어떤 형태나 형태로 작용할 것이며, 따라서 그 안에 있는 한 신성한 은혜와 능력이 빛나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리브가의 교활함과 야곱의 심한 속임수와 같은 요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믿음에는 충분했지만 자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항상 자신의 방식을 채택해야 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이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데 전적으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 진실로 복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재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된 마음은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가장 깊은 교훈을 배우고 가장 감미로운 경험을 즐깁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서 떼어내려는 유혹이 더욱 강렬할수록 우리 자신을 거기에 맡기는 축복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우리를 축복하시면서 무한한 기쁨을 찾으시는 분에게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감미롭습니다. 이 경이로운 위치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만이 그것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 곳을 완전하고 중단 없이 차지하신 유일한 분은 주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의존했으며, 다른 어떤 것이 되겠다는 원수의 모든 제안을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그의 언어는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는 태에서 당신에게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배고픈 것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그분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는 유혹을 받았을 때 그분은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서 세상 왕국을 빼앗고 그분이 아닌 다른 이에게 절을 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때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한마디로, 완전한 인간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위치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 그분의 아들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분이 갑자기 그분의 성전에 오시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세상의 왕국을 주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의 목적이 성취되기를 단순하고 중단 없이 기다리셨던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빵을 주셨을 때만 먹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때만 성전에 들어갈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보좌에 오르실 것이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판이 될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 시 110편 )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이러한 심오한 복종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탄스럽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등하시지만 사람으로서 의존하는 위치를 취하시며 항상 아버지의 뜻 안에서 기뻐하셨습니다. 상황이 그분에게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감사하십시오.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그분의 위대하고 변함없는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 때,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완벽하게 마치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불어넣으셨고, 그분의 육신은 약속된 영광과 승영을 바라며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감받은 사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천하게 여기셨느니라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또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주가 되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니라"

야곱은 자신의 역사를 시작할 때 이 복된 마음을 얼마나 적게 알았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길을 기다릴 준비가 얼마나 부족하였습니까! 그는 야곱의 시간과 야곱의 방식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택하신 은혜가 약속되었고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확실히 이루실 하나님을 단순히 의지하고 복종하는 것보다 온갖 간교함과 속임수를 통해 축복과 유업을 얻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 이 모든 것에 대한 인간의 마음의 반대를 얼마나 잘 아는가! 그것에 대한 어떤 태도도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자연을 산만하게 만들어 하나님 외에는 모든 자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는 오해할 수 없는 언어로 인간 본성의 진정한 성격을 말해줍니다. 자연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모든 세련된 도덕 감각에 당연히 충격을 주는 악덕과 범죄의 현장을 방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요; 필요한 것은 단지 의존의 자리에서 잠시 그것을 시도해보고 그것이 어떻게 거기까지 전달될 것인지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므로 그분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모든 비참함과 도덕적 타락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하므로 파멸되고 무가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기 전에는 무엇이냐? 아니면 그 사람은 무엇일까요?

이제 리브가와 야곱에게서 우리는 이삭과 에서에게서 자연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봅니다. 정말 이랬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삭의 눈은 어두워졌기 때문에 강요당할 수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그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실 사람을 축복하려는 이삭의 목적, 즉 자연에 기초한 목적을 완전히 좌절시켰을 것입니다. 가장 사랑스럽지 못한 본성은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장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냥한 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굴욕적인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 우리의 상황,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엄청난 슬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야곱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야곱이 몰래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후에 그의 삶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세상적인 행복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형은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그 일을 피하기 위해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삼촌 라반이 자기 아버지를 속인 것처럼 그를 속이고 그를 매우 엄하게 대하였다. 21년의 노예 생활 후에 그는 은밀하게 그를 떠나야 했고, 분노한 형에 의해 다시 끌려오거나 살해당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사라지자마자 그는 그의 침대를 더럽힌 그의 아들 르우벤의 비천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다음으로 세겜 사람들을 향한 시므온과 레위의 배반과 잔인성을 통곡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는 다음으로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 강요당했고, 요셉의 때 이른 죽음으로 추정되는 것을 한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강제로 내려가 그곳 낯선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의 길은 모두 정의롭고 경이로우며 교훈적입니다."

{*시련의 장소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승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에 관한 한 이것은 참된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한 면, 즉 우울한 면만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찬가지로 밝은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곱과 관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모든 장면에서, 야곱이 자신의 음모와 사악함의 열매를 거두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야곱의 하나님은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고 그의 불쌍한 종의 모든 죄와 어리석음 위에 은혜를 넘치게 하셨습니다. . 우리는 그의 역사를 진행하면서 이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삭과 리브가와 에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7장의 시작 부분에서 자연의 과도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위엄을 믿음으로 유지하는지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분은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모든 의식으로 축복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나니 그리하면 그가 복을 받을 것이라 … 보라 내가 그를 네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이제 네게 어떻게 하랴?" 그는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보화를 마음대로 소유한 사람으로서 말합니다. 거짓된 겸손도 없고, 자연의 발현을 이유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없습니다. 사실, 그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 직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그에 따라 그의 자리를 차지하여 믿음의 위엄과 능력으로 축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으니 그리하면 그도 복을 받으리라.” "나는 옥수수와 포도주로 그를 먹여 살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실패와 그 결과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세우신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영역입니다.

리브가는 자신의 교활한 연기로 인한 슬픈 결과를 모두 느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자신이 문제를 가장 능숙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아아! 그녀는 다시는 Jacob을 보지 못했습니다. 관리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만일 그녀가 그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면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이 관리되는 방식이며, 항상 이득이 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생각하여 그 키를 한 규빗이나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걱정하고 계획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차단할 뿐이며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계략의 열매를 거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내리는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합당한 위치와 특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을 알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판의 백합화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위치를 지금까지 망각할 때 우리의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에서에 대하여 사도는 그를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라고 부르며, “그 후에 축복을 상속받고자 하되 버릴 곳을 얻지 못하므로 버린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바뀌었으나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의 깊게 그것을 구하였느니라." 그리하여 우리는 불경한 사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두 세계를 모두 갖고 싶은 사람; 미래에 대한 권리를 잃지 않고 현재를 즐기고 싶은 사람. 이는 결코 드문 경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양심이 신성한 진리의 작용을 느껴본 적이 없고 마음이 신성한 은혜의 영향을 느껴본 적이 없는 단순한 세속적인 공언자를 표현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지붕 아래에서 야곱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그를 땅에서 집도 없고 외로운 방랑자로 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제 야곱은 에서와 관련하여 그의 행위의 쓴 열매를 어느 정도 깨닫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종의 모든 약함과 어리석음을 초월하시고 그를 대하실 때 자신의 주권적인 은혜와 심오한 지혜를 나타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분의 자녀가 영이 불순하고 마음이 불신하여 그분의 손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는 많은 고통스러운 훈련과 고통스러운 징계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동하시도록 허락했다면 그는 하란으로 도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에서를 다루셨을 것이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정해진 장소와 몫을 찾게 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과 계획에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그 감미로운 평안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마음의 지나친 나약함은 끊임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수동적으로 누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 알지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외에는 어떤 것도 순종할 수 없는 계율입니다. “너희 절제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조심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활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립보서 4:5-7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은혜롭게 다스리시며, 우리가 믿지 않고 참을성 없는 길의 열매를 거두도록 부름을 받는 동안, 그분은 그 길을 통해 그분 자신의 부드러운 은혜와 완전한 지혜에 대한 더 깊은 교훈을 우리 마음에 가르치실 기회를 얻으십니다. 이것은 확실히 불신과 조급함을 전혀 보증하지 않지만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놀랍게 드러내며 우리가 실패로 인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을 때에도 마음을 위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십니다. 더욱이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는 것은 그분의 특별한 특권입니다.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기를 얻게 하고 강한 것은 단 것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자신의 불안하고 기만적인 행위의 결과로 그의 아버지의 집 지붕에서 유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조용히 있었다면 결코 "벧엘"의 의미를 배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똑같이 사실입니다. 집에서. 따라서 그림의 양면은 야곱의 역사의 모든 장면에 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집"의 축복과 엄숙함을 어느 정도 맛보게 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삭의 집에서 쫓겨났을 때였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나가서 하란으로 향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밤새도록 유하니 이는 해가 되었음이라 그가 그곳의 돌을 취하여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거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실 수 있고, 그분의 은혜와 영광의 목적을 펼치실 수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있는 노숙자 방랑자를 발견합니다. 여기 우리 앞에 제시된 야곱의 상태보다 더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표현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열려진 차양 아래, 돌베개를 두고 무기력한 잠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와 그의 자손에 관한 그분의 목적을 나타내셨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나니라.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으며 온 땅에 퍼지리라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까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느 곳에서든지 너를 지키리라 네가 가서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데려오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여기에 참으로 “은혜와 영광”이 있습니다. “ 땅 위에 세워진” 사닥다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도록 이끈다. 이스라엘과 교회와 전 세계에 관한 모든 신성한 계획의 기초, 강력하고 영원한 기초를 형성하는 놀라운 사업이 지상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살고, 수고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죽음을 통해 인간을 축복하려는 신성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다리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의사소통 매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라” —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필요에까지 내려오시고 또한 인간을 일으켜 그분의 임재 앞에 세우시는 분에 대한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영원히, 신성한 의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모든 계획이 성취되도록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신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의 한계 내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영혼에게 영원한 기쁨이 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야곱의 사다리로 예표된 일이 완전히 성취될 때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 날에 내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것과 그들을 위하여 언약을 세우고 활과 칼과 전쟁을 깨뜨리고 땅에서 내려 그들을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공평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성실함으로 너와 약혼하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 날에는 내가 들을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하늘에 듣고 그들은 땅의 말을 듣고 땅도 듣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들을 것이요 그들은 이스르엘을 들을 것이라 내가 그를 땅에 뿌리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 백성이 아니었더니 너희는 내 백성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리로다' ( 호세아 2:18-23 ) 또한 요한복음 1장에는 야곱의 놀라운 환상과 관련된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51 버전)

이제 야곱의 이 환상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복된 계시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실제 성격과 그의 실제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둘 다 분명히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청구권이 없었습니다. 아직은 성격상. 에서는 이 두 가지 근거에 대해 몇 가지 주장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특권이 무시된다면; 그러나 야곱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하나님의 특권을 배제하는 입장에만 설 수 있었던 반면, 야곱은 그 특권을 도입하고 확립하는 입장에서만 설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너무나 죄인이었고, 태어날 때나 행동으로나 모든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했기 때문에 순수하고 값없고 주권적인 은혜라는 하나님의 목적 외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주님께서 그분이 택하신 종에게 주시는 계시에는 그분 자신이 앞으로 행하실 일에 대한 간단한 기록 또는 예언이 있습니다. " 나는 ... 내가 주리라... 내가 지키리라... 내가 가져오리라... 내가 네게 말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그것은 모두 그 자신이었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은혜가 작용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if 가 있는 곳에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만약'이라는 질문을 하셔야 하는 책임 있는 위치에 놓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돌베개 위에서 잠든 야곱은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고 가장 깊은 무력함과 궁핍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충만하고, 가장 풍부하고, 가장 무조건적인 은혜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다는 축복을 소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참된 기쁨과 축복을 얻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특권이 가장 완벽하게 확립될 때입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우리가 설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하나님은 책임을 근거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하며, 그렇게 되면 실패는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너무 나빴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그를 위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그토록 많은 슬픔과 압박감에 빠뜨린 것은 이것을 습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와 우리가 그 계시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로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우리는 그가 자신의 진정한 성품을 발전시키고 방금 그에게 그토록 놀랍게 자신을 계시하신 축복받은 분에 대해 실제로 그가 얼마나 아는 바가 거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두려워하여 이르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비워지고 부서지기 전에는 어떤 마음도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과 상한 마음으로 그분과 함께 집에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찬양됩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아직 이런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안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 알려지지 않고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 곳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안과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영혼에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영혼은 오히려 “주여 내가 주의 집이 계신 곳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 시 26:8 ) 그리고 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그것이라. 주님, 그분의 성전에서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 시 27:4 ) 그리고 다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뜰을 사모하여 곤비하니 쇠약하도다.” ( 시 84편 )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굳게 잡히면 그 집의 성격이 어떠하든, 그것이 벧엘이든지, 예루살렘 성전이든지, 지금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이든지, 그 사람은 분명히 그분의 집을 사랑할 것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그의 역사의 그 시점에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집에 대한 야곱의 지식이 매우 얕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베델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언급할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야곱이 하나님과 맺은 거래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서 이 장에 대한 우리의 묵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은 그에게 참으로 특징적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그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점에 관한 진술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평안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을 주목 하십시오 . 이제 주님은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야곱의 마음은 “ 만일 ”이라는 생각 을 넘어서지 못하며 ,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각으로는 “먹을 빵과 입을 옷”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와 그 위에 주님이 서 계시며 무수한 씨와 영원한 소유를 약속하시는 장엄한 환상을 방금 본 사람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의 실제와 충만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스스로 헤아리므로 하나님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야곱은 아직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들의 땅에 이르니라.” 우리가 방금 보았듯이, 창 28장 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실제 성품에 대한 이해에 완전히 실패했고, 음식과 의복에 대한 비참한 거래와 “만약”이라는 조건으로 벧엘의 모든 풍성한 은혜를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따라 철저한 흥정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기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야곱은 아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수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상황을 사용하여 그를 징계하고 파멸시키십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많은 슬픔과 시련의 진짜 비결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앞에서 실제로 상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판단하거나 자기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벽에 머리를 두드립니다. 누구든지 자아의 밑바닥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이는 육신의 종말이 보이는 바로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육체의 종말에 이르지 못했다면 내 영혼의 깊고 긍정적인 경험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정당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식으로든 자연의 참된 척도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시며, 이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그분이 사용하실 때만 효과적입니다. 야곱의 경우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 귀에 말씀하실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분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발견합니까?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곳이 얼마나 두렵도다!” 야곱은 이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따라서 20년 동안의 끔찍한 교육이 필요했고, 그것도 그의 육체에 놀랍도록 적합한 학교에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그것조차도 그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자신의 도덕적 체질에 딱 들어맞는 분위기로 되돌아가는지 보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흥정하는 야곱은 흥정하는 라반을 만났고, 둘 다 서로를 속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반도 벧엘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상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는 열린 하늘과 거기에서 땅까지 닿는 사다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수한 씨와 함께 가나안 온 땅을 그에게 보장해 주겠다는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장엄한 약속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탐욕스러운 비천한 정신을 나타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다른 자원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정신과 세상적인 원칙과 방식만을 기대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우월하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깨끗한 것을 부정한 것 가운데서 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벧엘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과 씨름하고 그러한 수단으로 재산을 축적하려고 애쓰는 야곱을 발견하는 것은 특히 겸손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높은 운명과 하늘의 유업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의 자녀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내려와 죄로 인해 멸망해 가는 이 땅의 부와 명예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 요한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 그 원리에 대한 단 하나의 증거를 추적하는 것이 종종 어려울 정도로 이것이 사실입니다. 야곱과 라반을 바라보고 자연적인 원칙에 따라 그들을 판단한다면 어떤 차이점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무대 뒤에서 두 가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르게 만든 것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녀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찾아내기 어려울지라도, 참으로 매우 넓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전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의 그릇”이라는 엄숙한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영광에 이르도록 미리 예비하신 것이요”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기로 합당한 진노의 그릇”입니다. ( 로마 9:22-23 )*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야곱과 라반은 물질적으로 다르고, 달라졌으며, 영원히 다를 것입니다. 비록 전자가 그들의 진정한 성격과 존엄성을 실현하고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데는 너무나 슬프게도 실패할지라도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영이 얼마나 세심하게 움직이시는지를 지적하는 것은 영적인 마음에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9 그리고 실제로 모든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선택 교리에서 인간의 마음이 끌어내는 끔찍한 추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진노의 그릇"에 관해 말씀하실 때 단순히 "멸망에 속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맞추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분은 “긍휼의 그릇”을 언급하실 때 “영광을 받도록 미리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독자가 잠시 마태복음 25:34-41을 읽어보면 동일한 내용에 대한 또 다른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사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왕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 (34절)

그러나 그분께서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내 아버지께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41절)

그렇다면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영광의 왕국과 그 왕국을 상속받을 “자비의 그릇”을 “준비”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을 위해 “영원한 불”을 예비하지 않으시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며, “진노의 그릇”을 예비하시지 아니하셨으나 그들이 스스로 예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 유혹 "을 부지런히 경계하는 만큼 "선택 "도 분명하게 확립합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있는 세 장에 설명된 야곱의 경우, 그의 모든 수고와 일은 이전의 비참한 거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둘 수 없는 무능력의 결과입니다. 가나안 온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약속을 받은 후에 “만일 하나님이 내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신다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아주 희미한 이해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또는 그분의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그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봅니다. 은혜를 이해하지 못할 때 항상 이런 식입니다. 은혜의 원리는 고백할 수 있지만 은혜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는 정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의 환상이 그에게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주었다고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벧엘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하란에서의 야곱의 행동은 매우 다른 두 가지이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에 대한 야곱의 생각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직업이 무엇이든, 성격과 행위는 영혼의 경험과 확신의 실제 척도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평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은혜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라반과 같이 평가하고 그의 격언과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자신의 무지함을 증명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육체의 고유한 특성을 배우고 판단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특성이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바로 그 영역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는 라반과 리브가의 나라인 하란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은 그가 그토록 뛰어난 능숙함을 지닌 원칙이 싹트고 그곳에서 가르치고 전시하고 유지하는 바로 그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다면 베델로 가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하란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에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란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아, 얼마나 뒤죽박죽이고 긁어모으는가! 얼마나 섞이고 변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하고 고상한 확신은 없으며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빛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야곱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임재와 신실하심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계획과 계획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야곱은 아내와 품삯에 관한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도록 허락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자신의 교활함과 관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대체자"입니다. 예를 들어, 독자가 창 30:37-42을 펴서 더 뛰어난 교활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말하게 하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야곱의 완전한 그림이다. 하나님께서 신뢰를 받으셨다면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얼룩한 것과 점 있는 것과 점 있는 짐승”을 번성하게 하시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다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정책을 통해 그들의 번성을 보장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야곱의 마음. 라반과 함께 20년 동안 머무는 동안 그의 모든 행동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가장 특징적으로 "도둑질"하여 모든 면에서 자신과의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라운 견해를 얻게 되는 특별한 역사의 각 단계에서 야곱의 실제 성격을 추적해 나갈 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그런 사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혜는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지성을 가지고 그를 다룬다. 사람이 처음 시작할 때 은혜의 이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뢰를 자주 흔들고 평화를 방해하는 개인적인 사악함이 나중에 발견된 것을 확고한 마음으로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매혹되었고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평안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본 자연의 완전한 파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계속 나아가면서 그들은 내면에 있는 악을 더 깊이 발견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희생의 정도와 효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즉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벗어버리고 자기 자신에게 던져진 다음, 헌신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철저한 세속성과 육욕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비참한 결과이며, 모두 "은혜 안에 굳건한 마음"을 갖지 못한 결과입니다.

야곱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매우 흥미롭고 매우 유용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세 장을 읽고 야곱과 같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놀라운 은혜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발견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야곱의 죄악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 민수 23:21 ) 그분은 자신에게 불법과 패역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마음에 확신, 즉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바로 그 확신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가련한 죄인의 마음을 결코 확신시킬 수 없습니다 . 아아! 그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에게는 죄가 없으며 , 더욱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의 단순한 근거 위에 그의 마음과 양심이 틀림없이 안식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에서를 데려가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토록 복된 은혜를 나타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우리가 야곱을 보는 불쾌한 빛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가라앉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높아집니다. 내 평가에 따르면 내 빚이 50펜스에서 500펜스로 늘어남에 따라 은혜에 대한 감각도 높아지고, 우리가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우리 모두를 “솔직히 용서”할 수 있었던” 그 사랑에 대한 나의 경험도 높아졌습니다. ( 누가복음 7:42 ) 사도는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 행하는 자에게 무익하니라"( 히 13:9 )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2장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따른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애정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분은 누구를 사랑하시며,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분 자신과 같아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에게 얼마나 작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여기 우리 앞에 제시된 그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땅에 있는 자기 형 에서에게 자기보다 먼저 사자들을 보냈더라.” 그는 분명히 에서와 관련하여 불안함을 느꼈으며, 이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를 나쁘게 대했고 그의 양심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낌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대신, 에서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다시 평소의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에서를 관리 하려고 합니다 .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 에게 이같이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의 말은 내가 라반에게 우거하여 지금까지 거기 거하였노라 하였느니라.” 이 모든 것은 영혼이 하나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났음을 나타냅니다. "나의 주"와 "당신의 종"은 형제의 언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의식적인 위엄을 지닌 사람의 언어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곱의 말이었고, 또한 야곱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말이었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네 형 에서에게로 왔더니 그도 사백 명을 거느리고 너를 맞으러 왔노라 하매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고 근심하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먼저 무엇을 합니까? 그는 즉시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니까? 아니요; 그는 관리를 시작합니다. “그가 자기와 함께한 백성과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야곱의 첫 번째 생각은 언제나 계획이었고, 여기에는 불쌍한 인간 마음의 참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세운 후에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분께 구원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를 멈추자마자 계획을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 기도와 계획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계획을 세운다면 나는 어느 정도 내 계획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두 가지는 완벽하게 호환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서로를 파괴합니다. 내 눈이 나 자신의 일들로 가득 차 있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기도는 나의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계획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일을 미신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내 재산을 거룩하게 하고 축복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그분께 직접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행동하실 수 있게 되면 그분은 자신의 대리인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과 조바심의 계획과 안배를 하나님이 소유하고 축복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구별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하느님께 자신을 형 에서에게서 구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에 “예물로 그를 달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뢰는 "현재"에 있었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마음의 확신의 실제 근거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란 종종 어렵습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우리가 고안한 어떤 계획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고 상상하거나 스스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야곱의 기도를 들은 후에 그는 “나를 내 형 에서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노니 그가 와서 나와 내 어머니를 칠까 두렵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아이들이요." 그가 "선물로 달래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잊었나요? 그는 현재의 신을 만들고 있었습니까? 그는 방금 자신을 헌신한 여호와보다 몇 마리의 소를 더 신뢰했습니까? 이것들은 에서와 관련된 야곱의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들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유리를 들여다봄으로써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야곱의 역사의 페이지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의 경영에 얼마나 더 의지하는지를 배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경영의 종말이 완전한 어리석음임을 깨달아야 하며, 참된 지혜의 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안식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경영의 일부로 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에 기도를 추가하거나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하나님께 축복을 구했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 매우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계획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대신 기도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실제로 끝내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계획을 결코 끝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 이사야 40:6 )

이것이 이 흥미로운 장의 내용입니다. 야곱이 모든 계획을 다 마치고 나서,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하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매우 놀라운 사람의 역사에 있어서 전환점입니다. 하나님과 홀로 남겨지는 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길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도달하는 유일하고 참된 길입니다. 우리는 성소의 저울로 그것들을 달아보고 거기서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할 때까지는 결코 자연과 그 모든 작용에 대한 참된 평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다; 단순한 본성의 모든 생각, 추리, 상상, 감정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홀로", 그리하여 우리만이 우리 자신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그와 씨름하매”. 마크, 그것은 야곱이 남자와 씨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씨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야곱의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흔히 언급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본문의 간단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남자와 씨름하는 것과 남자가 나와 씨름하는 것은 마음에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생각을 제시합니다. 전자의 경우 나는 그에게서 어떤 목적을 얻고 싶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는 나에게서 어떤 목적을 얻고 싶어합니다. 이제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하고 무가치한 피조물인지를 그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고,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는 것을 그토록 집요하게 반대했을 때 “그가 그의 환도뼈를 만지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그러졌느니라." 육신에 죽음의 선고가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꾸준히 행복하게 동행하려면 먼저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야곱의 비범한 성격의 모든 굴곡과 활동 가운데서 그를 따라왔습니다. 우리는 그가 라반과 함께 머무는 20년 동안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남게" 될 때까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자리에 손을 대고 "내가 너를 놓지 않겠다"고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에게는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나의 무력한 영혼을 당신께 매달립니다."

이것은 대체하고 계획하는 야곱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였습니다. 이 시점까지 그는 자신의 방식과 수단을 굳게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내가 너를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 이제 내 독자는 야곱이 "그 환도뼈에 손을 대기" 전에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전체 장면의 진정한 해석을 결정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 지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야곱과 씨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야곱의 기도의 능력에 관하여 그가 하나님께 몇 마디 말을 하자마자 “내가 선물로 그(에서)를 달래겠다. " 만일 그가 정말로 기도의 의미, 즉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의미에 들어갔다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에서를 달래기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내가 선물로 그를 달래겠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구별되어야 하며, 신앙 생활의 신성한 현실을 많이 아는 모든 영혼 안에서 그렇게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변한다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수단을 사용하는 그럴듯하고 명백히 경건한 공식 아래서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가련하고 거짓된 마음의 적극적인 불신앙을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단을 축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을 의지하는 대신 수단에 의지하여 그분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오! 우리 마음이 이런 행동의 악함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더욱 단순하게 하나 님께만 매달리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그리하여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뛰어넘는 거룩한 고양으로 더욱 특징지워질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모든 형태와 형태를 지닌 피조물의 종말에 도달하여 "당신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보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그 능력 안에 거하는 것이 모든 참된 힘의 비결입니다. 야곱은 자기 환도뼈를 만졌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니다. 그는 육체에 대한 확신이 강했기 때문에 굴복하기 전에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강인한 품성을 티끌까지 무너뜨리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의 힘의 샘을 만지는 방법과 그 위에 철저히 죽음의 선고를 내리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진정한 "하나님이나 사람과 함께하는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해지기" 전에 "약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것과 관련해서만 "우리 위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의 힘이나 지혜나 영광에 승인의 인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라앉아야만 그분께서 부활하실 수 있습니다. 자연은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은혜나 능력을 나타내는 받침대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육체가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품의 나타남은 본성을 완전히 제쳐놓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본성을 제쳐두기 전까지는 영혼은 결코 전자의 공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의 이름을 알리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의 이름이 "야곱, 즉 약탈자"임을 인정했지만, 그와 씨름하고 그를 지옥으로 끌어내렸던 분의 이름에 대한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먼지. 그는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 또는 왕자"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는 큰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라고 말할 때; 그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에게서 자신에 관한 진리를 이끌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시고 그에 따라 그를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가족의 연대기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모든 도덕적 결함 속에 자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오셨고 우리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우리에게도 축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합니다. 야곱은 그의 환도뼈를 만졌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강력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실제 이름과 상태를 가져오신 그분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받는 것과 영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분의 성품이 계시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배웁니다. "그가 거기서 그를 축복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든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데에는 축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더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길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넓적다리를 만졌을 때 그는 그것이 신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쌍하고 멈춰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전능하신 분에게 매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나는 욥기가 어떤 의미에서 야곱의 역사에서 이 장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처음 31장 전체에 걸쳐 욥은 친구들과 씨름하고 그들의 모든 주장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견지합니다. 그러나 욥기 32장 에서 하나님은 엘리후를 도구로 하여 그와 씨름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욥기 38장 에서 그분은 그의 권능의 모든 위엄으로 그에게 직접 강림하시고, 그의 위대함과 영광의 나타남으로 그를 압도하시며,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말씀을 이끌어 내십니다. 귀가 되었으나 이제 내 눈이 주를 뵈옵 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 자신을 혐오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 욥기 42:5-6 ) 이것은 사실상 그의 넓적다리에 닿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눈이 당신을 봅니다"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단순히 "나는 나 자신을 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하지만 "너."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견해는 실제로 회개와 자기혐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욥의 역사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바라보면 애곡할 것이며 그 때에 온전한 회복과 축복이 있으리라. 그들의 나중 끝은 욥의 끝과 같이 그들의 시작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아 네가 스스로 패망하였나니 너의 도움은 내게 있느니라”라는 말씀의 온전한 의미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 호세아 13:9 )

창세기 33장 & 창세기 34장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며, 그의 모든 계획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씨름하고, 환도뼈를 만지고, 멈춰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야곱이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보라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왔는지라 그가 그 자식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 주고 여종들과 그들의 아이들은 맨 앞에 있고 레아와 그의 아이들은 뒤에 있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있습니다." 이 배열은 그의 두려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에서의 손에서 복수할 것을 예상했으며,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그 복수의 첫 번째 공격에 노출시켰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깊이는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얼마나 느린 일입니까!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했다면 그는 자신과 가족의 멸망을 결코 예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아! 마음은 단순히 현존하시고 전능하시며 무한하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차분한 신뢰 속에 단순히 안식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의 염려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주목해 보십시오. “에서가 달려가서 그를 맞이하여 그를 안고 그의 목을 안고 그에게 입맞추고 우니라.” 현재는 매우 불필요했습니다. 계획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라반을 달래셨던 것처럼 에서를 달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의 가난하고 비겁하고 믿지 않는 마음을 꾸짖으시고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기를 기뻐하십니다. 에서의 무서운 칼 대신에 야곱은 그의 포옹과 입맞추기를 맞이합니다. 다툼과 갈등 대신에 그들은 눈물을 섞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누가 그분을 믿지 않겠습니까? 누가 마음의 온전한 신뢰로 그분을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모든 감미로운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새로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심하고 주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이제 너는 그분을 알고 평안하라." ( 욥기 22:21 ) 이것은 회심하지 않은 죄인에게든, 하나님의 자녀에게든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분과의 참된 친분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요한 17:3 )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질수록 우리의 평화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며, 우리의 영혼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의존에서 더욱 고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시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지탱하실 준비가 되어 있고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의 모든 무게를 그분께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선하심의 나타남 후에 우리는 야곱이 숙곳에 정착하고 순례자의 삶의 정신과 원칙에 어긋나서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집을 짓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숙곳은 그가 신성하게 정한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는 숙곳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아니요; 그러나 "나는 베델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숙곳이 아닌 벧엘이 야곱의 주요 목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아!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부여하신 것보다 부족한 위치와 부분에 만족하여 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야곱은 세겜으로 이동하여 땅을 구입하지만 여전히 신성한 표식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가 제단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그의 영혼의 도덕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는 그것을 “엘엘로헤 이스라엘”, 즉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매우 축소된 관점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그분 집의 하나님으로 알고 우리 자신을 그 집의 일부로 보는 것은 더 높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로 아는 것은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그분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 알고 우리 자신을 그 몸의 지체로 아는 것은 더 높은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에 이르면 야곱이 하나님에 대해 더 높고 더 넓은 관점을 갖게 되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에서 그는 분명히 낮은 땅에 있었고,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땅에 미치지 못할 때 항상 그렇듯이 그는 그 일에 대해 현명하게 되었습니다. 두 지파 반은 요단 이편에 자리를 잡고 가장 먼저 적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창 34장 에서 그가 세겜에 체류하면서 얻은 쓴 열매를 봅니다 . 시므온과 레위는 단순한 자연의 힘과 폭력으로 그의 가족에게 오점을 지우고 더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자기 딸에게 당한 모욕보다 야곱에게 더 혹독한 감동을 주었다. 브리스 사람 이라 나는 수가 적으니 그들이 모여 나를 대적하여 나를 죽이 리니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야곱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자신과 관련된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신이나 가족의 위험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불안하고 조심스럽고 소심하고 계산적인 정신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의 삶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야곱이 대체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확실히 히브리어의 "구름 같은 증인들"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11 . 그러나 그는 그 신성한 원칙을 습관적으로 실천하지 않음으로 인해 슬픈 실패를 나타냈습니다. 믿음이 그로 하여금 "나와 내 집은 멸망하리로다"라고 말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분명히 아니다. 창 28:14-15 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불쌍하고 소심한 정신에서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야 했습니다. "내가 너를 지키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였어야 하였느니라. 그러나 사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그의 안전보다 세겜 사람들 중에 있는 위험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알았어야 하였느니라. “그의 머리털 하나도 만질 수 없었으니 그러므로 시므온과 레위와 그들의 경솔한 행동의 결과를 보는 대신에 그는 전혀 그런 입장에 있는 것으로 스스로 판단했어야 하였느니라. 만일 그가 세겜에 거주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디나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고 그 아들들의 포악함도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깊은 슬픔과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스스로를 판단하는 대신에 상황을 살펴보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녀들의 난폭함, 완고함, 세속성에 대해 영혼의 극심한 고뇌를 얼마나 자주 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그들은 가족과 관련하여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주로 자신을 비난해야 합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세겜에서 도덕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낮은 곳을 감지할 수 있는 세련된 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매우 신실하게 그의 상황을 사용하여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서 흘러나오는 원리이며, 적용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잘못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적극적인 자비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에게서 멀어지는 괴로움을 배우는 것은 자비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염된 안식을 주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쉬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완전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시들거나 부족할 때 그분의 말씀은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신의 열매인 거짓 겸손은 방황하는 자와 타락한 자를 하나님의 회복의 원리와 척도를 알지 못한 채 낮은 위치로 이끌 것입니다. 탕자는 자기에게 있어서는 아들의 자리보다 종의 자리를 대신할 자격이 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종이 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를 그러한 위치에 두는 것은 아버지의 성품에 전혀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원칙과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35장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라.”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 왔던 원리를 확증해 줍니다. 실패나 타락이 있을 때, 주님은 영혼을 그분께 다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 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계시 2:5 ) 이것이 회복에 관한 하느님의 원칙입니다. 영혼은 가장 높은 지점까지 회상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한 표준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네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요; 그러나 '네가 떨어진 높은 지위를 기억하라.' 그리하여 오직 사람만이 자신이 얼마나 멀리 쇠퇴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발걸음을 어떻게 되돌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높고 거룩한 표준을 회상할 때, 사람은 자신의 타락한 상태의 슬픈 악을 실제로 보게 됩니다. 야곱의 가족 주위에 얼마나 두려운 양의 도덕적 악이 모여들었는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채 그의 영혼이 “벧엘로 올라가라”는 부르심으로 깨어날 때까지 이르렀습니다. 세겜은 이 모든 악을 탐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소의 분위기는 불순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영혼이 악의 진정한 성격을 어느 정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벧엘에 대한 부름이 야곱의 귀에 들리는 순간, “야곱이 자기 가족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버리고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자 벧엘로 올라가라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나님의 집"에 대한 언급 자체가 족장의 영혼에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파란만장한 20년의 역사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배운 곳은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벧엘로 돌아가서 세겜에 있는 그의 제단과는 완전히 다른 기반,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제단을 세워야 했습니다. 후자는 많은 부정함과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집의 거룩함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집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제외하고는 영혼을 악으로부터 지속적이고 지능적으로 분리하는 길에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단지 나 자신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집과의 관계에 대한 합당한 인식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 명확하고 완전하며 신성한 감각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어떻게 불순한 재료를 섞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제단은 "엘 벧엘"이라는 이름의 제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높은 수준에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실수입니다. 영적인 마음을 가진 독자라면 세겜에서의 야곱의 상태와 벧엘에서의 그의 상태 사이의 엄청난 도덕적 차이를 즉시 발견할 것입니다. 두 제단 사이에서도 동일한 차이가 관찰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우리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그분의 성품과 관계를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낮고 위축되거나 고상하고 포괄적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제단의 이름과 예배의 성격도 같은 이념을 표현합니다. 엘베델 예배는 엘엘로헤이스라엘 예배보다 더 높은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더 높은 개념을 전달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분을 고독한 개인의 진리의 하나님이라기보다 그분을 그의 집의 하나님으로 말할 때 하나님에 대한 더 고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에 아름다운 은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성품을 볼 때 항상 행복감을 느껴야 하며, 그분의 집의 모든 돌과 몸의 모든 지체와 은혜롭게 그분 자신을 연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각 돌은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산 돌”과 연결된 “산 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복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확대된 영적 지능을 통해 그분을 그러한 존재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분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는 것보다 더 높은 예배의 특성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이 벧엘을 회상할 때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는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고난의 날”을 생각나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 자신이 사다리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간 지점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는 것이 종종 좋은 일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스스로 작게 여겼던” 시절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정한 출발점입니다. “네가 스스로 작게 여겼던 때”는 우리가 종종 상기할 필요가 있는 요점입니다. 그때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며,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무(無)를 다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처음으로 봉사나 간증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개인적인 연약함과 무능력을 느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얼마나 의지하게 됩니까! 그분께 도움과 힘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열렬하게 호소하는가! 나중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예전과 같은 나약함이나 단순히 하나님께 의존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역은 기름부음이나 능력이 없이 가난하고, 빈약하고, 경솔하고, 장황한 일이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끝없는 조류에서 흘러나오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비참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일입니다.

버전에서. 9-15장,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복하시고, “탈취자” 대신에 “군왕”이라는 새 이름을 확증하십니다. 야곱은 다시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른다. 18절에는 믿음의 판단과 본성의 판단의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가 있습니다. 후자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흐릿한 안개를 통해 사물을 본다. 전자는 하나님의 임재와 권고에 비추어 그들을 바라본다. “그의 혼이 떠나가매(그녀가 죽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자연은 그를 "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자연의 생각들 사이의 차이는 참으로 넓어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전자가 아닌 후자의 지배를 받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창세기 36장

에서의 아들들의 목록과 함께 그들의 다양한 직함과 출신지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전체 영감의 정경에서 가장 유익하고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7-50장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성경에는 요셉보다 더 완전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모형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 "그의 소유"의 부러움의 대상(그의 굴욕, 고난, 죽음, 승영, 영광)으로 보든, 모든 면에서 우리는 요셉을 통해 그분을 뚜렷하게 예표합니다.

창 37장 에는 요셉의 꿈이 있는데, 그 꿈은 그의 형제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었으며 매우 높은 운명의 주체였습니다. 그의 형제들의 마음이 이러한 것에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높아지리라는 생각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그들은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을 대표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그들의 눈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열려서 “그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미워했습니다.

이제 요셉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가 형들이 그의 첫 번째 꿈을 거절한 결과로 결코 그의 간증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 “또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하니라.” 이것은 신성한 계시에 근거한 단순한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린 것은 바로 간증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간증을 숨기거나 그 가장자리와 힘을 조금이라도 뺐더라면 그는 목숨을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미워하였느니라.

요셉의 위대한 원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진리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분은 선한 고백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진리에 대한 그분의 간증은 사람 편에서 십자가, 즉 식초로 응답되었습니다. 군인의 창.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역시 가장 깊고 충만하며 풍성한 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마음의 모든 사랑의 완전한 표현으로 오셨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에게 완전히 계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와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더니 사람이 하나님을 심히 미워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났을 때 인간의 증오가 가장 충만하게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던져졌던 구덩이에서 감동적으로 예시되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멀리서 보고 그를 죽이려고 꾀하고 서로 말하되 보라 꿈 꾸는 자가 오니 자 이제 그를 죽이고 그를 죽이자 하고 그를 어떤 구덩이에 던지면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이 말은 마태복음 22장 에 나오는 비유를 강하게 생각나게 합니다 . “마지막에 그가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를 잡자” 그의 기업에 대하여 그를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는 생각으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아아! 사람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쫓아냈습니다. 땅과 하늘은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쟁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사람은 그분을 두 도둑 사이의 십자가 위에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그분께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찬란한 위엄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의 역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우물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느니라 활 쏘는 자가 그를 심히 괴롭게 하고 쏘고 미워하였으되 그의 활은 견실하며 그의 팔은 견고하도다”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그에게서 나시느니라 너를 도우시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과 네게 복을 주실 전능자의 손으로 말미암아 손이 강건하여졌느니라 위로 하늘의 축복과 아래로 깊은 물의 축복과 젖과 태의 축복이여 네 아비의 축복이 내 조상들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닿도록 하리로다 요셉의 머리요 또 그 형제 중 구별된 자의 정수리이니이다' ( 창 49:22-26 )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올 영광”을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궁수들"은 그들의 일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보다 강하셨습니다. 진짜 요셉은 친구들의 집에서 총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의 팔이 강건하여졌”으며, 믿음은 이제 그분을 교회와 이스라엘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축복과 영광의 모든 하나님의 목적의 기초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덩이와 감옥에 갇힌 요셉을 볼 때, 그리고 나중에 그가 애굽 온 땅을 다스리게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사이의 차이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와 “하늘에 있는 위엄의 보좌”를 볼 때 우리는 같은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 외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의 실제 상태를 드러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느니라.” ( 요한복음 15:22 ) 그들이 죄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니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9:41 )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셨고, 사람은 “이 사람이 상속자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 그를 죽이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자기 죄를 가리울 겉옷이 없”습니다.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명을 고백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시력을 고백하는 것 입니다 .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공언하는 시대에 참으로 엄숙한 원리입니다. 죄의 영속성은 단지 본다고 고백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경이면서도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눈을 뜨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8장 .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를 영광스럽게 승리시키는 놀라운 상황 중 하나를 제시합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에게서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 히브리 7:14 ) 그런데 어떻게요? “유다는 다말 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더라 .” ( 마태 1:3 )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라는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을 딛고 일어나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따라서 조금 더 나아가서 마태복음에는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족보 사슬의 연결고리로서 다말과 밧세바를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분명한가! 마태복음 1장이 끝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그것도 성령의 펜을 통해 발견된다는 것이 얼마나 분명한가! 인간은 결코 그러한 족보를 고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성하며, 영적인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신성한 은혜의 축복된 표현을 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신성한 영감, 둘째로 적어도 육신에 따른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한 기록입니다. 나는 2 Sam의 비교를 믿습니다 . 11  Gen. 38 과 Matt. 나는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달콤하고 교화적인 묵상을 위한 자료를 제공할 것입니다.

영감의 이 흥미로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의 큰 요점, 즉 구덩이에 있던 사람을 높이는 데로 향하는 일련의 놀라운 섭리의 행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수많은 하위 개체를 불러옵니다. “많은 마음의 생각”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높아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시어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시고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으니 곧 요셉이 종으로 팔려 그 발을 착고에 상하게 하고 그를 쇠사슬에 매어 그 때까지 하였더라” 그 말이 응할 때 곧 여호와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풀어 놓으니 곧 백성의 지도자라 그가 그를 자기 집의 주인으로 삼으며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그의 뜻대로 그의 방백들을 묶고 그의 원로원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라." ( 시편 105:16-22 )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거부했던 분을 높이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같은 사람들에게 거절한 그들의 죄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놀랍게 이루어졌는가! 가장 사소하고 가장 중요하며, 가능성이 가장 높거나 가능성이 가장 낮은 상황이 하나님의 목적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집니다.

 

창세기 39장  40장

창세기 39 장에서 사탄은 보디발의 아내를 이용했고, 창세기 40 장에서는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을 이용했습니다. 전자는 요셉을 지하 감옥에 가두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자는 그의 배은망덕한 과실로 인해 그를 거기에 두곤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손가락은 환경이라는 광대한 기계의 모든 샘을 인도하고 있었으며, 정해진 때가 되자 그분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사람을 이끌어 내시고 그분의 발을 ​​넓은 방에 두셨습니다. 이제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그분의 웅대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서 아버지의 손길과 권고를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모든 종류의 대리인이 그분의 주권적인 처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천사, 사람, 악마 등 모두가 그분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있으며 모두가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성경에는 이 모든 것이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대장의 가족, 이방인 왕의 가족, 그리고 그의 침상 곁을 방문하시며, 침상 위에 있는 그의 머리에 나타나는 환상 자체가 그분의 계획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히 개인과 그들의 상황이 하나님의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채택되고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집트와 주변 국가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온 땅은 “그 형제들과 구별되신” 분의 영광과 위대함을 전시할 극장이 되도록 하나님의 손에 의해 준비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놀라운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성도의 영혼에게 가장 행복하고 고상한 훈련 중 하나입니다. 이 심오하고 흥미로운 요셉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강력하게 드러나는가! 잠시 동안 경비대장의 지하 감옥을 살펴보십시오.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 즉 사회에서 버림받고 더러운 죄로 기소된 "철에 갇힌"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가 거의 순간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보면, 그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말대로 다스림을 받으리라 오직 보좌에서만 내가 너보다 크겠느냐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다스리게 하노라 하고 바로가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니라 세마포를 입히고 목에 금목걸이를 걸고 자기의 둘째 병거에 타게 하니 그들이 그 앞에서 부르짖고 무릎을 꿇으니 애굽 온 땅의 통치자를 세우니라 바로가 이르되 요셉에게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너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느니라' ( 창 41:39-44 )

그렇다면 여기에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승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구덩이와 지하 감옥과 대조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하나님의 손길을 뚜렷이 드러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놀라운 예표를 보게 됩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의 시기와 이방인의 거짓 판결로 말미암아 그 구덩이와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애굽 온 땅의 통치자가 되니라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온 땅에 축복의 통로가 되고 생명을 유지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실제로 유형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의도와 목적에 따라 죽음의 자리, 사람의 손에 놓여졌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으켜지고 위엄과 영광 가운데 놓이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나사렛 예수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서 행하신 능력과 기사와 표적으로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니라 하나님이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행 2:22-24 )

그러나 요셉의 역사에는 주목된 내용과 함께 그 예표를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만드는 두 가지 점이 있습니다. 나는 창 41장 에서 그가 낯선 사람과 결혼한 것을 암시하고 , 창 45장 에서 그의 형제들과의 인터뷰를 암시한다 . 다음은 행사 순서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로 소개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거부하고, 그들로서는 그분을 죽음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를 데려가시고 그를 가장 존귀한 자리로 높이십니다. 이렇게 높아지면 그는 신부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으로는 그의 형제들이 완전히 상하여 그의 앞에 부복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알리시고 그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면 그는 그들과 온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나는 요셉의 결혼과 그의 형제들의 회복에 관해 몇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이상한 아내는 교회의 그림자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나 배척을 받으시고 높은 곳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이루시고 하늘 영광 가운데 그분과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교리는 이미 창세기 24장 에 대한 설명에서 다루어졌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한두 가지 요점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우리는 요셉의 이집트 신부가 그의 영광 가운데 그와 친밀하게 연합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아내는 교회가 그분의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모세의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거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제시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부로서 그의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에게만 알려진 친밀하고 친밀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도 그러합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거절과 영광을 동시에 나누기 위해 그리스도께 모아졌습니다. 교회의 지위에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위이며, 교회의 지위는 언제나 교회의 행실에 특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모이면 영광 가운데 높아지는 것이요 이 땅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니라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다시는 그를 알지 아니하노라.” ( 고후 5:16 ) 교회가 모이는 곳은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것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요한복음 12:32 )

이 원리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에는 언뜻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성향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일치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표시에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표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성도들의 연합이요”, 즉 성도들의 연합의 중심이 되는 것은 대중적인 정서입니다. 이제 우리를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세우는 것은 무한히 귀중한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은 복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피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신성한 기초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연합의 중심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모으신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진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연합에 품성, 즉 높고 거룩한 품성을 부여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보다 더 낮은 입장을 취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종파나 분열을 형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요한 의식을 중심으로 모이거나, 아무리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를 중심으로 모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보다 못한 것을 우리의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하늘의 머리께로 모아진다는 진리에서 흘러나오는 실제적인 결과를 숙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그분께 집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늘에 감추어져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곳의 그분의 위치에서 자신의 품성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7:16 , 19 )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에서도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오니 너희도 산 돌 같이 세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집 곧 거룩한 제사장을 세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게 하려 하심이라" ( 베드로전서 2:4-5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모아졌다면 우리는 그분이 계신 그대로 ,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 에게로 모아져야 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혼을 이 사실을 이해하도록 인도할수록 우리는 우리에게 행해지는 특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신부는 구덩이나 지하 감옥이 아니라 애굽에서 그가 지닌 지위의 위엄과 영광 안에서 그와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 우리는 두 입장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우리는 “ 기근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았으니”라고 읽습니다.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의 결합의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들은 이 시련의 시기 이전에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온 땅에 닥칠 “큰 환난”이 있기 전에, 그 모든 지체가 부름을 받고 온 몸이 완성되어 하늘에 계신 머리께로 모아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나눈 인터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후일의 이스라엘 역사와 몇 가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시야에서 숨겨졌던 기간 동안, 형제들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양심의 훈련을 통해 깊고 엄중한 시련을 통과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연습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죄가 있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듣지 아니하였 느니라 ."  환난이 우리에게 임하였느냐 르우벤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에게 죄를 짓지 말라 하였어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보라 그 피를 맡아야 하리라 하였느니라. ( 창 42:21-22 )

다시 창세기 44 장에서 우리는 “유다가 이르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정죄하리이까 하나님이 주의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처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양심에 죄에 대한 참된 인식을 심어주실 수 있으며, 영혼을 그분의 임재 가운데 있는 심오한 상태로 끌어내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분 자신의 일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죄악의 삶을 계속하다 마침내 전능자의 화살이 그들의 양심을 꿰뚫을 때까지 마음을 살피고 영혼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게 되는데, 이는 오직 성령의 풍부한 자원에서만 위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구하는 것.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 대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고…앉아서 떡을 먹더라.” “대발에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향유를 자기에게 바르는 자들에게는 화 있을진저 그들은 요셉의 고난을 인하여 근심하지 아니하는도다.” ( 아모스 6:6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마음의 슬픔과 양심의 활동을 나타내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형제들은 모든 것이 옳았다고 헛되이 상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7년 풍년과 7년 흉년이니라!” 무슨 뜻인가요? 누가 보냈나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습니까? 놀라운 섭리! 헤아릴 수 없는 지혜! 기근이 가나안에 이르렀고, 배고픈 부르짖음이 실제로 죄 많은 형제들을 부상당한 요셉의 발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들은 “악한 손으로” 구덩이에 던져진 사람 앞에 그들의 양심을 꿰뚫는 확신의 화살을 들고 서 있습니다. 확실히 그들의 죄가 그들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 앞에서였습니다. 축복받은 곳!

“요셉이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능히 참지 못하고 외쳐 이르되 다들 나를 떠나라 하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자기를 알리는 동안에는 그와 함께 서 있는 자가 없었더라.” ( 창세 45:1 ) 낯선 사람은 누구도 이 신성한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확신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함께 모이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하니 그들이 가까이 가니라 이르되 나는 너희가 애굽에 판 너희 아우 요셉이니 그러므로 근심하지 말며 한탄하지 말라 당신들이 나를 이리 팔았으니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보존하고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으니 이제는 당신들이 아니니라 나를 여기로 보냈는데, 신이시여." 유죄 판결을 받은 양심을 완전히 안식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형제들은 이미 아주 철저하게 스스로를 정죄하였으므로 요셉은 그들의 상한 마음에 축복된 향유를 부어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후기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바라보고 애통”할 때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다루심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재성과 “죄와 더러움을 위하여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열릴 샘”의 정결케 하는 효능을 증명할 것입니다. ( 슥 13:1 ).

사도행전 3장 에서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유대인들의 양심 속에 이러한 신적 확신을 일으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 아들을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기로 작정하였을 때에 그를 부인하였느니라 너희가 거룩하고 의인을 부인하고 살인자를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왕을 죽였으니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자니 우리가 이에 증인이로다' 이 말은 청중의 마음과 입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한 고백, 즉 “우리에게 죄가 있도다”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따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모르고 너희 관원들도 그렇게 하였음을 이제 내가 알았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회개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 때에 상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비록 유대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들의 마음의 원수를 행하였을지라도 요셉의 형제들도 요셉을 대하여 행하였지만 각 사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미리 나타내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완전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참으로 확신을 갖는 양심뿐이다. “우리의 죄가 참으로 크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너희가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는 귀한 은혜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자신의 정죄를 철저히 선언한 영혼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하고 감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나머지 장은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것과 그들이 그곳에 정착한 일을 다루고 있다. 남은 기근 기간 동안 요셉이 행한 일; 야곱이 열두 족장을 축복함; 그의 죽음과 매장. 영적인 마음이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발견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근거 없는 두려움은 그의 아들이 살아 있고 높아지는 것을 보고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심판이 뒤섞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형제를 보낸 바로 그 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요셉의 놀라운 은혜는 바로에게 높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자신을 숨기고 왕에 대한 지속적인 의무로 백성을 묶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가라"고 말했고, 요셉은 사실상 "네가 가진 모든 것과 네 소유가 모두 바로의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사람의 아들이 신성한 임명에 따라 정부의 고삐를 자신의 손에 맡기고 구속된 모든 피조물, 즉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를 다스릴 그 영광스러운 시간으로 영혼을 인도합니다. — 영원한 권고에 따라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장소를 차지합니다. 완전히 회복된 이스라엘 집은 그분의 은혜로운 손으로 양육되고 유지될 것입니다. 온 땅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 깊은 축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복종시키신 후에 그분은 정부의 고삐를 하나님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요셉의 역사의 풍부함과 풍부함에 대한 어떤 생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이스라엘 집에 대한 아들의 사명, 즉 그분의 굴욕과 거절, 이스라엘의 깊은 훈련과 최종적인 회개와 회복,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 그분의 승영 등을 분명히 예표적으로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그리고 보편적 정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때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들이 영감의 정경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가르쳐지고 완전히 확립되어 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의 역사 위에 그 진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귀중한 진리에 대한 그러한 초기 예표를 찾는 것은 교화적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만연한 신성한 일치를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창세기나 에베소서, 즉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선지자를 읽든 우리는 동일한 진리를 배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습니다.

{*야곱의 경력의 마지막은 그의 다사다난한 역사의 모든 이전 장면과 가장 기분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그것은 폭풍우가 몰아친 날 이후의 고요한 저녁을 연상시킵니다. 낮 동안 구름과 안개와 안개에 가려져 있던 태양은 장엄하고 밝게 지며, 그 광선으로 서쪽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밝은 내일의 응원하는 전망. 우리 연로한 축복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기적인 두려움의 탈취, 거래, 운영, 관리, 이동, 뒤섞기, 자연과 대지의 모든 어두운 구름이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교통만이 나누어줄 수 있는 거룩한 기술 안에서 축복을 주고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눈은 어두워도 신앙의 눈은 예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배정된 상대적인 위치에 대해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창 27장 에 나오는 그의 아버지 이삭처럼 거의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심히 떨지" 않았습니다 . 정반대입니다. 덜 배운 아들에 대한 그의 현명한 대답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이다. 감각의 힘은 이삭의 안일함처럼 그의 영적 시력을 흐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험의 학교에서 신성한 목적에 가까이 머무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으며, 자연의 영향력은 그를 거기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창세기 48:11 에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고 우리의 모든 두려움보다 더 뛰어나심을 나타내시는 매우 아름다운 예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씨도 보이셨느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요셉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살아 계시고 가장 높은 권세의 자리 곧 보좌 바로 옆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느니라.” ( 고린도전서 2:9 )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한 이해력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칭호가 소개되는 방식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네 아들 요셉이 네게로 오느니라 하매 이스라엘이 기운을 내어 침상에 앉았고" 그 다음에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야곱이 요셉에게 이르되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셨느니라." 나 루즈에 있어." 이제 우리는 성경에 구체적인 의미가 없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의 교환에는 몇 가지 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곱”은 하나님이 내려오신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야곱이 높아진 높이.}

 

C. H. Mackintosh.

 

Genesis 16

Here we find unbelief casting its dark shadow across the spirit of Abraham, and again turning him aside, for a season, from the path of simple, happy confidence in God. "And Sarai said to Abram, Behold the Lord has restrained me from bearing." These words bespeak the usual impatience of unbelief; and Abraham should have treated them accordingly, and waited patiently on the Lord for the accomplishment of His gracious promise. The poor heart naturally prefers anything to the attitude of waiting. It will turn to any expedient — any scheme — any resource, rather than be kept in that posture. It is one thing to believe a promise, at the first, and quite another thing to wait quietly for the accomplishment thereof. We can see this distinction constantly, exemplified in a child. If I promise my child anything, he has no idea of doubting my word; but yet, I can detect the greatest possible restlessness and impatience in reference to the time and manner of accomplishment. And cannot the wisest sage find a true mirror in which to see himself reflected, in the conduct of a child? Truly so. Abraham exhibits faith, in Gen. 15 and yet he fails in patience, in Gen. 16. Hence the force and beauty of the apostle's word, in Hebrews 6, "followers of them who through

There is such a thing, in the commercial world, as "the present worth" of a bill or promissory note, for if men are called upon to wait for their money, they must be paid for waiting. Now, in faith's world, there is such a things as the present worth of God's promise; and the scale by which that worth is regulated, is the heart's experimental knowledge of God; for according to my estimate of God, will be my estimate of His promise; and moreover, the subdued and patient spirit finds its rich and full reward in waiting upon Him for the accomplishment of all that He has promised.

However, as to Sarah, the real amount of her word to Abraham is this, "the Lord has failed me; it may be, my Egyptian maid will prove a resource for me." Anything but God for a heart under the influence of unbelief. It is often truly marvellous to observe the trifles to which we will betake ourselves, when once we have lost the sense of God's nearness, His infallible faithfulness, and unfailing sufficiency. We lose that calm and well-balanced condition of soul, so essential to the proper testimony of the man of faith; and, just like other people, betake ourselves to any or every expedient, in order to reach the wished-for end, and call that "a laudable use of means."

But it is a bitter thing to take ourselves out of the place of absolute dependence upon God. The consequences must be disastrous. Had Sarah said, 'Nature has failed me, but God is my resource,' how different it would have been! This would have been her proper ground; for nature really had failed her. But, then, it was nature in one shape, and therefore she wished to try nature in another. She had not learnt to look away from nature in every shape. In the judgement of God, and of faith, nature in Hagar was no better than nature in Sarah. Nature, whether old or young, is alike to God; and, therefore, alike to faith; but, ah! we are only in the power of this truth when we are experimentally finding our living centre in God Himself. When the eye is taken off that Glorious Being, we are ready for the meanest device of unbelief. It is only when we are consciously leaning on the only true, the only wise, the living God, that we are enabled to look away from every creature stream. It is not that we shall despise God's instrumentality. By no means. To do so would be recklessness and not faith. Faith values the instrument, not because of itself, but because of Him who uses it. Unbelief looks only at the instrument, and judges of the success of a matter by the apparent efficiency thereof, instead of by the sufficiency of Him who, in grace, uses it. Like Saul, who, when he looked at David, and then looked at the Philistine, said, "thou are not able to go against this Philistine to fight with him; for thou art but a youth." Yet the question in David's heart was not as to whether he was able, but whether Jehovah was able.

The path of faith is a very simple and a very narrow one. It neither deifies the means, on the one hand, nor despises it, on the other. It simply values it, so far as it is evidently God's means, and no further. There is a vast difference between God's using the creature to minister to me, and my using it to shut Him out. This difference is not sufficiently attended to. God used the ravens to minister to Elijah, but Elijah did not use them to exclude God. If the heart be really trusting in God, it will not trouble itself about His means. It waits on Him, in the sweet assurance that by what means soever He pleases, He will bless, He will minister, He will provide.

Now, in the case before us, in this chapter, it is evident that Hagar was not God's instrument for the accomplishment of His promise to Abraham. He had promised a son, no doubt, but He had not said that this son would be Hagar's; and, in point of fact, we find from the narrative, that both Abraham and Sarah "multiplied their sorrow," by having recourse to Hagar; for "when she saw that she had conceived, her mistress was despised in her eyes." This was but the beginning of those multiplied sorrows, which flowed from hastening after nature's resources. Sarah's dignity was trampled down by an Egyptian bond-woman, and she found herself in the place of weakness and contempt. The only true place of dignity and power is the place of felt weakness and dependence. There is no one so entirely independent of all around, as the man who is really walking by faith, and waiting only upon God; but the moment a child of God makes himself a debtor to nature or the world, he loses his dignity, and will speedily be made to feel his loss. It is no easy task to estimate the loss sustained by diverging, in the smallest measure, from the path of faith. No doubt, all those who walk in that path will find trial and exercise; but one thing is certain, that the blessings and joys which peculiarly belong to them are infinitely more than a counterpoise; whereas, when they turn aside, they have to encounter far deeper trial, and nought but that.

"And Sarai said, My wrong be upon thee." When we act wrong, we are, oft-times, prone to lay the blame on some one else. Sarah was only reaping the fruit of her own proposal, and yet she says to Abraham, "My wrong be upon thee;" and then, with Abraham's permission, she seeks to get rid of the trial which her own impatience had brought upon her. "But Abram said to Sarai, Behold thy maid is in thy hand; do to her as it pleases thee. And when Sarah dealt hardly with her, she fled from her face." This will not do. "The bond-woman" cannot be got rid of by hard treatment. When we make mistakes, and find ourselves called upon to encounter the results thereof, we cannot counteract those results by carrying ourselves with a high hand. We frequently try this method, but we are sure to make matters worse thereby. If we have done wrong, we should humble ourselves and confess the wrong, and wait on God for deliverance. But there was nothing like this manifested in Sarah's case. Quite the reverse. There is no sense of having done wrong; and, so far from waiting on God for deliverance, she seeks to deliver herself in her own way. However, it will always be found that every effort which we make to rectify our errors, previous to the full confession thereof, only tends to render our path more difficult. Thus Hagar had to return, and give birth to her son, which son proved to be not the child of promise at all, but a very great trial to Abraham and his house, as we shall see in the sequel.

Now, we should view all this in a double aspect: first, as teaching us a direct practical principle of much value; and secondly, in a doctrinal point of view. And, first, as to the direct, practical teaching, we may learn that when, through the unbelief of our hearts, we make mistakes, it is not all in a moment, nor yet by our own devices, we can remedy them. Things must take their course. "Whatsoever a man sows that shall he also reap. For he that sows to his flesh shall of the flesh reap corruption; but he that sows to the Spirit, shall of the Spirit reap life everlasting." This is an unalterable principle, meeting us, again and again, on the page of inspiration, and also on the page of our personal history. Grace forgives the sin and restores the soul, but that which is sown must be reaped. Abraham and Sarah had to endure the presence of the bond-woman and her son for a number of years, and, then, get rid of them in God's way. There is peculiar blessedness in leaving ourselves in God's hands. Had Abraham and Sarah done so, on the present occasion, they would never have been troubled with the presence of the bond-woman and her son; but, having made themselves debtors to nature, they had to endure the consequences. But, alas! we are often "like a bullock unaccustomed to the yoke," when it would be our exceeding comfort to "behave and quiet ourselves as a child that is weaned of his mother." No two figures can be more opposite than a stubborn bullock and a weaned child. The former represents a person senselessly struggling under the yoke of circumstances, and rendering his yoke all the more galling by his efforts to get rid of it; the latter represents one meekly bowing his hand to everything, and rendering his portion all the sweeter, by entire subjection of spirit.

And, now, as to the doctrinal view of this chapter. We are authorised to look at Hagar and her son, as figures of the covenant of works, and all who are thereby brought into bondage. (Gal. 4:22-25) "The flesh" is, in this important passage, contrasted with "promise;" and thus we not only get the divine idea as to what the term "flesh" implies, but also as to Abraham's effort to obtain the seed by means of Hagar, instead of resting in God's "promise." The two covenants are allegorised by Hagar and Sarah, and are diametrically opposite the one to the other. The one gendering to bondage, inasmuch as it raised the question as to man's competency "to do" and "not to do," and made life entirely dependent upon that competency. "The man that does these things shall live in them." This was the Hagar-covenant. But the Sarah-covenant reveals God as the God of promise, which promise is entirely independent of man, and founded upon God's willingness and ability to fulfil it. When God makes a promise, there is no "if" attached thereto. He makes it unconditionally, and is resolved to fulfil it; and faith rests in Him, in perfect liberty of heart. It needs no effort of nature to reach the accomplishment of a divine promise. Here was, precisely, where Abraham and Sarah failed. They made an effort of nature to reach a certain end, which end was absolutely secured by a promise of God. This is the grand mistake of unbelief. By its restless activity, it raises a hazy mist around the soul, which hinders the beams of the divine glory from reaching. "He could there do no mighty works, because of their unbelief." One great characteristic virtue of faith is, that it ever leaves the platform clear for God to show Himself; and truly, when He shows Himself, man must take the place of a happy worshipper.

The error into which the Galatians allowed themselves to be drawn, was the addition of something of nature to what Christ had already accomplished for them by the cross. The gospel which had been preached to them, and which they had received, was the simple presentation of God's absolute, unqualified, and unconditional grace. "Jesus Christ had been evidently set forth crucified among them." This was not merely promise divinely made, but promise divinely and most gloriously accomplished. A crucified Christ settled everything, in reference both to God's claims and man's necessities. But the false teachers upset all this, or sought to upset it, by saying, "Except ye be circumcised after the manner of Moses, ye cannot be saved." This, as the apostle teaches them, was, in reality, "making Christ of none effect." Christ must either be a whole Saviour, or no Saviour at all. The moment a man says, "except ye be this or that, ye cannot be saved," he totally subverts Christianity; for in Christianity I find God coming down to me, just as I am, a lost, guilty, self-destroyed sinner; and coming, moreover, with a full remission of all my sins, and a full salvation from my lost estate, all perfectly wrought by Himself on the cross.

Hence, therefore, a man who tells me, "you must be so and so, in order to be saved," robs the cross of all its glory, and robs me of all my peace. If salvation depends upon our being or doing ought, we shall, inevitably, be lost. Thank God, it does not; for the great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gospel is, that God is ALL — man is NOTHING. It is not a mixture of God and man. It is all of God. The peace of the gospel does not repose, in part, on Christ's work, and, in part, on man's work; it reposes wholly on Christ's work, because that work is perfect — perfect for ever; and it renders all who put their trust in it as perfect as itself.

Under the law, God, as it were, stood still to see what man could do; but, in the gospel, God is seen acting, and as for man, he has but to "stand still and see the salvation of God." This being so, the inspired apostle hesitates not to say to the Galatians, "Christ is become of no effect to you; whosoever of you are justified by law, (en nomoo,) ye are fallen from grace." If man has anything to do in the matter, God is shut out; and if God is shut out, there can be no salvation, for it is impossible that man can work out a salvation by that which proves him a lost creature; and then if it be a question of grace, it must be all grace. It cannot be half grace, half law. The two covenants are perfectly distinct. It cannot be half Sarah and half Hagar. It must be either the one or the other. If it be Hagar, God has nothing to do with it; and if it be Sarah, man has nothing to do with it. Thus it stands throughout. The law addresses man, tests him, sees what he is really worth, proves him a ruin, and puts him under the curse; and not only puts him under it, but keeps him there, so long as he is occupied with it — so long as he is alive. "The law has dominion over a man so long as he lives;" but when he is dead, its dominion necessarily ceases, so far as he is concerned, though it still remains in full force to curse every living man.

The gospel, on the contrary, assuming man to be lost, ruined, dead, reveals God as He is — the Saviour of the lost — the Pardoner of the guilty — the Quickener of the dead. It reveals Him, not as exacting ought from man; (for what could be expected from one who has died a bankrupt) but as exhibiting His own independent grace in redemption. This makes a material difference and will account for the extraordinary strength of the language employed i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 marvel" — "Who has bewitched you" — "I am afraid of you" — "I stand in doubt of you" — "I would they were even cut off that trouble you." This is the language of the Holy Ghost, who knows the value of a full Christ, and a full salvation; and who also knows how essential the knowledge of both is to a lost sinner. We have no such language as this in any other epistle; not even in that to the Corinthians, although there were some of the grossest disorders to be corrected amongst them. All human failure and error can be corrected by bringing in God's grace; but the Galatians, like Abraham in this chapter, were going away from God, and returning to the flesh. What remedy could be devised for this? How can yon correct an error which consists in departing from that which alone can correct anything? To fall from grace, is to get back under the law, from which nothing can ever be reaped but "the curse." May the Lord establish our hearts in His own most excellent grace!

 

Genesis 17

Here we have God's remedy for Abraham's failure set before us. "And when Abram was ninety years old and nine, the Lord appeared to Abram, and said to him, I am the Almighty God: walk before me, and be thou perfect."* This is a most comprehensive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Abraham had not been walking before the Almighty God when he adopted Sarah's expedient in reference to Hagar. It is faith alone that can enable a man to walk up and down before an Almighty One. Unbelief will ever be thrusting in something of self, something of circumstances, second causes, and the like, and thus the soul is robbed of the joy and hence, the calm elevation, and holy independence, which flow from leaning upon the arm of One who can do everything. I believe we deeply need to ponder this. God is not such an abiding reality to our souls as He ought to be, or as he would be, were we walking in more simple faith and dependence.

{*I would here offer a remark as to the word "perfect." When Abraham was called upon to be "perfect," it did not mean perfect in himself; for this he never was, and never could be. It simply, meant that he should be perfect as regards the object before his heart — that his hopes and expectations were to be perfectly and undividedly centred in the "Almighty God."

In looking through the New Testament, we find the word "perfect" used in, at least, four distinct senses. In Matt. 5:48, we read, "Be ye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Here we learn from the context that the word "perfect" refers to the principle of our walk. At verse 44, we read, "love your enemies, … that ye may be the sons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 he makes the sun to rise up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upon the just and the unjust" Hence, to be "perfect" in the sense of Matt. 5:48 is to act on a principle of grace toward all, even toward those who are injurious and hostile. A Christian going to law, and asserting or contending for his rights, is not "perfect as his Father" for his Father is dealing in grace, whereas he is dealing in righteousness.

The question here is not as to the right or wrong of going to law with worldly people, (as to brethren, 1 Cor. 6 is conclusive.) All I contend for is, that a Christian so doing is acting in a character the direct opposite to that of his Father; for assuredly He is not going to law with the world. He is not now on a judgement-seat, but on a mercy-seat — a throne of grace. He showers His blessings upon those who, were He to go to law with them, should be in hell. Wherefore it is plain that a Christian, when he brings a man before the judgement-seat, is not "perfect as his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At the close of Matt. 18 we have a parable which teaches us that a man who asserts his rights is ignorant of the character and proper effect of grace. The servant was not unrighteous in demanding what was due to him; but he was ungracious. He was totally unlike his master. He had been forgiven ten thousand talents, and yet he could seize his fellow by the throat for a paltry hundred pence. What was the consequence? He was delivered to the tormentors. He lost the happy sense of grace, and was left to reap the bitter fruits of having asserted his rights, while being himself a subject of grace. And, observe further, he was called "a wicked servant," not because of having owed "ten thousand talents," but because of not having forgiven the "hundred pence." The master had ample grace to settle the former, but he had not grace to settle the latter. This parable has a solemn voice for all Christians going to law; for although in the application of it, it is said, "so shall my heavenly Father do to you, if you, from your heart, forgive not every one his brother their trespasses," yet is the principle of general application, that a man acting in righteousness will lose the sense of grace.

In Hebrews 9 we have another sense of the term "perfect." Here, too, the context settles the import of the word. It is "perfect, as pertaining to the conscience." This is a deeply important use of the term. The worshipper under the law never could have a perfect conscience, for the simplest reason possible, because he never had a perfect sacrifice. The blood of a bullock and a goat did well enough for a time, but it could not do for ever and, therefore, could not give a perfect conscience. Now, however, the weakest believer in Jesus is privileged to have a perfect conscience. Why? Is it because he is a better man than the worshipper under the law? Nay; but because he has gotten a better sacrifice. If Christ's sacrifice is perfect for ever, the believer's conscience is perfect for ever. The two things necessarily go together. For the Christian not to have a perfect conscience is a dishonour to the sacrifice of Christ. It is tantamount to saying that His sacrifice is only temporary, and not eternal in its effect; and what is this but to bring it down to the level of the sacrifices under the Mosaic economy.

It is very needful to distinguish between perfection in the flesh and perfection as to conscience. To pretend to the former, is to exalt self; to refuse the latter, is to dishonour Christ. The babe in Christ should have a perfect conscience; whereas St. Paul had not, nor could have, perfect flesh. The flesh is not presented in the word as a thing which is to be perfected, but as a thing which has been crucified. This makes a wide difference. The Christian has sin in him, but not on him. Why? Because Christ, who had no sin in Him, ever, had sin on Him, when He was nailed to the cross.

Finally, in Phil. 3 we have two other senses of the word "perfect." The apostle says, "not as though I had already attained, either were already perfect," and yet a little further on he says, "Let as many as be perfect be thus minded." The former refers to the apostles full and everlasting conformity to Christ in glory. The latter refers to our having Christ as the all-engrossing object before the heart's affections.}

"Walk before me." This is true power. To walk thus, implies our having nothing whatever before our hearts save God Himself. If I am founding my expectation upon men and things, I am not walking before God, but before men and things. It is of the utmost importance to ascertain who or what I have before me as an object. To what am I looking? On whom or what am I leaning, at this moment? Does God entirely fill my future? Have men or circumstances ought to do therein? Is there any space allotted to the creature? The only way in which to get above the world is to walk by faith, because faith so completely fills the scene with God, that there is no room for the creature, no room for the world. If God fills up my entire range of vision, I can see nothing else; and then I am able to say with the Psalmist, "My soul, wait thou only upon God; for my expectation is from him. He only is my rock and my salvation: he is my defence, I shall not be moved." (Ps. 62:5-6) This word "only" is deeply searching. Nature cannot say this. Not that it will, save when under the direct influence of a daring and blasphemous scepticism, formally shut out God altogether; but it, assuredly, cannot say, "He only."

Now, it is well to see that, as in the matter of salvation, so in all the details of actual life, from day to day, God will not share His glory with the creature. From first to last, it must be "He only;" and this, too, in reality. It will not do to have the language of dependence upon God on our lips, while our hearts are really leaning on some creature resource. God will make all this fully manifest; He will test the heart; He will put faith into the furnace. "Walk before me, and be thou perfect." Thus it is we reach the proper point. When the soul is enabled, by grace, to get rid of all its fondly-cherished creature expectations, then, and only then, it is prepared to let God act; and when He acts all must be well. He will not leave anything undone. He will perfectly settle everything on behalf of those who simply put their trust in Him. When unerring wisdom, omnipotent power, and infinite love combine, the confiding heart may enjoy unruffled repose. Unless we can find some circumstance too big or too little for "the Almighty God," we have no proper base on which to found a single anxious thought. This is an amazing truth, and one eminently calculated to put all who believe it into the blessed position in which we find Abraham in this chapter. When God had, in effect, said to him, "leave all to me and I will settle it for you, beyond your utmost desires and expectations; the seed and the inheritance, and everything pertaining thereto, will be fully and everlastingly settled, according to the covenant of the Almighty God" — then "Abram fell on his face." Truly blessed attitude! the only proper one for a thoroughly empty, feeble, and unprofitable sinner, to occupy in the presence of the living God, the Creator of heaven and earth, the possessor of all things, "the Almighty God."

"And God talked with him." It is when man is in the dust, that God can talk to him in grace. Abraham's posture here, is the beautiful expression of entire prostration, in the presence of God, in the sense of utter weakness and nothingness. And this, be it observed, is the sure precursor of God's revelation of Himself. It is when the creature is laid low that God can show Himself in the unclouded effulgence of what He is. He will not give His glory to another. He can reveal Himself, and allow man to worship in view of that revelation; but until the sinner takes his proper place, there can be no unfolding of the divine character. How different is Abraham's attitude in this and the preceding chapter! There, he had nature before him; here, he has the Almighty God. There, he was an actor; here, he is a worshipper. There, he was betaking himself to his own and Sarah's contrivance; here, he leaves himself and his circumstances, his present and his future, in God's hands, and allows Him to act in him, for him, and through him. Hence, God can say, "I will make" "I will establish" "I will give" "I will bless." In a word, it is all God and His actings; and this is real rest for the poor heart that has learnt anything of itself.

The covenant of circumcision is now introduced. Every member of the household of faith must bear in his body the seal of that covenant. There must be no exception. "He that is born in thy house, and he that is bought with thy money, must needs be circumcised: and my covenant shall be in your flesh, for an everlasting covenant. And the uncircumcised man child, whose flesh of his foreskin is not circumcised, that soul shall be cut off from his people, he has broken my covenant." We are taught in Romans 4, that circumcision was "a seal of the righteousness of faith."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ounted to him for righteousness." Being thus counted righteous, God set His "seal" upon him.

The seal with which the believer is now sealed is not a mark in the flesh, but "that Holy Spirit of promise, whereby he is sealed to the day of redemption." This is founded upon his everlasting connection with Christ, and his perfect identification with Him, in death and resurrection; as we read, in Colossians, "And ye are complete in him, which is the head of all principality and power. In whom also ye are circumcised with the circumcision made without hands, in putting off the body of the sins of the flesh, by the circumcision of Christ; buried with him in baptism, wherein also ye are risen with him, through the faith of the operation of God who has raised him from the dead. And you, being dead in your sins and the uncircumcision of your flesh, has he quickened together with him, having forgiven you all trespasses." This is a most glorious passage, unfolding to us the true idea of what circumcision was meant to typify. Every believer belongs to "the circumcision" in virtue of his living association with Him who, by His cross, has for ever abolished everything that stood in the way of His Church's perfect justification. There was not a speck of sin on the conscience, nor a principle of sin in the nature of His people, for which Christ was not judged on the cross; and they are now looked upon as having died with Christ, lain in the grave with Christ, been raised with Christ, perfectly accepted in Him — their sins, their iniquities, their transgressions, their enmity, their uncircumcision, having been entirely put away by the cross. The sentence of death has been written on the flesh; but the believer is in possession of a new life, in union with His risen Head in glory.

The apostle, in the above passage, teaches that the Church was quickened out of the grave of Christ; and moreover, that the forgiveness of all her trespasses is as complete, and as entirely the work of God, as was the raising of Christ from the dead; and this latter, we know, was the result of "God's mighty power," or, as it may be rendered, "according to the energy of the might of his power" (Eph. 1:19) — a truly wonderful expression, calculated to set forth the magnitude and glory of redemption, as well as the solid basis on which it rests.

What rest — perfect rest — for the heart and conscience is here! What full relief for the burdened spirit! All our sins buried in the grave of Christ — not one — even the smallest — left out! God did this for us! All that His searching eye could detect in us, He laid on the head of Christ when He hung upon the cross! He judged Him there and then, instead of judging us, in hell for ever! Precious fruit, this, of the admirable, the profound, the eternal counsels of redeeming love! And we are "sealed," not with a certain mark cut in our flesh, but with the Holy Ghost. The entire household of faith is sealed thus. Such is the dignity, the value, the changeless efficacy of the blood of Christ, that the Holy Ghost can take up His abode in all those who have put their trust therein.

And, now, what remains for those who know these things, save to "be steadfast, unmovable, always abounding in the work of the Lord." Thus may it be, O Lord, through the grace of Thy Holy Spirit!

 

Genesis 18

This chapter affords a beautiful exemplification of the results of an obedient, separated walk.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 man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to him, and sup with him, and he with me." (Rev. 3:20) again, we read,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If a man love me he will keep my words, and my Father will love him, and we will come to him, and make our abode with him." (John 14:23) From these passages, taken in connection with our chapter, we learn that an obedient soul enjoys a character of communion entirely unknown to one who moves in a worldly atmosphere.

This does not touch, in the most remote manner, the question of forgiveness or justification. All believers are clothed in the same spotless robe of righteousness — all stand in one common justification, under the eye of God. The one life flows down from the Head in heaven through all the members on earth. This is plain. The doctrine, in reference to the above important points, is fully established in the word; and has been, again and again, unfolded through the foregoing pages of this volume. But we should remember that justification is one thing, and the fruit thereof quite another. To be a child is one thing, to be an obedient child is quite another. Now, a father loves an obedient child, and will make such a child more the depository of his thoughts and plans. And is this not true, in reference to our heavenly Father? Unquestionably. John 14:23 puts this quite beyond dispute; and, moreover, it proves that for one to speak of loving Christ, and not to "keep his words," is hypocrisy. "If a man love me, he will keep my words." Hence, if we are not keeping Christ's words, it is a sure proof we are not walking in the love of His name. Love to Christ is proved by doing the things which He commands, and not by merely saying, "Lord, Lord." It is of very little avail to say, "I go, sir," while the heart has no idea of going.

However, in Abraham we see one who, however he may have failed in detail, was, nevertheless, characterised, in the main, by a close, simple, and elevated walk with God; and in the interesting section of his history now before us, we find him in the enjoyment of three special privileges, namely, providing refreshment for the Lord! enjoying full communion with the Lord, and interceding for others before the Lord. These are high distinctions; and yet are they only such as ever result from an obedient, separated, holy walk. Obedience refreshes the Lord, as being the fruit of His own grace in our hearts. We see in the only perfect man that ever lived, how He constantly refreshed and delighted the Father. Again and again, God bore testimony to Him from heaven, as His "beloved Son; in whom he was well pleased." The path of Christ furnished a continual feast to Heaven. His ways were ever sending up a fragrant incense to the throne of God. From the manger to the cross, He did always the things which pleased His Father. There was no interruption, no variation, no salient point. He was the only perfect One. There only can the Spirit trace a perfect life below. Here and there, as we look along the current of inspiration, we find one and another who occasionally refreshed the mind of Heaven. Thus, in the chapter before us, we find the tent of the stranger at Mamre affording refreshment to the Lord Himself — refreshment lovingly offered, and willingly accepted. (Ver. 1-8)

Then we find Abraham enjoying high communion with the Lord, first, in reference to his own personal interests, (ver. 9-15) and, secondly, in reference to the destinies of Sodom. (Ver. 16, 21) What confirmation to Abraham's heart in the absolute promise (Sarah shall have a son!" Yet this promise only elicited a laugh from Sarah, as it had elicited one from Abraham in the preceding chapter.

There are two kinds of laughter spoken of in scripture. There is first, the laughter with which the Lord fills our mouth, when, at some trying crisis, He appears in a signal manner for our relief. "When the Lord turned again the captivity of Zion, we were like them that dream. Then was our mouth filled with laughter, and our tongue with singing: then said they among the heathen,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whereof we are glad." (Ps. 126:1-2)

Again, there is the laughter with which unbelief fills our mouths, when God's promises are too magnificent for our narrow hearts to take in, or the visible agency too small, in our judgement, for the accomplishment of His grand designs. The first of these we are never ashamed or afraid to avow. Zion's sons are not ashamed to say, "then was our mouth filled with laughter." (Ps. 126:2) When Jehovah makes us to laugh, we may laugh heartily. "But Sarah denied, saying, I laughed not; for she was afraid." Unbelief makes us cowards and liars; faith makes us bold and truthful. It enables us to "come boldly," and to "draw near with true hearts."

But, further, Abraham is made the depository of God's thoughts and counsels about Sodom. Though having nothing to do with it personally, yet he was so near the Lord that he was let into His mind in reference to it. The way to know the divine purposes about this present evil world, is not to be mixed up with it, in its schemes and speculations, but to be entirely separated from it. The more closely we walk with God, and the more subject we are to His word, the more we shall know of His mind about everything. I do not need to study the newspaper, in order to know what is going to happen in the world. God's word reveals all I want to know. In its pure and sanctifying pages I learn all about the character, the course, and the destiny of the world; whereas, if I go to the men of the world for news, I may expect that the devil will use them to cast dust in my eyes.

Had Abraham visited Sodom in order to obtain information about its facts, had he applied to some of its leading intelligent men, to know what they thought of Sodom's present condition and future prospects, how would he have been answered? Doubtless, they would have called his attention to their agricultural and architectural schemes, the vast resources of the country; they would have placed before his eyes one vast, mingled scene of buying and selling, building and planting, eating and drinking, marrying and giving in marriage. Doubtless, too, they would never dream of judgement, and if any one had made mention thereof, their mouths would have been filled with infidel laughter. Hence, then, it is plain, that Sodom was not the place in which to learn about Sodom's end. No; "the place, where Abraham stood before the Lord," afforded the only proper point from whence to take in the whole prospect. There he could stand entirely above the fogs and mists which had gathered upon Sodom's horizon. There, in the clearness and calmness of the divine presence, he could understand it all. And what use did he make of his knowledge and his elevated position? How was he occupied in the Lord's presence? The answer to these inquiries leads us to the third special privilege enjoyed by our patriarch in this chapter, namely, —

Intercession for others before the Lord. He was enabled to plead for those, who were mixed up in Sodom's defilement, and in danger of being involved in Sodom's judgement. This was a happy and a holy use to make of his place of nearness to God. Thus it is ever. The soul that can "draw near to God," in the assurance of faith, having the heart and conscience perfectly at rest, being able to repose in God as to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 that soul will be able and willing to intercede for others. The man, who has on "the whole armour of God," will be able to pray for all saints." And, oh! what a view this gives us of the intercession of our Great High Priest, who has passed into the heavens! What infinite repose He enjoys in all the divine counsels! With what conscious acceptance He sits enthroned amid the brightness of the Majesty in the heavens! And with what efficacy He pleads, before that Majesty, for those, who are toiling along, amid the defilement of this present scene! Happy, ineffably happy, they, who are the subjects of such all prevailing intercession! At once happy and secure. Would that we had hearts to enter into all this — hearts enlarged by personal communion with God, to take in more of the infinite fullness of His grace, and the suitability of His provision, for all our need.

We see, in this scripture, that, how blessed soever Abraham's intercession might be, yet it was limited, because the intercessor was but a man. It did not reach the need. He said, "I will speak yet but this once," and there he stopped short, as if afraid of having presented too large a draft at the treasury of infinite grace, or forgetting that faith's cheque was never yet dishonoured at God's bank. It was not that he was straitened in God. By no means. There was abundance of grace and patience in Him to have hearkened to His dear servant, had he proceeded even to three or one. But the servant was limited. He was afraid of overdrawing his account. He ceased to ask, and God ceased to give. Not so our blessed Intercessor. Of Him it can be said, "He is able to save to the uttermost, … seeing he ever lives to make intercession." May our hearts cling to Him, in all our need, our weakness, and our conflict.

Before closing this section, I would offer a remark, which, whether it may be regarded as properly flowing out of the truth contained therein, or not, is nevertheless worthy of consideration. It is of the utmost importance, in the study of scripture, to distinguish between God's moral government of the world, and the specific hope of the Church. The entire body of Old Testament prophecy, and much of the New, treats of the former, and, in so doing, presents, I need hardly say, a subject of commanding interest to every Christian. It is interesting to know what God is doing, and will do, with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Interesting to read God's thoughts about Tyre, Babylon, Nineveh, and Jerusalem; about Egypt, Assyria, and the land of Israel. In short, the entire range of Old Testament prophecy demands the prayerful attention of every true believer. But, let it be remembered, we do not find therein contained the proper hope of the Church. How could we? If we have not therein the Church's existence directly revealed, how could we have the Church's hope? Impossible. It is not that the Church cannot find there a rich harvest of divine moral principles, which she may most happily and profitably use. She undoubtedly can; but this is quite another thing from finding there her proper existence and specific hope. And yet, a large portion of the Old Testament prophecies has been applied to the Church; and this application has involved the whole subject in such mist and confusion, that simple minds are scared away from the study, and, in neglecting the study of prophecy, they have also neglected that which is quite distinct from prophecy, properly so called, even the hope of the Church, which hope, be it well remembered, is not anything which God is going to do with the nations of the earth, but to meet the Lord Jesus in the clouds of heaven, to be for ever with Him, and for ever like Him.

Many may say, I have no head for prophecy. Perhaps not, but have you a heart for Christ? Surely if you love Christ, you will love His appearing, though you may have no capacity for prophetic investigation. An affectionate wife may not have a head to enter into her husband's affairs; but she has a heart for her husband's return. She might not be able to understand his ledger and day-book; but she knows his footstep, and recognises his voice. The most unlettered saint, if only he has affection for the Person of the Lord Jesus, can entertain the most intense desire to see Him; and this is the Church's hope. The apostle could say to the Thessalonians, "ye turned to God from idols, to serve the living and true God, and to wait for his Son from heaven." (1 Thess. 1:9-10) Now, evidently, those Thessalonian saints could, at the moment of their conversion, have known little, if anything, of prophecy, or the special subject thereof; and yet they were, at that very moment, put into the full possession and power of the specific hope of the Church — even the coming of the Son. Thus is it throughout the entire New Testament. There, no doubt, we have prophecy — there, too, we have God's moral government; but, at the same time, numberless passages might be adduced in proof of the fact, that the common hope of Christians in apostolic times — the simple, unimpeded, and unencumbered hope was, THE RETURN OF THE BRIDEGROOM. May the Holy Ghost revive "that blessed hope" in the Church — may He gather in the number of the elect, and "make ready a people prepared for the Lord."

 

Genesis 19

There are two methods which the Lord graciously adopts, in order to draw the heart away from this present world. The first is, by setting before it the attractiveness and stability of "things above." The second is, by faithfully declaring the evanescent and shakeable nature of "things on the earth." The close of Hebrews 12 furnishes a beautiful example of each of these methods. After stating the truth, that we are come to mount Zion, with all its attendant joys and privileges, the apostle goes on to say, "see that ye refuse not him that speaks: for if they escaped not, who refused him that spake on earth, much more shall not we escape, if we turn away from him that speaks from heaven; whose voice then shook the earth, but now he has promised, saying, Yet once I shake, not only the earth, but also heaven. Now this word Once signifies the removal of the shakeable things, as of things that are made, that the unshakeable things may remain." Now it is much better to be drawn by the joys of heaven, than driven by the sorrows of earth. The believer should not wait to be shaken out of present things. He should not wait for the world to give him up, before he gives up the world. He should give it up in the power of communion with heavenly things. There is no difficulty in giving up the world when we have, by faith, laid hold of Christ; the difficulty would then be to hold it. If a scavenger were left an estate of ten thousand a year, he would not long continue to sweep the streets. Thus, if we are realising our portion amid the unshakeable realities of heaven, we shall find little difficulty in resigning the delusive joys of earth. Let us now look at the solemn section of inspired history here set before us.

In it we find Lot "sitting in the gate of Sodom," the place of authority. He has evidently made progress. He has "got on in the world." Looked at from a worldly point of view, his course has been a successful one. He, at first, "pitched his tent toward Sodom." Then, no doubt, he found his way into it; and now we find him sitting in the gate — a prominent, influential post. How different is all this from the scene with which the preceding chapter opens! But, ah! my reader, the reason is obvious. "By faith Abram sojourned in the land of promise, as in a strange country, dwelling in tabernacles." We have no such statement, in reference to Lot.* It could not be said, "By faith Lot sat in the gate of Sodom." Alas! no; he gets no place among the noble army of confessors — the great cloud of witnesses to the power of faith. The world was his snare, present things his bane. He did not "endure as seeing him who is invisible." He looked at "the things which are seen, and temporal:" whereas Abram looked at "the things which are unseen and eternal." There was a most material difference between those two men, who, though they started together on their course, reached a very different goal, so far as their public testimony was concerned. No doubt Lot was saved, yet it was "So as by fire," for, truly, "his work was burned up." On the other hand, Abraham had "an abundant entrance ministered to him into the everlasting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It would furnish a very searching question for the heart, in reference to every undertaking, were we to ask, "Am I doing this by faith?" "Whatever is not of faith is sin;"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Further, we do not find that Lot is permitted to enjoy any of the high distinctions and privileges with which Abraham was favoured. Instead of refreshing the Lord, Lot gets his righteous soul vexed; instead of enjoying communion with the Lord, he is at a lamentable distance from the Lord; and, lastly, instead of interceding for others, he finds enough to do to intercede for himself. The Lord remained to commune with Abraham, and merely sent His angels to Sodom; and these angels could, with difficulty, be induced to enter into Lot's house, or partake of his hospitality: "they said, Nay, but we will abide in the street all night." What a rebuke! How different from the willing acceptance of Abraham's invitation, as expressed in the words, "So do as thou hast said."

There is a great deal involved in the act of partaking of any one's hospitality. It expresses, when intelligently looked at, full fellowship with him. "I will come in to him, and sup with him, and he with me." "If ye have judged me to be faithful to the Lord, come into my house and abide." If they had not so judged her, they would not have accepted her invitation.

Hence, the angels' word to Lot contains a most unqualified condemnation of his position in Sodom. They would rather abide in the street all night, than enter under the roof of one in a wrong position. Indeed, their only object in coming to Sodom seems to have been to deliver Lot, and that, too, because of Abraham; as we read: "And it came to pass,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that God remembered Abraham, and sent Lot out of the midst of the overthrow, when he overthrew the cities in which Lot dwelt." This is strongly marked. It was simply for Abraham's sake that Lot was suffered to escape: the Lord has no sympathy with a worldly mind; and such a mind it was that had led Lot to settle down amid the defilement of that guilty city. Faith never put him there; a spiritual mind never put him there; "his righteous soul" never put him there. It was simple love for this present evil world that led him, first, to "choose," then to "pitch his tent toward," and, finally, to "sit in the gate of Sodom." And, oh! what a portion he chose. Truly it was a broken cistern which could hold no water; a broken reed which pierced his hand. It is a bitter thing to seek, in any wise, to manage for ourselves; we are sure to make the most grievous mistakes. It is infinitely better to allow God to order all our ways for us, to commit them all, in the spirit of a little child, to Him, who is so willing and so able to manage for us; to put the pen, as it were, into His blessed hand, and allow Him to sketch out our entire course, according to His own unerring wisdom and infinite love.

No doubt, Lot thought he was doing well for himself and his family, when he moved to Sodom; but the sequel shows how entirely he erred; and it also sounds in our ears a voice of deepest solemnity — a voice telling us to beware how we yield to the incipient workings of a worldly spirit. "Be content with such things as ye have." Why? Is it because you are so well off in the world? Because you have all that your poor rambling hearts would seek after? Because there is not so much as a single chink in your circumstances, through which vain desire might make its escape? Is this to be the ground of our contentment? By no means. What then? "For he has said, I will never leave thee nor forsake thee." Blessed portion! Had Lot been content therewith, he never would have sought the well watered plains of Sodom.

And, then, if we need any further ground of inducement to the exercise of a contented spirit, truly we have it in this chapter. What did Lot gain in the way of happiness and contentment? Little indeed. The people of Sodom surround his house, and threaten to break into it; he seeks to appease them by a most humiliating proposition, but all in vain. If a man will mingle with the world, for the purpose of self-aggrandisement, he must make up his mind to endure the sad consequences. We cannot profit by the world, and, at the same time, bear effectual testimony against its wickedness. "This one fellow came in to sojourn, and he will needs be a judge." This will never do. The true way to judge is to stand apart, in the moral power of grace, not in the supercilious spirit of Pharisaism. To attempt to reprove the world's ways, while we profit by association with it, is vanity; the world will attach very little weight to such reproof and such testimony. Thus it was, too, with Lot's testimony to his sons-in law; "he seemed as one that mocked." It is vain to speak of approaching judgement, while finding our place, our portion, and our enjoyment, in the very scene which is to be judged.

Abraham was in a far better position to speak of judgement, inasmuch as he was entirely outside of the sphere thereof. The tent of the stranger at Mamre was in no danger, though Sodom were in flames. Oh! that our hearts longed more after the precious fruits of a realised strangership, so that instead of having, like poor Lot, to be dragged, by main force, out of the world, and casting a lingering look behind, we might, with holy alacrity, bound forward, like a racer, towards the goal.

Lot, evidently, longed after the scene which he was forced, by angelic power, to abandon; for not only had the angels to lay hold of him, and hasten him away from the impending judgement, but even when exhorted to escape for his life, (which was all he could save from the wreck,) and flee to the mountain, he replies, "Oh! not so, my Lord: behold, now, thy servant has found grace in thy sight, and thou hast magnified thy mercy which thou hast showed to me in saving my life; and I cannot escape to the mountain, lest some evil take me and I die: behold, now, this city is near to flee to, and it is a little one: oh! let me escape thither, (is it not a little one) and my soul shall live." What a picture! He seems like a drowning man, ready to catch even at a floating feather. Though commanded by the angel to flee to the mountain, he refuses, and still fondly clings to the idea of "a little city," — some little shred of the world. He feared death in the place to which God was mercifully directing him — yea, he feared all manner of evil, and could only hope for safety in some little city, some spot of his own devising. Oh! let me escape thither, and my soul shall live." How sad. There is no casting himself wholly upon God. Alas! he had too long walked at a distance from Him; too long breathed the dense atmosphere of a "city," to be able to appreciate the pure air of the divine presence, or lean on the arm of the Almighty. His soul seemed completely unhinged; his worldly nest had been abruptly broken up, and he was not quite able to nestle himself, by faith, in the bosom of God. He had not been cultivating communion with the invisible world; and, now, the visible was passing away from beneath his feet with tremendous rapidity. The "fire and brimstone from heaven" were about to fall upon that in which all his hopes and all his affections were centred. The thief had broken in upon him, and he seems entirely divested of spiritual nerve and self-possession. He is at his wits' end; but the worldly element, being strong in his heart, prevails, and he seeks his only refuge in "a little city." Yet he is not at ease even there, for he leaves it, and gets up to the mountain. He does, through fear, what he would not do at the command of God's messenger.

And, then, see his end! His own children make him drunk, and in his drunkenness he becomes the instrument of bringing into existence the Ammonites and the Moabites — the determined enemies of the people of God. What a volume of solemn instruction is here! Oh! my reader, see here what the world is! see what a fatal thing it is to allow the heart to go out after it! What a commentary is Lot's history upon that brief but comprehensive admonition, "love not the world!" This world's Sodoms and its Zoars are all alike. There is no security, no peace, no rest, no solid satisfaction for the heart therein. The judgement of God hangs over the whole scene; and He only holds back the sword, in long-suffering mercy, not willing that any should perish, but that all should come to repentance.

Let us, then, seek to pursue a path of holy separation from the world. Let us, while standing outside its entire range, be found cherishing the hope of the Master's return. May its well-watered plains have no charms for our hearts. May its honours, its distinctions, and its riches, be all surveyed by us in the light of the coming glory of Christ. May we be enabled, like the holy patriarch Abraham, to get up into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from that elevated ground, look forth upon the scene of wide-spread ruin and desolation — to see it all, by faith's anticipative glance, a smoking ruin. Such it will be. "The earth, also, and the things that are therein, shall be burned up." All that about which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so intensely anxious — after which they are so eagerly grasping — for which they are so fiercely contending — all — all will be burned up. And who can tell how soon? Where is Sodom? Where is Gomorrha? Where are the cities of the plain — those cities which were once all life, and stir, and bustle! Where are they now? All gone! swept away by the judgement of God. Consumed by His fire and brimstone. Well, His judgements now hang over this guilty world. The day is at hand; and, while judgements impend, the sweet story of grace is being told out to many an ear. Happy they, who hear and believe that story. Happy they, who flee to the strong mountain of God's salvation! who take refuge behind the cross of the Son of God, and therein find pardon and peace!

God grant that the reader of these lines may know what it is, with a conscience purged from sin, and his heart's affections purged from the defiling influence of the world, to wait for the Son from heaven.

Genesis 20

We have two distinct points in this chapter: first, the moral degradation to which the child of God sometimes subjects himself, in the view of the world; and, secondly, the moral dignity which always belongs to him in the view of God. Abraham again exhibits the dread of circumstances, which the heart can so easily understand. He sojourns in Gerar, and fears the men of that place. Judging that God was not there, he forgets that He is always with him. He seems to be more occupied with the men of Gerar than with the One who was stronger than they. Forgetting God's ability to protect his wife, he has recourse to the same stratagem which, years before, he had adopted in Egypt. This is very admonitory. The father of the faithful was carried away, by taking his eye off God. He lost, for a little, his centre in God, and, therefore, gave way. How true it is, that we are only strong as we cling to God in the sense of our perfect weakness. So long as we are in the path of His appointment, nothing can harm us. Had Abraham simply leaned on God, the men of Gerar would not have meddled with him; and it was his privilege to have vindicated God's faithfulness in the midst of the most appalling difficulties. Thus, too, he would have maintained his own dignity, as a man of faith.

It is often a source of sorrow to the heart to mark how the children of God dishonour Him, and, as a consequence, lower themselves before the world, by losing the sense of His sufficiency for every emergency. So long as we live in the realisation of the truth, that all our springs are in God, so long shall we be above the world, in every shape and form. There is nothing so elevating to the whole moral being as faith: it carries one entirely beyond the reach of this world's thoughts; for how can the men of the world, or even worldly minded Christians, understand the life of faith? Impossible: the springs on which it draws lie far away beyond their comprehension. They live on the surface of present things. So long as they can see what they deem a proper foundation for hope and confidence, so long they are hopeful and confident; but the idea of resting solely on the promise of an unseen God, they understand not. But the man of faith is calm in the midst of scenes in which nature can see nothing. Hence it is, that faith ever seems, in the judgement of nature, such a reckless, improvident, visionary thing. None but those, who know God, can ever approve the actings of faith, for none but they really understand the solid and truly reasonable ground of such actings.

In this chapter we find the man of God actually exposing himself to the rebuke and reproach of the men of the world, by reason of his actings, when under the power of unbelief. Thus it must ever be. Nothing but faith can impart true elevation to a man's course and character. We may, it is true, see some, who are naturally upright and honourable in their ways, yet nature's uprightness and honour cannot be trusted: they rest on a bad foundation, and are liable to give way at any moment. It is only faith which can impart a truly elevated moral tone, because it connects the soul in living power with God, the only source of true morality. And it is a remarkable fact, that, in the case of all those whom God has graciously taken up, we see that, when off the path of faith, they sank even lower than other men. This will account for Abraham's conduct in this part of his history.

But there is another point of much interest and value brought out here. We find that Abraham had harboured an evil thing for a number of years: he had, it seems, started upon his course with a certain reserve in his soul, which reserve was the result of his want of full, unqualified confidence in God. Had he been able fully to trust God in reference to Sarah, there would have been no need of any reserve or subterfuge whatever. God would have fenced her round about from every ill; and who can harm those, who are the happy subjects of His unslumbering guardianship? However, through mercy, Abraham is enabled to bring out the root of the whole matter — to confess and judge it thoroughly, and get rid of it. This is the true way to act. There can be no real blessing and power till every particle of leaven is brought forth into the light and there trampled under foot. God's patience is exhaustless. He can wait. He can bear with us; but He never will conduct a soul to the culminating point of blessing and power, while leaven remains known and unjudged. Thus much as to Abimelech and Abraham. Let us now look at the moral dignity of the latter, in the view of God.

In the history of God's people, whether we look at them as a whole, or as individuals, we are often struck with the amazing difference between what they are in God's view, and what they are in the view of the world. God sees His people in Christ. He looks at them through Christ; and hence He sees them "without spot, or wrinkle, or any such thing." They are as Christ is before God. They are perfected for ever, as to their standing in Christ. "They are not in the flesh but in the spirit."

But, in themselves, they are poor, feeble, imperfect, stumbling, inconsistent creatures; and, inasmuch as it is what they are in themselves, and that alone, that the world takes knowledge of, therefore it is that the difference seems so great between the divine and the human estimate.

Yet it is God's prerogative to set forth the beauty, the dignity, and the perfection of His people. It is His exclusive prerogative, inasmuch as it is He Himself who has bestowed those things. They are only comely through the comeliness which He has put upon them; and it is, therefore, due to Him to declare what that comeliness is; and truly He does it in a manner worthy of Himself, and never more blessedly than when the enemy comes forth to injure, to curse, or accuse. Thus, when Balak seeks to curse the seed of Abraham, Jehovah's word is, "I have not beheld iniquity in Jacob, neither have I seen perverseness in Israel." "How goodly are thy tents, O Jacob, and thy tabernacles, O Israel." Again, when Satan stands forth to resist Joshua, the word is, "The Lord rebuke thee, O Satan, … is not this a brand plucked out of the fire?" Thus He ever puts Himself between His people and every tongue that would accuse them. He does not answer the accusation by a reference to what His people are in themselves, or to what they are in the view of the men of this world, but to what He Himself has made them, and where He has set them.

Thus, in Abraham's case, he might lower himself in the view of Abimelech, king of Gerar; and Abimelech might have to rebuke him, yet, when God comes to deal with the case, He says to Abimelech, "Behold, thou art but a dead man;" and of Abraham he says, "He is a prophet, and he shall pray for thee." Yes, with all "the integrity of his heart, and the innocency of his hands," the king of Gerar was "but a dead man;" and, moreover, he must be a debtor to the prayers of the erring and inconsistent stranger for the restoration of the health of his household. Such is the manner of God: He may have many a secret controversy with His child, on the ground of his practical ways; but directly the enemy enters a suit against him, Jehovah ever pleads His servant's cause. "Touch not mine anointed, and do my prophets no harm." "He that touches you, touches the apple of mine eye." "It is God that justifies, who is he that condemns? No dart of the enemy can penetrate the shield, behind which the Lord has hidden the very feeblest lamb of His blood-bought flock. He hides His people in His pavilion, sets their feet upon the rock of ages, lifts their heads above their enemies round about, and fills their hearts with the everlasting joy of His salivation.

His name be praised for evermore!

Genesis 21

"And the Lord visited Sarah, as he had said, and the Lord did to Sarah as he had spoken." Here we have accomplished promise — the blessed fruit of patient waiting upon God. None ever waited in vain. The soul, that takes hold of God's promise by faith, has gotten a stable reality which will never fail him. Thus was it with Abraham; thus was it with all the faithful from age to age; and thus will it be with all those, who are enabled, in any measure, to trust in the living God. Oh! it is a wonderful blessing to have God Himself as our portion and resting-place, amid the unsatisfying shadows of this scene through which we are passing; to have our anchor cast within the veil; to have the word and oath of God, the two immutable things, to lean upon, for the comfort and tranquility of our souls.

When God's promise stood before the soul of Abraham, as an accomplished fact, he might well have learnt the futility of his own effort to reach that accomplishment. Ishmael was of no use, whatever, so far as God's promise was concerned. He might, and did, afford something for nature's affections to entwine themselves around, thus furnishing a more difficult task for Abraham to perform afterwards; but he was in no wise conducive to the development of the purpose of God, or to the establishment of Abraham's faith — quite the reverse. Nature can never do ought for God. The Lord must visit and the Lord must "do," and faith must wait, and nature must be still; yea, must be entirely set aside as a dead, worthless thing, and then the divine glory can shine out, and faith find in that outshining all its rich and sweet reward. "Sarah conceived and bare Abraham a son in his old age, at the set time of which God had spoken to him." There is such a thing as God's "set time," His "due season," and for this the faithful must be content to wait. The time may seem long, and hope deferred may make the heart sick; but the spiritual mind will ever find its relief in the assurance, that all is for the ultimate display of God's glory. "For the vision is for an appointed time, but at the end it shall speak, and not lie; though it tarry, wait for it; because it will surely come, it will not tarry. …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Hab. 2:3-4) This wondrous faith! It brings into our present all the power of God's future, and feeds upon God's promise as a present reality. By its power the soul is kept hanging upon God, when every outward thing seems to be against it; and, "at the set time," the mouth is filled with laughter. "Abraham was an hundred years old when his son Isaac was born to him." Thus nature had nothing to glory in. "Man's extremity was God's opportunity;" and Sarah said, "God has made me to laugh." All is triumph when God is allowed to show Himself.

Now while the birth of Isaac filled Sarah's mouth with laughter, it introduced an entirely new element into Abraham's house. The son of the free-woman very speedily developed the true character of the son of the bond-woman. Indeed, Isaac proved, in principle, to be to the household of Abraham, what the implantation of the new nature is in the soul of a sinner. It was not Ishmael changed, but it was Isaac born. The son of the bond-woman could never be anything else but that. He might become a great nation, he might dwell in the wilderness, and become an archer, he might become the father of twelve princes, but he was the son of the bond-woman all the while. On the contrary, no matter how weak and despised Isaac might be, he was the son of the free-woman. His position and character, his standing and prospects, were all from the Lord.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and that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

Regeneration is not a change of the old nature, but the introduction of a new; it is the implantation of the nature or life of the Second Adam, by the operation of the Holy Ghost, founded upon the accomplished redemption of Christ, and in full keeping with the sovereign will or counsel of God. The moment a sinner believes in his heart, and confesses with his mouth, the Lord Jesus, he becomes the possessor of a new life, and that life is Christ. He is born of God, is a child of God, is a son of the free-woman. (See Rom. 10:9; Col. 3:4; 1 John 3:1-2; Gal. 3:26; Gal. 4:31)

Nor does the introduction of this new nature alter, in the slightest degree, the true, essential character of the old. This latter continues what it was, and is made, in no respect, better; yea, rather, there is the full display of its evil character in opposition to the new element. "The flesh lusts against the Spirit, and the Spirit against the flesh; and these are contrary the one to the other." There they are in all their distinctness, and the one is only thrown into relief by the other.

I believe this doctrine of the two natures in the believer is not generally understood; and yet, so long as there is ignorance of it, the mind must be utterly at sea, in reference to the true standing and privileges of the child of God. Some there are, who think that regeneration is a certain change which the old nature undergoes; and, moreover, that this change is gradual in its operation, until, at length, the whole man becomes transformed. That this idea is unsound, can be proved by various quotations from the New Testament. For example, "the carnal mind is enmity against God." How can that, which is thus spoken of, ever undergo any improvement? The apostle goes on to say, "it is not subject to the law of God, neither indeed can be." If it cannot be subject to the law of God, how can it be improved? How can it undergo any change? Again, "that which is born of the flesh is flesh." Do what you will with flesh, and it is flesh all the while. As Solomon says, "Though thou shouldest bray a fool in a mortar, among wheat with a pestle, yet will not his foolishness depart from him." (Prov. 27:22) There is no use in seeking to make foolishness wise: you must introduce heavenly wisdom into the heart that has been heretofore only governed by folly. Again, "ye have put off the old man." (Col. 3:9) He does not say, Ye have improved, or are seeking to improve, "the old man;" but, Ye have put it off. This gives us a totally different idea. There is a very great difference between seeking to mend an old garment, and casting it aside altogether, and putting on a new one. This is the idea of the last-quoted passage. It is a putting off the old, and a putting on of the new. Nothing can be more distinct or simple.

Passages might easily be multiplied to prove the unsoundness of the theory, with respect to the gradual improvement of the old nature — to prove that the old nature is dead in sins, and utterly unrenewable and unimproveable; and, moreover, that the only thing we can do with it is, to keep it under our feet in the power of that new life, which we have in union with our risen Head in the heavens.

The birth of Isaac did not improve Ishmael, but only brought out his real opposition to the child of promise. He might have gone on very quietly and orderly till Isaac made his appearance; but then he showed what he was, by persecuting and mocking at the child of resurrection. What then was the remedy? To make Ishmael better? By no means; but, "cast out this bondwomen and her son; for the son of this bond-woman shall not be heir with my son, even with Isaac." (8-10) Here was the only remedy. "That which is crooked cannot be made straight;" therefore you have only to get rid of the crooked thing altogether, and occupy yourself with that which is divinely straight. It is labour lost to seek to make a crooked thing straight. Hence all efforts after the improvement of nature, are utterly futile, so far as God is concerned. It may be all very well for men to cultivate and improve that which is of use to themselves; but God has given his children something infinitely better to do, even to cultivate that which is His own creation, the fruits of which, while they, in no wise, serve to exalt nature, are entirely to His praise and glory.

Now the error into which the Galatian churches fell, was the introduction of that which addressed itself to nature. "Except ye be circumcised after the manner of Moses, ye cannot be saved." Here salvation was made to depend upon something that man could be, or man could do, or man could keep. This was upsetting the whole glorious fabric of redemption, which, as the believer knows, rests exclusively upon what Christ is, and what He has done. To make salvation dependent, in the most remote manner, upon anything in, or done by, man, is to set it entirely aside. In other words, Ishmael must be entirely cast out, and all Abraham's hopes be made to depend upon what God had done, and given, in the person of Isaac. This, it is needless to say, leaves man nothing to glory in. If present or future blessedness were made to depend upon even a divine change wrought in nature, flesh might glory. Though my nature were improved, it would be something of me, and thus God would not have all the glory. But when I am introduced into a new creation, I find it is all of God, designed, matured, developed by Himself alone. God is the actor, and I am a worshipper; He is the blesser, and I am the blessed; He is "the better," and I am "the less;" (Heb. 7:7) He is the giver, and I am the receiver. This is what makes Christianity what it is; and, moreover, distinguishes it from every system of human religion under the sun, whether it be Romanian, Puseyism, or any other ism whatsoever. Human religion gives the creature a place more or less; it keeps the bond-woman and her son in the house; it gives man something to glory in. On the contrary, Christianity excludes the creature from all interference in the work of salvation; casts out the bond-woman and her son, and gives all the glory to Him, to whom alone it is due.

But let us inquire who this bond-woman and her son really are, and what they shadow forth. Galatians 4 furnishes ample teaching as to these two points. In a word, then, the bond-woman represents the covenant of the law; and her son represents all, who are "of works of law," or on that principle (ex ergon nomou). This is very plain. The bond-woman only genders to bondage, and can never bring forth a free man. How can she? The law never could give liberty, for so long as a man was alive it ruled him. (Rom. 7:1) I can never be free so long as I am under the dominion of any one. But while I live, the law rules me; and nothing but death can give me deliverance from its dominion. This is the blessed doctrine of Rom. 7. "Wherefore, my brethren, ye also are become dead to the law by the body of Christ, that you should be married to another, even to him that is raised from the dead, that we should bring forth fruit to God." This is freedom; for, "If the Son shall make you free, ye shall be free indeed.'' (John 8:36) So, then, brethren, we are not children of the bond-woman, but of the free." (Gal. 4:31)

Now, it is in the power of this freedom that we are enabled to obey the command, "cast out this bondwoman and her son." If I am not consciously free, I shall be seeking to attain liberty in the strangest way possible, even by keeping the bond-woman in the house: in other words, I shall be seeking to get life by keeping the law; I shall be establishing my own righteousness. No doubt, it will involve a struggle to cast out this element of bondage, for legalism is natural to our hearts. "The thing was very grievous in Abraham's sight, because of his son." Still, however grievous it may be, it is according to the divine mind that we should abidingly stand fast in the liberty wherewith Christ has made us free, and not be entangled again with the yoke of bondage." (Gal. 5:1) May we, beloved reader, so fully and experimentally enter into the blessedness of God's provision for us in Christ, that we may be done with all thoughts about the flesh, and all that it can be, do, or produce. There is a fullness in Christ which renders all appeal to nature utterly superfluous and vain.

Genesis 22

Abraham is now in a fit moral position to have his heart put to a most severe test. The long-cherished reserve being put forth from his heart, in Gen. 20 — the bond-woman and her son being put forth from his house, as in Gen. 21, he now stands forth in the most honoured position in which any soul can be placed, and that is a position of trial from the hand of God Himself. There are various kinds of trial — trial from the hand of Satan; trial from surrounding circumstances; but the highest character of trial is that which comes directly from the hand of God, when He puts His dear child into the furnace for the purpose of testing the reality of his faith. God will do this: He must have reality. It will not do to say "Lord, Lord," or, "I go, sir." The heart must be probed to the very bottom, in order that no element of hypocrisy, or false profession, may he allowed to lodge there. "My son, give me thine heart." He does not say, "give me thine head, or thine intellect, or thy talents, or thy tongue, or thy money;" but "give me thine heart:" and in order to prove the sincerity of our response to this gracious command, He will lay His hand upon something very near our hearts. Thus he says to Abraham, "Take now thy son, thine only son Isaac, whom thou lovest, and get thee into 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for a burnt-offering, upon one of the mountains which I will tell thee of." This was coming very close to Abraham's heart. It was passing him through a searching crucible indeed. God "requires truth in the inward parts." There may be much truth on the lips, and much in the intellect, but God looks for it in the heart. It is no ordinary proof that will satisfy God, as to the love of our hearts. He Himself did not rest satisfied with giving an ordinary proof. He gave His Son, and we should aim at giving very striking proofs of our love to Him who so loved us, even when we were dead in trespasses and sins.

However, it is well to see that God confers a signal honour upon us when He thus tests our hearts. We never read that "the Lord did tempt Lot." No; Sodom tempted Lot. He never reached a sufficiently high elevation to warrant his being tried by the hand of Jehovah. It was too plainly manifest that there was plenty between his heart and the Lord, and it did not, therefore, require the furnace to bring that out. Sodom would have held out no temptation whatever to Abraham. This was made manifest in his interview with Sodom's king, in chapter 14. God knew well that Abraham loved him far better than Sodom; but He would make it manifest, that He loved him better than any one or anything, by laying his hand upon the nearest and dearest object. "Take now thy son, thine only son, Isaac." Yes, Isaac, the child of promise; Isaac, the object of long-deferred hope, the object of parental love, and the one in whom all the kindreds of the earth were to be blessed. This Isaac must be offered as a burnt-offering. This, surely, was putting faith to the test, in order that, being more precious than gold that perishes, though it be tried with fire, it might be found to praise, and honour, and glory. Had Abraham's whole soul not been stayed simply on the Lord, he never could have yielded unhesitating obedience to such a searching command. But God Himself was the living and abiding support of his heart, and therefore he was prepared to give up all for Him.

The soul that has found all its springs in God, can, without any demur, retire from all creature streams. We can give up the creature, just in proportion as we have found out, or become experimentally acquainted with, the Creator, and no further. To attempt to give up the visible things in any other way, save in the energy of that faith which lays hold of the invisible, is the most fruitless labour possible. It cannot be done. I withhold fast my Isaac until I have found my all in God. It is when me are enabled, by faith, to say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that we can also add, "therefore will we not fear, though the earth be removed, and though the mountains be carried into the midst of the sea." (Ps. 46:1-2)

"And Abraham rose up early in the morning." There is ready obedience. "I made haste and delayed not to keep thy commandments." Faith never stops to look at circumstances, or ponder results; it only looks at God; it expresses itself thus; "But when it pleased God, who separated me from my mother's womb, and called me by his grace, to reveal his Son in me, that I might preach him among the Gentiles; immediately I conferred not with flesh and blood." (Gal. 1:1, 5, 16) The moment we confer with flesh and blood, our testimony and service are marred, for flesh and blood can never obey. We must rise early, and carry out, through grace, the divine command. Thus we are blessed, and God is glorified. Having God's own word as the basis of our acting will ever impart strength and stability to our acting. If we merely act from impulse, when the impulse subsides, the acting will subside also.

There are two things needful to a course of steady and consistent action, viz., the Holy Ghost, as the power of action, and the word to give proper direction. To use a familiar illustration: on a railway, we should find steam [deisel/electricity] of little use without the iron rails firmly laid down; the former is the power by which we move; and the latter, the direction. It is needless to add that the rails would be of little use without the steam. Now, Abraham was blessed with both. He had the power of action conferred by God; and the command to act given by God also. His devotedness was of a most definite character; and this is deeply important. We frequently find much that looks like devotedness, but which, in reality, is but the desultory activity of a will not brought under the powerful action of the word of God. All such apparent devotedness is worthless, and the spirit from which it proceeds will very speedily evaporate. We may lay down the following principle, viz., whenever devotedness passes beyond divinely appointed bounds it is suspicious. If it comes not up to these bounds it is defective; if it flows without them it is erratic. I quite admit that there are extraordinary operations and ways of the Spirit of God, in which He asserts His own sovereignty, and rises above ordinary bounds; but, in such cases, the evidence of divine activity will be sufficiently strong to carry home conviction to every spiritual mind; nor will they, in the slightest degree, interfere with the truth of the principle that true devotedness will ever be founded upon and governed by divine principle. To sacrifice a son might seem to be an act of most extraordinary devotedness; but, be it remembered, that, what gave that act all its value, in God's sight, was the simple fact of its being based upon God's command.

Then, we have another thing connected with true devotedness, and that is a spirit of sonship. "I and the lad will go yonder and worship." The really devoted servant will keep his eye, not on his service, be it ever so great, but on the Master, and this will produce a spirit of worship. If I love my master, according to the flesh, I shall not mind whether I am cleaning his shoes or driving his carriage; but if I am thinking more of myself than of him, I shall rather be a coachman than a shoe black. So is it precisely in the service of the heavenly Master: if I am thinking only of Him, planting churches and making tents will be both alike to me. We may see the same thing in angelic ministry. It matters not to an angel whether he be sent to destroy an army, or to protect the person of some heir of salvation. It is the Master who entirely fills his vision. As some one has remarked, "if two angels were sent from heaven, one to rule an empire, and the other to sweep the streets, they would not dispute about their respective work." This is most true, and so should it be with us. The servant should ever be combined with the worshipper, and the works of our hands perfumed with the ardent breathings of our spirits. In other words we should go forth to our work in the spirit of those memorable words, "I and the lad will go yonder and worship." This would effectually preserve us from that merely mechanical service into which we are so prone to drop; doing things for doing's sake, and being more occupied with our work than with our Master. All must flow from simple faith in God, and obedience to His word.

"By faith Abraham, when he was tried, offered up Isaac; and he that had received the promises, offered up his only-begotten." (Heb. 11:17) It is only as we are walking by faith that we can begin, continue, and end our works in God. Abraham not merely set out to offer his son, but he went on, and reached the spot which God had appointed. "And Abraham took the wood of the burnt-offering, and laid it upon Isaac his son; and he took the fire in his hand, and a knife: and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And further on we read, "And Abraham built an altar there; and laid the wood in order; and bound Isaac his son, and laid him on the altar upon the wood. And Abraham stretched forth his hand, and took the knife to slay his son." This was real work, "A work of faith and labour of love," in the highest sense. It was no mere mockery — no drawing near with the lips, while the heart was far off — no saying "I go, sir, and went not." It was all deep reality, just such a faith ever delights to produce, and which God delights to accept. It is easy to make a show of devotedness when there is no demand for it. It is easy to say, "though all shall be offended because of thee, yet will never be offended … though I should die with thee, yet will I not deny thee;" but the point is to stand the trial. When Peter was put to the test, he entirely broke down. Faith never talks of what it will do, but does what it can in the strength of the Lord. Nothing can be more thoroughly worthless than a spirit of empty pretension. It is just as worthless as the basis on which it rests. But faith acts "when it is tried;" and till then it is content to be unseen and silent.

Now, it needs hardly to be remarked that God is glorified in those Holy activities of faith. He is the immediate object of them, as He is the spring from whence they emanate. There was not a scene in Abraham's entire history in which God was so much glorified as the scene on Mount Moriah. There it was that he was enabled to bear testimony to the fact that he had found all his fresh springs in God — found them not merely previous to, but after, Isaac's birth. This is a most touching point. It is one thing to rest in God's blessings, and another thing to rest in Himself. It is one thing to trust God when I have before my eyes the channel through which the blessing is to flow; and quite another thing to trust Him when that channel is entirely stopped up. This was what proved the excellency of Abraham's faith. He showed that he could not merely trust God for an innumerable seed while Isaac stood before him in health and vigour; but just as fully if he were a smoking victim on the altar. This was a high order of confidence in God; it was unalloyed confidence; it was not a confidence propped up, in part, by the Creator, and in part by the creature. No it rested on one solid pedestal, viz., God Himself. "He accounted that God was able." He never accounted that Isaac was able. Isaac, without God, was nothing; God, without Isaac, was everything. This is a principle of the very last importance, and one eminently calculated to test the heart most keenly. Does it make any difference to me to see the apparent channel of all my blessings dried up? Am I dwelling sufficiently near the fountain-head to be able, with a worshipping spirit, to behold all the creature streams dried up? This I do feel to be a searching question. Have I such a simple view of God's sufficiency as to be able, us it were, to "stretch forth my hand and take the knife to slay my son." Abraham was enabled to do this, because his eye rested on the God of resurrection. "He accounted that God was able to raise him up even from the dead."

In a word, it was with God he had to do, and that was quite enough. He was not suffered to strike the blow. He had gone to the very utmost bounds; he had come up to the line beyond which God could not suffer him to go. The Blessed One spared the father's heart the pang which He did not spare His own heart, even that of smiting His Son. He, blessed be His name, passed beyond the utmost bounds, for "he spared not his own Son, but delivered him up for us all." "It pleased the Lord to bruise him; he has put him to grief." There was no voice from heaven when, on Calvary, the Father offered up His only-begotten Son. No; it was a perfectly accomplished sacrifice; and, in its accomplishment, our everlasting peace is sealed.

However, Abraham's devotedness was fully proved, and fully accepted. For now "I know that thou fearest God, seeing thou hast not withheld thy son, thine only son, from me." Mark it is "now I know." It had never been proved before. It was there, no doubt, and, if there, God knew it; but the valuable point here, is, that God founds His knowledge of it upon the palpable evidence afforded at the altar upon Mount Moriah. Faith is always proved by action, and the fear of God by the fruits which flow from it. "Was not Abraham our father justified by works when he had offered Isaac his son on the altar" (James 2:21) Who could think of calling his faith in question? Take away faith, and Abraham appears on Moriah as a murderer, and a madman. Take faith into account, and he appears as a devoted worshipper — a God-fearing, justified man. But faith must be proved. "What doth it profit, my brethren, though a man say he has faith, and have not works" (James 2:14) Will either God or man be satisfied with a powerless and profitless profession? Surely not. God looks for reality and honours it where He sees it; and as for man, he can understand nought save the living and intelligible utterance of a faith that shows itself in acts. We are surrounded by the profession of religion; the phraseology of faith is on every lip; but faith itself is as rare a gem as ever — that faith which will enable a man to push out from the shore of present circumstances, and meet the waves and the winds, and not only meet them, but endure them, even though the Master should seem to be asleep on the pillow.

And here I would remark the beautiful harmony between James and Paul, on the subject of justification. The intelligent and spiritual reader, who bows to the important truth of the plenary inspiration of holy scripture, knows full well that, on this question it is not with Paul or James we have to do, but with the Holy Ghost, who graciously used each of those honoured men as the pen to write His thoughts, just as I might take up a quill pen or a steel pen to write my thoughts, in which case it would be quite preposterous to speak of a discrepancy between the two pens, inasmuch as the writer is one. Hence it is just as impossible that two divinely-inspired penmen could clash, as that two heavenly bodies, while moving in their divinely appointed orbits, could come into collision.

But, in reality, as might be expected, there is the fullest and most perfect harmony between these two apostles; indeed, on the subject of justification, the one is the counterpart or exponent of the other. Paul gives us the inward principle, James the outward development of that principle; the former presents the hidden life, the latter the manifested life; the former looks at man in relation to God, the latter looks at him in his relation to man. Now we want both: the inward would not do without the outward; and the outward would be valueless and powerless without the inward. "Abraham was justified" when "he believed God;" and "Abraham was justified" when "he offered Isaac his son." In the former case we have his secret standing; in the latter, his public acknowledgement by heaven and earth. It is well to understand this distinction. There was no voice from heaven when "Abraham believed God," though in God's view he was there, then, and that "counted righteous;" but "when he had offered his son upon the altar," God could say, "now I know;" and all the world had a powerful and unanswerable proof of the fact that Abraham was a justified man. Thus will it ever be. Where there is the inward principle, there will be the outward acting; but all the value of the latter springs from its connection with the former. Disconnect, for one moment, Abraham's acting, as set forth by James, from Abraham's faith as set forth by Paul, and what justifying virtue did it possess? None whatever. All its value, all its efficacy, all its virtue, springs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outward manifestation of that faith, by virtue of which he had been already counted righteous before God. Thus much as to the admirable harmony between Paul and James, or rather, as to the unity of the voice of the Holy Ghost, whether that voice be uttered by Paul or James.

We now return to our chapter. It is deeply interesting to mark here how Abraham's soul is led into a fresh discovery of God's character by the trial of his faith. When we are enabled to bear the testings of God's own hand, it is sure to lead us into some new experience with respect to His character, which makes us to know how valuable the testing is. If Abraham had not stretched out his hand to slay his son, he never would have known the rich and exquisite depths of that title which he here bestows upon God, viz., "Jehovah Jireh." It is only when we are really put to the test that we discover what God is. Without trial we can be but theorists, and God would not have us such: He would have us entering into the living depths that are in Himself — the divine realities of personal communion with Him. With what different feelings and convictions must Abraham have retraced his steps from Moriah to Beer-sheba! from the mount of the Lord to the well of the oath! What very different thoughts of God! What different thoughts of Isaac! What different thoughts of everything! Truly we may say, "Happy is the man that endures trial." It is an honour put upon one by the Lord Himself, and the deep blessedness of the experience to which it leads cannot be easily estimated. It is when men are brought, to use the language of Psalm 107, "to their wits' end," that they discover what God is. Oh! for grace to endure trial, that God's workmanship may appear, and His name be glorified in us.

There is one point which, before closing my remarks on this chapter, I shall notice, and that is the gracious way in which God gives Abraham credit for having done the act which he had showed himself so fully prepared to do. "By myself have I sworn, says the Lord; for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ing, and hast not withheld thy son, thine only son, that in blessing, I will bless thee, and in multiplying, I will multiply thy seed as the stars of heaven, and as the sand which is upon the sea-shore; and thy seed shall possess the gate of his enemies: and in thy seed shall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be blessed: because thou hast obeyed my voice." This beautifully corresponds with the Spirit's notice of Abraham's acting, as put before us in Heb. 11 and also in James 2, in both of which scriptures he is looked upon as having offered Isaac his son upon the altar. The grand principle conveyed in the whole matter is this: Abraham proved that he was prepared to have the scene entirely cleared of all but God; and, moreover, it was this same principle which both constituted and placed him a justified man. Faith can do without every one and everything but God. It has the full sense of His sufficiency, and can, therefore, let go all beside. Hence Abraham could rightly estimate the words, "by myself have I sworn." Yes, this wondrous word, "myself," was everything to the man of faith. "For when God made promise to Abraham, because he could swear by no greater, he swear by himself … For men verily swear by the greater, and an oath for confirmation is to them an end of all strife. Wherein God, willing more abundantly to show to the heirs of promise the immutability of his counsel, confirmed it by an oath." The word and oath of the living God should put an end to all the strivings and workings of the human will, and form the immovable anchor of the soul amid all the tossing and tumult of this stormy world.

Now, we must condemn ourselves consistently, because of the little power which the promise of God has in our hearts. There it is, and we profess to believe it; but ah! it is not that deep, abiding, influential reality which it ought ever to be; we do not draw from it that "strong consolation" which it is calculated to afford. How little prepared are we, in the power of faith, in the promise of God, to slay our Isaac! We need to cry to God that He would be graciously pleased to endow us with a deeper insight into the blessed reality of a life of faith in Himself, that so we may understand better the import of that word of John, "this is the victory that overcomes the world, even your faith." We can only overcome the world by faith. Unbelief puts us under the power of present things; in other words, it gives the world the victory over us. A soul that has entered, by the teaching of the Holy Ghost, into the sense of God's sufficiency, is entirely independent of things here. Beloved reader, may we know this, for our peace and joy in God, and His glory in us.

 

Genesis 23

This little section of inspiration furnishes much sweet and profitable instruction to the soul. In it the Holy Spirit sets before us a beautiful exhibition of the mode in which the man of faith should carry himself toward those that are without. While it is true, divinely true, that faith makes a man independent of the men of the world, it is no less true that faith will ever teach him to walk honestly toward them. We are told to "walk honestly toward them that are without;" (1 Thess. 4:12) "to provide things honest in the sight of all;" (2 Cor. 8:21) "to owe no man anything." (Rom. 13:8) These are weighty precepts — precepts which, even before their distinct enunciation, were duly observed in all ages by the faithful servants of Christ, but which, in modern times, alas! have not been sufficiently attended to.

The 23rd of Genesis, therefore, is worthy of special notice. It opens with the death of Sarah, and introduces Abraham in a new character, viz., that of a mourner. "Abraham came to mourn for Sarah, and to weep for her." The child of God must meet such things; but he must not meet them as others. The great fact of resurrection comes in to his relief, and imparts a character to his sorrow quite peculiar. (1 Thess. 4:13-14) The man of faith can stand at the grave of a brother or sister, in the happy consciousness that it shall not long hold its captive, "for if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them also which sleep in Jesus will God bring with him." The redemption of the soul secures the redemption of the body; the former we have, the latter we wait for. (Rom. 8:23)

Now, I believe that in purchasing Machpelah for a burying-place, Abraham gave expression to his faith in resurrection. "He stood up from before his dead." Faith cannot long keep death in view; it has a higher object, blessed be the "living God" who has given it. Resurrection is that which ever fills the vision of faith; and, in the power thereof, it can rise up from before the dead. There is much conveyed in this action of Abraham. We want to understand its meaning much more fully, because we are much too prone to be occupied with death and its consequences. Death is the boundary of Satan's power; but where Satan ends, God begins. Abraham understood this when he rose up and purchased the cave of Machpelah as a sleeping place for Sarah. This was the expression of Abraham's thought in reference to the future. He knew that in the ages to come, God's promise about the land of Canaan would be fulfilled, and he was able to lay the body of Sarah in the tomb, "in sure and certain hope of a glorious resurrection."

The sons of Heth knew nothing about this. The thoughts which were filling the patriarch's soul were entirely foreign to the uncircumcised children of Heth. To them it seemed a small matter where he buried his dead, but it was by no means a small matter to him. "I am a stranger and a sojourner with you: give me a possession of a burying-place with you, that I may bury my dead out of my sight." It might, and manifestly did, appear strange to them to make so much ado about a grave; but, "beloved, the world knows us not, even as it knew him not." The finest traits and characteristics of faith are those which are most incomprehensible to the natural man. The Canaanites had no idea of the expectations which were giving character to Abraham's actings on this occasion. They had no idea that he was looking forward to the possession of the land, while he was merely looking for a spot in which, as a dead man, he might wait for God's time, and God's manner, viz., the MORNING OF RESURRECTION. He felt he had no controversy with the children of Heth, and hence he was quite prepared to lay his head in the grave, and allow God to act for him, and with him, and by him.

"These all died in (or according to) faith, (kata pistin,) not having received the promises, but having seen them afar off, and were persuaded of them, and embraced them, and confessed that they were strangers and pilgrims on the earth." (Heb. 11:13) This is a truly exquisite feature in the divine life. Those "witnesses," of whom the apostle is speaking in Heb. 11 not merely lived by faith, but even when they arrived at the close of their career, they proved that the promises of God were as real and satisfying to their souls as when they first started. Now, I believe this purchase of a burying place in the land was an exhibition of the power of faith, not only to live, but to die. Why was Abraham so particular about this purchase? Why was he so anxious to make good his claim to the field and cave of Ephron on righteous principles? Why so determined to weigh out the full price "current with the merchant?" Faith is the answer. He did it all by faith. He knew the land was his in prospect, and that in glory his seed should yet possess it, and until then he would be no debtor to those who were yet to be dispossessed.

Thus we may view this beautiful chapter in a twofold light; first, as setting before us a plain, practical principle, as to our dealings with the men of this world; and secondly, as presenting the blessed hope which should ever animate the man of faith. Putting both these points together, we have an example of what the child of God should ever be. The hope set before us in the gospel is a glorious immortality; and this, while it lifts the heart above every influence of nature and the world, furnishes a high and holy principle with which to govern all our intercourse with those who are without. "We know that when he shall appear, we shall be like him, for we shall see him as he is." This is our hope. What is the moral effect of this? "Every man that has this hope in him purifies himself, even as he is pure." (1 John 3:2-3) If I am to be like Christ by and by, I shall seek to be as like Him now as I can. Hence, the Christian should ever seek to walk in purity, integrity and moral grace in the view of all round.

Thus it was with Abraham, in reference to the sons of Heth. His whole deportment and conduct, as set forth in our chapter, would seem to have been marked with very pure elevation and disinterestedness. He was "a mighty prince among them," and they would fain have done him a favour; but Abraham had learnt to take his favours only from the God of resurrection, and while he would pay them for Machpelah he would look to Him for Canaan. The sons of Heth knew well the value of "current money with the merchant," and Abraham knew the value of the cave of Machpelah. It was worth much more to him than it was to them. "The land was worth" to them "four hundred shekels of silver," but to him it was priceless, as the earnest of an everlasting inheritance, which, because it was an everlasting inheritance, could only be possessed in the power of resurrection. Faith conducts the soul onward into God's future; it looks at things as He looks at them, and estimates them according to the judgement of the sanctuary. Therefore, in the intelligence of faith, Abraham stood up from before his dead, and purchased a burying-place, which significantly set forth his hope of resurrection, and of an inheritance founded thereon.

 

Genesis 24

The connection of this chapter, with the two which precede it, is worthy of notice. In Gen. 22 the son is offered up; in Gen. 23 Sarah is laid aside; and in Gen. 24 the servant is sent forth to procure a bride for him who had been, as it were, received from the dead in a figure. This connection, in a very striking manner, coincides with the order of events connected with the calling out of the Church. whether this coincidence is to be regarded as of divine origin, will, it may be, raise a question in the minds of some; but it must at least be regarded as not a little remarkable.

When we turn to the New Testament, the grand events which meet our view are, first, the rejection and death of Christ; secondly, the setting aside of Israel after the flesh; and, lastly, the calling out of the Church to occupy the high position of the bride of the Lamb.

Now, all this exactly corresponds with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two preceding chapters. The death of Christ needed to be an accomplished fact, ere the Church, properly so called, could be called out. "The middle wall of partition" needed to be broken down, ere the "One new man" could be developed. It is well to understand this in order that we may know the place which the Church occupies in the ways of God. So long as the Jewish economy subsisted there was the most strict separation maintained between Jew and Gentile, and hence the idea of both being united in one new man was far removed from the mind of a Jew. He was led to view himself in a position of entire superiority to that of a gentile, and to view the latter as utterly unclean, to whom it was unlawful to come in. (Acts 10:28)

If Israel had walked with God according to the truth of the relationship into which He had graciously brought them, they would have continued in their peculiar place of separation and superiority; but this they did not do; and, therefore, when they had filled up the measure of their iniquity, by crucifying the Lord of life and glory, and rejecting the testimony of the Holy Ghost, we find St. Paul is raised up to be the minister of a new thing, which was held back in the counsels of God, while the testimony to Israel was going on. "For this cause I, Paul, the prisoner of Jesus Christ for you Gentiles, if ye have heard of the dispensation of the grace of God, which is given me to you-ward: how that by revelation he made known to me the mystery which in other ages was not made known to the sons of men, as it is now revealed to his holy apostles and prophets (i.e., New Testament prophets, tois hagiois apostolois autou kai prophetais) by the Spirit; that the gentiles should be fellow-heirs, and of the same body, and partakers of his promise in Christ by the gospel." (Eph. 3:1-6) This is conclusive. The mystery of the Church, composed of Jew and Gentile, baptis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 united to the glorious Head in the heavens, had never been revealed until Paul's day. Of this mystery the apostle goes on to say, "I was made a minister, according to the gift of the grace of God, given to me, by the effectual working of his power." (Ver. 7) The apostles and prophets of the New Testament formed, as it were, the first layer of this glorious building. (See Eph. 2:20) This being so, it follows, as a consequence, that the building could not have been begun before. If the building had been going on from the days of Abel, downwards, the apostle would then have said, "the foundation of the Old Testament saints." But he has not said so, and therefore we conclude that, whatever be the position assigned to the Old Testament saints, they cannot possibly belong to a body which had no existence, save in the purpose of God, until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and the consequent descent of the Holy Ghost. Saved they were, blessed be God; saved by the blood of Christ, and destined to enjoy heavenly glory with the Church; but they could not have formed a part of that which did not exist for hundreds of years after their time.

It were easy to enter upon a more elaborate demonstration of this most important truth, were this the place for so doing; but I shall now go on with our chapter, having merely touched upon a question of commanding interest, because of its being suggested by the position of Genesis 24.

There may be a question, in some minds, as to whether we are to view this deeply-interesting portion of scripture as a type of the calling out of the Church by the Holy Ghost. For myself, I feel happier in merely handling it as an illustration of that glorious work. We cannot suppose that the Spirit of God would occupy an unusually long chapter with the mere detail of a family compact, were that compact not typical or illustrative of some great truth. "Whatsoever things were written aforetime, were written for our learning." This is emphatic. What, therefore, are we to learn from the chapter before us? I believe it furnishes us with a beautiful illustration or foreshadowing of the great mystery of the Church. It is important to see that, while there is no direct revelation of this mystery in the Old Testament, there are, nevertheless, scenes and circumstances which, in a very remarkable manner, shadow it forth; as, for example, the chapter before us. As has been remarked, the son being, in a figure, offered up, and received again from the dead; the original parent stem, as it were, being laid aside, the messenger is sent forth by the father to procure a bride for the son.

Now, in order to the clear and full understanding of the contents of the entire chapter, we may consider the following points, viz., 1, the oath; 2, the testimony; 3, the result. It is beautiful to observe that the call and exaltation of Rebekah were founded upon the oath between Abraham and his servant. She knew nothing of this, though she was, in the purpose of God, so entirely the subject of it all. So is it exactly with the Church of God as a whole and each constituent part. "In thy book were all my members written, which in continuance were fashioned, when as yet there were none of them." (Ps. 139:16)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with all spiritual blessings in the heavenlies in Christ; according as he has chosen us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at we should be holy and without blame before him in love." (Eph. 1:3-4) "For whom he did foreknow, he also did predestinate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Moreover, whom he did predestinate, them he also called; 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and whom he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Rom. 8:29-30) These scriptures are all in beautiful harmony with the point immediately before us. The call, the justification, and the glory of the Church, are all founded on the eternal purpose of God — His word and oath, ratified by the death, resurrection, and exaltation of the Son. Far back, beyond the bounds of time, in the deep recesses of God's eternal mind, lay this wondrous purpose respecting the Church, which cannot, by any means, be separated from the divine thought respecting the glory of the Son. The oath between Abraham and the servant had for its object the provision of a partner for the son. It was the father's desire with respect to the son that led to Rebekah's after-dignity. It is happy to see this. Happy to see how the Church's security and blessing stand inseparably connected with Christ and His glory. "For the man is not of the woman, but the woman of the man. Neither was the man created for the woman; but the woman for the man." (1 Cor. 11:8-9) So it is in the beautiful parable of the marriage supper;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o a certain king which made a marriage for his son." (Matt. 22:2) The Son is the Grand object of all the thoughts and counsels of God: and if any are brought into blessing, or glory, or dignity, it can only be in connection with Him. All title to these things, and even to life itself, was forfeited by sin; but Christ met all the penalty due to sin; He made Himself responsible for everything on behalf of His body the Church; He was nailed to the cross as her representative; He bore her sins in His own body on the tree, and went down into the grave under the full weight of them. Hence, nothing can be more complete than the Church's deliverance from all that was against her. She is quickened out of the grave of Christ, where all her trespasses were laid. The life which she has is a life taken up at the other side of death, after every possible demand had been met. Hence, this life is connected with, and founded upon, divine righteousness, inasmuch as Christ's title to life is founded upon His having entirely exhausted the power of death; and He is the Church's life. Thus the Church enjoys divine life; she stands in divine righteousness; and the hope that animates her is the hope of righteousness. (See, amongst many other scriptures, John 3:16, 36; John 5:39-40; John 6:27, 40, 47, 68; John 11:25; John 17:2; Rom. 5:21; Rom. 6:23; 1 Tim. 1:16; 1 John 2:25; 5:20; Jude 21; Eph. 2:1-6, 14, 15; Col. 1:12-22 Col. 2:10-15; Rom. 1:17; Rom. 3:21-26; Rom. 4:5, 23-25; 2 Cor. 5:21; Gal. 5:5)

These scriptures most fully establish the three points, viz., the life, the righteousness, and the hope of the Church, all of which flow from her being one with Him who was raised from the dead. Now, nothing can be so calculated to assure the heart as the conviction that the Church's existence is essential to the glory of Christ. "The woman is the glory of the man." (1 Cor. 11:7) And again, the Church is called "the fullness of him that fills all in all." (Eph. 1:23) This last is a remarkable expression. The word translated "fullness" means the complement, that which, being added to something else, makes up a whole. Thus it is that Christ the Head, and the Church the body, make up the "one new man." (Eph. 2:15) Looking at the matter in this point of view, it is no marvel that the Church should have been the object of God's eternal counsels. When we view her as the body, the Bride, the companion, the counterpart, of His only-begotten Son, we feel that there was, through grace, wondrous reason for her being so thought of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Rebekah was necessary to Isaac, and therefore, she was the subject of secret counsel while yet in profound ignorance about her high destiny. All Abraham's thought was about Isaac. "I will make thee swear by the Lord, the God of heaven, and the God of the earth, that thou shalt not take a wife to my son of the daughters of the Canaanites, among whom I dwell." Here we see that the all-important point was, "a wife to my son."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This opens up a very deep and blessed view of the Church. In the counsels of God she is necessary to Christ; and in the accomplished work of Christ, divine provision has been made for her being called into existence.

While occupied with such a character of truth as this, it is no longer a question as to whether God can save poor sinners; He actually wants to "make a marriage" for his Son," and the Church is the destined bride — she is the object of the Father's purpose, the object of the Son's love, and of the testimony of the Holy Ghost. She is to be the sharer of all the Son's dignity and glory, as she is the sharer of all that love of which He has been the everlasting object. Hear His own words, "And the glory which thou gavest me, I have given them; that they may be one, even as we are one: I in them, and thou in me, that they may be made perfect in one; and that the world may know that thou hast sent me, and hast loved them as thou hast loved me." (John 17:22-23) This settles the whole question. The words just quoted give us the thoughts of Christ's heart in reference to the Church. She is to be as He is, and not only so, but she is so even now, as St. John tells us, "Herein is love perfected with us, that we may have boldness in the day of judgement: because as he is, so are we in this world." (1 John 4:17) This gives full confidence to the soul. "We are in him that is true, in his Son Jesus Christ. This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 (1 John 5:20) There is here no ground for uncertainty. Everything is secured for the bride in the bridegroom. All that belonged to Isaac became Rebekah's because Isaac was hers; and so all that belongs to Christ is made available to the Church. "All things are yours; whether Paul, or Apollos, or Cephas, or the world, or life, or death, or things present, or things to come; all are yours, and ye are Christ's, and Christ is God's." (1 Cor. 3:21-23) Christ is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Eph. 1:22) It will be His joy, throughout eternity, to exhibit the Church in all the glory and beauty with which He has endowed her, for her glory and beauty will be but the reflection of His. Angels and principalities shall behold in the Church the marvellous display of the wisdom, power, and grace of God in Christ.

But we shall now look at the second point for consideration, viz., the testimony. Abraham's servant carried with him a very distinct testimony. "And he said, I am Abraham's servant. And the Lord has blessed My master greatly, and he is become great; and he has given him flocks, and herds, and silver, and gold, and men servants, and maid servants, and camels, and asses. And Sarah, my master's wife, bare a son to my master when she was old; and to him has he given all that he has." (Ver. 34-36) He reveals the father and the son. Such was his testimony. He speaks of the vast resources of the father, and of the son's being endowed with all these in virtue of his being "the only-begotten," and the object of the father's love. With this testimony he seeks to obtain a bride for the son.

All this, I need hardly remark, is strikingly illustrative of the testimony with which the Holy Ghost was sent from heaven upon the day of Pentecost. "When the Comforter is come,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even the Spirit of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Father, he shall testify of me." (John 15:26) Again, "Howbeit when he the Spirit of truth is come, he wi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soever he shall hear, that shall he speak; and he will show you things to come.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ow it to you." All things that the Father has are mine: therefore said I, that he shall take of mine, and shall show it to you. (John 16:13-15) The coincidence of these words with the testimony of Abraham's servant is instructive and interesting. It was by telling of Isaac that he sought to attract the heart of Rebekah; and it is, as we know, by telling of Jesus, that the Holy Ghost seeks to draw poor sinners away from a world of sin and folly into the blessed and holy unity of the body of Christ. "He shall take of mine and show it to you." The Spirit of God will never lead any one to look at Himself or His work; but only and always at Christ. Hence, the more really spiritual any one is, the more entirely will he be occupied with Christ.

Some there are who regard it as a great mark of spirituality to be ever looking in at their own hearts, and dwelling upon what they find there, even though that be the work of the Spirit. This is a great mistake. So far from its being a proof of spirituality, it is a proof of the very reverse, for it is expressly declared of the Holy Ghost that "He shall take of mine and show it to you." Therefore, whenever one is looking inward, and building on the evidences of the Spirit's work there, he may be assured he is not led by the Spirit of God, in so doing. It is by holding up Christ that the Spirit draws souls to God. This is very important. The knowledge of Christ is life eternal; and it is the Father's revelation of Christ, by the Holy Ghost, that constitutes the basis of the Church. When Peter confessed Christ to be the Son of the Living God, Christ's answer was, "blessed art thou, Simon Barjonah; for flesh and blood has not revealed it to thee, but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And I say to thee, that thou art Peter;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il against it." (Matt. 16:17-18) What rock? Peter? God forbid. "This rock" (taute te petra) simply means the Father's revelation of Christ, as the Son of the living God, which is the only means by which any one is introduced into the assembly of Christ. Now this opens to us, very much, the true character of the gospel. It is, pre-eminently and emphatically, a revelation — a revelation not merely of a doctrine, but of a Person — the Person of the Son. This revelation being received by faith, draws the heart to Christ, and becomes the spring of life and power — the ground of membership — the power of fellowship. "When it pleased God … to reveal His Son in me," &c. Here we have the true principle of "the rock," viz., God revealing His Son. It is thus the superstructure is reared up; and on this solid foundation it reposes, according to God's eternal purpose.

It is therefore peculiarly instructive to find in this 24th of Genesis such a marked and beautiful illustration of the mission and special testimony of the Holy Ghost. Abraham's servant, in seeking to procure a bride for Isaac, sets forth all the dignity and wealth with which he had been endowed by the father; the love of which he was the object; and, in short, all that was calculated to affect the heart, and draw it off from present things. He showed Rebekah an object in the distance, and set before her the blessedness and reality of being made one with that beloved and highly favoured object. All that belonged to Isaac would belong to Rebekah too, when she became part of him. Such was his testimony. Such, also, is the testimony of the Holy Ghost. He speaks of Christ, the glory of Christ, the beauty of Christ, the fullness of Christ, the grace of Christ, "the unsearchable riches of Christ," the dignity of His Person, and the perfectness of His work.

Moreover, he sets forth the amazing blessedness of being one with such a Christ, "members of His body, of his flesh, and of his bones." Such is the Spirit's testimony always; and herein we have an excellent touchstone by which to try all sorts of teaching and preaching. The most spiritual teaching will ever be characterised by a full and constant presentation of Christ. He will ever form the burden of such teaching. The Spirit cannot dwell on ought but Jesus. Of Him He delights to speak. He delights in setting forth His attractions and excellencies. Hence, when a man is ministering by the power of the Spirit of God, there will always be more of Christ than anything else in his ministry. There will be little room in such ministry for human logic and reasoning. Such things may do very well where a man desires to set forth himself; but the Spirit's sole object be it well remembered by all who minister — will ever be to set forth Christ.

Let us now look, in the last place, at the result of all this. Truth, and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truth, are two very different things. It is one thing to speak of the peculiar glories of the Church, and quite another thing to be practically influenced by those glories. In Rebekah's case the effect was most marked and decisive. The testimony of Abraham's servant sank down into her ears, and into her heart, and entirely detached her heart's affections from the scene of things around her. She was ready to leave all and follow after, in order that she might apprehend that for which she had been apprehended. It was morally impossible that she could believe herself to be the subject of such high destinies, and yet continue amid the circumstances of nature. If the report concerning the future were true, attachment to the present was the worst of folly. If the hope of being Isaac's bride, joint-heir with him of all his dignity and glory, if this were a reality, then to continue to tend Laban's sheep would be practically to despise all that God had, in grace, set before her.

But, no, the prospect was far too bright to be thus lightly given up. True, she had not yet seen Isaac, nor yet the inheritance, but she had believed the report, the testimony of him, and had received, as it were, the earnest of it, and these were enough for her heart; and hence she unhesitatingly arises and expresses her readiness to depart in the memorable words, "I will go." "She was fully prepared to enter upon an unknown path in companionship with one who had told her of an object far away, and of a glory connected with him, to which she was about to be raised. "I will go," said she, and "forgetting the things which were behind, and reaching forth toward the things which were before, she pressed toward the mark for the prize of her high calling." Most touching and beautiful illustration this of the Church, under the conduct of the Holy Ghost, going onward to meet her heavenly Bridegroom. This is what the Church should be; but, alas! there is sad failure here. There is little of that holy alacrity in laying aside every weight and every entanglement, in the power of communion with the Holy Guide and Companion of our way, whose office and delight it is to take of the things of Jesus, and show them to us; just as Abraham's servant took of the things of Isaac, and showed them to Rebekah: and no doubt, too, he found his joy in pouring fresh testimonies concerning the son into her ear, as they moved onward toward the consummation of all her joy and glory. Thus it is, at least with our heavenly guide and companion. He delights to tell of Jesus, "He shall take of mine and show it to you;" and again, "he shall show you things to come." Now, this is what we really want, this ministry of the Spirit of God, unfolding Christ to our souls, producing earnest longing to see Him, as He is, and be made like Him for ever. Nought but this will ever detach our hearts from earth and nature. What, save the hope of being associated with Isaac, would ever have led Rebekah to say, "I will go," when her "brother and her mother said, Let the damsel abide with us a few days, at least ten." And so with us: nothing but the hope of seeing Jesus as He is, and being like Him, will ever enable or lead us to purify ourselves, even as He is pure.

 

Genesis 25

In the opening of this chapter, Abraham's second marriage is set before us, an event not without its interest to the spiritual mind, when viewed in connection with what we have been considering in the preceding chapter. With the light furnished by the prophetic scriptures of the New testament, we understand that after the completion and taking up of the elect bride of Christ, the seed of Abraham will again come into notice. Thus, after the marriage of Isaac, the Holy Ghost takes up the history of Abraham's seed by a new marriage, together with other points in his history, and that of his seed, according to the flesh. I do not press any special interpretation of all this; I merely say that it is not without its interest.

We have already referred to the remark of some one on the book of Genesis, namely, that it is "full of the seeds of things;" and as we pass along its comprehensive pages, we shall find them teaming with all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ruth, which are more elaborately brought out in the New Testament. True, in Genesis these principles are set forth illustratively, and in the New Testament didactically; still, the illustration is deeply interesting, and eminently calculated to bring home the truth with power to the soul.

At the close of this chapter we are presented with some principles of a very solemn and practical nature. Jacob's character and actings which hereafter, if the Lord will, come more fully before us; but I would just notice, ere passing on, the conduct of Esau, in reference to the birthright, and all which it involved. The natural heart places no value on the things of God. To it God's promise is a vague, valueless, powerless thing, simply because God is not known. Hence it is that present things carry such weight and influence in man's estimation. Anything that man can see he values, because he is governed by sight, and not by faith. To him the present is everything; the future is a mere uninfluential thing — a matter of the merest uncertainty. Thus it was with Esau. Here his fallacious reasoning, "Behold, I am at the point to die; and what profit shall this birthright do to me? What strange reasoning? The present is slipping from beneath my feet, I will therefore despise and entirely let go the future? Time is fading from my view, I will therefore abandon all interest in eternity! "Thus Esau despised his birthright." Thus Israel despised the pleasant land; (Ps. 106:24) thus they despised Christ. (Zech. 11:13) Thus those who were bidden to the marriage despised the invitation. (Matt. 22:5) Man has no heart for the things of God. The present is everything to him. A mess of pottage is better than a title to Canaan. Hence, the very reason why Esau made light of the birthright was the reason why he ought to have grasped it with the greater intensity. The more clearly I see the vanity of man's present, the more I shall cleave to God's future. Thus it is in the judgement of faith. "Seeing then that all these things shall be dissolved, what manner of persons ought we to be, in all holy conversation and godliness; looking for and hasting to the coming of the day of God, wherein the heavens being on fire shall be dissolved, and the elements shall melt with fervent heat? Nevertheless we, according to his promise, look for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herein dwells righteousness." (2 Peter 3:11-13) These are the thoughts of God, and, therefore, the thoughts of faith. The things that are seen shall be dissolved. What, then, are we to despise the unseen? By no means. The present is rapidly passing away. What is our resource? "Looking for, and hasting to, the coming of the day of God." This is the judgement of the renewed mind; and any other judgement is only that of "a profane person, as Esau, who for one morsel of meat sold his birthright." (Heb. 12:16) The Lord keep us judging of things as He judges. This can only be done by faith.

 

Genesis 26

The opening verse of this chapter connects itself with Gen. 12. "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beside the first famine that was in the days of Abraham." The trials which meet God's people, in their course, are very much alike; and they ever tend to make manifest how far the heart has found its all in God. It is a difficult matter — a rare attainment, so to walk in sweet communion with God as to be rendered thereby entirely independent of things and people here. The Egypts and the Gerars which lie on our right hand and on our left present great temptations, either to turn aside out of the right way, or to stop short of our true position as servants of the true and living God.

"And Isaac went to Abimelech, king of the Philistines, to Gerar." There is a manifest difference between Egypt and Gerar. Egypt is the expression of the world in its natural resources, and its independence of God. "My river is mine own," is the language of an Egyptian who knew not Jehovah, and thought not of looking to Him for ought. Egypt was, locally, further removed from Canaan than Gerar; and, morally, it expresses a condition of soul further from God. Gerar is thus referred to in Gen. 10 "And the border of the Canaanites was from Sidon, as thou comest to Gerar, to Gaza as thou goest to Sodom, and Gomorrah, and Admah, and Zeboim, even to Lasha." (Ver. 19) We are informed that "from Gerar to Jerusalem was three days' journey." It was, therefore, as compared with Egypt, an advanced position; but still it lay within the range of very dangerous influences. Abraham got into trouble there, and so does Isaac, in this chapter, and that, too, in the very same way. Abraham denied his wife, and so does Isaac. This is peculiarly solemn. To see both the father and the son fall into the same evil, in the same place, tells us, plainly, that the influence of that place was not good.

Had Isaac not gone to Abimelech, king of Gerar, he would have had no necessity for denying his wife; but the slightest divergence from the true line of conduct superinduces spiritual weakness. It was when Peter stood and warmed himself at the high priest's fire that he denied his Master. Now, it is manifest that Isaac was not really happy in Gerar. True, the Lord says to him, "sojourn in this land;" but how often does the Lord give directions to His people morally suitable to the condition He knows them to be in, and calculated also to arouse them to a true sense of that condition? He directed Moses, in Num. 13 to send men to search the land of Canaan; but had they not been in a low moral condition, such a step would not have been necessary. We know well that faith does not need "to spy out" when God's promise lies before us. Again, he directed Moses to choose out seventy elders to help him in the work; but had Moses fully entered into the dignity and blessedness of his position, he would not have needed such a direction. So, in reference to the setting up of a king, in 1 Sam. 8. They ought not to have needed a king. Hence, we must always take into consideration the condition of an individual or a people to whom a direction is given before we can form any correct judgement as to the direction.

But again it may be said, if Isaac's position in Gerar was wrong, how do we read, "Then Isaac sowed in that land, and received the same year an hundred-fold: and the Lord blessed him." (ver. 12) I reply, we can never judge that a person's condition is right because of prosperous circumstances. We have had already to remark, that there is a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Lord's presence and His blessing. Many have the latter without the former; and, moreover, the heart is prone to mistake the one for the other — prone to put the blessing for the presence; or at least to argue that the one must ever accompany the other. This is a great mistake. How many do we see surrounded by God's blessings, who neither have, nor wish for, God's presence? It is important to see this. A man may "wax great, and go forward, and grow until he becomes very great, and have possession of flocks, and possession of herds, and great store of servants," and all the while, not have the full, unhindered joy of the Lord's presence with him. Flocks and herds are not the Lord. They are things on account of which the Philistines might envy Isaac, whereas they never would have envied him on account of the Lord's presence. He might have been enjoying the sweetest and richest communion with God, and the Philistines have thought nothing whatever about it, simply because they had no heart to understand or appreciate such a reality. Flocks, herds, servants, and wells of water they could appreciate; but the divine presence they could not appreciate.

However, Isaac at length, makes his way from amongst the Philistines, and gets up to Beersheba. "And the Lord appeared to him the same night, and said, I am the God of Abraham thy father; fear not, for I am with thee, and will bless thee." (Ver. 24) Mark, it was not the Lord's blessing merely, but the Lord Himself. And why? because Isaac had left the Philistines, with all their envy, and strife, and contention behind, and gone up to Beersheba. Here the Lord could show Himself to His servant. His liberal hand might follow him during his sojourn in Gerar; but His presence could not there be enjoyed. To enjoy God's presence, we must be where He is, and He certainly is not to be found amid the strife and contention of an ungodly world; and hence, the sooner the child of God gets away from all such, the better. So Isaac found it. He had no rest in his own spirit; and he assuredly did not, in any wise, serve the Philistines by his sojourn amongst them. It is a very common error to imagine that we serve the men of this world by mixing ourselves up with them in their associations and ways. The true way to serve them is to stand apart from them in the power of communion with God, and thus show them the pattern of a more excellent way.

Mark the progress in Isaac's soul, and the moral effect of his course. "He went up from thence," "The Lord appeared to him," "he builded an altar," "he called upon the name of the Lord," "he pitched his tent," "his servants digged a well." Here we have most blessed progress. The moment he took a step in the right direction, he went from strength to strength. He entered into the joy of God's presence — tasted the sweets of true worship, and exhibited the character of a stranger and pilgrim, and found peaceful refreshment, an undisputed well, which the Philistines could not stop because they were not there.

These were blessed results in reference to Isaac himself; and now observe the effect produced upon others. "Then Abimelech went to him from Gerar, and Ahuzzath, one of his friends, and Phicol, the chief captain of his army. And Isaac said to them, Wherefore come ye to me, seeing ye hate me, and have sent me away from you? And they said, We saw certainly that the Lord was with thee: and we said, Let there now be an oath betwixt us," &c. The true way to act on the hearts and consciences of the men of the world is to stand in decided separation from them, while dealing in perfect grace toward them. So long as Isaac continued in Gerar, there was nothing but strife and contention. He was reaping sorrow for himself, and producing no effect whatever upon those around him. On the contrary, the moment he went away from them, their hearts were touched, and they followed him, and desired a covenant. This is very instructive. The principle unfolded here may be seen constantly exemplified in the history of the children of God. The first point with the heart should ever be, to see that in our position we are right with God, and not only right in position, but in the moral condition of the son. When we are right with God, we may expect to act salutarily upon men. The moment Isaac got up to Beersheba, and took his place as a worshipper, his own soul was refreshed, and he was used of God to act upon others. So long as we continue in a low position, we are robbing ourselves of blessing, and failing, totally, in our testimony and service.

Nor should we, when in a wrong position, stop to inquire, as we so often do, "Where can I find anything better?" God's order is, "Cease to do evil;" and when we have acted upon that holy precept, we are furnished with another, namely, "learn to do well." If we expect to "learn how to do well," before we "cease to do evil," we are entirely mistaken. "Awake, thou that sleepest, and arise from among the dead." (ek ton nekron.) And what then? "Christ shall give thee light." (Eph. 5:14)

My beloved reader, if you are doing what you know to be wrong, or if you are identified, in any way, with what you own to be contrary to scripture, hearken to the word of the Lord, "Cease to do evil." And, be assured, when you have yielded obedience to this word, you will not long be left in ignorance as to your path. It is sheer unbelief that leads us to say, "I cannot cease to do evil, until I find something better." The Lord grant us a single eye, and a docile spirit.

 

Genesis 27-35

These chapters present to us the history of Jacob — at least, the principal scenes in that history. The Spirit of God here sets before us the deepest instruction, first, as to God's purpose of infinite grace; and, secondly, as to the utter worthlessness and depravity of human nature.

There is a passage in Gen. 25 which I purposely passed over, in order to take if up here, so that we might have the truth in reference to Jacob fully before us. "And Isaac entreated the Lord for his wife, because she was barren; and the Lord was entreated of him, and Rebekah his wife conceived. And the children struggled together within her: and she said, If it be so, why am I thus? And she went to enquire of the Lord. And the Lord said to her, Two nations are in thy womb, and two manner of people shall be separated from thy bowels; and the one people shall be stronger than the other people; and the elder shall serve the younger." This is referred to in Malachi, where we read, "I have loved you, says the Lord: yet ye say, wherein hast thou loved us? Was not Esau Jacob's brother? says the Lord: yet I have loved Jacob, and hated Esau." This is again referred to in Rom. 9: "For the children being not yet born, neither having done any good or evil, that the purpose of God, according to election, might stand, not of works, but of him that calls; it was said to her, The elder shall serve the younger, as it is written, Jacob have I loved, but Esau have I hated."

Thus we have very distinctly before us, God's eternal purpose, according to the election of grace. There is much involved in this expression. It banishes all human pretension from the scene, and asserts God's right to act as He will. This is of the very last importance. The creature can enjoy no real blessedness until he is brought to bow his head to sovereign grace. It becomes him so to do, inasmuch as he is a sinner, and, as such, utterly without claim to act or dictate. The great value of finding oneself on this ground is, that it is then no longer a question of what we deserve to get, but simply of what God is pleased to give. The prodigal might talk of being a servant, but he really did not deserve the place of a servant, if it were to be made a question of desert; and, therefore, he had only to take what the father was pleased to give — and that was the very highest place, even the place of fellowship with himself. Thus it must ever be. "Grace all the work shall crown, through everlasting days." Happy for us that it is so. As we go on, day by day, making fresh discoveries of ourselves, we need to have beneath our feet the solid foundation of God's grace: nothing else could possibly sustain us in our growing self-knowledge. The ruin is hopeless, and therefore the grace must be infinite: and infinite it is, having its source in God Himself, its channel in Christ, and the power of application and enjoyment in the Holy Ghost. The Trinity is brought out in connection with the grace that saves a poor sinner. "Grace reigns through righteousness, to eternal life, by Jesus Christ our Lord." It is only in redemption that this reign of grace could be seen. We may see in creation the reign of wisdom and power; we may see in providence the reign of goodness and long-suffering; but only in redemption do we see the reign of grace, and that, too, on the principle of righteousness.

Now, we have, in the person of Jacob, a most striking exhibition of the power of divine grace; and for this reason, that we have in him a striking exhibition of the power of human nature. In him we see nature in all its obliquity, and therefore we see grace in all its moral beauty and power. From the facts of his remarkable history, it would seem that, before his birth, at his birth, and after his birth, the extraordinary energy of nature was seen. Before his birth, we read, "the children struggled together within her." At his birth, we read, "his hand took hold on Esau's heel." And, after his birth — yea to the turning point of his history, in Gen. 32, without any exception — his course exhibits nothing but the most unamiable traits of nature; but all this only serves, like a drab background, to throw into relief the grace of Him who condescends to call Himself by the peculiarly touching name, "the God of Jacob" — a name most sweetly expressive of free grace.

Let us now examine the chapters consecutively. Gen. 27 exhibits a most humbling picture of sensuality, deceit, and cunning; and when one thinks of such things in connection with the people of God, it is sad and painful to the very last degree. Yet how true and faithful is the Holy Ghost! He must tell all out. He cannot give us a partial picture. If he gives us a history of man, he must describe man as he is, and not as he is not. So, if He unfolds to us the character and ways of God, He gives us God as He is. And this, we need hardly remark, is exactly what we need. We need the revelation of one perfect in holiness, yet perfect in grace and mercy, who could come down into all the depth of man's need, his misery and his degradation, and deal with Him there, and raise him up out of it into full, unhindered fellowship with Himself in all the reality of what He is. This is what scripture gives us. God knew what we needed, and He has given it to us, blessed be His name!

And, be it remembered, that in setting before us, in faithful love, all the traits of man's character, it is simply with a view to magnify the riches of divine grace, and to admonish our souls. It is not, by any means, in order to perpetuate the memory of sins, for ever blotted out from His sight. The blots, the failures, and the errors of Abraham, Isaac, and Jacob, have been perfectly washed away, and they have taken their place amid "the spirits of just men made perfect;" but their history remains, on the page of inspiration, for the display of God's grace, and for the warning of God's people in all ages; And, moreover, that we may distinctly see that the blessed God has not been dealing with perfect men and women, but with those of "like passions as we are" that He has been walking and bearing with the same failures, the same infirmities, the same errors, as those over which we mourn every day. This is peculiarly comforting to the heart; and it may well stand in striking contrast with the way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human biographies are written, in which, for the most part, we find, not the history of men, but of beings devoid of error and infirmity. Such histories have rather the effect of discouraging than of edifying those who read them. They are rather histories of what men ought to be, than of what they really are, and they are, therefore, useless to us, yea, not only useless, but mischievous.

Nothing can edify save the presentation of God dealing with man as he really is; and this is what the word gives us. The chapter before us illustrates this very fully. Here we find the aged patriarch Isaac, standing, as it were, at the very portal of eternity, the earth and nature fast fading away from his view, yet occupied about "savoury meat," and about to act in direct opposition to the divine counsel, by blessing the elder instead of the younger. Truly this was nature, and nature with its "eyes dim." If Esau had sold his birthright for a mess of pottage, Isaac was about to give away the blessing for a mess of venison, How very humiliating!

But God's purpose must stand, and He will do all His pleasure. Faith knows this; and, in the power of that knowledge, can wait for God's time. This nature never can do, but must set about gaining its own ends, by its own inventions. These are the two grand points brought out in Jacob's history — God's purpose of grace,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nature plotting and scheming to reach what that purpose would have infallibly brought about, without any plot or scheme at all. This simplifies Jacob's history amazingly, and not only simplifies it, but heightens the soul's interest in it also. There is nothing, perhaps, in which we are so lamentably deficient, as in the grace of patient, self-renouncing dependence upon God. Nature will be working in some shape or form, and thus, so far as in it lies, hindering the outshining of divine grace and power. God did not need the aid of such elements as Rebekah's cunning and Jacob's gross deceit, in order to accomplish His purpose. He had said, "the elder shall serve the younger." This was enough — enough for faith, but not enough for nature, which must ever adopt its own ways, and know nothing of what it is to wait on God.

Now, nothing can be more truly blessed than the position of hanging in child-like dependence upon God, and being entirely content to wait for His time. True, it will involve trial; but the renewed mind learns some of its deepest lessons, and enjoys some of its sweetest experiences, while waiting on the Lord; and the more pressing the temptation to take ourselves out of His hands, the richer will be the blessing of leaving ourselves there. It is so exceedingly sweet to find ourselves wholly dependent upon one who finds infinite joy in blessing us. It is only those who have tasted, in any little measure, the reality of this wondrous position that can at all appreciate it. The only one who ever occupied it perfectly and uninterruptedly was the Lord Jesus Himself. He was ever dependent upon God, and utterly rejected every proposal of the enemy to be anything else. His language was, "In thee do I put my trust;" and again, "I was cast upon thee from the womb." Hence, when tempted by the devil to make an effort to satisfy His hunger, His reply was,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s out of the mouth of God." When tempted to cast Himself from the pinnacle of the temple, His reply was, "It is written again, Thou shalt not tempt the Lord thy God." When tempted to take the kingdoms of the world from the hand of another than God, and by doing homage to another than Him, His reply was, "It is written, Thou shalt worship the Lord thy God, and him only shalt thou serve." In a word, nothing could allure the perfect man from the place of absolute dependence upon God. True, it was God's purpose to sustain His Son; it was His purpose that He should suddenly come to His temple; it was His purpose to give Him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this was the very reason why the Lord Jesus would simply and uninterruptedly wait on God for the accomplishment of His purpose, in His own time, and in His own way. He did not set about accomplishing His own ends. He left Himself thoroughly at God's disposal. He would only eat when God gave Him bread; He would only enter the temple when sent of God; He will ascend the throne when God appoints the time.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y foes thy footstool." (Ps. 110)

This profound subjection of the Son to the Father is admirable beyond expression. Though entirely equal with God, He took, as man, the place of dependence, rejoicing always in the will of the Father; giving thanks even when things seemed to be against Him; doing always the things which pleased the Father; making it His grand and unvarying object to glorify the Father; and finally, when all was accomplished, when He had perfectly finished the work which the Father had given, He breathed His spirit into the Father's hand, and His flesh rested in hope of the promised glory and exaltation. Well, therefore, may the inspired apostle say, "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who, being in the form of God,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 but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 and took upon him the form of a servant, and was made in the likeness of men; and being found in fashion as a man,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death, even the death of the cross. Wherefore God also has highly exalted him, and given him a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of things in heaven, and things in earth, and things under the earth; and that every tongue should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How little Jacob knew, in the opening of his history, of this blessed mind! How little was he prepared to wait for God's time and God's way! He much preferred Jacob's time and Jacob's way. He thought it much better to arrive at the blessing and the inheritance by all sorts of cunning and deception, than by simple dependence upon and subjection to God, whose electing grace had promised, and whose almighty power and wisdom would assuredly accomplish all for him.

But, oh! how well one knows the opposition of the human heart to all this! Any attitude for it save that of patient waiting upon God. It is almost enough to drive nature to distraction to find itself bereft of all resource but God. This tells us, in language not to be misunderstood, the true character of human nature. In order to know what nature is, I need not travel into those scenes of vice and crime which justly shock all refined moral sense. No; all that is needful is just to try it for a moment in the place of dependence, and see how it will carry itself there. It really knows nothing of God, and therefore cannot trust Him; and herein was the secret of all its misery and moral degradation. It is totally ignorant of the true God, and can therefore be nought else but a ruined and worthless thing. The knowledge of God is the source of life — yea, is itself life; and until a man has life, what is he? or, what can he be?

Now, in Rebekah and Jacob, we see nature taking advantage of nature in Isaac and Esau. It was really this. There was no waiting upon God whatever. Isaac's eyes were dim, he could therefore be imposed upon, and they set about doing so, instead of looking off to God, who would have entirely frustrated Isaac's purpose to bless the one whom God would not bless — a purpose founded in nature, and most unlovely nature, for "Isaac loved Esau," not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but "because he did eat of his venison." How humiliating!

But we are sure to bring unmixed sorrow upon ourselves, when we take ourselves, our circumstances, or our destinies, out of the hands of God.* Thus it was with Jacob, as we shall see in the sequel. It has been observed by another, that whoever observes Jacob's life, after he had surreptitiously obtained his father's blessing, will perceive that he enjoyed very little worldly felicity. His brother purposed to murder him, to avoid which he was forced to flee from his father's house; his uncle Laban deceived him, as he had deceived his father, and treated him with great rigor; after a servitude of twenty-one years, he was obliged to leave him in a clandestine manner, and not without danger of being brought back or murdered by his enraged brother; no sooner were these fears over, than he experienced the baseness of his son Reuben, in defiling his bed; he had next to bewail the treachery and cruelty of Simeon and Levi towards the Shechemites; then he had to feel the loss of his beloved wife; he was next imposed upon by his own sons, and had to lament the supposed untimely end of Joseph; and, to complete all, he was forced by famine to go into Egypt, and there died in a strange land. So just, wonderful, and instructive are all the ways of providence."

{*We should ever remember, in a place of trial, that what we want is not a change of circumstances, but victory over self.}

This is a true picture, so far as Jacob was concerned; but it only gives us one side, and that the gloomy side. Blessed be God, there is a bright side, likewise, for God had to do with Jacob; and, in every scene of his life, when Jacob was called to reap the fruits of his own plotting and crookedness, the God of Jacob brought good out of evil, and caused His grace to abound over all the sin and folly of His poor servant. This we shall see as we proceed with his history.

I shall just offer a remark here upon Isaac, Rebekah, and Esau. It is very interesting to observe how, notwithstanding the exhibition of nature's excessive weakness, in the opening of Genesis 27, Isaac maintains, by faith, the dignity which God had conferred upon him. He blesses with all the consciousness of being endowed with power to bless! He says, "I have blessed him; yea, and he shall be blessed … Behold, I have made him thy lord, and all his brethren have I given to him for servants; and with corn and wine have I sustained him; and what shall I do now to thee, my son?" He speaks as one who, by faith, had at his disposal all the treasures of earth. There is no false humility, no taking a low ground by reason of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rue, he was on the eve of making a grievous mistake — even of moving right athwart the counsel of God; still, he knew God, and took his place accordingly, dispensing blessings in all the dignity and power of faith. "I have blessed him; yea, and he shall be blessed." "With corn and wine have I sustained him." It is the proper province of faith to rise above all one's own failure and the consequences thereof, into the place where God's grace has set us.

As to Rebekah, she was called to feel all the sad results of her cunning actings. She, no doubt, imagined she was managing matters most skillfully; but, alas! she never saw Jacob again: so much for management! How different it would have been had she left the matter entirely in the hands of God. This is the way in which faith manages, and it is ever a gainer. "Which of you by taking thought, can add to his stature one cubit?" We gain nothing by our anxiety and planning; we only shut out God, and that is no gain. It is a just judgement from the hand of God to be left to reap the fruits of our own devices; and I know of few things more sad than to see a child of God so entirely forgetting his proper place and privilege, as to take the management of his affairs into his own hands. The birds of the air, and the lilies of the field, may well be our teachers when we so far forget our position of unqualified dependence upon God.

Then, again, as to Esau, the apostle calls him "a profane person, who for one morsel of meat sold his birthright," and "afterwards, when he would have inherited the blessing, he was rejected; for he found no place of change of mind, though he sought it carefully with tears." Thus we learn what a profane person is, viz. one who would like to hold both worlds; one who would like to enjoy the present, without forfeiting his title to the future. This is, by no means, an uncommon case. It expresses to us the mere worldly professor, whose conscience has never felt the action of divine truth, and whose heart has never felt the influence of divine grace.

We are now called to trace Jacob in his movement from under his fathers roof, to view him as a homeless and lonely wanderer on the earth. It is here that God's special dealings with him commence. Jacob now begins to realise, in some measure, the bitter fruit of his conduct, in reference to Esau; while, at the same time, God is seen rising above all the weakness and folly of His servant, and displaying His own sovereign grace and profound wisdom in His dealings with him. God will accomplish His own purpose, no matter by what instrumentality; but if His child, in impenitence of spirit, and unbelief of heart, will take himself out of His hands, he must expect much sorrowful exercise and painful discipline. Thus it was with Jacob: he might not have had to flee to Haran, had he allowed God to act for him. God would, assuredly, have dealt with Esau, and caused him to find his destined place and portion; and Jacob might have enjoyed that sweet peace which nothing can yield save entire subjection in all things to the hand and counsel of God.

But here is where the excessive feebleness of our hearts is constantly disclosed. We do not lie passive in God's hand; we will be acting; and, by our acting, we hinder the display of God's grace and power on our behalf.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is a precept which nought, save the power of divine grace, can enable one to obey. "Let your moderation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at hand. (eggus) Be careful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What will be the result of this activity? "The peace of God, which passes all understanding, shall garrison (phrouresei) your hearts and minds by Christ Jesus." (Phil. 4:5-7)

However, God graciously overrules our folly and weakness, and while we are called upon to reap the fruits of our unbelieving and impatient ways, He takes occasion from them to teach our hearts still deeper lessons of His own tender grace and perfect wisdom. This, while it, assuredly, affords no warrant whatever for unbelief and impatience, does most wonderfully exhibit the goodness of our God, and comfort the heart even while we may be passing through the painful circumstances consequent upon our failure. God is above all; and, moreover, it is His special prerogative to bring good out of evil; to make the eater yield meat, and the strong yield sweetness; and hence, while it is quite true that Jacob was compelled to be an exile from his father's roof in consequence of his own restless and deceitful acting, it is equally true that he never could have learnt the meaning of "Bethel" had he been quietly at home. Thus the two sides of the picture are strongly marked in every scene of Jacob's history. It was when he was driven, by his own folly, from Isaac's house, that he was led to taste, in some measure, the blessedness and solemnity of "God's house."

"And Jacob went out from Beersheba, and went toward Haran. And he lighted upon a certain place, and tarried there all night, because the sun was set; and he took of the stones of that place and put them for his pillows, and lay down in that place to sleep." Here we find the homeless wanderer just in the very position in which God could meet him, and in which He could unfold His purposes of grace and glory. Nothing could possibly be more expressive of helplessness and nothingness than Jacob's condition as here set before us. Beneath the open canopy of heaven, with a pillow of stone, in the helpless condition of sleep. Thus it was that the God of Bethel unfolded to Jacob His purposes respecting him and his seed. "And he dreamed, and behold a ladder set up on the earth, and the top of it reached to heaven: and behol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it. And behold the Lord stood above it, and said, I am the Lord God of Abraham thy father, and the God of Isaac: the land whereon thou liest, to thee will I give it, and to thy seed. And thy seed shall be as the dust of the earth, and thou shalt spread abroad to the west, and to the east, and to the north and to the south: and in thee and in thy seed shall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be blessed. And, behold, I am with thee, and will keep thee in all places whither thou goest, and will bring thee again into this land; for I will not leave thee, until I have done that which I have spoken to thee of."

Here we have, indeed, "grace and glory." The ladder "set on the earth" naturally leads the heart to meditate on the display of God's grace, in the Person and work of His Son. On the earth it was that the wondrous work was accomplished which forms the basis, the strong and everlasting basis, of all the divine counsels in reference to Israel, the Church, and the world at large. On the earth it was that Jesus lived, laboured and died; that, through His death, He might remove out of the way every obstacle to the accomplishment of the divine purpose of blessing to man.

But "the top of the ladder reached to heaven." It formed the medium of communication between heaven and earth; and "behol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upon it" — striking and beautiful picture of Him by whom God has come down into all the depth of man's need, and by whom also He has brought man up and set him in His own presence for ever, in the power of divine righteousness! God has made provision for the accomplishment of all His plans, despite of man's folly and sin; and it is for the everlasting joy of any soul to find itself, by the teaching of the Holy Ghost, within the limits of God's gracious purpose.

The prophet Hosea leads us on to the time when that which was foreshadowed by Jacob's ladder shall have its full accomplishment. "And in that day I will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beasts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creeping things of the ground: and I will break the bow, and the sword, and the battle, out of the earth, and will make them to lie down safely. And I will betroth thee to me for ever; yea, I will betroth thee to me in righteousness, and in judgement, and in loving-kindness, and in mercies; I will even betroth thee to me in faithfulness; and thou shalt know the Lord.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I will hear, says the Lord, I will hear the heavens, and they shall hear the earth; and the earth shall hear the corn, and the wine, and the oil; and they shall hear Jezreel. And I will sow her to me in the earth; and I will have mercy upon her that had not obtained mercy; and I will say to them which were not my people, Thou art my people; and they shall say, Thou art my God." (Hosea 2:18-23) There is also an expression in the first chapter of John, bearing upon Jacob's remarkable vision; it is Christ's word to Nathanael, "Verily, verily, I say to you, hereafter ye shall see heaven open,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upon the Son of man." (Ver. 51)

Now this vision of Jacob's is a very blessed disclosure of divine grace to Israel. We have been led to see something of Jacob's real character, something, too, of his real condition; both were evidently such as to show that it should either be divine grace for him, or nothing. By birth he had no claim; nor yet by character. Esau might put forward some claim on both these grounds; i.e., provided God's prerogative were set aside; but Jacob had no claim whatsoever; and hence, while Esau could only stand upon the exclusion of God's prerogative, Jacob could only stand upon the introduction and establishment thereof. Jacob was such a sinner, and so utterly divested of all claim, both by birth and by practice, that he had nothing whatever to rest upon save God's purpose of pure, free, and sovereign grace. Hence, in the revelation which the Lord makes to His chosen servant, in the passage just quoted, it is a simple record or prediction of what He Himself would yet do. "I am … I will give … I will keep … I will bring … I will not leave thee until I have done that which I have spoken to thee of." It was all Himself. There is no condition whatever. No if or but; for when grace acts there can be no such thing. Where there is an if, it cannot possibly be grace. Not that God cannot put man into a position of responsibility, in which He must needs address him with an 'if.' We know He can; but Jacob asleep on a pillow of stone was not in a position of responsibility, but of the deepest helplessness and need; and therefore he was in a position to receive a revelation of the fullest, richest, and most unconditional grace.

Now, we cannot but own the blessedness of being in such a condition, that we have nothing to rest upon save God Himself; and, moreover, that it is in the most perfect establishment of God's own character and prerogative that we obtain all our true joy and blessing. According to this principle, it would be an irreparable loss to us to have any ground of our own to stand upon, for in that case, God should address us on the ground of responsibility, and failure would then be inevitable. Jacob was so bad, that none but God Himself could do for him.

And, be it remarked, that it was his failure in the habitual recognition of this that led him into so much sorrow and pressure. God's revelation of Himself is one thing, and our resting in that revelation is quite another. God shows Himself to Jacob, in infinite grace; but no sooner does Jacob awake out of sleep, than we find him developing his true character, and proving how little he knew, practically, of the blessed One who had just been revealing Himself so marvellously to him. "He was afraid, and said, How dreadful is this place! This is none other but the house of God, and this is the gate of heaven." His heart was not at home in the presence of God; nor can any heart be so until it has been thoroughly emptied and broken. God is at home, blessed be His name, with a broken heart, and a broken heart at home with Him. But Jacob's heart was not yet in this condition; nor had he yet learnt to repose, like a little child, in the perfect love of one who could say, "Jacob have I loved." "Perfect love casts out fear;" but where such love is not known and fully realised, there will always be a measure of uneasiness and perturbation. God's house and God's presence are not dreadful to a soul who knows the love of God as expressed in the perfect sacrifice of Christ. Such a soul is rather led to say, "Lord, I have loved the habitation of thy house, and the place where thine honour dwells." (Ps. 26:8) And, again, "One thing have I desired of the Lord,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enquire in his temple." (Ps. 27:4) and again, "How amiable are Thy tabernacles, O Lord of hosts! My soul longs, yea, even faints, for the courts of the Lord." (Ps. 84) When the heart is established in the knowledge of God, it will assuredly love His house, whatever the character of that house may be, whether it be Bethel, or the temple at Jerusalem, or the Church now composed of all true believers, "builded together for an habitation of God through the Spirit." However, Jacob's knowledge, both of God and His house, was very shallow, at that point in his history on which we are now dwelling.

We shall have occasion, again, to refer to some principles connected with Bethel; and shall, now, close our meditations upon this chapter, with a brief notice of Jacob's bargain with God, so truly characteristic of him, and so demonstrative of the truth of the statement with respect to the shallowness of his knowledge of the divine character. "And Jacob vowed a vow, saying, If God will be with me, and will keep me in this way that I go, and will give me bread to eat, and raiment to put on, so that I come again to my Father's house in peace; then shall the Lord be my God; and this stone, which I have set for a pillar, shall be God's house: and of all that thou shalt give me, I will surely give the tenth to thee." Observe, "if God will be with me." Now, the Lord had just said, emphatically, "I am with thee, and will keep thee in all places whither thou goest, and will bring thee again into this land," &c. And yet poor Jacob's heart cannot get beyond an "if" nor, in its thoughts of God's goodness, can it rise higher than "bread to eat, and raiment put on." Such were the thoughts of one who had just seen the magnificent vision of the ladder reaching from earth to heaven, with the Lord standing above, and promising an innumerable seed, and an everlasting possession. Jacob was evidently unable to enter into the reality and fullness of God's thoughts. He measured God by Himself, and thus utterly failed to apprehend Him. In short, Jacob had not yet verily got to the end of himself; and hence he had not really begun with God.

"Then Jacob went on his journey, and came into the land of the people of the east." As we have just seen, in Gen. 28 Jacob utterly fails in the apprehension of God's real character, and meets all the rich grace of Bethel with an "if" and a miserable bargain about food and raiment. We now follow him into a scene of thorough bargain-making. "Whatsoever a man sows, that shall he also reap." There is no possibility of escaping from this. Jacob had not yet found his true level in the presence of God; and, therefore, God uses circumstances to chasten and break him down.

This is the real secret of much, very much, of our sorrow and trial in the world. Our hearts have never been really broken before the Lord; we have never been self-judged and self-emptied; and hence, again and again, we, as it were, knock our heads against the wall. No one can really enjoy God until he has got to the bottom of self, and for this plain reason, that God has begun the display of Himself at the very point at which the end of flesh is seen. If, therefore, I have not reached the end of my flesh, in the deep and positive experience of my soul, it is morally impossible that I can have anything like a just apprehension of God's character. But I must, in some way or other, be conducted to the true measure of nature. To accomplish this end, the Lord makes use of various agencies which, no matter what they are, are only effectual when used by Him for the purpose of disclosing, in our view, the true character of all that is in our hearts. How often do we find as in Jacob's case, that even although the Lord may come near to us, and speak in our ears, yet we do not understand His voice, or take our true place in His presence. "The Lord is in this place, and I knew it not … How dreadful is this place!" Jacob learnt nothing by all this, and it, therefore, needed twenty years of terrible schooling, and that, too, in a school marvellously adapted to his flesh; and even that, as we shall see, was not sufficient to break him down.

However, it is remarkable to see how he gets back into an atmosphere so entirely suited to his moral constitution. The bargain-making Jacob, meets with the bargain-making Laban, and they are both seen, as it were, straining every nerve to outwit each other. Nor can we wonder at Laban, for he had never been at Bethel: he had seen no open heaven, with a ladder reaching from thence to earth; he had heard no magnificent promises from the lips of Jehovah, securing to him all the land of Canaan, with a countless seed: no marvel, therefore, that he should exhibit a grasping grovelling spirit; he had no other resource. It is useless to expect from worldly men ought but a worldly spirit, and worldly principles and ways; they have gotten nought superior; and you cannot bring a clean thing out of an unclean. But to find Jacob, after all he had seen and heard at Bethel, struggling with a man of the world, and endeavouring, by such means, to accumulate property, is peculiarly humbling.

And yet, alas! it is no uncommon thing to find the children of God thus forgetting their high destinies and heavenly inheritance, and descending into the arena with the children of this world, to struggle there for the riches and honours of a perishing, sin-stricken earth. Indeed, to such an extent is this true, in many instances, that it is often hard to trace a single evidence of that principle which St. John tells us "overcomes the world." Looking at Jacob and Laban, and judging of them upon natural principles, it would be hard to trace any difference. One should get behind the scenes, and enter into God's thoughts about both, in order to see how widely they differed. But it was God that had made them to differ, not Jacob; and so it is now. Difficult as it may be to trace any difference between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there is, nevertheless, a very wide difference indeed — a difference founded on the solemn fact that the former are "the vessels of mercy, which God has before prepared to glory," while the latter are "the vessels of wrath, fitted (not by God, but by sin) to destruction." (Rom. 9:22-23)* This makes a very serious difference. The Jacobs and the Labans differ materially, and have differed, and will differ for ever, though the former may so sadly fail in the realization and practical exhibition of their true character and dignity.

{*It is deeply interesting to the spiritual mind to mark how sedulously the Spirit of God, in Rom. 9 and indeed throughout all scripture, guards against the horrid inference which the human mind draws from the doctrine of God's election — when He speaks of "vessels of wrath," He simply says, "fitted to destruction." He does not say that God "fitted" them.

Whereas, on the other hand, when He refers to "the vessels of mercy" he says, "whom he had afore prepared to glory." This is most marked.

If my reader will turn for a moment to Matt 25:34-41, he will find another striking and beautiful instance of the same thing.

When the king addresses those on His right hand, he says, "Come, ye blessed of my Father, inherit the kingdom prepared for you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Verse 34)

But when He addresses those on His left, He says, "Depart from me ye cursed." He does not say, "cursed of My Father." And, further, He says, "into everlasting fire, prepared," not for you, but "for the devil and his angels." (Verse 41)

In a word, then, it is plain that God has "prepared" a kingdom of glory, and "vessels of mercy" to inherit that kingdom; but He has not prepared "everlasting fire" for men, but for the "devil and his angels" nor has He fitted the "vessels of wrath," but they have fitted themselves.

The word of God as clearly establishes "election" as it sedulously guards against "reprobation." Everyone who finds himself in heaven will have to thank God for it; and everyone that finds himself in hell will have to thank himself.}

Now, in Jacob's case, as set forth in the three chapters now before us, all his toiling and working, like his wretched bargain before, is the result of his ignorance of God's grace, and his inability to put implicit confidence in God's promise. The man that could say, after a most unqualified promise from God to give him the whole land of Canaan, "IF God will give me food to eat and raiment to put on," could have had but a very faint apprehension of who God was, or what His promise was either; and because of this, we see him seeking to do the best he can for himself. This is always the way when grace is not understood: the principles of grace may be professed, but the real measure of our experience of the power of grace is quite another thing. One would have imagined that Jacob's vision had told him a tale of grace; but God's revelation at Bethel, and Jacob's actings at Haran, are two very different things; yet the latter tell out what was Jacob's sense of the former. Character and conduct prove the real measure of the soul's experience and conviction, whatever the profession may be. But Jacob had never yet been brought to measure himself in God's presence, and therefore he was ignorant of grace, and he proved his ignorance by measuring himself with Laban, and adopting his maxims and ways.

One cannot help remarking the fact that inasmuch as Jacob failed to learn and judge the inherent character of his flesh before God, therefore he was, in the providence of God, led into the very sphere in which that character was fully exhibited in its broadest lines. He was conducted to Haran, the country of Laban and Rebekah, the very school from whence those principles, in which he was such a remarkable adept, had emanated, and where they were taught, exhibited, and maintained. If one wanted to learn what God was, he should go to Bethel; if to learn what man was, he should go to Haran. But Jacob had failed to take in God's revelation of Himself at Bethel, and he therefore went to Haran, and there showed what he was — and oh, what scrambling and scraping! what shuffling and shifting! There is no holy and elevated confidence in God, no simply looking to and waiting on Him. True, God was with Jacob — for nothing can hinder the outshining of divine grace. Moreover, Jacob in a measure owns God's presence and faithfulness. Still nothing can be done without a scheme and a plan. Jacob cannot allow God to settle the question as to his wives and his wages, but seeks to settle all by his own cunning and management. In short, it is "the supplanter" throughout. Let the reader turn, for example, to Gen. 30:37-42, and say where he can find a more masterly piece of cunning. It is verily a perfect picture of Jacob. In place of allowing God to multiply "the ringstraked, speckled, and spotted cattle," as he most assuredly could have done, had He been trusted, he sets about securing their multiplication by a piece of policy which could only have found its origin in the mind of a Jacob. So in all his actings, during his twenty years' sojourn with Laban; and finally, he, most characteristically, "steals away," thus maintaining, in everything, his consistency with himself.

Now, it is in tracing out Jacob's real character, from stage to stage of his extraordinary history, that one gets a wondrous view of divine grace. None but God could have borne with such an one, as none but God would have taken such an one up. Grace begins at the very lowest point. It takes up man as he is, and deals with him in the full intelligence of what he is. It is of the very last importance to understand this feature of grace at one's first starting; it enables us to bear, with steadiness of heart, the after discoveries of personal vileness, which so frequently shake the confidence and disturb the peace of the children of God.

Many there are who, at first, fail in the full apprehension of the utter ruin of nature, as looked at in God's presence, though their hearts have been attracted by the grace of God, and their consciences tranquillised, in some degree, by the application of the blood of Christ. Hence, as they get on in their course, they begin to make deeper discoveries of the evil within, and, being deficient in their apprehensions of God's grace, and the extent and efficiency of the sacrifice of Christ, they immediately raise a question as to their being children of God at all. Thus they are taken off Christ, and thrown on themselves, and then they either betake themselves to ordinances, in order to keep up their tone of devotion, or else fall back into thorough worldliness and carnality. These are disastrous consequences, and all the result of not having "the heart established in grace."

It is this that renders the study of Jacob's history so profoundly interesting and eminently useful. No one can read the three chapters now before us, and not be struck at the amazing grace that could take up such an one as Jacob, and not only take him up, but say, after the full discovery of all that was in him, "He has not beheld iniquity in Jacob, neither has he seen perverseness in Israel." (Num. 23:21) He does not say that iniquity and perverseness were not in him. This would never give the heart confidence — the very thing, above all others, which God desires to give. It could never assure a poor sinner's heart, to be told that there was no sin in him; for, alas! he knows too well there is; but to be told there is no sin on him, and that, moreover, in God's sight, on the simple ground of Christ's perfect sacrifice, must infallibly set his heart and conscience at rest. Had God taken up Esau, we should not have had, by any means, such a blessed display of grace; for this reason, that he does not appear before us in the unamiable light in which we see Jacob. The more man sinks, the more God's grace rises. As my debt rises, in my estimation, from the fifty pence up to the five hundred, so my sense of grace rises also, my experience of that love which, when we "had nothing to pay, could "frankly forgive" us all. (Luke 7:42) Well might the apostle say, "it is a good thing that the heart be established with grace: not with meats, which have not profited them that have been occupied therein." (Heb. 13:9)

 

Genesis 32

"And Jacob went on his way, and the angels of God met him." Still God's grace follows him, notwithstanding all. "Nothing changes God's affection." Whom He loves, and as He loves, He loves to the end. His love is like Himself,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 ever." But how little effect "God's host" had upon Jacob may be seen by his actings, as here set before us. "And Jacob sent messengers before him to Esau his brother, to the land of Seir, the country of Edom." He evidently feels uneasy in reference to Esau, and not without reason;. He had treated him badly, and his conscience was not at ease; but instead of casting himself unreservedly upon God, he betakes himself to his usual planning again, in order to avert Esau's wrath. He tries to manage Esau, instead of leaning on God.

"And he commanded them, saying, Thus shall ye speak to my lord Esau; Thy servant Jacob says thus, I have sojourned with Laban, and stayed there until now." All this bespeaks a soul very much off its centre in God. "My lord," and "thy servant," is not like the language of a brother, or of one in the conscious dignity of the presence of God; but it was the language of Jacob, and of Jacob, too, with a bad conscience.

"And the messengers returned to Jacob, saying, We came to thy brother Esau, and also he comes to meet thee, and four hundred men with him. Then Jacob was greatly afraid and distressed." But what does he first do? Does he at once cast himself upon God? No; he begins to manage. "He divided the people that was with him, and the flocks, and herds, and the camels, into two bands; and said, If Esau come to the one company and smite it, then the other company which is left shall escape." Jacob's first thought was always a plan, and in this we have a true picture of the poor human heart. True, he turns to God, after he makes his plan, and cries to Him for deliverance; but no sooner does he cease praying than he resumes the planning. Now, praying and planning will never do together. If I plan, I am leaning more or less on my plan; but when I pray, I should lean exclusively upon God. Hence, the two things are perfectly incompatible; they virtually destroy each other. When my eye is filled with my own management of things, I am not prepared to see God acting for me; and, in that case, prayer is not the utterance of my need, but the mere superstitious performance of something which I think ought to be done, or it may be, asking God to sanctify my plans. This will never do. It is not asking God to sanctify and bless my means, but it is asking Him to do it all Himself.*

{*No doubt, when faith allows God to act, He will use His own agency; but this is a totally different thing from His owning and blessing the plans and arrangements of unbelief and impatience. This distinction is not sufficiently understood.}

Though Jacob asked God to deliver him from his brother Esau, he evidently was not satisfied with that, and therefore he tried to "appease him with a present." Thus his confidence was in the "present," and not entirely in God.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 It is often hard to detect what is the real ground of the heart's confidence. We imagine, or would fain persuade ourselves, that we are leaning upon God, when we are, in reality, leaning upon some scheme of our own devising. Who, after hearkening to Jacob's prayer, wherein he says, "Deliver me, I pray thee, from the hand of my brother, from the hand of Esau; for I fear him, lest he will come and smite me, and the mother with the children," could imagine him saying, "I will appease him with a present." Had he forgotten his prayer? Was he making a God of his present? Did he place more confidence in a few cattle than in Jehovah, to whom he had just been committing himself? These are questions which naturally arise out of Jacob's actings in reference to Esau, and we can readily answer them by looking into the glass of our own hearts. There we learn, as well as on the page of Jacob's history, how much more apt we are to lean on our own management than on God; but it will not do; we must be brought to see the end of our management, that it is perfect folly, and that the true path of wisdom is to repose in full confidence upon God.

Nor will it do to make our prayers part of our management. We often feel very well satisfied with ourselves when we add prayer to our arrangement, or when we have used all lawful means, and called upon God to bless them. When this is the case, our prayers are worth about as much as our plans, inasmuch as we are leaning upon them instead of upon God. We must be really brought to the end of everything with which self has ought to do; for until then, God cannot show Himself. But we can never get to the end of our plans until we have been brought to the end of ourselves. We must see that "all flesh is grass, and all the goodliness thereof is as the flower of the field." (Isa. 40:6)

Thus it is in this interesting chapter; when Jacob had made all his prudent arrangements, we read, "And Jacob was left alone; and there wrestled a man with him until the breaking of the day." This is a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this very remarkable man. To be left alone with God is the only true way of arriving at a just knowledge of ourselves and our ways. We can never get a true estimate of nature and all its actings, until we have weighed them in the balance of the sanctuary, and there we ascertain their real worth. No matter what we may think about ourselves, nor yet what man may think about us; the great question is, what does God think about us? and the answer to this question can only be heard when we are "left alone." Away from the world; away from self; away from all the thoughts, reasonings, imaginations, and emotions of mere nature, and "alone" with God — thus, and thus alone, can we get a correct judgement about ourselves.

"Jacob was left alone; and there wrestled a man with him." Mark, it was not Jacob wrestling with a man; but a man wrestling with Jacob. This scene is very commonly referred to as an instance of Jacob's power in prayer. That it is not this is evident from the simple wording of the passage. My wrestling with a man, and a man wrestling with me, present two totally different ideas to the mind. In the former case I want to gain some object from him; in the latter, he wants to gain some object from me. Now, in Jacob's case, the divine object was to bring him to see what a poor, feeble, worthless creature he was, and when Jacob so pertinaciously held out against the divine dealing with him, "he touched the hollow of his thigh; and the hollow of Jacob's thigh was out of joint as he wrestled with him." The sentence of death must be written on the flesh — the power of the cross must be entered into before we can steadily and happily walk with God. We have followed Jacob so far, amid all the windings and workings of his extraordinary character —  we have seen him planning and managing during his twenty years sojourn with Laban; but not until he "was left alone," did he get a true idea of what a perfectly helpless thing he was in himself. Then, the seat of his strength being touched, he learnt to say, "I will not let thee go."

"Other refuge have I none;
Clings my helpless soul to thee."

This was a new era in the history of the supplanting, planning, Jacob. Up to this point he had held fast by his own ways and means; but now he is brought to say, "I will not let thee go." Now, my reader remark, that Jacob did not express himself thus until "the hollow of his thigh was touched." This simple fact is quite sufficient to settle the true interpretation of the whole scene. God was wrestling with Jacob to bring him to this point. We have already seen that, as to Jacob's power in prayer, he had no sooner uttered a few words to God than he let out the real secret of his soul's dependence, by saying, "I will appease him (Esau) with a present." Would he have said this if he had really entered into the meaning of prayer, or true dependence upon God? Assuredly not. If he had been looking to God alone to appease Esau, could he have said, "I will appease him by a present?" Impossible: God and the creature must be kept distinct, and will be kept so in every soul that knows much of the sacred reality of a life of faith.

But, alas here is where we fail, if one may speak for another. Under the plausible and apparently pious formula of using means, we really cloke the positive infidelity of our poor deceitful hearts; we think we are looking to God to bless our means, while, in reality, we are shutting Him out by leaning on the means, instead of leaning on Him. Oh! may our hearts be taught the evil of thus acting. May we learn to cling more simply to God alone, that so our history may be more characterised by that holy elevation above the circumstances through which we are passing. It is not, by any means, an easy matter so to get to the end of the creature, in every shape and form, as to be able to say, "I will not let thee go except thou bless me." To say this from the heart, and to abide in the power of it, is the secret of all true strength. Jacob said it when the hollow of his thigh was touched; but not till then. He struggled long, ere he gave way, because his confidence in the flesh was strong. But God can bring down to the dust the stoutest character. He knows how to touch the spring of nature's strength, and write the sentence of death thoroughly upon it; and until this is done, there can be no real "Power with God or man." We must be "weak" ere we can be "strong." "The power of Christ" can only "rest on us" in connection with the knowledge of our infirmities. Christ cannot put the seal of His approval upon nature's strength, its wisdom, or its glory: all these must sink that He may rise. Nature can never form, in any one way, a pedestal on which to display the grace or power of Christ; for if it could, then might flesh glory in His presence; but this, we know, can never be.

And, inasmuch as the display of God's glory, and God's name or character, is connected with the entire setting aside of nature, so, until this latter is set aside the soul can never enjoy the disclosure of the former. Hence, though Jacob, is called to tell out his name, to own that his name is "Jacob, or a supplanter," he yet receives no revelation of the name of Him who had been wrestling with him, and bringing him down into the dust. He received for himself the name of "Israel, or prince," which was a great step in advance; but when he says, "Tell me, I pray thee, thy name;" he received the reply, "Wherefore is it that thou dost ask after my name?" The Lord refuses to tell His name, though he had elicited from Jacob the truth as to himself, and He blesses him accordingly. How often is this the case in the annals of God's family! There is the disclosure of self in all its moral deformity; but we fail to get hold practically of what God is, though He has come so very close to us, and blessed us, too, in connection with the discovery of ourselves. Jacob received the new name of Israel when the hollow of his thigh had been touched. He became a mighty prince when he had been brought to know himself as a weak man; but still the Lord had to say, "Wherefore is it that thou dost ask after my name?" There is no disclosure of the name of Him who, nevertheless, had brought out the real name and condition of Jacob.

From all this we learn that it is one thing to be blessed by the Lord and quite another thing to have the revelation of His character, by the Spirit, to our hearts. "He blessed him there;" but he did not tell His name. There is blessing in being brought, in any measure, to know ourselves, for therein we are led into a path, in which we are able, more clearly, to discern what God is to us in detail. Thus it was with Jacob. When the hollow of his thigh was touched he found himself in a condition in which it was either God or nothing. A poor halting man could do little, it therefore behoved him to cling to one who was almighty.

I would remark, ere leaving this chapter, that the book of Job is, in a certain sense, a detailed commentary on this scene in Jacob's history. Throughout the first thirty-one chapters, Job grapples with his friends, and maintains his point against all their arguments; but in Job 32 God, by the instrumentality of Elihu, begins to wrestle with him; and in Job 38 He comes down upon Him directly with all the majesty of His power, overwhelms him by the display of His greatness and glory, and elicits from him the well-known words, "I have heard of thee by the hearing of the ear: but now mine eye sees thee. Wherefore I abhor myself, and repent in dust and ashes." (Job 42:5-6) This was really touching the hollow of his thigh. And mark the expression, "mine eye sees thee." He does not say, "I see myself" merely; no; but "thee." Nothing But a view of what God is, can really lead to repentance and self-loathing. Thus it will be with the people of Israel, whose history is very analogous with that of Job. When they shall look upon Him whom they have pierced, they will mourn, and then there will be full restoration and blessing. Their latter end, like Job's, will be better than their beginning. They will learn the full meaning of that word, "O Israel, thou hast destroyed thyself; but in Me is thine help." (Hosea 13:9)

Genesis 33 & Genesis 34

We may here see how groundless were all Jacob's fears, and how useless all his plans. Notwithstanding the wrestling, the touching the hollow of the thigh, and the halting, we find Jacob still planning. "And Jacob lifted up his eyes, and looked, and, behold, Esau came, and with him four hundred men. And he divided the children to Leah, and to Rachel, and to the two handmaids. And he put the handmaids and their children foremost, and Leah and her children after, and Rachel and Joseph hindermost." This arrangement proved the continuance of his fears. He still anticipated vengeance from the hand of Esau, and he exposed those about whom he cared least, to the first stroke of that vengeance. How wondrous are the depths of the human heart? How slow it is to trust God! Had Jacob been really leaning upon God, he never could have anticipated destruction for himself and his family; but alas! the heart knows something of the difficulty of simply reposing, in calm confidence, upon an over present, all-powerful, and infinitely gracious God.

But mark, now, the thorough vanity of the heart's anxiety. "And Esau ran to meet him, and embraced him, and fell on his neck and kissed him; and they wept." The present was quite unnecessary — the plan, useless. God "appeased" Esau, as He had already appeased Laban. Thus it is He ever delights to rebuke our poor, coward, unbelieving hearts, and put to flight all our fears. Instead of the dreaded sword of Esau, Jacob meets his embrace and kiss; instead of strife and conflict, they mingle their tears. Such are God's ways. Who would not trust Him? Who would not honour Him with the heart's fullest confidence? Why is it that, notwithstanding all the sweet evidence of His faithfulness to those will put their trust in Him, we are so ready, on every fresh occasion, to doubt and hesitate? The answer is simple, we are not sufficiently acquainted with God. "Acquaint now thyself with Him and be at peace." (Job 22:21) This is true, whether in reference to the unconverted sinner, or to the child of God. The true knowledge of God, real acquaintance with Him, is life and peace. "This is, life eternal,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John 17:3) The more intimate our acquaintance with God, the more solid will be our peace, and the more will our souls be lifted above every creature dependence. "God is a Rock," and we only need to lean our whole weight upon Him, to know how ready and how able He is to sustain us.

After all this manifestation of God's goodness, we find Jacob settling down in Succoth, and, contrary to the spirit and principles of a pilgrim life, building a house, as if it were his home. Now, Succoth was evidently not his divinely-appointed destination. The Lord had not said to him," I am the God of Succoth;" no; but "I am the God of Bethel." Bethel, therefore, and not Succoth, should have been Jacob's grand object. But, alas! the heart is always prone to rest satisfied with a position and portion short of what God would graciously assign.

Jacob then moves on to Shechem, and purchases ground, still falling short of the divine mark, and the name by which he calls his altar is indicative of the moral condition of his soul. He calls it "El-elohe Israel," or "God, the God of Israel." This was taking a very contracted view of God. True, it is our privilege to know God as our God; but it is a higher thing to know Him as the God of His own house, and to view ourselves as part of that house. It is the believer's privilege to know Christ as his Head; but it is a higher thing to know Him as the Head of His body the Church, and to know ourselves as members of that body.

We shall see, when we come to Gen. 35 that Jacob is led to take a higher and a wider view of God; but at Shechem he was manifestly on low ground, and he was made to smart for it, as is always the case when we stop short of God's own ground. The two tribes and a half took up their position on this side of Jordan, and they were the first to fall into the enemy's hand. So it was with Jacob. We see, in Gen. 34 the bitter fruits of his sojourn at Shechem. There is a blot cast upon his family, which Simeon and Levi attempt to wipe out, in the mere energy and violence of nature, which only led to still deeper sorrow; and that, too, which touched Jacob still more keenly than the insult offered to his daughter: "And Jacob said to Simeon and Levi, Ye have troubled me, to make me to stink among the inhabitants of the land, among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and I being few in number, they shall gather themselves together against me, and slay me; and I shall be destroyed, I and my house." Thus, it was the consequences in reference to himself that affected Jacob most. He seems to have walked in constant apprehension of danger to himself or his family, and in the manifestation of an anxious, a cautious, timid, calculating spirit, utterly incompatible with a life of genuine faith in God.

It is not that Jacob was not, in the main, a man of faith; he assuredly was, and as such, gets a place amongst the "cloud of witnesses" in Heb. 11. But then he exhibited sad failure from not walking in the habitual exercise of that divine principle. Could faith have led him to say, "I shall be destroyed, I and my house?" Surely not. God's promise in Gen. 28:14-15, should have banished every fear from his poor timid spirit. "I will keep thee … I will not leave thee. This should have tranquillised his heart. But the fact is, his mind was more occupied with his danger among the Shechemites than with his security in the hand of God. He ought to have known that "not a hair of his head could be touched, and therefore, instead of looking at Simeon and Levi, or the consequences of their rash acting, he should have judged himself for being in such a position at all. If he had not settled at Shechem, Dinah would not have been dishonoured, and the violence of his sons would not have been exhibited. We constantly see Christians getting into deep sorrow and trouble through their own unfaithfulness; and then, instead of judging themselves, they begin to look at circumstances, and to cast upon them the blame.

How often do we see Christian parents, for instance, in keen anguish of soul about the wildness, unsubduedness, and worldliness of their children; and, all the while, they have mainly to blame themselves for not walking faithfully before God in reference to their family. Thus was it with Jacob. He was on low moral ground at Shechem; and, inasmuch as he lacked that refined sensibility which would have led him to detect the low ground, God, in very faithfulness, used his circumstances to chastise him. "God is not mocked, for whatsoever a man sows that shall he also reap." This is a principle flowing out of God's moral government, a principle, from the application of which none can possibly escape; and it is a positive mercy to the children of God that they are obliged to reap the fruits of their errors. It is a mercy to be taught, in any way, the bitterness of departing from, or stopping short of, the living God. We must learn that this is not our rest; for, blessed be God, He would not give us a polluted rest. He would ever have us resting in, and with Himself. Such is His perfect grace; and when our hearts founder, or fall short, His word is, "If thou wilt return, return to Me." False humility, which is simply the fruit of unbelief, would lead the wanderer or backslider to take lower ground, not knowing the principle or measure of God's restoration. The prodigal would seek to be made a servant, not knowing that, so far as he was concerned, he had no more title to take the place of a servant than to that of a son; and, moreover, that it would be utterly unworthy of the father's character to put him in such a position. We must come to God on a principle and in a manner worthy of Himself, or not at all.

 

Genesis 35

"And God said to Jacob. Arise, go up to Bethel and dwell there." This confirms the principle on which we have been dwelling. When there is failure or declension, the Lord calls the soul back to Himself. "Remember therefore from whence thou art fallen; and repent and do the first works." (Rev. 2:5) This is the divine principle of restoration. The soul must be recalled to the very highest point; it must be brought back to the divine standard. The Lord does not say, 'remember where you are;' no; but 'remember the lofty position from whence you have fallen.' Thus only can one learn how far he has declined, and how he is to retrace his steps.

Now, it is when thus recalled to God's high and holy standard, that one is really led to see the sad evil of one's fallen condition. What a fearful amount of moral evil had gathered round Jacob's family, unjudged by Him, until his soul was roused by the call to "go up to Bethel." Shechem was not the place in which to detect all this evil. The atmosphere of that place was too much impregnated with impure elements to admit of the soul's discerning, with any degree of clearness and precision, the true character of evil. But the moment the call to Bethel fell on Jacob's ear, "Then Jacob said to his household, and to all that were with him, Put away the strange gods that are among you, and be clean and change your garments, and let us arise and go up to Bethel; and I will make there an altar to God, who answered me in the day of my distress, and was with me in the way which I went." The very mention of "the house of God" struck a chord in the soul of the patriarch; it carried him, in the twinkling of an eye, over the history of twenty eventful years. It was at Bethel he had learnt what God was, and not at Shechem; hence he must get back to Bethel again, and erect an altar upon a totally different base, and under a totally different name, from his altar at Shechem. This latter was connected with a mass of uncleanness and idolatry.

Jacob could speak of "El-elohe-Israel," while surrounded by a quantity of things utterly incompatible with the holiness of the house of God. It is important to be clear in reference to this point. Nothing can keep the soul in a path of consistent, intelligent separation from evil save the sense of what "the house of God" is, and what becomes that house. If I merely look at God, in reference to myself, I shall not have a clear, full, divine sense of all that flows out of a due recognition of God's relation to His house. Some there are who deem it a matter of no importance how they are mixed up with impure materials in the worship of God, provided they themselves are true and upright in heart. In other words, they think they can worship God at Shechem; and that an altar, named "El-elohe Israel," is just as elevated, just as much according to God, as an altar named "El Bethel." This is evidently a mistake. The spiritually minded reader will at once detect the vast moral difference between Jacob's condition at Shechem, and his condition at Bethel; and the same difference is observable between the two altars. Our ideas, in reference to the worship of God, must, of necessity, be affected by our spiritual condition; and the worship which we present will be low and contracted, or elevated and comprehensive, just in proportion as we enter into the apprehension of His character and relationship.

Now, the name of our altar, and the character of our worship, express the same ides. El-Bethel worship is, higher than El-elohe-Israel worship, for this simple reason, that it conveys a higher idea of God. It gives me a more elevated thought of God to speak of Him as the God of His house, than as the God of a solitary individual truth, there is beautiful grace expressed in the title, "God, the God of Israel;" and the soul must ever feel happy in looking at the character of God, so graciously connecting Himself with every separate stone of His house, and every separate member of the body. Each stone in the building of God is a "lively stone" as connected with the "living stone," having communion with the living God, by the power of "the Spirit of life." But while all this is blessedly true, God is the God of His house; and when we are enabled, by an enlarged spiritual intelligence, to view Him as such, we enjoy a higher character of worship than that which flows from merely apprehending what He is to ourselves individually.

But there is another thing to be remarked in Jacob's recall to Bethel. He is told to make an altar "to God, that appeared to thee when thou fleddest from the face of Esau thy brother." He is thus reminded of "the day of his distress." It is often well to have our minds led in this way to the point in our history in which we found ourselves brought down to the lowest step of the ladder. Thus Saul is brought back to the time when he was "little in his own eyes." This is the true starting point with all of us. "When thou wast little in thine own eyes," is a point of which we often need to be reminded. It is then that the heart really leans on God. Afterwards we begin to fancy ourselves to be something, and the Lord is obliged to teach us afresh our own nothingness. When first one enters upon a path of service or testimony, what a sense there is of personal weakness and incapacity! and as a consequence, what leanings upon God! what earnest, fervent appeals to Him for help and strength! Afterwards we begin to think that, from being so long at the work, we can get on by ourselves, at least there is not the same sense of weakness, or the same simple dependence upon God; and then our ministry becomes a poor, meagre, flippant, wordy thing, without unction or power — a thing flowing, not from the exhaustless tide of the Spirit, but from our own wretched minds.

From ver. 9-15, God repeats His promise to Jacob, and confirms the new name of "prince," instead of "supplanter;" and Jacob again calls the name of the place "Bethel." At verse 18 we have an interesting example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judgement of faith and the judgement of nature. The latter looks at things through the hazy mist with which it is surrounded; the former looks at them in the light of the presence and counsels of God. "And it came to pass, as her soul was in departing, (for she died,) that she called his name Ben-oni: but his father called him Benjamin." Nature called him, "the son of my sorrow;" but faith "the son of the right hand." Thus is it ever.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oughts of nature must ever be wide indeed, and we should earnestly desire that our souls should be governed by the latter, and not by the former.

 

Genesis 36

Furnishes a catalogue of Esau's sons, with their various titles and localities. We shall not dwell on this, but pass on to one of the most fruitful and interesting sections in the entire canon of inspiration, viz.: —

 

Genesis 37-50

On which we shall dwell more particularly. There is not in scripture a more perfect and beautiful type of Christ than Joseph. Whether we view Christ as the object of the Father's love, the object of the envy of "His own" — in His humiliation, sufferings, death, exaltation, and glory — in all we have Him strikingly typified by Joseph.

In Gen. 37 we have Joseph's dreams, the statement of which draws out the enmity of his brethren. He was the object of his father's love, and the subject of very high destinies, and inasmuch as the hearts of his brothers were not in communion with these things, they hated him. They had no fellowship in the father's love. They would not yield to the thought of Joseph's exaltation. In all this they represent the Jews in Christ's day. "He came to His own and his own received him not." He had "no form nor comeliness in their eyes." They would neither own Him as the Son of God, nor king of Israel. Their eyes were not open to behold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 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They would not have Him; yea, they hated Him.

Now, in Joseph's case, we see that he, in no wise, relaxed his testimony in consequence of his brethren's refusal of his first dream. "And Joseph dreamed a dream, and he told it to his brethren; and they hated him yet the more" … "And he dreamed yet another dream, and told it to his brethren." This was simple testimony founded upon divine revelation; but it was testimony which brought Joseph down to the pit. Had he kept back his testimony, or taken off ought of its edge and power, he might have spared himself; but no; he told them the truth, and therefore they hated him.

Thus was it with Joseph's great Antitype. He bore witness to the truth — He witnessed a good confession — He kept back nothing — He could only speak the truth because He was the truth, and His testimony to the truth was answered, on man's part, by the cross, the vinegar, the soldier's spear. The testimony of Christ, too, was connected with the deepest, fullest, richest grace. He not only came as "the truth," but also as the perfect expression of all the love of the Father's heart: "grace and truth came by Jesus Christ." He was the full disclosure to man of what God was. Hence man was left entirely without excuse. He came and showed God to man, and man hated God with a perfect hatred. The fullest exhibition of divine love was answered by the fullest exhibition of human hatred. This is seen in the cross; and we have it touchingly foreshadowed at the pit into which Joseph was cast by his brethren.

"And when they saw him afar off, even before he came near to them, they conspired against him to slay him. And they said one to another, Behold, this dreamer comes; come now, therefore, and let us slay him, and cast him into some pit; and we will say, some evil beast has devoured him; and we shall see what will become of his dreams." These words forcibly remind us of the parable in Matthew 22. "But, last of all, he sent to them his son, saying, They will reverence my son. But when the husbandmen saw the son, they said among themselves,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let us seize on his inheritance. And they caught him, and cast him out of the vineyard, and slew him."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with this thought, "They will reverence my son;" but, alas! man's heart had no reverence for the "well beloved" of the Father. They cast him out. Earth and heaven were at issue in reference to Christ; and they are at issue still. Man crucified Him;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Man placed Him on a cross between two thieves; God set Him at His own right hand in the heavens. Man gave Him the very lowest place on earth; God gave Him the very highest place in heaven, in brightest majesty.

All this is shown out in Joseph's history. "Joseph is a fruitful bough, even a fruitful bough by a well, whose branches run over the wall. The archers have sorely grieved him, and shot at him, and hated him; but his bow abode in strength, and the arms of his hands were made strong by the hands of the mighty God of Jacob, (from thence is the shepherd, the stone of Israel;) even by the God of thy father, who shall help thee; and by the Almighty, who shall bless thee with blessings of heaven above, blessings of the deep that lies under, blessings of the breast and of the womb; the blessings of thy father have prevailed above the blessings of my progenitors, to the utmost bounds of the everlasting hills; they shall be on the head of Joseph, and on the crown of the head of him that was separate from his brethren." (Gen. 49:22-26)

These verses beautifully exhibit to our view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the glory that should follow." "The archers" have done their work; but God was stronger than they. The true Joseph has been shot at and grievously wounded in the house of his friends; but "the arms of his hands have been made strong" in the power of resurrection, and faith now knows Him as the basis of all God's purposes of blessing and glory in reference to the Church, Israel, and the whole creation. When we look at Joseph in the pit, and in the prison, and look at him afterwards as ruler over all the land of Egypt, we se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oughts of God and the thoughts of men; and so when we look at the cross, and at "the throne of the majesty in the heavens," we see the same thing.

Nothing ever brought out the real state of man's heart toward God but the coming of Christ. "If I had not come and spoken to them, they had not had sin." (John 15:22) It is not that they would not have been sinners. No; but "they had not had sin." So He says, in another place, "If ye were blind, ye should have no sin." (John 9:41) God came near to man in the Person of His Son, and man was able to say, "this is the heir;" but yet he said, "come, let us kill him." Hence, "they have no cloak for their sin." Those who say they see, have no excuse. Confessed blindness is not at all the difficulty, but professed sight. This is a truly solemn principle for a professing age like the present. The permanence of sin is connected with the mere profession to see. A man who is blind, and knows it, can have his eyes opened; but what can be done for one who thinks he sees, when he really does not?

 

Genesis 38.

Presents one of those remarkable circumstances in which divine grace is seen gloriously triumphing over man's sin. "It is evident that our Lord sprang out of Juda." (Heb. 7:14) But how? "Judas begat Phares and Zara of Thamar." (Matt. 1:3) This is peculiarly striking. God, in His great grace, rising above the sin and folly of man, in order to bring about His own purposes of love and mercy. Thus, a little further on, in Matthew, we rea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It is worthy of God thus to act. The Spirit of God is conducting us along the line through which, according to the flesh, Christ came; and, in doing so, he gives us, as links in the genealogical chain, Thamar and Bathsheba! How evident it is that there is nothing of man in this! How plain it is that when we reach the close of the first chapter of Matthew, it is "God manifest in the flesh" we find, and that, too, from the pen of the Holy Ghost! Man could never have devised such a genealogy. It is entirely divine, and no spiritual person can read it without seeing in it a blessed exhibition of divine grace, in the first place; and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Matthews gospel, in the second place, at least, of his account of Christ's genealogy according to the flesh. I believe a comparison of 2 Sam. 11 and Gen. 38 with Matt. 1 will furnish the thoughtful Christian with matter for a very sweet and edifying meditation.

In perusing these interesting sections of inspiration, we perceive a remarkable chain of providential actings, all tending to one grand point, namely, the exaltation of the man who had been in the pit; and, at the same time, bringing out, by the way, a number of subordinate objects. "The thoughts of many hearts" were to be "revealed;" but Joseph was to be exalted. "He called for a famine upon the land: he brake the whole staff of bread. He sent a man before them, even Joseph, who was sold for a servant; whose feet they hurt with fetters; he was laid in Iron; until the time that his word came; the word of the Lord tried him. The king sent and loosed him; even the ruler of the people, and let him go free. He made him lord of his house, and ruler of all his substance; to bind his princes at his pleasure, and teach his senators wisdom." (Psalm 105:16-22)

It is well to see that the leading object was to exalt the one whom men had rejected; and then to produce in those same men a sense of their sin in rejecting. And how admirably all this is effected! The most trivial and the most important, the most likely and the most unlikely, circumstances are made to minister to the development of God's purposes.

 

Genesis 39 and 40

In Genesis 39 Satan uses Potiphar's wife, and in Genesis 40 he uses Pharaoh's chief butler. The former he used to put Joseph into the dungeon; and the latter he used to keep him there, through his ungrateful negligence; but all in vain. God was behind the scenes. His finger was guiding all the springs of the vast machine of circumstances, and when the due time was come, He brought forth the man of His purpose, and set His feet in a large room. Now, this is ever God's prerogative. He is above all, and can use all for the accomplishment of His grand and unsearchable designs. It is sweet to be able thus to trace our Father's hand and counsel in everything. Sweet to know that all sorts of agents are at His sovereign disposal; angels, men, and devils — all are under His omnipotent hand, and all are made to carry out His purposes.

In the scripture now before us, all this is seen in a most remarkable manner. God visits the domestic circle of a heathen captain, the household of a heathen king, yea, and his bed-side, and makes the very visions of his head upon his bed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His counsels. Nor is it merely individuals and their circumstances that we see thus taken up and used for the furtherance of God's ends; but Egypt and all the surrounding countries are brought into the scene; in short, the whole earth was prepared by the hand of God to be a theatre on which to display the glory and greatness of the one "who was separate from his brethren." Such are God's ways; and it is one of the happiest and most elevating exercises for the soul of a saint to trace thus the admirable actings of his heavenly Father. How forcibly is God's providence brought out in this profoundly interesting history of Joseph! Look, for a moment, into the dungeon of the captain of the guard. See there a man "laid in iron," charged with a most abominable crime — the outcast and offscouring of society; and yet see him, almost in a moment, raised to the very highest eminence, and who can deny that God is in it all?

"And Pharaoh said to Joseph, Forasmuch as God has showed thee all this, there is none so discreet and wise as thou art: thou shalt be over my house, and according to thy word shall all my people be ruled: Only in the throne will I be greater than thou. And Pharaoh said to Joseph, See, I have set thee over all the land of Egypt. And Pharaoh took off his ring from his hand, and put it upon Joseph's hand, and arrayed him in vestures of fine linen, and put a gold chain about his neck. And he made him to ride in the second chariot that he had: and they cried before him, bow the knee: and he made him ruler over all the land of Egypt. And Pharaoh said to Joseph, I am Pharaoh, and without thee shall no man lift up his hand or foot in all the land of Egypt." (Gen. 41:39-44)

Here, then, was exaltation of no ordinary kind. Contrast this with the pit and the dungeon; and mark the chain of events by which it was all brought about, and you have, at once, a marked exhibition of the hand of God, and a striking type of the sufferings and glory of the Lord Jesus Christ. Joseph was taken from the pit and the dungeon, into which he had been brought by the envy of his brethren, and the false judgement of the Gentile, to be ruler over the whole land of Egypt; and not only so, but to be the channel of blessing, and the sustainer of life, to Israel and the whole earth. This is all typical of Christ; indeed, a type could hardly be more perfect. We see a man laid, to all intents and purposes, in the place of death, at the hand of man, and then raised up by the hand of God, and set in dignity and glory. "Ye men of Israel, hear these words: Jesus of Nazareth, a man approved of God among you by miracles, and wonders, and signs, which God did by him in the midst of you, as ye yourselves also know; him, being delivered by the determinate counsel and foreknowledge of God, ye have taken, and by wicked hands have crucified and slain; whom God has raised up, having loosed the pains of death, because it was not possible that he should be holden of it." (Acts 2:22-24)

But there are two points in Joseph's history which, together with what has been noticed, render the type remarkably perfect; I allude to his marriage with a stranger in Gen. 41, and his interview with his brethren in Gen. 45. The following is the order of events. Joseph presents himself to his brethren as one sent by the father; they reject him, and, so far as lies in them, put him in the place of death; God takes him up from thence, and raises him to a position of highest dignity: thus exalted, he gets a bride; and when his brethren, according to the flesh, are thoroughly broken and prostrate before him, he makes himself known to them, tranquillises their hearts, and brings them into blessing; he then becomes the channel of blessing to them and to the whole world.

I shall just make a few remarks on Joseph's marriage and the restoration of his brethren. The strange wife shadows forth the Church. Christ presented Himself to the Jews, and being rejected, took His seat on high, and sent down the Holy Ghost to form the Church, composed of Jew and Gentile, to be united with Him in heavenly glory. The doctrine of the Church has already been dwelt upon in our remarks on Gen. 24, but one or two points remain to be noticed here. And, first, we may observe, that Joseph's Egyptian bride was intimately associated with him in his glory. (Joseph's wife sets forth the Church as united to Christ in His glory; Moses' wife presents the Church as united to Christ in His rejection.) She, as being part of himself, shared in all that was his. Moreover, she occupied a place of nearness and intimacy, known only to herself. Thus it is with the Church, the bride of the Lamb. She is gathered to Christ to be the sharer, at once, of His rejection and His glory. It is Christ's position which gives character to the position of the Church, and her position should ever give character to her walk. If we are gathered to Christ, it is as exalted in glory, and not as humbled down here. "Henceforth know we no man after the flesh; yea, though we have known Christ after the flesh, yet now henceforth know we him no more." (2 Cor. 5:16) The Church's gathering point is Christ in glory. "I, if I be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to me." (John 12:32)

There is far more of practical value in the clear apprehension of this principle than might, at first sight, appear. It is ever the aim of Satan, as it is the tendency of our hearts, to lead us to stop short of God's mark in everything, and specially in the centre of our unity as Christians. It is a popular sentiment, that "the blood of the Lamb is the union of saints," i.e., it is the blood which forms their centre of unity. Now, that it is the infinitely precious blood of Christ which sets us individually as worshippers in the presence of God, is blessedly true. The blood, therefore, forms the divine basis of our fellowship with God. But when we come to speak of the centre of our unity as a church, we must see that the Holy Ghost gathers us to the Person of a risen and glorified Christ; and this grand truth gives character — high and holy character — to our association as Christians. If we take lower ground than this we must inevitably form a sect or an schism. If we gather round an ordinance, however important, or round a truth, however indisputable, we make something less than Christ our centre.

Hence, it is most important to ponder the practical consequences which flow out of the truth of our being gathered to a risen and glorified Head in the heavens. If Christ were on earth, we should be gathered to Him here; but, inasmuch as He is hidden in the heavens, the Church takes her character from His position there. Hence, Christ could say, "they are not of the world, even as I am not of the world;" and again, "For their sakes I sanctify myself, that they also might be sanctified through the truth." (John 17:16, 19) So also, in 1 Peter, we read, "To whom coming, as to a living stone, disallowed indeed of men, but chosen of God and precious; ye also, as lively stones, are built up a spiritual house, an Holy priesthood, to offer up spiritual sacrifices, acceptable to God by Jesus Christ." (1 Peter 2:4-5) If we are gathered to Christ we must be gathered to Him as He is, and where He is; and the more the Spirit of God leads our souls into the understanding of this, the more clearly we shall see the character of walk that becomes us. Joseph's bride was united to him, not in the pit or the dungeon, but in the dignity and glory of his position in Egypt; and, in her case, we can have no difficulty in perceiving the vast difference between the two positions.

But, further, we read, "And to Joseph were born two sons, before the years of famine came." There was a time of trouble coming; but previous thereto, the fruit of his union appeared. The children whom God had given him were called into existence previous to this time of trial. So will it be in reference to the Church. All the members thereof will be called out, the whole body will be completed and gathered to the Head in heaven, previous to "the great tribulation" which shall come upon all the earth.

We shall now turn, for a little, to Joseph's interview with his brethren, in which we shall find some points of resemblance to Israel's history in the latter day. During the period that Joseph was hidden from the view of his brethren, these latter were called to pass through deep and searching trial — through intensely painful exercises of conscience. One of these exercises is poured out in the following words: "And they said one to another, We are verily guilty concerning our brother, in that we saw the anguish of his soul, when he besought us, and we would not hear; therefore is this distress come upon us. And Reuben answered them, saying, Spake I not to you, saying, Do not sin against the child; and ye would not hear therefore, behold, also, his blood is required." (Gen. 42:21-22)

Again, in Gen. 44 we read, "And Judah said, What shall we say to my lord? What shall we speak? or how shall we clear ourselves? God has found out the iniquity of thy servants." None can teach like God. He alone can produce in the conscience the true sense of sin, and bring the soul down into the profound depths of its own condition in His presence. This is all His own work. Men run on in their career of guilt, heedless of everything, until the arrow of the Almighty pierces their conscience, and then they are led into those searchings of heart, and intense exercises of soul, which can only find relief in the rich resources of redeeming love. Joseph's brethren had no conception of all that was to flow to them from their actings toward him. "They took him and cast him into a pit … and they sat down to eat bread." "Woe to them … that drink wine in bowls, and anoint themselves with the chief ointments; but they are not grieved for the affliction of Joseph." (Amos 6:6)

However, God produced grief of heart, and exercises of conscience, and that in a most wonderful way. Years rolled on, and these brethren might have vainly imagined that all was right; but, then, "seven years of plenty, and seven years of scarcity!" What did they mean? Who sent them? And for what were they designed? Admirable providence! Unsearchable wisdom! The famine reaches to Canaan, and the calls of hunger actually bring the guilty brethren to the feet of the injured Joseph! How marked is the display of God's own hand in all this! There they stand, with the arrow of conviction thrust through and through their consciences, in the presence of the man whom they had, "with wicked hands," cast into the pit. Surely their sin had found them out; but it was in the presence of Joseph. Blessed place!

"Then Joseph could not refrain himself before all them that stood by him; and he cried, Cause every man to go out from me. And there stood no man with him, while Joseph made himself known to his brethren." (Gen. 45:1) No stranger was allowed to witness this sacred scene. What stranger could understand or appreciate it? We are here called to witness, as it were, divinely wrought conviction in the presence of divine grace; and we may say, when these two come together there is an easy settlement of every question.

"And Joseph said to his brethren, Come near to me, I pray you. And they came near. And he said, I am Joseph your brother, whom ye sold into Egypt. Now therefore be not grieved, nor angry with yourselves, that ye sold me hither; for God did send me before you, to preserve life … . And God sent me before you, to preserve you a posterity in the earth, and to save your lives by a great deliverance. So now it was not you sent me hither, but God." This is grace indeed, setting the convicted conscience perfectly at rest. The brethren had, already, most thoroughly, condemned themselves, and hence Joseph had only to pour in the blessed balm into their broken hearts. This is all sweetly typical of God's dealings with Israel, in the latter day, when "they shall look upon him whom they have pierced, and mourn." Then they shall prove the reality of divine grace, and the cleansing efficacy of that "fountain which shall be opened to the house of David, and to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for sin and for uncleanness." (Zech. 13:1).

In Acts 3, we find the Spirit of God in Peter seeking to produce this divine conviction in the consciences of the Jews. "The God of Abraham, and of Isaac, and of Jacob, the God of our fathers, has glorified his Son Jesus; whom ye delivered up, and denied him in the presence of Pilate, when he was determined to let him go. But ye denied the Holy One and the just, and desired a murderer to be granted to you; and killed the Prince of life, whom God has raised from the dead, whereof we are witnesses." These statements were designed to elicit from the hearts and lips of the hearers the confession made by Joseph's brethren — "we are verily guilty." Then follows the grace. "And now, brethren, I wot that through ignorance ye did it, as did also your rulers. But those things, which God before had showed by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that Christ should suffer, he has so fulfilled. Repent ye, therefore, and be converted, that your sins may be blotted out, when the times of refreshing shall com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We here see that, although the Jews really carried out the enmity of their hearts, in the death of Christ, as did also Joseph's brethren in their treatment of him, yet, the grace of God to each is seen in this, that all is shown to be decreed and foreshown of God for their blessing. This is perfect grace, surpassing all human thought; and all that is needed, in order to the enjoyment thereof, is a conscience truly convicted by the truth of God. Those who could say, "We are verily guilty," could rightly understand the words of precious grace, "It was not you, but God." Thus it must ever be. The soul that has thoroughly pronounced its own condemnation, is prepared to understand and appreciate God's pardon.

The remaining chapters of this book are taken up with the removal of Jacob and his family into Egypt, and their settlement there; Joseph's actings during the remaining years of famine; Jacob's blessing the twelve patriarchs; his death and burial. We shall not dwell in detail upon these things, though the spiritual mind may find much to feed upon therein.* Jacob's groundless fears dissipated by the sight of his son alive, and exalted — the peculiar grace of God seen in its overruling power, yet evidently mingled with judgement, inasmuch as Jacob's sons have to go down into the very place whither they had sent their brother. Again, Joseph's remarkable grace throughout: though exalted by Pharaoh, he hides himself, as it were, and binds the people in abiding obligation to the king. Pharaoh says, "Go to Joseph," and Joseph, in effect, says, "all you have and all you are belong to Pharaoh." This is sweetly interesting, and leads the soul on to that glorious time when the Son of man shall take the reins of government into His Own hand, by divine appointment, and rule over the whole redeemed creation, His Church — the bride of the Lamb — occupying the nearest and most intimate place, according to the eternal counsels. The house of Israel, fully restored, shall be nourished and sustained by His gracious hand; and all the earth shall know the deep blessedness of being under His sceptre. Finally, having brought everything into subjection, He shall hand back the reins of government into the hands of God, that "he may be all in all." From all this we may form some idea of the richness and copiousness of Joseph's history. In short, it sets before us, distinctly, in type, the mission of the Son to the house of Israel — His humiliation and rejection — the deep exercises and final repentance and restoration of Israel — the union of the Church with Christ — His exaltation and universal government, and, finally, it points us forward to the time when "God shall be all in all." It is quite needless to remark, that all these things are largely taught, and fully established, throughout the entire canon of inspiration: we do not, therefore, build their truth upon Joseph's history; still it is edifying to find such early foreshadowings of these precious truths: it proves to us the divine unity which pervades holy scripture. Whether we turn to Genesis or to Ephesians — to the prophets of the Old or those of the New Testament — we learn the same truths.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The close of Jacob's career stands in most pleasing contrast with all the previous scenes of his eventful history. It reminds one of a serene evening, after a tempestuous day: the sun, which during the day had been hidden from view by clouds, mists, and fogs, sets in majesty and brightness, gilding with his beams the western sky, and holding out the cheering prospect of a bright tomorrow. Thus is it with our aged patriarch. The supplanting, the bargain-making, the running, the management, the shifting, the shuffling the unbelieving selfish fears — all those dark clouds of nature and of earth seem to have passed away, and he comes forth, in all the calm elevation of faith, to bestow blessings, and impart dignities, in that holy skillfulness, which communion with God can alone impart.

Though nature's eyes are dim, faiths vision is sharp. He is not to be deceived as to the relative positions assigned to Ephraim and Manasseh, in the counsels of God. He has not, like his father Isaac, in Gen. 27, to "tremble very exceedingly," in view of an almost fatal mistake. Quite the reverse. His intelligent reply to his less instructed son is, "I know it, my son, I know it." The power of sense has not, as in Isaac's ease, dimmed his spiritual vision. He has been taught, in the school of experience, the importance of keeping close to the divine purpose, and nature's influence cannot move him from thence.

In Gen. 48:11, we have a very beautiful example of the mode in which our God ever rises above all our thoughts, and proves Himself better than all our fears. "And Israel said to Joseph, I had not thought to see thy face; and, lo, God has showed me also thy seed." To nature's view, Joseph was dead; whereas in God's view he was alive, and seated in the highest place of authority, next the throne. "Eye has not seen, nor ear heard, neither has it entered into the heart of man, the things which God has prepared for them that love him." (1 Cor. 2:9) Would that our souls could rise higher in their apprehension of God and His ways.

It is interesting to notice the way in which the titles "Jacob" and "Israel" are introduced in the close of the Book of Genesis; as, for example, "One told Jacob, and said, Behold thy son Joseph comes to thee: and Israel strengthened himself, and sat upon the bed" Then, it is immediately added, "And Jacob said to Joseph, God Almighty appeared to me at Luz." Now, we know, there is nothing in scripture without its specific meaning, and hence this interchange of names contains some instruction. In general, it may be remarked, that "Jacob" sets forth the depth to which God had descended; "Israel," the height to which Jacob was raised.}

 

출처 : https://www.stempublishing.com/authors/mackintosh/Pent/GENESIS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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