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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22)

by 복음과삶 2005. 7. 3.

 

갈라디아서 강해(22)

 

M.R 디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죄
The Sin of Judging Others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앞 장(갈 5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이미 언급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증명하였다. 율법주의자와 참된 신자 간의 다른 점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의 차이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저울질하여, 이에 미치지 못하는 그의 약점들을 드러내어, 그를 비판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는 은혜롭고 관용하며, 자비롭고 오래 참아 주며, 친절하고 용서한다.

 

우리가 받은 편지들 중에 가장 신랄하고 악의에 찬 것들은 ‘우리가 오직 은혜로써 구원받고,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은혜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온 것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예배 방법이나, 자신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나, 안식일이나 주일과 같이 특정한 날을 지키는 관습으로 기준삼아 이웃을 판단한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한 평가 기준을 소위 안식일이나 주일이라고 일컬어지는 날을 어떻게 보내는지의 여부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내는데 있어 가장 옳지 못한 태도는 ‘율법주의적이며 비판적인 자기들의 입장과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임을 그들은 잊고 있다.

사랑이고 비판하는 것이 아님

이러한 악한 태도에 대해서 바울은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5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끝맺는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 5:26)

신자에 대한 바울의 목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고, 이것은 절대적으로 죄 없는 완전을 가리켰지만, 바울은 그러한 완전 성화가 믿음의 길을 다 마치기까지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옛 사람의 근절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고, 다만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옛 사람에 대한 새 사람의 승리 생활에 대해 교훈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바울 사도는 옛 성품의 교활함과 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빌 3:3).

죄인이 회심하게 될 때에도 옛 성품, 곧 죄악된 성품에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의 옛 성품은 도저히 개선될 가망이 없고, 완전히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개선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 곧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옛 사람과 나란히(alongside) 신자 속에 넣어주신다. 이처럼 ‘중생, 곧 거듭나는 것(new birth)’은 이미 있던 존재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즉 육신으로 난 것은 그대로 육으로 남아 있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으로 남는다. 여기에서 양자 간의 다툼이 일어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승리의 생활을 위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 자신 밖에 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완전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의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가고, 은혜 안에서 자라가며, 성령 안에서 행하고, 우리의 육신의 지체들을 굴복시키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상을 얻기 위해 푯대를 향해 나아가라” 는 이 모든 훈계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신자의 ‘신앙 상태와 행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과 위치’와 같이 완전한 것이라면,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또는 “성령 안에서 행하라” 는 권고가 필요없을 것이다. 만일 신자의 신앙생활 상태가 완전한 것이라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물어뜯고 삼키려는 식인 행위에 대한 경고(갈 5:15)가 왜 나와 있겠는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당할까 조심하라”(갈 5:15)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물고 먹다니! 도대체 이 무슨 말인가!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불친절한 행위를 고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조차 없고,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추악하고 가련하고, 악독하고, 더러운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른 동료 신자들에 대해서 좀더 친절하고 관용적이며 동정적이고 용서하고 다정하고 인내할 것이 분명하다.

 

보다 더 연약한 형제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종종 우리가 건짐받아 나온 그 수렁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의 과거 상태와 그때 직면하게 될 뻔했던 그 위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초두에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이 구절에서 주의할 것은 바울이 ‘형제들’, 즉 신자들에게 타락한 형제를 다루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제들은 그러한 형제를 심판하거나 비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되고, 그 형제가 회복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 실패한 형제는 비난보다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죄에 빠진 형제가 있다면, 우리는 재판 자리에 앉아서 그를 심판하고 정죄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처럼 죄에 빠지게 되었던 환경을 모두 다 알지는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상황을 다 알았다면, 우리는 훨씬 더 은혜롭고 인내하면서 그를 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형제는 ‘범죄하게 된’(overtaken) 자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은 ‘범죄한(overtaking a sin)’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고의로 죄를 범하려고 염탐하러 다닌다. 그러나 성경에 언급된 것은 이 경우가 아니다. 성경에 언급된 그 형제는 ‘범죄하게 된’(죄에 압도당한) 자이다. 즉 그가 죄악을 피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이 연약하고 기도하지 못했으며, 승리를 위해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케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었고, 일시적으로 연약했기 때문에 죄와 싸워서 ‘진’ 것이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사람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형제와 똑같은 환경에 처했더라면, 우리는 죄에 더 깊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치른 죄악과의 투쟁을 -그가 많은 투쟁을 치렀지만, 죄악에 져서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 알지 못한다. 그는 아직 말씀 안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어리고 연약한 그리스도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도와주도록 하자. 만일 우리가 그의 사정을 하나님이 아신 것같이 알 수가 있다면,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진 그 성도에 대하여 보다 더 친절하고 관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고린도전서 4:5은 우리에게 헛되이 권고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가 오셔서 판단(심판)하시도록 하자. 왜 그래야 할까?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각 사람의 마음의 비밀을 아시고, 가장 패배적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 마음의 동기와 노력 등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들을 감안하시며, 승리의 생활을 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쉽게 만드는 환경과 모든 조건들도 고려하신다. 우리는 올무에 걸려 넘어지거나 타락하고 있는 신자를 정죄하거나, 심지어 그의 구원을 의심하기조차 하지만, 그가 겪고 있는 무시무시한 신앙적 투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올무에 걸려 넘어진 신자는 자기가 겪어야 하는 것들을 겪을 필요가 없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어려운 신앙적 투쟁을 참아내고 있을 수도 있다.

승리의 생활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 쉽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승리의 생활을 하기가 더 쉽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고려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침착하고 무난한 성품을 타고났다면, 성격이 불 같고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보다 더 평탄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성격은 다양하다. 베드로 같은 사람들도 있고, 요한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들을 극복해야만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옛 성질은 그가 회심한 후에도 얼마동안 지속되었음에 틀림없다.

교회 사무실이나 기독교 단체의 사무실 같은 항상 기도하는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칠고, 속되며, 음담패설을 하는 분위기와 불경스럽고 악담을 거침없이 퍼부어대는 상관 밑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신앙생활 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실 것이다. 그리고 경건하고, 헌신적이며, 상냥한 아내와 생활하는 그리스도인 남자는 매일 들볶아대고 잔소리하며, 우는 소리하고 트집만 잡으려고 하는 세상적인 아내와 한 지붕밑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남자보다 신앙생활 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형제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시기보다는 우리가 당하지 않을 수 없는 시험들과 특별한 약점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보장하고 계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신령한 너희는 그러한 사람을 회복시켜 주라!” 따라서 어떤 사람이 신령하다는 증거는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오래참고, 친절하며, 관용하며, 그리고 기꺼이 용서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신령한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하는 자들이 매우 경건한 척하려고 긴 얼굴을 하고, 오래토록 기도하면서도, 어떤 연약하고 죄에 빠진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고, 정죄하며, 검열관 같은 고자세와 너보다는 거룩하다는 자세를 취함으로 그들의 신령함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경우를 보아왔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한 젊은 부부가 죄에 빠졌었는데, 그들은 의견을 모아 교회의 집사와 장로들 앞에 나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였다.

그런데 소위 경건하다는 한 노인 집사가 그들의 자백이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몇 달 동안 그들을 시련(probation: 보호감찰)에 처하게 하자고 제안함으로써, 그들을 낙심케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회복시키라)” 라는 바울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연약한 그리스도인일수록 더욱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주님께 끌고와서 정죄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여인이 그러한 죄를 범하게 된 사정을(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더 이상 죄를 범치말라”(요 8:11)

그런데 위에 언급한 그 집사는 ‘어쩌다 범죄하게 되었던’ 그 젊은 부부를 시련에 처하게 한 지 얼마 있지 않아서, 그 집사 자신이 부끄러운 죄악을 열심히 좇아가고 있었음이(어쩌다 범죄하게 된 것이 아니고)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이 구절의 뒷부분에 연결되는 다음과 같은 말은 얼마나 적절한가!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로마서 14: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우리는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배척하거나 그들에게 시련을 주어서는 않되고, 그들을 받아주어야 한다. 믿음이 약한 자일수록 더욱더 우리의 도움과 교제를 필요로 한다. 로마서 15:1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고, 또한 자신을 정죄하는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1:28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오래토록 장황하게 설명해온 이 훈계는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물고 먹는’ 것과 믿음이 약한 형제에 대해 정죄하는 태도와,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형제에 대해서 적대시하는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이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적이고 육신에 속해 있다는 증거이다. 편협함과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으려 하는 것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갈보리 십자가에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것이다!

 

보라, 흠도 없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사, 그의 등은 찢겨져 피를 흘리시며,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그 몸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으시며, 그의 손과 발은 못에 박힌 채, 어찌할 도리 없고, 소망도 없는, 곧 마땅히 지옥에 가기에 합당하고, 또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그곳에 서서, 주께서 거기에 달리신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라.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할 아무런 권한도 없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다만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 은혜, 은혜 - 받을 자격도 없고 아무 공로도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총이었다. 주께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이처럼 주께서 버린바 되심으로써 죄책과 부끄러움을 지니고 있는 당신을 온전히 용납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깊이 생각해보라. 그런데도 당신은 교만하고 편협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용서치 않을 수 있는가?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그처럼 율법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필자가 원한이나 악의가 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라디오 성경 강해를 해오는 동안, 가장 비판적이고, 공격적이며 저주를 퍼부은 사람들(즉 가장 심하게 나를 괴롭힌 사람들)은, 우리가 은혜를 전파하는 것을 반대하는 율법의 옹호자들이었다. 우리가 받은 모욕적이고 정죄적인 편지들 중 절대 다수가 율법주의적인 개종자들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다시금 율법과 계명 아래로 끌어가려는 자들이며, 골로새 교회 당시처럼 우리를 율법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굳게 서고”, 베드로후서 3장 17절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아멘”(벧후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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