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14장. 우리들의 분깃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수13:1)
성경을 허투루 읽는 사람은 12장과 13장을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이다. 주의해서 말씀을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이다. 주의해서 말씀을 보지 않으면 본장은 가나안 지역의 지명들을 적은 목록에 불과하다. 그나마 발음도 하기 어려운 이름들이 많고 그 뜻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면 큰 손실을 본다. 성경의 보화는 얼른 쉽게 주워보도록 표면에 깔려 있지 않다.
12장은 지금까지 가나안에서 있었던 정복의 범위를 요약한 것으로서, 처음 6절까지는 모세의 지도 하에서 그리고 7~24절까지는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정복을 다루고 있다.
모세 하에서의 정복은 물론 요단강의 동편인 광야의 전투를 말하고, 여호수아의 정복은 가나안 땅 자체에서의 전투를 담은 것이다. 모세 하에서 얻었던 영토 중에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상속으로 넘어간 땅들이 있었다. 이것은 이 지파들의 청원에 따른 것이었다. 12장에서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정복한 가나안 땅의 형편을 묘사하고 있다. 즉, 점령지에서 살았던 세력있던 31명의 왕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가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정복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헤아려보는 일이 유익할 때가 많다. 자만심에서가 아니고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를 가져왔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로마서 5:20의 말씀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어떤 이들에게는 인생의 투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싸워야 할 삶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싸우고 있건 혹은 앞으로 싸우건 인생의 여행이 끝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시기를 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12장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구절은 6절이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기업으로 주었더라." 모세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꾸면 11:23절의 말씀과 거의 같은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요단강 저편에서 모세가 정착시킨 두 지파와 반 지파는 이스라엘의 민족생활에 거의 참예하지 않다가 결국 얼마 못가서 그들의 유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복했다고 믿었던 국가들에게 오히려 흡수된 듯하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광야편인 동편을 선택하였었다.
본인은 당신의 가슴 속에 깊이 심어지도록 한 가지 교훈을 주고 싶다. 즉,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가 우리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종국적으로 그 사람의 손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의 결단이나 노력의 힘으로 우리들이 힘쓰는 모든 일에 마침내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깊은 영적 생활의 축복은 우리 자신의 목적에 얽힌 자력의 힘에서 나오지 않는다. 영적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만 받을 수 있다. 우리들의 상속은 예수님께 모두 귀속되어 있으므로 믿음으로 모든 축복을 주님께 구하여 받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오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엡1:3)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의나 목표로 가나안 땅을 얻을 생각을 말고 주님 안에서 그가 이미 정복하신 땅을 나의 소유로 청해 받도록 해야 한다.
이제 13:1을 잠시 공부해 보자. "여호수아가 나이 많이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여호수아는 이때 약 90세였는데 아직도 취해야 할 땅과 정벌해야 할 영토가 많이 남아 있었다.
처음 6절까지는 남은 땅의 경계를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성취에 도취되어 쉴 수가 없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호수아서의 첫장이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모든 땅을 주셨다. 그러나 실제 그 땅을 한 치도 남기지 않고 다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이 땅을 소유하는 방법은 다음 장들에서 계속 나오지만 첫째 탐사, 둘째 분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지파들이 할당 받은 땅을 취하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다시 이 원칙을 공부할 것이므로 잘 이해하기 바란다.
성령이 선택을 받은 백성들에게 유산으로 책정한 지역의 범위를 살펴보자. 이 지역은 북쪽의 팔레스틴에서 남쪽의 비옥한 초원지대에까지 미쳤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과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한 땅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은 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달성한 적이 없었다.
그럼 이 역사가 주는 교훈을 우리들이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늘의 유산은 우리들이 즐겨 누리도록 하나님이 벌써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에게 주는 의미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같다. 우리들이 모두 취해야 할 땅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지도처럼 다 나와 있다. 여기에는 하늘의 비젼이 있는 산들, 첫눈에는 절망의 계곡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축복을 안고 있는 희망의 계곡들, 휴식과 평온의 초장들, 정복해야 할 성읍들, 쳐부숴야 할 적들이 다 나타나 있다.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아직도 취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 우리들의 유산은 그리스도의 일부가 아니고 전부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두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청구하는 분량에 비례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마땅히 청구해야 할 만큼 우리들의 유산을 더 청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뜻보다 적게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아무리 받아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소진할 정도의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다. 우리 중에는 싸워야할 투쟁에서 전승한 사람이 없다. 우리들이 지나간 생애를 돌이켜 보면 한결같이 패배의 상처가 있음을 자인하게 된다. 우리들은 싸워야 할 싸움을 마땅히 싸워 이기지 못한 경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을 피하고 쉬운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로 낙심할 것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저를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라는 고백의 기도가 나온다. 자신을 다시 일으켜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며 주님이 옆에서 인도하심을 실감하면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생활은 패배의 경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소득이다. 주님은 우리들을 결코 떠나시거나 포기하시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취해야 할 땅이 과연 많이 남아 있다.
잠시 당신과 나의 삶에서 더 취해야 할 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우선 어떻게 이들을 차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 다음 왜 소유할 수 없었는지를 고찰해 보자.
나는 첫째 지식의 영역에서 우리들이 차지해야 할 땅이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지적인 지식과는 다르다. 정신적인 단련, 기억, 관찰등은 지성을 개발시키지만 신앙적 지식과는 판이하다. 어떤 이는 지적인 능력이 거의 없더라도 지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깊은 영적 진리를 판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교육적인 배경이 옅은 소년 소녀들에게서 많이 배웠다. 이들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실감하고 그를 통해서 모든 지성을 넘어선 지혜로 말하며 내게 큰 감동을 주었었다. 한편 지적이고 명철한 두뇌를 가졌지만 참 지식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에 완벽한 바보가 될 뿐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들이 참되신 유일한 하나님을 알도록 영생을 주신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갈보리로 와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러 오라고 간청하신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다.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 마음을 이해 할 수 없다. 우리들은 정말 주님을 알고 있는가?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우리도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빌3:8,10).
친애하는 친구여, 그리스도의 지식에 관해서 우리들이 취해야 할 땅이 얼마나 많은가! 어째서 우리들은 이렇게도 무지한가? 우리들은 성경을 너무도 모른다. 성경에서 아직 차지하지 못한 페이지가 얼마나 많으며 탐색하지 못한 영토가 얼마나 큰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한번도 주의해서 보거나 표시하지 않은 절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은 단순한 진리의 에이.비.씨에서 살고 있다. 요한복음 3장을 위시하여 몇 군데 유명하고 위대한 장들만이 당신이 알아야 할 말씀의 전부가 아니다. 물론 그런 구절들은 더 말할 나위없이 훌륭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적 목표가 담긴 넓은 대륙은 이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양식을 받으며 즐거워하는 각성된 마음을 위해 계시되어 있다. 그런데도 아직 소유하지 못한 땅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주님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성경에서 아직 답습하지 못한 땅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을 받으라.
또 영적 경험의 경지에서도 취해야 할 땅이 많다. 우리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는 여러 왕들과, 요새, 악습 등이 싶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도저히 정복할 수 없을 것처럼 강력하게 보인다. 기도와 성경공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한 탄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제거할 수 없을 겉같이 느껴진다. 우리들은 속에 있는 악한 자의 내침으로 마음이 평강을 자주 잃는다. 경고도 없이 달려드는 이 속에 있는 적 때문에 우리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매몰스런 말을 한다. 계속하여 이 내적 원수는 여러 해에 걸친 교인생활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선교사의 생활이나 혹은 교회 지도자나 성경 교사의 경력에도 아랑곳 없이 우리들을 넘어뜨린다. 아무리 이 원수의 요새를 격파하려 해도 도무지 뜻을 이룰 수 없다.
당신도 이런 형편에 처해 있는가? 이 여호수아서를 공부하면서 당신은 무엇인가 느끼고 배우고 있는가? 나는 날마다 말씀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나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이 메시지가 비춰 주기 때문이다. 누가 네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투쟁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에 그대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 승리를 어떻게 나의 것으로 주장하는지를 배우는 데 있다. 우리들은 얼마나 이 죄와 원수들로 인해 시달림을 받고 기를 펴지 못하며 궁색한 교인생활을 해 왔는지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의 개인 신앙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사업을 하면서 주 예수님께 자기 사업을 넘기지 않고 주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사업과 신앙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세상의 단체나 세속적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주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이상이 어떤 것인지를 숙고해 보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잠시 주님의 능력, 인자, 거룩, 죄에 대한 혐오, 당신과 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뜻을 좇는 헌신, 자기 희생의 생애를 생각해 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이다. 이 이상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소유해야 할 유산이다. 만일 주님의 생활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거듭되지 않으면 우리들의 기독교는 힘이 없고 무익하며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전 목표와 우리 교리의 실체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들이 취해야 할 땅은 많이 있다. 이 사실은 우리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소유를 취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물론 방법이 있다. 성의있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생각해 보자.
우선 우리들이 주님을 충만히 소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주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라고 말하였다. (나는 바울이 솔직하게 말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바울의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죄 없는 완전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우리는 먼저 주님을 받기 위해 마음을 열고 그 다음 산 믿음으로 주님을 가기의 전부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에는 3가지 커다란 어휘가 있다. 즉, "복종" "헌신" "전유(專有)" 이다. 복종에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승복하지 않으면 개심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 헌신에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과 재능, 그외 모든 것을 바치는 봉헌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성령으로 보내시는 생명의 산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령한 순서이다. 우리들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소유해야만 주 예수님을 충만히 소유할 수 있다. 주님이 먼저 우리의 의지를 정복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그의 것이 되어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
우리들은 철저하게 자아를 예수님께 던지기 전에는 우리 생활에서 승리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들은 주 예수님이 우리를 보다 높은 경지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들의 소유를 취하려고 하는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소유를 취하고 승리하려면 성부, 성자, 성령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을 남김없이 무조건 삼위의 하나님께 복종시켜 완전히 자아가 넘어가게해야 한다.
어째서 우리들은 여호수아처럼 세월에 늙고 지쳐 있으면서 아직도 취해야 할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나 개인의 상상일지 모르나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하늘에서 주님과 개인면담을 할 날을 나는 그려본다. 주님을 볼 그 날은 얼마나 보된 날일까! 투쟁과 갈등이 끝나는 날,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 주님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정한 삶의 모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우리들이 어디에서 미끌어졌으며 믿음과 순종이 부족하여 최상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또한 비춰준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이 실수하고 넘어졌던 바로 그 곳에 주님이 자기의 피로 덮으시고 손수 우리들의 탈선을 자기의 손으로 붙잡아 주셨던 풍성한 자비를 보게 된다고 상상해 보라. 이 날에 당신과 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놓아주신 영원한 삶의 청사진 앞에서 주님의 은혜로 우리들의 실제 삶이 결국 그 계획과 적어도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들은 왜 영적으로 궁색하게 살아야 하는가? 왜 넘어지고 실패해야 하는가? 이 삶이 끝나고 이 짧은 경험을 마쳐 늙어지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다 기록되어 투쟁이 종결될 때 어째서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차지하도록 된 것들을 넉넉히 소유하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하겠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본장의 6절에 있다고 믿는다. 땅의 소유는 분배에 의해서 기업이 되었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 분배라는 어휘는 여러 번 나온다. 하나님은 분배에 의하여 각 지파에게 영토를 할당해 주셨다. 어떤 땅을 받았건 고난의 산이나 가슴 아픈 경험이나 뼈아픈 시련이 다같이 박혀있는 그 땅은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 이미 우리들에게 영원한 최상의 유산으로 주신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이 진리를 수락하면 그리스도를 새로운 방법으로 소유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 삶을 위해 배정해서 주신 몫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결코 받은 땅을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 대신 선택해 주도록 하였다. 그의 조카인 롯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사람은 믿음으로 또 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았다. 전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응락하였고 후자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존하였다. 이 두 사람들의 결과는 판연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몫을 하나님께 맡겼으므로 축복을 충만히 받았고 롯은 재난을 당하였다.
사랑하는 교우여,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기업을 정하도록 하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삶을 계획하며 살고 있는가? 당신은 자신의 재능을 믿는가? 아니면 아래의 찬송가처럼 주님의 길을 따르는가?
오 주님, 아무리 어두워도
내 길이 아닌 당신의 길을 원합니다.
당신의 손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갈 길 정해 주십시오.
평탄하든 험하든 그 길이 최상의 길입니다.
굽거나 곧거나 그 길만이
당신의 안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삶의 몫을 정해 주시고 그 길로
바르게 걷게 해 주십시오.
주님, 내 잔을 잡으시고
기쁨이든 슬픔이든 채워 주십시오.
당신의 선하신 대로.
나의 행복과 불행을 작정해 주십시오.
친구여 질병이여 건강이여
나를 위해 하나님을 택해 주오.
궁핍이여 부귀여
나를 위해 하나님을 택해 주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내 뜻이 아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안내자 나의 힘 나의 지혜
나의 모든 것이 되소서.
당신이 만일 당신의 소유를 취하려면 이것이 그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