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1)
M.R 디한
서론(1)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사도시대 이후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갈보리에서 마감된 율법시대가 은혜시대로 전환된 것은 아무 사건없이 갑작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갈등의 결과였다.
계명과 규례의 율법하에서 성장한 유대인 신자가 오순절 전에는 완전히 계시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은혜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아무런 의문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태복음 10장과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전파한 `천국복음'과 바울이 전파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조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계시받았다(갈 1:1, 2:1-9).
그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메시지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메시지였다.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백성인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취급했다. 그런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대인으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구원을 전파할 때 그러한 율법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바울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할례의식과 율법으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유대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그의 메시지를 불신케 하고, 그 대신에 사람은 의식과 율법주의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그들은 주장했다(행 15:1).
이렇듯 논쟁이 치열해지자 사도행전 15장에 나온 대로 예루살렘회의가 소집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이방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모세의 율법하에 놓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되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5:7-11에서 그 사실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행 15:5)은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이방인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언급된 바와 같이 분명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하여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고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와같은 명령을 하지 않았노라."(행 15:24)(흠정역 참조)
이 결정은 사도행전 15:11에 나오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전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모든 사람,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자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복음을 공격했다. 즉 신자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일단 해결되었으나, 이제 그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나 율법과 할례로 보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제 할례를 구원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제안하는 대신에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궁극적인 구원에 필요한 믿음의 부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복음전도를 통해 회심한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으로 시작'했음을 시인하지만, 이제 율법의 행위와 심지어 할례를 받음으로 끝까지 인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갈 3:3-5).
바울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한 후에 이 율법주의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끌어들인 것이 바로 그러한 가르침이었다. 그러한 가르침은 끝없는 혼란을 야기시켰는데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다. 바울 당시에는 율법과 은혜에 관해 다음 세가지 오류가 있었는데, 이러한 오류들은 진리가 성경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가르쳐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1. 율법주의. 이것은 의식과 규례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영혼을 해하는 그릇된 가르침에 답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에서 한 권 전체가 할애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서이다. 그 내용이 3:28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 반율법주의. 이것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어떻게 살고 행동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단적인 과오에 답하기 위해서 신약성경 중 한 권이 할애되었는데 그것이 야고보서이다. 그 내용이 2:17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3. 갈라디아주의. 이것은 구원은 은혜로 얻지만, 그 다음에는 율법에 의해 보존되며,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도 하나님이 은혜가 아닌, 우리의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그릇된 교리이다. 이러한 오류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성령께서 바울을 택하사 갈라디아서를 쓰게 하셨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고, 보존되고, 궁극적인 구속을 받는다는 더할 수 없이 강력한 논증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는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육체로 완전해지려 하는 것이었다(갈 3:3). 신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가르침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증거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인데, 그것은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저주가 선포된 사실과(갈 1:7, 9) 그들의 거짓된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력화시키고(좌절시키고), 또 하나님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헛되이 희생시키신 분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그 두려운 고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이미 믿은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은혜와 율법이 뒤섞인 복음이 증거되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아니 훨씬 더 절실히 요청된다. 이 갈라디아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율법과 행위의 위치를 그릇되게 가르치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 가운데 가장 간교한 가르침이다. 모쪼록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펴낸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죄인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우리는 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적절히 요약할 수 있다.
구원이란 율법과 은혜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이냐 은혜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그 두가지 모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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