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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23)

by 복음과삶 2005. 7. 3.

 

갈라디아서 강해(23)

 

M.R 디한


 

 

그리스도와 타인을 위한 삶

Living for Christ and For Others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2,5)


갈라디아서 6:1은 믿음이 연약하거나 실패한 신자들을 앉아서 판단함으로써, 신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율법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또한 이 구절은 죄에 빠진 자들에 대해 동정하고, 관용하며, 도와주라는 호소의 말씀이기도 하다. 죄인은 죄를 추구하지만, 신자는 죄를 피한다. 그러나 신자는 죄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죄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일수록 동정하는 마음과 도움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내하며 친절히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정죄하거나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1절에서 우리는 정죄하며 비난하는 정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경고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정신에 정반대되는 것이 2절에 나와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이와같이 우리는 믿음이 약하고 짐진 자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들의 짐을 져야”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자세야말로 율법주의의 증거이다. 이와는 반대로, 용서하고 오래 참아 주는 것이야말로 은혜의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야 한다. 그러나 5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모순된 것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5)


이 말씀은 2절과 모순된 것인가? 우리가 2절에 나오는 ‘짐’이란 단어가 5절에 나오는 ‘짐’이란 단어와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2절)는 말씀에 나오는 ‘짐’이란 단어의 원어는 바로스(βαροs)로서, 그 의미는 사전에 ‘무거운 짐과 부담’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5절에 나오는 ‘짐’ 이란 단어의 원어는 포르티온(φορτιου)으로서, 필자가 가지고 있는 사전에는 그 의미가 ‘해야 할 임무나 봉사’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도와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야 할 그 ‘짐’의 의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1절에 비추어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약하여 범죄하게 된 그 형제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는 권고를 받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정죄하거나 낙심케 하지 말고,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그러한 과실(범죄)을 극복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들을 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롬 15:1). 이것은 믿음이 어린 신자들을 교훈하고, 걸려 넘어진 성도들을 격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상(喪)당한 자들이나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병든 자와 외로운 사람들을 심방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자들을 도와주며, 방황하는 자들을 상담하고 조언해 주며, 새로이 회심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이끌어주는 것을 포함한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와 격려와 물질적인 구제와 유익한 조언으로써 도울 수 있는 무거운 짐진 자들은 수없이 많다. 우리는 병들고, 나이 많아 늙고, 가난으로 인해 잊혀진 영혼들의 짐을 얼마든지 맞들어 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는 말씀의 의미인 줄로 우리는 믿는다. 이와 같이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법적인 의무가 아니라, 율법에 요구된 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와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새로운 자유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자신의 짐

 

이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어 질 수 있는 짐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누어 질 수 없는 짐, 즉 개인적인 성격의 짐이 있다. 이에 관한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5)


원래 이 구절은 가르(Υαρ: 왜냐하면)라는 원어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상하 문맥을 참조해야 함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2절에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도와주어야 하며, 일부러라도 찾아가 도와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은 너무나 중요한 존재라서, 믿음이 연약하거나 가난한 형제·자매나 궁핍한 이웃과 관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는 그 마음 속에 은혜와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은혜로 충만한 사람의 삶 속에는 자신을 높이는 태도나 교만한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필자는 목회생활 초기에 회중 가운데는 소위 ‘상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런데 목회하는 중에 한 노부부께서 회심하여 예수를 믿고,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우 가난했고, 줄곧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병원비를 감당할 길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 낡아빠진 자동차와 깨끗하긴 했지만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다. 몇몇 거만한 사람들은 그 가난한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다소 싫어하는 표정이었고, 때로는 공공연히 자기들의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가 이 가난한 가족을 변호하고, 그들의 사정을 설명하려고 하자, 한 가족이 곧장 일어서서 나가버렸고, 금방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서로 도와 짐을 나누어질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가정의 가난을 구제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새 옷과 차를 사줄 수도 있었다.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그 비용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짐 지기를 거절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요한일서 3:16,17의 충고가 필요하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나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이러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금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그 다음 구절(갈 6:4)은 ‘그러나’(한글개역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음)로 시작된다. 이 구절에는 2절에 나오는 ‘짐’과 5절에 나오는 ‘짐’이 다음과 같이 대조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4,5)


바울은 여기서 일(Work)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나 업무를 말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가리킨다. 여기에 사용된 ‘짐’이란 단어는 마태복음 11장 30절에 사용된 단어와 같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봉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초청은 죄인들을 향한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와서 생명의 선물을 거저 받으라고 하시는 초청이다. 그러나 다음 절에 나오는 초청은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고 성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자기에게 와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이제는 봉사하기 위해서 자기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초청이다. 이것은 ‘수고와 봉사와 일의 상징인 멍에’ 와 관련되어 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여기에 나오는 ‘짐’은 ‘봉사와 순종과 복종의 멍에’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갈라디아서 6:5에 나오는 ‘짐’은 마태복음 11:30에 나오는 ‘짐’과 똑같은 의미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제자의 삶과 봉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줄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이 개인적으로 책임지고 완수해야 할 봉사의 짐이다. 즉 우리들 각자는 우리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일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재능과 은사와 기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아무도 그 짐을 대신 져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5절) 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앞 절(4절)이 가리키고 있는 바와 같이 일(Work)과 관계가 있다.

 

“각각 자기의 일을 (개인적으로)살피라”(5절 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것을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신의 책임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이렇듯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개인적인 일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심고 거둠

 

갈라디아서 6장 6절에는, 개인적인 책임에 대한 예가 나와 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고, 신령한 일로써 섬기는 자들은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너그러이 베풀어 주는 세상적인 배려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짐을 진 일과 봉사한 일에 대해 회계하게 될 것’ 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뒤따르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우리의 모든 행위가 평가받는 때가 오고 있으며, 그 날에 우리는 우리의 충성 여부에 근거하여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동기와 재능과 기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했던 불리한 상황이나 곤란한 사정,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었던 특별한 짐 등을 고려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씀은 확실하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 6:9,10)


이제 우리는 이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바울은 이 서신을 필사자에게 받아쓰게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썼다는 사실에 수신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대부분 바울의 서신들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바울이 시력이 약하여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들의 형편은 매우 급박해서 대필해 줄 사람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편지를 친히 큰 글씨로 써 보냈던 것이다. 영어 성경(KJV)에서 “내 손으로 너희에게 쓴 편지가 얼마나 큰 지를 보라”는 표현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매우 큰 글씨로 쓴 것을 보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서신을 끝맺기 전에, 바울은 거짓된 율법 선생에게 속고 있는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의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를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13)


이 서신은 바울이 이 은혜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확증함으로써 끝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갈보리 산에 서있으니, 다시는 시내 산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으니,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그의 증언을 들어보라.


세 가지 ‘십자가에 못박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세 가지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말함으로써 지금까지 말해 온 모든 내용을 결론짓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 근거

2. 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힘 - 결과

3.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 - 승리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기초 위에 근거한 우리의 위치(신분)는 ‘이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에 의해 보장되어 있고, 또한 승리하는 삶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경험하게 된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1. 율법에 대하여

2. 이 세상에 대하여

3. 자신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인 신자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로서,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갈라디아서를 마치고 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갈 6:16-18)


이처럼, 갈라디아서는 은혜로 시작된 것같이(갈 1:3) 은혜로 마치고 있다(갈 6:18).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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